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 월요일 밤 : 추운 날씨, 컨디션 저조, 파블로바는 쉽지 않아, 떡볶이, 말차라떼, 인연, 자동화는 힘들어, 날씨신이여 와주소서 2024 riga_vilnius2024. 10. 15. 02:37
사진은 이번 여행에서 읽으려고 챙겨온 피천득의 <인연> 수필집 중에서.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밤새 비가 왔고 아침에도 비가 조금 왔다. 오후에 귀가할 때도 가랑비가 오락가락했다. 오늘의 날씨는 정말이지 전형적인 이쪽 동네 10월 날씨였다. 아예 한겨울일 때보다 이때가 항상 더 춥다. 음습하고 스산하기 때문이다.
어제 많이 돌아다닌 여파도 있나 싶지만 근본적으로는 붉은군대 도래가 바짝 다가왔기 때문에 오늘 몸이 무겁고 좀 힘들었다. 밤에도 한시 넘어서 잠들었는데 새벽 4시에 깨고 한참 뒤척이고, 나중에도 30분마다 깨는 등 잠 설치는 것도, 손발이 좀 저리면서 온몸이 쑤시는 것도 딱 그 징후였다. 두통과 졸음도 마찬가지였다. 9시 다 되어 침대에 누운 채 조식을 거를까 말까 고민하다 몸이 쑤셔서 일단 따뜻한 물로 근육을 풀어준 후 밥먹으러 내려갔다. 간단하게 먹고 올라왔는데 요즘 조식 테이블에서 홍차 대신 페퍼민트 티를 마시고 있는고로 머리에 카페인이 들어가지 않아 너무 몽롱했다. 머리도 너무 아팠다. 업무메일과 나 없는 동안 진행되고 있는 업무에 대해서도 vpn으로 확인을 하다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스르르 도로 침대에 들어가 1시간 가량 졸았다. 그렇다고 제대로 잔 건 아니고 그냥 졸았음.
정오 무렵 몸을 일으켰고 이 두통은 분명 카페인 부족 때문이란 생각에 차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날씨가 나빴기 때문에 선택지는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곳 3곳으로 압축되었다. 피나비야(빌니아우스), 후라칸(토토리우-게디미나스 지점), 그리고 엘스카(필리모) 3곳. 날씨가 꾸무룩했으므로 후라칸에 가는게 좋으려나 했지만 차를 마시고 싶었고 피나비야 케익도 궁금했으므로 일단 피나비야로 가기로 했다.
날씨는 매우 안 좋았다. 그런데 추워서 옷을 껴입었기 때문에 불편했다. 오늘은 조금 더 두꺼운 기모 타이츠에 얼마전 여기서 샀던 긴 스커트, 히트텍과 반팔셔츠와 짚업에 숏패딩을 껴입었다. 그랬더니 몸을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조인다기보다는 그날이 다가와서 몸이 불편한 것이다. 아이고 힘들어.
하여튼 빌니아우스 거리는 숙소에서 가까우니 얼른 피나비야로 갔다. 그런데 진열장에는 거의가 홀케익들만 늘어서 있었고 조각으로 나와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이때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괜찮은 디저트 가게에서도 의외로 잘 만들기 쉽지 않은 파블로바를 골랐기 때문이다(이쁘긴 한데 모양만큼 맛있게 잘 만들기 쉽지 않은 디저트다) 하여튼 나는 얼그레이와 파블로바를 주문했다. 차를 마셨더니 두통이 좀 가셨다. 역시 카페인이 필요했어. 파블로바는 역시나 실패였다. 일단 머랭이 완벽하지 못했고 잘 부서지지 않는 데다 끈적했다. 좀 굳은 솜사탕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면 잘못 만든 슈니발렌. 가운데 들어있는 크림만 맛있었다. 피나비야는 패스트리와 키비나이 쪽이 더 맛있는 걸로 ㅎㅎ 하여튼 그래서 파블로바는 머랭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피나비야는 내부 조명이 밝고 내가 구석에 앉은데다 온통 흰색이라 조명 그림자 때문에 사진이 이쁘게 안 나왔다. 아마 파블로바 머랭에 실망해서 사진을 정성들여 찍지 않아서인지도.
...
