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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발췌한 두 개의 메모는 몇년 전 썼던 각각 다른 두 가지 글에 대한 노트이다.


첫번째 메모는 프라하에서 쓰기 시작해 서울에 돌아와 완성했던 가브릴로프 프리퀄의 후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소설은 나의 주인공 미샤가 체포되어 수용소와 클리닉, 면회실에서 겪는 일들을 다루고 있었다. 이 소설의 일부는 이전에 여러번 발췌했는데 주로 3부에서 미샤와 그의 친구 일린이 나누는 대화 부분들이었다.


두번째 메모는 저 글을 마친 후 본편으로 들어가기 전에 데이터와 캐릭터 구축을 위해 썼던 2차 소설 중 한 장면에 딸린 노트였다. 그 장면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맨 아래에 다시 발췌했다(사실 그 부분도 이전에 한번 올린 적이 있긴 하다)


두 개의 메모는 서로 다른 이야기와 배경을 다루지만 어쩌면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건 쓰는 사람이 동일했기 때문일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인물을 중심축에 놓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저때도 나는 실은 매우 실망했고 떠나려고 했었고 그러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글쓰기라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평생 하나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 그러나 그것을 변주하고 변형하고 마침내 그런 과정을 통해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것.







* 이 글들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첫번째 메모 : 2013. 5월>




 이 글을 쓰는 내내 난 전락과 치욕, 수치심에 대해 생각했다. 소중한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더럽혀졌다는 자각,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원칙이 무너진 순간의 고통에 대해.

 

  성적으로 분방한 사생활과 복잡하게 뒤엉킨 권력자들과의 관계, 체제로부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지적과 징계,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보안위원회 서류에도 불구하고 미샤는 일종의 순결함에 대한 강박적 수호 욕구를 가진 애였을 것이다. 그건 무엇보다도 춤에 대한 것이었을 테지만 동시에 집단주의 권력에 대한 저항 의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벨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인 순간 그는 수백 수천 명의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게 짓밟히는 것보다 더 속속들이 더럽혀졌으며 그건 다시는 복구할 수 없는 더러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이런 문제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청동기사상

사진은 alex gouliaev




이 사진은 내가 러시아 박물관 전시실에서 찍은 것이다. 작가는 미상. 러시아 민중들의 정교 예술작품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리스도 조각상이다.





...

 



 <두번째 메모 : 2013. 6월>






 가브릴로프 장편에서 미샤는 더 이상 춤을 추지 않는다. 이미 더 이상 무대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인데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그 도시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춤을 출 만한 몸 상태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그 애를 처음으로 만들어냈을 때 미샤는 무용수가 아니라 안무가였고 감독이었다. 그땐 '그 애'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당시 내가 그려냈던 미샤는 이미 3~40대에 접어든 나이였고 결코 타인에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수수께끼 같고 독립적이며 유능한 인물, 당시 구상했던 소설 속 주인공에게는 일종의 멘토이자 동시에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인물, 안티 히어로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후 그 인물에 대한 나의 관점은 변화했고 나는 미샤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구상했던 소설의 중심과 구조도 변형되었다. 이후 나는 그 애에 대한 단편을 몇 개 썼고 작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 꽤 긴 단편과 장편, 경장편을 썼다. 그 세 편의 소설에서 미샤는 이미 안무가가 되어 있었지만 내게 그 애는 그보다도 무용수에 가까웠다.


 가브릴로프에 유배된 후 그 애는 처음으로 완전하게 무대를 버리고 온전히 안무가와 예술감독의 역할을 맡게 된다. 타고난 무용수가 존재하듯 안무가로서의 타고난 재능이란 것도 분명 있다. 전자는 육체의 재능이며 후자는 창작자로서의 재능이다. 그 두 가지를 모두 갖는다는 건 아주 드문 축복이다. 그리고 나의 주인공은 분명 그런 축복을 받은 존재다. 그게 그 애의 어둡고 뒤틀린 영혼을 위해서도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샤는 'Frost'에서 마로조프와 대화할 때나 'The dark dances alone'에서 훨씬 친한 상대인 일린과 얘기할 때 한결같이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을 거라고 아주 단호하고 강력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그게 정말로 그렇게 쉬운 일일까? 나는 일린의 입을 빌어 그 애에게 무용수로 태어난 인간이 춤을 추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일 거라고 얘기했다. 게다가 그 애는 너무나 뛰어난 무용수였다.


 며칠 전 아래에 발췌한 부분을 쓸 때 나는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그 애와 스비제르스키의 관계. 성과 권력의 복잡한 역학. 그리고 두번째는 무용수로서의 그 애가 갖는 어떤 특질.


 나는 모든 위대한 예술의 정점에는 세 가지 중 하나가 있다고 믿는다. 사랑. 죽음. 그리고 삶이다. 그리고 나의 주인공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해답을 찾고 싶어 몸부림치고 계속해서 뛰어오르고 날고 움직이고 넘어졌다. 그 애는 자신의 춤과 무대에서 언제나 죽음과 조우한다. 그건 어떻게 보면 불행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위대한 정점에 오른다 해도 그건 자기파괴와 부정을 불러오는 음울한 마약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그 애가 춤을 그만 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믿는다.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청동기사상

사진은 alex gouliaev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청동기사상

사진은 alex gouliaev

 


..





