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 월요일 밤 : 핀란드 우하, 스몰니, 세월, 용서의 징표 2017-19 petersburg2019. 11. 12. 03:27
자정 좀 넘어 잠들었지만 여섯시간 반 정도 자고 깼다. 날씨 때문에 내내 졸리고 피곤한데 시차 적응이 이번따라 더 안되네.
일곱시 안돼 깬 후 자보려고 뒹굴다 결국 조식 먹고 왔다. 도로 침대에 들어가 어제 산 뻬쩨르 여행서 좀 읽으며 오늘 어디 갈까 생각하다 스몰니 사원에 오랜만에 가보기로 함. 숙소 근처에서 트롤리버스 5번을 타면 갈 수 있다.
스몰니에선 아주 옛날 첨 갔을때 쥬인과 거북이랑 같이 수업을 들었고 십여년 전 다시 갔을때도 그랬다. 그 이후엔 갈 일이 거의 없었다. 료샤가 스몰니 근처 동네에 살기는 하지만 걔네 집 갈때도 그 방향으로는 안 가서 굳이 갈 일이 없다. 게다가 좀 멀고 또 네바 강변을 등지고 있어서 강바람도 추운 곳이다. 이쪽에 정부 기관들이 있어서 분위기도 좀 삭막.
그래도 한번 오랜만에 가보았다. 넘 오랜만이었다. 옆의 공원을 산책하며 젖은 검은 흙을 밟고 마르크스 동상도 다시 보고. 스몰니 사원에 들어가서 초도 켜고 기도도 했다. 옛날엔 부속건물에 있는 교실에서 수업만 들어서 막상 이 사원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사원 안은 넓고 휑했다.
수업 받았던 건물 앞에 서자 옛날 생각이 많이 났고 세월이 이토록 빠르게 흘렀다는 사실에 좀 아득했다. 쥬인 손 잡고 다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저런 기분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네프스키에서 내려 로모노소프 가게 갔다. 새로 나온 이쁜 빨강 금빛 찻잔이랑 네바 강 그려진 뻬쩨르 찻잔 샀다. 행사 기간이라 두개 사면 하나 공짜로 준다 해서 파란 드레스 입은 귀족여인 찻잔을 골랐다.
숙소에 돌아오니 너무 배고프고 으슬으슬하고 습했다. 료샤랑 레냐 볼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배고파서(아침 먹은 후 빈속...) 근처 식당에 갔다. 팔로우하는 뻬쩨르 출신 일러스트레이터가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곳인데 괜찮아 보여서.
맨위 사진의 핀란드 우하 먹었다. 크림이 든 생선 수프이다. 춥고 습한 날씨라 어쩐지 먹고 싶어서.
핀란드 우하를 먹으면 언제나 두셰브나야 꾸흐냐와 친절했던 데니스가 생각난다. 안타깝게도 그 식당은 언제인지 문을 닫았다. 데니스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자묘르즐리?' (추워서 얼었어요?) 하고 묻던 부드러운 목소리도 기억에 생생하고. 나는 몇달 전에 쓴 미니 단편에서 알리사가 미샤에게 이 수프를 데워주게 만들었었다. 데니스에 대한 기억과 또 다른 여러가지를 되살리며.
이 식당의 핀란드 우하는 크림이 진하지 않고 가벼워서 먹기는 더 편했다. 맛있었고 몸이 따스해졌다.
연어와 이름모르는 흰살 생선, 감자와 홍합 한개가 들어 있었다.
수프와 함께 치킨 커틀릿을 먹었다. 그것도 맛있었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남겼다.
먹고 나니 허기가 가셨다. 근처 조그만 식료품점에서 에스키모 아이스크림을 한개 사서 디저트로 입가심을 했다.
료샤랑 레냐가 방에 와서 좀전까지 같이 놀고 얘기 나눴다. 어젯밤에도 친척집 갔다 돌아오면서 얘들이 깜짝 방문을 했다. 시간이 늦어서 어젠 십분만 있다 갔는데 레냐가 그때 분홍 장미 세송이를 주었다. 즉, 내가 슈클랴로프님에게 눈이 멀어 공연 보러 갔던 것을 용서해준 것이다 ㅋㅋ 도량이 넓은 우리 레냐 :)
갱지로 둘둘 말아서 갖다준 분홍장미 세송이 :) 레냐는 그래도 약간의 뒤끝을 드러냈다.
레냐 : 쥬쥬는 나 아니고 슈클랴로프한테 꽃 줬지만 나는 쥬쥬한테 꽃 준다아!!! 나는 진정한 남자야!!!
으앙 레냐야 내가 양갱이랑 붕어빵 과자랑 새우깡이랑 양파깡, 오징어땅콩 챙겨왔자나 ㅠㅠ (레냐 좀 할머니나 아재 입맛이라 이런 과자들 좋아함 ㅋ 그리고 얘는 지금도 어릴때와 변함없이 양갱을 엄청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남자인 레냐에게서 용서의 징표인 꽃을 받아 고맙고 기뻤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 방에 온 레냐는 내가 세개의 물병에 꽃을 나눠서 꽂아 여기저기 놓아둔 것을 보며 뿌듯해 했다 :))
료샤랑 레냐는 좀전에 돌아갔고 나는 오늘의 메모를 적고 있다. 졸려서 결국 오늘도 발레 후기를 못 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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