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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랑 오늘 이어서 그린 지나와 말썽쟁이 미샤의 뽀뽀 씬 >.< 둘은 진짜로 찐한 사이는 아니고 그저 최고 절친이다만, 미샤가 안무한 작품 레코딩 때문에 뽀뽀 씬 촬영 중.










쉬는 시간에 (너무 찐하게 뽀뽀 씬 촬영에 매진한 나머지) 덥다고 목도리 훌렁 풀어버리고 뭐라뭐라 코멘트 중이신 미샤(...라고 쓰고 사람 피말리는 안무가 + 무용수 + 연출가 + 감독님 이라고 읽는다). 원래 여기에 투덜대는 지나도 한컷 더 그리려고 했는데 졸려서 그냥 여기까지 세장만 시리즈로 그렸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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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오늘 스케치는 12월 기념 밝은 빨간색 스웨터 입고 빵끗 웃는 미샤 :))



분홍색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에게 빨강이란 더더욱 자기 색깔~~ 




미샤 : 무슨 색깔이든 어때~ 패완얼~~~ 나는나는 꽃미남이니까요~~ 


토끼 : 그래 너 잘났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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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몇주 전쯤 그렸던 분홍분홍 빵긋빵긋 미샤 스케치 :) 그는 분홍색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 



아직 발레학교 학생 시절이라 쫌더 해맑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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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1. 29. 22:51

춤, 글쓰기 about writing2018. 11. 29. 22:51





오랜만에 춤추는 미샤 스케치. 위는 오늘 그린 것. 아래는 예전에 그린 것.








...



 미샤는 한 손을 들어올려 자기 눈 위에 갖다 댔다. 무대 위에서 춤출 때처럼. 포즈를 취할 때처럼. 무의식적으로. 그는 결코 그런 습관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공기와 바람을 딛는 듯한 걸음걸이도, 자연스럽게 스텝을 세는 버릇도, 음악이 들려올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손을 움직이는 동작도, 틈이 날 때마다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의 몸이 언제나 의식을 앞설 것이다.





...  위의 짧은 문단은 몇년 전 쓴 단편의 일부이다. 제목은 '서리'.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고 또 쉬웠다. 그리고 행복하고 또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행복이 더 앞섰다. 언제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그 속에는 어떤 행복과 열락이 있고 그것을 대체할만한 것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그래서 글쓰기라는 것, 이것도 하나의 중독이라고, 실은 가장 강력한 중독 중 하나라고 나는 남몰래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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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1. 21. 23:19

빨간색 미샤랑 지나 sketch : 지나와 말썽쟁이2018. 11. 21. 23:19

 

 

 

간만에 미샤랑 지나. 오늘 컨셉은 빨강~

 

 

자기가 안무한 발레 작품 포스터 찍고 있는 말썽쟁이 미샤. 머리색도 붉은색으로 물들였음.

 

 

 

 

말썽쟁이를 친구로 둔 죄로... 그 말썽쟁이가 차린 발레단에 끌려들어가 춤추는 것도 모자라 재원 마련에 동참... 미샤가 물어다 준 뷰티 광고를 찍고 계신 지나. 역시나 빨간 립스틱 광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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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1. 18. 23:25

말썽쟁이 미샤의 기도문 sketch : 지나와 말썽쟁이2018. 11. 18. 23:25

 

 

 

 

가엾은 노동노예 옥토끼를 위해 기도 중인 기특한 미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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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1. 18. 00:52

붉은색 구름머리 카르멘 두 장 about writing2018. 11. 18. 00:52

 

 

 

오늘 오후에 그린 카르멘 스케치 두 장. 크로키로 빨리 그렸다. 오래 전 썼던 옴니버스 단편 시리즈인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주인공 소녀이다. 본명은 미나.  

 

 

내가 똥손인데다 얘도 빨간 곱슬머리라 역시 지나랑 비슷해짐 ㅠㅠ 나중에 두명 스케치를 대조해 올려봐야겠음. 카르멘 머리색이 더 어둡고 짙은 붉은색이고 더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곱슬머리이다. 지나 머리색은 밝은 빨강과 핑크가 좀 섞여 있음. 그리고 카르멘은 밝은 푸른색 눈이고 지나는 녹색 눈이다(흑흑 이 두개 빼고는 구분하기가 어려우니 다 내가 똥손이라 그렇다..) 불같은 성질인 건 둘이 비슷하지만 지나가 좀더 밝고 단순하고 정의감 넘치는 타입이다. 카르멘은 쫌 삐뚤어짐. 정키 이력도 있고 하여튼 이래저래...

 

 

근데 오늘 스케치는 둘 다 예전에 글쓰며 맘속으로 떠올렸던 카르멘보다는 좀 나이들게 그려졌다. 사실은 고딩이라 쫌더 앳된 모습일텐데 그리다 보니... 카르멘은 그려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손에 잘 안 익는다. 전에 그렸던 콘크리트 담장에 기댄 모습(http://tveye.tistory.com/8544)이 그나마 마음 속에서 떠올렸던 모습과 좀 비슷한 편이다

 

 

 

 

하여튼.. 쫌 노안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미안해 카르멘아 엉엉.. 화장 지우면 애기처럼 될 거야ㅠㅠ)

 

수업 땡땡이 까고 옥상에 앉아 구름과자 피우고 있음... (이런 걸 보면 미샤랑 좀 통하는 데가 있어 보이지만... 오래 전 스타차일드 시리즈에서 미샤를 젤 처음 등장시켰을 때 카르멘이랑 미샤가 마주치는 장면이 있었는데, 카르멘은 미샤를 별로 맘에 안 들어 했음. 카르멘 눈에 비친 미샤는 속을 알수도 없어 보이고 좀 음울한 느낌이어서...)

 

..

 

스타차일드 시리즈는 몇개의 단편을 전문, 혹은 일부 발췌해 올렸던 적이 있다. 각각의 링크는 아래 :

 

Lipstick traces(ep.3) : http://tveye.tistory.com/8556

 

open up and bleed(ep.14) : http://tveye.tistory.com/7072

 

staying in the dark(ep.20) : http://tveye.tistory.com/5413

 

Incomparble blind(ep.25) : http://tveye.tistory.com/8448

 

Not enough(ep.26) : http://tveye.tistory.com/4774

 

The stars my destination(ep.27) : http://tveye.tistory.com/8536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http://tveye.tistory.com/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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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1. 7. 22:27

심통난 꼬맹이 sketch : 지나와 말썽쟁이2018. 11. 7. 22:27





아이스크림 못 먹어서 심통나고 우울해진 꼬마 미샤. (숙제 안 해서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 뺏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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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요즘 오래 전에 썼던 단편 시리즈인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에피소드를 이따금 전문이나 일부 발췌해 올리고 있다. 최근 올렸던 두어편은 시리즈 후반부의 이야기들이었다. 오늘은 초반부 이야기를 한편 올려본다. 세번째 에피소드였다. ep.1은 마약에 찌든 소녀 미나(카르멘)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길거리에서 커트를 만나는 이야기였고 ep.2는 카르멘이 커트의 도움을 받아 약을 끊는 에피소드였다. 그리고 이 세번째 이야기는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온 카르멘에 대한 얘기이다. 초반부의 카르멘은 훨씬 더 모나고 훨씬 더 거칠고 동시에 훨씬 더 연약한 아이이다.

 

 

초기 에피소드라 쓴지도 무지 오래됐다. 2001년에 썼으니까 세상에나, 17년 전에 쓴 글이네. 흑흑 나 늙는 건 생각도 안해 엉엉.... 옛날 글이라 지금 쓰는 글과는 문체나 어휘, 접근법 등이 좀 다르다. 하여튼 내용 수정 없이 두어군데 오타만 고쳐서 올려본다. 이 글의 카르멘에게는 지금의 나보다는 그 당시의 내가 훨씬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뭐 당연한 얘기지만.

 

 

별건 아니지만.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단편들 절반 가량이 그렇긴 한데 여기에도 경미한 폭력 등의 묘사가 있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Lipstick Traces

 

 

 

 

 

 


 1981년 2월.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수업이 시작되기 몇 분 전에 교실로 들어왔다. 검은 리본으로 느슨하게 잡아맨 청동빛 곱슬머리와 희미한 붉은빛이 도는 입술, 창백하고 작은 얼굴과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흰색 겨울 코트, 눈을 밟아 더럽혀진 운동화가 책상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어떤 아이들은 놀란 표정을 짓거나 옆자리 친구를 쿡쿡 찌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손을 흔들거나 인사하는 아이도 없었다.

 

 

 심지어 교사조차 그녀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젊은 영어 교사는 단지 출석부에 이름을 체크했을 뿐 공기를 통과하듯 눈을 돌렸다. 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등을 의자에 기대고 머리를 세운 채, 맑은 눈에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하늘빛 광채를 쏟아내며.

 

 

 그녀에게는 역사 퀴즈의 질문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

 

 


 점심시간이었고 아이들은 떠들썩하게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직 겨울이었고 추운 날씨였지만 비싼 사립 학교였으므로 난방 시설도 좋아서 식당은 아주 따뜻하고 쾌적했다.

 

 

 그녀는 배식대로 가서 줄을 섰다. 뒤에서 키 큰 금발 머리 소녀 하나가 서두르다 어깨를 부딪쳐왔다.

 


 
 “ 어, 미안. ”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금발 머리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아’라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앞줄에 서 있는 친구들에게 가버렸다.

 

 

 그 아이는 변함없이 창백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배식대에서 따뜻한 오믈렛과 토마토와 사과 주스를 받아 쟁반에 얹었다. 그리고 잠시 식당 안을 훑었다. 드문드문 비어 있는 자리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곳에도 그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고, 얼굴이 붉어지거나 혹은 더 창백해지지는 않았다. 그저 쟁반을 들고 창가 쪽으로 돌아서 쭉 걸어가 기다란 식탁 가장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근처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들이 일어나 쟁반을 들고 다른 식탁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이전에 함께 수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이었지만 양쪽 다 서로 아는 체를 하거나 함께 점심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신기한 일은 당신이 모두에게 유리되어 홀로 떠도는 우주선처럼 앉아 있는 순간에도 청신경은 레이더처럼, 혹은 주 엔진처럼 꺼지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소리를 듣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음이 살아있는 성운처럼 당신을 덮쳐온다. 인간이란 종자의 대단하기 이를 데 없는 신비이다.

 

 

 그 소음은 다음과 같다.

 

 

 " 걔 왔더라, 봤어? "

 

“ 응, 재수 없게 하얀 옷 입고 얌전한 척 하고 왔더라. ”


 “ 눈 밑에 까만 거 봤어? 팔 감추려고 교실에서도 코트 안 벗는 거 있지. 난방 때문에 반팔 입고 있어도 땀나는데. ”

 


 “ 그런다고 누가 모르냐? 우리 학교 애들 다 알지.

 

 

 

 

 

 

 


 혹은.

