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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비가 내리고 추웠다. 아침에 커튼을 젖혀보니 유리창에 이렇게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아, 이거 6월 맞느냐.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자정 전에 잠자리에 든 후 물론 중간에 자다깨다 하긴 했지만 그래도 도합 8시간 이상 잤다. 계속 자고 싶었지만 억지로 일어나서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먹은 게 별로 없어 그런지 살도 빠지고 얼굴도 퀭하고 힘도 없고 감기 기운도 있는 것 같아서 일단 내려가 탄수화물을 퍼넣고 연한 홍차를 한 잔 마시고 두번째 홍차에는 꿀과 레몬을 투하해 마셨다.

 

방에 돌아와 회사 메일을 접속했다. 계속 안되다 오늘에야 성공했는데 업무 메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고 급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인계해주고 간 일들은 하나도 처리되어 있지 않아 관계자들이 모두 나에게 문의하고 있었다 ㅠㅠ

 

몸과 마음의 안위를 위해서는 회사 메일도 가차없이 무시해버려야 하는데..

 

이 와중에 작년 성과평가 결과도 나왔다. 딱히 좋지 않다. 상반기는 좋지만 하반기는 별로였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하반기 중간에 지방 발령이 났고 내 업무는 반토막이 났고 나 역시 방황을 했으므로...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할 내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공연히 이의를 제기해봤자 나에게만 손해가 될 게 뻔해서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기분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어쩔수 없다. 나도 작년 말에 방황했으니까. 그렇게 치면 올해 역시 결과가 그리 좋을 것 같진 않지만 뭐 그만두려고까지 했는데 그러면 어때.

 

회사 생각, 있었던 일 생각, 돌아갈 생각을 하면 다시금 답답해지고 머리가 아파온다. 그냥 여기 어딘가 숨고 싶다. 아침에 블라지미르 성당 종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무데나 사원 종지기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불쑥 든다. (이런 마음 때문에 예전에 쓴 글에서 미샤가 자기는 교회 종 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게 했었던 걸지도...)

 

(그 얘기 발췌한 적도 있었다. 여기 : http://tveye.tistory.com/3221)

 

 

계속 비가 왔다. 방에만 있기는 아까우니 나가야 하는데 날씨가 너무 괴로웠다. 원래 비오는 날엔 무제이!

무제이는 박물관이다. 여기 오면 항상 궂은 날에는 루스끼 무제이(러시아 박물관)에 간다. 2시쯤 나서며 어차피 버스 타고 가니까 카잔 성당 앞에서 내려 돔 끄니기 가서 카페 징거(cafe singer)에 들러 늦은 점심 먹고 곧장 러시아 박물관 가서 2시간 정도 보면 되겠지 하고 계산을 했다.

 

그래서 돔 끄니기에 갔는데 월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징거 카페는 만석이었다. 배도 고프고 피곤했다. 아무것도 안 먹고 박물관을 돌아다닐 기력은 없었다. 초코바도 하나 챙겨왔으니 전 같으면 그냥 박물관 갔겠지만 지금은 몸이 많이 지쳐 있으니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디 가서 밥먹나 하다가 작년에 bravebird님이 추천해주셔서 한번 가봤던 수프 비노에 가기로 했다. 마침 카잔성당 쪽이니 위치도 가까웠다.

 

..

 

 

천천히 카잔스카야 거리를 따라 내려갔고 근 1년만에 수프 비노에 갔다.

 

 

 

작년에 인사를 나누었던 조용한 목소리의 매력적인 알렉세이가 없어 아쉬웠지만 이곳 분위기는 여전히 평온하고 차분했다. 뭘 먹을까 하다가 치킨 수프와 해산물 루꼴라 파스타, 생강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작년엔 핀란드식 우하와 탕수소스 치킨 덮밥 같은 걸 먹었는데 그때 음식은 사실 내 입맛엔 짠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 먹은 음식들은 정말 너무 맛있었다. 치킨 수프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제일 양이 적은 수프를 고르다 보니, 그리고 몸이 힘드니 산성의 토마토 수프나 크림 수프 말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수프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냥 시킨 거였다. 그런데 이 수프가 정말 영혼의 닭고기 수프였다...

