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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 밤이다. 그래도 내일 저녁 비행기라서 오후에 공항으로 가니까 산책할 시간이 조금은 남아 있다. 이번에는 내 물건 산 게 거의 없어서 가방 꾸리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고 또 매일 꼬박꼬박 7시 전에 일어나고 있으므로 아침에 조식 먹고 와서 남은 가방을 마저 싸면 될 것 같다. 6~70% 정도 꾸려놓긴 했다.

 
어제 오후가 엄마와의 여행에서 가장 고비였지만 저녁 산책과 배 타고 오는 것으로 많이 풀어졌고 오늘은 나름대로 소소하고 즐겁게 보냈다. 이제 내일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행 자체보다는 휴가가 끝나고 무시무시하고 과중한 업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간밤에 너무 피곤했다. 11시 넘어서 잠들었고 7시간 가량, 그래도 깨지 않고 잤다. 오늘은 엄마와 어디에 가야 할지 좀 막막했다. 어제 배까지 탔으니...
 
엄마는 어제 짜증을 내신 게 미안했는지 오늘은 훨씬 상냥해지셨다. 어제 아빠 셔츠를 산 곳에 가서 이모부 것도 사면 좋겠다고 하셔서 다시 바츨라프 광장으로 갔다. 그쪽에 있는 쇼핑몰 이곳저곳에 들어갔다가, 중저가가 아닌 브랜드들이 모여있는 쇼핑몰에서 드디어 동생에게 줄 괜찮은 티셔츠를 하나 득템했다. 이리하여 아빠와 동생, 올케에게 줄 것들을 모조리 옷으로... 엄마는 다시 프리마크로 가셨고 이모부에게 어울리는 건 못 찾았으나 대신 아주 저렴하면서도 소재와 디자인이 나쁘지 않은 모자와 운동할 때 입을 민소매 티를 득템하셨다. 그런 것은 우리나라에도 많은데 싶었지만 가격이 매우 착해서 괜찮아보이긴 했다. 나는 엄마에게 프라하 와서 옷들을 득템해 가는 관광객은 엄마뿐일 것 같다고 농담을 했다 :) 크리스탈도 유리공예품도 냉장고 자석도 베헤로프카도 메도브닉이나 오플라트키도 아니고 그것도 체코제가 아닌 옷들 ㅎㅎ 독일에서도 스카프와 빗을 사셨으니...
 
그런데 이 쇼핑몰에서 나에게는 위기가 찾아옴. 나는 본시 쇼핑도 좋아하지 않고 백화점에 가는 것도 싫어한다. 사람 많은 곳에서 물건 고르고 구매하는 게 너무 힘들다. 답답하고 폐쇄적인 공간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리 시장은 탁 트여 있으니 괜찮은데... 게다가 엄마가 이것저것 물어보실때마다 가격을 계산해보고 소재를 확인해야 하니 더 정신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둘째날에도 바츨라프 광장 쇼핑몰들을 돌다가 너무 힘들어서 도브라 차요브나에 가서 주저앉았었다. 프리마크에서 엄마의 나시 티와 모자를 사서 나온 직후 너무너무 숨이 답답하고 힘이 들고 어깨가 결려서 벤치에 주저앉아 잠시 쉬었다. 내가 너무 힘들다고 하자 엄마는 이해를 잘 못하셨다. 엄마는 쇼핑 때문에 힘들고 답답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드신 타입인 것이다. 내가 골목길 돌아다니며 사진 찍고 카페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듯 엄마는 옷을 구경하고 이것저것 득템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스타일이었다. 어쨌든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 엄마도 벤치에 잠깐 앉았고 카페에라도 가자고 하셨다(엄마에게는 큰 결심!) 그런데 그 근방의 헤드샷은 오늘 문을 닫았고, 나는 코스타나 별다방에 가고 싶진 않았다. 잠시 앉아 있다가 좀 나아져서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광장에서 나와 걸어가는데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사람들이 콘을 먹으며 나오는 것을 발견한 엄마가 아이스크림 드시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맛있는 곳이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엄마를 꼬셔서 조금 더 걸어가서 하벨 시장 근처에 있는 안젤라또 지점에 갔다. 여기 계속 가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 엄마는 평소 저녁 운동 마치고 친구분들과 함께 배스킨 라빈스에 자주 들르신다고 하셨다. 엄마가 요거트 아이스크림과 빙수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안젤라또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자리 하나를 잡을 수 있었고 엄마를 위한 요거트 아이스크림, 그리고 내가 너무 좋아하는 스트라치아텔라를 시켰다. 흑흑 너무 맛있었다. 여기 스트라치아텔라가 제일 맛있다. 극도로 힘든 순간 먹으면 눈이 번쩍 뜨인다. 쇼핑몰에서 지친 터라 진짜 맛있었고 엄마도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드셨다.
 
