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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목요일이다. 월요일에 체크아웃하고 돌아가서 한국에는 화요일에 도착하고 수요일 새벽기차로 지방 본사 내려가 출근을 한다. 즉, 여행도 이미 절반 이상 지나갔다. 내일이 되면 순식간에 남은 며칠이 가버리겠지...



오늘은 그래도 10시 안 되어 일어났다. 징게르 카페(singer cafe이지만 러시아어로는 징게르라고 읽는다)에 가서 아침 먹어보려고. 여기는 카잔 성당 전망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이 자리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나마 지금은 비수기이고 원체 날씨가 꾸리꾸리하니까 좀 나을 것 같긴 했다. 오늘도 창가는 꽉 차 있었지만 잠시 후 맨 구석의 창가 자리가 나서 잽싸게 그 자리로 옮겨 앉았다.



전에 왔을 땐 조식 메뉴가 좀 더 다양했는데 이번에 메뉴가 또 바뀌었다. 여기는 전망도 그렇고 워낙 명소라 가격이 좀 비싸다. 예전 겨울에 여기서 감자랑 버섯 넣은 블린과 따뜻한 열매즙을 무척 맛있게 먹었었지만 그 감자 블린은 다음 겨울에 와도 안 팔았다. 그리고 아직은 따뜻한 수제음료가 나오기 전이었다.







여기서도 오믈렛 시켜보았다. 여기서는 다른 건 이것저것 먹어봤지만 오믈렛은 안 먹어봤다. 치즈만 넣은 오믈렛에 작은 빵을 한개 추가하고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를 시켰다. 계란 프라이처럼 납작하게 등장한 오믈렛의 외양에 실망해서 별 기대 안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무척 맛있었다! 부드럽고 폭신하고 구름같은 식감에 치즈가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돌아가서도 생각날 것 같은 맛이었다.



비가 계속 내렸다. 오늘은 공연도 없고 나올 땐 비가 안 와서 징게르에서 조식 먹고 수도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블라지미르 대로의 랜드 수퍼마켓에 들렀다 와야지 하는 계획을 세웠었는데... 하여튼 트롤리버스를 타고 네프스키 수도원에 갔다. 역시나 네프스키 중심가이자 최고로 밀리는 곳인 쁠로샤지 바스따니야 역 앞에서 엄청나게 밀려서 한참 걸렸다. 지하철 타면 두세 정거장인데... 전에 사도바야에서 폭발 테러 난 후로 소심한 나는 지하철이 무섭다 ㅠㅠ



수도원으로 들어가는데 여전히 비가 왔다. 가랑비가 왔다가 주룩주룩 왔다가 잠깐 그쳤다가 다시 주룩주룩, 가랑비, 주룩주룩을 반복했다. 수도원 안의 교회에 들어가 가족과 나를 위해 초를 몇개 켰고 이콘에 손을 얹은 채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도를 했다.








나와서 비오는 수도원 경내를 좀 거닐었다. 햇빛 쨍한 날이 제일 좋긴 하지만 비오는 날의 수도원 산책도 나름대로 평온했다. 좀 걷다가 반지하의 찻집에 가서 수도원에서 구운 사과빵을 사서 그거랑 얼그레이로 몸을 데웠다. 사과빵은 언제나처럼 따뜻했고 달지 않고 맛있었다. 지난 겨울에 여기서 먹었던 양귀비씨빵이 무척 맛있었던 기억도 나서 그 빵을 두개 포장해 왔다.



나와서 입장권을 끊고 수도원 옆에 있는 묘지에 갔다. 지난 겨울에 왔으니 10개월 만이다. '나의 도씨'인 도스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에게 인사하러 갔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아무도 없었다. 땅은 진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비 때문에 꽃들의 색채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도씨 무덤 앞에도 꽃들이 놓여 있었고 손으로 쓴 쪽지도 놓여 있었다. 나도 작년에 손편지와 입술자국을 남기고 갔었지. 오늘은 그냥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도씨의 흉상을 바라보았고 아무도 없었기에 소리내어 그에게 이야기를 조금 해보았다. 인사를 했고 두어가지 소망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수도원의 초와 이콘에 대고 기도했을 때보다 더 부드럽고 간절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차이코프스키는 전과 다름없이 슬퍼 보였다. 비가 와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




