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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해당되는 글 451

  1. 2017.10.05 수도원, 비 주룩주룩, 돌사자의 대화 2
  2. 2017.10.05 10.4 수요일 밤 : 장소특정적 향기들, Le Parc(프렐조카주) 짧은 메모, 날씨 엉엉 2
  3. 2017.10.04 부셰에서 오믈렛과 크루아상 아점 먹고있음 6
  4. 2017.10.04 10.3 화요일 밤 : 꿈, 마린스키 신관, 야로슬라브나(바르나바 안무) 짧은 메모, 이상한 데서 예리한 료샤 4
  5. 2017.10.03 본치 카페
  6. 2017.10.03 요런 날씨임 + 꿈 4
  7. 2017.10.03 행복은 이런 것, 보글보글 크리스마스 스웨터, 내가 졌다 4
  8. 2017.10.03 10.2 월요일 밤 : 추워, 밖에는 조금만 있었음, 카페, 료샤 재회 8
  9. 2017.10.02 차 마시며 친구 기다리고 있음 2
  10. 2017.10.02 나가려는 중 + 나와서(고스찌) 3
  11. 2017.10.02 잘 도착 - 사랑하는 도시 8
  12. 2017.09.23 동토의 땅, 겨울왕국 러시아 2
  13. 2017.09.22 축축하고 쓸쓸한 12월 오후 페테르부르크 10
  14. 2017.09.20 안녕 물과 돌의 도시, 빛과 얼음의 도시 4
  15. 2017.09.19 모르스 8
  16. 2017.09.08 트로이라는 남자,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를 불러내는 행위, 과정의 메모 22
  17. 2017.09.07 모이카 운하 따라 겨울 산책 8
  18. 2017.09.06 겨울날 늦은 오후의 페테르부르크 산책 6
  19. 2017.09.02 5년 후의 라라, 프랑스 단파 라디오, 나무 십자가 22
  20. 2017.09.01 얼음과 빛과 돌로 빚어진 도시, 겨울 페테르부르크 8
  21. 2017.08.29 수프 비노, 작년 6월 2
  22. 2017.08.12 유배된 미샤와 감시요원 베르닌의 첫 대면 16
  23. 2017.08.09 12월 페테르부르크 사진으로 더위 퇴치! 2
  24. 2017.08.02 추운 날 사진으로 더위 쫓는 중 6
  25. 2017.07.13 한겨울, 페테르부르크 외곽 동네를 걷는다 8





으아앙 비가 하루종일 주룩주룩주룩 온다 ㅠㅠ 그런데 나는 오늘 징게르 카페에도 가고 수도원에도 가고 초도 켜고 도스토예프스키 무덤도 다시 가고 블라지미르 대로의 랜드 수퍼마켓에도 다녀왔다. 엄청난 하루... 내내 비가 오는 와중에 ㅠㅠ



비오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수도원 교회 들어가는 분들. 나는 나오던 중.





이건 도스토예프스키랑 차이코프스키에게 인사하러 들렀던 묘지에 있는 돌사자 두 마리.



사자 1 : 정말 지긋지긋하게 비 많이 와...

사자 2 : 왜케 변함이 없을까 ㅠㅠ 매년 이맘때면 날씨 이모양이야...

사자 1 : 저 토끼는 왜 하필이면 딱 10월초에 왔을까? 

사자 2 : 그러게, 세상 물정 모르는 토끼인가봐 쯔쯧...



:
Posted by liontamer





오늘도 추웠고... 비가 왔다. 엉엉... 보통 아무리 겨울에 와도 햇빛 쨍 하는 날이 며칠 있었는데 이번엔 아주 제대로 걸렸다. 하긴 올 때도 10월이 제일 날씨 안 좋을 때니까 잘못하면 정말 비만 오겠다 싶긴 했었지.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ㅠㅠ



오늘까지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다. 아침에 진통제도 먹었는데 이상하게 효과가 없었다. 나는 부스코판보다 타이레놀이 더 잘 듣는 편인 것 같다 ㅠㅠ 두통까지 같이 겹쳐서 그런가보다. 결국 오후에 타이레놀을 두알 주워먹었다.



근처 빵집인 부셰에 가서 연어 오믈렛과 크루아상으로 아점을 먹었다. 무척 맛있었다. 올때마다 들르는 곳이다. 고스찌 바로 근처에 있고. 여기는 특히 주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료샤도 여기 빵을 좋아한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슬퍼졌다. 수도원 가고 싶었지만 계속 날씨가 안 좋고 빗방울까지 흩뿌리니 방도가 없다. 근처 서점에 가서 귀여운 엽서와 자석 따위를 좀 사고, 쭉 걸어서 돔 끄니기에 갔다. 항상 들르는 극장 서적 코너에 가니 누레예프에 대한 새 전기가 나와 있어서 그걸 샀다. 누레예프 전기야 여러권 읽었고 또 워낙 많이 나왔지만 러시아 사람이 쓴 거라서 우파랑 레닌그라드 시절에 대한 좀더 자세한 얘기가 있나 싶어서.









힘들고 머리가 너무 아파서 조금 더 걸어가 그랜드 호텔 유럽에 갔다. 문지기 아저씨 계시면 인사해야지 했는데 그분이 안 계셨다. 쉬는 날인가... 메조닌 카페에 갔다. 나는 이 카페보다는 아스토리야의 로툰다를 더 좋아하지만(차도 그렇고 디저트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아스토리야 쪽이 더 좋다) 그래도 소파가 편하다.



아스토리야와 그랜드 호텔 유럽은 둘다 특유의 냄새가 있다. 전자는 욕실 어메니티에서 나는 화이트 머스크 향이다. 일반적인 화이트 머스크보다 좀더 부드럽고 은은해서 혹시 페라가모에서 이 향수를 시판하고 있다면 사고 싶다. (여기는 페라가모 어메니티를 쓴다)



그랜드 호텔 유럽의 향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호텔에서 조향해서 방향제와 향수로 쓰고 있는 '그랜드 호텔 유럽' 향이다. 이건 조금 아저씨 스킨 향이 나는데 나쁘지 않다. 여기서 묵으면 체크아웃할때 10밀리짜리 미니어처를 선물해주는데 화정 집 화장실에 놔뒀다. 두번째 향은 역시 욕실 어메니티에서 나는 향인데 이건 아스토리야보다 조금 더 비누 냄새와 시트러스 냄새가 섞여 있다. 여기서 쓰는 어메니티는 elemis이다. (철자가 맞는지 갑자기 헷갈리네) 유럽 호텔에 마지막으로 묵은 게 벌써 2년도 더 되긴 했지만(요즘은 좀처럼 저렴하게 나오지를 않아서ㅠㅠ) 그래도 페테르부르크 올때마다 여기 들르곤 한다. 카페나 바에 가기도 하고 급할때 로비 화장실에도 간다(ㅋㅋ) 로비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핸드로션을 바르면 딱 그 향기가 난다. 비누와 시트러스가 섞인 냄새. 그러면 갑자기 '아, 여기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아스토리야의 화이트 머스크향이 더 좋긴 하지만 그랜드 호텔 유럽의 향기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메조닌 카페에 가서 다즐링과 에클레어를 시켜놓고 늘어져 있었다. 너무 피곤했다. 스케치를 몇장 그렸다. 누레예프 책을 조금 훑어보다가 좀 졸았다. 나중에 료샤가 왔다. 오자마자 내가 반쪽밖에 안 먹었던 에클레어를 한입에 홀랑 해치웠다 -_- 그리고는 빨리 볶음너구리와 맥심을 또 내놓으라고 난리 ㅠㅠ 그래서 호텔로 돌아왔다. (볶음너구리 네개 가져왔는데 그때 하나만 끓여준 후 나머지를 쥐어주지 않았었다 ㅋㅋ)



료샤에겐 볶음너구리 끓여주고 나는 조그만 유부우동 컵라면을 먹었다. 맥심을 타 먹이고 나는 수퍼에서 산 모르스를 마셨다. 그리고 극장에 갔다. 오늘도 마린스키 신관이었다.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Le Parc를 보았다. 무대에서 꼭 한번 보고프던 작품이었다. 영상으로만 봤기 때문이다. 원체 마지막 듀엣이 유명한 터라 전체 작품은 몰라도 '아 그 공중키스' 하며 끄덕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료샤는 어제의 악몽(야로슬라브나 -심지어 3막, 2시간 40분!- 보다가 꿈나라로...)에 괴로워하며 '나 오늘은 보지 말까?' 라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은 너도 맘에 들 거야. 야하거든' 이라고 말해주자 료샤가 눈을 반짝이며 '그래?' 하고 좋아했다. 사내놈 -_-



티켓을 끊고 나서 한참 후에야 배역이 공지되었다. 오늘 주역은 티무르 아스케로프와 크리스티나 샤프란이었다. 티무르 아스케로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무용수라 툴툴댔다. 슈클랴로프님이야 뮌헨에 가 있지만... 세르게예프가 춰주길 바랬다고... 아니면 귀여운 티모페예프라도... 그 다음날 배역은 올레샤 노비코바와 잰더 패리쉬였다. 배역 안 나왔을 때 원래 오늘 거랑 내일 것 중 뭐 끊을까 하다가 앞에 하는 쪽이 더 괜찮은 배역이겠지 싶어서 끊었던 건데...



공지된 배역을 보고 정말로 진지하게 다음날 거로 바꿀까 했었는데 잘 생각해보니 커플 케미스트리는 아스케로프 샤프란 쪽이 나을 것 같고, 게다가 나는 티무르 아스케로프가 프린시펄 승급했을때도 기가 막혔지만 잰더 패리쉬는 더더욱 그랬으므로... 그래, 욕망이 들끓는 작품이라면 뻣뻣한 나무토막 패리쉬보단 차라리 느끼한 티무르 아스케로프가 낫다 싶었다. 미안해요 노비코바.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난 슈클랴로프님과 노비코바의 이 작품 듀엣 영상을 보았을때도 큰 감흥이 없었고 '둘이 엄청 노력한다' 는 생각만 들었던 터라... 나에게 노비코바는 별로 섹시한 느낌이 들지가 않아서 그냥 표 안 바꿈. (나 노비코바 무척 좋아하는데 ㅠㅠ)



첨엔 배역 발표 전이라 혹시나 세르게예프를 비롯해 볼만한 무용수가 나오려나 싶어 앞줄 끊었었는데... 하여튼 그래서 앞줄에서 봤다. 이번에 끊은 발레 표들 중 젤 앞줄이다. 슈클랴로프님이 가버려서 이제 악착같이 앞줄 끊는 짓은 별로 안 하고 있음 ㅠㅠ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영상보다는 확실히 무대가 낫다. 하지만 나를 확 사로잡는 매력은 덜했다. 그리고 이건 딱 프랑스 안무가에게서 나올법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작품이 나왔을때인 90년대에 봤다면 확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90년대에 나왔던 육체와 욕망을 다룬 작품들에서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에이즈 시대에 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나는 그 시기와 그 주제에 많이 끌렸었고 사실 미샤를 처음으로 떠올리고 글을 구상했던 때 그는 바로 그런 시기에 발레단을 운영하고 안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녀석은 80년대 초의 시골 가브릴로프에 갇혀 있어 ㅠㅠ) 하여튼 그 시기에 나온 작품들 중 내가 많이 좋아하는 건 의외로 나초 두아토의 Remanso이다.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소품이다. (심지어 내가 두아토 안무작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Le Parc는 물론 다르다. 그리고 뛰어난 작품이다. 시선을 빼앗기도 하거니와 유머도 넘친다. 마지막의 에로틱한 듀엣은 무대로 보니 좋았다. 걱정했던 티무르 아스케로프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잰더 패리쉬보다는 더 나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샤프란은 너무 기다란 거 빼고는 역할에 어울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다 보고 나니 '슈클랴로프나 비슈뇨바가 추지 않는 한 다시 보지는 않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작품 보는 내내 남성적 시선이 좀 불편하게 느껴졌다. 욕망에 눈뜨는 여성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체적으로 욕망을 탐험하게 된다는 주제를 표방하고 있긴 한다만 전반적인 안무도 그렇고 배경도 그렇고 어딘가 내내 피상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란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영상을 볼 때보다 무대를 보니 더 그런 느낌이었다.



