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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전에 쓴 본편 중 일부를 발췌해 본다. 전에 종종 올렸던 수용소 중편 중 제3부, 미샤의 절친한 벗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그를 면회하는 장면 중 일부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그 부분을 먼저 읽고 여기로 넘어오면 된다.

 

앞부분 : http://tveye.tistory.com/5551 (수용소 면회실에서, 얼룩들)

 

 

 

이 이야기는 바로 앞부분을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사실 그 부분의 후반부 문단 몇개와 대화 몇개는 지금 올리는 이야기 맨 앞과 겹친다. 잘라내자니 앞이 너무 휑해져서.

 

 

고문을 당해 피폐해진 미샤 때문에 일린은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

 

 

여기 발췌한 이야기 후반부에는 일린의 딸인 라라가 등장한다. 라라는 예전에 올렸던 부활절 단편 Jewels의 1인칭 화자로 나왔던 인물이다. 일린의 큰딸로 그 이야기에서는 열살짜리 소녀로 등장했었다. 이 수용소 이야기는 jewels에서 5년 후를 다루고 있으므로 라라는 이제 15세의 사춘기 소녀이다.

 

 

사실은 jewels보다 이 소설을 먼저 썼고 라라도 여기서 제일 먼저 등장했다. 그 후 어린 라라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면서 라라를 일인칭 화자로 만들어 jewels를 쓰게 된 것이었다.

 

 

'나스챠'는 일린의 전 부인이자 라라의 엄마이다. 라라는 엄마 나스챠와 새아버지, 그리고 여동생 아냐와 함께 살고 있다. 지나이다는 본편에 등장하는 미샤의 파트너인 '그' 지나이다('지나와 말썽쟁이'의 그 지나이기도 합니다), 마르가리타와 이그나트는 일린의 볼쇼이 동료이다. 후자 두명은 jewels에서 일린네 집에 모여 같이 부활절 달걀 색칠하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세자르 모렐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안무가로 미샤의 춤에 매료되어 그를 위해 여러개의 작품을 안무해주었던 인물이다. 물론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jewels와 거기서 파생된 밑자료 half 소설인 dolls의 링크는 포스팅 맨 아래에 붙여 두었다.

 

 

맨 위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궁전광장의 알렉산드르 기념원주 천사 조각상. 예전에 올린 단편 illuminated wall에서 미샤가 저 천사 원주 아래에서 춤을 췄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나는 그 애의 손을 떼어내는 대신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정수리까지 치솟았던 열기와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폭발할 듯한 감정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심장 한가운데 그대로 고여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그런 분노와 증오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샤는 내가 잠잠해지자 한숨을 내쉬었고 손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여름이 아니었다면 벗어줄 재킷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꼴도 보기 싫은 스카프를 다시 주워 그 애의 목과 어깨에 둘러 줘야 했다. 마치 자주색의 죽은 뱀을 둘러주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미샤는 추워서 그런지 스카프를 감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초점이 흐릿한 검은 눈만이 불안하게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감시자들이 들어와 나를 끌어내 체포할까봐 두려운 것 같았다. 그 애가, 나의 미셴카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 어떤 권위와 위협 앞에서도 굴복할 줄 모르던 미샤 야스민이 그런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다니, 두려움으로 내 입을 막고 몸을 떨다니. 문득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난 거의 넘어갈 뻔 했다. 그 애의 몸에서 발산되는 불처럼 뜨거운 열기와 죽어 넘어진 페트루슈카를 연상시킬 정도로 심한 경련이 아니었다면 분명 난 꿈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나는 한 팔을 미샤의 팔 아래로 넣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아 안았다. 다른 팔을 뻗어 허리에 둘렀다. 그러자 경련이 조금 잦아들었다.

 

 

 “ 어깨에 기대. 그럼 좀 편해질 거야. ”

 

 

 “ 네 어깨는 작은데. ”

 

 

 “ 그래도 너 하나쯤은 기대게 해 줄 수 있어. 전에도 그랬잖아. ”

 

 

 “ 그랬지. ”

 

 

 미샤가 순순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짧은 머리칼이 얇은 셔츠를 파고들며 살갗을 찔렀다. 그 애의 이마와 뺨이 닿은 자리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 걱정하지 마. 날 체포하지는 않을 테니까. 벨스키가 보냈다고 했잖아. ”

 

 

 “ 왜 흥분하는 거야? 제일 안전할 줄 알고 네 이름 댔는데. 좀 무서운걸. ”

 

 

 “ 난 약과야. 지나가 왔으면 더 소리 지르고 화냈을 걸. ”

 

 

 “ 지나가 그러는 건 무섭지 않아. 걘 조용한 게 무섭지. 넌 반대잖아. 내 앞에서 화낸 적 없었는데. ”

 

 

 “ 너한테 화내는 게 아냐. ”

 

 

 “ 음, 나한테 화를 내면 안되지. 그럼 라라에게 이를 거야. ”

 

 

 “ 지금 농담한 거야? ”

 

 

 “ 미안, 여전히 재미없어서. ”

 

 

 나는 그의 허리에 두른 팔을 좀 더 바짝 끌어당겼다. 발레리나의 조그맣고 야윈 몸을 품에 안은 것 같았다. 이제 그 애의 열기가 퍼져 와서 내 온몸도 불을 놓은 것처럼 뜨거웠다. 주사를 놓든 약을 먹이든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지만 저 문을 열면 그 혐오스러운 알렉산드르 크냐제프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뱀처럼 웃으며 ‘역시 30분을 다 채우기란 무리였겠죠. 이 친구 상태가 아주 안 좋아서’ 라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떠들어댈 것이 분명했다. 그놈들의 손에 미샤를 돌려보내느니 아프더라도 단 5분, 10분이라도 더 내 어깨에 기대 있게 하는 것이 백배 천배 나았다. 미샤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자기 몸을 완전히 내 팔에 맡기고 있었다. 등을 두어 번 쓸자 스웨터 아래로 뼈마디가 그대로 만져졌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그러나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 얘기해봐, 미셴카. 그자들이 어떻게 했는지. ”

 

 

 “ 왜? 네겐 그런 게 중요해? ”

 

 

 “ 응. ”

 

 

 “ 왜 중요하지? 어차피 해결되는 일도 없는데. ”

 

 

 “ 그냥 얘기해봐. ”

 

 

 “ 기억이 잘 안나. ”

 

 

 “ 넌 대답하기 싫으면 항상 그렇게 얘기하잖아. ”

 

 

 “ 그럼 양치기 소년인가. ”

 

 

 

