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

« 2024/12 »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오랜만에 본편 일부를 올려본다.


이 에피소드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이전에 각각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네프스키의 유명 디저트 가게인 세베르에 나갔던 트로이는 우연히 미샤와 그의 극장 친구들을 마주치게 된다. 거기에는 미샤의 파트너 발레리나인 지나를 비롯해 동기인 레냐 핀스키, 후배인 니넬,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초빙되어 온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있었다. 일린은 토요일이 자신의 생일이라며 그를 파티에 초대한다.


순서는 반대로 일린의 생일 파티를 먼저 올렸었다. 트로이는 파티에 가서 미샤의 극장 동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미샤는 브이소츠키 노래를 부르고, 그러다 술에 취해 나가떨어진다.


이번에 올리는 에피소드는 그 두 이야기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시간 순서대로 재배열하면 세베르 - 이번 에피소드 - 노래 부르고 나가떨어지는 미샤 이다.




그 두 에피소드 링크는 아래 :


 
http://tveye.tistory.com/6253 세베르에서의 만남, 달콤한 것들, 미샤와 지나 어릴적 스케치 2


http://tveye.tistory.com/5842 생일과 그 다음날, 브이소츠키




...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는 일린의 이름과 부칭이다. 제대로 된 이름은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일린이고 미샤는 그를 애칭인 스탄카라고 부른다.



미샤와 일린이 논쟁을 벌이는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소설 '백야'이다. 나스첸카는 그 소설의 여주인공이다. 내가 쓴 이 소설 속에서 일린은 미샤와 지나를 위해 '백야'를 단막 발레로 안무하고 미샤를 화자였던 남자 주인공, 지나를 나스첸카로 캐스팅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과 부칭이다. 미샤에게는 존경하는 예술가를 이름과 부칭으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토요일 저녁 7시에 트로이는 미샤와 지나이다의 아파트로 갔다. 생일 파티는 8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미샤가 백야 때문에 일린과 이견이 생겼다면서 좀 일찍 와달라고 했다. 트로이는 자신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일찍 갔다.



 지나이다가 문을 열어주더니 반색을 했다.



 “ 제발 쟤 좀 말려요. 저러다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를 잡아먹겠어요. ”



 힐끗 보니 부엌 테이블에는 이미 음식들과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준비해 온 게 틀림없었다. 미샤는 원래 요리를 하거나 잘 차려먹는데 관심이 별로 없었고 지나이다도 가정적인 주부 노릇을 하기에는 너무 여왕님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술 한 잔 권하기는커녕 코트를 벗는 것도 기다려주지 않고 그의 팔목을 잡아끌며 거실로 데려갔다.



 미샤는 피아노 옆에 선 채 일린과 열띠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샤는 평소에는 나직하고 부드럽게 얘기했지만 논쟁할 때는 명료하고 건조한 말투로 변했다. 그는 빠르게 쏟아지는 일린의 설명을 중간 중간 칼처럼 끊어대며 끼어들었다. 검은 눈에서 불꽃이 연달아 튀었다. 처음에 트로이는 그들이 뭘 가지고 그렇게 가열찬 논쟁을 벌이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듣고 보니 주인공이 나스첸카의 첫사랑에게 연애편지를 전해주러 갈 때 무대 어느 쪽에 서야 하느냐, 여자가 그 첫사랑이란 작자에게 달려들어 안길 때 주인공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느냐 아니면 관객들로부터 등을 돌려야 하느냐 등의 트로이로서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듯한 문제들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 대체 왜 미샤가 자신에게 빨리 와 달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참 열을 내다가 트로이를 발견한 미샤가 좋아하며 손목을 휙 흔들었다.



 “ 아, 잘됐다. 빨리 스탄카한테 설명 좀 해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이 사람한테 좀 알려줘. 그리고 백야가 주인공과 나스첸카의 연애소설이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짝사랑이라는 이론 좀 설명해봐. 구조주의랑 뭐 그런 것도 섞어서. 너 지난번에 세미나에서 발표한 거 있잖아. ”



 “ 구조주의와는 관계가 없는데... ”



 “ 아니, 관계가 있게 설명해줘. 넌 할 수 있잖아. ”



 “ 그거랑 무대에서 등을 돌리고 말고랑 대체 상관이 있어? ”



 “ 있어요. ”



 미샤 대신 일린이 대꾸했다. 역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지만 밝은 회색 눈은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아마 턱수염을 깎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트로이에게 자신들의 이견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미샤의 질문과 주인공의 동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쭉 설명했다. 그는 간결하게 문장을 끊어서 말하는 미샤와는 달리 빠르고 길고 부드럽게 얘기했다. 일린이 어찌나 설득력 있게 조곤조곤 얘기하는지 트로이는 미샤에게 그냥 연출자의 말을 따르라고 충고할 뻔 했다. 하지만 미샤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이는 할 수 없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페테르부르크 소설들에 대해 얘기를 늘어놔야 했다. 나중에는 미샤가 원하는 대로 구조주의 이론도 좀 섞었다.