료샤는 정말 안 졸았다. 이게 막간 휴식 없이 1시간 40분 지속된다는 사실에 그는 고뇌하였고 1장에서는 좀 지루해 했으나 본격적으로 남녀들이 유혹을 펼치는 2장부터는 재밌게 보았다. 마지막의 에로틱 듀엣에 대해선 살짝 설명만 해주었는데 그걸 보기 위해 그는 열심히 기다렸다(뭐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렇고) 유명한 공중키스(여자가 남자의 목에 두 팔을 감은 채 격렬하게 입을 맞추고 둘은 빙글빙글 풍차처럼 돈다. 이때 남자 무용수의 손은 여자를 받쳐주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목에 팔을 감고 오로지 키스만으로 허공에 수평으로 뜬 채 빙그르르 돈다. 이거 볼때마다 '남자 목이랑 허리 뿌러지겠다... 여자 복근 엄청 생기겠다' 이런 생각이 든다 ㅋㅋ



료샤도 공중키스 씬에서 입을 벌리고 보더니 끝나고 나오면서 '우와 저 남자 좀 짱이다. 역시 키도 있고 덩치도 있어서 그런지 네가 좋아하는 얼굴만 예쁜 슈클랴로프 따위보다 훨씬 힘도 세고 남자답구나. 그래서 여자를 목에 매달고 막 도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발끈해서 나는 '뭐야! 슈클랴로프도 저거 췄어! 똑같은 거 췄다고! 목에 매달고 돌았다고!' 하고 외쳐주었다. 료샤는 '쳇... 걔가 추면 이입 안될거 같음' 이런다. 근데... 사실 이게 료샤 말이 좀 맞는게... 나는 슈클랴로프가 이 바람둥이 유혹자를 추는 게 정말 이입이 안됐다. 아무리 바람둥이 연기를 해도 누나들에게 휘둘리는 청순한 로미오처럼 보여서... ㅋㅋㅋ



커튼콜 사진 두어 장. 몇장 안 찍었다. 앞줄 오른쪽 사이드 자리였다. 그래서 무대가 비스듬하게 찍혔다. 대충대충 찍어서..... 이때 료샤는 또 '거봐 슈클랴로프 아니니까 앞줄인데도 사진 안 찍네' 하고 놀렸음. 야! 그것이 팬심이란 말이야!!! 바보멍충이!!!! (얼마나 놀림받을지 뻔히 알기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볼뽀뽀받은 얘긴 절대 안 해주고 있음 ㅋㅋ)










...



날씨가 안 좋아서 너무 슬프다고 하자 료샤가 '이런 곳에서 평생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라고 한다... '그래도 너네는 백야 있잖아 ㅠㅠ 우리는 여름 완전 수증기 찜통이야' 라고 하자 '맞아 우리는 여름 좋아' 라고 또 납득한다. 하지만 곧이어 '너네는 볶음너구리랑 맥심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잖아' 라고 함 ㅋㅋ



내일은 드디어 레냐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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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내가 좋아하는 빵집 부셰에서 연어 오믈렛이랑 크루아상, 홍차로 아점 먹고 있다. 여기는 모든 것이 맛있다.










안에 연어가 가득.



..



아깐 한적했으나 오분 후, 열두시 넘자마자 몰려드는 사람들의 줄! 빵 사러 오는 사람들에 식사하러 오는 사람들! 여기는 정말 맛있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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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시차 때문에 새벽에 제대로 깨어났고 한참 뒤척였다. 잠이 너무 안 왔다. 호르몬 주기와도 겹쳐서 그런 거였다. 진통제를 주워먹고 8시쯤 다시 잤고 10시 반쯤 깨어나 계속 누워 있었다. 아침에 새로 잠들었을 때 아주 생생하고 복잡하고 또 감정적으로 격렬한 꿈을 꾸었다. 심지어 동료가 안 좋은 일을 당하는 꿈에 자신의 흐느낌 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꿈에 나온 회사 동료가 걱정되어 톡까지 보냈다. 꿈자리 안 좋으니 조심하라고.... 울 엄마는 내가 이런 말 하면 할머니 같이 군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이따금 꿈이 맞을 때가 있단 말이야 ㅠㅠ



바깥 날씨는 아주 꾸무룩했다. 어제까진 예보에서 분명 오늘 기온은 낮아도 구름은 약하고 해가 난다 해서 수도원에 갈까 했었지만 그날이 시작되어 몸 상태도 나쁘고 또 원체 흐려서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았기에(저녁에 비온다고 예보는 되어 있었다) 다 포기했다. 1시 넘어서 기어나갔다.





(이 꾸무룩한 날씨 ㅠㅠ)

(맨 위 오페라 글라스 사진이랑 왜이리 느낌이 다르냐면... 그 사진은 dslr로 찍은 것이기 때문...

극장 갈때만 카메라 들고 갔다. 어제랑 오늘 몸이 힘들어서 그냥 폰으로만 찍었더니 찍은 사진도 별로 없고 화질도 그냥저냥...)




...




호텔에서 10분 거리의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본치 카페에 가보았다. 여기는 페테르부르크 알파벳이라는 일러스트 북을 그린 소피야 콜로프스카야가 멋지게 그려놓고 추천했던 곳이다. 예전에 간판은 자주 봤는데 들어가보진 않았었다. 내가 러시아에서 기대하는 카페와는 다르게 너무 현대적이라서 ㅋㅋ 점원은 너무 시크해서 친절한 느낌이 없었지만 카페 자체는 좋았고 특히 창가에 앉아 글쓰기가 편한 곳이라 왜 콜로프스카야가 여기를 좋아하는지 알것 같았다. 앉아서 아침에 꾼 꿈 이야기를 약 5장 정도 자세히 적었다. 나중에 단편 같은 걸로 쓸 수 있을만큼 상징과 글감이 넘쳐나는 꿈이었다.



본치 카페에서 스메타나 곁들인 아주 얇은 블린 석장과 생강차를 먹었다. 탄수화물을 좀 먹었더니 정신이 좀 들었다.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도 서양배로 때웠다... 카페에서 나와 건너편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일본라멘집인 야루멘에 갔는데 가라아게 카레 시켰다가 너무 맛없어서 피보고(차라리 오뚜기 3분 카레가 낫겠어!!!) 계산서 갖다달라 했는데도 너무 한나절이라 결국 나가면서 카운터에서 직접 계산하고 팁은 안 줬다.



방에 돌아와 좀 쉬면서 디카페인 차 우려서 도착했던 날 호텔에서 준 초콜릿 상자를 열어 두 알 곁들여 먹었다. 그리고는 화장을 좀 고치고 6시 즈음 호텔을 나섰다.




...






(다시 와서 반가운 마린스키 신관의 깃털 막과 스와롭스키 크리스탈 장식들)




오늘은 마린스키 신관에서 블라지미르 바르나바가 여름 백야축제 개막작으로 안무했던 3막 발레인 '야로슬라브나, 일식'을 끊어두었다. 바르나바는 슈클랴로프랑 스메칼로프의 절친인 젊은 안무가인데 모던 발레를 안무한다. 예전에 이 사람 단품을 몇개 봤고 최근 호평을 들었던 '글리나'(clay)도 무대에서 봤는데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볼까말까 하다가 이번 여행 기간엔 발레 레퍼토리 체가 딱히 풍성하지 않아서 그냥 보기로 했다. (흑, 도착 전날 슈클랴로프님이 노비코바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췄지 엉엉... 진작 말해줬으면 휴가를 앞당겼을 거 아니니 엉엉)



하여튼 이 공연은 혼자 볼 생각이었는데 내가 오늘이랑 내일 다 발레 본다니까 료샤가 자기도 따라왔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이 안무가는 현대발레 안무가이다. 그나마도 네가 (나 덕분에 알게 된) 백조의 호수나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 같은 발레와는 다를 것이다. 재미없고 뭔 말인지 모를 수도 있다... 등등... 그러나 료샤는 '이고리 원정기 얘기잖아! 그거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배운단 말이야! 너보단 내가 더 잘 알아!' 하면서 잘난척하며 따라온 것이다. 아아... 나는 분명 경고했어!



료샤는 1막 내내 졸았고 2막에선 좀 좋아했고(왜냐면 중간에 약간 야할듯 말듯한 장면이 나와서) 3막에선 또 졸았다 ㅠㅠ 나도 1막은 좀 지루했고 2막이 제일 재미있었고 3막은 그냥 그랬다. 주인공인 이고리 대공과 그의 아내 야로슬라브나가 나오는 장면들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해서.... 역설적으로 2막은 얘들보다는 적군들의 샤먼 의식과 괴기스러운 마법의 초원이 나와서 더 볼만했음.



이 발레는 70년대 소련에서 안무된 작품을 바탕으로 바르나바가 재안무한 것이다. 내용은 러시아 역사에서 유명한 이고리 대공의 원정기와 그의 아내 야로슬라브나의 비가를 재구성한 것인데 영웅 서사시라기보다는 인간(특히 한 남성) 내부의 야망과 정복욕, 그리고 헛된 파괴와 비극을 다루고 있다. 보면 딱 러시아 현대 발레 느낌이 난다. 보리스 티셴코의 음악도 딱 소련 작곡가 스타일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별로 내 취향이 아니었음. 보고 있자니 음악과 무대 미술에 안무가 먹히는 느낌이었다.



바르나바는 물론 열심히 했고 내가 좋아하는 스메칼로프가 주역인 이고리 대공을 춰서 근사해보이긴 했지만 작품 자체는 탁월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줄곧 어우러졌고 장엄하고 웅장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자아냈지만 가장 중요한 춤과 주인공들의 드라마가 약해서 아쉬웠다. 바르나바는 주인공 내면의 투쟁과 거대한 비극을 다루고 싶었다고 인터뷰했지만 내게 그건 피상적으로 남아서 아쉬웠다. 팔다리 길쭉길쭉하고 키크고 체격 좋은 스메칼로프는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춤도 그렇고 이고리 대공 역에 딱 맞았고 잘 추기도 했지만 슬프게도 그게 다였다. 아무리 무용수가 뛰어나도 작품 자체가 그 정도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도 스메칼로프가 나올때는 군대들도 나오고 전투도 나와서 좀 나았는데 야로슬라브나가 나타나 느릿느릿하게 온몸을 꼬고 비틀며 독백하고 고통에 몸부림칠때면 '언제 들어가니 ㅠㅠ'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니 작품 타이틀로 등장한 배역이 이래버리면 이미 낭패...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 취향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사랑의 전설에서 메흐메네 바누가 몸을 꼬며 고뇌하는 장면도 안 좋아했음 ㅋㅋ 그러나 이 작품에 비하면 그리고로비치의 메흐메네 바누는 엄청나게 탁월하다!)







(그래도 커튼콜 사진 두 장. 이번엔 맨앞줄이 아니고 3층 앞줄을 끊어서 오케스트라 핏 앞까지 뛰어나가지 않았음.

사진도 대충... 스메칼로프는 붉은 칠 검댕 칠을 해서 얼굴도 제대로 안 나옴 ㅠㅠ)



...



하여튼 나는 안 졸았고 그래도 열심히 보았다. 료샤는 실컷 졸고 나서는 나에게 '너 뭔말인지나 알아들었냐? 노어로 계속 노래부르던데 그거 다 이고리 원정기 얘기인데!' 하고 오히려 나에게 쿠사리를 준다.



'내용이야 대충 다 알아들었다, 나도 대학 시절 이고리 원정기 노어로 읽었다'고 하자 그는 '헉 그거 옛날 노어로 되어 있는데 어케 읽었어?' 하고 깜딱 놀랐다. 전체는 번역본으로 읽었고 노어로는 발췌 텍스트만 읽고 시험봤는데 머리 쥐나는 줄 알았고 수업시간엔 졸았고 그때도 야로슬라브나의 비가 읽으며 '으악 머리야' 했다고 말해주자 료샤는 킥킥 웃었다. 졸았다고 쿠사리들을까봐 먼저 공격하는 이놈...



나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료샤가 쫓아온 것에 감사했다(차를 가져왔으니까 ㅋㅋ) 차 안에서 료샤는 '오늘 나온 놈도 좋아하지 않았어? 얼굴 보니 전에 너랑 딴거 볼때 나왔던 놈 같아. 그때도 네가 사진 찍지 않았어?' 하고 물었다.



나 : 응, 유리 스메칼로프도 좋아해. 되게 옛날에 에이프만 발레단 무용수로 있으면서 내한공연했을 때부터 좋아했어. 


료샤 : 흥, 그래도 그 슈클랴로프 놈보다는 안 좋아하지.


나 : 그건 그렇지만... 왜!


료샤 : 그러니까 1야루스(3층)를 끊었지. 슈클랴로프 녀석이 나왔음 이렇게 지루한 발레라도 분명 맨앞줄 가운데 끊어서 가산 탕진했겠지!


나 : 우와 예리하다!!!!



내가 그날 때문에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진통제를 털어넣고 있자니 료샤가 혀를 찼다. 도대체 몸이 괜찮을 때는 언제냐고 묻는다 -_- 야! 우리 나라는 10월 초에 5도까지 내려가진 않는단 말이다 ㅠㅠ 그리고 사내놈이 뭘 알아! 네가 일생에 한번이라도 여자처럼 피를 흘려보았느냐!!!! 흑흑...