 


 “ 쟤 퇴학당한 줄 알았는데... 아니면 전학 갔거나. 저번에 분명히 라커룸에서 헤로인 하다가 걸리지 않았어? ”


 “ 너 코니 말 못 들었어? 아랫동네 쓰레기들하고 쟤하고 뒤엉켜서 약 하고 있는 거 봤다잖아. ”


 “ 아, 나도 봤어. 길거리에 아예 쭈그려 앉아서 거지가 따로 없더라고. ”


 “ 근데 어떻게 다시 학교에 왔지? ”


 “ 뻔하지 뭐. 선생들하고 뒹굴었겠지. ”

 

 


 

 그리고.

 

 


 “ 그래봤자 며칠 나오다가 또 마약이나 찌르러 가겠지. 정말 싫어. ”


 “ 야, 너 그래도 쟤 듣는데서 그런 말하지 마. 쟤 얼마나 성격 더러운 줄 알아? ”

 

 

 

 

 

 그것은 소음이다. 당신의 귀를 아프게 하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웅웅거림. 침묵은 사람을 상처 입히고 소음은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녀는 침묵의 무게에 짓눌려 아파하는 남자를 하나 알고 있다. 그 남자도 정키였다, 이전에는.

 

 

 그녀는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수군거림이나 질시, 경멸과 혐오가 두렵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그녀는 겉돌고 있었다. 함께 앉고 점심을 먹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전에, 그녀가 독한 마약을 손대기 시작하기 전에는 그녀와 사귀고 싶어 하는 남자애들도 꽤 있었다. 그녀는 우아한 얼음 공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많은 남학생들과 사귀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함께 자고 가벼운 마약을 조금 하는 것. 고급 사립학교의 얌전한 학생들.

 

 

 그녀가 막 헤로인의 유혹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청바지를 모델처럼 잘 입는 멋진 선배 하나가 그녀와 사귀고 싶어했던 적이 있었다. 단순하고 착하고 부드러운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게이였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모욕을 받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왜 그것이 모욕일까 하고 그녀는 한동안 의문했다. 그 애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정말로 좋은 것은 결코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스며들지 않았다.

 

 


 이제 아이들은 그녀를 밀어내고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무시했다. 문제는 헤로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거친 말투도 아니었다.

 

 

 그건 그녀의 안에 있는 무언가였다. 땅에 스며들지 못하고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무엇, 마치 플라스틱처럼 유해하고 다른 분자들과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는 구조를 가진 밀폐된 무엇.

 

 

 아마도 그녀가 아는 옛 정키 친구는 그것을 피라고 할 것이다. 오염된 피.

 

 

 그녀는 오믈렛 위에 케첩을 쏟아 부었고 무감각한 눈으로 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포크로 케첩 범벅이 된 오믈렛을 먹었다. 오믈렛은 별로 맛이 없었다. 보통 헤로인은 입맛을 달아나게 만들지만 약을 끊은 지금도 그녀는 입맛이 없었다.

 

 

 오믈렛을 포기하고 사과 주스를 마시고 있는데 남자애들 몇 명이 쟁반을 들고 와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 오랜만이네. 여기 자리 있는 거 아니지? ”

 

 

 그녀는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작년에 한 두 수업을 같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식 체크무늬의 값비싼 스웨터를 입은 남자애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카르멘은 즉석에서 그놈을 ‘스코티쉬’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 여자애들은 헤로인을 하면 예뻐진다면서? 정말인 것 같은데? ”

 

 

 그녀는 주스를 마시다 말고 물어뜯는 어조로 쏘아붙였다.

 

 

 “ 꺼져. ”

 

 

 체크무늬 스코티쉬 옆에 앉은 녀석들이 낄낄거렸다. 약을 사고 싶든지 사생활이 지저분하다고 알려진 그녀와 값싸게 자고 싶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둘 중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다. 직접 약을 구하러 다니기에는 너무 잘나고 고결한 상류층 도련님들 따위는 그녀에겐 너무 고급이어서 역겨웠다.

 

 

 스코티쉬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 이거 왜 그래, 오랜만에 학교 와 가지고. 너 혼자 좋은 거 다 하기야? 예쁜 코트네, 이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한데. ”

 

 

 그녀는 참기로 했다가 녀석이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건드리는 순간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주스 컵을 테이블에 내리쳐 깨고 의자를 휘둘러 놈을 두들겨 팼다.

 

 

 “ 꺼지랬잖아, 개새끼야! 귀가 먹었어? ”

 

 

 운동화를 신은 작은 발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체크무늬 스코티쉬를 걷어차고 의자를 집어던지며 그녀가 욕설을 퍼부었다. 한 손에는 깨진 유리컵 조각을 쥐고 창백한 이마에 흘러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 아래서 격렬한 푸른 눈을 불길처럼 태우며 악을 써대는 작은 악마 같은 그녀를 스코티쉬에게서 떼어놓을 만큼 용기 있는 패거리는 하나도 없었다. 욕을 하고 때리고 걷어찬 뒤 그녀는 유리 조각을 그대로 쥔 채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 학교에 불을 질러 버릴까? ’

 

 

 카르멘이 눈이 쌓인 운동장으로 나오면서 제일 먼저 한 생각이었다. 혹은 기관총을 들고 들어가 식당과 교실에 난사하거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웃었다. 아마 불을 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지저분한 눈밭에 불길이 비치는 모습은 참 볼만할 것이다. 하지만 기관총을 들고 사람들을 쏴 죽이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미움이나 분노, 혹은 억울한 감정이 있어야만 한다. 카르멘에겐 그런 감정이 없었다. 몇 대 때려 주면 그 뿐이다. 그것도 그 스코티쉬 놈이 그녀의 가슴을 만지작거렸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게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어쩌면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쏴 죽이는 사이코들은 단순히 그게 재미있기 때문에 총질을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것이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카르멘은 입술을 깨물었다. 학교에 오기로 한 것은 따분한 실수였다. 그건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약을 끊었으니 건전한 모범생이 되어 보기로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잘나가는 양친은 그녀에게 별 관심도 없었고 서로 정부를 만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르멘은 양쪽의 정부들을 시내의 인접한 카페들에서 동시에 본 적도 있었다. 아버지 쪽이 보다 취미가 고상해서 그레타 가르보를 닮은 젊은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남자는 검은 물개수염을 기른 느끼한 마초였는데 그녀는 그런 남자가 섹시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르멘은 정부를 끼고 있고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며 종종 학교에서 호출을 받으면 잠시 의무적으로 그녀의 불량기에 대해 야단을 치고 그녀가 길거리 정키 아지트에서 며칠째 뒹굴다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신의 부모들이 쿨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교사들이 귀여워할 만큼 공부도 잘 했고 예쁜 아이였다. 물론 몇 달 동안의 무단결석(어쨌든 카르멘은 자신의 부모가 아무렇게나 변명을 지어내기는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한 학기를 깡그리 다시 다녀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적은 좋았다. 그리고 매력적인 소녀였다. 한때는 치어리더들이 그녀를 끌어들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녀의 눈이 굶주리고 황폐한 하늘빛 푸른색으로 변하기 전이었다.

 

 

 아마도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카르멘 자신도 왜 학교에 다시 올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유행하는 화장을 하고 비싼 머리를 하고 연예인과 모델 잡지를 주고받으며 뜻 없이 떠들고 웃는, 졸업 파티의 여왕이 누가 될까 점치고 댄스 상대를 기다리는 단순하고 생각 없는 여학생이 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특별 활동을 잔뜩 하고 성적을 몽땅 에이 플러스로 채워 넣는 학생회장 같은 존재가 되려고 했거나. 하지만 그녀는 위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 눈이 쌓인 운동장을 터덜터덜 걸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혹은 아이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에겐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녀 자신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정말로 오염된 피일까?

 

 

 카르멘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바닥을 폈다.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 조각을 뽑아내 교문 근처의 휴지통에 버렸고 나무 아래 쌓인 눈 위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몹시 쓰리고 아팠다. 흰 눈 위로 피가 번져 새빨갛게 물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어쩌면 약을 끊은 건 바보짓이었는지도 몰라. ’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입을 앙 다물며 교문을 나갔다. 어디로 갈까? 당분간 학교에는 다시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흰 눈처럼 순결한 헤로인의 세계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곱 블럭쯤 떨어진 곳에 지하 정키 아지트가 하나 있었다. 시간은 좀 이르지만 그녀와 잘 알고 지내는 정키 패거리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녀는 호주머니의 돈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찢어진 운동화 속으로 눈이 스며들어왔다. 잠시 카르멘은 슈팅 갤러리에 가기 전에 쇼핑 몰에 들러 새 운동화를 살까 말까 망설였다.

 

 


 * 첫번째 선택 : 쇼핑 몰에 가서 운동화를 산다.


   ... 부정적 측면 : 일단 헤로인을 팔뚝에 찔러넣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은 아지트에서 뒹굴어야 한다. 나갈 곳도 없고 약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

 

 

 * 두번째 선택 : 젖은 운동화를 신고 아지트에 가 뒹군다.


   ... 부정적 측면 : 아지트는 몹시 추워서 운동화와 발을 말리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위험이 있다.

 

 


  
 ** 변수 : 아지트의 정키 패거리들은 고물 스토브를 팔아 치웠을까?

 

 

 


 그녀는 좁은 길을 건너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아지트에 전화해서 아직 스토브가 남아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부스는 두 칸 다 비어 있었다.

 

 

 동전을 찾아 호주머니를 뒤지는데 갑자기 탕탕탕 하는 총성이 울리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옆 부스의 유리가 와장창 깨지며 수화기가 박살났다.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카르멘은 부스 바닥에 엎드렸다.

 

 

 바닥에 몸을 붙이고 공처럼 둥글게 웅크린 채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유리문 너머로 바깥을 살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이 쌓인 길바닥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자동차 바퀴가 끼익 하고 길바닥을 미끄러지는 소리와 욕설, 비명이 꼬리를 이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갱들이 총격전을 하는 모양이었다, 혹은 마피아, 혹은 살인자와 경찰들..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좁은 부스 안에 무릎을 말고 옆으로 엎드린 채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빌었다. 무서워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끝날 거야, 조금만... ’

 

 

 길 위의 눈에 총알이 튀어 박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총성은 그치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어쩌면 그건 그녀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카르멘은 정키 뒷골목에는 훤했고 상당히 거친 패거리들과도 안면이 있었지만 총격전의 와중에 말려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약 쇼크로 죽은 사람은 본 적이 있었지만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총성과 고함 소리, 길을 달려가는 발소리 등으로 미루어 보아 두 패거리가 전화 부스가 있는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총격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는 꼼짝도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다. 부스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담배꽁초와 껌, 진흙과 맥주병 뚜껑 따위를 하나하나 세고 관찰하면서. 그녀는 손톱으로 반쯤 파묻혀 버린 찌그러진 버드와이저 병뚜껑을 파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짓눌려 바닥에 화석처럼 파고 들어가 버린 병뚜껑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뚜껑을 파냈다. 손톱이 부러지고 상처가 났다. 그래도 미친 듯이 악착같이 뚜껑을 긁고 당기고 바닥을 팠다. 숨을 헐떡이고 이를 악문 채 세상에서 가장 값비싸고 눈부신 보석이라도 되는 양 헌 병뚜껑을 파냈다.

