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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크'에 해당되는 글 937

  1. 2017.09.06 겨울날 늦은 오후의 페테르부르크 산책 6
  2. 2017.09.02 5년 후의 라라, 프랑스 단파 라디오, 나무 십자가 22
  3. 2017.09.01 얼음과 빛과 돌로 빚어진 도시, 겨울 페테르부르크 8
  4. 2017.08.29 수프 비노, 작년 6월 2
  5. 2017.08.12 유배된 미샤와 감시요원 베르닌의 첫 대면 16
  6. 2017.08.02 추운 날 사진으로 더위 쫓는 중 6
  7. 2017.07.13 한겨울, 페테르부르크 외곽 동네를 걷는다 8
  8. 2017.07.08 근 1년 전, bravebird님과 백야의 페테르부르크에서 4
  9. 2017.07.08 옥사나 본다레바의 근사한 화보들 + 슈클랴로프, 비슈뇨바 2
  10. 2017.07.05 마린스키 극장 2층 홀과 샹들리에 + 카페 6
  11. 2017.06.29 한겨울 오후 네 시, 눈오는 페테르부르크 거리 4
  12. 2017.06.28 더위 퇴치를 위한 페테르부르크 12월 사진 두 장 더 8
  13. 2017.06.27 겨울의 페테르부르크 그리워하며 8
  14. 2017.05.15 겨울의 페테르부르크 10
  15. 2017.05.07 한겨울 오후의 페테르부르크 2
  16. 2017.04.11 레냐가 강변의 커플을 따라한 후 했던 말 2
  17. 2017.04.05 나의 페테르부르크 2
  18. 2017.04.02 북방 도시의 빛은 창백하다
  19. 2017.04.01 이해할 수 없지만 확신이.. 4
  20. 2017.03.28 외곽은 아직도 레닌그라드 같지... 2
  21. 2017.03.27 항상 떠나고 싶으니.. 6
  22. 2017.03.26 파이프. 운하의 검은 물. 레닌그라드. 몇년 전의 메모 25
  23. 2017.03.17 겨울,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24. 2017.03.13 12월, 얼어붙은 모이카 운하 10
  25. 2017.03.08 밤중에 호텔 복도를 지나다 4





작년 12월. 페테르부르크.



오후 4시에서 5시 즈음.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 몇 장. 바로 아래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사진 빼고는 모두 네프스키 대로 따라 산책하며 찍음.



























:
Posted by liontamer

 

 

 

 

간만에 전에 쓴 본편 중 일부를 발췌해 본다. 전에 종종 올렸던 수용소 중편 중 제3부, 미샤의 절친한 벗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그를 면회하는 장면 중 일부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그 부분을 먼저 읽고 여기로 넘어오면 된다.

 

앞부분 : http://tveye.tistory.com/5551 (수용소 면회실에서, 얼룩들)

 

 

 

이 이야기는 바로 앞부분을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사실 그 부분의 후반부 문단 몇개와 대화 몇개는 지금 올리는 이야기 맨 앞과 겹친다. 잘라내자니 앞이 너무 휑해져서.

 

 

고문을 당해 피폐해진 미샤 때문에 일린은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

 

 

여기 발췌한 이야기 후반부에는 일린의 딸인 라라가 등장한다. 라라는 예전에 올렸던 부활절 단편 Jewels의 1인칭 화자로 나왔던 인물이다. 일린의 큰딸로 그 이야기에서는 열살짜리 소녀로 등장했었다. 이 수용소 이야기는 jewels에서 5년 후를 다루고 있으므로 라라는 이제 15세의 사춘기 소녀이다.

 

 

사실은 jewels보다 이 소설을 먼저 썼고 라라도 여기서 제일 먼저 등장했다. 그 후 어린 라라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면서 라라를 일인칭 화자로 만들어 jewels를 쓰게 된 것이었다.

 

 

'나스챠'는 일린의 전 부인이자 라라의 엄마이다. 라라는 엄마 나스챠와 새아버지, 그리고 여동생 아냐와 함께 살고 있다. 지나이다는 본편에 등장하는 미샤의 파트너인 '그' 지나이다('지나와 말썽쟁이'의 그 지나이기도 합니다), 마르가리타와 이그나트는 일린의 볼쇼이 동료이다. 후자 두명은 jewels에서 일린네 집에 모여 같이 부활절 달걀 색칠하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세자르 모렐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안무가로 미샤의 춤에 매료되어 그를 위해 여러개의 작품을 안무해주었던 인물이다. 물론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jewels와 거기서 파생된 밑자료 half 소설인 dolls의 링크는 포스팅 맨 아래에 붙여 두었다.

 

 

맨 위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궁전광장의 알렉산드르 기념원주 천사 조각상. 예전에 올린 단편 illuminated wall에서 미샤가 저 천사 원주 아래에서 춤을 췄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나는 그 애의 손을 떼어내는 대신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정수리까지 치솟았던 열기와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폭발할 듯한 감정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심장 한가운데 그대로 고여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그런 분노와 증오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샤는 내가 잠잠해지자 한숨을 내쉬었고 손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여름이 아니었다면 벗어줄 재킷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꼴도 보기 싫은 스카프를 다시 주워 그 애의 목과 어깨에 둘러 줘야 했다. 마치 자주색의 죽은 뱀을 둘러주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미샤는 추워서 그런지 스카프를 감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초점이 흐릿한 검은 눈만이 불안하게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감시자들이 들어와 나를 끌어내 체포할까봐 두려운 것 같았다. 그 애가, 나의 미셴카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 어떤 권위와 위협 앞에서도 굴복할 줄 모르던 미샤 야스민이 그런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다니, 두려움으로 내 입을 막고 몸을 떨다니. 문득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난 거의 넘어갈 뻔 했다. 그 애의 몸에서 발산되는 불처럼 뜨거운 열기와 죽어 넘어진 페트루슈카를 연상시킬 정도로 심한 경련이 아니었다면 분명 난 꿈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나는 한 팔을 미샤의 팔 아래로 넣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아 안았다. 다른 팔을 뻗어 허리에 둘렀다. 그러자 경련이 조금 잦아들었다.