 얘기를 마쳤을 때 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그럼 좀 더 생각해봐야겠는데. 이건 내일 다시 맞춰보는 걸로 해. ”




 “ 등 돌리는 거지? ”




 
 한번 파고들면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는 미샤가 집요하게 물었다. 자신이 일린의 입장이었다면 그 고집 세고 버릇없는 젊은 애에게 화를 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



 “ 그래, 등 돌리는 걸로 하자. 이제 페트루슈카 좀 맞춰보면 좋겠는데. 좀 있으면 사람들 올 테니까. ”



 소파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지나이다가 일어났다. 피아노 쪽으로 다가오면서 트로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 고마워요, 덕분에 공연이 파탄나지는 않겠네요. ”




 “ 무슨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군요. ”




 “ 그냥 쟤를 얌전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성공이에요. ”




 지나이다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테마를 치기 시작했다. 미샤가 바 앞으로 가더니 목과 팔을 기형적으로 꺾은 채 지푸라기 인형처럼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일린이 박자를 셌다. 중간 중간 동작을 지시하기도 하고 손을 내저으며 음악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백야를 놓고 열띠게 대들던 것과는 달리 미샤는 일린의 모든 지적에 온순하게 따랐다.




 “ 팔을 더 내려야 해. 허리는 좀 더 펴고. 무릎이 더 나가야지. 다시 해봐. 어깨도 내리고. ”




 미샤가 다시 포즈를 취했다. 일린이 뒤로 다가와서 왼쪽 어깨를 아래로 세게 내리눌렀다. 아픈 부위였기 때문에 미샤가 잠깐 얼굴을 찡그렸지만 불평 없이 어깨를 더 내렸다. 일린이 손을 치우자 그는 정말로 꼭두각시 인형 같은 모습으로 허공에 매달린 듯 서 있었다. 트로이는 금방이라도 미샤가 무릎을 꺾고 바닥에 넘어질까봐 오싹했다.



 지나이다가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 일린은 박자를 세는 것 외에는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고 피아노 옆에 선 채 미샤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샤는 검은 머리칼을 털실이나 지푸라기처럼 들썩이며 사지를 상하좌우로 흔들었다. 몇 차례 이어지는 도약조차 무릎을 구부린 채 낮게 뛰었다. 발레란 몸을 가능한 한 곧게 펴고 길게 늘이는 것이라고 믿었던 트로이에게 있어 그 춤은 전혀 아름답거나 우아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팔과 어깨 동작이 특히 그랬다. 불협화음과 구슬픈 멜로디가 뒤섞인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속에서 미샤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우울해지고 고통스러워졌다. 얼굴 전체가 일그러지며 외롭고 슬프게 변했다. 두 손을 털실로 감친 인형 손처럼 둥그렇게 뭉쳐서 가슴을 치며 옷을 잡아당기고 어깨를 떨며 이따금 구부러진 다리를 바깥으로 한두 번 찼다. 피아노를 치면서 지나이다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너무 슬픈데. 꼭 저걸 가져가야 하나... ”




 미샤가 몸을 돌려 일린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발레리나 인형이나 독재자 흥행사를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피아노 옆에는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있었고 그 밝은 회색 눈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예리한 칼처럼 자기 앞의 무용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미샤는 두 손을 어색하게 뻗더니 삿대질을 하고 턱짓을 했다. 그리고 어깨를 홱 떨구더니 한 바퀴 빙글 돌고 바닥에 넘어졌다.



 일린이 손바닥을 마주쳐 딱 소리를 냈다.



 “ 훨씬 좋아졌네. 어깨 동작만 좀 손보면 되겠어. 런던에서 좋아할 거야. ”




 미샤는 심하게 숨을 헐떡였다. 트로이는 그가 연습하면서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어려운 동작 때문인지 마음이 산란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면 티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거실 마룻바닥에 반쯤 엎드린 채 두 손으로 머리와 가슴을 감싸고 숨을 몰아쉬면서 가만히 있었다. 방금 춘 춤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힘든 것 같았다. 마침내 일린이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씻어야지, 뭘 더 입든가. 런던 가기도 전에 감기 걸리면 안되잖아. ”




 “ 나 좀 놔둬. ”




 미샤가 목쉰 음성으로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머리를 들지 않은 채였다. 지나이다가 일어나더니 모른 척하면서 부엌으로 갔다. 일린은 다른 말을 하는 대신 소파에 펼쳐져 있던 카디건을 가져와 미샤의 머리와 등을 덮었다.



