여기와 지금, 옛날 얘기, 판박이 콜랴, 부츠를 신고 밖으로 + about writing2023. 3. 11. 21:38
새 글을 구상하고 있는데 운이 좋으면 오늘 밤부터 쓰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간밤에 전반적인 내용과 얼개는 모두 짰는데 심신에 기운이 돌지 않아 문제임. 항상 시작이 가장 어렵다.
아래 발췌한 세 문단은 작년에 쓴 중편의 후반부. 지난번에 발췌한 순간온수기 파트 바로 앞부분이다. 한달만에 집에 돌아온 게냐가 비를 쫄딱 맞은 채 샤워를 하러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첫 문단에 언급되는 콜랴는 게냐의 발레단 동료 무용수이다. 미샤의 발레단에서는 게냐보다 조금 더 먼저 춤추기 시작했다. 지나이다, 핀스키는 미샤가 주인공이었던 소설들에서 종종 등장했었다. 셋은 발레학교, 극장 동기이고 친한 사이이다. 레냐는 레오니드의 애칭이다. 어린 시절 자기가 크면 나와 결혼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약혼자 운운하던 나의 귀여운 레냐와도 이름이 같다. 막상 이 레냐 핀스키가 등장하는 글을 썼던 건 귀여운 꼬마 레냐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일이었지만.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도 예전에 다른 발췌문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적이 있다. 미샤의 극장 선배이고 초창기부터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던 인물이다.
발췌문은 아래 접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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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는 시원찮았다. 중간중간 끊겼고 기분 탓인지 수압도 더 낮아진 것 같았다. 관리실의 도둑놈들이 라디에이터를 고쳐주는 대신 배관을 떼어내 팔아먹은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몇 주 전 마지막으로 집에 왔을 때 들렀던 콜랴가 녹물이 나오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다면서 수도꼭지를 분해했다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도로 조여놓으면서 부품을 잘못 건드렸을 수도 있다. 함께 있었던 미샤는 당연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콜랴가 끙끙거리는 모습을 무슨 코미디 쇼라도 보듯 즐겁게 구경하면서 옛날이야기를 풀어놓기나 했다. 마린스키 데뷔 시절 사도바야에서 딱 여기랑 비슷한 아파트에서 동료 무용수들과 함께 살았는데 레냐가 뭘 고쳐보겠다고 나섰다가 수도 파이프를 다 터뜨려서 온 집안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자기와 룸메이트 여럿 모두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추운 길거리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어째 콜랴가 하는 짓이 이십여 년 전 레냐와 판박이라서 불길하다, 자기는 부츠를 신고 밖에 나가 있겠다고 농담을 했다. 능력을 의심받고 부아가 치민 콜랴가 도대체 그 똥손 레냐가 누구냐고 투덜대자 미샤는 너희들의 고매하신 스승님 레오니드 핀스키씨라고 대꾸해서 우리 입을 막아버렸다. 나는 핀스키에게 직접 배우지 않았지만 마린스키에서는 가끔 지도를 받았고 나보다 몇 년 선배인 콜랴는 발레학교 고학년 시절 그를 직속 스승으로 모셨으므로 똥손 레냐라는 신성모독적 표현을 황급히 취소했다.
나는 미샤와 지나이다, 핀스키가 모두 동기라는 건 알기는 했지만 그게 도저히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지나는 이따금 마린스키에서도 후배 발레리나들을 가르치곤 했지만 여전히 현역이었고 나와도 이따금 무대에 올라가는 반면 레오니드 핀스키는 내게는 대선배이자 ‘선생님’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미샤에 대해서라면, 그가 마린스키, 아니 키로프에 8년이나 몸을 담았었고 그동안 한결같이 최고의 자리에 있었으며 이른바 슈퍼스타였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역사책이나 신문 기사를 읽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린스키와 그를 결부시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키로프를 떠난 후였다. 물론 화보와 기록 영상으로는 봤다. 그 유명했던 알리와 솔로르, 알브레히트, 그리고 지그프리드 왕자를 추는 것도. 그가 지나와 함께 춘 로미오와 줄리엣 전체 영상 녹화본도. 그건 발레학교 시절 우리에겐 드라마 발레와 2인무에 대한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 그는 언제나 지금의 미샤, 콩쿠르 예선과 결선을 치르는 내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자리에 앉아 내 모든 동작을 예리한 시선으로 지켜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사위원장으로서 최종 결과를 발표할 때도 그 흔한 축하와 찬사, 격려의 말 한마디 없이 짤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던 미샤, 축하 리셉션에서 내게 다가와 바로 다음 날로 잡혀 있던 자기 발레단 공연에 초청하고, 공연을 마친 후 나와 함께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춤과 극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미샤, 완전히 새로운 동작과 문법으로 결코 변하지 않는 그 무엇과 언제나 변해 사라지는 것들을 살과 피를 가진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미샤였다. 마린스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들의 총체.
지나이다와 루키얀은 그가 키로프 시절에도 똑같았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과거의 미샤, 금박과 푸른 벨벳, 샹들리에로 장식된 그 거대한 극장의 무대에서 호두까기 왕자를 추고 당에서 명령한 집단농장 투어를 돌며 붉은 깃발과 레닌 초상화가 걸려 있는 강당에서 춤추고 인사하는 미샤를 상상할 수 없었다.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와 레오니드 핀스키라면 스크랩 기사와 사진을 보지 않고서도 눈에 선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심지어 지나마저도. 그러나 미샤는 과거가 아니라 여기, 오로지 지금 여기에 존재했다. 어쩌면 내가 그의 과거에서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거기 가 닿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지금 여기’조차도 확실치 않다. 세계 유수의 극장들, 최고의 무용수들과 안무가들, 패션 디자이너들과 셀레브리티들과 영화감독들과 광고주와 사업가들, 열광적인 팬들이 빽빽하게 거미줄을 치고 있는 무수한 장소들, 바실리 섬의 자기 발레단 스튜디오와 판탄카, 그 모든 여기들. 그러나 그 ‘여기’에 이곳, 아브보드느이 운하와 엘리자로프스카야 사이, 헌책시장과 로모노소프 도자기 공장 사이의 허름한 원룸을 굳이 끼워 넣을 필요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는 그저 자기 마음대로 존재했다. 지붕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가사를 잘라내 노래를 부르고 웅덩이에 빠진 고양이를 주워오고 홍차에는 결코 설탕을 넣지 않고, 고맙다는 인사 대신 키스를 하고 미안할 때는 눈을 똑바로 보며 사과를 하고는 곧 키스를 하며 눈을 감아버리면서, 그렇게...
...
<아브보드느이 운하와 엘리자로프스카야 사이, 헌책시장과 로모노소프 도자기 공장 사이> 는 이 소설에서 게냐의 원룸 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좀 황량한 동네이다.
미샤가 즐겁게 늘어놓은 '라떼' 옛날 얘기의 똥손 레냐와 파이프 사건 에피소드는 예전에 썼던 레닌그라드 장편(트로이가 주인공으로 나왔다)에 나왔던 얘기이다. 그 소설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
맨 위 사진은 아스토리야 호텔 로비. 아래 사진은 마린스키 극장. 둘다 2023년 현재의 사진들이라 게냐의 1997년 11월과는 좀 다른 풍경이지만. 어쨌든 '여기'와 '저기', 아무 곳도 아닌 어딘가에 대한 게냐의 상념들과는 좀 어울리는 것 같아서 올려두었다.
위의 발췌문에서 지난번의 순간온수기 이야기로 곧장 연결된다. 링크는 아래.
moonage daydream :: 순간온수기, 여기 +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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