 

 

겉으로는 평범한 치킨 수프..

 

그러나 여기에는... 긴 쌀이 가득 들어 있었고 허브 우끄롭(이게 아마 '딜'인 것 같은데 좀 긴가민가 하네), 축축한 빵조각과 길게 찢은 닭고기가 들어 있었다... 그 맛은 잘 끓인 닭곰탕에 밥을 좀 말아놓은 것 같기도 했고 우끄롭의 향미가 느끼함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내 입맛에도 그렇게 짜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엄마의 맛이 났다. 사실 우리 엄마는 삼계탕이나 닭곰탕 같은 거 안 끓여주는 편이었고 나도 식당에서 그런거 딱히 즐기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랬다. 집의 맛이랄까...

 

아마 계속 춥고 힘들고 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몇달 동안 지방 본사에서 일하면서 집2나 근처에서도 제대로 된 밥을 먹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주말에 화정의 집1로 돌아와도 피곤하고 귀찮아서 예전처럼 요리를 해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누가 정성들여 끓여준 수프나 국을 먹어본지 오래돼서 그런지도 모른다. (만취해 돌아왔을떄 엄마가 황태국 끓여오셨지만 그건 예외로 치자)

 

수프는 사실 아주 쉬우면서도 어려운 음식이다. 수프를 잘 끓이는 것은 어렵다. 먹을만한 수프는 끓일 수 있지만 맛있는 수프는 좀처럼 끓이기 어렵다. 그런데 저 수프는 맛있었다. 수프 비노라는 이름이 어쩌면 수프 때문일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작년 초 얼어붙은 채 들어갔던 두셰브나야 꾸흐냐에서 먹었던 핀란드 우하가 생각났다. 그런 맛이었다. 몸을 데워주고 어쩐지 위안을 주는 맛.

 

고깃국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인데도 저 수프를 끝까지 다 먹었다. 기름지지도 않았다. 원래 러시아에서 먹은 닭고기 수프는 항상 기름이 둥둥 떴는데... 정말 닭곰탕처럼 잘게 찢은 하얀 고기가 들어 있었다. 쌀 때문에 밥을 먹은 기분이었고 몸이 따스해졌다. 그리고 좀 행복해졌다.

 

그리고 해산물 루꼴라 파스타가 나왔다. 첨엔 치즈가 가득 얹혀 있어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일 파스타를 원했기 때문이다. 토마토 소스 베이스였고 치즈를 헤쳐보니 파스타는 푸실리였다. 평소 푸실리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다시 한번 '아...' 했지만...

 

 

 

이 파스타도 정말 맛있었다!

해산물이 특별히 많이 들어 있지도 않았다. 새우와 홍합이 전부였다. 토마토 소스, 푸실리, 그리고 치즈. 그런데 진짜 맛있었다. 사실 러시아에서는 맛있는 파스타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이건 맛있었다. 놀라웠다. 작년에 먹었던 핀란드 우하와 치킨 덮밥은 잊어버렸다. 여기 오면 파스타를 먹어야 한다!

 

수프와 파스타를 먹고 나니 현기증도 좀 가시고 몸도 따스해졌다. 러시아 박물관 가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곳에 좀 더 앉아 있다 가고 싶었다. 워낙 작은 곳이라(테이블이 4~5개 뿐이다) 계속 손님들이 오지만 않는다면 노트북 들고 와서 글을 쓰고 싶은 곳이다.

 

입을 정리하기 위해 얼그레이 홍차와 치즈케익을 시켰다. 티포트와 찻잔 중 택일하게 되어 있어(전자가 당연히 더 비쌈) 포트를 선택했고 당근케익, 판나코타, 치즈케익, 아이스크림만 있어서 치즈케익을 시킨 거였다. 근데 티포트가 엄청 컸다! 2인용인가보다... 앞으로는 그냥 잔으로 시켜도 될 것 같다.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 마법의 포트와 찻잔!