 

 

 “ 어깨에 기대. 그럼 좀 편해질 거야. ”

 

 

 “ 네 어깨는 작은데. ”

 

 

 “ 그래도 너 하나쯤은 기대게 해 줄 수 있어. 전에도 그랬잖아. ”

 

 

 “ 그랬지. ”

 

 

 미샤가 순순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짧은 머리칼이 얇은 셔츠를 파고들며 살갗을 찔렀다. 그 애의 이마와 뺨이 닿은 자리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 걱정하지 마. 날 체포하지는 않을 테니까. 벨스키가 보냈다고 했잖아. ”

 

 

 “ 왜 흥분하는 거야? 제일 안전할 줄 알고 네 이름 댔는데. 좀 무서운걸. ”

 

 

 “ 난 약과야. 지나가 왔으면 더 소리 지르고 화냈을 걸. ”

 

 

 “ 지나가 그러는 건 무섭지 않아. 걘 조용한 게 무섭지. 넌 반대잖아. 내 앞에서 화낸 적 없었는데. ”

 

 

 “ 너한테 화내는 게 아냐. ”

 

 

 “ 음, 나한테 화를 내면 안되지. 그럼 라라에게 이를 거야. ”

 

 

 “ 지금 농담한 거야? ”

 

 

 “ 미안, 여전히 재미없어서. ”

 

 

 나는 그의 허리에 두른 팔을 좀 더 바짝 끌어당겼다. 발레리나의 조그맣고 야윈 몸을 품에 안은 것 같았다. 이제 그 애의 열기가 퍼져 와서 내 온몸도 불을 놓은 것처럼 뜨거웠다. 주사를 놓든 약을 먹이든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지만 저 문을 열면 그 혐오스러운 알렉산드르 크냐제프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뱀처럼 웃으며 ‘역시 30분을 다 채우기란 무리였겠죠. 이 친구 상태가 아주 안 좋아서’ 라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떠들어댈 것이 분명했다. 그놈들의 손에 미샤를 돌려보내느니 아프더라도 단 5분, 10분이라도 더 내 어깨에 기대 있게 하는 것이 백배 천배 나았다. 미샤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자기 몸을 완전히 내 팔에 맡기고 있었다. 등을 두어 번 쓸자 스웨터 아래로 뼈마디가 그대로 만져졌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그러나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 얘기해봐, 미셴카. 그자들이 어떻게 했는지. ”

 

 

 “ 왜? 네겐 그런 게 중요해? ”

 

 

 “ 응. ”

 

 

 “ 왜 중요하지? 어차피 해결되는 일도 없는데. ”

 

 

 “ 그냥 얘기해봐. ”

 

 

 “ 기억이 잘 안나. ”

 

 

 “ 넌 대답하기 싫으면 항상 그렇게 얘기하잖아. ”

 

 

 “ 그럼 양치기 소년인가. ”

 

 

 

 미샤는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그 애가 어떻게 아직도 웃을 수 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 근데 정말이야, 스탄카. 기억이 나지 않아. 그자들 이름도 생각이 안나. 주사는 좀 맞았던 것 같아. 아팠던 것 같기도 해. 잘 모르겠어. ”

 

 

 “ 피 흘리고 있었어. ”

 

 

 “ 누가? ”

 

 

 “ 너. 사진에서 봤어. ”

 

 

 “ 무슨 사진? ”

 

 

 

 그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레닌그라드로 소환된 후 파리가 얼마나 시끌시끌했는지. 해외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지식인들, 사상가들, 인권단체들이 그의 구명을 위해 어떤 시위를 벌였는지. 오히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있던 우리들보다도 그쪽 사람들이 재판에 대한 정보를 더 먼저 알아냈다.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던 라라는 단파 라디오로 프랑스 방송을 잡아냈지만 그 아이의 프랑스어 실력은 뉴스를 이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라는 수차례 반복되는 미샤의 이름과 몇몇 단어밖에 알아듣지 못했고 새벽에 엉엉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 아빠, 프랑스 라디오에서 미셴카 얘길 하고 있어. 심각한 얘기 같은데 못 알아들었어. 방금 엄마가 라디오 뺏아갔어. 그런 거 들으면 잡혀간대. 어떻게 해, 못 알아들었어... 그 주파수 기억도 안나. 다시 못 찾을 거야... 무서운 얘기였으면 어떻게 하지? 뉴스였어. 자꾸 이름이 나왔어. 나쁜 일인 거야? 미셴카에게 나쁜 일 생긴 거야? 아빠, 구해줘. 그 사람 구해줘. 제발 어떻게 좀 해봐, 아빠 아는 의원님들에게 부탁 좀 해봐... ”

 

 

 

 라라를 달래고 안심시킨 후 나는 볼쇼이 발레교사인 마르가리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으로 와 달라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극장에서 프랑스통으로 불렸고 원어민처럼 불어를 구사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마르가리타는 동료인 이그나트를 데리고 왔다. 둘 다 미샤가 볼쇼이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들어오자마자 마르가리타는 문을 잠그고 창문마다 커튼을 친 후 싱크대와 욕실의 물을 틀어놓았다. 그녀는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그 뉴스 듣고 있었어. 안 그래도 여기 오려던 중이었어. ”

 

 

 “ 난 라라가 전화해서 알았어. 내용이 뭐였어? 안 좋은 얘기였어?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

 

 

 “ 재판 얘기였어. 파리에서 정보를 입수했대. ”

 

 

 

 그때까지 우리는 미샤가 비공개 재판을 받아 어딘가에 수감되었다는 사실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 프랑스 방송은 훨씬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허술하고 형식적인 재판 절차에 대해 지적했고, 재판정에 소환된 증인들의 이름까지 몇 명 폭로했다. 모두 당 강경파의 측근들과 미샤의 격렬한 반대파들이었다. 그런데 그자들이 증언대에 올라가 온갖 밀고와 음해를 쏟아 붓는 동안 그 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들, 제대로 된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은 단 한 명도 소환되지 않았다. 우리는 재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았다.