길을 건너서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아주머니들이 어떤 청년에게 길을 가르쳐준다고 부산하게 친절을 베풀었다. 판탄카의 42번지인가 몇번지를 찾는데 몇번 버스로 갈아타야 하냐니까 '나 따라 내려' 라고 하는 분, '버스 갈아타는 거 아니야, 내려서 걸어가야 해!' 하는 분, '리쩨이느이에서 내려서 판탄카 운하 따라 걸어가다 왼쪽으로 꺾으면 돼' 라고 하는 분 등등... 그리고는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깔깔 웃으며 다 같이 '삐슈꼼!' 하고 외친다. '걸어서' 라는 뜻이다. 차 타고 갈 필요 없다는 얘기다. 여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지만 가끔 보면 의외로 친절하고 또 유머도 넘친다. (모스크바는 안 그렇다고 한다 - 페테르부르크 토박이 료샤의 주장인데 이 얘기는 웬만한 페테르부르크 토박이들이 쓴 여행책자에는 다 나와있음. 페테르부르크가 더 친절하고 예의바르다고 ㅋㅋ)



비가 오는데다 피곤해서 그냥 호텔까지 가버릴까 고민하다 그래도 내려서 블라지미르스카야 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랜드 수퍼마켓에 갔다. 올때마다 들르는 커다란 마트이다. 이것저것 살 것 같았는데 막상 산 건 별로 없었다. 쥬인 주려고 초콜릿 몇개를 사고, 내가 마실 타이가 잎차를 사고... 드이냐(중앙아시아 멜론)를 잘라서 컵에 파는 게 있어서 좀 비쌌지만 그거 샀다. 드이냐는 너무 커서 사먹을 엄두가 안나는데 잘라서 파니까....



생각보다 거의 물건을 안 샀기 때문에 '여기 오지 말걸' 하며 걸어오다가, 로모노소프 도자기 블라지미르스키 대로 지점에 들어갔다. 페테르부르크에는 로모노소프 샵이 여러개 있는데 이 지점은 내가 별로 안 좋아한다. 불친절한 편이라서. 그렇지만 며칠 전 갔던 발샤야 코뉴셴나야 지점에서 보지 못했던 게 있어서 찻잔을 결국 두개 샀다. 내가 그렇지 뭐... 근데 사실 제일 자주 가던 지점에 아직 안 갔다... 네프스키 한가운데 있는 곳... 거기 가서 또 다른걸 지를까봐 겁나는구나.



찻잔이랑 슈퍼에서 산 물건이 든 에코백, 카메라가 든 가방(비가 오니 dslr 가지고 다녀봤자 안 꺼내게 된다... 괜히 가지고 나왔어... 이번 여행 사진은 거의가 폰으로 찍음), 우산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호텔에 왔다.


..



방에 와서 물건들 내려놓고 좀 쉬다가 로비 카페로 내려갔다. 료샤가 저녁에 레냐를 데리고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있자니 레냐가 나타났다. 세상에나, 넉달 전보다 더 커 있음! 얘 조금만 있음 정말 나보다 커지겠어 엉엉...



레냐는 달음질쳐 와서 나를 와락 껴안고는 '쥬쥬!!!' 하며 좋아 어쩔줄 몰랐다. 나도 너무 반가웠다. 그때 프라하에서 봤을땐 살이 쪽 빠져 있었는데 그새 다시 볼살이 통통해졌다 >.< 날 보자마자 '쥬쥬, 그러니까 여름에 왔어야지! 지금 오니까 비오고 날씨 안 좋잖아' 라고 쿠사리를 준다. 이럴땐 지 아빠 료샤랑 닮았음 ㅋㅋ



로툰다 카페에서 셋이 저녁을 먹었다. 레냐는 내일도 학교 가야 하기 때문에 저녁 먹고 좀 놀다가 집에 가야 했다. 즉, 엄마인 이라가 있는 집이다. 료샤네 집에서 잘 수 있는 것은 주말 뿐인데 뭐 어쩔수 없다. 양육을 하는 것도 엄마인 이라이고, 또 레냐는 금요일까지 등교를 해야 하니까.



