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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과 작년, 2년에 걸쳐서 9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두 편의 글을 썼다. 실제로는 세 편이라고 해야겠지만 가장 첫번째 단편은 상당히 짧았고 또 이야기들을 잘 풀어나가기 위해 게냐나 미샤보다는 주변인물인 마사지사 루키얀을 내세워서 썼으므로 본격적인 <90년대 페테르부르크와 게냐의 이야기>는 그 후 쓴 두 편이 맞는 것 같다. 재작년에 쓴 글은 <눈의 여왕>이라는 단편이었고 게냐가 풀코보 공항에 지나를 픽업하러 가는 길부터 그날 밤까지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리고 작년에 쓴 중편은 <눈의 여왕>의 시점에서 이틀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룬다. 전자는 3인칭으로 썼고 후자는 게냐의 1인칭으로 썼다. 플롯과 이야기, 캐릭터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쓰는 과정, 거리감, 인물과 이야기를 마주하는 방식은 물론 달랐다. 

 

 

두 개의 글에서 모두 등장하는 키트리와 바질에 대한 에피소드를 발췌해본다. 게냐 역시 무용수이기 때문에 이 90년대 이야기들에서도 발레와 춤 얘기가 이따금 나온다. 

 

 

 

먼저 작년에 마친 중편의 전반부. 게냐는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의 카페에서 조우한 옛 연인 리다를 부축해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키트리와 돈키호테, 그리고 또 다른 것들을 떠올린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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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리다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카페를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지만 리다는 갇히는 느낌이 답답하다며 그냥 계단으로 가자고 했다. 그녀를 부축하는 것은 물론 어렵지 않았다. 나는 무용수니까. 하지만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내내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임신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이힐을 신었기 때문에. 차라리 업거나 안아서 옮기는 쪽이 훨씬 편했겠지만 우리는 이제 그럴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나는 갑작스럽게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기분일 뿐이었다. 리다는 파트너에게 자기 몸무게를 어떻게 실어야 하는지 아는 발레리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예전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으니까. 나는 아마도 한 손으로도 그녀를 들어 올릴 수 있을 테니까. 바질이 키트리를 들어 올리듯. 내가 아직 한 번도 춰보지 못한 배역. 한때 리다를 보며 키트리를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자신만만함, 반짝이는 눈동자와 또렷한 말투, 언제나 약간은 유혹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린스키 입단 초기에 나는 감독이 내게 바질을 준다면 리다를 생각하며 배역을 준비해야지하고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첫 시즌에 돈키호테의 배역을 받았지만 그건 바질이 아니라 투우사였다. 물론 첫 시즌에 받은 역으로는 상당히 큰 배역이었고 추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바질을 추고 싶었고 리다의 반짝이는 눈을 볼 때면 키트리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결국 마린스키에서 바질을 춰보지 못했다. 지금 우리 발레단의 레퍼토리에는 돈키호테가 없다. 아니, 미샤가 말했지. 내년 가을에 올릴 거라고. 음악과 리브레토 모두 준비됐다고. 또 그런 말도 했었다. 마린스키에서는 자신에게 투우사를 주지 않았다고.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기억났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뉴욕에 대해 말했고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내 팔 안의 리다는 이제 키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은빛 모피코트와 샤넬 니트 드레스에 파묻힌 작은 인형 같았다. 조금 가쁜 숨결이 이따금 내 목덜미에 뜨겁게 와닿지 않았다면 더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팔이나 몸에서는 별다른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피 때문에 구름 속의 뼈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구름에도 뼈가 있지. 바지도 입는데 뼈라고 없겠어?  키라의 집에서 미샤가 그런 농담을 했을 때 모두가 웃었다. 맥락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나만 빼고. 내 소외감을 눈치챈 키라는 내게 마야코프스키 시집을 빌려주었다. 교과서에서 형식적으로 접했던 것 외엔 처음이었다. 키라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 다 읽긴 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바지를 입은 구름역시 마찬가지였다. 하긴 나는 미샤나 키라와 문학적 취향이 딱 맞는 적이 별로 없었다. 아마 세대 차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름 속의 뼈라는 말은 계속해서 남았다. 나는 화려한 의상과 미모로 무장했지만 춤 실력이 형편없어 나무토막같이 느껴지는 발레리나들을 볼 때마다 미샤의 그 농담을 떠올리곤 했다. 아마도 미샤는 정반대의 상황을 빗대어 말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

 

 

 

이 중편을 다 쓰고 나서도 한참동안 제목 때문에 고민했는데, 결국은 위의 발췌문에서 가져왔다. 그래서 이 중편의 제목은 <구름 속의 뼈>가 되었는데, 내용과 구조 상 이래저래 어울리긴 한다만 뭔가 좀 호러 느낌이 나서 고민을 많이 했었다. 좀 말랑말랑하고 우아한 제목으로 바꿔볼까 싶기도 했으나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결국은 구름과 뼈로... ㅜㅜ 

 

 

'바지를 입은 구름'은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유명한 장시이다. 