엄마는 스파게티를 먹어보고 싶다고 하셨다. 아마 나 때문에 그러신 것 같았다. 그냥 집에 가서 오징어짬뽕이나 햇반 먹어도 되고 한국식당에 가도 된다고 했지만 스파게티를 드시겠다고 하여 젤레즈나 거리에 있는 전에 쥬인과 갔던 이탈리아 식당에 갔다. 그런데 거기는 파스타 메뉴는 없고 온통 피자 뿐이라 결국은 일어섰고, 문득 하벨시장 쪽에 몇 년 전 묵었던 레온 도로 호텔 옆에 kogo라는 이탈리아 음식점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좀 비싼 곳이긴 하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었다. 그래서 거기 갔고, 생선수프와 해산물 스파게티, 새우 알리오 올리오 스파게티, 그리고 레모네이드를 시켰다. 엄마는 이런 것도 처음 드셔보시는 것이었다. 원체 식성이 한식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그러나 친구들에게 파스타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해산물로 골라드렸고 수프도 시켜드렸다. 생선수프는 맛있게 드셨고(참치찌개 같다고 하심. 좀 그런 맛이었음), 파스타는 토마토소스는 없어서 올리브유였지만 그래도 곧잘 드셨다. 다만 파스타는 역시 간이 셌고 양이 많아서 우리 둘다 많이 남겼다. 레모네이드는 너무 시어서 싫다고 하셨다(이 동네 레모네이드는 정말 탄산수나 그냥 생수에 레몬만 짜서 넣어줌. 나는 괜찮은데...)
 
파스타로 배가 너무 불러진 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1시 반쯤 되었던 것 같다. 아침에 엄마에게 ‘호텔에 청소 하지 말라고 해요?’ 라고 묻자 엄마는 그냥 하게 놔두라고 하셨다(이 일 때문에 내가 어제 상당히 스트레스였는지 꿈에서도 리셉션에 가서 청소할 필요없다고 했었음) 집에 들어가면서 청소가 안되어 있으면 매우 기분나쁠 것 같다, 항의를 해야 하나 하며 들어갔는데 말끔히 청소도 되어 있고 타월도 와 있고 어메니티도 새로 채워져 있어 엄마도 나도 기분이 좋아짐.
 
엄마는 씻고서 쉬셨고 나는 좀 쉬다가 엄마가 잠시 눈을 붙이는 동안 좋은 날씨와 마지막 날이라는 아쉬움이 겹쳐서 잠깐 혼자서 집을 나섰다. 근방을 한 시간 가량 산책했다. 예전에 많이 걷던 루트인 마스나, 틴 광장과 운겔트 등을 걸었고 에벨에 가보았다. 날씨가 너무 좋은 여름이라 다들 노천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갔는지 조그만 에벨은 테이블 하나만 현지 노부인 둘이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테이크아웃하려고 했는데 자리가 비어 있으니 너무 좋았고 결국 카푸치노를 시켜서 마셨다. 커피 마시게 하는 곳. 카푸치노가 작은 것과 큰 것이 있어서 작은 것을 시켰는데 너무 부드럽고 맛있었다. 햇살이 매우 쨍했고 창 밖이 밝고 또 밝았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라서 금요일과 토요일보다는 덜 붐볐고 이상하게도 매우 한적하고 고요했다. 에벨에는 15~20분 밖에 앉아 있지 않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었고 너무 좋았다. 마음이 평안했고 고요했다. 게다가 에벨 로고가 들어간 리넨 에코백이 나와 있어 그것도 득템했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일어나 계셨다. 엄마는 다니시는 교회의 오늘 예배를 유튜브로 다시보기하고 계셨고 나는 챙겨왔지만 한 줄도 읽지 못했던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었다(이 사람 에세이들은 언제나 여행용 책들임) 그러다 저녁을 챙겨먹었다. 햇반을 딱 맞게 가져와서(12개 챙겨왔고 엄마가 누룽지 이틀분을 가져오셨음. 첫날은 안 먹고 잤으므로 8일치가 딱 맞음) 다 먹었고 엄마표 볶음김치도 다 먹고 진미채만 좀 남았다. 내가 아까워했지만 엄마가 또 해서 주면 되는데 뭐가 아깝냐고 버리심. 내가 어제 사왔던 로메인도, 며칠 전 사왔던 세 개들이 파프리카도 오늘 다 해치워서 아주 깔끔하게 일용할 양식을 다 먹었다. 내일은 체크아웃 후 점심에 한국식당에 가면 되겠다고 했다.
 