그래도 이라는 레냐를 위해 꼬박꼬박 주말마다 료샤에게 아이를 보내주고 있다. 이라는 재혼을 했으니까 레냐에겐 새아빠도 있지만 그래도 주말마다 아빠를 보러오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레냐는 여전히 료샤와 사이가 좋다. 그런 걸 보면 이라는 좋은 엄마 같다.



(그런데 전에 이런 말을 했더니 료샤가 '쳇, 내가 이라한테 위자료를 많이 주니까 그렇지!' 라고 투덜거렸다. 그는 아직도 전부인인 이라를 무서워해서 웬만하면 대화를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내가 이라였음 돈만 받고 레냐 너한테 꼬박꼬박 안 보냈을지도 모르는데! 이라가 착한 거야!' 라고 하자 료샤는 '이라가 얼마나 무서운지 네가 몰라서 그래!' 하고 한숨만 팍팍 쉬었다)


료샤는 뭔가 붉은 고기로 되어 있는 걸 먹었고(스테이크 비스무리한 거였는데 기억 안남), 레냐랑 나는 치킨버거랑 감자튀김이랑 시저샐러드 시켜서 나눠먹었다. 비싼 곳이라 치킨버거에 들어가는 닭고기가 튀기거나 다진 패티가 아니고 그릴에 구운 닭가슴살이었음! 나야 구운 닭가슴살을 좋아하니 맛있었지만 이런거 모르고 시키는 사람들은 낭패일 듯 ㅋㅋ 레냐도 역시 어린아이라 '잉, 나는 KFC가 더 맛있는 거 같아' 라고 한다 ㅋㅋㅋ 그러자 옆에서 꾸역꾸역 지 밥을 먹고 있던 료샤가 '닭보다 소가 더 맛있단 말이야! 특히 너! 너는 붉은 고기 좀 먹어야 돼! 넌 왜 맨날 닭 아니면 생선만 먹냐!' 하면서 갑자기 나를 공격했다 ㅠㅠ 웃기는 놈이야 정말 ㅠㅠ



저녁 먹은 후 레냐랑 료샤는 아이스크림을 시켜서 먹었는데 나는 김릿을 한잔 시켰다. 지난 겨울에 여기서 마셨던 김릿 생각이 나서. 료샤는 나를 노려보며 '너 그거 마시면 훅 간다!' 하고 경고했다. 오늘 내가 비오는 길을 많이 돌아다닌 것과 원체 술이 약한 걸 잘 알아서 그렇다. '김릿은 별로 안 독하잖아!' 하자 '저번에 벨리니 마시고도 맛 갔잖아!' 라고 받아치는 료샤. 그렇다, 예전에 유럽호텔 바에서 낮에 벨리니 마시고 갑자기 꿈나라로 가서 료샤가 방까지 업어다 준 적이 있다(ㅠㅠ 료샤는 그때 이후로 나에게 절대 밖에서 술 마시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경고경고... 특히 낮술 절대 안된다고 경고경고경고....) 변명하자면 그 바에서 만들어준 벨리니는 내가 베니스에서 마셨던 그 벨리니가 아니었다. 복숭아 벨리니 함량보다 독한 알콜 함량이 훨씬훨씬 많았었다!



나 : 너도 맨날 술 마시잖앗!


료샤 : 나는 오늘 안 마셔! 운전할 거니까!


나 : 더 잘됐다. 네가 안 마시니까 나는 너를 믿고 마실 수 있다. 계속 이거 마시고팠는데 혼자라서 안 마시고 있었단 말이야!


레냐 : 아빠, 쥬쥬가 먹고 싶은대로 하게 해줘.



하여튼 그래서 나는 김릿을 주문했다. 진과 라임주스.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립 말로, 테리 레녹스의 칵테일. 여기에선 진과 보드카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나는 물론 진을 택한다. 여기 칵테일에는 레몬주스가 추가로 들어간다. 입맛 때문인지, 아니면 버거를 먹고 난 후여서인지 모르겠으나 오늘 마신 김릿은 지난 겨울에 마셨을때보다 덜 시큼했다. 대신 좀더 독한 느낌이 들었다.