 

 

 그 라디오 방송은 미샤의 자기 변론이 겨우 2분도 안되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30분도 걸리지 않아 판결이 내려졌다는 얘기와 더불어 당 내 강경파 일부는 훨씬 가혹한 처벌을 주장했기 때문에 재판 결과에 실망했다는 정보를 흘리기까지 했다. 순진한 이그나트는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파리에서 이 모든 끔찍한 사실들을 알아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벨벳 덮개를 뒤집어씌운 어항 안에 갇혀 있는 물고기들이었으니까.

 

 

 그 방송을 듣고서야 우리는 그 애가 7년형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반체제 선동과 당에 대한 불복종, 체제 전복 위협 등 그 애에게 씌워진 죄목은 끝이 없었다. 이후 파리에서 조직된 구명위원회의 팸플릿에 따르면 그 더러운 놈들은 스파이 죄목까지 씌우려고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마지막에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 그건 르 피가로와 뉴욕 타임즈 등 유명 일간지에 컬러로 실렸다. 마르가리타가 이즈베스티야 뭉치 안에 르 피가로를 숨긴 채 사색이 되어 달려왔을 때 우리 집에는 이미 여러 가지 경로로 그 사진을 입수한 지인들이 다섯 명이나 와 있었다. 극장 직원들과 예술가들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까봐 걱정에 빠진 노비코프가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르니 한동안 모여 다니지 말라고 전화로 경고하지 않았다면 아마 미샤의 지인이나 팬들 여럿이 더 몰려왔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미샤와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모스크바에서는.

 

 

 

 누구도 그 사진의 출처를 알지 못했다. 신문사들은 익명으로 사진을 제공받았다고 입을 모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은 총 세 장이었는데 두 장은 측면이었고 한 장은 정면이었다.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그 애를 들어 옮기고 있었다. 측면 사진 한 장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팔목에 튜브를 꽂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정면 사진을 보았을 때 내 머리 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자들이 결국 저 애를 죽였구나...

 

 

 

 사진 속에서 그는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진 채 머리를 젖히고 있었다. 들쭉날쭉하게 잘린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에 유화 페인트처럼 불규칙하게 엉겨 있었고 피부는 시체처럼 푸른빛이 도는 흰색이었다. 감긴 눈 아래로 속눈썹이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검은 페인트를 칠한 듯 무겁게 처진 채 마구 뒤엉켜 있었다. 코와 입에서 시작되어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는 너무 붉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그 애의 팔과 다리가 나무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의료 요원들은 그 애를 죽은 짐승처럼 들어 옮기고 있었다. 
 

 

 

 


 그날 지나이다가 모스크바로 왔다. 키로프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딤카 아르부조프와 함께였다. 그녀는 이제 울지도 않았고 흥분하거나 공포에 질리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분노해 있었던 것이다.

 

 

 “ 세자르 모렐이 내일 모스크바에 올 거예요. 파리 공산당원 자격으로. 로쉬도 함께 입국하려고 했지만 물론 거절당했어요. ”

 

 

 “ 그자들은 세자르가 와도 만나주지 않을 거야. ”

 

 

 

 실제로 그랬다. 당에서는 형식적인 예의와 절차를 갖춰 모렐을 맞이했지만 그의 면담 요청은 거부했고 그가 직접 가져온 파리 공산당 지부와 프랑스 문화예술계의 탄원서도 무시했다. 그 유명한 인물이, 전후 30여년 이상 유럽 무용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 거장, 한결같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열렬한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세자르 모렐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왔는데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모스크바에서는 모렐을 초청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모렐이 미샤의 춤을 보고 반해서 그를 위한 작품을 안무해 볼쇼이로 날아왔을 때 당에서는 대대적인 선전을 펼쳤고 모렐을 서방의 공산 영웅이자 진정한 예술가로 숭배하고 떠받들었던 것이다.

 

 

 지나이다는 키로프를 비롯한 레닌그라드 극장들에서 미샤를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해외에서 그렇게 구명 운동을 하고 있는데 동료들이 모른 척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치를 떨었다. 나도 볼쇼이와 므하트를 포함한 몇몇 극장에서 서명을 받았다. 그건 꽤 위험한 일이었고 후환이 생길 가능성도 많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날 우리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같은 시각에 성명을 발표하고 당에 탄원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성명서를 낭독하는 중에 보안위원회에서 들이닥쳤다. 나는 다섯 시간 동안 구금되어 있었지만 별다른 심문 없이 풀려났다. 탄원서는 압수당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연행되었던 지나는 한 시간도 안 되어 풀려났고 아무 것도 압수당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벨스키가 나를 풀어주도록 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 쪽은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힘을 쓴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는 미샤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진이 공개되고 이곳에서 자행되는 끔찍하고 더러운 일들이 서방 제국주의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좋은 먹잇감이 된 상황에서 그자들이 미샤를 살려놓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외 언론들에서는 미샤가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해 중태에 빠져 있다고 떠들었고 모스크바 측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했다. 미하일 야스민은 반체제 선동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며 소비에트 법률에 따라 정상적으로 수감되어 있으니 남의 나라 일에 쓸데없는 참견 따위는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라라는 나스챠에게 한동안 아빠와 지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나스챠는 그 애를 보내주지 않았다. 내가 그 애를 위험에 빠뜨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라디오를 숨겼고 딸아이의 스크랩북들도 몽땅 태워버렸다. 한 번만 더 집에서 미샤의 이름을 거론하거나 외국 신문 따위가 발견되면 일 년 동안 외출을 금지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딸아이가 울면서 전화했을 때 내가 나스챠와 이혼했던 이유를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

