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금요일 밤 : 시간 쪼개서 투표하고 옴, 역시 바빴던 하루, 엘리트와 트로피, 표피적 이해와 위선 사이 fragments2022. 3. 4. 22:42
점심시간에 사전투표를 하고 왔다. 예전의 사전투표들을 생각하며 갔는데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주민센터 훨씬 바깥의 상가 앞까지 줄이 늘어서 있었다. 코로나 확산이 너무 무서운 추세로 증가하고 있어 대선 당일은 위험할 것 같아 오늘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간 거였는데 정말 사람이 많았고 연로한 분들도 많이 계셨다. 투표하고 나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재택근무일이었다. 역시 매우 바빴다. 아침부터 빡세게 일했다. 10시 반부터 또 줌회의를 했는데 원래 안건을 마친 후에 2차, 3차 회의를 이어서 했다. 그러느라 오늘도 점심시간이 한시간이나 밀렸다. 엄청 배가 고파졌다 ㅠㅠ 마지막엔 윗분이 나에게 따로 논의할 게 있다고 하여 둘만 남아 회의를 했는데 이게 좀 답답했다.
둘이 남아서 한 회의에 대해. 애초 이 회의는 윗분이 겉으로는 '토끼님의 의견을 좀 들읍시다' 하고 시작했지만 실은 어제 이분과 우리 실무기획자와의 의견이 맞지 않아 빡쳐서 나에게 역성을 들어달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실무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상황이었다.
윗분과 나 사이에는 다양성과 서브컬처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이 주제는 올해 우리 부서 사업과 관계된 내용이다. 윗분이 본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오픈 마인드가 아니고 고루한 측면이 있어 실무자가 기획해 온 프로그램에 대해 정말 중요한 부분들을 다 놓쳐버리고는 우리는 발 빼야 한다고 반대하고 계셨다. 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분이 그 프로그램을 하지 말자고 하면서 대는 이유들이 '우리가 기획주체로 100% 들어가지 않기 때문', '우리 사업과 맥락이 안맞음' 등이었는데 사실 그건 이전에 했던 다른 사업들과 비교했을 때 일관성이 없었다. 예전 사업들에서는(주제는 다르지만 카테고리는 같은 사업들이다) 지금 이 프로그램보다 더 맥락이 약하더라도 범위 안으로 끌어들여 진행을 했고 결과도 좋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윗분이 그쪽 문화와 커뮤니티, 기획의도 등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그 사실은 결코 인정하지 않고 실무자의 기획력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실상은 이분의 보수적 마인드 때문이다.
보수적인 것까지는 좋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최종책임자의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배경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사적인 가치관이나 취향 등과 업무 영역은 엄격히 분리하고 작금의 상황에서 이러이러한 일을 추진할 경우 현실적 리스크가 발생하지 않는지 여부를 따져서 판단 기준으로 삼으니까. 차라리 그런 쪽으로 논의를 가져간다면 나도 별로 기분 상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일은 일이니까. 그러나 이분이 자기가 그렇지 않다고, 자기는 아주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이(심지어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것이) 너무 짜증이 났다. 그 부분을 조금이라도 지적하면 자기는 아주 오픈되어 있고 소위 정치적으로 공정하다면서 과민반응을 보였다.
이분이 항상 다양성과 서브컬처, 젠더와 논바이너리에 대해 표피적 엘리트주의로 접근하고 때로 그 문제들을 대상화하고 일종의 상징적 트로피와 가십처럼 다루려는 경향이 있어 나는 항상 그런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차례 그런 태도의 위험성에 대해 얘기한 적도 있지만 이분은 전혀 이해를 못하셨다. 막상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당연히 열린 마음이고 그런 것들을 지지하는 사람이야. 내가 반대하는 건 다른 이유야' 라고 하시는데 '솔직히 그거 열린 마음 아니거든요, 피상적으로 그러시는 거거든요, 소위 강남좌파 비슷한 태도에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말해도 안 통해서.
'사실 당신은 그쪽에 대해 이해가 잘 안되는 거고 조금이라도 위험해질까봐, 혹은 체면이 상할까봐 그러는 거죠. 본인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열린 마음도 아니고 그런 다양성과 서브컬처에 대한 이해도도 없거든요' 라고 대놓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해결이 안되고(심지어 윗분이므로 이렇게 대놓고 비판하기도 어렵다. 돌려가며 얘기하긴 했지만 이분은 자기 역성 들어달라고 나를 남겨서 회의를 계속한 상황이라 내가 반대의견을 피력하자 이미 빈정 상하기 시작하시는 게 너무 눈에 보였다), 어차피 이분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상황이라 공연히 말싸움을 계속하면 이분의 히스테리만 불러일으키게 되니 '무슨 뜻으로 그러시는지는 알겠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실무자 의견에 동의합니다. 다만 그렇게 판단하신다면 그간의 과정에서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정도로만 얘기하고 그만두었다. 본인의 이해도가 부족하고 정치/문화적으로 사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딱 보기 좋을만큼의 엘리트적 보여주기식 관용을 내세우고 있을 뿐 실은 보수적이고 이해도 역시 떨어진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 얘기 하느라 회의가 길어져서 점심 시간 한시간이 미뤄진 것이다. 나중에 실무자와는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정도의 절충안을 만들어주었다. (절충안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윗분의 의견을 거의 반영한 것이다. 전체 사업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프로그램은 아니니 이것으로 공연히 계속 감정싸움을 하면 나머지 사업들 추진에 계속 애로사항을 겪고 이분의 히스테리를 받아내야 하니 전략적으로 행동하기로 한 것이다 ㅠㅠ)
가끔은 '차라리 아예 모르는 사람이 덜 위선적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오늘 이 문제와는 다른 얘기지만 비슷한 결로 가끔은 '차라리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주제에 온갖 맨스플레인을 늘어놓는 자칭 진보 위선자(실생활에서 많이 겪었음)보다는 아예 마초가 낫다'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는 뭔가를 모르는 사람보다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거나 위선을 떠는 사람을 견디는 게 더 어렵다. 모르는 건 용서가 돼도 위선은 용서가 안된다. 이러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고 찝찝한 마음도 오래 간다.
이렇게 오전에 심신의 기운이 다 빠진 후, 뒤늦게 대충 빨리 점심을 먹은 후 남은 시간을 쪼개어 사전투표를 하고 왔고 다시 일을 했다. 바쁘게 일하다 하루가 저물었다. 지쳐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거품목욕을 했다.
이제 주말이라 다행이다. 내일 늦게까지 푹 잘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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