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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파트는 맞은편에 바와 클럽들이 있어서 새벽에도 시끄럽다. 그리고 차 지나가는 소리도 상당히 크다. 오늘은 새벽 4시에 남자들이 너무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서 깨버렸고 한참 뒤척이다가 간신히 조금 더 자서 종일 피곤했다.

 

오늘은 엄마가 궁금해하셨던 강변의 농수산물 시장에 갔다. 예전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엄마를 위해 샀던 여행서에 시장 정보가 있었다. 아홉시 반쯤 집을 나섰고 마사리코보 기차역 앞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트램 3번을 타고 9정거장쯤 가야 했다. 카를로보 나메스티를 지나서 조금 더 가는 쪽이었고 예전의 내 반경에는 들어가지 않는 곳이다. 여기는 토요일에만 새벽 6시인가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서는 시장으로 싱싱한 야채, , 케익, 치즈, , , 바클라바, 견과 강정 등등 이것저것 맛있는 것을 많이 팔았다. 햄과 소시지 노점도 많았다. 커피와 주스도 있고, 특히 빵과 샌드위치 등속이 맛있어보였다. 쥬인이랑 왔으면 참 좋아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시장 구경이 너무 재미있었고 아마 혼자였거나 쥬인 혹은 친구들과 함께였다면 이것저것 사고 또 먹느라 정신없었을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엄마는 이쪽 음식들 취향이 전혀 아니셔서 그런지 나만큼 흥미로워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줄서서 사가는 빵 노점에서 포피씨드와 자두가 든 빵 한 조각을 사는 것으로 만족했고, 한시간 좀 안되게 한 바퀴 돈 후 엄마와 시장에서 나왔다. 예전에 알았다면 갔었을텐데 아쉬웠다.

 

 

생각보다 시장 구경이 일찍 끝났고 나는 지난 겨울 여행 때 바츨라프 광장과 인드리슈스카 거리 근처에 있던 러시아 식품점이 마침 가는 경로에 있어 거기 들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융만노바의 헤드샷커피에 들르려고 했다. 엄마도 계시니 그냥 테이크아웃하려고. 주말에 쉬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구글맵에 영업한다고 나와서 혹시나 하고 가보았지만, 문은 꽉꽉 닫혀 있었다. 나를 우롱한 구글... 그때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 오늘은 분명 종일 맑음이라 했고, 내내 우산 가지고 다니다가 오늘만 안 가지고 나왔는데... 비를 피하기 위해 헤드샷 맞은편의 IPPA 카페에 갔다. 여기는 지난번에 서양배 모양의 맛있지만 값비싼 디저트를 먹었던 곳이다. 엄마는 자몽 주스, 나는 얼그레이와 이번에는 레몬 모양의 케익을 시켰다. 화이트초콜릿 안에 크림과 레몬잼이 들어있었는데 서양배보다 맛은 덜했다.

 

하여튼 비를 피하며 앉아 있다가, 조금씩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리는 다시 나왔다. 그냥 트램 타고 집에 갈까 하다가 러시아 식품점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는데, 그 중간에 광장의 PRIMARK 쇼핑몰에 우연히 들어갔다. 여기는 저렴한 옷과 잡화들을 파는 아주 큰 곳이다. 나는 예전에도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는데, 동생에게 좀 재밌는 걸 사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엄마랑 들른 것이다. 그런 좀 재밌고 귀여운 티셔츠를 발견했으나 동생이 입을만한 사이즈는 없고 전부 XL 이하여서 실패(내 동생은 키도 크고 어깨가 넓고 요즘 덩치가 좀 불어서 아무리 봐도 2XL는 사야 할 것 같았음. 그 사이즈는 다 빠진 것 같았다) 대신 파란색의 화려한 무늬의 순면 남방 셔츠를 발견했다. 동생에게 어울릴 것 같았으나 이것도 사이즈가 없어서 대신 아빠 사이즈로 샀다. 이리하여 결국 동생 것만 없음.

 

 