 

 

 

 라라는 학교를 빼먹고 극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열다섯 살도 채 안된 아이가 어디서 정보를 입수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라라는 이미 사진과 기사를 보았고 내가 잠깐 연행되었던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잠을 못 자고 너무 울어서 얼굴이 퀭했다. 라라는 내가 무용수들을 데리고 월말에 올릴 작품 리허설을 하는 동안 얌전하게 복도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내가 나왔을 때 딸아이는 바람처럼 달려와 두 팔로 날 끌어안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애였다.

 

 

 “ 아빠, 아빠! 너무 무서웠어! 아빠가 미셴카처럼 끌려갈까봐, 못 돌아올까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 ”

 

 

 

 내 품 안에 파고든 라라의 심장이 너무 팔딱거려서 조그만 새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라라는 흐느껴 울면서 나를 더 꼭 껴안았다.

 

 

 

 “ 그래도 그 사람 살아 있는 거지? 죽는 거 아니지? 그냥 조금 아프기만 한 거지? 아빠, 기도해. 아침에, 자기 전에. 미샤 구해달라고 기도해, 그럼 괜찮을지도 몰라. 나 계속 하고 있어, 엄마 몰래. 내 친구들도 같이 하고 있어. 아냐한테는 얘기 못 했어, 사진 보면 충격 받을까봐. 근데 아냐가 어제는 갑자기 우리 같이 별장에 갔던 얘길 하면서 다시 가고 싶다고, 미셴카 보고 싶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으면서 라라가 주머니에서 나무로 깎은 십자가를 꺼내 내 팔목에 걸어주었다.

 

 

 “ 이거 내가 만들었어, 아빠도 하나 가지고 있어. 여기 입 맞추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 주실지도 몰라. 꼭 해야 해, 최소한 하루에 두 번. 바빠도 두 번은 꼭 기도해야 돼, 아빠. 약속해. ”

 

 

 

 그래서 나는 약속했다. 하루에 두 번, 아니, 사실은 틈나는 대로 기도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독실한 신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건 라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살짝 비스듬하게 깎인 나무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되풀이하는 순간이면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변했다. 어쩌면 우리의 별 것 아닌 신앙, 이성과 과학과 당의 탄압 속에서 옛 시대의 그림자처럼 변해버린 낡은 정교가 결국 옳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벨스키가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미샤, 만신창이가 되어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그래도 내 어깨에 기댄 채 여전히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있는 내 친구의 옆에 앉아 있으니까.

 

 

 


 미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 스탄카, 무슨 사진? ”

 

 

 나는 소파와 벽과 책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청 장치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나 같은 일반인에게 그런 대단한 장치가 보일 리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다 아는 얘기였다.

 

 

 

 “ 의료진이 너 옮기는 사진. 누가 몰래 찍어서 파리와 뉴욕에 보냈어. 그것 때문에 해외에서 난리였어. ”

 

 

 “ 아, 그랬군. ”

 

 

 “ 벨스키가 말 안 해줬어? ”

 

 

 “ 사진 얘긴 안 해줬어. 내 허락도 없이 그런 걸 찍다니. ”

 

 

 “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는 걸.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쨌든, 그 사진에서 너 피 흘리고 있었어. 그래서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

 

 

 “ 엄청 보기 싫게 나왔겠네. 태워버려. ”

 

 

 “ 외신에 다 났는데 어떻게 태워. 뉴욕에서 그걸로 전시도 했어. ”

 

 

 “ 라라한테 절대 보여주지 마. ”

 

 

 “ 아, 그래. ”

 

 

 

 미샤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내게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에어컨을 꺼줘야 할 것 같았지만 단 일 초도 그 애를 소파에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이마에 손을 얹자 금방이라도 물집이 잡힐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

 

 

 

 

맨 위 메모에서 언급했던 jewels와 dolls 링크는 여기.

 

 

부활절 단편 Jewels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밑자료 half : Dolls


01. 에벨리나(http://tveye.tistory.com/6960),
02. 미샤(http://tveye.tistory.com/6964)
03. 일린(http://tveye.tistory.com/6969)
04. 에벨: http://tveye.tistory.com/6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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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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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이른 오후. 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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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8. 29. 22:33

수프 비노, 작년 6월 2016 petersburg2017. 8. 29. 22:33





작년 6월. 페테르부르크. 카잔스카야 거리의 수프 비노.




여기는 bravebird님의 소개로 알게 된 곳이다. 로컬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 그리고 따뜻하고 아늑한 곳, 나직하고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의 알렉세이가 있는 곳이다.




2015년 여름에 처음 갔었다. 작년 6월에 거의 도망치듯 페테르부르크로 날아와 3주 정도 머물렀다. 수프 비노에 두어번 갔고 알렉세이와 다시 대화를 나눴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 좀 긴 휴가를 얻었어요.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어요' 라고 말했고 알렉세이는 매우 부드럽고 조용한 특유의 목소리와 선량한 눈빛으로 '그랬군요'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대답보다는 눈빛과 목소리 때문에 남모를 위안을 받았다. 그건 살짝,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의 묘지 사이를 거닐며 종소리를 들을 때 느끼는 평온함과 위안의 느낌에 가까웠다.