 

 

 파낸 병뚜껑을 더러워진 손으로 꼭 쥔 채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는 체크무늬 스코티쉬를 두들겨 패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나올 때 늙은 고양이인 로로를 한번 안아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길을 지나가다 마주친 아버지의 그레타 가르보의 발을 슬쩍 걸어 넘어뜨리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도, 하얀 코트를 입고 온 것을 후회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와 등 위로 유리 조각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어디선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유리 파편들을 눈처럼 뒤집어쓴 채 헌 병뚜껑을 꽉 움켜쥐고 부스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울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떨지도 않고 숨소리도 죽인 채 기묘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녀는 지금 미치도록 약이 필요했다. 헤로인,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 독액이 미친 듯이 필요했다.

 

 

 그녀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신음과 비명,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수많은 발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경찰들이 온 모양이라고 카르멘은 생각했다. 그럼 역시 길거리의 어린 갱들이었을까?

 

 

 경찰들은 정말로 왔다. 그들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조무래기 두세 명을 옮기고 주변을 수색했지만 모두가 쏜살같이 도망쳤기 때문에 남은 것은 깨진 유리와 펑크 난 타이어, 엉망이 된 거리와 겁에 질린 행인들뿐이었다. 경찰들은 행인들에게서 목격 진술을 받고 거리를 훑었다. 카르멘은 유니폼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전화 부스 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경찰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에 깜짝 놀랐다. 제복 차림의 두 경찰관은 유리가 산산이 깨진 부스와 옆 칸의 부서진 수화기를 살피고 수첩에 기록한 후 바닥에 엎드린 카르멘을 공기처럼 지나쳐 갔던 것이다. 심지어 경찰관 하나는 그녀가 엎드려 있는 부스 바닥에 담배꽁초를 버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잠시 멍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하얀 코트를 입고 우박처럼 유리 파편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그녀는 우스꽝스런 눈사람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효력을 발휘하여 하느님이 그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다시 돌아온 공포에 질려 카르멘은 손을 펴보았다. 병뚜껑이 반쯤 파고 들어가 있는 손바닥이 보였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르멘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도저히 부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위험이 지나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한 발짝도 밖으로 내디딜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일이다. 어차피 갱들이 아직 설치고 있다 해도 그녀는 투명인간이니 무슨 상관인가?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비되어 저린 손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어 동전을 꺼냈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며 카르멘은 투입구에 동전을 집어넣고 헤로인 아지트의 번호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어느 미친 정키가 눈이 쌓인 위험한 뒷골목으로 그녀를 데리러 기어 나오겠는가. 게다가 거기엔 스토브도 없다.

 

 

 수화기를 든 채 그녀는 길 잃은 아이처럼 울면서 서 있었다. 빌어먹을, 이건 정말 좋지가 않다, 안 좋은 상황이다. 그녀는 수십 개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투명인간인 그녀에겐 전화할 상대가 없었다. 더러운 일이었다. 누가 그녀를 볼 수 있겠는가?

 

 

 카르멘은 울면서 굳은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           *            *

 

 


 커트는 곧 그녀를 데리러 왔다. 이전처럼 친구의 차를 가지고 왔는데 울고불고 횡설수설하는 카르멘의 전화에 놀란 나머지 신호와 행인들을 전부 무시하고 기록적인 속도로 도로와 골목을 주파해 경찰차 수십 대를 뒤에 달고 올 뻔 했다.

 

 

 전화 부스 안에 웅크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는 카르멘을 본 커트는 그녀가 놀랄까봐 걱정하며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 카르멘. ”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푸른 눈으로 커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 내가 보여요? ”


 “ 응. ”

 

 

 커트는 카르멘을 안아서 차로 옮겼다. 그녀는 두 팔로 커트의 목에 매달리고 무릎으로 그의 허리를 감은 채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투명인간과 그레타 가르보와 고양이, 병뚜껑에 대해 횡설수설했다. 그리고 무슨 체크무늬 스코티쉬에 대해서도 지껄여댔다. 커트는 카르멘을 조금 진정시킨 후 차를 몰아 그녀를 자기 아파트로 데려갔다.

 

 


*           *            *

 

 

 


 거품이 이는 뜨거운 우유와 위스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콜을 섞은 칵테일을 두 잔 마시고 나자 카르멘은 훨씬 진정되었다. 커트는 이미 흰색과는 거리가 멀게 더럽혀진 그녀의 코트와 젖은 운동화와 양말을 벗긴 후 타월로 발을 닦고 슬리퍼를 신겼다. 그리고 그녀를 모포에 감싸 소파에 기대게 한 후 간이 스토브를 가져와 따뜻한 불을 쬐게 해주었다.

 

 

 그녀는 두서없이 학교에 갔던 얘기를 했다. 아이들이 지껄이던 소리와 그녀의 사과를 받고 싶어 하지 않았던 키 큰 금발 머리 여자애와 자리를 피하던 애들과 재수 없는 체크무늬 스코티쉬 패거리들에 대해 얘기했다.

 

 

 “ 난 학교가 싫어요. ”


 “ 나도 학교가 싫었어. ”

 

 

 커트는 머리를 완전히 뒤로 넘겨 묶고 있었다. 가느다란 앞머리가 몇 가닥 흘러내려와 있었는데 은색 블론드로 탈색한 머리카락 뿌리 부분이 어두운 붉은 갈색으로 자라나 있었다. 마치 그가 이마 위에 가느다란 갈색 머리띠를 한 것처럼 보였다. 카르멘은 잠시 커트가 다녔던 미시간의 학교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그녀보다도 더 일찍 학교와 연을 끊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건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가 열세 살밖에 안 된 아들을 정신병원에 보내 뇌세포를 매일 태워대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는 커트의 어두운 적갈색 머리카락이 전기에 그을린 흔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커트의 머리카락을 다시 뿌리까지 탈색해 주고 싶었다.

 

 

 “ 하지만 왜죠? 내 무엇이 잘못된 거죠? ”

 

 

 그녀는 커트가 오염된 피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커트는 스웨터를 벗고 검은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으면서 대꾸했다.

 

 

 “ 그건 질투야. 그 애들이 너를 질투하는 거야. ”


 “ 왜요? ”

 

 

 커트는 잠시 카르멘을 빤히 바라보았다.

 

 

 “ 아름다우니까. ”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 학교에 예쁜 공주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


 “ 그래. 하지만 그건 달라. 찌르고 흔적을 남기는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 그것도 일종의 병이야. ”


 “ 그럼 정말로 내 안에 잘못된 것이 있는 건가요? ”


 “ 난 그게 좋아. ”

 

 

 커트의 음성은 낮고 솔직했다. 카르멘은 어쩐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커트 때문에 가슴이 아파졌다.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서 병뚜껑을 꺼내 커트에게 보여주었다.

 

 

 “ 부스에서 파냈어요. 내 새 부적이에요. ”

 

 

 커트는 찌그러진 버드와이저 뚜껑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들여다보더니 연장 상자를 가져와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여러 겹의 가죽끈 목걸이를 벗어 뚜껑을 끼웠다. 그리고 부적 목걸이를 카르멘의 목에 걸어 주었다.

 

 

 “ 멋있다. ”

 

 

 카르멘은 기분이 좋아져서 커트의 뺨에 입을 맞추곤 소파에서 일어나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던 가방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 이리 와요, 목걸이 만들어준 상이에요. ”

 

 

 그녀는 립스틱을 들고 커트에게 다가갔다. 커트는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 취했구나, 너. ”


 “ 맞아요, 취했어요. 누가 그 독한 칵테일을 만들었더라? 맛있었어요. 한잔 더 만들어줘요. ”


 
 그러면서 카르멘은 커트를 소파에 앉혀놓고 붉은 립스틱을 칠해 주었다. 커트는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 너 즐기고 있지? ”


 “ 왜 빼고 그래요? 내가 자기 팬이었던 거 몰라요? 립스틱이랑 마스카라에 칵테일 드레스까지 차려입고 레코드 재킷 찍던 사람이. ”

 

 

 커트는 웃기 시작했다. 그는 전혀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래서 그를 좋아했다.

 

 

 

 카르멘은 립스틱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유리창에 온통 낙서를 하고 커트가 만들어 준 칵테일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는 지독하게 취해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커트는 취한 카르멘이 아무렇게나 칠해서 입술 옆으로 번진 붉은 립스틱을 닦아낼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는 카르멘을 안아서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리본을 풀어 풍성한 머리채를 베개 위에 펼쳐 주었다. 그리고 발코니로 나가 우스꽝스러운 동물과 나비, 기호와 글자가 붉은색으로 어지럽게 널려 있는 유리창을 바라보며 노래를 하나 썼다. 하지만 거기에는 멜로디가 없었다. 오직 붉은 흔적만 있었다.

 

 

 


FIN
2001. 6. 27

 

..

 

 

맨 위 사진은 2016년 겨울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눈보라 맞으며 걷다 찍은 것. 카르멘은 1981년의 뉴욕에 있으니 아무런 관련 없는 사진이다만 눈과 거리에 대한 사진을 올리고 싶어서 마침 눈에 얻어걸린 사진 올림. 하긴 돌이켜보니 저 당시 무지 힘들고 우울한 시기였으니 감정적으로는 조금 통하는 데가 있으려나 싶기도 하다.

 

 

..

 

 

두들겨 맞은 (성희롱범) 체크무늬 스코티쉬는 이후에도 계속 나온다. 뒤로 갈수록 주요인물 중 하나가 됨. 마크 :)

 

 

..

 

전에 올렸던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몇가지 에피소드 링크는 아래. 전문 또는 일부를 올렸었다.

 

 


open up and bleed(ep.14) : http://tveye.tistory.com/7072


staying in the dark(ep.20) : http://tveye.tistory.com/5413 


Incomparble blind(ep.25) : http://tveye.tistory.com/8448


Not enough(ep.26) : http://tveye.tistory.com/4774

 

The stars my destination(ep.27) : http://tveye.tistory.com/8536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http://tveye.tistory.com/4287 


 ** 카르멘 스케치 : http://tveye.tistory.com/8544

 

:
Posted by liontamer

 

 

 

 

오늘 스케치는 미샤 등짝에 코알라처럼 찰싹 붙어서 콜콜 자고 있는 지나. 그리고 푹신한 소파에 벌러덩 엎드려 꿀잠 자다가 어쩐지 등짝이 무거워져 오는 걸 느끼고 있는 미샤 ㅋㅋ

 

 

지나 : 난방 아직 안되니까 바부팅이 등짝에 붙어서 자야지~ 인간난로~~

 

미샤 : 으응... 이거 모야... 가위 눌리는 거 같아 흐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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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0. 29. 22:43

과거에서 온 아이, 카르멘 about writing2018. 10. 29. 22:43





며칠 전 오랜 옛날의 글을 한편 올리고 났더니(http://tveye.tistory.com/8536  : 내 목적지는 별들) 한번 그려보고 싶어서, 오늘 그려봄. 빨간 곱슬머리이긴 하지만 지나 아님. 지나처럼 보이는 것은 내가 똥손이라서 ㅋㅋ 잘 보면 빨간색 톤도 좀 다르고 눈색깔도 다릅니다. 