하여튼 그래서 료샤는 나를 데려다주고는 자라고 하고 가버렸다. 맥심 한 잔쯤은 타줄 용의가 있었는데 나보고 얼굴이 너무 창백하다고 하며 자라고 한다. 그럼 피가 줄줄 나오는데 얼굴에 홍조가 돌겠냐 ㅠㅠ 나는 사실 저녁을 안 먹어서 배고파서 이놈이 괜찮다고 하면 뭐라도 테이크아웃해서 들어오려 했는데... 이놈이 나보고 아파보인다고 매우 걱정을 하며 '어서 자야 한다'고 난리를 쳐서 착한 친구답게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방에 와서 배고파서 과일접시에 남아 있던 파란 사과를 반쪽 먹었다. 무지 시고 맛없어 흐흑.. 그래서 미니 초콜릿도 한개 먹었다.



으앙.... 나 아직 청동기사상도, 푸쉬킨 동상도 안 보러 갔다. 뻬쩨르 와서 이런 건 처음이다... 흑, 제발 내일은 날씨가 좋았으면... 그리고 아픈 것도 가셨으면 ㅠㅠ

(그런데 찻잔은 샀다... 이게 뭐냐 ㅋㅋ)



..



모두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보름달도 보실 수 있길!

(여기 날씨를 보니 올해도 난 보름달 보긴 틀렸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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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3. 22:42

본치 카페 2017-19 petersburg2017. 10. 3. 22:42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본치 카페에서 매우 늦은 아점을 먹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춥다. 기온은 살짝 더 높은 듯한데 내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습한 바람도 많이 불고 패딩 걸치고 나왔는데도 꽤 추웠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려고 수제 생강차 시킴. 생강, 사과즙, 꿀, 레몬 등이 들어가 있는데 꽤 맛있고 몸이 데워지는 느낌이다.





입맛도 없고 들어오면서 근처 일본라멘집에서 밥 먹을 생각이었기에 그냥 블린 시켰다. 스메타나 곁들인 걸로. 맛있었다. 블린이 뜨겁지 않은 게 옥의 티였다.





본치는 살짝 우리 나라나 다른 나라 카페 같다. 널찍하고 밝고 나무로 되어 있고 통유리가 있다. 창밖을 바라보며 글쓰기 괜찮은 곳인데 와이파이를 잡으려면 러시아 전화번호가 있어야 해서 그것만 아쉽다.



여기 앉아서 아침에 꾼 꿈 노트를 자세히 적었다.






역시 러시아 카페답게 바깥은 환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적당히 어두컴컴한 홀이 있다. 나는 환한 쪽을 좋아하므로 창가에 앉았다. 저 안쪽은 친구들이랑 같이 오면 들어가 있기 좋을 듯하다.



...




여기서 나와서 자주 들르던 근처의 야루멘에 갔다. 일본라멘집인데 오늘 첨 카레 시켰다가 완전 피봤다. 카레 진짜 맛없고 밥도 막 덩어리로 나옴. 너무해.... 그래도 텐동이나 라멘은 괜찮아서 여기 동양인들 엄청 우글거리는 곳인디 -_-




대충 밥 먹은 후 호텔 방으로 돌아와 좀 쉬고 있다. 저녁에 공연 보러 가야 한다. 쉬다가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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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3. 17:58

요런 날씨임 + 꿈 2017-19 petersburg2017. 10. 3. 17:58







어제의 날씨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



창밖을 보니 오늘도 만만치 않을 듯.



아침에 두어시간 깨 있다 다시 두시간 정도 잤는데 꿈을 복잡하게 꾸었다. 무한증식하는 양수괴물, 새들, 무용수, 인공지능, 날아오르기, 벽. 찢어냄. 장면전환. 노동탄압. 조직의 횡포. 체포되어 공중에서 바다로 투하되는 처형을 당하는 노조 주요인물과 나. 날아오를 수 있는 나. 물에서 끌어내려고 갖은 힘을 다했지만 실패해서 죽어간 사람들. 그리고 나는 정말 소리내 흐느끼다 깼다.



꿈 노트를 자세히 적고 나중에 글로 써봐야겠다...



아파서 진통제 두알 먹었음. 조금만 더 누워 있다 일어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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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도시 :)



아스토리아 로툰다 카페.






아아 욕조 있는 집으로 다시 이사가고프다 ㅠㅠ






(원래 내가 좋아하는 장미향 배스밤을 사려 했는데 점원이 이거 신제품이라고 꼬셔서 사보았음)







(녹으면 이렇게... 핑크색과 연한 붉은빛 마블링이... 확실히 이런 건 파란색 계열이 예쁘긴 하다만 ㅋㅋ

이놈은 좀 클린코튼 향 비슷한 게 났다. 나쁘진 않았으나 나는 장미향 쪽이 더 좋긴 했음)





(그려놓고 보니 꼭 가운데 손가락 같아 ㅠㅠ 아니에요 세어보세요 검지에요 ㅋㅋ)




흐흑 료샤에겐 말로는(특히 러시아어로는) 이길 수 없어 ㅠㅠ



그치만 그 수염 에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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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의 이삭 광장에서 찍은 호텔 전경. 빨간 차양들만 나왔지만^^;)

 



어제 완전히 녹초가 되어 뻬쩨르 도착. 어제는 료샤가 시간이 안돼서(얘는 왜 항상 내가 오는 날이랑 출장이랑 겹치는 거야 -_-) 그냥 호텔 픽업을 요청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공항에서 호텔 가는 교통비는 아끼지 않게 됨...



어제 픽업을 나온 기사는 젊은 남자였는데 내게 러시아어 발음이 매우 좋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 얘기를 오늘 료샤에게 했더니 이 자식이 '그래 맞아 너는 발음이나 억양 자체는 괜찮아. 근데 우다레니예-강세-가 틀려. 그리고 갈수록 문법도 얼버무려!' 라고 한다 흐흑... 진실이므로 뭐라 할 수도 없음 엉엉)





호텔에 도착한 게 밤 열한시 무렵이라 씻고 어쩌고 하다가 새벽 한시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여섯시간 시차가 나니까 하루를 꼬박 샌 것이나 다름없다. 너무 피곤했다. 시차 때문이라기보다는 언제나처럼 잠든지 네시간 만에 깼다가 도로 자고 아침부터는 한두시간마다 자다깨다 반복했는데 피로가 쌓여서 자고 또 잤다. 열시 반쯤에야 억지로 일어났다. 꽤 추웠다. 다음주부터 난방을 해준다는데 잘못 걸렸어 흐흑... 춥잖아. 생각해보니 예전에 페테르부르크 기숙사에서 살때도 이맘때가 젤 추웠다. 난방 해주기 직전인데 날씨는 이미 초겨울!



조식도 포함 안되어 있고 제일 저렴하고 환불 안되는 방을 예약했다. 맨날 늦잠자고 게으름부리고 아침은 조금밖에 못먹으니 조식 놓치는 경우가 너무 많기도 하고... 그러나 이 호텔은 조식이 아주 근사하므로 살짝 아쉽다. 한번쯤 돈내고 먹어볼까 했지만 꽤 비싸고 작년 겨울에도 먹어봤으니 그러지 않기로 했다. 오늘처럼 한시가 다 되어 나섰을 때는 더더욱 조식 포함 안 시킨게 잘한 일임 ㅠㅠ



...



나왔더니 가랑비 흩뿌리고 엄청 춥고 쌀쌀하고 음습함. 긴 티셔츠에 카디건에 니트 재킷을 입고 재킷에 달린 후드까지 덮어쓰고 스카프 둘렀는데도 추웠다. 청바지 한장은 안되겠구나 ㅠㅠ 일단 도보 10분 거리의 고스찌에 갔다.




여기는 런치메뉴가 있어서 좋다. 올리비에 샐러드와 양배추 수프, 비프 스트로가노프, 녹차를 골랐다. 합쳐서 380루블! 팁까지 합쳐도 8천원! 게다가 맛도 뛰어나다. 이 동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카페라 올때마다 자주 들르는 곳이다. 료샤와 레냐도 여기를 좋아한다. 오늘은 미니 나폴레옹 케익도 디저트라고 같이 주어서 더 좋았다. 시큼한 맛이 감도는 양배추 수프도 무척 맛있고 따끈했다. 식전빵도 고소하고 맛있었다. 아아 맨날 시골에서 식판밥이랑 컵밥만 먹었지 엉엉...





훈제치킨이 들어간 올리비에 샐러드. 여기 올리비에 샐러드 무척 맛있다. 소박하면서도 느끼하지 않다.





옛날엔 안 좋아했지만 지금은 매우 좋아하게 된 양배추 수프. 시큼한 맛이 매력. 생긴건 꼭 미역국에 두부 띄워놓은 것 같다만... 저 하얀 건 스메타나(사워크림). 안에는 잘게 썬 감자도 들어있고 여기는 특이하게 삶은 달걀 반쪽도 들어있다! 발음법 표기상 '시치' 'shchi' 라고 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시이'에 가깝게 발음된다. '쉬'와 '시' 사이 어딘가에 있는 발음인데 이거 발음이 나에겐 좀 어렵다 ㅠㅠ 어떨땐 되고 어떨땐 안된다. 오늘은 그만 '쉬'라고 발음해서 점원이 '아하, 양배추 수프요?' 하고 알아맞췄다 흑...



...



밥을 먹은 후 네프스키 거리를 따라 좀 걷다가 너무 춥고 비까지 와서 그냥 물건만 좀 사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발샤야 코뉴셴나야 거리의 로모노소프 샵에 가서 찻잔 한세트랑 접시 하나를 샀다. 엄청 조금 샀구나! 하고 자가칭찬... 을 하기는 어려운게 찻잔이 쪼끔 가격대가 있었음(그래도 우리 나라 들어오는 것에 비하면...)



그리고는 항상 첫날에 하는 의식대로 네프스키에 있는 카톨릭 성당에 초 켜러 갔는데 공사 중이라 못 들어갔다 ㅠㅠ 근처의 러쉬 매장에 가서 입욕제를 산 후 버스를 타고 호텔로 되돌아왔다. (공항 면세점 붐벼서 취소했었으나 호텔 방 욕조를 보고 머리가 멍해져서 결국 사버림. 이게 뭐야 엉엉.. 면세가 더 쌌는데...)



방에 돌아와 입욕제를 풀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노곤하고 좋았다. 아아 욕조 있는 집에서 살고파라.... 화정으로 이사온 후부턴 집에 욕조가 없고... 시골의 2집도 오피스텔이라 욕조 없다 엉엉... 나는 욕조가 좋은데...



...





목욕을 한 후 호텔 로비 카페로 내려가 다즐링과 메도빅을 시켜놓고 글을 조금 썼다. 어머나, 한동안 못 쓰던 글조차 여기 오니 몇줄이라도 쓸 수가 있네 엉엉어엉엉 역시 나는 회사 때문에 글을 못 쓰고 있는 거였다... 아름다운 도시의 아름다운 카페에 앉자 글이 써진다!!! (하지만 비싸다는 것이 함정!)



(이삭 성당 앞 장미가 아직도 피어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추워져서 다 져버렸을 줄 알았는데 아직 덜 시들었다!)




글을 쓰며 료샤를 기다렸다. 료샤는 주말에 노보시비르스크(!) 출장을 갔다가 오늘 돌아오는 거였다. 노보시비르스크도 여기서 비행기로 몇시간 걸린다. (그래도 얘는 비즈니스석 타잖아 흐흑) 사무실에는 안 가고(왜냐면 얘는 자기가 보스니까ㅠㅠ) 집에 가서 가방 풀고 옷만 갈아입고 카페로 왔다. 6월초에 프라하에서 헤어졌으니 4달 만이었다.



앗! 뭔가 바뀌었다! 헤어 스타일! 맨날 짧게 잘라 세우던 스타일이었는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나는 긴 머리를 좋아하는 편이라 맨날 머리 한번 길러보라고 했었음 ㅋ) 그것까진 좋은데... 수염도 세트로 기르고 있는 거였다! 끄악.... 남자는 수염이라며 자기 되게 멋있지 않냐고 자뻑에 취해 있다... 너 수염 안 어울려 ㅜㅜ



료샤는 날 보자마자 볶음너구리 타령을 해댔다... 너 그게 진짜 맛있었구나... 매운데도...



그래서 밖에 나가 저녁 먹는 대신 그냥 방에 올라왔다. 료샤는 방을 보더니 '웬일로 네가 이렇게 좋은 방을 얻었냐!' 라고 한다. '몰라, 호텔에서 업그레이드해줬어. 젤 싼 방 했는데..' 라고 하자 '비수기라 그렇지. 누가 이런 구질구질한 시즌에 여길 오냐!' 하고 비웃는다 흐흑....