료샤 말이 맞았음. 김릿 마신 후 10여분 정도 띵해져서 소파에 기대어 졸았다 ㅠㅠ 료샤가 쿠사리 주고 있는데 레냐가 '아빠! 쥬쥬는 힘들게 일했으니까 그냥 놔둬!' 하고 내 편을 든다. 그러자 도리어 내가 미안해졌음... 어린애 앞에서 김릿을 마시고 취해버린 나 ㅠㅠ 엉엉... 약혼녀의 약한 모습을 감싸주는 나의 의젓한 약혼자(9세) 레냐.



술기운은 곧 가셨다. 아마 피곤했었던 모양이다. 레냐는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레냐는 항상 따뜻하고 통통하고 보들보들하다 :) 그런데 레냐는 반대로 나에게 '쥬쥬는 보들보들하고 좋은 냄새가 나~' 라고 한다 ㅋㅋ 우리가 그러고 있으면 료샤가 '야! 쟤는 향수 쓰니까 좋은 냄새 나는 거야' 라고 툴툴거린다. 그러면 레냐는 나에게 '쥬쥬 향수는 울엄마 향수보다 좋아~ 오늘 냄새도 좋아!' 그런다. 앗싸, 이번에 면세점에서 질렀던 향수 성공했나보다 ㅋㅋㅋ 비오고 추운 날 어울리는 향이긴 하지... 그런데 좀 어른스러운 향이라서 레냐가 좋다고 하는 것에 살짝 놀랐다. 얘 전에는 장미향이나 꿀향 뿌렸을 때 좋아했었는데 ㅋㅋㅋ



술기운이 가신 후 료샤랑 레냐 데리고 방에 올라왔다. 레냐에게 붕어빵 과자와 양갱, 러버덕 젤리, 리락쿠마 빼빼로, 밀크 캬라멜과 그외 마트에서 긁어모은 각종 과자들을 안겨주었다. 료샤는 '야! 왜 나한테는 맥심이랑 볶음너구리 몇개밖에 안 주더니 레냐한테는 이렇게 많이 주냐!' 하고 투덜거린다. 아빠 맞아?



레냐는 과자들 때문에 완전 행복해져서 해해 웃고 ㅋㅋ 그러다가 집에 가기 싫다고 징징대기 시작... '이거봐아, 오늘은 쥬쥬 방도 넓잖아... 나 여기서 자고 갈래 앙앙' 하고 떼쓰기 시작. 료샤가 엄하게 '안돼! 엄마가 집에서 기다리잖아!' 라고 하자 레냐는 아빠를 조금 원망하다가... '그러면 내일은 아빠 집 가니까 쥬쥬랑 오래 놀 수 있지?' 라고 금방 누그러졌다 ㅠㅠ 이럴때 보면 측은하다... 물론 레냐는 다른 이혼가정에 비해서는 유복하게 살고 또 아빠랑도 꼬박꼬박 보고 있으니 상당히 좋은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매주 엄마랑 아빠 집을 오가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레냐를 데려다줘야 했기 때문에 9시 좀 안돼서 료샤가 일어섰다. 내일 보기로 했다.



그래서 료샤랑 레냐는 돌아갔고 나는 어제 러쉬에서 추가로 샀던 배스 밤을 욕조에 던져넣고 15분 정도 몸을 담그고 있었다. 이번 것은 '펌프킨'이었는데 꿀냄새 나는 거 있냐고 했더니 딱 맞는 건 없지만 달콤하고 따뜻한 향이라고 준 거였다. 근데 별로 그런 냄새 아니고 오히려 시트러스 냄새가 남 -_- 하여튼 욕조에 몸 담그고 있었더니 피로가 좀 풀렸다. 술기운이 다시 좀 올라오다 말았다. 술 마시고 목욕하면 안되는데 ㅠㅠ 오늘은 약 안 먹고 자야지.