 

 

 

 

 

 

 

 

바질과 키트리, 돈키호테에 대한 게냐의 또 다른 회상은 아래 <눈의 여왕> 중반부 발췌문에 나온다. 바질과 돈키호테에 대한 기억의 일부는 위의 <구름 속의 뼈> 발췌문과도 연동된다. 아래 발췌문 중 중간의 몇 문단은 전에 따로 올린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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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는 게냐의 팔을 가볍게 토닥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배가 고파 미칠 것 같다고 투덜댔다. 눈보라 때문에 한 시간 가까이 착륙을 못 하고 빙빙 도느라 안 그래도 형편없었던 기내식 따윈 이미 다 소화돼버렸다, 입국장에서도 한참 줄을 서느라 어지러워 죽는 줄 알았다, 초콜릿 생각밖에 안 났다고 푸념했다.

 

 

 “ 당분이 필요한데! 트렁크에 초콜릿이랑 사탕 있는데 그거 꺼내는 거 까먹고 뒤에 실어버렸네. ”

 

 

 게냐는 문득 공항에서 만났던 노파가 떠올라서 점퍼 주머니에서 트윅스 초코바를 꺼내주었다. 단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지나는 환성을 지르며 포장지를 쭉 찢고는 초콜릿이 입혀진 비스킷 바를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가느다란 초코바를 오독오독 씹고 입 안에서 굴려 가며 두 개 모두 순식간에 해치우더니 금세 눈을 반짝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난 프랑스 초콜릿보다 슈퍼에서 파는 초코바가 더 맛있더라. 미국 맛 나는 거. 그런 말 한다고 디나가 얼마나 구박했는지 몰라.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네 음식에 너무 집착한다니까. ”

 

 “ 공연은 어땠어요? 신문만 봤는데. ”

 

 “ 괜찮았어. 매진이었고 관객들도 좋아했고 기사도 많이 났어. 디나가 네 안부 묻더라. 같이 오지 그랬냐고 얼마나 아쉬워하던지. 지난번 모렐 기념 공연에서 그 볼레로를 굉장히 좋게 봤대. 미샤가 처음 췄을 때 생각났다고 하더라고. 디나가 그렇게 말하는 건 진짜 칭찬이지. ”

 

 

 

 그들은 잠시 파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이다는 디나 로쉬가 조직위원장을 맡은 모던 발레 페스티벌에 참여해 미샤가 그녀를 위해 안무해준 신작을 췄고 부대 프로그램인 마스터 클래스를 일주일 동안 진행했다. 방송 녹화도 했고 무용 전문가들의 국제 세미나에 패널로 나갔다. 파리 오페라 극장의 지젤 무대에도 올라갔다. 미샤가 4주 동안 파리에 다녀오라고 해서 친한 사람들도 만나고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먹고 실컷 놀 수 있으려니, 여름에 못 간 휴가를 뒤늦게 즐길 수 있겠다고 들떴는데 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때 못지않게 빡빡한 일정이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 그렇지 그 악마가 그렇게 순순히 자기를 쉬게 해줄 리가 없는데, 디나 로쉬나 미샤나 다 한통속에 워커홀릭이란 사실을 깜박 잊은 자신이 바보였다고 툴툴댔다. 물론 말만 그렇지 지나 역시 그 워커홀릭 부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게냐가 그래도 재미있었죠?’ 하고 묻자 지나는 솔직히 말하면 세미나 빼고는 다 나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런 세미나는 말발 좋은 미샤에게나 어울리지 자기는 몸으로 때우는 쪽이 편한데 주제도 너무 딱딱하고 통역까지 붙어서 피곤하기 그지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오히려 지젤은 오랜만에 춘 배역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수월했고 파리 오페라 발레단 파트너와도 합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녀 나이의 무용수가 아직도 고전 발레를 완벽하게 출 수 있다는 것은 웬만한 자기 관리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좀 걱정이 되었는지 지나는 파리로 출발하기 전날까지 지젤 2막을 연습하다가 미샤에게 불평을 했었다.

