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수면부족으로 일찍 누웠으나 역시 3~4시간만에 깨어났다. 그리고는 새벽 3시부터 두어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약을 먹고 다시 잠들어 늦게 일어났다.
내일 숙소를 옮겨야 하므로 가방을 좀 꾸렸다. 내일 옮기는 숙소는 하루만 묵고 또 모레 옮긴다. 그리고는 며칠 후 다시 내일 가는 숙소로 옮긴다. 중간에 일정을 추가해서 그렇게 됐다. 참 피곤하긴 하다 ㅠㅠ 가방을 몇번 풀어야 하는겨..
너무 졸리고 피곤했는데 오늘 그날이 시작되었다. 어쩐지... 너무 졸리더라니. 내일 호텔 옮기려면 힘들겠다. 택시 불러달라 해야겠다.
샐러드와 체리로 아주 간단한 아점을 먹었다. 어제 먹은 것도 느끼했고 근 열흘간 제대로 된 '밥'을 못먹었다. 계란볶음밥과 리조또를 좀 먹긴 했지만 그건 흰밥이 아니니까 무효.
마침내 느끼함을 견딜 수 없어 오늘은 루빈슈테인 거리에 있는 중국 레스토랑에 밥 먹으러 갔다. 근데 내겐 그냥 아무 중국집이나 뭔가 마파두부나 매운게 있으면 되는 거였는데 이 거리는 워낙 요즘 뜨는 거리이다 보니 중국집마저도 고급화되어 가격도 비싸고 마파두부도 엄청 조금 나와서 빈정상했다. 나 원래 많이 안먹는데 -_- 내가 보기에 적으면 그거 진짜 적은 거라고요!! 그나마 베지테리안 메뉴라 돼지고기가 들어 있지 않았다. 맛은 간장 맛이 강해서 많이 달았고 전혀 맵지 않았다. 하여튼 오랜만에 그냥 흰밥을 먹으니 살것 같았다. 비록 긴쌀이지만 그래도 밥이 어디야..
하여튼.. 본시 중국집이란 세계 어딜 가도 비슷비슷하고 또 싼 가격에 많이 먹을 수 있는게 장점이고 한국 식당대신 뭔가 매운거 먹고플때 갈수 있는 곳이거늘... 아무리 루빈슈테인 거리라 해도 그렇지... 비싸고 양 적어!!! 될말이냐 ㅠㅠ
그래도 흰밥이랑 두부 먹고 좀 나아짐. 생각해보니 러시아로 떠나오기 전에도 근 일주일 가까이 제대로 못 먹었다. 일하고 울고 괴로워하고...
여기 와서 며칠 만에 살이 많이 빠졌다. 아마 그때 힘들었던 게 누적되어 그런 것 같다. 떠나오기 며칠 전 홍대에서 샀던 자잘한 무늬의 흰 블라우스를 오늘 꺼냈다. 극장 갈때 입으려고 챙겨온 건데 그사이 살이 빠져서 어깨가 다 드러났다. 좀 파진 옷이긴 했지만 이렇진 않았는데. 결국 그 옷 대신 다른 옷 입었다. 회사 있을땐 계속 일하고 지방과 서울을 오가도 운동을 못해서 그런지 아무리 힘들어도 살이 안 빠졌는데 여기 오니 살이 쭉쭉 빠지네.. 예쁘게 빠지는 게 아니라서 별로 좋진 않다. 료샤와 레냐가 날 보고는 작년보다 살빠졌다고 슬퍼했고 레냐는 나에게 메도빅과 고기를 많이 먹여줘야 한다고 했음. (그래봤자 토끼긴 하지만)
..
덥고 습한 날이었다. 밤에 비가 온다고 했다. 오늘은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보리스 에이프만의 안나 카레니나를 보기로 한 날이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차 한잔 마시고 가기로 했다.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뒤에는 극장 박물관이 있는데 전에 박물관 갔다가 들르지 못했던 디아길레프 카페에 갔다. 카페 이름이 디아길레프, 그리고 안에는 박스트의 발레 일러스트 액자들이 걸려 있어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근데 카페가 작고 에어컨을 틀지 않아서 엄청 더웠다. 긴 소매 블라우스 입고 갔다가 쪄죽는 줄 알았다. 하여튼 차 한잔과 메도빅(여기 와서 오늘 첨 먹음) 한개 시켜놓고 앉아서 몇달 전 샀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여행을 위해 안 읽고 아껴뒀던 책이다.