수프 비노. 사진 몇 장.




사족 : 이곳의 치킨 수프는 매우 맛있다. 파스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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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쓰고 있는 글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몇년 째 쓰고 있는 글이 있는데 오랫동안 멈춰 있어. 중간중간 다른 글들을 써서 마치기도 하고 미완으로 남겨두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 '정말로' 쓰고 있는 글은 하나야.' 라고. 그게 바로 가브릴로프 본편이다.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구상했고 계속해서 머릿속과 마음속에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는 글이다.

 

 

다른 글들은 사실 다 여기서 새끼친 것들이다. 서무 시리즈도. 게다가 트로이를 내세운 장편 역시 사실은 이 본편에서 나왔다. 트로이는 원래 이 본편에 잠깐 등장하는 인물이었는데 플롯을 구상하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할까?' 라는 의문을 품었고 결국 그의 목소리와 그의 시선을 빌려 꽤나 긴 소설을 썼었다. 최근 여러번 발췌한 미샤의 수용소 단편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을 위한 프리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본편은 이미 몇년째 120여페이지에 머물러 있다. 뒤를 이어서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고, 사실 전체 플롯과 구조, 메인이 되는 이야기들과 작은 에피소드들도 근 7~80% 정도는 모두 구상되어 있는데 쓰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보통 글을 자유롭게 춤추듯이 쓰는 것을 좋아하고 한번 몰입하면 쉽게 써나가는 편인데 이 가브릴로프 본편만은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아마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직 여기에만 집중했을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년 동안 나는 너무 여러가지로 산란해져 있었고 특히 회사 때문에 더욱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이 본편을 꼭 쓰기는 할 것이다. 언제가 됐든 마칠 것이다. 그럴 거란 사실을 자신의 마음 속으로 알고 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의 2장이다. 1장은 미샤가 부임해오는 극장의 무용수 하나의 시선으로 전개되었고 이 2장은 기차로 가브릴로프에 호송된 미샤가 그의 KGB 감시요원인 다닐 베르닌과 처음 대면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맞다, 서무 시리즈의 그 다닐 베르닌, 단추청년, 왕재수 미샤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집사 베르닌이다. 하지만 본편의 베르닌은 서무 시리즈에서 희화화시킨 단추 베르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사실 진짜인데...어느새 그는 단추청년이 되었지 ㅠㅠ 이 장면 중 중간 정도는 전에 좀 발췌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첫 대면 에피소드를 온전하게 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기 다시 올려본다.

 

 

..

 

 

맨 위 사진은 가브릴로프...는 당연히 아니고, 2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찍은 사진. 레트니 사드(여름 정원). 발췌한 에피소드에서 미샤와 베르닌이 숲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와서 뭔가 숲 느낌 나는 사진이 어울릴 것 같아서 올려봄.

 

 

...

 

 

가브릴로프는 물론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이다. 하지만, 드넓은 러시아(및 구소련) 땅 어딘가에 이 이름 붙은 소도시가 실제로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이름이고... 대천사 가브리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 야스민이 가브릴로프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보안위원회에 제출할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꽤 두툼한 보안 서약 서류에 서명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지만 다닐 베르닌은 거의 친절하기까지 한 어조로 서류에 그가 가브릴로프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미샤가 서류를 들춰볼 기색을 보이지 않자 베르닌은 허가 없이는 시계를 넘어갈 수 없으며 모든 시외전화는 보안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상대의 침묵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류의 제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했다. 약 20페이지 가량의 서류는 갱지에 타이핑되어 있었고 노끈으로 허술하게 묶여 있었다.

 

 

“ 붉은 담장 도착하기 전에 차 안에서 읽어두는 게 좋을 걸요. 일단 제출하고 나면 내용 확인할 기회 없을 테니까. ”

 

 

미샤는 서류를 읽는 대신 붉은 담장이 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가브릴로프에 도착해서 그가 제일 처음 했던 말일 것이다. 기차역에서 베르닌에게 인계된 이래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 아, 그렇지. 당신은 여기 사람이 아닌데. 붉은 담장은 말이죠, 우리 사무실을 가리키는 겁니다. 오해는 말아요, 담장이 있긴 하지만 붉은색은 아니니까요. 크라스나야 강변에 있어서 그런 겁니다. 모스크바에서는 루뱐카라고 부르듯이. 뭐 그런 식인 거죠. 쓸데없는 설명인가요?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약 10여분 정도 기다렸고 그가 전혀 서류를 읽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맨 마지막 장을 펼쳐주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미샤가 서명을 한 후 펜과 서류를 돌려주자 베르닌은 그것들을 봉투에 다시 집어넣으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 의외인데. 전 사실 서류를 한 부 더 준비했답니다. ”

 

 

“ 왜죠? ”

 

 

“ 찢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

 

 

“ 하긴 그렇죠. 안 읽은 것도 그래서겠지. 현명한 사람이군요. ”

 

 

 

