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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다와 게냐에 대한 단편은 여전히 쓰는 중이다. 이 단편은 작년 가을에 마무리한 '눈의 여왕' 이라는 단편과 여러 모로 연결되고 또 후자보다 단 이틀 전에 일어나는 이야기라 첨에 구상했을 때 '쌍둥이' 라는 애칭을 붙였었다. 눈의 여왕도 그렇고 쌍둥이도 그렇고 좀 진지하고 섬세한 타입이라 이따금 '아 좀 웃긴 걸 써보고 싶은데. 일하는 것도 힘든데 쓰는 글도 너무 진지하니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지금 필요한 글, 지금 쓰고 싶은 글이기 때문에' 쓰고 있다. 

 

 

오늘 오랜 친구 쥬인이랑 간만에 만나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다. 쥬인과 나는 지금 쓰는 글의 배경이 되는 시간대에 역시 그 공간적 배경인 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 만나 친해졌다. 그러니 오랜 우정을 쌓아왔다. 서로 나이를 먹고 인생의 경험들이 쌓였지만 지금도 만나면 옛날처럼 마냥 소녀처럼 즐겁고 허물없다. 그래선지 아래 지나와 미샤의 대화가 생각나 발췌해 본다. 이건 지금 쓰는 쌍둥이가 아니라 작년에 쓴 '눈의 여왕' 후반부의 이야기이다. 별다른 내용은 없다. 파리 투어 겸 출장에서 돌아온 지나를 게냐가 공항에서 픽업해 왔고 둘은 배가 고파서 네프스키 대로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 갔다. 그리고 패션지 촬영을 마친 미샤가 지나가다 그곳에 들어와 한달만에 지나와 재회하고 둘은 거의 만담에 가까운 대화를 나눈다. 

 

 

이 단편도 상당히 진지한 편이라 이런 가벼운 대화가 나오는 장면은 여기 뿐이다. 이 글에서 미샤와 지나는 이미 나이를 먹었고 인생에 있어 서로 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경험을 했으며 제3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어른', 혹은 '이룰 것을 다 이룬, 업계에서 존경받는 사람들' 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어릴 적 지나와 말썽쟁이 시절처럼 여전히 허물없고 가볍고 어린애 같다. 

 

 

 

위의 사진은 Yulia Mikheeva 가 찍은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 나는 콘다우로바를 볼 때마다 지나를 좀 떠올린다. 물론 콘다우로바는 키도 아주 크고 늘씬해서 지나처럼 조그맣고 가냘픈 이미지는 아니지만, 붉은 계열 머리색도 그렇고 분위기가 은근히 지나의 어떤 면을 연상시킨다. 어린 시절이나 20대 시절의 지나 말고, 그 이후의 지나. 

 

 

발췌문은 아래 접어둔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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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감자샐러드와 큼직한 닭튀김 두 조각을 모조리 해치운 지나가 종알거렸다.

 

 

“ 배는 부른데, 자꾸 뭔가 더 먹고 싶네. 입가심하고 싶어. 메뉴에 뭐가 더 있는지 좀 보고 올까 봐. ”

 

 

게냐가 가서 보고 오겠다고 하려는데 지나가 갑자기 ‘어머, 저 바보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미샤가 출입구 근처에 선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듯 환하게 웃으며 재빨리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지나를 꼭 껴안고 뺨을 마주 대고 키스를 하며 열렬한 환영을 표시했다. 지나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팔꿈치로 미샤의 옆구리를 툭 쳤다.

 

 

“ 기름을 다 묻히네, 바보. ”

 

 

그러면서 냅킨을 집어 미샤의 얼굴과 자기 입술을 닦았다. 미샤는 지나의 손에서 냅킨을 빼앗아 쟁반 한쪽에 내팽개치고는 다시 환영의 입맞춤을 두 번이나 더 한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코트와 목도리는 벗었지만 비니는 그대로 쓰고 있었다. 벌써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중년 여인들과 젊은 남녀들이 속닥거리며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으니 모자는 쓰고 있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지나도 그들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아휴, 우리끼리는 참 평화로웠는데’ 하고 투덜거리며 눈에 띄는 붉은 곱슬머리를 재빠르게 땋아서 등 뒤로 감췄다. 그리고는 궁금해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동글동글 굴리며 물었다.

 

 

 

“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촬영은 끝난 거야? 눈 안 맞았어? 별로 안 젖었네, 스튜디오 촬영으로 바꿨어? ”

 

“ 눈이야 맞았지, 엄청나게. 우박도 맞고 비도 맞고. 사진사가 3종 세트라고 좋아하던데. 그래도 아니치코프랑 판탄카에서만 찍고 봉기 광장은 접었어. 눈 때문에 판탄카 촬영분만으로도 충분히 그림이 나왔다고 하더라고. 악천후 덕분인 거지. ”

 

“ 그게 뭐가 덕분이야, 완전 재수 옴 붙은 거지! 눈보라 치는데 강변에서 무슨 놈의 촬영을 해! 감기 걸릴 거야, 뼈에 바람 들어가서! ”

 

“ 재수 좋은 촬영이었는데. 모피 입고 찍었거든, 샤프카도 쓰고. 하나도 안 추웠어. 닥터 지바고 콘셉트래. ”

 

“ 닥터 지바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너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

 

“ 뭐 상관없잖아. 어차피 걔들은 그거 읽지도 않았을 텐데. 영화만 좀 봤겠지. ”

 

“ 영화랑도 하나도 안 닮았거든요! 수염도 없고! ”

 

“ 하긴. 그래서 자꾸 춤을 춰보라고 시켰나. 미끄러질 뻔했는데 그 사진이 제일 잘 나왔어. ”

 

“ 눈 맞으면서 돌바닥에서 웬 춤! 시킨다고 추냐! 그러다 머리 깨지고 다리라도 부러지면! ”

 

“ 괜찮아, 보험도 미리 다 들어줬어. 미국 애들은 그런 건 정확해. ”

 

 

 

지나는 씩씩거리며 미국 놈들이고 보그고 나발이고 전부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욕을 하다가 잠시 후 ‘어휴 다 자업자득이지 내가 뭐라고 이 바보멍충이 걱정을 해’ 하며 진정되었다. 그리고는 진짜 궁금했던 질문으로 되돌아갔다.