 

그리고 치즈케익은 블루베리가 샌드되어 있고 초콜릿 시럽이 뿌려져 있어 또다시 '아..' 했다. 블루베리 치즈케익을 안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케익조차 아주 맛있었다. 많이 달지도 않았고 삭 녹았다.

 

(옆자리 커플이 '케익 뭐 시키지' 하고 고민하자 다른 옆자리 여자 손님들이-아마 단골인 듯- 여긴 당근케익이 최고에요! 라고 했고 커플은 옳다구나 하고 당근케익 주문. 아, 나도 나중에 그거 주문해봐야 하나... 근데 난 당근케익을 별로 안 좋아하지. 토끼인데 왜 안 좋아할까...)

 

 

 

 

차는 뜨거웠고 케익은 부드러웠다. 몸이 노곤해졌다. 글을 쓰고 싶은 곳이었다. 이렇게 맛있고 소박하고 조용한 곳이라니. 그런데 너무 작아서 손님들이 자꾸 오니까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글을 쓰기에는 미안한 곳이다. 흑...

 

작년 처음 왔을 땐 알렉세이가 좋았는데 오늘은 음식과 공간 자체가 좋았다. 이곳을 소개시켜주신 bravebird님 감사해요.

 

 

.. 그건 그렇고 내 다른 옆자리에 앉은 엄마 아빠 어린 여자애가 있었다. 러시아 가족이었는데 이들도 수프와 파스타와 차를 시켰다. 근데 이들도 나처럼 닭고기 수프를 시켰고... 내가 그토록 행복하게 먹은 수프는 여자아이 입맛엔 안 맞았다. 그 이유는... 우끄롭 때문이었다. 아이는 울상이 되어 징징댔고 엄마는 엄하게 '수프를 다 먹지 않으면 밥도 없고 차도 디저트도 없다!' 하고 말했다. 아이는 훌쩍이며 수프를 떠먹었고 숟가락으로 가능한 한 열심히 조그맣고 가느다란 파란 이파리들을 옆으로 밀어냈다.

 

아, 나도 이해해... 아이 입맛엔 싫을 수밖에... ㅠㅠ 나도 어릴 때 엄마가 콩밥 해주면 싫었어. 지금도 콩밥 안좋아해. 검은콩도 두부도 다 좋아하지만 밥에 든 콩은 싫다. 특히 푸른 완두콩 든 밥이 싫다. 후각이 예민해선지 밥에 든 콩은 너무 비리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허브 중에서도 고수 등 너무 센 건 안 좋아한다. 우끄롭도 향이 강한 편이니 아이들은 싫어할수도 있다.. 가엾은 녀석...

 

하여튼 소녀는 꾸역꾸역 수프를 먹었다. 나중에 내 치즈케익이 나오자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부모님에게 수프 먹었으니 디저트 시켜달라 졸랐다. 그 가족은 과연 판나 코타가 뭘까 하고 궁금해했다. 슬며시 내가 설명해줄까 하는 맘이 들었는데 마침 점원이 와서 알려주었고 소녀는 그것을 골랐다. 엄마는 '판나 코타 하나 주세요' 라고 한 후 '우끄롭은 빼고요~' 라고 덧붙였고 가족은 하하 웃었다. 나중에 나온 판나 코타 역시 맛있었는지 아이는 그제사 웃기 시작했다.

 

..

 

 

차와 케익까지 먹고 나서 수프 비노를 나왔다. 시간도 어중간하고 몸도 피곤해서(대체 언제까지 피곤할 것인가... 대체 이제껏 얼마나 힘들었기에 그런 것인가) 러시아 박물관은 포기하고 그냥 돔 끄니기에 갔다. 루키야넨코의 쉐스또이 다조르(여섯번째 경비대)를 사려고. 이것이 다조르 시리즈의 완결판이고 작년에 나왔다는데...

 

 

-- 여기서부터 한 문단은 아주 조금 스포일러. 국내 미출간본(빠슬레드느이 다조르, 노브이 다조르)까지 읽은 분은 거의 안계시겠지만 그래도 이 시리즈 마지막 알기 싫으신 분은 스킵하세요. ...