미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검은 눈을 찬찬히 응시하면서 조금 전보다 훨씬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이제부터 충고 하나 하죠. 강을 건너기 전에. 일단 시내로 들어가면 우리 대화는 전부 기록해야 할 테니까. 난 77년에 모스크바에 있었어요. 당신이 볼쇼이에 있었을 때죠. 당신 무대는 여러 번 봤습니다. 내 심미안이야 교양 있는 관객들에겐 비웃음을 살 수준이지만, 일단 팬이라고 해둡시다. 그래서 말인데,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으로 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지루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온건한 사람은 아니지요. 가브릴로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곳은 말이지요, 미하일, 작은 도시입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는 다르지요. 저 숲들이 보이시나요? 이쪽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습니다. 공항과 기차역과 저 울창한 숲, 그리고 즐라타야 강. 우리는 지금 강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곧 다리를 건너게 되겠죠. 그곳에 시내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손바닥만 한 도심과 주거지. 그리고 숲. 공장들. 아, 하나 빼먹었군. 교회들. 이젠 쓸모없는 곳들이지만. 어쨌든 이게 전부입니다. 운 좋게 도시란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당신처럼 대도시에서 온 분에게 이곳은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겠죠. 그러니 이곳을 손에 넣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곳에도 시 의원들이 있지요. 당원들도 있고 노멘클라투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는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한 사람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유치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당신이 서류를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찢어버렸다면 아예 입을 다물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당원이자 폭군이죠. 표면적으로 볼 때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기 권위를 무시하는 겁니다. 하지만 더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페호프를 만나게 되면 그걸 감추는 쪽이 피차 좋을 겁니다. 그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말썽을 부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족해요. 더는 필요 없습니다. 훌륭한 배우였으니 물론 그 정도는 쉬운 일이겠죠. 아마 10분도 안 걸릴 겁니다. 그리고 난 그 10분이 걱정돼서 이렇게 길게 떠들어댄 거고요. 내 말 아시겠습니까? ”

 

 

“ 그게 당신의 충고인가요? ”

 

 

“ 글쎄요, 난 충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보군요. ”

 

 

 

베르닌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 우리는 곧 노브이 다리로 접어들 겁니다. 당신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아마 배를 타고 곧장 강을 가로질러 갔겠지요. 사실 그게 시내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만 기차역에서 내렸으니 좀 돌아가는 수밖에요. 오른편으로 강이 보이시나요? 즐라타야 강입니다. 당신들의 네바 강보다는 덜 화려하겠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 가장 내세울만한 풍경이죠. 지금 건너는 게 노브이 다리입니다. 물론 스타르이 다리도 있지요. 그건 검은 숲 지대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가장 먼저 생긴 다리는 아니지만요. 그건 가브릴로프 다리죠. 구시가지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이곳도 꽤 넓게 느껴지는군요. 우리의 즐라타야 강이 마음에 드십니까? 당신은 레닌그라드에서 왔으니 도심 한가운데 강이 흐르면 한결 마음이 안정되겠군요. 그래도 우리 쪽 강이 더 낫지요. 범람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여기는 늪을 갈아엎어 만든 도시가 아니거든요. 대부분이 숲이죠. 추위도 덜할 겁니다. 기온이야 당신 살던 곳과 비슷하겠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습한 기후는 아니니까요. 수도원 근방으로 가면 온천도 있습니다. 여러 모로 당신에겐 훨씬 낫겠죠. 그런데 더우십니까? 창문을 좀 여는 게 낫겠군요. 오늘은 햇살이 강해서 좀 답답하군요. ”

 

 

 

쉴 새 없이 떠들다가 미샤의 상기된 옆얼굴을 힐끗 쳐다본 베르닌이 창문을 반쯤 열었다. 찬바람이 불어 들어오자 미샤가 몸을 희미하게 움츠렸다. 베르닌은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 아니면 열이 나서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추우면 창을 닫겠습니다. 어쨌든 기차로 열네 시간은 그렇게 짧은 거리는 아니지요. 비행기를 탔다면 좋았겠지만 아마 여의치 않았겠죠. 정 힘드시다면 병원에 먼저 들르도록 해드리죠. ”

 

 

“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

 

 

“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런데 아직 20분은 더 가야 하거든요. 혹시, 그러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주저 말고 얘기하세요. 어차피 병원 검진은 오늘 일정에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요. 국장 면담 후 곧장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

 

 

“ 내 일정표를 다 외고 있는 모양이죠? ”

 

 

“ 적어도 오늘 일정은. ”

 

 

 

미샤는 입을 꽉 다물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열린 창문을 닫을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와 뺨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열기가 퍼져서 눈동자까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르닌은 자신의 가방 안에 루뱐카 클리닉으로부터 인계받은 앰풀 두 개와 주사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장시간의 기차 여행을 견딜 수 있었다면 남은 20분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국장과의 면담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고 다소 허세를 부렸지만 그 주사를 놓으면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지체될 것이다. 그리고 스페호프 국장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스크바에서 보낸 인물, 자신의 권위를 짓밟아가며 밀어 넣은 반역자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불과 사흘 전에 스페호프가 모스크바 본부로 호출되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건 비공식 출장도 아니었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아주 은밀하게 행동하는 방법도 잘 아는 인물이었지만 그건 대단한 정적들을 다룰 때에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달아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을 정식으로 호출했다. 스비제르스키가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보안위원회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연방에서 공식적인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스페호프는 몹시 분노한 상태로 돌아왔다. 좀처럼 부하 직원들 앞에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은 베르닌이 있는 자리에서도 화를 참지 못했다. 공항에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는 모스크바와 크레믈린에 대해, 루뱐카에 대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역겨운 반역자 주제에 줄을 잘 타서 빠져나온 애송이에 대해서도. 그러나 대부분의 욕설은 총살형 대신 정신교화 수용소 쪽을 관철시켰던 제믈랴코프와 그 애송이를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며 약물을 찔끔찔끔 놓다가 결국 자기 무덤을 판 레닌그라드 쪽 책임자에게 돌아갔다. 베르닌은 모든 서류를 아주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스페호프가 그렇게 화가 난 진짜 이유 두어 가지를 눈치 챘지만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관용차가 다리를 건너 크라스나야 강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미샤의 시선이 자작나무 숲에 못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베르닌이 쾌활하게 말했다.