좋은 방이라 하는 이유는... 이 방에는 소파가 있어어!!! 3인용 소파 1개 2인용 소파 3개!!!! 기다란 테이블도 있고... 그리고 옷장 칸은 따로 문이 있고!!!!!!게다가 6층이다.






료샤는 볶음너구리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컵라면보단 사실 라면 버전으로 볶아먹는게 더 맛있지만 그래도 맛의 큰 차이는 없다. 그래서 료샤에게는 볶음너구리를 끓여서 손수 비벼주고(!! 나는 진정한 친구!), 나는 카페에서 메도빅도 먹고 으슬으슬해서 차에 꿀과 레몬까지 타서 먹었더니 밥 생각이 없어서(사실 먹을 것도 없다. 이번에는 료샤랑 레냐 줄 것만 챙겨오고 나 먹을 건 유부우동 작은 컵라면 하나 가져왔는데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어제 호텔에서 웰컴 선물로 차려놓았던 과일접시에서 서양배를 먹었다. (이미 아침에 서양자두 두알이랑 미니사과 한알을 먹었음)



료샤가 하필 자기가 좋아하는 배를 먹냐고 투덜투덜... 파란 사과 아니면 포도, 키위도 있는데 왜 배를 먹냐고 한다. 이 자식아, 볶음너구리 사다줬잖아! 서양배 별로 맛도 없구먼 ㅠㅠ 난 저녁 대신 먹고 있는데!!!



(그 과일접시엔 원래 이런 것들이 있었으나 아침에 자두랑 미니사과는 해치웠음)

(맨 위에 있는 것이 료샤가 탐내던 서양배 -_- 뒤집어놓아서 동그래 보이네)



그러자 자기는 볶음너구리 먹으면 매우니까 과일접시의 배를 보고 아 저거 먹으면 되겠다 하고 나름대로 계산을 했던 거라고 한다 ㅠㅠ 그러나 내가 맥심을 꺼내서 보여주니 불만이 쏙 들어갔다. 열렬한 볼뽀뽀와 사랑 고백을 받았다 ㅋㅋㅋ (누누이 말하지만 얘는 맥심 믹스만 갖다주면 사랑 고백을 쏟아놓는다 ㅋㅋㅋ 료샤에게서 사랑 고백을 받고프다면 맥심을 준비하세요)



그래서 오늘 사온 (비싼) 찻잔을 심지어 이놈의 맥심 타주는 용도로 개시하였다. 흑... 나도 아직 안 마셔본 새 찻잔... 심지어 인스턴트 커피믹스로 개시....



(맥심으로 개시된 나의 새 찻잔. 맨 아래는 마침 할인 중이어서 산 접시)



료샤는 행복해하며 볶음너구리를 해치우신 후 맥심을 마시고 나는 서양배를 먹고 물을 마시며(뭐야 이게 ㅋㅋㅋ) 편안한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아 방 업그레이드해주니 참 좋구나(들인 돈은 다 까먹고 방 업그레이드해줬다고 좋아하는 역시 조삼모사 토끼 ㅠㅠ)



료샤는 더 늦게까지 놀고 싶어했다. 나도 더 놀고 싶었지만 얘도 출장 다녀왔고 내일 아침엔 또 조찬 미팅 따위가 있다고 해서 '이제 들어가랏!' 하고 등 떠밀어 보냈다. 료샤는 '쳇, 간만에 좋은 방 얻어놓고 내쫓냐!' 라고 툴툴댔지만 진실은 '아 조찬 미팅 가기 시러ㅠㅠ' 임. 조찬 미팅까지 가야 한다면 제발 수염 깎고 가라고 슬슬 달래보았지만 그는 자신의 멋있음을 과시할 거라면서 수염 안 깎을 거라고 한다 ㅠㅠ 수염도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안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고 ㅠㅠ 료샤는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레냐랑 한통속이라 한다. 레냐도 '아빠 수염 싫어' 라고 했단다 ㅋㅋㅋ



하여튼 수염모드로 나타난 료샤는 조금 전에 돌아가고 나는 이제 오늘 메모를 적고 있다. 날씨는 아주 안 좋고 바깥 구경은 별로 안 했지만 즐거운 하루였다. 아아 회사를 안 가니 이렇게 좋은 것을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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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2. 23:16

차 마시며 친구 기다리고 있음 2017-19 petersburg2017. 10. 2. 23:16



밤에 자다가 너무 추워서 깨어나 이불을 두겹으로 접어서 덮고 잤다. 아직 도시 난방이 시작되지 않았다. 제일 추운 시기이다. 밤 기온 5도, 체감 3도. 낮 기온 8도, 체감 5도. 가랑비가 흩뿌려서 더욱 음습하다. 전형적인 페테르부르크의 흐리고 비오는(ㅜㅜ) 날.



늦게 일어나 고스찌에 가서 아점 먹은 후, 네프스키 거리 조금 걷다가 도로 호텔로 돌아왔다. 너무 피곤했다. 내일은 공연도 끊어놨고 그날 시작 직전(이 망할놈의 호르몬 주기는 꼭 이럴 때 맞춰서 옴)이라 힘들어서 다른데 안 가고 그냥 호텔 로비의 카페에 내려와 차 마시고 있다. 차를 안 마셨더니 머리가 아파서.



내가 좋아하는 카페. 아스토리아 로툰다.



다즐링 마시며 메도빅 먹고 있음. 두통이 좀 가신다. 글 쓰려고 노트북도 가지고 내려왔는데 결국 이렇게 블로깅이나 하고 놀기만 할 거 같아 ㅎㅎ



료샤가 저녁에 여기로 오기로 했다. 레냐는 학교도 가야 하고 월요일이라 엄마네에 있어서 주중 늦게나 만날 것 같다. 어제 내가 밤늦게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냐는 공항에 갔다가 약혼녀 쥬쥬의 호텔방에서 자고서 등교하겠다고 찡찡대어 료샤를 당혹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ㅋㅋㅋ(어머 얘 좀 봐~ 약혼자 9세 ㅋ)











내가 사랑하는 아스토리아의 빨간 차양. bravebird님과 엽님 모두 이 차양 아래에서 처음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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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2. 19:33

나가려는 중 + 나와서(고스찌) 2017-19 petersburg2017. 10. 2. 19:33





너무 피곤해서 방해하지 마시오 붙이고 열시 반까지 잤다. 일어나서 쌋고 가방 풀고.. 벌써 한시네... 아점 먹으러 나가려는 중. 낮 기온 8도 ㅠㅠ 흐림.



...








나와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고스찌에 옴. 여기는 런치 메뉴가 좋다. 380루블(8천원 미만)에 샐러드, 수프, 메인, 음료를 먹을 수 있고 맛도 좋다.



매우 춥다. 흐리고 음습한 전형적 뻬쩨르 날씨이다. 패딩 가져온게 다행인데 오늘은 니트 점퍼 입고 나와 춥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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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2. 07:13

잘 도착 - 사랑하는 도시 2017-19 petersburg2017. 10. 2. 07:13






매우 고생 끝에 잘 도착... 사랑하는 도시에 다시 왔다.







비수기라서 그런가 아님 일주일 이상 묵어서 그런가, 젤 저렴하고 환불도 안되는 방 예약했는데 업그레이드를 해주었다. 옹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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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23. 22:51

동토의 땅, 겨울왕국 러시아 2016 petersburg2017. 9. 23. 22:51

 

 

 

 

제목은 아주 상투적 표현이다. 하지만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페테르부르크를 거닐다 보면 정말 저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다.

 

 

추워서 잔뜩 가슴을 부풀리고 있는 두마리 비둘기.

 

 

 

 

 

 

 

 

 

 

 

 

 

 

이삭 성당은 여전히 아직 수리 중이었다.

 

 

 

 

그래도 겨울왕국이기에 매력이 넘치는 곳.

(하지만 역시 여행을 하기에는 여름이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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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이때 여행 중 이날 날씨가 최악이었다. 음습하고 춥기도 하고, 계속 진눈깨비가 내렸고 바닥은 완전히 진창이었다. 즉, '전형적인' 페테르부르크 겨울 날씨였다. 바로 이 날씨 때문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아예 정착해 살라고 하면 망설이게 될 것 같은 것이다!!!!

 

 

날씨 안 좋은 날은 무조건 박물관 가는 날임. 그래서 이 날은 루스키 무제이(러시아 박물관) 갔다. 페테르부르크 갈때마다 들르는 곳이다. 근데 이 날은 날씨도 그렇고 몸도 많이 안 좋아서(아마 복직을 앞두고 있어 더 심란했던 듯하다) 그림 구경도 대충 했다.

 

 

러시아 박물관은 옆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고 미하일로프스키 공원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전시실 창문들 너머로는 공원도 보이고 예술광장이나 그랜드 호텔 유럽이 보이기도 하고 스파스 나 크로비를 비롯해 카톨릭 성당, 인줴네르 자목 등의 첨탑이 보이기도 한다. 위로부터 세장은 박물관 창 너머로 본 바깥 풍경들.  

 

 

(여기엔 사진 안 올렸지만 에르미타주는 러시아 박물관보다 더 크고 길기 때문에 거기 전시실들 창문 너머로는 궁전광장, 네바 강변, 길거리 등등 더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오후 2시 즈음이었던 것 같다. 이미 해는 거의 다 져버렸다.

 

 

 

 

 

 

 

눈과 얼음, 진흙이 지저분하게 녹아 진창을 이루기 시작한 차가운 바닥 위로 까마귀 몇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사진엔 한 마리만.

 

 

 

 

박물관 갔다가 근처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옷 갈아입으러 호텔로 들어가는 길. 네프스키 거리에서 버스 기다리며 한 장 찍음. 이게 오후입니다 흐흑... 그래도 사진으로 보면 뭔가 있어보이고 분위기 근사하죠... 실상은 '으악 이 날씨 정말 괴로워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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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페테르부르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표트르 1세 청동기사상 앞과 네바 강변 산책하며 찍은 사진 몇장. 석양 무렵. 하지만 오후 3시 즈음이다. 겨울엔 해가 아주 빨리 진다. 여름에는 백야의 도시. 하지만 겨울에는 금방 해가 져버리는 어둠의 도시.





네바 강은 꽁꽁 얼어붙고...






보기만 해도 추워보이죠? 진짜 추움.







이렇게 꽝꽝 얼어붙은 강변을 살살 걸으며 찬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한다.






궁전 교각 근처에 서 있는 청동사자상. 두 마리가 있다. 사진엔 한 마리만 나왔지만.







이 도시의 상징 중 하나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사원 첨탑.




물과 돌의 도시. 빛과 얼음과 눈의 도시. 페테르부르크. 소련 시절 이름은 레닌그라드. 내가 사랑하는 도시. 그리고 내가 쓰고 있는 글의 주인공이 어쩌면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도시. 불과 바람으로 만들어진 아이. 물과 돌의 도시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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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19. 22:29

모르스 2016 petersburg2017. 9. 19. 22:29





작년 12월. 페테르부르크.



메조닌 카페. 그랜드 호텔 유럽.



러시아박물관 다녀와서 너무 몸이 아프고 힘들어서 혼자 들어가 모르스와 비프 스트로가노프를 주문해 먹었었다. 모르스. 모르스. 모르스. 작년 여름과 겨울, 어쩌면 나에게는 모르스 부호와도 같았던 것. 달콤하고 진하고 슬며시 찐득한 열매주스. 모르스. 지난 여름에 나에게 위안을 주었던 것. 모르스. 체리. 마로제노예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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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나는 미샤의 10대 후반에서부터 20대 초반까지, 발레학교 상급생에서 키로프 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춤추던 초기 4년까지의 시기를 배경으로 꽤 긴 소설을 썼었다. 원래 쓰려던 소설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다시 글을 쓰기로 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브릴로프 본편을 구상했었다. 워밍업으로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미샤가 비행기에서 나누는 대화를 주축으로 한 단편 Frost를 먼저 썼고(이 글에 대해서는 여러번 포스팅한 적이 있다) 그 후 가브릴로프 본편을 시작하려고 플롯과 인물들을 직조하기 시작했다. 트로이는 이 시기에 떠오른 인물이다. 떠오르기보다는 거의 필연적으로 왔다.



그리고 어쩌면 쓸데없이, 어쩌면 과잉, 혹은 게으름, 주제일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트로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을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하고 왜 이렇게 이야기할까. 그것은 내가 미샤 야스민이란 인물에게 다가갔던 과정과 조금 비슷했다.



그때는 글을 쓰기가 좀 힘든 시기였다. 역설적으로 글을 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트로이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아니, 트로이의 렌즈를 통해 미샤라는 인물에 대해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완성된 소설은 내밀했고 여기저기 금이 가 있는 유리조각 같았고 조용했고 동시에 시끄러웠다. 나는 트로이를 심리적 화자로 등장시켰고 다분히 고의적으로 미샤의 곁을 맴돌게 했다. 그는 행성이 되었고 때로는 그보다도 못한 위성이 되었다. 하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들 모두가 항성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본명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이지만 분명한 이유로 '트로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아래 발췌문에 나온다.