오래 전에 썼던 스타차일드 단편 시리즈의 주인공인 카르멘. 본명은 미나.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썼던 것도 거의 십몇년 전이다. 그러니 내 글에 나오는 빨간머리는 얘가 지나보다 먼저였습니다. 성깔은 지나보다 훨씬 윗길이라 고딩임에도 불구하고 마약 폭력 응응 3종세트 마스터... 추근대는 남자애를 두들겨패 늑골에 금가게 만든 전력도 있음. 학교에서 불리는 별명은 펑크 폭력녀(ㅜㅜ)



딱히 넣을 폴더가 없어서 그냥 지나와 말썽쟁이 폴더에 넣음.



... 그랬다가 about writing 폴더로 다시 옮겨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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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의 운하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과는 다르다. 셋 중 가장 늦은 도시. 하지만 가장 문학적이고 환상적인 도시. 전자의 두 도시가 상업과 교역으로 역사 깊은 곳이었다면 페테르부르크는 한 사람의 권력자, 한 인간의 의지에서 태어난 도시, 애초에 견고한 디딤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늪 위에 세워진 도시, 물과 안개와 바람과 진창을 돌로 메운 도시, 인간의 의지로 세워진 도시,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비인간적인 도시, 언제나 악마와 홍수와 멸망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도시이다.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 




이 도시는 운하 때문에 북방의 베네치아라고 불리기도 하고 암스테르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세 도시를 모두 쏘다녔고 운하들 사이사이를 걸어보았다. 베네치아의 좁다랗고 꼬불꼬불한 운하들은 여기서 손을 뻗으면 건너편의 건물 벽이 만져질 것만 같다. 햇살로 씻겨나간 듯 밝고 화려한 색채들. 온통 빛들. 거기에 이곳의 어둠과 추위는 없다. 암스테르담은 베네치아보다는 춥다. 운하도 훨씬 널찍널찍하다. 온통 힙한 느낌이지만 문학적인 깊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페테르부르크의 운하는 그 두 도시와는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디에도 같은 도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도시에 대해 형용할 수 없는 애착과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당연하고도 두려운 이질감을. 나는 서울에 대해서도 그런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인생의 극히 일부만을 보낸 도시가 그토록 강력한 마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경이로워지는 순간이 있다. 



아래는 내가 쓰는 글의 주인공인 미샤가 도시와 운하, 자신에 대해 하는 말 일부이다. 이전에 저 파트를 좀 발췌해서 올린 적이 있다. 페테르부르크.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 운하.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6096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한데. ”



 그는 심각하게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팔 안의 몸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미샤의 몸에는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 세상이란 게 뭔데. 소비에트 연방?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




 
 그는 키로프라고 하지 않고 마린스키라고 했다. 레닌그라드 대신 페테르부르크라고 얘기한 것처럼.



 “ 우리 주위의 모든 것. 전부. ”



 “ 레닌그라드. ”



 미샤가 결론을 내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트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레닌그라드. ”



 그는 미샤가 이 도시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의 깊이에 전율했다. 물 위에 돌로 지어진 도시, 학살과 절망의 도시, 피와 바람의 도시, 허위와 모방의 역사로 가득 찬 옛 수도, 이제는 모스크바의 광휘에 밀려나 퇴색하고 있는 도시를 향해 그런 절대적이고 강력한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 나하고 레닌그라드는 같을지도 몰라. ”



 미샤는 트로이의 귓가에 입술을 마주 댄 채 따스한 숨결을 내쉬며 말했다.



 “ 뿌리가 없어. 돌이킬 수 없이 안이 비었어. 파이프처럼. 운하의 검은 물이 그 안으로 차올랐다가 어디론가 빠져나가. 그래서 사람들을 잡을 수가 없어. 친구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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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래 단편은 2004년 가을에 썼던 글이다. 이 폴더에 몇차례 올린 적이 있는 스타차일드 시리즈에 속한 단편이다. 시리즈는 총 27개의 에피소드와 크리스마스 등의 외전 두어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단편이 마지막 에피소드인 27편이다. 딱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쓴 건 아니고, 저 당시에 원래 28편, 29편도 구상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더 이상 쓰지 못했다. 그렇다고 미완성 시리즈라고 하기엔 애초부터 완성과 결말의 개념을 갖춘 시리즈가 아니었다. 



27편의 제목은 'The Stars, My Destination' 이다. 이 근사한 제목은 유명한 sf 작가인 알프레드 베스터의 동명 소설에서 따왔다. 이 이야기 자체가 카르멘이 베스터의 이 소설책을 훑어보다 저 구절이 마음에 들어서 수첩에 베껴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 나라에는 오래 전에 '타이거, 타이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지금은 절판되었을 것 같긴 하다. 베스터의 장편소설은 이 소설과 '파괴된 사나이'가 번역되었는데 둘다 굉장히 재미있다. 둘 중에선 나는 전자를 더 좋아했다. 더 시적이고 화려해서.



27편의 주요 등장인물은 시리즈의 주인공인 카르멘(학교에서 불리는 본명은 미나. 카르멘은 친구인 커트가 지어준 이름)과 동급생인 마크, 그리고 어떤 여자아이이다. 전문을 올려본다. 이것도 이미 십몇년 전의 글이네(흐흑 시간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야...)



이 이야기는 스타차일드 시리즈의 이전 에피소드들과는 약간 성격이나 결이 다르다. 바로 앞의 26편을 쓰고서 5개월 정도의 텀을 둔 후 썼는데, 그 당시엔 워낙 계속 글을 쓰던 시절이라 이 정도 간격이면 매우 긴 것이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쓰고 나서 '그 동안 뭔가가 약간 변한 것 같다' 라고 느끼기도 했었다. 



에피소드 앞에 붙어 있는 메모는 저 글을 완성한 직후 적은 아주 짧은 후기이다.



..




<2004년 9월의 메모>




정말 오랜만에 글을 한편 완성했다. 스타차일드 시리즈 27편이다.



사실 알프레드 베스터의 소설과는 내용적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다. 다만 작가들의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오랜 생각을 했을 뿐이다. 독자들은 그 작가가 결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 글을 읽는다. 그리고, 가끔은 행동을 한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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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ars, my destination






Deep space is my dwelling place,
The stars, my destination.
.. Alfred Bester, The stars my destination ..






 1981년 11월.




 그날의 메뉴는 커틀릿과 감자튀김이었고 카르멘은 일찌감치 점심을 포기한 채 핼로윈의 부산물인 커다란 초콜릿 봉지와 빨간 수첩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학교 옥상 한 귀퉁이에는 그녀의 비밀 장소가 있었다. 레스의 스튜디오 옥상이 목요일 밤마다 친밀한 마법을 공유하는 곳이라면 이곳은 그녀만의 장소였다. 그녀는 난간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거나 수첩에 글을 쓰곤 했다. 



 아주 가끔씩은 데본 펠이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그들 둘은 모두 야생 짐승들처럼 자신의 구역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수첩에 글을 쓰는 동안 데본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앉거나 누워 악마만이 짐작할 수 있는 뭔가를 하곤 했다.



 입에는 아몬드 초콜릿 바를 가득 물고 눈으로는 펼쳐든 수첩의 구절들을 읽으면서 카르멘은 계단을 올라갔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보라색 잉크로 휘갈겨 놓은 네 줄의 시를 읽고 있었다.



내 이름은 걸리버 포일
내 나라는 지구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별들


Gully Foyle is my name
And Terra is my nation.
Deep space is my dwelling place,
The stars, my destination.






 그녀는 그 구절을 아침에 레스의 낡은 SF 소설책에서 발견했다. 레스와는 달리 추리나 SF 소설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난 데다 레스가 토스트를 굽고 있었으므로 식탁에 앉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책을 뒤적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절을 발견했다. 마지막 행은 카르멘의 마음을 잡아끌었고 그녀는 레스에게 소리쳐 물었다.



 “ 걸리버 포일이란 놈이 나오는 책 내용이 뭐야? ”


 “ 아, 행성과 행성 사이를 순간 이동할 수 있는 남자에 대한 얘기야. ”



 카르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을 꺼내 그 네 줄을 옮겨 적었다. 그리고 책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레스가 가져다 준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다...



 아침에 먹고 온 맛있는 토스트를 생각하자 카르멘은 학교 식당 메뉴에 부아가 치밀었다. 새로 온 요리사는 이른바 베지테리안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가을 학기부터 그들의 점심은 모두가 기름진 고기 요리 일색으로 변했다.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드디어 학비에 걸맞게 메뉴를 고급화했다고 좋아했지만 카르멘은 죽을 지경이었다.



 초코바 토막을 입 안에 전부 밀어 넣고 우물거리며 카르멘은 옥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그녀는 오랫동안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난간 벽에 기대앉아 뭔가를 수첩에 적고 있는 붉은 머리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 그 애의 이름은 미나였다.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던 문제아, 헤로인 중독자, 폭력을 밥 먹듯 휘두르는 펑크 소녀. 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런 일반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그 애가 쉴 새 없이 초콜릿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런 달콤한 것들을 먹어대도 결코 살이 찌지 않는 운 좋은 부류에 속한 아이가 분명했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저녁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전부터는 점심도 거르기로 마음먹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이전보다 조금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마음에 드는 예쁜 옷을 입을 수가 없었고 여전히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인사를 하거나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점심을 거르기 시작한 것은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붉은 머리의 깡패 소녀는 하트 모양의 창백한 얼굴에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짙은 검은색 마스카라와 타들어가는 듯한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있었다. 날씬한 아이들만 입을 수 있는 흰색 니트 스웨터와 골반에 걸쳐진 검은색 진을 입고 여러 겹의 끈이 달린 낡은 부츠 뒷굽으로 시멘트 바닥을 탁탁 치며 수첩을 뒤적이고 있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쁜 아이들, 날씬한 아이들, 쿨한 아이들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혹은, 친구가 많은 아이들, 언제나 바쁘게 놀러 다니는 아이들도.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곤 수업 시간에 집중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다는 것, 좋은 성적표를 받아오면 부모님이 기뻐하며 착한 딸이라고 칭찬을 해 준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교 1등을 도맡아 놓고 하는 아이는 그녀의 절반만큼도 노력하는 것 같지 않았고 그녀의 금발머리 여동생은 언제나 부모님의 귀염둥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뭔가에 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너무나 열정적인 사랑에 휩싸인 연인들에 대해, 예술혼에 사로잡혀 미쳐가는 비극적인 음악가에 대해, 목숨을 걸고 빙벽을 오르는 도전자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하지만 과연 실제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뭔가에 열중한다는 것은 그저 뭔가를 좋아한다는 것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뭔가에 집중한 나머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어이없는 허풍에 지나지 않았다. 그 무엇을 한다 해도,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해도 그녀는 자신의 외모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붉은 머리의 펑크 소녀를 지켜보았다. 미나, 그 애의 이름은 미나였다. 그녀는 미나를 알고 있었다. 이야기 한번 나눠본 적이 없고 (물론 그건 미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과도 마찬가지였지만) 옆자리 한번 앉아본 적이 없지만 알고 있었다. 