목욕하고 나와서 버거랑 김릿 때문에 갈증 나서 드이냐를 먹었다. 참외나 멜론류 별로 안 좋아하지만 드이냐는 맛있다. 이거 먹으면 쥬인 생각난다. 쥬인이 이거 좋아하는데 ㅠㅠ 쥬인아, 쥬인 생각하면서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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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이곳에 도착한 후 가장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날씨가 맑았고 하늘이 파랬다. 호텔 조식 먹으러 내려가기가 싫어서 한참 누워 있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날씨가 좋으니 네프스키 수도원에 가기로 했는데 일단 배가 고프니 아점으로 근처 식당에서 잘 먹고 가기로 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자고로드느이 대로가 나오는데 그 대로와 루빈슈테인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우크라이나 식당 '쉬녹'이 있다. 여기는 작년에 bravebird님이 가셨다가 맛있다고 추천해주셔서 나도 가봤는데 그때 무척 맛있게 먹었던 곳이다. 런치로 먹으면 가격도 저렴하다.

 

이번엔 런치에 내가 먹고 싶은 게 없어서 그냥 제값 주고 보르쉬와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을 주문했다. 우크라이나 식당이니까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음식을 먹는다. 보르쉬도 여러 버전이라 돼지고기 없는 것으로 추천을 받아 오데사 스타일의 보르쉬를 주문. 쇠고기와 토마토, 감자, 비트, 파프리카 등이 들어 있었는데 무척 맛있었다. 빵껍질이 덮여 나오고 그 빵을 먹을 수 있다. 고골의 보르쉬가 좀더 진하고 크리미한 맛이라면 여기 보르쉬는 딱! 그 보르쉬 맛이었다.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 역시 자르는 순간 기름이 주루룩 흘러나오는 것이 진짜(ㅋㅋ) 키예프 커틀릿이었다. 그러나 별로 느끼하진 않았다. (기름진 거 못먹는 내 입에도 나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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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보르쉬를 먹으니 땀이 좀 났다. 몸이 많이 힘든 상태인가보다. 그래선지 어제 수프 비노의 치킨 수프와 오늘 쉬녹의 보르쉬가 둘다 몸에 필요했던 것 같다.

 

먹은 후 생각보다 날이 더워서 다시 숙소로 갔다. 트렌치코트와 카디건을 벗고 후드재킷으로 바꿔입은 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수도원에 갔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은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난 언제나 날씨가 좋은 날, 햇볕이 따스한 날 이곳에 온다.

 

먼저 수도원 카페에 가서 얼그레이 티와 사과빵을 먹었다. 보통 여기 오면 수도원 모르스를 마시는데 오늘은 차를 안 마셔서... 사과빵은 여전히 담백하고 맛있었다. 전혀 달지 않았다. 지하 카페는 텅 비어 있었지만 잠시 후 러시아인들이 한둘씩 들어와 차와 빵을 먹고 나가곤 했다. 이 카페를 찾는 것은 거의 러시아인들이다. 그도 그럴것이 정교 수도원에 있는 카페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곳에 올땐 정교 신자는 아니지만 잠시 기도를 한다.

 

 

소박한 카페이다. 내가 사랑하는 곳이다. 사진 찍으면 안되는데 마음 속에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살짝 찍었다 ㅠㅠ

 

..

 

 

빵과 차로 몸을 데운 후 햇살 아래로 나왔다. 찬란한 오후였다. 하늘은 파랬고 햇살이 눈부셨다. 나는 스카프로 머리를 싸맸고 초를 네개 사서 수도원 내의 교회로 들어갔다. 러시아 정교 사원은 카톨릭이나 개신교 교회와는 많이 다르다. 벽에는 이콘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이콘 앞에는 초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머리를 스카프로 가린 여자들과 허리를 굽힌 남자들이 이콘과 이콘 사이를 오가며 절을 하고 성호를 긋고(카톨릭과는 순서가 다르다) 한쪽에서는 정교 신부가 예배를 보기도 한다. 신도들은 이콘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성호를 긋고 기도하고 이콘을 손으로 만지고 입을 맞추고 다시 성호를 긋고 인사를 한다. 초를 켠다.

 

나도 초를 켰다. 가족과 나를 위해. 우리 집은 개신교니까 엄밀히 말해서 정교 신자는 아니지만 성호도 그었다. 사실 진정한 신앙이 존재한다면 거기 차이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언제나 회의주의자인 내게 그런 믿음이 생기기를 바랬던 것 같다.