아래 발췌문은 이 소설의 1부 3장, 아주 초반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소설에서는 트로이라고 불리며 오로지 미샤 야스민으로부터만 '안드레이'라고 불리는 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의 장이다. 사실 이것은 내가 일반적으로 인물에 대해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어떤 등장인물에 대해 이런 식으로 줄줄이 설명하는 것은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런 방식이 필요했다. 오직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에 대해서만.



발췌된 글 말미에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라는 인물을 어떻게 불러냈는지에 대한 짧은 메모가 붙어 있다.



맨 위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이즈마일로프 사원, 별칭으로는 트로이츠키 사원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결혼식을 올렸던 사원. 그리고 내가 트로이의 이름을 따온 곳이다. 그의 성은 이 사원에서 가져왔다. 그의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래 발췌문에 나온다. 맨 위와 아래의 트로이츠키 사원 사진은 둘다 웹에서 가져옴(내가 이렇게 잘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 ㅎㅎ)



갈랴, 알리사 등은 모두 트로이의 친구들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보통 그 정도로 키가 큰 사람들은 시선을 끌기 마련이지만 트로이츠키는 그렇지 않다. 아마 그의 별 특징 없는 머리색과 흐릿한 얼굴 윤곽, 언제나 앞으로 굽어 있는 어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197센티미터의 키에 언제나 뻣뻣하게 뒤엉키는 긴 팔다리를 늘어뜨린 나무인형 같은 사람이다. 새치가 드문드문 섞인 우중충하고 어두운 금발을 전형적인 문과 대학원생 스타일로 멋대가리 없이 짧게 깎은 데다 아무리 다림질을 해도 결국은 어딘가가 구겨지고 마는 셔츠와 소매가 접히는 재킷을 입고 다닌다. 구두 뒤축은 언제나 찌그러져 있고 바짓단에는 자주 진창 얼룩이 진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왼쪽 발을 살짝 끌면서 걷는다.




   
 부드러운 잿빛 눈의 뼈대가 굵고 조금 야윈 남자, 두세 명만 옆에 있어도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사람이다. 아마 당신은 네프스키 거리나 국립대학 앞 강변을 걷다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와 수십 차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임이나 파티에서 당신에게 그를 소개해준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 후 돌아서자마자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낮으며 부드러운 편이지만 무릎을 떨리게 할 만큼 섹시하지도 않고 콤소몰 중창단에 들어갈 만큼 근사한 것도 아니다. 딱히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다, 그는 당과 강령에 충성을 다하는 붉은 영웅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눈에 띄는 사고를 친 적도 없고 경찰서에 끌려간 적은 더더욱 없다. 그가 알기로는 KGB 요원을 달고 다닌 적도 없다. 물론 밝은 대낮에 마주친다 해도 그는 그게 보안요원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에게는 예리한 직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중학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고 아버지는 수학 교수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레닌그라드를 떠나서 산 적이 없다. 해외에 가본 적도 없다. 이혼 후 리가의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여름 방학 때 두어 번 그곳에 가본 적이 있지만 물론 연방은 해외가 아니다.



 껑충한 키 때문에 그는 농구나 배구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실상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모든 종류의 운동에 소질이 없으며 피오네르 캠프 교사는 그에게 수영을 가르치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교육법을 다 동원해야 했다. 지금 그가 친구들과 흑해에 가서 물에 몸을 띄울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책임감 강한 교사 덕분이다. 어린 시절 그는 기다랗게 튀어나온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아무도 그에게 별명을 붙여준 적이 없지만 트로이츠키는 남몰래 자신을 회색 거미라고 생각하며 우울해하곤 한다.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 진학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언제나 5점을 받는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좋은 점수를 받는 학생이었다. 교사들은 그를 모범생이라고 여겼지만 특별히 사랑하거나 챙겨주지는 않았다. 그는 평균 이상의 언어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작문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학부를 선택해야 할 때 같은 반 단짝이었던 알리사가 외국어학부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자고 꼬드겼다. 트로이츠키는 친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데다 오래 전부터 영미 문학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러기로 했다. 그의 부모는 어쨌든 유망한 학과이므로 찬성했다.



 영어권 국가에 나가본 적이 없고 원어민에게 교습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의 영어 실력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담당 교수 스베들로프는 그에게 넌지시 KGB 관련 진로를 추천한 적이 있다. 트로이츠키는 나름대로는 외교적인 태도로 품위 있게 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 일 년 동안 교수는 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마쳤을 때 스베들로프는 다시 한 번 그 제안을 하게 된다.



 트로이츠키가 해외 진출과 출세가 반쯤 보장된 그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은 그가 격렬한 반 소비에트 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나약하고 소심한 성격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레닌그라드와 친구들 때문이다. 그리고 절반쯤은 미샤 야스민 때문이다. 몇 년 후 그는 동베를린과 오슬로 측으로부터 연구직 초청을 받게 되지만 고민 끝에 그 기회를 거절하게 될 것이다. 그때 미샤 야스민이란 이름은 어느 정도도 아니고 절반도 아닐 것이다. 그 이유의 완벽한 전부를 차지할 것이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딱히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멸망한 고대 국가 트로이를 동경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성을 따서 트로이라고 불러달라고 청했을 뿐이다. 톨스토이를 좋아했던 그의 부모가 ‘전쟁과 평화‘의 안드레이 공작에서 그의 이름을 가져왔다. 트로이츠키는 톨스토이를 싫어하며 안드레이 공작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인물의 따분하고 비관적인 회의주의 때문이 아니라 그를 집어삼킨 길고 고통스러우며 무의미한 죽음 때문이다.



 그의 선량한 친구들은 부탁을 받아들여 그를 트로이라고 부른다. 멸망한 고대 국가의 러시아식 이름은 트로야이지 트로이가 아니며, 더구나 트로이란 별명은 트로이카, 즉 기껏 3점짜리 점수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친구를 그렇게 부를 수 없다는 갈랴 예피모바만 빼고. 트로이츠키는 오랜 친구 갈랴가 자신을 안드류샤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지만 내심 그렇게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



 드물게 미샤 야스민이 그를 안드레이라고 부르는 순간이면 트로이츠키는 톨스토이와 죽은 공작에 대한 자신의 뿌리 깊은 혐오를 완전히 망각한다.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남몰래 습작을 한다. 10대 소년 시절부터 모눈 공책에 시를 써 왔고 가끔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완성된 소설은 거의 없다. 피오네르 시절 그는 영웅도시 레닌그라드와 폭격에서 청동기사상을 구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날랐던 시민들에 대한 시를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알리사를 제외한 모임 친구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는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까봐 걱정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의 수많은 시들과 미완성 소설이 적힌 노트들을 들춰보았던 건 알리사와 미샤 야스민 뿐이다.



 알리사와는 중고등학교 시절 서로의 습작 노트를 공유하며 토론하던 사이지만 트로이츠키는 항상 알리사가 순수 문학보다는 풍자와 비판을 더 좋아한다는 것과 그녀가 언젠가는 글쓰기를 그만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리사는 대학에 진학한 후 더 이상 습작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서와 토론은 여전히 좋아해서 그와 함께 모임을 시작했다. 그녀는 트로이츠키에게 요즘 쓰는 글이 있으면 좀 보여 달라고 습관처럼 말을 걸지만 그는 번역 필사본과 평론, 영문학 수업과 관련된 메모가 아니면 더 이상 알리사에게도 자기 노트를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이 매우 흐릿하며 끈질기게 노력하고 매달려야만 간신히 조그만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불꽃을 가지고 태어나긴 했지만 그건 미지근하고 어둡게 깜박이는 촛불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우울증에 잠겨 한밤중에 네바 강으로 가서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미샤 야스민은 알리사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다. 그때 트로이츠키는 논문이 잘 풀리지 않아 머리를 식히려고 대청소를 하고 있었다. 미샤는 언제나처럼 불쑥 들렀다가 뒤집혀진 책상 서랍과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상자들 사이에서 펼쳐진 모눈 공책을 발견하고 모든 금서와 사미즈다트 애호가답게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뒤늦게 트로이츠키가 그 재앙을 알아차리고 사색이 되어 뛰어왔을 때 미샤는 유일하게 깨끗한 공간인 부엌 식탁 위에 걸터앉아 공책을 네 권 째 읽고 있었다. 트로이츠키가 얼굴이 붉어져서 심하게 말을 더듬거리며 공책을 빼앗았을 때 미샤 야스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영어로 쓰면 바깥에서 출판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때 미샤가 시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해, 그 무엇보다도 재능에 대해 침묵해 준 것에 대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움을 느꼈다.



 몇 년 후 미샤 야스민이 드라마 극장 무대에 프로코피예프 음악을 짜깁기한 15분짜리 모던 발레를 안무해 올렸을 때 그는 트로이츠키의 노트에 적혀 있던 시 몇 편을 제멋대로 해체하고 오려붙여 브이소츠키 풍의 발라드를 만들어 에피그라프처럼 삽입했다. 그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의 생애에서 분명 가장 영광스런 순간 중 하나였다.




 트로이츠키는 여전히 글을 쓴다. 때로는 자신의 문장과 단어와 인물에 홀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따금 그는 사랑의 시를 쓴다. 밤이 지나고 나면 그 자신조차 다시 읽기 부끄러운 시들을.




 ...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학교의 몇몇 여학생들과 연상의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여자들은 그가 자상하고 선량한 남자이지만 수줍음이 많아 좀처럼 사귀자는 말을 먼저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이따금 끼는 안경이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공부벌레이며 어디를 가나 나서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를 배신하거나 꼭 필요한 순간 그 자리에 없는 얄미운 부류에는 절대 속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는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섹시한 상대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안정적인 파트너로 보인다. 즉 연애 상대라기보다는 결혼 상대로 적합한 남자이다.




 트로이츠키는 오랜 기간 동안 여자를 사귄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주변 사람들은 그와 알리사가 커플이라고 오해하곤 했다. 사실 그들은 아주 친한 친구였을 뿐이며 트로이츠키는 단 한번도 알리사에게 연애 감정이나 성적 충동을 느낀 적이 없다. 알리사는 일 년에 두어 번씩 남자친구를 바꿨고 가끔은 트로이츠키에게 자신의 연애사를 상담하기도 했다. 알리사는 석사를 마친 후 아버지가 소개해 준 남자와 결혼하지만 6개월 만에 이혼하게 된다. 이혼 후 알리사는 곧장 트로이츠키의 아파트로 와서 밤새 울고는 기분 전환을 하겠다며 냉장고를 몽땅 뒤집어 일주일 동안 먹어도 모자랄 만큼의 보르쉬와 펠메니, 감자 샐러드, 다진 고기파이와 버섯파이, 온갖 종류의 피클, 꼬치구이, 콤포트, 거의 보드카 도수에 육박하는 정체불명의 강력한 펀치를 만들어 놓고 떠난다. 그 산더미 같은 음식들을 처리하기 위해 트로이츠키는 모임 장소를 갈랴의 집에서 자기 아파트로 바꿔야 할 것이다.



 알리사 외에도 그에게는 여자 친구들이 많지만 애인은 없다. 그가 가장 오래 사귀었던 여자는 대학원 동기인 이라 티호노바였지만 그것도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친구들은 가끔 그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소심증을 극복해보라고 각종 조언을 해주지만 그럴 때마다 트로이츠키는 언젠가 자기 짝을 만나면 결혼할 거라고 판에 박힌 대답을 하며 넘긴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자신이 결코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가족이나 친구들 그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다.





...








아래 노트는 2013년 1월 말에 이 소설을 마치고 퇴고를 거듭한 후 쓴 후기의 일부이다. 이 노트에서 나는 그로부터 몇달 전,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하고 트로이란 인물을 떠올렸을 때의 메모를 그대로 첨부했다. 그리고 이 메모는 위에 발췌했던 실제 소설의 일부에도 그대로 들어가 있기도 했다.




<2012년 가을의 메모에 대한 2013년 1월의 노트> 





 .... 소설을 시작할 때 나는 트로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메모를 적었다. 두 번째 단락은 1부 3장에서 그에 대한 소개를 할 때 거의 그대로 집어넣었다.




 나는 적당한 만큼의 엘리트이며 적당한 만큼 재능이 있고 그래서 우울하게도 사실은 평범한 사람들에 해당되는 인물을 만들기로 했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이며 1949년생이다. 배경은 1971년~ 1977년의 레닌그라드이다. 트로이츠키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을 밟는 일종의 지식인이며 회색 종자다.
  