(오른편 창가에 디아길레프 초상화가 보인다)
여기 메도빅은 너무 달고 끈적해서 내 입맛엔 안 맞았다. 그래도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고 있자니 좋긴 했다.
..
내가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는 좋아하지 않고 수필가로서의 하루키만 좋아한다고 수차례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작가로서 하루키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그리고 소설쓰기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지 읽는 것은 역시 흥미로웠다.
'인간이 소설을 쓰려고 하는 곳은 모두 다 밀실이고 이동식 서재입니다' 라는 저 문장은 나와 매우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는 더워서 조금 일찍 나와 알렉산드린스키 공원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책을 좀더 읽었다.
문득 얼마만에 바깥 바람을 맞으며 하늘 아래에서 책을 읽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행복하다기보다는 살짝 우울했다. 어쩌면 행복해서 우울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
8시 공연이었다. 에이프만 발레를 무대에서 보는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에이프만은 내게는 아주 특별한 예술가이고 내게 지금 쓰는 글과 미샤라는 주인공에 대한 영감을 준 사람이다.
에이프만의 안나 카레니나는 전에 본적이 없었다. 라트만스키 버전으로 마린스키에서만 봤다. 사실 그 작품도 큰 감흥은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 내가 톨스토이와 그의 원작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겐 언제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더 맞았다.
에이프만의 안나 카레니나도 실은 마찬가지여서 난 까라마조프가 더 맘에 들었다. 에이프만은 과감하게 모든 등장인물들을 쳐내고 카레닌과 안나, 브론스키 3인에게만 집중하고 특히 안나에게 온전히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는데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플롯은 단선화되었다. 솔직히 말해 피곤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1막은 큰 감흥이 없었고 에이프만 특유의 안무(팔과 다리 동작, 리프팅 등)가 반복되는게 약간 매너리즘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브론스키보다 카레닌의 춤이 더 멋지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다니... 브론스키 실패한 거야? 아니면 카레닌 역의 올레그 마르코프가 워낙 더 매력적이어서였을지도 모르지. 올레그 가브이셰프의 브론스키는 평면적으로 느껴졌고 좀 너무 순정파처럼 보였다. 아마 에이프만이 안나에게 집중하느라 브론스키를 평면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만... 브론스키가 너무 후줄후줄해서 카레닌이 더 멋있었음 ㅠㅠ
안나 역의 마리야 아바쇼바는 훌륭했다. 예전의 베라 아르부조바를 좀 연상시켰다.
2막 중간까지도 큰 감흥이 없었고 오히려 나는 회사와 그곳에서 있었던 일,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길 등에 대해 상념에 빠지기까지 해서 좀 우울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에이프만답게 후반부의 박력은 굉장했고 안나가 최후를 앞두고 육체와 정념이 들끓는 마음속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고 마침내 무용수들과 소음으로 이루어진 기차로 뛰어드는 결말까지 약 15분 정도는 숨을 쉴수 없을만큼 몰입해서 봤다. 아마 그 후반부는 내 취향에 맞는 드라마틱함과 처절함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좀 감동해서 나왔다.
2층 벨에타쥐 두번째 열에 앉았다. 극장이 작아서 잘 보이긴 했는데 하여튼 조명 때문에 커튼콜 사진은 거의 못 건짐. 다 번졌다. 오늘 무거워서 좀 작은 렌즈를 가져가긴 했었다.
리뷰를 따로 써보고픈데 과연 언제 쓸지..
..
끝나고 네프스키를 따라 판탄카 운하와 아니치코프 다리를 건너 숙소까지 걸어왔다. 두세 정거장 거리라서.
걸어오면서 폰으로 찍은 사진 몇 장. 폰인데다 해가 진 후라 좀 어둡게 나왔다.
..
좋은 공연을 보았고 오랜만에 책도 읽었는데 좀 마음도 가라앉고 우울하다. 아마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인가보다.
이제 자고 내일 숙소 옮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