 

어두컴컴하고 화려하고 조용하고 촛불이 여기저기 총총 빛나고 있는 사원 안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햇빛 아래로 나왔다. 하늘색과 흰색, 금색으로 칠해진 조그만 천사 이콘을 샀다. 수호천사 이콘이라고 되어 있는데 금발인 것을 보니 가브리엘 같다. 자세히 뜯어보면 좀 조잡한데 그래도 첫눈에 띄었기 때문에 샀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그리고 쓰는 글을 위해. 천사가 중요한 상징 중 하나인 글이니까.

 

 

..

 

수도원 경내를 오랫동안 거닐었다. 햇볕을 받으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걷고 꽃들을 보고 향기를 맡았다. 묘지 사이를 걸었다. 검고 축축한 흙을 밟았다. 묘지의 십자가들과 이름들을 보았고 바람을 맞았고 심호흡을 했다. 햇살이 따스했고 눈부셨다. 하늘이 너무나 파래서 온몸을 깨끗하게 통과해 지나가는 것 같았다. 평온이 찾아왔다.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이곳에 와야 했다. 내가 이곳으로 날아온 가장 큰 이유가 어쩌면 여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진까지는 카메라로 찍은 것.

그리고 수도원 경내로 들어가서는 큰 카메라로 촬영하면 안되니(원래는 촬영 자체가 좀 그렇다) 소리 안나는 앱을 사용해 폰으로만 찍었다. 물론 교회 안은 찍지 않았다.

폰으로 찍은 수도원 사진들은 나중에 따로 올려보겠다. 아래 몇 장만.

 

(러시아 와서 올리고 있는 사진들 중 화질과 심도가 좋은 건 카메라로 찍은 거고 얕고 평면적인 건 폰으로 찍은 것들이다. 후자가 더 많다. 아무래도 휴대하기가 편하고 용량이 작아서 업로드도 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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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산책을 하고 햇볕을 쬐다가 화단 안쪽에서 한가롭게 조는 고양이를 한 마리 발견했다. 토실토실하고 예쁜 고양이인데다 원체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는 곳이라 웬만한 소음이나 기척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햇살 받고 조는 고양이를 보니 나도 노곤해졌고 고양이를 바라보며 따뜻한 돌바닥에 한참 주저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나를 보았고 귀찮아하며 도로 졸았다.

 

 

 

고양이를 바라보며 햇살 쬐며 노곤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앙증맞고 따뜻한 어린아이 손이 날 확 껴안았다. 그리고는 '쥬쥬~' 하는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레냐와 료샤가 뒤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는데 레냐가 '쉿! 고양이 깨!' 하길래 나도 꾹 참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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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원래 내가 산책을 마친 후 수도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근데 둘이 생각보다 좀 일찍 도착해서 수도원에 들어왔다고 한다. 좀 걷다가 보자마자 나인 줄 알았다고 하길래 나는 의아했다.

 

나 : 어떻게 난줄 알았어? 나 머리에 스카프 두르고 있었는데!! 뒷모습만 보고!

 

료샤 : 그걸 모르냐~

 

나 : 또 호빗이라 할라고!

 

료샤 : 아니야! 수건 두르면 뭐해! 땅바닥에 요가 자세로 앉아 있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놀라운 동양의 신비!!

 

나 : (아, 맞다. 나 양반다리 하고 앉아 있었지 ㅋㅋ) 그거 동양의 신비 아니야 이 바보야 ㅠㅠ 나처럼 둔한 사람도 다 하는 거야..

 

레냐 : 아니야! 나는 알아! 뒷모습만 봐도 알아~ 쥬쥬우우우~~

 

..

 

우리는 함께 수도원을 조금 거닌 후 한쪽에서 수도원 시장이 열린다고 해서 거기도 가보았다. 수도원에서 만들었다는 꿀을 먹어보고 배아플 때 좋다는 꿀을 사고 또 각종 향초가 배합된 차를 이것저것 시향한 후 차를 사고 있자니 료샤가 혀를 찼다. 척 봐도 '상술에 넘어가는 바보 토끼!'라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수도원에서 만든 거니까 살 거야!'라는 시선을 마구 쏘아주었다 ㅋㅋ

 

료샤의 차를 타고 걔네 집으로 갔다. 레냐가 피자를 먹고 싶어해서 근처 이탈리안 식당에 갔다. 나는 해산물 리조또를 시켜서 막 먹었다. 료샤가 혀를 찼다.