 미나는 차가운 시멘트벽에 등을 대고 고개를 숙인 채 초코바를 우물대며 끊임없이 볼펜을 놀리고 있었다. 아마도 뭔가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숙제는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표지가 빨간 작은 수첩에 숙제를 하지는 않았다. 그럼 편지일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쓰는 편지, 연애편지. 그녀가 겨우 한 차례 썼던 것, 하지만 남들이 보면 전혀 연애편지라고 여길 수 없는 어눌한 편지. 그녀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하긴 일반적인 편지 자체도 주고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아주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나는 전혀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싸늘한 바람에 붉은 곱슬머리가 파도처럼 이마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나방이 한 마리 날아와 이마와 뺨에 앉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지만 그것조차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          *           *




 싸늘한 바람이 옥상의 시멘트 바닥을 때리고 지나갔다. 거센 바람이었고 카르멘의 무릎에 있던 초콜릿 봉지가 저만치 데구르르 굴러갔다.



 “ 에이씨. ”



 카르멘은 수첩을 덮고 봉지 쪽으로 손을 뻗었고 그때 다른 아이를 보았다. 연한 갈색 머리의 뚱뚱한 여자아이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난간의 시멘트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초콜릿 봉지는 그녀의 발치 가까이 굴러가 있었다. 카르멘은 그 아이가 대체 언제부터 거기 앉아 있었던 걸까 하고 의문했다. 



 “ 좀 집어줄래? ”



 그녀는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움찔하더니 봉지를 주워 주었다. 어쩐지 카르멘은 그녀가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멘은 봉지를 받았고 건포도와 땅콩이 박힌 초콜릿 캔디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 먹을래? 맛있어. ”


 “ 어... 나 단 거 안 먹거든.. ”



 여자아이는 잠시 후 어색하게 덧붙였다.



 “ 고마워. ”



 카르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수첩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어 하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바람에 초콜릿 봉지가 굴러가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시를 끝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은 이미 가 버렸고 단어도 가 버렸다. 혀끝에서 맴돌고 손끝을 간지럽히는 단어였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 ... 역사 퀴즈 준비는 다 했어? ”



 웅얼대는 듯한 음성으로 여자애가 물었고 혀끝에서 맴돌던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에 카르멘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 퀴즈 따위 알게 뭐야, 어차피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는데. 숙제나 내면 되지. ”


 “ 나, 나한테도 안 물어봐. 그래도 시험이니까 긴장되잖아. ”



 카르멘은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파이처럼 희끄무레하고 넓적한 얼굴에 불분명한 이목구비, 숱이 거의 없는 눈썹 때문인지 무척이나 흐릿한 인상이었다. 두꺼운 안경에 가려진 조그만 회색 눈과 두툼한 양 볼 사이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코, 연분홍색의 얇은 입술, 그리고 카르멘 같은 아이가 두 명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사이즈의 촌스러운 회록색 스웨터와 허벅지에 꽉 끼는 체크무늬 면바지. 분명 수업 한두 개 쯤은 같이 들었던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성이 A로 시작하는 아이라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언젠가 신체검사 때 제일 앞줄에 서 있었던 것 같은 기억 때문이었다.



 “ 그럼 여기 있는 것보다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아?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르멘은 원래부터 이런 스타일의 모범생들과는 전혀 마음이 맞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화가 끊긴 것에 아무런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막 잃어버린 단어를 다시 혀끝으로 끌어올리고 있을 때 소녀가 다시 말했다.



 “ 근데 요즘은 왜 마크랑 안 다녀? ”


 “ 그 개자식이랑 뭐가 좋은 일이 있다고 같이 다녀. ”


 “ ... 멋진 애잖아. ”


 “ 속물이지. ”



 카르멘은 귓가에 울리는 자신의 음성이 너무나 짜증스럽고 퉁명스러운데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짜증이 났다. 기름덩어리 고기 요리를 내놓는 학교 식당 때문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 때문에, 그리고 완전히 잃어버린 단어 때문에.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점심시간은 벌써 끝나가고 있었고 그녀는 역사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단어 하나가 없는 시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볼펜으로 시를 쫙쫙 그어버렸고 분이 풀리지 않아 종이를 부욱 뜯어냈다. 그리곤 바싹 구겨서 시멘트 바닥에 집어던졌다.



 “ 안 내려가? 점심시간 다 끝났어. ”



 여자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 나 시험 안 볼 거야. ”



 그 음성은 무심하고 부드러웠다. 



 “ 그래, 맘대로 해. ” 



 카르멘은 건포도 초콜릿 캔디를 입안에 쑤셔 넣었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카르멘은 그 여자아이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애가 입 밖으로 낸 말은 ‘나 시험 안 볼 거야’란 말이 전부였고 카르멘은 ‘그래서,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뭔데?’라고 묻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그녀는 마지막 남은 캔디의 포장을 뜯고 있었고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전부 잊어버린 채 아침에 레스의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별들. 더럽게 멋진 구절이었다.




*          *           *





 역사 시간은 언제나처럼 지루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카르멘에게는 퀴즈의 질문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게 편했다.



 치어리더 공주들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자랑스럽게 퀴즈의 답을 외쳐댔다. 그리고 마크가 마지막 질문에 답을 했을 때는 모두가 박수를 쳐댔다. 



 의도적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크는 수업 벨이 울린 후에야 들어왔고 카르멘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된 후 카르멘은 마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마크는 갑작스럽게 여윈 것 같았다. 마치 자고 나서 한 뼘이 커진 사춘기 소년처럼. 하지만 그 부르주아 나치 녀석이 여위든 말든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다음 수업은 기하였고 마크는 여전히 그녀 곁에 자리를 잡았다. 삼각형을 가지고 기묘한 증명 문제를 푸는 동안 교사는 마크에게 다가와 그의 성적을 칭찬했다.



 “ 2주일 후에 수학 경시대회가 있는데 우리 학교 대표로 너와 앤더슨을 추천할 생각이야. 준비 잘 해둬라. 진학에도 도움이 될 거야. ”



 그리고 언제나처럼 교사는 카르멘을 스쳐지나갔다. 공기를 투과하듯.




*          *           *




 마침내 벨이 울렸고 아이들이 시끌시끌하게 떠들며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카르멘은 복도를 돌아 나오다 공주 무리를 이끌고 나온 금발 치어리더에게서 팔꿈치 공격을 당했고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기 때문에 냅다 정강이를 걷어차 주었다. 싸움이 나야 할 상황이었지만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슬며시 떠밀었고 그녀는 치어리더 패거리들에게서 벗어나 하교하는 아이들의 물결 속으로 파묻혔다. 운동장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니 마크였고 카르멘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 끼어들 필요는 없어. ”



 마크가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을 때 근처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비정상적으로 날카롭고 히스테릭한 비명 소리였다.



 마치 커다란 블랙홀에 빨려들듯 아이들이 와르르 몰려들기 시작했고 카르멘은 다시 파도에 떠밀렸다. 그리고 시멘트 보도 위에 사지를 뻗고 누워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성이 A로 시작하는 아이.



 소녀는 타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피 웅덩이 위에 누워 있었다. 희끄무레하던 얼굴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코와 입에서 끈끈한 선홍색 피가 두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엷은 갈색 머리칼에는 피와 뇌수가 엉겨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정통으로 부딪쳐 두개골이 박살난 것 같았다. 두 팔과 다리는 기이하게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마치 꼭두각시 춤을 추다가 부러져버린 나무인형 같았다. 



 “ 옥상에서 뛰어내렸나봐.. ”


 “ 누, 누구야? ”


 “ 누구지? ”


 “ 처음 보는 앤데.. ”



 시체는 작고 둥근 눈을 말없이 뜬 채 허공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금발머리 치어리더가 비명을 지르며 기절해 넘어졌고 곁에 있던 남학생 하나가 재빨리 그녀를 안아들고 자리를 피했다.



 “ 대체 누구야...? ”


 “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너무 끔찍해.. ”


 “ 선생님을 불러.. ”


 “ 앤더슨... 앤더슨 아냐? ”


 “ 무슨 앤더슨인데? ”


 “ 몰라. ”



 카르멘은 침을 삼켰다.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흘러내렸다. 비명을 지르게 될까봐 두려웠다. 한번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너무하잖아, 하필이면 수업 끝날 때 뛰어내릴게 뭐야... 30분만 참아줘도 됐잖아.. ”



 카르멘은 욕설을 퍼부으며 아이들을 밀어젖히고 시체 곁으로 달려갔다. 두 손으로 죽은 여자아이의 머리를 껴안았다. 손바닥에 뭔가 끈끈하고 기분 나쁜 점액이 엉겨들었다. 현기증이 났다. 시멘트 바닥이 핑그르르 돌며 그녀에게로 달려드는 것 같았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옥상에 같이 앉아 있던 애였다. 그들 사이에 오고간 대화라곤 서로 이어지지도 않는 몇 마디뿐이었다. 



 앤더슨. 성이 A로 시작하는 아이. 



 카르멘은 그 애의 이름을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 애가 마지막으로 입 밖으로 낸 말은 ‘나 시험 안 볼 거야’란 말이 전부였다. 그녀는 ‘그래서,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뭔데?’ 라는 물음조차 던지지 않았다. 귀찮았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짜증이 났기 때문에. 그 흔한 이름 하나 물어본 적이 없었다. 



 10여 분 후 교사들이 달려와 앤더슨의 시체로부터 그녀를 떼어냈다.




*          *           *





 정신이 들었을 때 카르멘은 낯익은 양호실 커튼 아래 누워 있었다. 이미 창밖은 캄캄했고 누군가가 목까지 담요를 덮어준 모양이었지만 한기가 느껴졌다. 지독한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 같았다. 잠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그녀는 죽은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컵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다.



 “ 마셔,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



 뜨거운 코코아가 목구멍으로 한 모금 흘러들었고 카르멘은 고통스런 온기를 느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고 천천히 코코아를 전부 마셨다.



 컵을 받아들며 마크가 말했다.



 “ 집에 데려다줄게 그만 가자. 여덟 시가 넘었어. ”



 
 카르멘은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따끔거렸다.