 키가 껑충하게 큰 그는 어깨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다니며 긴 팔다리가 언제나 볼품없이 뒤엉키는 나무인형 같은 사람이다. 새치가 섞인 우중충한 블론드를 당시 소련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멋없이 짧게 깎고 있으며 부드러운 잿빛 눈을 가진 남자, 두세 명만 옆에 있어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다. 아마 당신은 네프스키 거리나 국립대학 앞 강변을 걷다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와 수십 차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임이나 파티에서 당신에게 그를 소개해준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 후 돌아서자마자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게는 내부에 은밀한 뭔가가 있으며 그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의 평범한 대학생 청년도 마찬가지다.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불꽃과 빛을 타고 나며 누군가는 굳어져가는 촛농에 남아 있는 희미한 온기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물론 후자이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어둠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며 물론, 욕망과 사랑도 있다. 사실 그건 아주 강력한 것이다. 결코 우스꽝스럽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든 읽는 입장에서든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렇게 어려운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재능은 우리들 많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흐릿하고 나약하기 때문이다.



 'Frost'와는 달리 나는 3인칭을 골랐다. 따라서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드미트리 마로조프처럼 관대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전이는 있을 것이다. 그것도 강력하게. 이번에는 관대함과 전이 사이의 틈새를 따라가는 글쓰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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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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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9. 7. 21:09

모이카 운하 따라 겨울 산책 2016 petersburg2017. 9. 7. 21:09

 

 

 

지난 12월 페테르부르크는 떠나기 일주일 전 결정하고 날아갔었다. 복직을 앞두고 마음이 너무 심란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해보자면 12월은 결코 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다. 언제나, 여름이 제일 좋다. 겨울에는 해가 너무 늦게 뜨고 일찍 지는데다 기후가 혹독하다. 눈보라는 예사이고 칼바람이 불어온다. 여름과 반대로 하루의 대부분이 어둠에 잠겨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으로 날아갔다. 열흘 가까이 머물렀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돌아왔다.

 

 

역시 12월답게 추웠고 어두웠고 습했다. 하지만 동시에, 역시 아름다웠다.

 

 

이때 숙소는 이삭 광장 쪽에 있는 아스토리아 호텔이었다. 겨울 비수기라 좀 싸게 나와서 잽싸게 예약하고 날아가서 소녀의 꿈 중 하나를 이루었다(아스토리아에 묵는 것~)

 

 

호텔은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사이에 있다. 호텔에서 나와 이 거리들을 따라 네프스키로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길을 건너서 모이카 운하를 따라 걸었다. 페테르부르크에 갈때마다 즐겨 걷는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얼어붙은 모이카 운하 따라 걸으며 찍은 사진 몇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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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작년 12월. 페테르부르크.



오후 4시에서 5시 즈음.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 몇 장. 바로 아래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사진 빼고는 모두 네프스키 대로 따라 산책하며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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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간만에 전에 쓴 본편 중 일부를 발췌해 본다. 전에 종종 올렸던 수용소 중편 중 제3부, 미샤의 절친한 벗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그를 면회하는 장면 중 일부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그 부분을 먼저 읽고 여기로 넘어오면 된다.

 

앞부분 : http://tveye.tistory.com/5551 (수용소 면회실에서, 얼룩들)

 

 

 

이 이야기는 바로 앞부분을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사실 그 부분의 후반부 문단 몇개와 대화 몇개는 지금 올리는 이야기 맨 앞과 겹친다. 잘라내자니 앞이 너무 휑해져서.

 

 

고문을 당해 피폐해진 미샤 때문에 일린은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

 

 

여기 발췌한 이야기 후반부에는 일린의 딸인 라라가 등장한다. 라라는 예전에 올렸던 부활절 단편 Jewels의 1인칭 화자로 나왔던 인물이다. 일린의 큰딸로 그 이야기에서는 열살짜리 소녀로 등장했었다. 이 수용소 이야기는 jewels에서 5년 후를 다루고 있으므로 라라는 이제 15세의 사춘기 소녀이다.

 

 

사실은 jewels보다 이 소설을 먼저 썼고 라라도 여기서 제일 먼저 등장했다. 그 후 어린 라라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면서 라라를 일인칭 화자로 만들어 jewels를 쓰게 된 것이었다.

 

 

'나스챠'는 일린의 전 부인이자 라라의 엄마이다. 라라는 엄마 나스챠와 새아버지, 그리고 여동생 아냐와 함께 살고 있다. 지나이다는 본편에 등장하는 미샤의 파트너인 '그' 지나이다('지나와 말썽쟁이'의 그 지나이기도 합니다), 마르가리타와 이그나트는 일린의 볼쇼이 동료이다. 후자 두명은 jewels에서 일린네 집에 모여 같이 부활절 달걀 색칠하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세자르 모렐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안무가로 미샤의 춤에 매료되어 그를 위해 여러개의 작품을 안무해주었던 인물이다. 물론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jewels와 거기서 파생된 밑자료 half 소설인 dolls의 링크는 포스팅 맨 아래에 붙여 두었다.

 

 

맨 위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궁전광장의 알렉산드르 기념원주 천사 조각상. 예전에 올린 단편 illuminated wall에서 미샤가 저 천사 원주 아래에서 춤을 췄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나는 그 애의 손을 떼어내는 대신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정수리까지 치솟았던 열기와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폭발할 듯한 감정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심장 한가운데 그대로 고여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그런 분노와 증오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샤는 내가 잠잠해지자 한숨을 내쉬었고 손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여름이 아니었다면 벗어줄 재킷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꼴도 보기 싫은 스카프를 다시 주워 그 애의 목과 어깨에 둘러 줘야 했다. 마치 자주색의 죽은 뱀을 둘러주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미샤는 추워서 그런지 스카프를 감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초점이 흐릿한 검은 눈만이 불안하게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감시자들이 들어와 나를 끌어내 체포할까봐 두려운 것 같았다. 그 애가, 나의 미셴카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 어떤 권위와 위협 앞에서도 굴복할 줄 모르던 미샤 야스민이 그런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다니, 두려움으로 내 입을 막고 몸을 떨다니. 문득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난 거의 넘어갈 뻔 했다. 그 애의 몸에서 발산되는 불처럼 뜨거운 열기와 죽어 넘어진 페트루슈카를 연상시킬 정도로 심한 경련이 아니었다면 분명 난 꿈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나는 한 팔을 미샤의 팔 아래로 넣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아 안았다. 다른 팔을 뻗어 허리에 둘렀다. 그러자 경련이 조금 잦아들었다.

 

 

 “ 어깨에 기대. 그럼 좀 편해질 거야. ”

 

 

 “ 네 어깨는 작은데. ”

 

 

 “ 그래도 너 하나쯤은 기대게 해 줄 수 있어. 전에도 그랬잖아. ”

 

 

 “ 그랬지. ”

 

 

 미샤가 순순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짧은 머리칼이 얇은 셔츠를 파고들며 살갗을 찔렀다. 그 애의 이마와 뺨이 닿은 자리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 걱정하지 마. 날 체포하지는 않을 테니까. 벨스키가 보냈다고 했잖아. ”

 

 

 “ 왜 흥분하는 거야? 제일 안전할 줄 알고 네 이름 댔는데. 좀 무서운걸. ”

 

 

 “ 난 약과야. 지나가 왔으면 더 소리 지르고 화냈을 걸. ”

 

 

 “ 지나가 그러는 건 무섭지 않아. 걘 조용한 게 무섭지. 넌 반대잖아. 내 앞에서 화낸 적 없었는데. ”

 

 

 “ 너한테 화내는 게 아냐. ”

 

 

 “ 음, 나한테 화를 내면 안되지. 그럼 라라에게 이를 거야. ”

 

 

 “ 지금 농담한 거야? ”

 

 

 “ 미안, 여전히 재미없어서. ”

 

 

 나는 그의 허리에 두른 팔을 좀 더 바짝 끌어당겼다. 발레리나의 조그맣고 야윈 몸을 품에 안은 것 같았다. 이제 그 애의 열기가 퍼져 와서 내 온몸도 불을 놓은 것처럼 뜨거웠다. 주사를 놓든 약을 먹이든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지만 저 문을 열면 그 혐오스러운 알렉산드르 크냐제프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뱀처럼 웃으며 ‘역시 30분을 다 채우기란 무리였겠죠. 이 친구 상태가 아주 안 좋아서’ 라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떠들어댈 것이 분명했다. 그놈들의 손에 미샤를 돌려보내느니 아프더라도 단 5분, 10분이라도 더 내 어깨에 기대 있게 하는 것이 백배 천배 나았다. 미샤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자기 몸을 완전히 내 팔에 맡기고 있었다. 등을 두어 번 쓸자 스웨터 아래로 뼈마디가 그대로 만져졌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그러나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 얘기해봐, 미셴카. 그자들이 어떻게 했는지. ”

 

 

 “ 왜? 네겐 그런 게 중요해? ”

 

 

 “ 응. ”

 

 

 “ 왜 중요하지? 어차피 해결되는 일도 없는데. ”

 

 

 “ 그냥 얘기해봐. ”

 

 

 “ 기억이 잘 안나. ”

 

 

 “ 넌 대답하기 싫으면 항상 그렇게 얘기하잖아. ”

 

 

 “ 그럼 양치기 소년인가. ”

 

 

 

 미샤는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그 애가 어떻게 아직도 웃을 수 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 근데 정말이야, 스탄카. 기억이 나지 않아. 그자들 이름도 생각이 안나. 주사는 좀 맞았던 것 같아. 아팠던 것 같기도 해. 잘 모르겠어. ”

 

 

 “ 피 흘리고 있었어. ”

 

 

 “ 누가? ”

 

 

 “ 너. 사진에서 봤어. ”

 

 

 “ 무슨 사진? ”

 

 

 

 그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레닌그라드로 소환된 후 파리가 얼마나 시끌시끌했는지. 해외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지식인들, 사상가들, 인권단체들이 그의 구명을 위해 어떤 시위를 벌였는지. 오히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있던 우리들보다도 그쪽 사람들이 재판에 대한 정보를 더 먼저 알아냈다.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던 라라는 단파 라디오로 프랑스 방송을 잡아냈지만 그 아이의 프랑스어 실력은 뉴스를 이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라는 수차례 반복되는 미샤의 이름과 몇몇 단어밖에 알아듣지 못했고 새벽에 엉엉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 아빠, 프랑스 라디오에서 미셴카 얘길 하고 있어. 심각한 얘기 같은데 못 알아들었어. 방금 엄마가 라디오 뺏아갔어. 그런 거 들으면 잡혀간대. 어떻게 해, 못 알아들었어... 그 주파수 기억도 안나. 다시 못 찾을 거야... 무서운 얘기였으면 어떻게 하지? 뉴스였어. 자꾸 이름이 나왔어. 나쁜 일인 거야? 미셴카에게 나쁜 일 생긴 거야? 아빠, 구해줘. 그 사람 구해줘. 제발 어떻게 좀 해봐, 아빠 아는 의원님들에게 부탁 좀 해봐... ”

 

 

 

 라라를 달래고 안심시킨 후 나는 볼쇼이 발레교사인 마르가리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으로 와 달라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극장에서 프랑스통으로 불렸고 원어민처럼 불어를 구사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마르가리타는 동료인 이그나트를 데리고 왔다. 둘 다 미샤가 볼쇼이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들어오자마자 마르가리타는 문을 잠그고 창문마다 커튼을 친 후 싱크대와 욕실의 물을 틀어놓았다. 그녀는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그 뉴스 듣고 있었어. 안 그래도 여기 오려던 중이었어. ”

 

 

 “ 난 라라가 전화해서 알았어. 내용이 뭐였어? 안 좋은 얘기였어?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

 

 

 “ 재판 얘기였어. 파리에서 정보를 입수했대. ”

 

 

 

 그때까지 우리는 미샤가 비공개 재판을 받아 어딘가에 수감되었다는 사실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 프랑스 방송은 훨씬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허술하고 형식적인 재판 절차에 대해 지적했고, 재판정에 소환된 증인들의 이름까지 몇 명 폭로했다. 모두 당 강경파의 측근들과 미샤의 격렬한 반대파들이었다. 그런데 그자들이 증언대에 올라가 온갖 밀고와 음해를 쏟아 붓는 동안 그 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들, 제대로 된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은 단 한 명도 소환되지 않았다. 우리는 재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았다.

 

 

 그 라디오 방송은 미샤의 자기 변론이 겨우 2분도 안되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30분도 걸리지 않아 판결이 내려졌다는 얘기와 더불어 당 내 강경파 일부는 훨씬 가혹한 처벌을 주장했기 때문에 재판 결과에 실망했다는 정보를 흘리기까지 했다. 순진한 이그나트는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파리에서 이 모든 끔찍한 사실들을 알아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벨벳 덮개를 뒤집어씌운 어항 안에 갇혀 있는 물고기들이었으니까.