프리마크에서 러시아 식품점까지는 10분 정도 걸렸다. 흑빵 두 덩어리를 사고, 비록 디저트를 먹었지만 견디지 못하고 러시아 플롬비르 아이스크림을 한 개 사서 맞은편 공원 벤치에 앉아 먹은 후 엄마와 함께 집까지 걸어왔다. 비는 다 그쳐 있었고 해가 났다. 엄마는 피곤해하셨다. 내가 볼 때 엄마의 흥미를 끄는 것들은 모두 소진되었고 이제 만사가 피곤하고 별로인 모드에 접어드신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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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왔는데 오늘은 아파트 청소와 타월 교체를 해줄 줄 알았으나(7일마다 해준다고 되어있었음), 140분 정도에 들어왔지만 방이 그대로라 엄마가 무척 짜증을 내셨고 이게 뭐냐고 다그치셨다. 여기는 호텔도 오후 늦게나 청소해주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드렸지만 이미 만사가 피곤하고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 엄마는 매우 저기압이었고 청소가 안되어 있는 것에 대해 계속 화를 내셨다. 내가 전화를 해서 얘기를 하겠다고 하니 그냥 하지 말라고, 이틀 후면 돌아가는데 아직도 안해놓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고 성질을 부리심. 나도 너무 피곤해졌고 청소가 안되어 있는게 내 잘못도 아닌데 엄마가 너무 딱딱거리시니 여태 엄마를 모시고 다니며 고생한 피로가 확 몰려왔다. 그래서 그걸 나한테 화내실 일은 아니지 않느냐, 내가 지금 전화를 해서 청소해달라고 하겠다, 아니면 몇시에 오는지 물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엄마가 기분이 나빠지신 상태라 내 방에 가서 전화를 했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아파트라 리셉션에서 전화를 받았고 얘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나보고 와서 타월을 받아가라고 했다. 청소는 유료라고 해서 내가 당초 예약 당시 조건들에 대해 그대로 읽어주자 담당자가 당황하더니 다시 전화를 해주겠다고 했다. 곧 전화가 왔고 지금 청소를 해주겠다고 했는데, 엄마는 피곤하니 쉬고 싶고 그동안 청소를 하러 오면 제대로 쉴수도 없고 또 나가야 하니 그게 너무 싫어서 계속 짜증을 내셨으므로 나는 안와도 돼요, 우리는 지금 집에서 쉬려고 하니 그냥 오지 마세요라고 말했고 리셉션에서 그럼 내일 갈까요라고 하여 내일 오전에 와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끊고 엄마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엄마가 어차피 모레 가는데 내일 와서 타월과 시트를 바꾸고 청소를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냥 오지 말라고 하라고 하셔서 내일 아침 조식 먹으러 갈 때 리셉션에 다시 얘기하겠다고 했다. 뭐 이 시기쯤 되면 한번쯤 이러실 거라고는 생각했고 또 원체 엄마가 음식도, 여행 취향도 이쪽과 딱 들어맞지는 않으니 이제 피곤하고 지루해지실 법도 하다. 이해는 되는데 나도 힘들고 바쁜 와중에 간신히 시간을 짜내서 여기 왔고 모든 것을 엄마에게 맞춰드리며 다니려고 애썼는데 짜증을 내시니 기운이 빠져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엄마는 먹을 것도 할 것도 없다고 심통을 내셨지만 한편으론 좀 미안하셨는지 어제 먹은 그 오징어짬뽕이나 사올걸 그랬다고 하셨고 내가 한국식품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엄마도 같이 나가겠다고 하셨지만 그냥 집에 계시라고 말씀드렸다.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실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 생각보다 엄마도 나이가 드신데다 원체 깔끔한 성격이니 청소 때문에 화가 날 법도 했다. 교회에도 못가고 여기는 다 별로라는 모드가 되어 계셔서 나도 잠깐 나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메스티 레푸블리키의 한국식품점에 갔다. 엄마를 위해 오징어짬뽕을 사고, 바로 옆의 BILLA 수퍼에 들러 마침 할인 중이던 로메인 상추를 샀고 회사 직원들에게 줄 초콜릿 한 상자, 쥬인을 위한 치즈, 그리고 신상 감자칩을 사서 귀가했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해가 쨍쨍 났다. 엄마는 나에게 따로 나가서 놀고 오라고 했지만 나도 기운이 없었다. 사실 나 혼자 나가면 갈곳은 많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엄마는 오징어짬뽕을 끓여드시고 기분이 좀 나아지셨고 눈을 좀 붙이셨다. 나는 굳이 엄마에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냥저냥 지치고 마음이 가라앉아서 거실에서 그냥 쉬었다. 업무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라 곧 돌아가서 그 일폭풍에 휩싸일 것을 생각하니 기운이 다 빠졌다. 결국 샤워도 하고 머리도 감고 그냥 나도 오늘 더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열쇠가 하나뿐이라 엄마만 두고 나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여행이 아까운 마음이 약간 들었지만 그건 <휴가> 자체에 대한 아까운 마음일뿐, 여기는 자주 왔던 곳이라 별로 간절하거나 아쉽지도 않았다.