 미샤는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그 애가 어떻게 아직도 웃을 수 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 근데 정말이야, 스탄카. 기억이 나지 않아. 그자들 이름도 생각이 안나. 주사는 좀 맞았던 것 같아. 아팠던 것 같기도 해. 잘 모르겠어. ”

 

 

 “ 피 흘리고 있었어. ”

 

 

 “ 누가? ”

 

 

 “ 너. 사진에서 봤어. ”

 

 

 “ 무슨 사진? ”

 

 

 

 그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레닌그라드로 소환된 후 파리가 얼마나 시끌시끌했는지. 해외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지식인들, 사상가들, 인권단체들이 그의 구명을 위해 어떤 시위를 벌였는지. 오히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있던 우리들보다도 그쪽 사람들이 재판에 대한 정보를 더 먼저 알아냈다.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던 라라는 단파 라디오로 프랑스 방송을 잡아냈지만 그 아이의 프랑스어 실력은 뉴스를 이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라는 수차례 반복되는 미샤의 이름과 몇몇 단어밖에 알아듣지 못했고 새벽에 엉엉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 아빠, 프랑스 라디오에서 미셴카 얘길 하고 있어. 심각한 얘기 같은데 못 알아들었어. 방금 엄마가 라디오 뺏아갔어. 그런 거 들으면 잡혀간대. 어떻게 해, 못 알아들었어... 그 주파수 기억도 안나. 다시 못 찾을 거야... 무서운 얘기였으면 어떻게 하지? 뉴스였어. 자꾸 이름이 나왔어. 나쁜 일인 거야? 미셴카에게 나쁜 일 생긴 거야? 아빠, 구해줘. 그 사람 구해줘. 제발 어떻게 좀 해봐, 아빠 아는 의원님들에게 부탁 좀 해봐... ”

 

 

 

 라라를 달래고 안심시킨 후 나는 볼쇼이 발레교사인 마르가리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으로 와 달라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극장에서 프랑스통으로 불렸고 원어민처럼 불어를 구사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마르가리타는 동료인 이그나트를 데리고 왔다. 둘 다 미샤가 볼쇼이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들어오자마자 마르가리타는 문을 잠그고 창문마다 커튼을 친 후 싱크대와 욕실의 물을 틀어놓았다. 그녀는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그 뉴스 듣고 있었어. 안 그래도 여기 오려던 중이었어. ”

 

 

 “ 난 라라가 전화해서 알았어. 내용이 뭐였어? 안 좋은 얘기였어?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

 

 

 “ 재판 얘기였어. 파리에서 정보를 입수했대. ”

 

 

 

 그때까지 우리는 미샤가 비공개 재판을 받아 어딘가에 수감되었다는 사실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 프랑스 방송은 훨씬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허술하고 형식적인 재판 절차에 대해 지적했고, 재판정에 소환된 증인들의 이름까지 몇 명 폭로했다. 모두 당 강경파의 측근들과 미샤의 격렬한 반대파들이었다. 그런데 그자들이 증언대에 올라가 온갖 밀고와 음해를 쏟아 붓는 동안 그 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들, 제대로 된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은 단 한 명도 소환되지 않았다. 우리는 재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았다.

 

 

 그 라디오 방송은 미샤의 자기 변론이 겨우 2분도 안되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30분도 걸리지 않아 판결이 내려졌다는 얘기와 더불어 당 내 강경파 일부는 훨씬 가혹한 처벌을 주장했기 때문에 재판 결과에 실망했다는 정보를 흘리기까지 했다. 순진한 이그나트는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파리에서 이 모든 끔찍한 사실들을 알아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벨벳 덮개를 뒤집어씌운 어항 안에 갇혀 있는 물고기들이었으니까.

 

 

 그 방송을 듣고서야 우리는 그 애가 7년형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반체제 선동과 당에 대한 불복종, 체제 전복 위협 등 그 애에게 씌워진 죄목은 끝이 없었다. 이후 파리에서 조직된 구명위원회의 팸플릿에 따르면 그 더러운 놈들은 스파이 죄목까지 씌우려고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마지막에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 그건 르 피가로와 뉴욕 타임즈 등 유명 일간지에 컬러로 실렸다. 마르가리타가 이즈베스티야 뭉치 안에 르 피가로를 숨긴 채 사색이 되어 달려왔을 때 우리 집에는 이미 여러 가지 경로로 그 사진을 입수한 지인들이 다섯 명이나 와 있었다. 극장 직원들과 예술가들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까봐 걱정에 빠진 노비코프가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르니 한동안 모여 다니지 말라고 전화로 경고하지 않았다면 아마 미샤의 지인이나 팬들 여럿이 더 몰려왔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미샤와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모스크바에서는.

 

 

 

 누구도 그 사진의 출처를 알지 못했다. 신문사들은 익명으로 사진을 제공받았다고 입을 모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은 총 세 장이었는데 두 장은 측면이었고 한 장은 정면이었다.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그 애를 들어 옮기고 있었다. 측면 사진 한 장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팔목에 튜브를 꽂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정면 사진을 보았을 때 내 머리 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자들이 결국 저 애를 죽였구나...

 

 

 

 사진 속에서 그는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진 채 머리를 젖히고 있었다. 들쭉날쭉하게 잘린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에 유화 페인트처럼 불규칙하게 엉겨 있었고 피부는 시체처럼 푸른빛이 도는 흰색이었다. 감긴 눈 아래로 속눈썹이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검은 페인트를 칠한 듯 무겁게 처진 채 마구 뒤엉켜 있었다. 코와 입에서 시작되어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는 너무 붉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그 애의 팔과 다리가 나무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의료 요원들은 그 애를 죽은 짐승처럼 들어 옮기고 있었다. 
 

 

 

 


 그날 지나이다가 모스크바로 왔다. 키로프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딤카 아르부조프와 함께였다. 그녀는 이제 울지도 않았고 흥분하거나 공포에 질리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분노해 있었던 것이다.

 

 

 “ 세자르 모렐이 내일 모스크바에 올 거예요. 파리 공산당원 자격으로. 로쉬도 함께 입국하려고 했지만 물론 거절당했어요. ”

 

 

 “ 그자들은 세자르가 와도 만나주지 않을 거야. ”

 

 

 

 실제로 그랬다. 당에서는 형식적인 예의와 절차를 갖춰 모렐을 맞이했지만 그의 면담 요청은 거부했고 그가 직접 가져온 파리 공산당 지부와 프랑스 문화예술계의 탄원서도 무시했다. 그 유명한 인물이, 전후 30여년 이상 유럽 무용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 거장, 한결같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열렬한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세자르 모렐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왔는데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모스크바에서는 모렐을 초청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모렐이 미샤의 춤을 보고 반해서 그를 위한 작품을 안무해 볼쇼이로 날아왔을 때 당에서는 대대적인 선전을 펼쳤고 모렐을 서방의 공산 영웅이자 진정한 예술가로 숭배하고 떠받들었던 것이다.