 

 

'안톤 고로제츠키의 마지막 이야기'라고 되어 있어 너무 조마조마해서 맨 뒷장을 들춰봤다. (고로제츠키 죽으면 안 사려고... 십년 넘게 읽어온 시리즈인데 주인공이 죽어버리는 걸로 끝나면 너무 속상하니까 안 사려고..) 다행히 죽진 않는데... 안 죽지만 그에게는 참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걸로 끝나는 분위기라 기분이 확 다운됐지만 그래도 일단 샀다. 흑, 작가 너무해 엉엉...

 

 

...

 

 

그리고는 재미있는 동화책 한권과 소련 시절 지어진 레닌그라드 명소가 표기된 지도가 있어 그것도 같이 샀다. 후자는 글쓸 때 도움이 될것 같아서.

 

..

 

책을 산 후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이번엔 루빈슈테인 거리 쪽을 따라 뒷길로 돌아서 숙소로 갔다. 내가 쓴 글의 우주에서는 이 루빈슈테인 거리에 미샤의 오랜 애인인 유라가 의사로 일하는 병원이 있다. 실제의 루빈슈테인 거리에는 병원 대신 바와 레스토랑, 그리고 말르이 드라마 극장이 있다. 요즘 뜨는 동네라 괜찮아보이는 카페와 식당들이 많았다. 조만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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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돌아와서는 씻고서 동화책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한동안 침대에 드러누워 끝까지 다 읽었다. 선물용으로 산 건데 내것도 하나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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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서 카디건을 입고 스카프를 담요처럼 덮고 있다가 결국 원피스를 꺼냈다. 체크무늬 단추 원피스로 끈을 잡아매는 로브 스타일이다. 분명 외출복으로 샀지만 이제 이 원피스는 실내가운으로 변하고 말았다. 넉넉한 편이라 파자마와 티셔츠 위에 걸치고 끈을 느슨하게 매니 그냥 가운이다... 그래도 한결 따뜻하다.

 

8시 즈음 배가 고파져서 어제 수퍼에서 사온 미모자 샐러드(감자, 달걀, 당근, 치즈, 마요네즈 등으로 버무려 겹겹이 쌓은 샐러드. 올리비에랑 좀 비슷하지만 이건 잘게 다져서 층을 쌓는다)와 체리를 좀 먹었다. 어쨌든 오늘은 부실하나마 조식도 먹었고 점심은 수프와 파스타로 잘 먹었고 차와 케익도 먹고 저녁은 샐러드와 체리도 먹었으니 세끼 다 챙겨먹었다. 스스로 칭찬하는 중.

 

근데 샐러드와 체리가 많아서 샐러드는 반만 먹었고 체리는 4분의 1만 먹었다. 미국 체리가 아니고 러시아 쪽 체리이다. 체리 종류가 몇가지 있는데 잘못 사면 신 품종이 걸리기 때문에 어젠 점원에게 물어봐서 단 것으로 골랐다. 이 체리는 맛있었다.

 

 

 

..

 

회사 메일을 보고 평가 결과를 보고 또 일도 좀 해서 그런지 다시금 마음이 좀 무겁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현실적으로야 돌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미 나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사실 나 자신의 무의식이 바랬던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든다. 돌아갈 길을 막아서 떠날 수 있게 하려고 그랬던 걸까? 잘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부당한 처사를 겪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회의를 품고 있었고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병가를 내고 떠나오게 만든 마지막 직접적인 원인은 그것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아마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난 지금도 괴로워하며 그냥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인생은 놀라운 것이다. 항상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그것에 따라 뭔가가 변한다.

 

하긴 그래봤자 얼마 후면 지금처럼 다 닳아서 결국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

 

생각하지 말자. 잘 먹고, 걷고 보고, 글도 좀 쓰고... 다시 숨을 쉬러 왔으니까. 종소리를 듣고 바람을 맞고 강변을 걷고 석양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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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