위의 메모가 딸려 있었던 2차 소설의 그 장면은 여기. 사실 이 내용은 전에 발췌했던 글에 포함되어 있다. 카를로비 바리의 별장에서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지시에 따라 춤을 추는 미샤의 이야기였다.





 스비제르스키는 밖으로 나갈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마룻바닥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 애가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샤는 가끔 그를 힐끗거리며 쳐다보았지만 스비제르스키가 말을 걸거나 곁에 다가오지 않자 점차 그의 존재를 잊었다. 연습에 완전히 몰입해 음악과 파트너도 없이 2인무와 3인무, 솔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췄다. 검은 머리칼이 짧고 부드러운 벨벳 커튼처럼 펄럭였고 두 팔이 단단하고 유연한 채찍처럼 물결쳤다. 그 애가 아무런 무게도 없는 도약을 서너 번 반복했을 때 스비제르스키는 담배를 잘못 내려놓다가 손가락 끝을 데었다. 하지만 뜨거움이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샤가 바닥으로 내려왔을 때 스비제르스키가 입을 열었다.

   

 “ 그건 놀라운데. 무대에서도 꽤 높이 뛴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었군. 일부러 높이를 낮추는 건가? ”

 

 “ 서커스가 아니니까요. ”

 

 “ 흠, 니진스키처럼 얘기하는군. 다른 애가 그런 말 했으면 건방지다고 해줬을 걸. 대단한 도약인데. 혹시 피루엣도 더 빨리 돌 수 있는데 억지로 늦추는 거야? ”

 

 “ 음악에 맞추는 거예요. ”

 

 “ 오케스트라가 네 움직임에 맞춰줄 걸. 한번쯤 그렇게 해봐, 갈라 무대에서는 그렇게 해도 무방하니까. 할 수 있는 최대로 뛰어오르고 돌아봐, 그럼 관객들이 심장 발작으로 줄줄이 실려 갈 테니 안 되려나. 지난번 공연 때도 여자 두어 명 기절했었지. ”

 

 

 미샤는 바를 붙잡고 무릎을 구부리며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 이런, 피루엣을 빼먹는군. 취기도 가셨으니 까먹은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그런 말 들으니까 부끄러워? 너 춤에 대해서는 전혀 겸손하지 않잖아. 프로페셔널답게 끝까지 해야지. 해봐, 연속 회전. 푸에테. ”

 

 

 미샤가 잠깐 동안 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두 눈에 뜨겁고 격렬한 분노가 일었다. 자기 춤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듣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스비제르스키는 흥미롭게 그 시선을 맞받았다. 과연 그 애의 춤에 대한 자존심이 공포를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미샤는 스비제르스키의 눈빛을 오랫동안 동요 없이 받아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전 기계가 아니에요. ”

 

 “ 기계가 아니니까 그런 춤을 출 수 있겠지. 키로프 애들 절반 이상은 다 기계야. 세레브랴코프가 왜 그렇게 널 잡아먹고 싶어서 안달인지 정말 몰라? 그놈은 스텝과 회전을 찍어내는 기계처럼 추지. ”

 

 “ 당신들이 임명한 공훈예술가예요. ”

 

 “ 아, 본심이 나오는 건가? 걱정 마, 넌 그놈보다 훨씬 빨리 공훈예술가가 될 테니까. 20대 다 넘기기 전에 인민예술가 달아줄 수도 있을 걸. 그러니까 춰봐, 피루엣. 연습은 제대로 끝내야지, 토요일 공연이라면서. ”

   

 미샤는 바를 놓고 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잠깐 스텝을 밟은 후 회전하기 시작했다. 검은 프로펠러처럼 빠르고 힘차게 돌았다. 격렬하면서도 우아한 회전 때문에 양쪽으로 쭉 뻗은 두 팔이 날개처럼 펼쳐져 퍼덕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빠르게 연속 회전하면서도 몸의 축이 전혀 기울어지지 않았다. 두 눈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가속도가 붙자 이제 그 불길이 몸 전체로 옮아가는 것 같았다. 한순간 스비제르스키는 미샤가 빙글빙글 돌다가 모터 달린 바람개비처럼 하늘로 휙 날아오를 것 같다는 착각에 휩싸였다. 이미 50번을 훌쩍 넘겼지만 그 애는 계속해서 돌고 있었다. 마침내 스비제르스키는 그 애를 저지해야 했다. 

 

 “ 이제 그만하지. 그 근육 풀어주려면 한 시간은 스트레칭해야 할 걸. ”

  

 미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애는 계속해서 돌았다.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곧게 뻗어 있던 두 팔이 점점 아래로 처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돌았다. 스비제르스키는 무용수든 서커스 단원이든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회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100번은 예전에 지났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 정신 나간 짓을 무력으로 끝내려고 했을 때 미샤가 멈췄다. 무릎을 꿇는가 싶더니 끔찍할 정도로 가쁜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옆으로 누웠다. 두 팔을 부러진 날개처럼 꺾은 채 다리를 길게 뻗고 물에서 막 건져낸 사람처럼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검은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 이마와 뺨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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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글의 앞뒤 내용이 좀 더 붙어 있는 버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620 

<별장의 미샤와 스비제르스키, , 레닌그라드 아이, 뒤틀린 관계>







 아르춈 옵차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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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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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