 

 

 지나이다는 키로프를 비롯한 레닌그라드 극장들에서 미샤를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해외에서 그렇게 구명 운동을 하고 있는데 동료들이 모른 척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치를 떨었다. 나도 볼쇼이와 므하트를 포함한 몇몇 극장에서 서명을 받았다. 그건 꽤 위험한 일이었고 후환이 생길 가능성도 많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날 우리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같은 시각에 성명을 발표하고 당에 탄원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성명서를 낭독하는 중에 보안위원회에서 들이닥쳤다. 나는 다섯 시간 동안 구금되어 있었지만 별다른 심문 없이 풀려났다. 탄원서는 압수당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연행되었던 지나는 한 시간도 안 되어 풀려났고 아무 것도 압수당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벨스키가 나를 풀어주도록 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 쪽은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힘을 쓴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는 미샤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진이 공개되고 이곳에서 자행되는 끔찍하고 더러운 일들이 서방 제국주의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좋은 먹잇감이 된 상황에서 그자들이 미샤를 살려놓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외 언론들에서는 미샤가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해 중태에 빠져 있다고 떠들었고 모스크바 측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했다. 미하일 야스민은 반체제 선동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며 소비에트 법률에 따라 정상적으로 수감되어 있으니 남의 나라 일에 쓸데없는 참견 따위는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라라는 나스챠에게 한동안 아빠와 지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나스챠는 그 애를 보내주지 않았다. 내가 그 애를 위험에 빠뜨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라디오를 숨겼고 딸아이의 스크랩북들도 몽땅 태워버렸다. 한 번만 더 집에서 미샤의 이름을 거론하거나 외국 신문 따위가 발견되면 일 년 동안 외출을 금지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딸아이가 울면서 전화했을 때 내가 나스챠와 이혼했던 이유를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

 

 

 

 라라는 학교를 빼먹고 극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열다섯 살도 채 안된 아이가 어디서 정보를 입수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라라는 이미 사진과 기사를 보았고 내가 잠깐 연행되었던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잠을 못 자고 너무 울어서 얼굴이 퀭했다. 라라는 내가 무용수들을 데리고 월말에 올릴 작품 리허설을 하는 동안 얌전하게 복도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내가 나왔을 때 딸아이는 바람처럼 달려와 두 팔로 날 끌어안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애였다.

 

 

 “ 아빠, 아빠! 너무 무서웠어! 아빠가 미셴카처럼 끌려갈까봐, 못 돌아올까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 ”

 

 

 

 내 품 안에 파고든 라라의 심장이 너무 팔딱거려서 조그만 새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라라는 흐느껴 울면서 나를 더 꼭 껴안았다.

 

 

 

 “ 그래도 그 사람 살아 있는 거지? 죽는 거 아니지? 그냥 조금 아프기만 한 거지? 아빠, 기도해. 아침에, 자기 전에. 미샤 구해달라고 기도해, 그럼 괜찮을지도 몰라. 나 계속 하고 있어, 엄마 몰래. 내 친구들도 같이 하고 있어. 아냐한테는 얘기 못 했어, 사진 보면 충격 받을까봐. 근데 아냐가 어제는 갑자기 우리 같이 별장에 갔던 얘길 하면서 다시 가고 싶다고, 미셴카 보고 싶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으면서 라라가 주머니에서 나무로 깎은 십자가를 꺼내 내 팔목에 걸어주었다.

 

 

 “ 이거 내가 만들었어, 아빠도 하나 가지고 있어. 여기 입 맞추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 주실지도 몰라. 꼭 해야 해, 최소한 하루에 두 번. 바빠도 두 번은 꼭 기도해야 돼, 아빠. 약속해. ”

 

 

 

 그래서 나는 약속했다. 하루에 두 번, 아니, 사실은 틈나는 대로 기도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독실한 신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건 라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살짝 비스듬하게 깎인 나무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되풀이하는 순간이면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변했다. 어쩌면 우리의 별 것 아닌 신앙, 이성과 과학과 당의 탄압 속에서 옛 시대의 그림자처럼 변해버린 낡은 정교가 결국 옳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벨스키가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미샤, 만신창이가 되어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그래도 내 어깨에 기댄 채 여전히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있는 내 친구의 옆에 앉아 있으니까.

 

 

 


 미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 스탄카, 무슨 사진? ”

 

 

 나는 소파와 벽과 책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청 장치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나 같은 일반인에게 그런 대단한 장치가 보일 리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다 아는 얘기였다.

 

 

 

 “ 의료진이 너 옮기는 사진. 누가 몰래 찍어서 파리와 뉴욕에 보냈어. 그것 때문에 해외에서 난리였어. ”

 

 

 “ 아, 그랬군. ”

 

 

 “ 벨스키가 말 안 해줬어? ”

 

 

 “ 사진 얘긴 안 해줬어. 내 허락도 없이 그런 걸 찍다니. ”

 

 

 “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는 걸.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쨌든, 그 사진에서 너 피 흘리고 있었어. 그래서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

 

 

 “ 엄청 보기 싫게 나왔겠네. 태워버려. ”

 

 

 “ 외신에 다 났는데 어떻게 태워. 뉴욕에서 그걸로 전시도 했어. ”

 

 

 “ 라라한테 절대 보여주지 마. ”

 

 

 “ 아, 그래. ”

 

 

 

 미샤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내게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에어컨을 꺼줘야 할 것 같았지만 단 일 초도 그 애를 소파에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이마에 손을 얹자 금방이라도 물집이 잡힐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

 

 

 

 

맨 위 메모에서 언급했던 jewels와 dolls 링크는 여기.

 

 

부활절 단편 Jewels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밑자료 half : Dolls


01. 에벨리나(http://tveye.tistory.com/6960),
02. 미샤(http://tveye.tistory.com/6964)
03. 일린(http://tveye.tistory.com/6969)
04. 에벨: http://tveye.tistory.com/6972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몇년 째 쓰고 있는 글이 있는데 오랫동안 멈춰 있어. 중간중간 다른 글들을 써서 마치기도 하고 미완으로 남겨두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 '정말로' 쓰고 있는 글은 하나야.' 라고. 그게 바로 가브릴로프 본편이다.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구상했고 계속해서 머릿속과 마음속에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는 글이다.

