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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도착한 후 가장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날씨가 맑았고 하늘이 파랬다. 호텔 조식 먹으러 내려가기가 싫어서 한참 누워 있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날씨가 좋으니 네프스키 수도원에 가기로 했는데 일단 배가 고프니 아점으로 근처 식당에서 잘 먹고 가기로 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자고로드느이 대로가 나오는데 그 대로와 루빈슈테인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우크라이나 식당 '쉬녹'이 있다. 여기는 작년에 bravebird님이 가셨다가 맛있다고 추천해주셔서 나도 가봤는데 그때 무척 맛있게 먹었던 곳이다. 런치로 먹으면 가격도 저렴하다.

 

이번엔 런치에 내가 먹고 싶은 게 없어서 그냥 제값 주고 보르쉬와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을 주문했다. 우크라이나 식당이니까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음식을 먹는다. 보르쉬도 여러 버전이라 돼지고기 없는 것으로 추천을 받아 오데사 스타일의 보르쉬를 주문. 쇠고기와 토마토, 감자, 비트, 파프리카 등이 들어 있었는데 무척 맛있었다. 빵껍질이 덮여 나오고 그 빵을 먹을 수 있다. 고골의 보르쉬가 좀더 진하고 크리미한 맛이라면 여기 보르쉬는 딱! 그 보르쉬 맛이었다.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 역시 자르는 순간 기름이 주루룩 흘러나오는 것이 진짜(ㅋㅋ) 키예프 커틀릿이었다. 그러나 별로 느끼하진 않았다. (기름진 거 못먹는 내 입에도 나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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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보르쉬를 먹으니 땀이 좀 났다. 몸이 많이 힘든 상태인가보다. 그래선지 어제 수프 비노의 치킨 수프와 오늘 쉬녹의 보르쉬가 둘다 몸에 필요했던 것 같다.

 

먹은 후 생각보다 날이 더워서 다시 숙소로 갔다. 트렌치코트와 카디건을 벗고 후드재킷으로 바꿔입은 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수도원에 갔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은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난 언제나 날씨가 좋은 날, 햇볕이 따스한 날 이곳에 온다.

 

먼저 수도원 카페에 가서 얼그레이 티와 사과빵을 먹었다. 보통 여기 오면 수도원 모르스를 마시는데 오늘은 차를 안 마셔서... 사과빵은 여전히 담백하고 맛있었다. 전혀 달지 않았다. 지하 카페는 텅 비어 있었지만 잠시 후 러시아인들이 한둘씩 들어와 차와 빵을 먹고 나가곤 했다. 이 카페를 찾는 것은 거의 러시아인들이다. 그도 그럴것이 정교 수도원에 있는 카페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곳에 올땐 정교 신자는 아니지만 잠시 기도를 한다.

 

 

소박한 카페이다. 내가 사랑하는 곳이다. 사진 찍으면 안되는데 마음 속에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살짝 찍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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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차로 몸을 데운 후 햇살 아래로 나왔다. 찬란한 오후였다. 하늘은 파랬고 햇살이 눈부셨다. 나는 스카프로 머리를 싸맸고 초를 네개 사서 수도원 내의 교회로 들어갔다. 러시아 정교 사원은 카톨릭이나 개신교 교회와는 많이 다르다. 벽에는 이콘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이콘 앞에는 초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머리를 스카프로 가린 여자들과 허리를 굽힌 남자들이 이콘과 이콘 사이를 오가며 절을 하고 성호를 긋고(카톨릭과는 순서가 다르다) 한쪽에서는 정교 신부가 예배를 보기도 한다. 신도들은 이콘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성호를 긋고 기도하고 이콘을 손으로 만지고 입을 맞추고 다시 성호를 긋고 인사를 한다. 초를 켠다.

 

나도 초를 켰다. 가족과 나를 위해. 우리 집은 개신교니까 엄밀히 말해서 정교 신자는 아니지만 성호도 그었다. 사실 진정한 신앙이 존재한다면 거기 차이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언제나 회의주의자인 내게 그런 믿음이 생기기를 바랬던 것 같다.

 

어두컴컴하고 화려하고 조용하고 촛불이 여기저기 총총 빛나고 있는 사원 안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햇빛 아래로 나왔다. 하늘색과 흰색, 금색으로 칠해진 조그만 천사 이콘을 샀다. 수호천사 이콘이라고 되어 있는데 금발인 것을 보니 가브리엘 같다. 자세히 뜯어보면 좀 조잡한데 그래도 첫눈에 띄었기 때문에 샀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그리고 쓰는 글을 위해. 천사가 중요한 상징 중 하나인 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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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경내를 오랫동안 거닐었다. 햇볕을 받으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걷고 꽃들을 보고 향기를 맡았다. 묘지 사이를 걸었다. 검고 축축한 흙을 밟았다. 묘지의 십자가들과 이름들을 보았고 바람을 맞았고 심호흡을 했다. 햇살이 따스했고 눈부셨다. 하늘이 너무나 파래서 온몸을 깨끗하게 통과해 지나가는 것 같았다. 평온이 찾아왔다.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이곳에 와야 했다. 내가 이곳으로 날아온 가장 큰 이유가 어쩌면 여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진까지는 카메라로 찍은 것.