 

 

 

 “ 나 올해는 클래식은 거의 안 췄는데! 그 무대까지 엮어주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내 나이가 몇인데! 파리 가르니에는 몇 번밖에 안 서봐서 무대도 불편한데. 내 발가락 다 빠지겠다! ”

 

 “ 그래도 지젤은 괜찮아. 잠자는 미녀나 키트리는 아니잖아. ”

 

 “ 뭐야? 그러니까 오로라나 키트리는 힘 딸려서 안 될 것 같으니까 지젤로 잡아줬다는 뜻이야? 나 늙었다는 얘기지? ”

 

 

 

 미샤는 지나가 발칵 화를 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아다지오 동작을 도와주면서 느긋하게 대꾸했다.

 

 

 

 “ 아니, 내가 언제. 그 반대야. 여왕님이야 언제나 원기왕성하지, 그쪽 애들이 힘이 모자라서 감당을 못하는 거지. 파리 가르니에는 잠자는 미녀나 돈키호테는 별로잖아. 지젤이 제일 나아. 너한테도 잘 어울리고. ”

 

 

 

 지나는 금세 누그러진 게 분명했지만 미샤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게냐 쪽을 바라보며 너 같으면 나랑 뭘 출 거야?’라고 물었다. 게냐는 이럴 때 뭐라고 하는 쪽이 외교적으로 적당할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그냥 솔직하게 돈키호테라고 대답했다. 지나는 누가 뭐래도 최고의 키트리였으므로 발레학교 시절부터 그녀와 돈키호테 무대에 올라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고. 그런데 소원이 반만 이루어져서 몇 년 전 마린스키 첫 시즌 때 지나가 키트리를 췄던 무대에 올라가기는 했지만 바질 대신 투우사 역을 받았기 때문에 아쉬웠다고 털어놓았다. 다행히 그 대답에 지나는 완전히 기분이 풀려서 너랑은 언제든지!’하고 게냐에게 키스를 해주고는 미샤와 30분 정도 연습을 더 하고서 가방을 꾸리러 갔다.

 

 

 

 그날 밤 게냐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미샤는 그래도 나보고 지나랑 하나만 추라고 하면 지젤일 텐데. 지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배우니까라고 말했다. 게냐는 미샤가 전적으로 그녀의 기량과 예술적 강점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하는 것이 놀랍다고 생각했다. 극장에서든 평론가들이든 발레 애호가들이든 하나같이 미샤와 지나의 호흡이 가장 뛰어났던 무대라면 지젤이나 돈키호테보다는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70년대에 보리스 아사예프가 재안무했던 라 바야데르를 최고로 쳤다. 거기서 미샤가 췄던 솔로르는 지젤의 알브레히트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강렬해서 지금도 자주 회자되곤 했다. 하지만 미샤는 그 라 바야데르는 솔로르를 위해 안무된 것이었고 지나는 지젤에서 더 돋보였다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게냐는 미샤가 상대 발레리나들을 장식품처럼 취급하며 자기 혼자 무대를 장악했다는 소문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궁금했다. 매주 찾아오는 루키얀에게 슬며시 물어보았을 때 그는 무슨 소리, 저 친구 여자들에겐 깍듯했지. 사내애들끼리 물고 뜯은 거지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그 나이 든 마사지사는 미샤에게 약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미샤는 지나의 장점에 대해 몇 마디 더 얘기한 후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 나한테는 투우사를 안 줬어. 키로프에서는. ”

 

 “ 투우사 타입은 아니잖아요. ”

 

 “ 바질 추고 싶지 않았어? ”

 

 “ 당연히 추고 싶었죠. ”

 

 “ 그런데도 타입이 중요해? ”

 

 

 

 

 그때 게냐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극장에서 나와서 당신에게 왔겠죠라고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목이 꽉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어차피 돈키호테는 우리 레퍼토리에 없잖아요. ”

 

 “ 내년 가을에 올릴 거야, 작업 중이거든. 리브레토랑 음악은 다 정했고. ”

 

 

 

 게냐는 미샤가 재안무하는 돈키호테라면 바질도 키트리도 투우사도 모두 새롭게 변모하리라고 생각했다. 상관없었다. 오히려 더욱 좋았다. ‘그러면 나한테 바질을 줄 건가요?’ 라고 묻고 싶었다. 다시 목구멍 안쪽이 당겨왔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어쩐지 공정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미샤가 먼저 얘기해주기를. 바질에 대해. 돈키호테에 대해. 혹은, 투우사에 대해. 완전히 다른 타입, 새로운 배역에 대해. 그리고 미샤는 정말로 먼저 얘기를 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식으로.

 
 
 

 

 

 

 

 

 

...

 

 

 

 

사진은 분장실의 디아나 비슈뇨바, 그리고 바질을 추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키트리를 추는 비슈뇨바나 테료쉬키나 사진을 올려볼까 했으나 찾기가 귀찮았고 또 나름대로 이 사진들이 어딘가 어울리는 느낌도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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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