 

 

다른 글들은 사실 다 여기서 새끼친 것들이다. 서무 시리즈도. 게다가 트로이를 내세운 장편 역시 사실은 이 본편에서 나왔다. 트로이는 원래 이 본편에 잠깐 등장하는 인물이었는데 플롯을 구상하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할까?' 라는 의문을 품었고 결국 그의 목소리와 그의 시선을 빌려 꽤나 긴 소설을 썼었다. 최근 여러번 발췌한 미샤의 수용소 단편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을 위한 프리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본편은 이미 몇년째 120여페이지에 머물러 있다. 뒤를 이어서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고, 사실 전체 플롯과 구조, 메인이 되는 이야기들과 작은 에피소드들도 근 7~80% 정도는 모두 구상되어 있는데 쓰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보통 글을 자유롭게 춤추듯이 쓰는 것을 좋아하고 한번 몰입하면 쉽게 써나가는 편인데 이 가브릴로프 본편만은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아마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직 여기에만 집중했을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년 동안 나는 너무 여러가지로 산란해져 있었고 특히 회사 때문에 더욱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이 본편을 꼭 쓰기는 할 것이다. 언제가 됐든 마칠 것이다. 그럴 거란 사실을 자신의 마음 속으로 알고 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의 2장이다. 1장은 미샤가 부임해오는 극장의 무용수 하나의 시선으로 전개되었고 이 2장은 기차로 가브릴로프에 호송된 미샤가 그의 KGB 감시요원인 다닐 베르닌과 처음 대면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맞다, 서무 시리즈의 그 다닐 베르닌, 단추청년, 왕재수 미샤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집사 베르닌이다. 하지만 본편의 베르닌은 서무 시리즈에서 희화화시킨 단추 베르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사실 진짜인데...어느새 그는 단추청년이 되었지 ㅠㅠ 이 장면 중 중간 정도는 전에 좀 발췌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첫 대면 에피소드를 온전하게 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기 다시 올려본다.

 

 

..

 

 

맨 위 사진은 가브릴로프...는 당연히 아니고, 2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찍은 사진. 레트니 사드(여름 정원). 발췌한 에피소드에서 미샤와 베르닌이 숲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와서 뭔가 숲 느낌 나는 사진이 어울릴 것 같아서 올려봄.

 

 

...

 

 

가브릴로프는 물론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이다. 하지만, 드넓은 러시아(및 구소련) 땅 어딘가에 이 이름 붙은 소도시가 실제로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이름이고... 대천사 가브리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 야스민이 가브릴로프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보안위원회에 제출할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꽤 두툼한 보안 서약 서류에 서명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지만 다닐 베르닌은 거의 친절하기까지 한 어조로 서류에 그가 가브릴로프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미샤가 서류를 들춰볼 기색을 보이지 않자 베르닌은 허가 없이는 시계를 넘어갈 수 없으며 모든 시외전화는 보안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상대의 침묵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류의 제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했다. 약 20페이지 가량의 서류는 갱지에 타이핑되어 있었고 노끈으로 허술하게 묶여 있었다.

 

 

“ 붉은 담장 도착하기 전에 차 안에서 읽어두는 게 좋을 걸요. 일단 제출하고 나면 내용 확인할 기회 없을 테니까. ”

 

 

미샤는 서류를 읽는 대신 붉은 담장이 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가브릴로프에 도착해서 그가 제일 처음 했던 말일 것이다. 기차역에서 베르닌에게 인계된 이래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 아, 그렇지. 당신은 여기 사람이 아닌데. 붉은 담장은 말이죠, 우리 사무실을 가리키는 겁니다. 오해는 말아요, 담장이 있긴 하지만 붉은색은 아니니까요. 크라스나야 강변에 있어서 그런 겁니다. 모스크바에서는 루뱐카라고 부르듯이. 뭐 그런 식인 거죠. 쓸데없는 설명인가요?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약 10여분 정도 기다렸고 그가 전혀 서류를 읽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맨 마지막 장을 펼쳐주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미샤가 서명을 한 후 펜과 서류를 돌려주자 베르닌은 그것들을 봉투에 다시 집어넣으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 의외인데. 전 사실 서류를 한 부 더 준비했답니다. ”

 

 

“ 왜죠? ”

 

 

“ 찢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

 

 

“ 하긴 그렇죠. 안 읽은 것도 그래서겠지. 현명한 사람이군요. ”

 

 

 

미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검은 눈을 찬찬히 응시하면서 조금 전보다 훨씬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이제부터 충고 하나 하죠. 강을 건너기 전에. 일단 시내로 들어가면 우리 대화는 전부 기록해야 할 테니까. 난 77년에 모스크바에 있었어요. 당신이 볼쇼이에 있었을 때죠. 당신 무대는 여러 번 봤습니다. 내 심미안이야 교양 있는 관객들에겐 비웃음을 살 수준이지만, 일단 팬이라고 해둡시다. 그래서 말인데,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으로 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지루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온건한 사람은 아니지요. 가브릴로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곳은 말이지요, 미하일, 작은 도시입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는 다르지요. 저 숲들이 보이시나요? 이쪽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습니다. 공항과 기차역과 저 울창한 숲, 그리고 즐라타야 강. 우리는 지금 강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곧 다리를 건너게 되겠죠. 그곳에 시내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손바닥만 한 도심과 주거지. 그리고 숲. 공장들. 아, 하나 빼먹었군. 교회들. 이젠 쓸모없는 곳들이지만. 어쨌든 이게 전부입니다. 운 좋게 도시란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당신처럼 대도시에서 온 분에게 이곳은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겠죠. 그러니 이곳을 손에 넣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곳에도 시 의원들이 있지요. 당원들도 있고 노멘클라투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는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한 사람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유치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당신이 서류를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찢어버렸다면 아예 입을 다물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당원이자 폭군이죠. 표면적으로 볼 때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기 권위를 무시하는 겁니다. 하지만 더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페호프를 만나게 되면 그걸 감추는 쪽이 피차 좋을 겁니다. 그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말썽을 부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족해요. 더는 필요 없습니다. 훌륭한 배우였으니 물론 그 정도는 쉬운 일이겠죠. 아마 10분도 안 걸릴 겁니다. 그리고 난 그 10분이 걱정돼서 이렇게 길게 떠들어댄 거고요. 내 말 아시겠습니까? ”

 

 

“ 그게 당신의 충고인가요? ”

 

 

“ 글쎄요, 난 충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보군요. ”

 

 

 