조식을 적게 먹고 나와서 그런지 배가 고파져서 쌀밥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피나비야 맞은편에 있는 Manami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여기는 스시 등 일식집 같은 스타일이지만 똠얌꿍도 있고 뭔가 이것저것 아시아 음식들 짬뽕 메뉴가 많았다. 덮밥이나 먹어야겠다 하고 보니 런치메뉴가 있었는데 두꺼운 메뉴책은 영어 병기가 되어 있었지만 런치에는 리투아니아어만 적혀 있었다. 근데 그중에 무슨무슨 도리, 고항 어쩌고 하는 이름에다 사진은 데리야끼 치킨덮밥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것에 점심 수프를 추가할 수 있어서 그렇게 시켰다. 손님도 별로 없었는데 엄청 늦게 나왔다. 아니 근데 고항이라며... 고항 일본어로 밥 아니었어? 흐흑, 궁중떡볶이 같은 음식이 짠 하고 나왔다. 으앙... (떡볶이 안 좋아하는 자) 굴소스와 간장 양념을 해서 기름에 볶은 떡볶이로 닭고기와 아스파라거스, 버섯, 당근, 파프리카가 들어 있었다(고수도 원래 넣어주는 건데 고항 어쩌고 하는 메뉴를 읽다가 고수를 발견하고 내가 급하게 그거 빼달라고 했었음) 떡볶이 좋아하는 분들은 반갑고 맛있게 먹었을 것 같다. 떡도 조그만 쌀떡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수프는 돈지루로 추정되었는데,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라멘 비스무레한 소면도 좀 들어 있고, 코코넛향이 물씬 났다. 으잉? 배고팠기 때문에 굴소스 간장 떡볶이는 그래도 반쯤 먹었고 야채랑 고기는 다 건져먹었는데 코코넛과 동남아향이 물씬 나는 기름진 돈지루 수프는 조금밖에 못 먹음. 앵, 그냥 바로 앞의 웍에 가서 돈부리를 먹었으면 행복했을 텐데.
난데없는 굴소스 간장떡볶이와... (그런데 맛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매운 거라면 더 맛있었을 것 같다만 난 매운 떡볶이도 별로 안 좋아하긴 해)
돈지루 같은데 또 동남아 수프 같기도 한 혼종 수프. 근데 베이스는 돈지루가 맞는 것 같음. 돈지루+코코넛. 오늘의 수프 뭔지 물어볼걸. 당연히 미소 그런 거 줄 거라 생각했던 바보같은 나. (혼종이라고 투덜댔지만 사실 정통 돈지루도 별로 안 좋아함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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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점심을 먹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날씨는 스산했고 온몸이 저리고 쑤셨다. 추워져서 혈액순환이 잘 안되나 흑흑... 후라칸과 엘스카를 놓고 가늠하다 월요일 오후니까 엘스카가 한적하겠다 싶어서 그리로 갔다. 빌니아우스 거리에서는 낡은 건물 사이의 안뜰을 통과하면 곧장 엘스카 쪽으로 갈 수 있어 가깝다.
엘스카는 정말 한적했다. 토요일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리고 날씨가 안좋아서 오늘은 야외 테이블에 한 사람도 없었다. 이번에는 말차라떼를 시켜보았다. 빌니우스 카페들은 신기하게도 다들 말차라떼를 팔고 이것을 열심히 홍보한다. 카페 문화가 좀 늦게 들어와서 그런가. 일본 쪽 영향을 은근히 많이 받는 것 같다. 인테리어도 그렇고 말차라떼, 모찌 뭐 그런것도 그렇고. 좀 신기하다. 의외로 차이라떼는 별로 없는데 가는 데마다 말차라떼는 있다. 물론 우유 안 든 그냥 말차는 없음. 내가 좋아하는 자리도 비어 있긴 했지만 오늘은 책만 읽다 가려고 했으므로 그 앞의 1개짜리 테이블에 앉았다.
이번에 체류기간에 비해선 책을 별로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 제일 조그맣고 가벼운 챈들러의 에세이 1권(이건 절판된 책이라 애지중지해서 웬만하면 안 가지고 나오는데 막판에 무거운 책을 넣을 수가 없어서 가져왔다. 리가와 빌니우스 오는 비행기에서 너무 잘 읽으면서 옴),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1권, 여행에 잘 어울리는 하루키 에세이집 1권, 그리고 이따금 여행 갈 때 챙기는 피천득의 <인연>. 이게 전부. 하루키 잡문집은 좀 무거워서 오후에 근처 카페인 같은 곳에 갈 때 챙기는 게 낫기 때문에 오늘은 오랜만에 인연을 들고 나갔다. 몇 년 만에 다시 읽는데 이분의 문체는 참 훌륭하다. 글에 군더더기가 없고 우아하고 간결하다. 정취가 있다. 물론 옛날 사람이라 구식 정서가 많이 배어 있다만 나는 옛날 작가들의 경우엔 그런 쪽엔 그냥 관대한 편이다.
