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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시작한 단편은 느릿느릿 나아가고 있다. 집중해서 휙휙 쓰고 싶은데 역시 연초는 원체 바쁘고 일도 많은 시기라 집중이 잘 안돼서 속도가 나지 않는다. 이제야 주인공인 게냐가 전 여자친구인 리다와 본격적으로 마주앉아 대화를 시작했음 ㅠㅠ 

 

 

이따금 그날그날의 메모나 전에 발췌한 파트에서 언급했듯 이 단편은 90년대 후반(명확하게는 97년 11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있는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에서 시작된다. 게냐는 리다의 연락을 받고 예전에 종종 데이트하던 곳인 이 호텔 2층 카페로 그녀를 만나러 간다. 아래 두 문단은 전에 둘이 사귀던 시기에 대한 게냐의 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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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언제나 2층 카페에서 만났다. 로비 바보다는 이쪽이 더 아늑하고 한적했다. 홀 구석 창가에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빛이 들어와서 1층보다 훨씬 밝았고 소파도 크고 푹신했다. 별도의 디저트나 샌드위치 대신 커피나 차 한 잔만 시키는 정도라면 가격도 무난했다. 원한다면 칵테일이나 맥주를 마실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고 바텐더도 손님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에 한참 앉아 있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근처의 조그만 식료품 가게에서 주전부리를 사 가곤 했다. 리다가 가장 좋아했던 건 트윅스 초코바와 조그만 노란색 봉지에 든 이상한 스낵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과자는 감자칩처럼 생겼지만 튀겨서 기름기가 배어 나온다는 것과 짭짤한 것 빼고는 맛은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가격이 매우 싸다는 것 외의 이점은 없어 보였지만 리다는 그 정체불명의 과자를 가리켜 ‘싸구려 칩시(чипсы)’라고 불렀고 쓸데없이 비싼 레이스(LAYS)의 훌륭한 대체물이라 했다. 마치 가짜 LSD처럼. 나는 리다의 표현대로 ‘장기간의 세뇌 교육 때문에’ 과자를 먹는 건 기피했지만 그녀와 트윅스를 반으로 나눠 먹는 건 좋아했다. 매대에 트윅스가 없을 때, 그러니까 운이 좋을 때는 내가 선호하는 피크닉 초코바를 고를 수도 있었다. 트윅스의 찐득한 캐러멜 시럽보다는 피크닉의 땅콩 쪽이 더 좋았다. 리다는 내게 그 와중에도 나이트를 고르느냐고 핀잔을 줬다. 나이트는 다크 초코잖아. 난 그냥 초코가 더 좋단 말이야. 다크로 눈속임한다고 뭐가 달라져? 어차피 초콜릿 먹는 거. 다이어트 콜라 시키는 거랑 똑같잖아.

 

 

 

 옥에 티는 이 홀과 카페가 이따금 단체 손님들의 행사 장소로 쓰인다는 거였다. 그럴 때면 천을 씌운 테이블이 줄줄이 깔리고 하키나 축구 유니폼을 입은 운동선수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오붓한 데이트는 완전히 물 건너간다. 리다는 ‘어차피 여기서 섹스를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너보다 몸 좋은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게 싫은 거지?’라고 나를 놀려댔지만 사실 본인이야말로 사람 많은 걸 질색해서 2층에 올라올 때마다 케이터링 테이블이 깔려 있는지 아닌지부터 확인하곤 했었다.

 

 

 

 

 

 

 

 

 

..

 

 

 

 

 

 

맨 위 사진이 바로 그 2층 카페인데 아쉽게도 97년 사진은 아니고 2006년에 찍은 것이다. 쥬인과 같이 차 마시면서. 그래서 조금 나온 우리 모습은 블러 처리해서 실루엣만 보인다. 바로 위의 황량한 잿빛 건물 사진은 역시 2006년에 찍었던 호텔 후면 풍경이다. 역시 삭막해보인다. 1980년 즈음 개소한 호텔인데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큰 호텔임. 뭐랄까, 이 건물은 지나갈 때마다 '소련 느낌!' 이라고 혼자 생각하곤 했다. 97년에 찍어놓은 사진들은 아쉽게도 없다. 그땐 디카가 아니라 필카를 썼기 때문에 안 그래도 아까운 필름을 사람 찍기도 모자라서 이런 건물이나 배경 찍을 겨를이 없었음 ㅋㅋ 그나마도 내가 찍은 예전 버전으로 올려본다만, 97년엔 위 사진의 유리건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나중에 증축한 것 같다.

 

 

그리고 맨 위의 2층 카페도 2006년 풍경이고 97년엔 저렇게 아늑하지는 않았다. 사진처럼 잎차를 우려주지도 않아서 당시엔 홍차 시키면 립톤 비스무레한 티백 담가줬다(그러니까 호텔이라도 가격이 별로 안 비쌌던 것 같음) 하지만 게냐와 리다에겐 오아시스였고 사실 저 당시 나와 쥬인에게도 그랬다. 쥬인과 나도 저 카페에 이따금 갔었다. 호텔치곤 카페의 커피와 차 값이 그렇게 비싸지 않았고 기숙사에서 가까운 곳이었으니까. 

 

 

게냐와 리다가 얘기하는 싸구려 칩시는 실은 나랑 쥬인이 가게에서 사가곤 했던 과자였는데 그때도 지금도 이름은 모른다(아마 이름이 안 붙어 있었던 것 같다) 쥬인과 나는 에스트렐라 감자칩을 좋아했지만 그것이 비싸기도 했고 저렇게 카페에 가져가기엔 너무 봉지가 커서 눈에 잘 띄니 어려웠다. 어느날 근처 가게에서 저 과자를 발견하고는 호텔 카페에 갈 때 종종 가져가서 먹었다. 싸구려 칩시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우리의 추억에서 가져왔다. 칩시(чипсы)는 chips의 러시아어 표기이다. 그리고 트윅스와 피크닉에 대한 이야기도 쥬인과 나의 기억에서 가져왔다. 그러니 이 글을 쓰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나의 과거와 기억들을 거슬러올라가 새롭게 재구성하고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주인공이 겪는 실질적인 이야기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지만. 

 

 

 

 

 

 

 

97년 당시와 비교했을 때 전혀 변하지 않은 풍경. 이 호텔에는 이렇게 커다란 전광판이 붙어 있고 시간과 기온이 번갈아가며 표시되곤 했다. 그래서 쥬인과 나는 학교 갈 때 아침 버스를 타고 호텔 앞을 지나칠 때면 눈을 크게 뜨고 기온을 확인하곤 했다. 뉴스에서 나오는 기온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근데 체감온도는 항상 이 전광판에 나오는 온도보다 몇도는 낮게 느껴졌다. 이 동네가 바닷가에 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동네 갔던 것도 거의 5년 쯤 전인데 그때도 저 전광판은 여전히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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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