베르닌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 우리는 곧 노브이 다리로 접어들 겁니다. 당신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아마 배를 타고 곧장 강을 가로질러 갔겠지요. 사실 그게 시내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만 기차역에서 내렸으니 좀 돌아가는 수밖에요. 오른편으로 강이 보이시나요? 즐라타야 강입니다. 당신들의 네바 강보다는 덜 화려하겠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 가장 내세울만한 풍경이죠. 지금 건너는 게 노브이 다리입니다. 물론 스타르이 다리도 있지요. 그건 검은 숲 지대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가장 먼저 생긴 다리는 아니지만요. 그건 가브릴로프 다리죠. 구시가지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이곳도 꽤 넓게 느껴지는군요. 우리의 즐라타야 강이 마음에 드십니까? 당신은 레닌그라드에서 왔으니 도심 한가운데 강이 흐르면 한결 마음이 안정되겠군요. 그래도 우리 쪽 강이 더 낫지요. 범람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여기는 늪을 갈아엎어 만든 도시가 아니거든요. 대부분이 숲이죠. 추위도 덜할 겁니다. 기온이야 당신 살던 곳과 비슷하겠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습한 기후는 아니니까요. 수도원 근방으로 가면 온천도 있습니다. 여러 모로 당신에겐 훨씬 낫겠죠. 그런데 더우십니까? 창문을 좀 여는 게 낫겠군요. 오늘은 햇살이 강해서 좀 답답하군요. ”

 

 

 

쉴 새 없이 떠들다가 미샤의 상기된 옆얼굴을 힐끗 쳐다본 베르닌이 창문을 반쯤 열었다. 찬바람이 불어 들어오자 미샤가 몸을 희미하게 움츠렸다. 베르닌은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 아니면 열이 나서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추우면 창을 닫겠습니다. 어쨌든 기차로 열네 시간은 그렇게 짧은 거리는 아니지요. 비행기를 탔다면 좋았겠지만 아마 여의치 않았겠죠. 정 힘드시다면 병원에 먼저 들르도록 해드리죠. ”

 

 

“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

 

 

“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런데 아직 20분은 더 가야 하거든요. 혹시, 그러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주저 말고 얘기하세요. 어차피 병원 검진은 오늘 일정에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요. 국장 면담 후 곧장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

 

 

“ 내 일정표를 다 외고 있는 모양이죠? ”

 

 

“ 적어도 오늘 일정은. ”

 

 

 

미샤는 입을 꽉 다물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열린 창문을 닫을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와 뺨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열기가 퍼져서 눈동자까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르닌은 자신의 가방 안에 루뱐카 클리닉으로부터 인계받은 앰풀 두 개와 주사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장시간의 기차 여행을 견딜 수 있었다면 남은 20분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국장과의 면담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고 다소 허세를 부렸지만 그 주사를 놓으면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지체될 것이다. 그리고 스페호프 국장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스크바에서 보낸 인물, 자신의 권위를 짓밟아가며 밀어 넣은 반역자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불과 사흘 전에 스페호프가 모스크바 본부로 호출되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건 비공식 출장도 아니었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아주 은밀하게 행동하는 방법도 잘 아는 인물이었지만 그건 대단한 정적들을 다룰 때에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달아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을 정식으로 호출했다. 스비제르스키가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보안위원회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연방에서 공식적인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스페호프는 몹시 분노한 상태로 돌아왔다. 좀처럼 부하 직원들 앞에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은 베르닌이 있는 자리에서도 화를 참지 못했다. 공항에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는 모스크바와 크레믈린에 대해, 루뱐카에 대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역겨운 반역자 주제에 줄을 잘 타서 빠져나온 애송이에 대해서도. 그러나 대부분의 욕설은 총살형 대신 정신교화 수용소 쪽을 관철시켰던 제믈랴코프와 그 애송이를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며 약물을 찔끔찔끔 놓다가 결국 자기 무덤을 판 레닌그라드 쪽 책임자에게 돌아갔다. 베르닌은 모든 서류를 아주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스페호프가 그렇게 화가 난 진짜 이유 두어 가지를 눈치 챘지만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관용차가 다리를 건너 크라스나야 강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미샤의 시선이 자작나무 숲에 못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베르닌이 쾌활하게 말했다.

 

 

 

“ 자작나무를 좋아하시나보군요. 하긴 자작나무를 싫어하는 러시아인은 없지요. 그런데 저건 진짜 숲이 아니랍니다. 여기서는 그냥 공원이나 화단 정도죠. 구시가지 쪽으로 넘어가면 진짜 숲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숲은 정말 크고 울창하죠. 극장 주변 공원에도 나무는 많답니다. 아마 이곳에 나무가 없다는 말과 공기가 안 좋다는 말만은 못할 겁니다. 다른 건 없어도 나무와 물은 많죠. 살기에는 좋을 거예요, 물자는 좀 부족한 편이지만 그거야 일반인들 얘기고 적어도 국가에서 운영되는 극장의 감독이라면 사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좀 지루하긴 하겠지만. ”

 

 

 

미샤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다. 생판 모르는 도시에 던져진 사람치고는 별로 현명한 태도는 아니었다. 베르닌은 그가 완전히 체념한 상태인지, 아니면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것인지 궁금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숙련된 기자가 초점을 맞춰 놓은 카메라 렌즈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는 KGB 감시요원의 친절한 설명보다는 자기 눈을 믿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게 스페호프가 좋아하는 방식일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침내 관용차가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본관 앞에 도착했다. 미샤는 베르닌이 미처 차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먼저 내렸다. 가방은 뒷좌석에 그대로 팽개쳐둔 채였다. 가방과 보안 서약 서류가 든 봉투를 들고 내린 베르닌이 솔직하게 놀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여권을 챙기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것도 당국에 출두하면서. ”

 

 

“ 챙기기 전에 항상 압수당했거든요. ”

 

 

 

미샤는 웃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꾸하며 시멘트 담장을 따라 정문으로 들어갔다. 베르닌은 그에게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의 농담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는 충고를 추가해 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이미 그는 차 안에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

 

 

 

...

 

 

 

내일이나 모레쯤은 가브릴로프 KGB 국장 스페호프와 미샤의 첫 대면 에피소드를 이어서...

 

 

전에 이 본편의 에피소드 몇개를 발췌한 적이 있다.

