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 예전의 글 : 료샤와 타타 about writing2020. 8. 16. 19:29
아래 발췌한 글은 몇년 전까지 쓰다가 잘 풀리지 않아 중단해 놓고 기다리는 중인 가브릴로프 본편의 첫 장 일부이다. 화자는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발레단의 무용수인 알렉세이. 애칭은 료샤. 내 친구 료샤랑은 상관없고 이 이름이 캐릭터와 잘 어울렸기 때문에 붙였다. 가브릴로프 본편은 1부 100여페이지, 2부 약간을 쓴 후 멈춰 있는데 언젠가 이어서 쓰기는 할 것이다. 반드시. 사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구상한 게 바로 이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 본편이 안 풀려서 외전도 여러 편 썼고 다른 글들도 여럿 썼다. 그 중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게 이 블로그에도 떡하니 폴더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임. 이 본편의 완전 외전 패러디로 웃기게 쓴 건데 정작 그건 거의 40개 가까운 에피소드들을 쓰고 ㅠㅠ
그래서 서무 시리즈엔 가브릴로프 본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쏠쏠하게 나왔는데(심지어 본편에선 아직 쓰지도 않았던 인물들도 미리 나왔다) 이 시리즈에서도 본편 중요 인물 두명은 패러디하지 않았다. 하나는 지난번 발췌한 적이 있는 미샤의 화가 친구 키라이고 한명은 이 료샤이다. 같이 나오는 데니스와 타타(본명은 타마라이고 타타는 애칭이다)는 서무 시리즈에 종종 등장했었다. 발레단의 스타 커플이었는데 본편에서도 그렇다. 료샤는 그들의 친구로 학창 시절부터 소설의 현재까지 소위 '삼총사'인데 두 친구에 비해 승급도 늦고 인정도 못 받는 편이다. 이 사람은 맨처음 가브릴로프 본편을 구상했을 때부터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소설 자체도 이 사람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발췌한 부분은 신임감독인 미샤가 소집한 배역 오디션이 있는 날, 극장에 도착한 삼총사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카페에 들러 간단한 아침을 먹는 장면이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티무르 보리소비치도 서무 시리즈에 나왔었다(무려 베르닌에게 돈키호테 배역을 지도하던 사람!) 티무르 보리소비치와 나누는 대화는 주로 데니스의 대사들이다.
부체르브로드는 오픈 샌드위치. 칼바사는 햄.
료샤는 알렉세이, 타타는 타마라, 덴카는 데니스의 애칭이다. 미셴카는 물론 미샤(본명은 미하일)의 애칭.
어쩐지 오늘은 이 이야기를 올려보고 싶어서 발췌해본다. 사진은, 딱 맞진 않지만 하여튼 그냥 글만 올리면 심심하니까. 출처는 마린스키의 브 콘탁테 계정에서 옛날에 갈무리한 극장 카페 사진.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우리는 타타의 뒤를 따라 극장 카페로 들어갔다. 데니스의 우울한 예상은 물론 들어맞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음식도 거의 없었다. 칼바사와 오이가 얹혀 있는 부체르브로드 세 조각과 삶은 마카로니 한 접시, 홍차 두 잔과 내가 마실 우유를 간신히 긁어모았다. 아직 9시 반도 안 됐기 때문에 자리는 거의 다 차 있었다. 그래도 타타는 솜씨 좋게 비집고 들어가서 우리 자리 쪽으로 다가갔다. 가운데 창가 자리. 다행히 거기 앉아 있는 건 티무르 보리소비치였고 찻잔도 거의 비어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가 인사를 하자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저런 노인네가 오전 수업 시간만 되면 호랑이처럼 돌변한다는 것은 정말 인생의 수수께끼였다.
우리는 티무르 보리소비치와 합석했다. 중앙아시아 출신 노인네답게 그는 우리의 접시를 보더니 혀를 찼다.
“ 아침에는 고기를 좀 먹어야지. 부체르브로드 한쪽 먹고 어떻게 힘을 쓰려고. 닭고기 수프라도 시켜오지 그랬나. ”
“ 수프는 다 떨어졌어요, 티무르 보리소비치. 있는 거 전부 쓸어온 거예요. ”
“ 그럼 아침에 좀 더 빨리 나오든가. 아니면 집에서 챙겨 먹고 다녀! 안 그래도 오후에 오디션도 두 개나 보면서. ”
“ 점심 때 많이 먹으면 되죠. ”
“ 자네 농담이지? 잔뜩 먹고 나서 새 감독 앞에서 주테를 하겠다고? 몸이 무거워서 제대로 뛰기나 하겠나? 가뜩이나 덩치도 큰 친구가. 미셴카가 키로프에서 주테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어제 보여준 것처럼 뛰었다간 미셴카가 그 자리에서 자네 역 뺏아 버릴 거야. ”
“ 제발 좌절시키지 말아 주세요, 티무르 보리소비치. 가뜩이나 지금 남자애들은 전부 불안해하고 있다고요. 그 사람하고 우리를 비교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런 생각하면 잘 뛰려다가도 미끄러지겠어요. ”
티무르 보리소비치는 껄껄 웃었다. 괜한 걱정을 한다며 데니스의 뒤통수를 가볍게 탁 치더니 다른 손으로 창틀의 천사를 쓱 문질렀다. 그게 우리의 행운을 빌어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습관적인 행위인지 궁금했다. 그는 남은 차 한 모금을 훌쩍 마신 후 먼저 일어났다. 그동안 데니스는 마카로니 접시를 끌어당겨 거의 사흘은 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타타는 내게 부체르브로드를 쥐어 주고 우유 컵도 밀어주었다. 타타에게는 언제나 어딘가 엄마 같은 면이 있었다. 발레학교 시절에도 항상 나와 데니스를 따라다니며 간식을 챙겨주고 모자를 뒤집어씌우고 목도리를 칭칭 감아 주었다. 우리보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훨씬 빨리 철이 들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동생을 돌보며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저 여자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타타의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나와 데니스도 장례식에 갔었다. 학교 친구들 모두가 갔다. 타타는 울어서 눈이 빨갰지만 우리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썼다. 위로하는 데니스에게는 엄마가 다행히 많이 아프지 않았다고, 자기와 동생에게 키스를 하고 웃으면서 떠나셨다고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후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을 때, 접시를 하나 떨어뜨려 깼을 때 타타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엄마가 좋아하던 접시였다면서 슬피 울었다. 나는 타타를 안아주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땐 겨우 열네 살이었으니까. 그저 그녀를 꼭 안고 머리를 쓸어주었을 뿐이었다. 타타는 오랫동안 울었지만 거실을 정리하던 데니스가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는 눈물을 쓱 닦고 급하게 깨진 접시조각들을 치웠다. 그러다 손을 다쳤다. 손가락을 지혈해주고 반창고를 붙여줬을 때 타타는 내 손을 꼭 쥐며 간절하게 말했다. 덴카한테는 내가 울었다고 말하지 마. 그날 이후 나는 내내 사랑에 빠져 있었다.
'about writ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는 중 - 아무 때나 와도 되는 미샤와 모레 와야 하는 트로이 + (6) | 2020.08.30 |
---|---|
쓰는 중 - 의사 선생에겐 어쩐지 불공평한 관심사들 + (2) | 2020.08.23 |
루빈슈테인 거리 사진 한 장 (2) | 2020.08.08 |
잠시 - 백조를 준비하는 지나 + (2) | 2020.08.01 |
잠시 - 연말 저녁 어둠에 잠긴 거리 + (4) | 2020.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