 잠시 후 미샤가 일어났다. 여전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카디건을 일린에게 휙 던지고 한 손으로 어깨를 누르면서 욕실로 갔다. 스위치를 찾지 못해 한참 문 옆 벽을 더듬었다. 트로이가 다가가서 불을 켜주었다. 미샤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곧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린은 바를 붙잡고 아까 미샤가 하던 동작 몇 개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정확하기는 했지만 나이 때문인지, 무용수에서 은퇴한지 오래됐기 때문인지 미샤보다는 훨씬 뻣뻣했고 우아한 느낌도 적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좀 더 내려야 하는데...’ 하고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트로이는 견디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 더는 아파서 안 될 거예요. 그 어깨 아픈지 반년 가까이 됐어요. ”




 “ 아니, 그 정도예요? 왜 아프다고 얘길 하지 않는 건지... ”




 “ 자존심이 강해서 그래요. ”




 “ 저 정도로 추면 자존심 내세워도 돼요. 아픈 건 별개지만. ”




 “ 백야만 추는 줄 알았는데, 런던은 무슨 얘기죠? ”




 “ 2월 런던 페스티벌 있잖아요. 경쟁부문에도 초청됐어요. 참가진도 꽤 화려하고. 그래서 페트루슈카로 정한 거예요, 누가 뭐래도 러시아 춤이니까. ”




 “ 미샤가 정했어요? ”




 “ 아뇨, 하나 안무해달라고 해서 내가 고른 거죠. 물론 포킨 오리지널에서 가져온 거지만. ”




 “ 그럼 런던에 함께 가요? ”




 “ 글쎄요, 당국에서 나까지 허가를 내줄 것 같지는 않아요. ”




 일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 정도로 아프다면 동작을 바꿔야겠는데... ”




 “ 미샤에게는 내가 그런 말 했다고 얘기하지 마세요. ”




 “ 자존심 앞에는 친구도 소용없나 보죠? ”




 “ 자기 춤 앞에서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죠. ”




 “ 그럴만해요. 내가 저렇게 출 수 있었다면 목숨이라도 내놨을 테니까. ”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투명한 회색 고양이처럼 미소를 띠었다. 트로이는 사라토프의 시골에서 할머니가 고양이들을 자루에 넣어 강물에 빠뜨려 죽였던 것을 떠올렸다. 일린을 향해 솟구치는 부당한 증오심에 그는 소스라쳤다.





...




발레 페트루슈카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올린 적이 있다.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의 초창기 메인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킨이 니진스키를 위해 안무한 단막 발레이다. 러시아 전통시장과 놀이문화, 마슬레니차의 흥겨움과 화려함, 거기에 꼭두각시 헝겊 인형 페트루슈카와 독재자 흥행사, 아름다운 발레리나 인형과 폭압적인 무어 인형이 등장한다. 음악은 스트라빈스키. 원체 음악이 유명해서 종종 따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연주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미샤가 추는 페트루슈카는 포킨 원작이 아니고 일린이 그 원작을 따와서 미샤를 위해 변형시킨 작품이다. 여기 발췌한 적은 없지만 이후 미샤는 안무가가 되었을 때 니진스키를 위한 트리뷰트 작품을 안무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한 페트루슈카를 재등장시킨다.




런던에서 미샤가 춘 페트루슈카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공연을 본 알리사가 트로이에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http://tveye.tistory.com/5178 프라하의 두 개 메모, 문을 여는 사람, 악령과 성모



마린스키에서 본 페트루슈카 무대에 대한 짧은 메모와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15

http://tveye.tistory.com/3686


..





미하일 포킨의 페트루슈카를 춘 바츨라프 니진스키.






최근에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발레 뤼스 디아길레프 갈라에서 페트루슈카의 모놀로그를 추었다. 마린스키에 오리지널 페트루슈카가 레퍼토리로 들어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은 그전까지는 페트루슈카를 춰본 적이 없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준 연습 영상을 보니 무척 보고팠는데 공연 영상은 올라오지 않았다. 무대 분장 사진을 보니 오리지널 페트루슈카를 그대로 따온 것 같긴 한데... 나에겐 실제 분장 사진보다 이 연습 사진이 더 인상깊었다.


페트루슈카는 남자 꼭두각시 인형이지만 최근 디아나 비슈뇨바가 젊은 안무가인 블라지미르 바르나바가 새로 안무한 작품에서 페트루슈카 역할을 추기도 했다.


리허설 중인 슈클랴로프 사진 몇 장 더.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