 

먼저 위의 이야기에서 곧장 연결되는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검색대를 통과하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5368

 

 

그리고 스페호프와의 대면을 마치고 나온 후의 짧은 장면인

햇살. 본편의 베르닌과 서무의 단추 사이 : http://tveye.tistory.com/4451

 

 

같은 파트의 마지막 부분. 숙소에 도착한 미샤와 베르닌이 나누는 이야기는 여기

이웃사촌 미샤와 베르닌, 미샤가 생각한 해법 두가지 : http://tveye.tistory.com/4971

 

 

그리고 이 다음 파트인 3장의 일부인 렐랴의 인터뷰 : http://tveye.tistory.com/5114

 

 

 

이 가브릴로프 본편은 파트별로 시점이나 심리적 화자, 혹은 구조가 조금씩 다르게 서술된다. 나는 다성악 구조를 좋아하는 편이고 쓰기에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본편은 좀 어렵다. 그만큼 집중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17. 8. 5. 22:25

면회 - 발광 페인트 토마토 수프 about writing2017. 8. 5. 22:25

 

 

 

 

 

며칠 전 이 폴더에 글쓰기와 시점에 대한 메모를 올린 적이 있다. 몇년 전 쓴 미샤의 수용소 단편에 대한 글쓰기 메모와 일기였다. 제목은 '1인칭 시점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 링크는 http://tveye.tistory.com/6836

 

 

그 수용소 단편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용소 간수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3인칭의 1부, 미샤의 후원자였던 공산당 고위간부 게오르기 벨스키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3인칭의 2부, 그리고 미샤의 절친한 벗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1인칭으로 전개된 3부인데 각 파트별로 꽤 여러 토막을 이 폴더에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오늘 발췌하는 부분은 2부. 게오르기 벨스키가 모스크바 비밀클리닉에 입원한 미샤를 후원하러 가서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다. 이 파트 바로 앞부분을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발췌문 맨 앞 미샤와 벨스키가 재판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 몇 문단은 그때 발췌문 맨뒤와 겹치는데, 그걸 잘라버리면 너무 흐름이 끊겨서 그냥 살려두었다.

 

 

 

이 폴더에야 거의 항상 글을 토막토막 잘라 올리고 있으니 이 부분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크게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앞의 상황이 궁금하시다면 http://tveye.tistory.com/6068 (모스크바 요양소, 재판)를 먼저 읽고 이 파트를 읽으면 된다.

 

 

..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벨스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소설의 배경인 1970년대~80년대 초반의 소련 공산당 고위 간부이다.

 

파나예바는 모스크바 비밀클리닉에서 미샤를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이다.

 

글루크, 슈스코프는 미샤가 1부에서 갇혀 있었던 수용소의 원장과 정신교화 책임자이다.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스비제르스키는 역시 미샤의 오랜 후원자인 공산당 고위 당 간부이자 옛 KGB 고위직 출신이다. 이전에 jewels에서 미샤를 파티에 불러낸 인물이기도 하고 이 본편 우주에서 미샤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마로조프 역시 미샤의 오랜 후원자이자 애인인 당 간부이다. 스비제르스키는 모스크바 의원이고 마로조프는 레닌그라드 의원이다. 그는 이 2부의 심리적 화자인 게오르기 벨스키를 정치적으로 발굴한 대부이기도 하다.

 

 

아사예프는 미샤가 춤췄던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의 발레단 예술감독, 지나는 미샤의 발레학교 동기이자 발레리나 파트너이다. (지나와 말썽쟁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그 두둥실 지나 ㅋㅋ)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와 옥사나 셰먀코바는 극장 동료 무용수들이다.

 

 

...

 

 

위의 사진은 alex gouliaev가 찍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젊은이와 죽음' 화보.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왜 오셨어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

 

“ 파리 때문에. 그 외 다른 문제도. ”

 

“ 파리? 모스크바라고 하셨잖아요. ”

 

 

벨스키는 언제까지 미샤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머릿속에 간단하게 정보들을 밀어 넣기로 했다.

 

 

“ 여기 오기 전에. 글루크가 있는 수용소에 가기 전에. 파리에 갔었잖아. 그 니진스키 트리뷰트 때문에. 그 전에는 뉴욕에 갔었고. 자네 그 파리에서 도망쳤었잖아. 그래서 문제가 생겼지. 돌아와서 재판 받았잖아, 그래서 그 수용소로 보낸 거고. ”

 

 

미샤가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두어 차례 휘저었다.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볍게 흔들자 거무스름한 멍들로 뒤덮인 목덜미가 드러났다. 맞아서 생긴 상처 같지는 않았다. 그곳을 맞았다면 쇄골이 부러졌을 터였다.

 

 

“ 도망치지 않았어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러 갔었을 뿐이에요. ”

 

 

갑작스럽게 미샤가 아주 또렷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비공개 재판에서도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변호하려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미샤는 직접 변론을 했다. 극장 동료들 몇몇이 유리한 증언을 해주려고 자원했지만 모두 자격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참석을 금지 당했다. 벨스키는 그 재판의 일지와 보고서를 훑어보았지만 중간 쯤 읽다가 그만두었다. 미샤의 변론 대부분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나마 끝까지 이어지지도 않았다. 재판관이 그의 발언을 중단시킨 후 휴정을 선언했고 30분 만에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벨스키는 그런 종류의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정말 도망친 거였다면 지금 여기 있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기억이 되살아난 것 같군. 자네 소환됐을 때 파리에서 시끌시끌했던 건 생각나나? 호텔 앞부터 공항까지 피켓 시위자들이 몰렸었지. 기자들도. 자네 가고 나서 그 시위가 좀 커졌거든. 게다가 이상한 오해가 생겼지. 헛소문이 퍼져서 상황이 좋지 않았어. ”

 

 

“ 무슨 소문이요? ”

 

 

“ 뻔하잖아. 자넬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처박았다는 얘기. 벌써 루뱐카에서 총살했다는 얘기. 제국주의자들 입맛에 맞는 얘기들. ”

 

 

“ 그게 제국주의자들 입맛에 맞는 얘기예요? ”

 

 

 

미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몸을 가누기가 힘든 듯 점점 어깨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볼품없이 들쭉날쭉 잘린 검은 머리칼이 한 움큼 이마 위로 흘러내려왔다.

 

 

 

“ 그 얼간이가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 누굴 소환한다고. 하지만 걘 아무 것도 몰라요. 절 좋아한 적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걘 놔주세요. 그 여자 정말 아무 것도 몰라요. ”

 

 

“ 누구 얘길 하는 거지? 그 여자가 누구야? 얼간이는 누구고? ”

 

 

“ 아, 소환 같은 건 없었군요. 어차피 허풍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진짜 역겨운 놈이었어. ”

 

 

벨스키는 그가 글루크나 슈스코프 중 한 명을 언급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파나예바가 정해준 10분은 이미 흘러가버렸고 미샤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론부터 말해주기로 했다.

 

 

“ 자네 석방될 수도 있어, 회복되면. ”

 

 

미샤는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거의 무관심한 표정으로 오른손 손가락들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왼팔을 들어 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손목이 3센티미터 쯤 올라갔다가 무겁게 툭 떨어지자 짜증도 내지 않고 계속해서 그 무익한 시도를 반복했다.