 

료샤 : 왜 그렇게 정신없이 먹니.. 굶었냐?

 

나 : 쌀밥이라서... 밥 먹고 싶었어... 밥이다 밥...

 

료샤 : 너 왜 이렇게 오늘 불쌍하게 굴어 ㅠㅠ 수건 쓰고 요가자세로 앉아 고양이 보고 있지를 않나, 꿀 찍어먹고 찻잎 냄새 맡고 비닐봉다리에 꿀이랑 차 사지 않나... 쌀이라고 리조또를 막 욱여넣질 않나...

 

나 : 안 불쌍해! 수도원 오면 원래 그런 거야! 그리고 집 떠나오면 원래 쌀밥 먹고픈 거야!

 

료샤 : 불쌍해. 많이 먹어. 한 접시 더 시켜줄까?

 

나 : 내가 돼지냐!

 

레냐 : 아니야! 쥬쥬는 돼지 아니야, 쥬쥬는 토끼야~ 토끼여왕이야~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고 료샤네 집에 가서 허브차를 마셨다. 레냐는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데다 엄격한 엄마 탓에 귀가 시간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료샤는 레냐를 먼저 집에 데려다 주었고 그다음에 나도 숙소로 데려다 주었다. 료샤는 숙소가 맘에 안 든다며 나에게 도로 자기 집으로 가서 자고 가라고 했지만 그냥 내일 보기로 했다. 얘도 어제 출장에서 돌아와 많이 피곤한 거 안다.

 

내일 우리는 같이 공연을 보러 갈 것이다. 아마 저녁도 먹을 것이다. 레냐랑은 모레부터 만나 다시 놀 것이다.

 

여기 수도원이 있고 햇살이 있고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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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마음의 위안을 위해.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는 소박한 카페가 하나 있다. 반지하로 내려가면 그냥 구내식당처럼 생긴 엄청 조그맣고 소박한 카페가 나온다.

 

빵을 시키면 이렇게 종이접시에 준다. 여기 사과빵과 버섯빵 등 속을 채운 빵들은 정말 맛있다. 아무런 기교가 없는 음식이다. 사과빵은 전혀 달지 않다. 속이 가득 들어 있고 먹어도 속이 편하다. 갓 나온 따끈따끈한 수도원 사과빵은 먹어본 사람만 그 맛을 안다.

 

아무래도 수도원 내 카페이다 보니 사진 찍는 게 너무 찔려서... 폰으로 슬그머니 몇 장만 찍어서 근사한 사진은 없다만...

 

이곳의 또다른 자랑은 바로 저 나무열매로 만든 주스. 러시아어로는 모르스라고 한다. 크랜베리 주스와 비슷한 맛인데 수도원에서 직접 만든다. 정말 맛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내에는 교회도 있고 유명인들의 묘지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여기 묻혀 있다(그런데 나는 이 묘지에 되게 여러번 왔지만 아직도 도씨의 묘를 못 찾았다 ㅠㅠ 무덤들 사이로 샅샅이 뒤지고 다녔는데 흐흑...) 이 수도원에는 정교 신자들이 많이 온다. 그리고 이 카페에도 많이 온다. 오면 저 빵을 종류별로 엄청나게 많이 사간다!!! 가격도 매우 저렴하고 게다가 맛있으니 나라도 가족이 있으면 바리바리 싸가겠다.

 

빵을 사면 아주 얇은 비닐봉지에 넣어준다. 너무 얇고 부드러워서 손가락을 잘못 넣으면 쭉 찢어질만큼 약한 봉지이다. 여태 나는 러시아에서만 그런 비닐봉지를 봤다.

 

심신이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그런지 저 수도원이 그립다. 마음을 비운 채 경내를 거닐고 종소리를 듣고 이콘 앞에서 초를 켜고, 그리고 돌아나오면서 저 카페에 들러 따끈한 사과빵과 시원하고 달콤한 모르스를 먹고 싶다.

 

 

 

내부는 이렇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한 장.

태그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을 클릭하면 전에 올린 이 수도원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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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