 

 

 그 방송을 듣고서야 우리는 그 애가 7년형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반체제 선동과 당에 대한 불복종, 체제 전복 위협 등 그 애에게 씌워진 죄목은 끝이 없었다. 이후 파리에서 조직된 구명위원회의 팸플릿에 따르면 그 더러운 놈들은 스파이 죄목까지 씌우려고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마지막에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 그건 르 피가로와 뉴욕 타임즈 등 유명 일간지에 컬러로 실렸다. 마르가리타가 이즈베스티야 뭉치 안에 르 피가로를 숨긴 채 사색이 되어 달려왔을 때 우리 집에는 이미 여러 가지 경로로 그 사진을 입수한 지인들이 다섯 명이나 와 있었다. 극장 직원들과 예술가들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까봐 걱정에 빠진 노비코프가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르니 한동안 모여 다니지 말라고 전화로 경고하지 않았다면 아마 미샤의 지인이나 팬들 여럿이 더 몰려왔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미샤와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모스크바에서는.

 

 

 

 누구도 그 사진의 출처를 알지 못했다. 신문사들은 익명으로 사진을 제공받았다고 입을 모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은 총 세 장이었는데 두 장은 측면이었고 한 장은 정면이었다.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그 애를 들어 옮기고 있었다. 측면 사진 한 장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팔목에 튜브를 꽂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정면 사진을 보았을 때 내 머리 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자들이 결국 저 애를 죽였구나...

 

 

 

 사진 속에서 그는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진 채 머리를 젖히고 있었다. 들쭉날쭉하게 잘린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에 유화 페인트처럼 불규칙하게 엉겨 있었고 피부는 시체처럼 푸른빛이 도는 흰색이었다. 감긴 눈 아래로 속눈썹이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검은 페인트를 칠한 듯 무겁게 처진 채 마구 뒤엉켜 있었다. 코와 입에서 시작되어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는 너무 붉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그 애의 팔과 다리가 나무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의료 요원들은 그 애를 죽은 짐승처럼 들어 옮기고 있었다. 
 

 

 

 


 그날 지나이다가 모스크바로 왔다. 키로프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딤카 아르부조프와 함께였다. 그녀는 이제 울지도 않았고 흥분하거나 공포에 질리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분노해 있었던 것이다.

 

 

 “ 세자르 모렐이 내일 모스크바에 올 거예요. 파리 공산당원 자격으로. 로쉬도 함께 입국하려고 했지만 물론 거절당했어요. ”

 

 

 “ 그자들은 세자르가 와도 만나주지 않을 거야. ”

 

 

 

 실제로 그랬다. 당에서는 형식적인 예의와 절차를 갖춰 모렐을 맞이했지만 그의 면담 요청은 거부했고 그가 직접 가져온 파리 공산당 지부와 프랑스 문화예술계의 탄원서도 무시했다. 그 유명한 인물이, 전후 30여년 이상 유럽 무용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 거장, 한결같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열렬한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세자르 모렐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왔는데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모스크바에서는 모렐을 초청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모렐이 미샤의 춤을 보고 반해서 그를 위한 작품을 안무해 볼쇼이로 날아왔을 때 당에서는 대대적인 선전을 펼쳤고 모렐을 서방의 공산 영웅이자 진정한 예술가로 숭배하고 떠받들었던 것이다.

 

 

 지나이다는 키로프를 비롯한 레닌그라드 극장들에서 미샤를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해외에서 그렇게 구명 운동을 하고 있는데 동료들이 모른 척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치를 떨었다. 나도 볼쇼이와 므하트를 포함한 몇몇 극장에서 서명을 받았다. 그건 꽤 위험한 일이었고 후환이 생길 가능성도 많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날 우리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같은 시각에 성명을 발표하고 당에 탄원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성명서를 낭독하는 중에 보안위원회에서 들이닥쳤다. 나는 다섯 시간 동안 구금되어 있었지만 별다른 심문 없이 풀려났다. 탄원서는 압수당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연행되었던 지나는 한 시간도 안 되어 풀려났고 아무 것도 압수당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벨스키가 나를 풀어주도록 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 쪽은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힘을 쓴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는 미샤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진이 공개되고 이곳에서 자행되는 끔찍하고 더러운 일들이 서방 제국주의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좋은 먹잇감이 된 상황에서 그자들이 미샤를 살려놓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외 언론들에서는 미샤가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해 중태에 빠져 있다고 떠들었고 모스크바 측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했다. 미하일 야스민은 반체제 선동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며 소비에트 법률에 따라 정상적으로 수감되어 있으니 남의 나라 일에 쓸데없는 참견 따위는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라라는 나스챠에게 한동안 아빠와 지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나스챠는 그 애를 보내주지 않았다. 내가 그 애를 위험에 빠뜨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라디오를 숨겼고 딸아이의 스크랩북들도 몽땅 태워버렸다. 한 번만 더 집에서 미샤의 이름을 거론하거나 외국 신문 따위가 발견되면 일 년 동안 외출을 금지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딸아이가 울면서 전화했을 때 내가 나스챠와 이혼했던 이유를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

 

 

 

 라라는 학교를 빼먹고 극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열다섯 살도 채 안된 아이가 어디서 정보를 입수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라라는 이미 사진과 기사를 보았고 내가 잠깐 연행되었던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잠을 못 자고 너무 울어서 얼굴이 퀭했다. 라라는 내가 무용수들을 데리고 월말에 올릴 작품 리허설을 하는 동안 얌전하게 복도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내가 나왔을 때 딸아이는 바람처럼 달려와 두 팔로 날 끌어안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애였다.

 

 

 “ 아빠, 아빠! 너무 무서웠어! 아빠가 미셴카처럼 끌려갈까봐, 못 돌아올까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 ”

 

 

 

 내 품 안에 파고든 라라의 심장이 너무 팔딱거려서 조그만 새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라라는 흐느껴 울면서 나를 더 꼭 껴안았다.

 

 

 

 “ 그래도 그 사람 살아 있는 거지? 죽는 거 아니지? 그냥 조금 아프기만 한 거지? 아빠, 기도해. 아침에, 자기 전에. 미샤 구해달라고 기도해, 그럼 괜찮을지도 몰라. 나 계속 하고 있어, 엄마 몰래. 내 친구들도 같이 하고 있어. 아냐한테는 얘기 못 했어, 사진 보면 충격 받을까봐. 근데 아냐가 어제는 갑자기 우리 같이 별장에 갔던 얘길 하면서 다시 가고 싶다고, 미셴카 보고 싶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으면서 라라가 주머니에서 나무로 깎은 십자가를 꺼내 내 팔목에 걸어주었다.

 

 

 “ 이거 내가 만들었어, 아빠도 하나 가지고 있어. 여기 입 맞추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 주실지도 몰라. 꼭 해야 해, 최소한 하루에 두 번. 바빠도 두 번은 꼭 기도해야 돼, 아빠. 약속해. ”

 

 

 

 그래서 나는 약속했다. 하루에 두 번, 아니, 사실은 틈나는 대로 기도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독실한 신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건 라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살짝 비스듬하게 깎인 나무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되풀이하는 순간이면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변했다. 어쩌면 우리의 별 것 아닌 신앙, 이성과 과학과 당의 탄압 속에서 옛 시대의 그림자처럼 변해버린 낡은 정교가 결국 옳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벨스키가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미샤, 만신창이가 되어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그래도 내 어깨에 기댄 채 여전히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있는 내 친구의 옆에 앉아 있으니까.

 

 

 


 미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 스탄카, 무슨 사진? ”

 

 

 나는 소파와 벽과 책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청 장치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나 같은 일반인에게 그런 대단한 장치가 보일 리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다 아는 얘기였다.

 

 

 

 “ 의료진이 너 옮기는 사진. 누가 몰래 찍어서 파리와 뉴욕에 보냈어. 그것 때문에 해외에서 난리였어. ”

 

 

 “ 아, 그랬군. ”

 

 

 “ 벨스키가 말 안 해줬어? ”

 

 

 “ 사진 얘긴 안 해줬어. 내 허락도 없이 그런 걸 찍다니. ”

 

 

 “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는 걸.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쨌든, 그 사진에서 너 피 흘리고 있었어. 그래서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

 

 

 “ 엄청 보기 싫게 나왔겠네. 태워버려. ”

 

 

 “ 외신에 다 났는데 어떻게 태워. 뉴욕에서 그걸로 전시도 했어. ”

 

 

 “ 라라한테 절대 보여주지 마. ”

 

 

 “ 아, 그래. ”

 

 

 

 미샤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내게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에어컨을 꺼줘야 할 것 같았지만 단 일 초도 그 애를 소파에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이마에 손을 얹자 금방이라도 물집이 잡힐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

 

 

 

 

맨 위 메모에서 언급했던 jewels와 dolls 링크는 여기.

 

 

부활절 단편 Jewels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밑자료 half : Dolls


01. 에벨리나(http://tveye.tistory.com/6960),
02. 미샤(http://tveye.tistory.com/6964)
03. 일린(http://tveye.tistory.com/6969)
04. 에벨: http://tveye.tistory.com/6972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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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작년 12월 이른 오후. 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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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8. 29. 22:33

수프 비노, 작년 6월 2016 petersburg2017. 8. 29. 22:33





작년 6월. 페테르부르크. 카잔스카야 거리의 수프 비노.




여기는 bravebird님의 소개로 알게 된 곳이다. 로컬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 그리고 따뜻하고 아늑한 곳, 나직하고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의 알렉세이가 있는 곳이다.




2015년 여름에 처음 갔었다. 작년 6월에 거의 도망치듯 페테르부르크로 날아와 3주 정도 머물렀다. 수프 비노에 두어번 갔고 알렉세이와 다시 대화를 나눴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 좀 긴 휴가를 얻었어요.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어요' 라고 말했고 알렉세이는 매우 부드럽고 조용한 특유의 목소리와 선량한 눈빛으로 '그랬군요'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대답보다는 눈빛과 목소리 때문에 남모를 위안을 받았다. 그건 살짝,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의 묘지 사이를 거닐며 종소리를 들을 때 느끼는 평온함과 위안의 느낌에 가까웠다.



수프 비노. 사진 몇 장.




사족 : 이곳의 치킨 수프는 매우 맛있다. 파스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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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몇년 째 쓰고 있는 글이 있는데 오랫동안 멈춰 있어. 중간중간 다른 글들을 써서 마치기도 하고 미완으로 남겨두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 '정말로' 쓰고 있는 글은 하나야.' 라고. 그게 바로 가브릴로프 본편이다.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구상했고 계속해서 머릿속과 마음속에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는 글이다.

 

 

다른 글들은 사실 다 여기서 새끼친 것들이다. 서무 시리즈도. 게다가 트로이를 내세운 장편 역시 사실은 이 본편에서 나왔다. 트로이는 원래 이 본편에 잠깐 등장하는 인물이었는데 플롯을 구상하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할까?' 라는 의문을 품었고 결국 그의 목소리와 그의 시선을 빌려 꽤나 긴 소설을 썼었다. 최근 여러번 발췌한 미샤의 수용소 단편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을 위한 프리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본편은 이미 몇년째 120여페이지에 머물러 있다. 뒤를 이어서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고, 사실 전체 플롯과 구조, 메인이 되는 이야기들과 작은 에피소드들도 근 7~80% 정도는 모두 구상되어 있는데 쓰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보통 글을 자유롭게 춤추듯이 쓰는 것을 좋아하고 한번 몰입하면 쉽게 써나가는 편인데 이 가브릴로프 본편만은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아마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직 여기에만 집중했을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년 동안 나는 너무 여러가지로 산란해져 있었고 특히 회사 때문에 더욱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이 본편을 꼭 쓰기는 할 것이다. 언제가 됐든 마칠 것이다. 그럴 거란 사실을 자신의 마음 속으로 알고 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의 2장이다. 1장은 미샤가 부임해오는 극장의 무용수 하나의 시선으로 전개되었고 이 2장은 기차로 가브릴로프에 호송된 미샤가 그의 KGB 감시요원인 다닐 베르닌과 처음 대면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맞다, 서무 시리즈의 그 다닐 베르닌, 단추청년, 왕재수 미샤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집사 베르닌이다. 하지만 본편의 베르닌은 서무 시리즈에서 희화화시킨 단추 베르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사실 진짜인데...어느새 그는 단추청년이 되었지 ㅠㅠ 이 장면 중 중간 정도는 전에 좀 발췌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첫 대면 에피소드를 온전하게 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기 다시 올려본다.

 

 

..

 

 

맨 위 사진은 가브릴로프...는 당연히 아니고, 2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찍은 사진. 레트니 사드(여름 정원). 발췌한 에피소드에서 미샤와 베르닌이 숲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와서 뭔가 숲 느낌 나는 사진이 어울릴 것 같아서 올려봄.

 

 

...