 

 

“ 왜, 믿지 않아? 내 말인데도? ”

 

 

“ 믿어요. 의원님이 제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

 

 

“ 그런데 별로 관심이 없나? 수용소가 좋아? 자네 7년형 받았잖아.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 약물 치료 다시 받고 싶을 리가 없잖아. ”

 

 

“ 전 선언문 안 읽을 거예요. 인터뷰도. ”

 

 

미샤가 툭 끊어지듯 거친 음성을 내뱉더니 무겁게 처져 있던 어깨와 허리를 억지로 다시 세웠다. 이마와 목에 파란 핏줄이 돋아 오르며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벨스키는 파나예바의 경고를 어기고 그의 가슴에 손을 얹어 가볍게 뒤로 밀었다. 미샤는 저항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벨스키가 조금 힘을 실어 누르자 다시 베개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인터뷰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선언문 수준도 아냐. 몇 줄만 읽으면 끝나. ”

 

 

“ 당신들 다 똑같아. ”

 

 

미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베개에 피가 튀었다. 가슴에서 짐승들이 내는 듯 낮게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이제 기침은 하지 않았지만 오른손으로 목을 감싸 누른 채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베개에 쏟아진 피는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발광 페인트처럼 새빨간 색이라 벨스키는 파나예바를 불러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 파나예바를 부른다면 그녀는 면담을 완전히 중지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벨스키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조그만 타월을 미샤에게 건네주었다. 병실에 있는 물품들은 모두 소독을 마쳤을 테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샤가 타월로 입과 턱에 흘러내린 피를 닦는 동안 그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 어쩔 수 없잖아.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지. 나나 스비제르스키도, 아니,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라도 마찬가지야. 서기장이라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어. ”

 

 

“ 무슨 명분이요. 거짓말해서 풀려나라고요? 아니면 창녀짓해서? 다른 이름들도 얘기하시지 그래요. ”

 

 

미샤가 몸을 떨었다. 벨스키는 그가 그렇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폭발적 열기와는 달리 사석에서의 미하일 야스민은 아주 침착하고 서늘한 인물이었다. 훨씬 어렸을 때도 그랬다. 하긴 그는 미샤가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 자네 지금 아파서 제대로 생각이 안 되고 있어. 그냥 내 제안대로 해. 원한다면 문구도 자네가 써. 싫으면 내가 써서 보여줄 테니 고쳐도 좋아. ”

 

“ 정치국 위원님은 바쁘실 텐데... ”

 

 

벨스키는 온건한 개혁파 의원이었지만 나이 차이가 두 배 가까이 나는 애에게서 그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미샤가 구겨진 타월 위로 다시 피를 뱉은 후 몸을 심하게 떨면서 완전히 옆으로 누웠기 때문이다. 수척한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많이 아프잖아. 자네 정말 죽을 뻔 했어. 스비제르스키 의원이 들르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 거야. 난 자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망가지는 것도. 내가 왜 여기까지 직접 왔겠어. 내가 자네 아꼈던 거 몰라? 3분만 자존심 버려.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 ”

 

 

“ 지금 보내주실 수 있어요? 리허설에 가야 해요. ”

 

 

 

벨스키는 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미샤는 오른쪽으로 몸을 튼 채 창문과 벽 사이의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완전히 달라진 어조로 간청하듯 속삭였다.

 

 

“ 제발 보내주세요. 다시 올 테니까. 이 방으로 다시 오면 되잖아요. 지금은 안돼요. 저한테 약속하셨잖아요, 말 잘 들으면 다시는 그 약 안 먹일 거라고. 주사도 안 놓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제발 놔주세요. 너무 아파요. 내일, 내일 다시 올게요. ”

 

 

“ 정신 좀 차려, 난 그 사람이 아니야. 아무래도 파나예바를 불러야겠군. ”

 

 

미샤가 오른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손이 타들어가는 듯 뜨거웠지만 여섯 살짜리 어린애처럼 미약해서 슬쩍 움직여도 털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 난 말을 들었는데. 시키는 건 다 했는데. 당신 말은 다 들었어, 하나 빼고. 내가 그랬잖아. 당 이름으로 창녀 짓 하는 건 못한다고. 이제 상관없어. 그거 계속 놔도, 가둬도, 못 움직이게 해도. 그냥 죽여주면 좋을 텐데 당신 절대 그런 짓은 안 해. 자꾸 날 막아. 이제 그만 가. ”

 

 

게오르기 벨스키는 군 출신이었고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동문 서클과 그 도시의 실권자인 드미트리 마로조프를 통해 정치계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그 냉철한 마로조프가 그를 실질적 후계자로 점찍고 모스크바 권력의 중심지까지 단숨에 밀어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벨스키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점진적 개혁파에 속했고 결코 정적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거나 모함과 숙청이라는 자연스러운 무기를 대놓고 쓴 적도 없는 온건한 인물이었지만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충격을 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마로조프는 벨스키를 정치국으로 입성시켰고 놀랍게도 그의 오랜 정적이었던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조차도 거기에 방해 공작을 펼치지 않았다. 스비제르스키는 사석에서 벨스키에게 ‘당신 뱃속은 쇠망치로 두들겨 패도 충격을 전부 흡수해버릴 쿠션들로 꽉 차 있다니까’ 라고 노골적인 농담을 건네기까지 했다. 그만큼 그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게오르기 벨스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자기 앞에 누워 있는 젊은 죄수, 한때 그가 열렬하게 후원했던 무용수를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미샤가 다시 기침을 했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반 숟갈 가량의 피가 밀려나왔다. 괴로운 듯 베개에 이마를 부딪쳐댔다. 벨스키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감싸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미샤가 오른손을 들어 벨스키의 손목을 쳐냈다.

 

 

“ 만지지 마. 제발 내 몸에 손대지 마. 나 좀 놔둬. ”

 

 

벨스키는 더 이상 면담을 계속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파나예바를 부르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곧장 들어왔다. 파나예바는 미샤를 보더니 벨스키에게 책망하는 시선을 던졌다.