 “ 걔는 어떻게 됐어? ”


 “ 앰뷸런스가 와서 병원으로 실어갔어. ”


 “ 죽었어, 그렇지? ”



 
 마크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너랑 잘 아는 사이였어? ”


 “ 아니. ”



 카르멘은 구토기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 아까 옥상에서 잠깐 얘길 했을 뿐이야. 아마 내가 걜 마지막으로 봤던 사람일 거야. "



 카르멘은 차마 ‘살아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마크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셔츠에 묻어 있는 지저분한 피 얼룩을 보았다. 맨 처음에 카르멘은 마크가 앤더슨의 시체를 안고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앰뷸런스가 그녀를 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마크가 품에 안아 옮기기엔 앤더슨은 너무나, 너무나 컸다. 아마도 그의 셔츠에 얼룩을 묻힌 것은 앤더슨이 아니라 카르멘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과 스웨터를 내려다보았고 검붉게 변색된 핏자국을 발견했다. 



 “ 이거 입어. ”



 마크가 학교 엠블럼이 찍힌 미식축구 티셔츠를 건네주었다.



 “ 너는? ”


 “ 난 됐어. 별로 안 묻었어. ”



 카르멘은 머리 위로 스웨터를 벗었고 맨살에 와 닿는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티셔츠를 뒤집어썼다.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껏 갈아입은 옷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꾹 참았다.  



 마크는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녀는 완전히 무감각해져 있었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혼자 일어설 수 없다는 것, 한 발짝도 혼자 내디디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그게 마크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괴롭혔던 금발머리 치어리더라 해도 괜찮았다.



 그녀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난 걔 이름도 몰랐어. ”   


 “ 타냐 앤더슨이야. ”



 카르멘은 놀란 눈으로 마크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그 애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분명 뒤늦게 달려온 교사들 역시 그 애의 이름을 몰랐을 것이다. 앤더슨이라는 성 외에는. 그걸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마크는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나직하게 뇌까렸다.



 “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 ”


 “ 발렌타인 편지? ”



 
 카르멘은 자신이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래, 발렌타인 편지. 별 내용은 없었어. ”



 카르멘은 잠시 마크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는 교내에서 발렌타인 카드를 제일 많이 받는 남학생 중 하나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뚱뚱하고 못생긴, 그리고 아무런 존재감도 없는 여자애의 발렌타인 카드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건 마크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른 잘생긴 남자애들 역시 똑같을 것이다.



 
 “ 근데 요즘은 왜 마크랑 안 다녀? ”


 “ 그 개자식이랑 뭐가 좋은 일이 있다고 같이 다녀. ”


 “ ... 멋진 애잖아. ”


 “ 속물이지. ”



 그녀는 타냐와 나눴던 그 대화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마크에게 전한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한 짓처럼 느껴졌다. 타냐는 마크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것 때문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혹은 자신의 쌀쌀맞은 태도 때문도. 분명 뭔가 큰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부모로부터 혼이 났거나 어디선가 모욕을 당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아주 사소한 그 무엇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몇 마디 때문에 그녀 또래의 한 소녀가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책임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거라고,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마크가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 네 거야. ”


 “ 뭔데? ”



 카르멘은 손바닥 위에 있는 종이쪽지를 내려다보았다. 구겨진 종이쪽지였다. 검은 볼펜 잉크로 휘갈겨진 글자들이 보였다. 그녀가 수첩에서 뜯어냈던 종이쪽지였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찍찍 줄을 긋고 집어던졌던 종이쪽지.



 
 “ 어디서 났어? ”


 “ 타냐 옆에 떨어져 있었어. ”


 “ 근데 왜 들고 왔어? ”



 마크는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한 후 그는 어눌하게 대꾸했다.



 “ 네 글씨잖아. 네가 휘말릴까봐 그랬어. ”



 카르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학교 측에서는 타냐의 자살 동기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유서 깊은 귀족 사립학교에서 학생이 자살한 건 불명예스런 오점이 될 것이다. 자살한 소녀가 문제아로 소문난 아이의 필체가 적힌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희생양을 하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크는 언제나처럼 그녀보다 영리했다.



 “ 그래, 고마워. ”



 처음으로 카르멘은 마크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천천히 쪽지를 폈다. 열 줄 정도 써 내려갔던 시는 마지막 단어에서 막혀 있었고 돌이킬 수 없게 지워져 있었다. 너무나 거칠게 줄을 북북 그어놓아서 글씨를 거의 판독할 수가 없었다. 카르멘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쓰레기였다. 그러니까 결국 타냐는 이 종이쪽지를 쥐고 뛰어내린 게 아니었다. 싸늘한 11월의 바람이 옥상에서 이 종이를 불어 떨어뜨린 것일 뿐이었다. 



 그녀는 종이쪽지를 뒤집었다. 그리고 보라색 잉크로 휘갈겨진 네 줄의 시를 발견했다.



  
 마지막 두 행에는 희미한 밑줄이 쳐져 있었다.  



내 이름은 걸리버 포일
내 나라는 지구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별들




 카르멘은 종이를 바싹 구겼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마크로부터 등을 돌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          *           *




 옥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마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발을 내디뎠다. 계단은 가파르고 길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잠긴 문을 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녀의 곱슬머리가 붕 나부꼈다. 뒤따라오던 마크가 재채기를 했다. 그녀는 마크에게 같이 가자고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뒤에 아무도 없었다면 정말 무서웠을 것이 분명했다. 마크는 양호실 어딘가에서 찾아낸 손전등을 켰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옥상 위로 올라갔다. 넓고 텅 빈 옥상. 



 담배꽁초와 초콜릿 캔디 포장지들이 몇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오직 바람 외에는.



 마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내려가자. 벌써 학교에서 다 보고 갔을 거야. ”



 카르멘은 고개를 저었고 마크의 손에서 손전등을 빼앗았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자신과 타냐가 앉아 있었던 자리를 비추었다.



 그곳에 네 줄의 시가 있었다.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 위에 검정색 사인펜으로 한껏 커다랗게 흘려 쓴 글자들이 저 먼 곳으로부터 밀려드는 네온 불빛과 손전등 불빛, 그리고 흐릿한 달빛 아래 거대한 형광 캔디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내 이름은 타냐 앤더슨
내 나라는 지구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내 목적지는 별들




 카르멘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은빛을 띤 달이 떠 있었다. 하지만 별은 없었다. 뉴욕의 밤하늘에서 진짜 별을 찾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마크에게 손전등을 돌려주었고 나직하게 말했다.



 “ 내려가자. ”




*          *           *





 때로는 단어 하나가 시를 완성한다. 인간의 삶조차도 그렇다. 스쳐 지나가는 한 단어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그건 이름도 마찬가지다. 희미하게 일렁이며 사라지는 숨결 하나만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머나먼 곳에서 번쩍이는 네온 불빛도, 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부드러운 노랫소리도, 바닥에 패인 작은 구멍에 모여 있는 개미떼도, 구겨져 버려진 작은 종이쪽지에 휘갈겨진 몇 줄의 시도.



 타냐는 그게 어디서 온 시인지도 몰랐다. 심지어 미나가 종이를 찢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단지 그녀는 역사 시험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 



 미나가 내려간 후 그녀는 결국 마음을 바꿔먹었다.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분명 나쁜 점수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타냐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고 저려오는 무릎을 잠시 주물렀다. 그리고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종이쪽지를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타냐는 보라색 잉크로 휘갈겨진 네 줄의 시를 읽었다. 마치 그 네 줄의 시가 그녀의 피부로 문신처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심장 한가운데로 깊게 낙인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언어가 그녀를 뒤흔든 적이 없었다. 그녀 자신의 존재를 잊게 해 준 적도 없었다. 그 무엇으로도 타냐 앤더슨이라는 존재를 잊게 해 줄 수 없었다.



 타냐는 검은색 사인펜을 꺼내 그 네 줄의 시를 베껴 썼다. 시멘트 바닥은 울퉁불퉁해서 글씨를 쓰기가 힘들었다. 마지막 단어를 쓰는 순간 사인펜의 펠트 팁이 부러지며 검은 잉크가 손가락 끝에 튀었다. 



 난생 처음으로 타냐는 온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장으로부터 전신의 혈관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타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둠이 밀려오며 하늘을 따스한 검은색으로 뒤덮었고 커다랗게 반짝이는 별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그녀의 발 아래에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부드럽고 달콤하게 불어오는 바람 뿐.



 
 타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그녀는 충동적인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유로웠다. 그녀는 네 줄의 시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잃어버린 단어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싼 별들을 보았다.



 타냐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바람을 디디며 걷는 법을 익혔다. 이제 별들은 도처에 있었다. 그녀는 두 팔로 바람을 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부드럽고 달콤한 숨결을 내쉬었다.
 





FIN
2004. 9. 29



..



아주 오래전에 쓴 글이라 다시 읽으면서 기분이 새로웠다. 




예전에 이 폴더에 스타차일드 시리즈 에피소드들 중 일부를 발췌하거나 거의 전문을 올린 경우들이 있다. 각 링크는 아래. 옴니버스 단편들이라 각각 완결성을 띠고 있다만 하여튼 순서가 있다. 쓴 순서와 거의 일치한다. 뒤로 갈수록 인물들은 성장하거나 변화한다. 두번째 링크의 스테잉 인 더 다크는 미샤가 파리에서 체포되기 직전에 보냈던 (그런데 의외로 아주 평온한) 밤을 다루고 있다. 26편인 낫 이너프는 후반부의 일부만 발췌했었다.




open up and bleed(ep.14) : http://tveye.tistory.com/7072


staying in the dark(ep.20) : http://tveye.tistory.com/5413 


Incomparble blind(ep.25) : http://tveye.tistory.com/8448


Not enough(ep.26) : http://tveye.tistory.com/4774


크리스마스 파편(데본 펠) : http://tveye.tistory.com/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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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고로호바야 거리 사진(http://tveye.tistory.com/8505)에 이어 오늘은 쉡첸코 거리 사진 몇 장.

 

 

여기는 내가 러시아에 두번째로 연수를 갔을 때 살았던 기숙사가 있는 곳이다. 첫 연수 때는 바닷가에 있는 까라블레스뜨로이쩰레이 거리의 기숙사에서 살았고(이때 쥬인과 만났음) 세월이 흘러 다시 갔을 때는 이곳 쉡첸코에 있는 기숙사에 살았다. 이쪽 기숙사 시설이 더 좋고 더 비싸다. 분명 첫 연수 시절엔 이쪽에 있는 기숙사 시설이 더 안 좋았는데 그 사이에 바뀌어 있었음.

 

 

 

 

 

이게 내가 지냈던 기숙사 건물이다 :) 여기는 나름대로 보안이 잘 되어 있었고 외부인은 들어갈 때 여권을 맡겨야 하며 밤 9시인가 10시가 되면 나가야 했다.

 

 

고로호바야 거리에 트로이를 입주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쉡첸코 거리에 갈랴와 료카의 보금자리이자 트로이네 문학 서클의 아지트가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사실 기숙사 양옆과 맞은편에 진짜로 아파트들이 있었고 그 중 한두 집에는 가보기도 했었다.

 

 

 

 

이렇게...

 

 

쉡첸코 거리는 꽤나 조용하고 한적하다. 근처엔 널찍한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도 좋고 주거 지역이다. 대신 조금만 올라가면 공동묘지가 있다(ㅜㅜ) 그래서 그쪽으로 가면 쫌 무섭다.