저녁을 먹은 후 소화를 위해 엄마랑 산책을 나갔다. 오늘 생각해보니 애초부터 이렇게 오전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오후에 쉬고 저녁 산책을 나갔다면 엄마의 평소 루틴과도 맞아서(항상 저녁 운동을 하시니)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도 저녁 산책 후 기분이 나아지셨다. 나는 왕창 몰아서 하고 일단 집에 들어오면 씻은 후 늘어지는 타입이라 그런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역시 엄마와는 다른 스타일. 여행 막바지가 되어서야 이런 것들을 깨달아서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막바지에라도 이렇게 좋은 패턴을 찾게 되어 다행이다. 해가 여전히 높고 하늘은 파랬고 그늘과 저녁 바람은 선선해서 걷기 좋았다. 엄마와 요세포프 쪽의 안 가본 골목들 여기저기를 돌아서 어제 배를 탔던 체추프 다리 쪽으로 갔다. 벤치가 있어 거기 앉았는데, 강바람 맞으며 지나가는 관광객들과 현지인 구경하는 것을 엄마가 좋아하셔서 생각보다 오래 앉아 구경을 하고 이런저런 가족과 관련된 얘기, 예전 이야기 등을 했다. 그리고는 강변을 따라 마네수프 다리를 지났고 카를 교에 가까워지는 지점에서는 강변으로 가기 어렵고 도로변으로 좀 돌아서 가야 하므로 거기서 그냥 길을 건너서 요세포프와 파리슈스카 대로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왔다(엄마도 나도 카를 교는 사람이 많으니 한번으로 족하다고 의견일치)
 
산책을 하면서 마네수프 다리 난간에 기대어 블타바 강과 주변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런 데서 한달 살라고 하면 나는 못한다고 아빠한테 말해야지’ 라는 엄마에게 ‘그래도 집에 가고 나면 힘든 건 그냥저냥 힘들었다는 정도로 중화되고 좋았던 기억이 남을 거에요. 이렇게 저녁 산책하고 강바람 맞으면서 이런 풍경 보고 있었던 게 좋았다고 하실거에요’ 라고 말씀드렸고 엄마도 그 말이 맞다고 했다. 그리고 딸 덕에 이런 데도 와본다고 하셨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아들색히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 지 각시만 챙기고 엄마아빠 데리고 여행가자는 얘기도 안하고’로 화제가 넘어갔음. 흑흑... 미안하다 동생아.
 
집에 돌아오니 여덟시가 좀 넘어 있었다. 나는 샤워와 머리감기, 머리말리기의 괴로운 미션을 마치고 가방을 약간 더 정리했다. 엄마는 유튜브를 보시다가 조금전 잠드셨고 나는 이 메모를 다 적은 후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이렇게 엄마와의 여행이 거의 마무리되었다. 내일 오후까지 거리 산책을 하고, 연착도 터뷸런스도 없는 안전하고 편안한 장거리 비행 후 집에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푹 잘 수 있기를.
 
 
 

 

 
 
 
이 사진은 나 혼자 산책 나갔을 때 운겔트와 틴 광장으로 접어들면서 찍었음. 이번 여행은 정말 사진을 거의 안 찍었다. 오늘 한시간 산책하며 찍은 2~30장이 가장 많이 찍은 것임. 절반은 그나마도 카페 에벨. 나머지는 엄마 사진인데 그것도 많이 찍진 않았다. 엄마가 사진 찍어드린다 해도 조금만 찍으셨고 그나마도 맘에 안 드는 건 다 지워버리셨음. 어쨌든 오늘 오후의 고요함과 무척 환했던 빛이 좋아서 이 사진을 올려본다. 맨 위 사진은 안젤라또의 아이스크림.



.. 아, 오늘은 18,400보. 그런데 거리는 13킬로로 제일 많았음. 이번 여행은 매일 많이 걸었다. 날씨도 이틀 비온거 빼곤 선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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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