 

 

 

“ 자작나무를 좋아하시나보군요. 하긴 자작나무를 싫어하는 러시아인은 없지요. 그런데 저건 진짜 숲이 아니랍니다. 여기서는 그냥 공원이나 화단 정도죠. 구시가지 쪽으로 넘어가면 진짜 숲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숲은 정말 크고 울창하죠. 극장 주변 공원에도 나무는 많답니다. 아마 이곳에 나무가 없다는 말과 공기가 안 좋다는 말만은 못할 겁니다. 다른 건 없어도 나무와 물은 많죠. 살기에는 좋을 거예요, 물자는 좀 부족한 편이지만 그거야 일반인들 얘기고 적어도 국가에서 운영되는 극장의 감독이라면 사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좀 지루하긴 하겠지만. ”

 

 

 

미샤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다. 생판 모르는 도시에 던져진 사람치고는 별로 현명한 태도는 아니었다. 베르닌은 그가 완전히 체념한 상태인지, 아니면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것인지 궁금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숙련된 기자가 초점을 맞춰 놓은 카메라 렌즈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는 KGB 감시요원의 친절한 설명보다는 자기 눈을 믿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게 스페호프가 좋아하는 방식일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침내 관용차가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본관 앞에 도착했다. 미샤는 베르닌이 미처 차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먼저 내렸다. 가방은 뒷좌석에 그대로 팽개쳐둔 채였다. 가방과 보안 서약 서류가 든 봉투를 들고 내린 베르닌이 솔직하게 놀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여권을 챙기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것도 당국에 출두하면서. ”

 

 

“ 챙기기 전에 항상 압수당했거든요. ”

 

 

 

미샤는 웃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꾸하며 시멘트 담장을 따라 정문으로 들어갔다. 베르닌은 그에게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의 농담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는 충고를 추가해 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이미 그는 차 안에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

 

 

 

...

 

 

 

내일이나 모레쯤은 가브릴로프 KGB 국장 스페호프와 미샤의 첫 대면 에피소드를 이어서...

 

 

전에 이 본편의 에피소드 몇개를 발췌한 적이 있다.

 

먼저 위의 이야기에서 곧장 연결되는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검색대를 통과하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5368

 

 

그리고 스페호프와의 대면을 마치고 나온 후의 짧은 장면인

햇살. 본편의 베르닌과 서무의 단추 사이 : http://tveye.tistory.com/4451

 

 

같은 파트의 마지막 부분. 숙소에 도착한 미샤와 베르닌이 나누는 이야기는 여기

이웃사촌 미샤와 베르닌, 미샤가 생각한 해법 두가지 : http://tveye.tistory.com/4971

 

 

그리고 이 다음 파트인 3장의 일부인 렐랴의 인터뷰 : http://tveye.tistory.com/5114

 

 

 

이 가브릴로프 본편은 파트별로 시점이나 심리적 화자, 혹은 구조가 조금씩 다르게 서술된다. 나는 다성악 구조를 좋아하는 편이고 쓰기에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본편은 좀 어렵다. 그만큼 집중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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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8. 2. 15:05

추운 날 사진으로 더위 쫓는 중 2016 petersburg2017. 8. 2. 15:05

 

 

 

 

 

작년 12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

 

 

 

 

 

여기는 이삭 광장.

 

 

 

 

 

다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사진. 아래 두 장도 수도원에서.

 

 

 

 

 

 

 

 

 

 

이건 다시 이삭 광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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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 더워죽겠다. 아침 10시부터 폭염경보 문자 온다 꽤꾸약 여름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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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예프스키 섬.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 근방.

 

 

오래전 처음 러시아에 갔을 때 이 근방에 있던 기숙사에 살았었다. 작년 12월에 갔을 때 다시 가보았다. 그때처럼 춥고 얼어붙은 운하를 따라 기숙사까지 걸어가보았다.

 

이곳에 다다르면 시간이 멈춘 것 같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동시에, 몇십년 전 레닌그라드를 떠올리기도 한다. 나는 본편을 쓸때 미샤가 소년 시절을 보낸 동네를 이곳으로 설정했다.

 

 

 

 

혹한의 러시아에서 겨울을 나는 비둘기들을 보면 항상 어딘가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주머니에 먹을게 있으면 조금씩이라도 던져주곤 했다. (근데 제발 푸드득 날지만 말아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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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엄밀히 말하자면 딱 1년 전은 아니고 1년하고 한달 쯤 전이다. 블로그 이웃인 bravebird님과 페테르부르크에서 조우했었다. 항상 장난삼아 '언젠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요~'라고 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이삭 광장의 아스토리야 호텔 빨간 차양 아래에서 만났다. 6월이었지만 비바람이 불고 매우 추운 날씨였다. 나는 무슬림처럼 머리에 스카프를 칭칭 두르고 나갔다.

 

다음날 우리는 고스찌에서 점심을 먹고 아스토리야의 로툰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케익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해가 질 무렵 함께 청동기사상에게 가서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네바 강변을 거닐며 백야의 석양을 만끽했다. 그리고 어두워진 골목을 걸어서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bravebird님이 먼저 귀국하시고 며칠 후 나는 다시 그 아스토리야 호텔 빨간 차양 아래에서 다른 블로그 이웃분인 엽님을 만났다. 그때도 역시 무척 즐거웠다.

 

떠나는 날 아침에는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로 pica님을 만나 돔 끄니기 2층 카페에서 같이 아침을 먹기도 했다. 작년 6월은 내게 무척 힘든 시기였지만 대신 좋은 분들을 세분이나 만나게 되어 이것만은 큰 기쁨이었다.

 

 

얼마전 프라하에 갔을때도 이웃분인 영원한 휴가님과 그야말로 번개치듯 갑자기 드레스덴에서 만났다. 이렇게 번개치듯 만난 분들이 다들 좋은 분들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작년 6월, bravebird님과 아스토리야 로툰다 카페에서 차 마시며 찍은 사진 몇 장 + 그리고 차 마신 후 산책하러 나가다 찍은 사진 두 장.