그리고 수도원 경내로 들어가서는 큰 카메라로 촬영하면 안되니(원래는 촬영 자체가 좀 그렇다) 소리 안나는 앱을 사용해 폰으로만 찍었다. 물론 교회 안은 찍지 않았다.

폰으로 찍은 수도원 사진들은 나중에 따로 올려보겠다. 아래 몇 장만.

 

(러시아 와서 올리고 있는 사진들 중 화질과 심도가 좋은 건 카메라로 찍은 거고 얕고 평면적인 건 폰으로 찍은 것들이다. 후자가 더 많다. 아무래도 휴대하기가 편하고 용량이 작아서 업로드도 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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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산책을 하고 햇볕을 쬐다가 화단 안쪽에서 한가롭게 조는 고양이를 한 마리 발견했다. 토실토실하고 예쁜 고양이인데다 원체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는 곳이라 웬만한 소음이나 기척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햇살 받고 조는 고양이를 보니 나도 노곤해졌고 고양이를 바라보며 따뜻한 돌바닥에 한참 주저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나를 보았고 귀찮아하며 도로 졸았다.

 

 

 

고양이를 바라보며 햇살 쬐며 노곤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앙증맞고 따뜻한 어린아이 손이 날 확 껴안았다. 그리고는 '쥬쥬~' 하는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레냐와 료샤가 뒤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는데 레냐가 '쉿! 고양이 깨!' 하길래 나도 꾹 참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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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원래 내가 산책을 마친 후 수도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근데 둘이 생각보다 좀 일찍 도착해서 수도원에 들어왔다고 한다. 좀 걷다가 보자마자 나인 줄 알았다고 하길래 나는 의아했다.

 

나 : 어떻게 난줄 알았어? 나 머리에 스카프 두르고 있었는데!! 뒷모습만 보고!

 

료샤 : 그걸 모르냐~

 

나 : 또 호빗이라 할라고!

 

료샤 : 아니야! 수건 두르면 뭐해! 땅바닥에 요가 자세로 앉아 있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놀라운 동양의 신비!!

 

나 : (아, 맞다. 나 양반다리 하고 앉아 있었지 ㅋㅋ) 그거 동양의 신비 아니야 이 바보야 ㅠㅠ 나처럼 둔한 사람도 다 하는 거야..

 

레냐 : 아니야! 나는 알아! 뒷모습만 봐도 알아~ 쥬쥬우우우~~

 

..

 

우리는 함께 수도원을 조금 거닌 후 한쪽에서 수도원 시장이 열린다고 해서 거기도 가보았다. 수도원에서 만들었다는 꿀을 먹어보고 배아플 때 좋다는 꿀을 사고 또 각종 향초가 배합된 차를 이것저것 시향한 후 차를 사고 있자니 료샤가 혀를 찼다. 척 봐도 '상술에 넘어가는 바보 토끼!'라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수도원에서 만든 거니까 살 거야!'라는 시선을 마구 쏘아주었다 ㅋㅋ

 

료샤의 차를 타고 걔네 집으로 갔다. 레냐가 피자를 먹고 싶어해서 근처 이탈리안 식당에 갔다. 나는 해산물 리조또를 시켜서 막 먹었다. 료샤가 혀를 찼다.

 

료샤 : 왜 그렇게 정신없이 먹니.. 굶었냐?

 

나 : 쌀밥이라서... 밥 먹고 싶었어... 밥이다 밥...

 

료샤 : 너 왜 이렇게 오늘 불쌍하게 굴어 ㅠㅠ 수건 쓰고 요가자세로 앉아 고양이 보고 있지를 않나, 꿀 찍어먹고 찻잎 냄새 맡고 비닐봉다리에 꿀이랑 차 사지 않나... 쌀이라고 리조또를 막 욱여넣질 않나...

 

나 : 안 불쌍해! 수도원 오면 원래 그런 거야! 그리고 집 떠나오면 원래 쌀밥 먹고픈 거야!

 

료샤 : 불쌍해. 많이 먹어. 한 접시 더 시켜줄까?

 

나 : 내가 돼지냐!

 

레냐 : 아니야! 쥬쥬는 돼지 아니야, 쥬쥬는 토끼야~ 토끼여왕이야~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고 료샤네 집에 가서 허브차를 마셨다. 레냐는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데다 엄격한 엄마 탓에 귀가 시간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료샤는 레냐를 먼저 집에 데려다 주었고 그다음에 나도 숙소로 데려다 주었다. 료샤는 숙소가 맘에 안 든다며 나에게 도로 자기 집으로 가서 자고 가라고 했지만 그냥 내일 보기로 했다. 얘도 어제 출장에서 돌아와 많이 피곤한 거 안다.

 

내일 우리는 같이 공연을 보러 갈 것이다. 아마 저녁도 먹을 것이다. 레냐랑은 모레부터 만나 다시 놀 것이다.

 

여기 수도원이 있고 햇살이 있고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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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주 맑고 따스해졌다. 수도원에 가서 차를 마시고 사원에서 초를 켜고 경내를 거닐었다.


거기서 료샤와 레냐를 만나 지금 걔네 집에 잠시 와 있다. 오늘 메모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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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