 

 

“ 심문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

 

 

“ 잠깐 얘기를 나눴을 뿐이야, 소장이 너무 낙관적으로 얘기했던 것 아닌가 모르겠군. 전혀 회복이 안된 것 같은데. ”

 

 

“ 의원님께서 그 면담을 고집하지 않으셨으면 훨씬 나았을 거예요. 10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이상은 집중을 못 해요. ”

 

 

파나예바가 미샤의 자세를 바꿔주고 출혈이 멎도록 조치를 취하는 동안 벨스키는 병실에서 나가는 대신 창가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주로 자신의 스케줄을 한 번 더 비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었지만 미샤가 파나예바의 손길은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뒤섞였다. 어쨌든 그는 5년 이상 미샤를 알았고 가장 강력한 후원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올가 파나예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걸었다. 벨스키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샤의 대답은 잘 들렸다. 체포되기 이전처럼 또렷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 아니, 그건 부다페스트에서였어요. 아사예프가 저와 지나의 호흡을 점검해보고 싶어서 투어 무대에 먼저 올라가게 했죠. 키로프 첫 무대는 12월이었어요. 74년. 폴랴코바가 테라스 장면에서 배경을 바꿨는데 아사예프가 무대가 죽어 보인다고 화를 냈어요. 그 사람 그때 공연 직전까지 계속 화만 냈죠. 진짜 이유는 저와 지나가 금발로 염색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집시 로맨스를 출 작정이냐고 한 시간 동안 설교를 늘어놓았어요. 지나가 빨간 머리 줄리엣이 뭐가 문제냐고 발끈하더니 저에게 아사예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집시 분장을 하고 추자고 했어요. 걔는 화를 내면 무섭기 때문에 잠깐 집시 의상까지 입어봤는데 그걸 보고 지나가 포기했어요. ”

 

 

 

파나예바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뭐라고 속삭이자 미샤가 대꾸했다.

 

 

 

“ 아, 다른 건 다 됐는데 피부색을 바꿔야 했어요. 집시처럼 보이려면 진한 파우더가 필요했는데 마침 다 떨어졌거든요. 그러고 있는데 아사예프가 들어와서 기겁을 하더니 염색 얘길 더 이상 안 했어요. 그래서 원래대로 췄죠. 이후에도 그거 출 때 금발로 물들인 적 없었어요, 단 한 번도. ”

 

 

‘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얘기하고 있군. ’

 

 

 

벨스키는 잠시 매혹된 채 파나예바와 미샤 쪽에 시선을 던졌다. 자신이 췄던 작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미샤는 완전히 정상처럼 얘기했다. 파나예바가 백조의 호수에 대해 묻자 미샤는 니나 크류코바와 췄던 첫 무대나 크레믈린, 해외 투어 무대가 아니라 헝가리 춤을 추고 들어간 발레리나가 떨어뜨렸던 머리장식을 밟고 미끄러질 뻔 했던 무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뒤엉킨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최고의 찬사를 받은 무대가 아니라 실수를 할 뻔 했던 무대라는 것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스키는 미샤가 얘기하는 공연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옥사나 셰먀코바가 고의적으로 장식을 떨어뜨렸다는 소문이 무용계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당시 셰먀코바는 미샤의 오랜 반대파였던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의 연인이었고 그 서클에서는 끊임없이 각종 방법을 동원해 그를 괴롭히고 있었으므로 꽤 신빙성 있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미샤는 이듬해 볼쇼이로 옮겼는데 벨스키는 세레브랴코프 서클이 그를 조금만 더 심하게 볶아댔으면 더 빨리 옮겨오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벨스키는 자신도 모르게 파나예바가 지젤이나 라 바야데르에 대해 물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미샤 야스민의 알브레히트나 솔로르를 따라갈 무용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팬들이 미샤의 무게 없는 도약과 고속 회전, 화려한 테크닉에 푹 빠졌지만 벨스키는 항상 그의 진정한 강점은 드라마 배우로서 타고난 연기력과 음악에 대한 완벽한 감각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서방 관객들과 전문가들이 그 젊은 무용수 앞에서 넋을 놓았던 것도 당연했다. 그자들이 어디에서 그런 춤을 볼 수 있었겠는가. 볼쇼이나 키로프에서도 그렇게 춤추는 무용수는 없었다. 그런 재능은 유일무이했다.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온전한 재능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재능이, 그 완벽했던 육체가 부서지고 찢어진 채 반쯤 마비되어 있었고 무용수답지 않게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명료한 이성은 으깬 토마토 수프처럼 뒤섞여 있었다.

 

 

 

... 

 

 

 

 

이 면회의 후반부 대화를 일부 발췌한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589 (체제의 이름, 비행사, 천사 이름 붙은 도시)

 

 

이 링크에 발췌된 이야기에는 이 단편의 다른 파트들에 대한 링크들도 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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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췌문에 붙인 제목은 그냥 충동적으로 여기 나오는 단어들을 조합했음. 원래 이 단편은 1부 1~3장, 2부 1~3장, 3부 1~3장으로만 되어 있어 이런 소제목 같은 건 없기 때문에 여기 발췌해 올릴 때 내 맘대로 대충 붙이고 있다. 주인공이 피 토하고 정신 흐릿해진 상태이니 뭐 어울리는 듯... (미샤 : 뭐 임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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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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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8. 21:05

나는 그의 말투로 시작했다 about writing2017. 3. 8. 21:05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풍경. 예전의 레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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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 귓가에 조용히 닿았다가 아무런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목소리. 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흠잡을 데 없이 예의바르고 차분한 태도, 그러나 어쩐지 부아가 치밀게 만드는 어조. 어쩌면 음성학 수업에서나 들을 법한 정확하고 모범적인 발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0여 년 동안 나는 그가 부정확한 어휘를 쓰거나 문법적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무용수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아마 레닌그라드 토박이라서 그럴 것이다. 방송국에서 일했던 그의 아버지나 교정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을 테지만 대놓고 물어본 적은 없다. 사실 미샤가 나 외의 그 누구에게든 자기 부모 이야기를 꺼낸 적이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선동 죄목으로 죽은 가족이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 2012년 9월, Fr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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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단편의 이 문단으로 시작했다. 앞부분에는 생략된 대화가 몇 줄 있다.


어떤 글이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 동시에 첫 단어와 문장과 문단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심장을 조이고 또 흥분시키는 일도 거의 없다.


지금은 다른 글을 쓰고 있지만 어느 정도 궤도를 찾으면 나는 저 본편의 우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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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프라하.


요세포프. 베이크숍 프라하에서 차 마시며 케익 먹다가 창 밖을 보니 바로 앞 벤치에 이렇게 두 명의 금발 여인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외모 자체는 거의 닮지 않았지만 비슷한 색채의 곧은 금발 때문인지 둘은 꼭 자매처럼 보였다. 


돌아와서 이 사진을 볼 때마다 '금발의 두 여인은 자매처럼 보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단편을 써보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첫 문장 외엔 아무런 것도 떠올리지 않았다.


사실 그 상태가 좋을 때도 있다. 묻어둔 문장들. 하나씩 간직한 문장들은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그 문장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어떤 이야기로든 변화할 수 있다. 단 하나의 문장은 마치 하나의 알처럼 미지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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