 

 

가브릴로프는 물론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이다. 하지만, 드넓은 러시아(및 구소련) 땅 어딘가에 이 이름 붙은 소도시가 실제로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이름이고... 대천사 가브리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 야스민이 가브릴로프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보안위원회에 제출할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꽤 두툼한 보안 서약 서류에 서명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지만 다닐 베르닌은 거의 친절하기까지 한 어조로 서류에 그가 가브릴로프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미샤가 서류를 들춰볼 기색을 보이지 않자 베르닌은 허가 없이는 시계를 넘어갈 수 없으며 모든 시외전화는 보안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상대의 침묵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류의 제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했다. 약 20페이지 가량의 서류는 갱지에 타이핑되어 있었고 노끈으로 허술하게 묶여 있었다.

 

 

“ 붉은 담장 도착하기 전에 차 안에서 읽어두는 게 좋을 걸요. 일단 제출하고 나면 내용 확인할 기회 없을 테니까. ”

 

 

미샤는 서류를 읽는 대신 붉은 담장이 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가브릴로프에 도착해서 그가 제일 처음 했던 말일 것이다. 기차역에서 베르닌에게 인계된 이래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 아, 그렇지. 당신은 여기 사람이 아닌데. 붉은 담장은 말이죠, 우리 사무실을 가리키는 겁니다. 오해는 말아요, 담장이 있긴 하지만 붉은색은 아니니까요. 크라스나야 강변에 있어서 그런 겁니다. 모스크바에서는 루뱐카라고 부르듯이. 뭐 그런 식인 거죠. 쓸데없는 설명인가요?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약 10여분 정도 기다렸고 그가 전혀 서류를 읽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맨 마지막 장을 펼쳐주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미샤가 서명을 한 후 펜과 서류를 돌려주자 베르닌은 그것들을 봉투에 다시 집어넣으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 의외인데. 전 사실 서류를 한 부 더 준비했답니다. ”

 

 

“ 왜죠? ”

 

 

“ 찢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

 

 

“ 하긴 그렇죠. 안 읽은 것도 그래서겠지. 현명한 사람이군요. ”

 

 

 

미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검은 눈을 찬찬히 응시하면서 조금 전보다 훨씬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이제부터 충고 하나 하죠. 강을 건너기 전에. 일단 시내로 들어가면 우리 대화는 전부 기록해야 할 테니까. 난 77년에 모스크바에 있었어요. 당신이 볼쇼이에 있었을 때죠. 당신 무대는 여러 번 봤습니다. 내 심미안이야 교양 있는 관객들에겐 비웃음을 살 수준이지만, 일단 팬이라고 해둡시다. 그래서 말인데,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으로 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지루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온건한 사람은 아니지요. 가브릴로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곳은 말이지요, 미하일, 작은 도시입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는 다르지요. 저 숲들이 보이시나요? 이쪽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습니다. 공항과 기차역과 저 울창한 숲, 그리고 즐라타야 강. 우리는 지금 강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곧 다리를 건너게 되겠죠. 그곳에 시내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손바닥만 한 도심과 주거지. 그리고 숲. 공장들. 아, 하나 빼먹었군. 교회들. 이젠 쓸모없는 곳들이지만. 어쨌든 이게 전부입니다. 운 좋게 도시란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당신처럼 대도시에서 온 분에게 이곳은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겠죠. 그러니 이곳을 손에 넣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곳에도 시 의원들이 있지요. 당원들도 있고 노멘클라투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는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한 사람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유치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당신이 서류를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찢어버렸다면 아예 입을 다물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당원이자 폭군이죠. 표면적으로 볼 때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기 권위를 무시하는 겁니다. 하지만 더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페호프를 만나게 되면 그걸 감추는 쪽이 피차 좋을 겁니다. 그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말썽을 부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족해요. 더는 필요 없습니다. 훌륭한 배우였으니 물론 그 정도는 쉬운 일이겠죠. 아마 10분도 안 걸릴 겁니다. 그리고 난 그 10분이 걱정돼서 이렇게 길게 떠들어댄 거고요. 내 말 아시겠습니까? ”

 

 

“ 그게 당신의 충고인가요? ”

 

 

“ 글쎄요, 난 충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보군요. ”

 

 

 

베르닌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 우리는 곧 노브이 다리로 접어들 겁니다. 당신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아마 배를 타고 곧장 강을 가로질러 갔겠지요. 사실 그게 시내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만 기차역에서 내렸으니 좀 돌아가는 수밖에요. 오른편으로 강이 보이시나요? 즐라타야 강입니다. 당신들의 네바 강보다는 덜 화려하겠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 가장 내세울만한 풍경이죠. 지금 건너는 게 노브이 다리입니다. 물론 스타르이 다리도 있지요. 그건 검은 숲 지대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가장 먼저 생긴 다리는 아니지만요. 그건 가브릴로프 다리죠. 구시가지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이곳도 꽤 넓게 느껴지는군요. 우리의 즐라타야 강이 마음에 드십니까? 당신은 레닌그라드에서 왔으니 도심 한가운데 강이 흐르면 한결 마음이 안정되겠군요. 그래도 우리 쪽 강이 더 낫지요. 범람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여기는 늪을 갈아엎어 만든 도시가 아니거든요. 대부분이 숲이죠. 추위도 덜할 겁니다. 기온이야 당신 살던 곳과 비슷하겠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습한 기후는 아니니까요. 수도원 근방으로 가면 온천도 있습니다. 여러 모로 당신에겐 훨씬 낫겠죠. 그런데 더우십니까? 창문을 좀 여는 게 낫겠군요. 오늘은 햇살이 강해서 좀 답답하군요. ”

 

 

 

쉴 새 없이 떠들다가 미샤의 상기된 옆얼굴을 힐끗 쳐다본 베르닌이 창문을 반쯤 열었다. 찬바람이 불어 들어오자 미샤가 몸을 희미하게 움츠렸다. 베르닌은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 아니면 열이 나서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추우면 창을 닫겠습니다. 어쨌든 기차로 열네 시간은 그렇게 짧은 거리는 아니지요. 비행기를 탔다면 좋았겠지만 아마 여의치 않았겠죠. 정 힘드시다면 병원에 먼저 들르도록 해드리죠. ”

 

 

“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

 

 

“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런데 아직 20분은 더 가야 하거든요. 혹시, 그러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주저 말고 얘기하세요. 어차피 병원 검진은 오늘 일정에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요. 국장 면담 후 곧장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

 

 

“ 내 일정표를 다 외고 있는 모양이죠? ”

 

 

“ 적어도 오늘 일정은. ”

 

 

 

미샤는 입을 꽉 다물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열린 창문을 닫을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와 뺨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열기가 퍼져서 눈동자까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르닌은 자신의 가방 안에 루뱐카 클리닉으로부터 인계받은 앰풀 두 개와 주사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장시간의 기차 여행을 견딜 수 있었다면 남은 20분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국장과의 면담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고 다소 허세를 부렸지만 그 주사를 놓으면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지체될 것이다. 그리고 스페호프 국장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스크바에서 보낸 인물, 자신의 권위를 짓밟아가며 밀어 넣은 반역자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불과 사흘 전에 스페호프가 모스크바 본부로 호출되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건 비공식 출장도 아니었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아주 은밀하게 행동하는 방법도 잘 아는 인물이었지만 그건 대단한 정적들을 다룰 때에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달아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을 정식으로 호출했다. 스비제르스키가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보안위원회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연방에서 공식적인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스페호프는 몹시 분노한 상태로 돌아왔다. 좀처럼 부하 직원들 앞에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은 베르닌이 있는 자리에서도 화를 참지 못했다. 공항에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는 모스크바와 크레믈린에 대해, 루뱐카에 대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역겨운 반역자 주제에 줄을 잘 타서 빠져나온 애송이에 대해서도. 그러나 대부분의 욕설은 총살형 대신 정신교화 수용소 쪽을 관철시켰던 제믈랴코프와 그 애송이를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며 약물을 찔끔찔끔 놓다가 결국 자기 무덤을 판 레닌그라드 쪽 책임자에게 돌아갔다. 베르닌은 모든 서류를 아주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스페호프가 그렇게 화가 난 진짜 이유 두어 가지를 눈치 챘지만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관용차가 다리를 건너 크라스나야 강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미샤의 시선이 자작나무 숲에 못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베르닌이 쾌활하게 말했다.

 

 

 

“ 자작나무를 좋아하시나보군요. 하긴 자작나무를 싫어하는 러시아인은 없지요. 그런데 저건 진짜 숲이 아니랍니다. 여기서는 그냥 공원이나 화단 정도죠. 구시가지 쪽으로 넘어가면 진짜 숲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숲은 정말 크고 울창하죠. 극장 주변 공원에도 나무는 많답니다. 아마 이곳에 나무가 없다는 말과 공기가 안 좋다는 말만은 못할 겁니다. 다른 건 없어도 나무와 물은 많죠. 살기에는 좋을 거예요, 물자는 좀 부족한 편이지만 그거야 일반인들 얘기고 적어도 국가에서 운영되는 극장의 감독이라면 사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좀 지루하긴 하겠지만. ”

 

 

 

미샤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다. 생판 모르는 도시에 던져진 사람치고는 별로 현명한 태도는 아니었다. 베르닌은 그가 완전히 체념한 상태인지, 아니면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것인지 궁금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숙련된 기자가 초점을 맞춰 놓은 카메라 렌즈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는 KGB 감시요원의 친절한 설명보다는 자기 눈을 믿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게 스페호프가 좋아하는 방식일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침내 관용차가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본관 앞에 도착했다. 미샤는 베르닌이 미처 차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먼저 내렸다. 가방은 뒷좌석에 그대로 팽개쳐둔 채였다. 가방과 보안 서약 서류가 든 봉투를 들고 내린 베르닌이 솔직하게 놀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여권을 챙기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것도 당국에 출두하면서. ”

 

 

“ 챙기기 전에 항상 압수당했거든요. ”

 

 

 

미샤는 웃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꾸하며 시멘트 담장을 따라 정문으로 들어갔다. 베르닌은 그에게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의 농담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는 충고를 추가해 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이미 그는 차 안에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

 

 

 

...

 

 

 

내일이나 모레쯤은 가브릴로프 KGB 국장 스페호프와 미샤의 첫 대면 에피소드를 이어서...

 

 

전에 이 본편의 에피소드 몇개를 발췌한 적이 있다.

 

먼저 위의 이야기에서 곧장 연결되는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검색대를 통과하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5368

 

 

그리고 스페호프와의 대면을 마치고 나온 후의 짧은 장면인

햇살. 본편의 베르닌과 서무의 단추 사이 : http://tveye.tistory.com/4451

 

 

같은 파트의 마지막 부분. 숙소에 도착한 미샤와 베르닌이 나누는 이야기는 여기

이웃사촌 미샤와 베르닌, 미샤가 생각한 해법 두가지 : http://tveye.tistory.com/4971

 

 

그리고 이 다음 파트인 3장의 일부인 렐랴의 인터뷰 : http://tveye.tistory.com/5114

 

 

 

이 가브릴로프 본편은 파트별로 시점이나 심리적 화자, 혹은 구조가 조금씩 다르게 서술된다. 나는 다성악 구조를 좋아하는 편이고 쓰기에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본편은 좀 어렵다. 그만큼 집중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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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입추였는데 오늘도 여전히 끈적하고 습하고 더웠다. 더위 퇴치용 한겨울 꽁꽁 페테르부르크 사진 세 장. 셋 다 작년 12월에 갔을 때 찍었다. 궁전광장과 네프스키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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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2. 15:05

추운 날 사진으로 더위 쫓는 중 2016 petersburg2017. 8. 2. 15:05

 

 

 

 

 

작년 12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

 

 

 

 

 

여기는 이삭 광장.

 

 

 

 

 

다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사진. 아래 두 장도 수도원에서.

 

 

 

 

 

 

 

 

 

 

이건 다시 이삭 광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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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 더워죽겠다. 아침 10시부터 폭염경보 문자 온다 꽤꾸약 여름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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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예프스키 섬.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 근방.

 

 

오래전 처음 러시아에 갔을 때 이 근방에 있던 기숙사에 살았었다. 작년 12월에 갔을 때 다시 가보았다. 그때처럼 춥고 얼어붙은 운하를 따라 기숙사까지 걸어가보았다.

 

이곳에 다다르면 시간이 멈춘 것 같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동시에, 몇십년 전 레닌그라드를 떠올리기도 한다. 나는 본편을 쓸때 미샤가 소년 시절을 보낸 동네를 이곳으로 설정했다.

 

 

 

 

혹한의 러시아에서 겨울을 나는 비둘기들을 보면 항상 어딘가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주머니에 먹을게 있으면 조금씩이라도 던져주곤 했다. (근데 제발 푸드득 날지만 말아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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