 

 

 

“ 근데 정말 어떻게 알고 왔어? 지나가다 창밖으로 우리 본 거야? ”

 

“ 아니. 촬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차 한잔 마시려고 키라한테 갔거든. 근데 키라는 없고 주차장에 우리 큰 차가 있잖아. 그럼 분명히 여기 왔겠구나 했지. 여기가 제일 가까우니까. 네가 좋아하고. ”

 

“ 맥도날드 가려다가 이리로 온 건데. ”

 

“ 거긴 길 두 번 건너야 하잖아. 눈 오는데. ”

 

“ 하여튼 쓸데없는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차 못 마셨겠네. 여기서라도 한 잔 시켜. 뭐라도 좀 먹고. 쫄쫄 굶었을 거 아냐. 미국 놈들이 뭘 먹여줬을 리가 없지. ”

 

“ 주긴 줬어, 초콜릿. 코코아랑 같이. ”

 

 

 

어떻게 그런 조합을 권할 수 있는지 당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코트 주머니를 뒤져 포장지를 뜯지도 않은 커다란 알펜골드 초콜릿을 꺼내 지나에게 건네주고는 주문대로 갔다. 가는 길에 결국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몇 장 같이 찍어주었다.

 

 

 

미샤는 홍차 한 잔과 감자샐러드만 들고 왔다. 티백만 담가놓은 홍차에 지나가 잽싸게 봉지를 뜯어 설탕을 몽땅 털어 넣고는 미샤가 채 항의하기도 전에 엄하게 말했다.

 

 

“ 뼈에 바람 들어갔으니까 설탕 넣어야 돼! ”

 

“ 비과학적이야! ”

 

“ 빅토르한테 물어보셔, 두 봉지는 넣어야 된다고 할걸! ”

 

 

 

미샤는 포기하고 설탕 녹인 홍차를 마셨다. 그리고는 감자샐러드도 먹었다. ‘아, 난 올리비에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이건 식초가 들어가네’ 하며 약간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지나가 ‘어휴 구식!’ 하고 핀잔을 주었다. 미샤는 ‘내가 왜 구식이야. 난 초밥도 좋아하는데’ 로 응수하고는 별말 없이 감자샐러드를 먹었다. 배가 고프긴 했던 모양이었다. 지나가 ‘눈속임을 위해’ 시켰다가 손도 대지 않았던 코울슬로를 밀어주자 그것도 먹었다. 먹으면서 지나에게서 파리 얘기도 듣고 친구들의 안부도 확인했다. 지나가 노라 토레스의 야스민 동지와 광고판 노래를 불러주자 아이처럼 좋아했다.

 

 

 
 
 
 

 

 

 

 

...

 

 

 

 

.. 알펜골드 초콜릿은 저 당시 나와 쥬인이 이따금 사먹었던 초콜릿이다. 여유가 있으면 파제르를 사먹었지만 파제르는 너부 비싸서 그보다는 좀 저렴한 거대 판 초콜릿 알펜골드를 가끔 먹었다. 당시에 우리 나라에는 이것저것 들어 있는 초콜릿이 별로 없어서 온갖 헤이즐넛이니 땅콩이니 건포도니 하는 것들이 박힌 초콜릿이 신기했다. 나중엔 파제르도 비싸고 알펜골드도 그리 싸지는 않다는 생각에 밀카를 자주 사먹었다. 그 추억에 외국 나갈 때마다 밀카가 보이면 사와서 쥬인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언젠가부터 우리 나라에도 밀카가 들어와서 항상 옛 생각이 난다. 근데 우리 나라에서 파는 밀카는 왜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음. 

 

 

지나의 대사에 등장하는 빅토르는 미샤의 발레단 전속 마사지사 겸 의무사. 맨 뒤에 나오는 노라 토레스는 미샤와 지나의 오랜 지인인 런던의 락 가수이다. 야스민 동지와 광고판 노래라는 것은 이 단편에서 지나가 파리에 갔을 때 미샤가 안 왔다고 슬퍼하던 노라가 길거리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미샤의 향수 광고판을 보고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부른 에피소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샤와 지나, 그리고 게냐가 치킨과 감자샐러드를 먹고 있는 저 패스트푸드점은 네프스키 대로에 있었던 갈레오라는 곳으로 KFC와 좀 비슷한 곳이었다. 나중에 KFC 들어온 후 문을 닫았다고 한다. 저 당시 쥬인이랑 나랑 자주 갔던 곳이다. 저기 감자샐러드는 식초가 들어가서 새콤한 맛이 있었고 맛있었다. 미샤가 올리비에 같은 줄 알았는데.. 라고 하는 이유는 오리지널 올리비에 샐러드엔 식초가 안 들어가기 때문에. 애초 패스트푸드점에는 거의 가지 않는 미샤라서 메뉴판에 감자샐러드라 적힌 걸 보고 올리비에를 생각하며 시켰기 때문이다 :) 그리고 당시 이 동네에서 초밥은 매우 힙한 음식이었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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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