 

 

 

 

 

 

엄마는 한시간 안되게 눈을 붙인 후 거실로 나오셨다. 나는 이제 안 입을 옷들을 한뭉치 들고 와서 가방을 조금 꾸렸고 엄마는 내가 가방 꾸리는 모습에 좀 감탄하셨다. 엄마는 대충대충 쑤셔넣고 왔는데 정말 야무지게도 꾸린다, 여행을 많이 다녀서 그렇구나 하셨다. (우리 엄마는 아주 엄격하고 깔끔하고 잔소리가 많은 분인데 막상 여행가방은 정말 대충 꾸려오셨고 놓고 온 것도 많았음. 나도 깜짝 놀랐음) 가방을 꾸리다가 좀 쉬다가 6시 좀 넘어서 저녁을 먹었다. 눈을 붙이고 저녁을 드시고 나니 엄마는 기분이 나아지셨고 너무 배가 부르니 운동 겸 강변에 가서 좀 걷고 와야겠다고 하셨다(원래 집에서는 밤마다 운동장을 몇바퀴씩 도시고 수영도 가셨음) 나는 이미 씻어버린 탓에 나가기가 싫었지만 그래도 엄마랑 같이 나갔다. (혼자 다녀오시게 할 수는 없었음)

 

 

카를 교 정도까지 걸어갔다 오기로 했는데, 요세포프를 지나 체추프 다리 쪽으로 왔을 때 그쪽의 보트 선착장을 발견했다. 사실 엄마에게 계속 배를 타자고 했는데 엄마가 내켜하지 않으셨다. 비싸서 싫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어르고 달랬지만 미루고 또 미루셨다. 그런데 저녁 시간대에 보트 선착장을 지나게 되었고 관광객들이 계속해서 배에 오르는 것에 엄마도 조금 흔들리셨다. 한강에서도 탔는데 뭘 또 타느냐고 해서 언제 여기서 배를 타겠느냐, 풍경이 다르지 않느냐고 설득하였다. (교회라도 있으면 내일 예배라도 갈텐데, 할 것도 없고 여기는 정말 못살겠다, 먹을 것도 없다 등등 불만모드셨던 터라 배라도 태워드려야 나을 것 같아서) 몇차례의 망설임과 반복 끝에 그래, 지금은 비가 안 오니까 지금 출발하는 거라면 타자고 하셔서 제일 짧은 1시간 코스 표를 끊었다. 나도 프라하에 많이 왔지만 배는 한번도 타보지 않았었다. 이번 엄마와의 여행에서 나도 안해봤던 것들 몇 개를 해보게 되었다.

 

 

보트는 체추프 다리에서 시작해 카를 교와 레기 교까지 갔다가 뱃머리를 돌려서 강을 거슬러올라갔다. 아주 느려서 나는 좀 답답했지만 엄마는 풍경 구경하려면 느린게 맞지 네가 의외로 이런 데서 성질이 급하구나 라고 하셨다. 나는 한시간이나 걸리는 코스라면 좀 더 많은 곳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었음. 너무너무 느려서... 배는 레기 교와 체추프 교를 왕복하는 정도만 돌았다. 더 길고 비싼 걸 끊었으면 카를로보 나메스티와 댄싱하우스까지는 갔을 것 같다만. 어쨌든 더 길었으면 피곤했을 것 같았다. 씻고 나갔던 터라 선크림조차도 안 발라서 얼굴이 좀 탔을 것 같다. 하여튼 엄마는 배를 탄 후 집까지 걸어오시면서 오후보다는 기분이 나아지셨다. 다행이다. (사진은 배 위에서 찍음. 배 탈 거라는 생각을 안 하고 나갔던 거라서 카메라도 안 가져갔음)

 

 

이제 떠나는 날인 월요일을 제외하면 내일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내겐 여행이라기보다는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다. 얻은 것도 많고 그만큼 내가 지친 것도 많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소중한 시간들이다. 더 빨리, 더 자주 이런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 내가 힘든 만큼 엄마도 나에게 맞춰주고 계신 면들이 분명 있을 거고, 또 나에게는 이곳이 정든 곳이고 하나하나 아기자기하고 즐거운 곳이지만 엄마에게는 낯설고 이상하고 지루한 곳일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게 생기면 반복하며 즐기는 타입이지만 엄마는 한번 클리어하면 끝이고 나처럼 카페나 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다. 그러니 역시 엄마와는 패키지 여행이 더 잘 맞는다는 결론이 나옴. 그리고 엄마는 일주일 이상 여행을 해보신 적도 없으니 이 여행이 길게 느껴지실 거고 지금 딱 피곤하고 지루해지실 타이밍도 맞다. 사실 오기 전부터도 그렇게 생각은 했다만... 하여튼 그래도 모든 것에는 처음이 있기 마련이고 지나고 나면 이 시간들이 그립고 소중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오늘 메모는 이것저것 길었다. 오늘은 15000. 이번 여행은 80% 는 엄마, 20%는 업무와 앞날에 대한 고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디 오늘 새벽엔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좋겠는데 ㅠㅠ 하지만 토요일 밤이니 또 난리난리겠지. 제발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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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