엘스카의 말차라떼는 핫초콜릿과 마찬가지로 우유가 많이 들어 있고 연했다. 설탕이 거의 들어 있지 않아서 달지 않았다. 여기가 플랫화이트나 카푸치노도 우유를 많이 넣어주고 연해서 내가 마실만한가 보다!(어린이 입맛 주의보) 연한 말차라떼를 마시며 고풍스럽고 간결한 수필을 읽고 있으니 좋았다. 맨 위 사진은 내가 항상 좋아했던 문구. 이게 비단 수필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서 쓰는 자의 마음으로 너무 공감이 잘 된다.
3시가 지나자 한적하던 엘스카에도 다시 손님들이 북적대기 시작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애들이 많았고 영어를 쓰는 사람들도 많았다. 혼자 오는 사람도 많았다. 날씨 좋아서 빛이 많이 들어올 때가 더 좋긴 하다. 오늘 엘스카의 유일한 단점은 음악이었다. 오늘은 엄청 시끄러운 랩음악을 내내 틀어주었다. 에미넴의 목소리 같았지만 정확하지 않음... 아닐지도 몰라.
책을 3분의 1쯤 읽은 후 남은 말차라떼도 식었고(라떼 잔을 한가득 채워줘서 다 마시기 어려웠다), 랩음악이 너무 시끄러워서 엘스카에서 나왔다. 아직 늦은 오후는 아니었지만 방에 돌아가 쉬는게 나을 것 같았다. 좀 걸어가면 리미가 나오는데 그것도 귀찮아서 더 가까운 막시마에 갔다. 이 막시마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부가 너무 미로 같았고 물건 진열도 직관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키와 막시마 모두 셀프결제를 할 때 카드를 넣고 나면 뭔가 사인을 하라고 한 후 갑자기 점원을 부르라고 벨이 울려댄다 ㅜㅜ 리미는 안 그러는데. 리미랑 나르베센이 제일 좋은 걸로. 보통은 셀프결제를 하더라도 카운터에 점원이 한명 쯤은 있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빌니우스의 이런 슈퍼들 카운터는 거의 항상 비어 있음.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거 잘 이용하시는 걸까? 뭐 우리나라도 정신없긴 하지. 그리고 이런 시스템은 다 똑같이 통일되어 있으면 좋겠는데 우리나라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마트 별로 다 다르다. 아이고 피곤해. 겨우 물 두 병 사는데 점원 부르는 벨이 두 번이나 울리고 난리난리.
방에 돌아와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린 후 좀 쉬었다. 저녁도 대충 먹었다. 부디 내일은 날씨가 좀 좋았으면... 사실 날씨 기대 안하고 왔는데도 자꾸 기대하게 된단 말이야 흐흑. 그리고 옷을 많이 잘 챙겨왔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껴입을 옷이 별로 없음. 내일 또 옷 구경을 하러 가야 할지도 ㅎㅎㅎ 예보를 보니 어떤 예보는 내일 내내 흐리고 구름, 어떤 예보는 내일 해가 비친다고 되어 있음. 제발 후자가 맞게 해주세요.
여행이 이제 절반이 지나갔다. 2주 후 빌니우스를 떠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흑, 두달 더 있는 거라면 좋겠는데. 꼭 여기 있지 않아도 되니까 휴직 기간이... 원래 근속휴직은 3달 할 수 있는 거였는데 워낙 할 일들이 많고 게다가 나는 평직원이 아니라서 더욱 눈치가 보여서 간신히 큰 행사와 행사 사이의 10월 한 달만 낸 거라 너무 아쉽다. 하긴 이것도 못 오게 될까봐 막판까지 너무 힘들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행복하게 받아들여야지. 확실히 과로와 업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자 수면의 질은 나아졌고 조금 더 자게 되었다. 요 며칠은 그날 직전이라 다시 불량수면이 되었다만. 일을 안 하니 너무 자연스럽다. 흑흑...
.. 오늘은 3,773보, 2.4킬로. 날씨와 컨디션 때문에 매우 조금 움직임. 사진도 엘스카 사진이 거의 전부. 내일 날씨가 좋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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