 

 

이 사진들은 트로이와 미샤의 장편을 쓰고 난 이듬해 여름에 뻬쩨르에 갔을 때 들러서 찍은 것이다. 사실 여기는 관광지도 아니거니와 바실리예프스키 섬에서도 꽤 안쪽으로 들어와야 하는 동네라서 맘먹고 가지 않으면 다시 가기가 어렵다. 옛 추억을 되살릴 겸, 그리고 실제로 갈랴와 료카의 아파트가 어디쯤이고 지금 풍경은 어떤지 찍어놓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고 갔었다. 여행을 가면 주로 네프스키 거리나 이삭 성당 근처의 중심지에 묵게 되므로 여기 오려면 항상 잘 안 오는 7번 버스나 무지 느린 트롤리버스인 10번을 타야 한다.

 

 

이 버스들은 궁전교각을 따라 네바 강을 건너고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우니베르시쩻)을 거쳐 바실리예프스키 섬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버스들은 쉡첸코 거리에서는 서지도 않으므로 날리치나야 거리나 가반스까야 거리에서 내려서 걸어들어와야 한다. (아니면 미니버스인 마르쉬루트카를 타야 하는데 나는 '~에서 내려주세요' 하는 게 피곤해서 웬만하면 그걸 안 타는 편임)

 

 

나는 트로이와 미샤의 장편을 바로 이 장소에서 시작했다. 소설 1부 1장에서 트로이는 이 거리의 이 아파트에서 미샤를 처음으로 만난다. 금서를 읽고 토론하는 문학 서클의 아지트, 그들이 '엄마'라고 부르곤 하는 갈랴와 그녀의 남편 료카가 이 아파트 건물에 산다. 친구들은 일주일에 한두번씩 저녁에 이곳으로 모여들고 금서나 지하출판물, 외국어 문학을 읽고 토론을 하고... 주로 술을 마시며 논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밤, 미샤가 우연히 알게 된 서클 멤버를 따라 이곳에 오고 트로이는 창가에 기대어 있는 그를 본다.

 

 

나는 그들이 나의 루트를 따라 걷게 했다. 그들은 쉡첸코 거리에서 말르이 대로를 따라 걸어나와 길을 건너고 날리치나야 거리의 정류장에서 트롤리 버스를 탄다. 트롤리 버스는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레닌그라드를 느릿느릿 횡단한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을 지나 궁전교각을 따라 네바 강을 건너고 네프스키 대로로 들어서 미샤의 기숙사 가까이 있는 알렉산드린스키 공원까지 간다. 나는 눈을 감고도 그 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길을 떠올리면서 글을 쓰던 순간과, 이미 글을 마치고 나서 그 길을 다시 따라 오가는 순간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하지만 둘다 행복하고 충만한 순간이었다.

 

쉡첸코 거리의 아파트들 사진 몇 장. 여기 어딘가에 갈랴와 료카의 집이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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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고로호바야 거리. 모이카 운하를 끼고 있다. 쭉 걸어가면 양쪽으로 각각 해군성 공원과 사도바야 거리/센나야 광장이 나온다. 중간에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가 교차된다.



여기는 글을 쓸때 주요 인물 중 하나인 트로이의 집이 있는 곳으로 상정해서 자주 나오는 동네이다. 여기서 운하 따라 걸어가면 마린스키(레닌그라드 당시엔 키로프) 극장까지 2-30여분 걸린다. 내 걸음으로 그런 거니까 다리 길고 발빠른 미샤 같은 애는 훨씬 금방 오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극장 바로 근처로 이사한 후에도 트로이네 집에서 자주 자고 가긴 했지만.



트로이를 이 동네에 살게 한 이유는 좀 싱겁게도, 예전에 내가 출장왔을때(페테르부르크엔 맨날 개인적으로 왔는데 딱 한번 무슨 정책연구조사 출장을 온 적 있음) 이 거리의 어느 낡은 아파트에 있는 민박에 묵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위치도 그렇고, 아파트들과 이 도시 특유의 안뜰(드보르)도 그렇고 잘 어울리는 장소라 그냥 여기 살게 만들었음.



사실 트로이랑 미샤가 젤 처음 만나는 곳(문학 서클 친구들의 아지트)인 갈랴와 료카의 아파트는 내가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가 있는 쉡첸코 거리에 있다. 여기는 네바 강을 건너 바실리예스키 섬으로 들어가야 있다. 실제로 기숙사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모델로 했음.



그래서 글 다시 쓰기 시작할 무렵인 2012년부터 몇년 동안은 뻬쩨르 갈때면 고로호바야나 쉡첸코 거리를 비롯해 바가노바 아카데미가 있는 조드쳬고 로시 거리, 마린스키 극장, 그외 여러 동네를 많이 걸었고 사진도 많이 찍고 그랬다.



특히 트로이 나오는 소설의 주요 장소들 여럿은 내가 정말 살았거나 머물렀던 곳들, 잠시라도 다녔던 학교 등 개인적 기억이 서린 곳들을 골라서 썼기 때문에 내밀한 즐거움도 있었다. 물론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와 지금의 페테르부르크는 많이 다르지만. 도시가 갖는 어떤 특성 자체, 영혼 자체는 존속하기 마련이다.

 

* 추가 : 쉡첸코 거리에 대한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8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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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근 5년 전에 개인 홈피에 적었던 글쓰기 관련 노트이다. 당시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잠깐 휴직을 하고 두어달 동안 프라하에서 지내고 있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 반년 쯤 지난 후였다. 나는 프라하에 가기 전에 워밍업으로 미샤에 대한 단편 하나와 장편 하나를 썼다. 그리고 원래 쓰려고 했던 가브릴로프 본편을 시작하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아 한달 가까이 끙끙대다가 프리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글을 시작했다. 그게 가끔 이 폴더에 발췌해 올렸던 수용소 이야기이다.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1~2부는 프라하에서 썼고 3부는 한국에 돌아와서 썼다. 프라하에서는 당시 빌려서 머물던 아파트의 창가 책상과 카페 에벨에서 썼다. 돌아와서는 화정 집에서 썼다. 



아래 메모는 그 글을 쓰기 시작한 직후 남긴 것이다. 긴스버그와 와일드의 시를 각 장마다 에피그라프로 썼는데 그 파트들을 다 고른 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적었던 기억이 난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홈피 대문 문구를 바꾸었다. 꽤 오래 걸어두었던 장 주네의 문구 대신 앨런 긴스버그의 Howl 1장 후반부의 3행을 가져왔다. 정렬 때문에 조금 손을 댔지만 원래는 행이 이렇게 배열된다.
 
 


ah, Carl, while you are not safe I am not safe, and
     now you're really in the total animal soup of
     time

 



마야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긴스버그의 시에서도 행 배열이 중요하다. 그래서 전에 이 시 3장 번역할 때도 나름대로 배열에 맞게 해봤었는데 역시 시를 번역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Howl은 3장을 가장 좋아하지만, 1장도 꽤 좋다. 특히 북받치는 감정으로 내달리다가 저 후반부의 칼 솔로몬을 향한 부드러운 독백 3행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쩐지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 구절로 대문을 바꾼 이유는 어제부터 새로 시작한 글의 마지막 파트에 삽입될 에피그라프이기 때문이다. 전체 글의 에피그라프는 오스카 와일드의 레딩 감옥의 발라드 중 다음 연이다.




It is sweet to dance to violins
When Love and Life are fair:
To dance to flutes, to dance to lutes
Is delicate and rare:
But it is not sweet with nimble feet
To dance upon the air!


.. Oscar Wilde, The Ballade of Reading Gaol ..





 
인용구들을 보면 알겠지만 꽤 슬프고 무겁다. 그 이유는 새로 시작한 글이 원래 쓰고자 했던 가브릴로프 장편의 프리퀄이며(파트 0 정도 되는데, 본편에 삽입하기에는 내용이 무겁고 분위기가 좀 달라서 독립적인 단편이 된다) 수용소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는 'Frost' 직후를 다룬다. 즉 무단이탈과 반체제 행위 때문에 파리에서 레닌그라드로 소환된 미샤가 1981년 7월~ 8월 동안 겪는 일을 다루는데 실지로 미샤는 총 3장으로 구성될 이 단편에서 별로 말이 없다. 행동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각 파트는 서로 다른 인물들의 시점에서 기술된다. (그렇다고 전부 1인칭으로 서술되지는 않는다. 1인칭은 아마도 3장에서만 등장할 것이다)
 



원래는 각 장마다 에피그라프를 따로 두려고 했다. 레딩 감옥의 발라드 중에는 가슴을 찌르는, 그리고 지금 쓰려는 글과 정서가 잘 맞는 연들이 몇개 있다. 그것들은 아래와 같다.
 



He does not sit with silent men
Who watch him night and day;
Who watch him when he tries to weep,
And when he tries to pray;
Who watch him lest himself should rob
The prison of its prey.

 
 
..
  



For strange it was to see him pass
With a step so light and gay,
And strange it was to see him look
So wistfully at the day,
And strange it was to think that he
Had such a debt to pay.

 



.. 원래는 순서대로 1장, 2장에 삽입하고 전체 에피그라프로 넣은 연을 3장에 삽입할 생각이었지만 Howl의 저 글귀가 더 어울려서 전체적으로 바꿨다. 



 
새 글에서 미샤는 춤을 추지 않는다. 이미 그가 몇달 전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기도 했고 그가 처해 있는 상황 상 춤을 추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 에피그라프를 와일드의 저 구절들로 선택했듯 이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단편에서도 춤과 움직임이 갖는 이미지는 여전히 강렬하게 등장할 것이다.



 
근 한달 만에 다시 글을 시작해서 좋긴 한데, 등장인물을 괴롭힐 생각을 하니 마음이 그렇게 가볍지는 않다. 나이든 게 분명하다, 옛날에는 주인공을 괴롭히고 마구 고통을 가해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았는데.





(... 후기 : 그런데 저런 메모를 남기긴 했지만 하여튼 그 수용소 이야기에서 미샤를 실컷 괴롭히긴 했음^^;)



사진은 맨 위와 아래 둘다 이번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것. 메모와는 큰 상관은 없다만 느낌 닿는 대로 두 컷 갖다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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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지 두어달 된 스케치. 떡하니 발레단은 만들어놓고 안무도 하고 작품도 발표하고 이것저것 일은 잘 벌려놨는데 당연히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특히 소련 정부와 공산당에겐 찍힐 대로 찍혀서 매사가 피곤한 구 말썽쟁이 현 발레단 감독님 미샤님. 



미샤 : 아으으으으...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많은 종이들을 봐야 하는 거야 ㅠㅠ 난 예술가인데 왜 자꾸 서류를 보래 흑흑.. 신작 제작비도 따러 가야 되는데 아 귀찮아... 으앙...



지나 : 야! 그러면 일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우씨.. 너때매 나도 딸려서 고생 ㅠㅠ 빨랑 광고나 찍고 와!!! 돈 벌어와!!



미샤 : 힝... 은퇴 무르고 도로 춤을 춰야 하나 ㅠㅠ 다시 춤추면 출연료 무지무지 많이 준댔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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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한국이란 나라에서는 토끼가 인간둔갑을 하고 회사에 가서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나와 말썽쟁이 미샤와 알리사의 반응은 이와 같았으니...









.. 월요병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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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스케치는 고뇌하며 문제해결 방책을 궁리하고 있는 알리사 >.< 소련에서 용납될 수 없는 외국 금서들이랑 지하문학 읽는 서클 만들어서 잘 놀며 잘 지내왔는데 둔탱이 친구들 때문에 청년동맹(콤소몰) 대표 넘에게 뽀록났음.

 

 

현장에서 들킨 순간 알리사의 머릿속에서 파닥파닥 팽팽 돌아가는 생각들은 이러하였으니...

 

 

.. 하여튼 해결은 했다고 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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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 산책 나갔다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자기들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엄청 큰 까마귀 발견한 꼬맹이 미샤랑 지나 :)



미샤 : 옹와 이 까마귀 엄청 크다~ 날개 쫙 펴면 비행기 같겠당~~



지나 : 으앙... 까마귀 무싸와 ㅜㅜ 어제 길 건너는데 까마귀가 막 날라와서 생쥐 잡아채갔어 으아아앙... 쟤는 어제 걔보다 더 커.... 막 날라와서 부리로 나 콱 쫄 거 같아 ㅠㅠ 무싸와... 



미샤 : 까마귀 간지나는데... (난 지나가 더 무싸운데 ㅠㅠ)



... 엄청 큰 까마귀님은 지나가 무서워라 해서 안 그렸음 >.< 지나가 웬만하면 겁이 없는 편인데 까마귀랑 불시점검맨은 무서워함 ㅋㅋ


그치만 쫌 아쉬우니 뻬쩨르에서 찍은 까마귀 사진을 대신 올렸다. 여기 : http://tveye.tistory.com/8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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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스케치는 콜콜 쌕쌕 꿀잠 자고 있는 오렌지 냥이랑 아가 미샤. 간밤에 내가 늦게까지 잠을 못 자서 오늘은 꿀잠 자보고파서 그려보았음 :) 냥이도 세상 편하게 발라당 드러누워 주무시는 중 ㅋㅋ 냥이도 아가 미샤도 따끈따끈 보들보들해서 서로 잠가루 막 퍼뜨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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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9. 21:44

모이카 운하 2017-19 petersburg2018. 10. 9. 21:44





페테르부르크의 가장 중심지는 네프스키 대로이고 이 대로를 가로지르는 대표적 운하가 셋 있다. 판탄카, 그리보예도프, 그리고 모이카 운하이다. 그리보예도프 운하는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등 관광지들 때문에 여행객들로 항상 바글댄다. 그래서 실제로 산책하기엔 판탄카와 모이카 쪽이 더 나은 것 같다. 이것도 위 아래 방향에 따라 좀 다르긴 하지만. 



석양 무렵 모이카 운하를 따라 걸으면 참 좋다. 이쪽이 좀 한적하기도 하고. 검푸른 운하의 수면 위로 저물어가는 황금빛 햇살이 흩뿌려지며 반짝이는 광경을 보는 것도 좋다. 한낮의 눈부시고 찬란한 빛살과는 좀 다른 종류의 빛이다. 이쪽 길을 따라 쭈욱 걸어내려가면 끄라스느이 모스뜨(붉은 다리), 그리고 시느이 모스뜨(푸른 다리)와 이삭 성당이 나온다. 걷다 보면 고로호바야 거리나 사도바야 거리로 빠질 수도 있고. 계속 걸어가면 마린스키 극장 쪽으로도 갈 수 있다. 반대편 방향으로 쭈욱 가면 푸쉬킨 박물관이 있다. 결투 후 푸쉬킨이 숨을 거두었던 곳. 



본편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 도시 곳곳을 다시 떠올렸는데 자주 떠올린 이미지 중 하나는 미샤가 이 운하를 따라 걷는 거였다. 사실 동선을 생각해봐도 이 길 많이 쏘다닐 수밖에 없음. 극장으로도 통하고 박물관으로도 통하고 제일 친한 친구 가 사는 거리와도 통하니... 본편에서 트로이가 고로호바야 거리에 사는데 소련 시절엔 사실 게르첸 거리로 불렸었다. 하지만 글에서는 고로호바야와 게르첸을 섞어서 썼다. 당시 사람들도 거리 명칭들 섞어 부르거나 애칭으로 부르는 적이 많기도 했고. 게르첸 거리란 어감이 나에겐 딱히 와닿지 않아서. 하여튼 미샤는 툭하면 트로이네 집에 와서 자고 저 운하를 따라 걸어서 극장에 출근하곤 함. 나중에 차를 산 후에도 차는 잘 안 끌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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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스케치는 흥에 겨워 랄라랄라 춤추고 있는 꼬마 미샤 :) 길 가다가 제풀에 신나서 갑자기 이러고 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랄라랄라 ㅋㅋ (같이 걷고 있던 지나는 '아휴 바부팅이' 하면서 한쪽으로 슬며시 비켰음 ㅋㅋ) 



덩실덩실... 처럼 보이는 건 옷이 헐렁해서입니다 ㅋㅋ 촉망받는 발레 꿈나무 시절입니다 :))



맘속으로 떠올린 BGM : John, I'm only dancing (데이빗 보위님) 하긴 이 노래는 미샤가 저렇게 춤추고 놀고 있던 시절엔 아직 안 나왔었을테지만. (1972년에 나온 노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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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시 글쓰기에 돌입하진 못했지만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전에 썼던 글들을 마구 뒤섞어가며 읽고 있다. 본편도 읽고 외전도 읽고 데이터구축용 자료들도 읽고 등등... 좀전에 뒤적였던 추리 외전 전반부의 몇 문단 발췌해봄. 이것도 쓴지 4년쯤 됐다. 가브릴로프 본편 쓰려는데 하도 잘 안돼서 '그래, 등장인물들을 데리고 패러디를 먼저 가볍게 써보면 뭔가 실마리가 풀리겠지' 하고는 그 동네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을 우르르 어느 별장 저택에 밀어넣고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만드는 글을 썼었다. 나름대로 코미디였는데 다 쓰고 나니 생각만큼 코미디가 아니었음 흑... 



이 추리 외전의 주인공은 다닐 베르닌과 렐랴였는데 이 외전을 서무 시리즈보다 먼저 썼다. 여기 나오는 베르닌은 본편 베르닌만큼 뺀질거리는 타입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무에 나오는 단추 베르닌만큼 답없는 불쌍한 책상물림 집사도 아니다. 고지식하긴 하지만 하여튼 탐정1이다. 그리고 렐랴도 서무의 렐랴처럼 실속없는 허당이 아니고 여기선 어엿하게 주인공격으로 행동과 추리를 이끌어나감. 탐정1은 베르닌, 탐정2는 렐랴다 :) 



발췌한 부분은 두 토막인데 앞부분은 비오는 날 새벽에 저택에서 시체를 발견한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다닐 베르닌이 앞으로 나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역시 같은 씬의 좀 후반부에서 미샤가 베르닌과 얘기를 나누는 장면임. 나름대로 두 장면 모두에서 나는 코미디를 쓰고 있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뭔가 쫌 안 웃김. 나 아무래도 미샤랑 유머감각이 비슷한가봄 ㅠㅠ



위의 사진은 이번 뻬쩨르 여행 가서 묵었던 첫번째 호텔의 복도랑 전화기. 이미지 하나 넣고 싶었는데 대화들로 이루어진 장면들이라 딱히 맞는건 없고. 근데 첫번째 얘기에서 베르닌이 전화 운운해서 ㅋㅋ 렐랴네 별장은 옛 귀족이 쓰던 저택이니까 저런 전화기가 있을 법함.



레베진스키, 먀흐킨(이름은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코즐로프는 가브릴로프 극장 사람들, 키라는 미샤의 여자친구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레베진스키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베르닌을 노려보았다.



 “ 그건 그렇고 자네가 뭔데 살해가 어떻고 아무 데도 못 가니 마니 하는 말을 지껄이는 거지? 얘기하는 걸 보니 제일 처음 발견한 것 같은데, 그럼 병원에 연락을 했어야지. 아니면 경찰에. 완장이라도 찬 듯한 그 말투는 대체 뭐야! ”



 “ 시체를 제일 처음 발견한 건 내가 아니라 키라 모이세예브나입니다. 전 비명을 듣고 내려온 거고. 어쨌든, 병원이고 경찰이고 지금은 아무 데도 연락이 안 돼요. 폭풍우 때문에 전화가 불통이니까. 적어도 아침까지는 복구 안 될 겁니다. 그 말은, 지금 이 집안에서 수사권을 가진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얘기죠. ”



 “ 기가 막혀서! 스페호프 따까리 주제에, 비서 나부랭이나 해먹고 있는 풋내기가 수사권 운운하다니! ”



 먀흐킨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역시 화가 치밀어 오른 레베진스키가 거들었다.



 “ 자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닌가, 주제 파악 좀 하시지. 여기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가 계셔. 시 의원인데다 극장장이야. 여기 절반 이상이 극장 수석에 시에서 표창을 받은 사람들이고. 자네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



 “ 시 의원이고 수석이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경찰이 올 때까지, 사인이 밝혀질 때까지 여긴 범죄 현장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초지종이 드러날 때까지는 이 집안에 있는 모두가 잠재적 용의자라고 할 수 있죠. 다시 말하지만, 다들 아무 데도 못 갑니다. ”



 먀흐킨과 레베진스키가 입을 딱 벌렸다. 시체를 살펴보던 코즐로프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 나 참, 저렇게 달변이었다니. 어젯밤엔 입이 근질거려서 어떻게 참았을까. 시체가 하나 더 나오면 의회 출마라도 하겠군. ”




..





미샤는 화를 내거나 짜증스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을 뿐이었다. 아마 키라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는 곧 웃음기 가신 얼굴로 베르닌 쪽을 보면서 물었다.



 “ 우릴 하나하나 다 심문하려고? ”



 “ 그럴 거야. ”



 “ 서기가 필요하겠는데. ”



 “ 필요 없어, 내가 직접 기록할 테니까. ”



 “ 수첩은 있어? ”




 베르닌이 고개를 들어 미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제서야 미샤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물론 베르닌은 전혀 웃지 않았다. 렐랴는 미샤의 유머 감각은 보통 사람들과 좀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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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오늘의 스케치는 또 구름과자 폴폴 드시고 계신 말썽쟁이 미샤. 



이렇게 자주 그리니 마치 골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루에 두세개비 이상은 피우지도 못하는 주제에 허세부리고 있는 것임.




미샤 : 야 토끼! 조용히 해! 


토끼 : 뭘, 난 진실만을 말할 뿐인데. 


미샤 : 그래도 주변 사람들은 모른단 말이야! 나 담배도 잘 피우고 술도 잘 마시는 줄 알아!


토끼 : 주변 사람들이 바보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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