 

 

 

 

사진들에서 서로의 얼굴을 교묘하게 잘라내느라 ㅋㅋ 몇 장은 귀퉁이가 좀 잘려나갔다.

 

 

 

 

이것은 내가 시켰던 안나 파블로바. 머랭과 바질, 생크림과 딸기가 들어간다. 그런데 내 입맛엔 좀 안 맞았음 ㅜㅜ

 

 

 

 

이건 bravebird님이 주문하신 레몬 무스 케익(..이었다고 추정됨) 이것은 새콤하고 맛있었음.

 

 

 

 

로툰다 카페 창 너머로는 이삭 성당이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이다.

 

 

 

 

이건 폰으로 찍어서 어둡게 나왔네... 피아노도 연주해준다 :)

 

 

 

 

 

 

 

이건 전에 한번 올린 적 있음. bravebird님께서 갑자기 내게 짠 하고 내밀어주신 깜짝선물 :)

 

 

 

 

 

 

그리고 우리는 같이 이 길을 따라 해군성 공원을 지나 청동기사상 앞으로, 그리고 네바 강변으로 산책을 하러 갔다. 사진 오른편 아래에 그 빨간 차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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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간만에 아름다운 발레리나 화보들로 심신의 정화.

 

 

마린스키 발레리나 옥사나 본다레바 화보들 몇 장.

 

 

본다레바는 원래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에서 주역을 추다가 몇년 전 마린스키로 옮겨왔다. 세컨드 솔리스트인데 미하일로프스키에서는 꽤나 인기가 많았던 무용수였다. 미모가 뛰어나고 열정적인 스타일이라 화보들이 아름답다.

 

 

다만 내 기준으로 볼 때는 고전 발레에는 확실히 덜 어울린다. 일단 체격 조건이 맞지 않는다.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긴 한데 좀 영화배우나 모던 댄서처럼 아름답고 체형은 클래식 발레리나에는 어울리지 않는 편이다. 목선이나 상체 조건 때문에 날씬한 무용수임에도 불구하고 길쭉하고 늘씬해보이지는 않는다. 근육질의 강건하고 자그마한 무용수 느낌이라서... 나탈리야 오시포바도 내겐 좀 그런 느낌인데, 본다레바가 좀 더 그런 편이다. 그래서 본다레바의 무대는 실제로 몇번 보았을때도 그다지 인상에 남지는 않았다. 마린스키 타입 발레리나는 확실히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화보들은 정말 매력적이다. 좀 고양이 같은 외모이고 광대뼈가 넓고 눈이 큰 러시아 미녀 특징도 잘 살아 있다. 그래선지 무대 화보보다는 패션 화보가 더 잘 어울리고 아름답다.

 

사진 출처는 옥사나 본다레바의 instagram : bondareva.oksana.f

 

 

야외 화보는 페테르부르크의 네바 강가와 에르미타주 쪽에서 찍은 것들인데 분위기가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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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나오면 섭섭하니까~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두 장 :))

 

얼마 전 마린스키 신관 옥상에서 찍은 화보 두 장.

 

너는 어쩌면 야자나무 앞머리를 해도 멋있는 거니...

 

 

 

 

 

 

마지막은 아름답고 우아한 디아나 비슈뇨바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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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마린스키 극장 구관. 이날은 안드레이 예르마코프와 옐레나 옙세예바가 바질과 키트리를 춘 돈키호테를 보러 갔었다. 공연 시작하기 전, 차 한 잔 마시고 2층 홀로 가서 전시 구경. 내가 사랑하는 극장인 마린스키는 내게 미로처럼 좁게 이어지는 복도와 칸막이 좌석들, 푸른 빌로드 좌석과 복도에 기다랗게 늘어선채 샴페인 잔과 연어샌드위치를 들고 있는 사람들, 오페라 글라스,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 차림의 아름다운 여인들, 정반대로 운동화에 배낭을 메고 아무때나 플래쉬를 터뜨리는 관광객들 등등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리고 물론 샹들리에. 아름답고 우아하고 근사한 샹들리에들. 이제 마린스키 신관도 꽤나 마음에 드는 극장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구관이 갖는 광채와 아우라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



샹들리에와 홀 사진 하나로는 아쉬우니... 카페 사진도 두 장. 전에 몇번 소개한 적 있는 마린스키 구관 사이드 윙의 2야루스(4층)에 있는 작은 카페이다. 마린스키 구관은 복도마다 미로처럼 조그만 카페(..라고 해봤자 작은 카운터와 복도에 놓여진 테이블 몇개가 전부)가 있는데 여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라서 항상 공연 시작하기 한시간 전에 빨리 입장해 이 카페부터 간다. (한시간 전부터 입장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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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오후 4시!!!!


페테르부르크 블라지미르스키 거리.



이때 눈 갑자기 많이 와서 엄청 고생함... 추운데다 짐도 무거워서 ㅠㅠ 그런데 지금 너무 덥고 습하고 답답하다 보니 고생했던 저 날 사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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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습하고 답답하다. 오늘은 미세먼지 농도마저 나쁜 날이네.



비 좀 좍좍 왔으면 좋겠다.



더위 퇴치하려고 작년 12월에 찍은 페테르부르크 사진 두 장 더. 위는 청동기마상 쪽으로 가는 길. 아래는 모이카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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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27. 21:47

겨울의 페테르부르크 그리워하며 2016 petersburg2017. 6. 27. 21:47






너무 습하고 답답한 날씨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어서 겨울의 페테르부르크 꽁꽁 언 사진 몇 장 올려본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작년 12월에 갔을 때 찍은 사진 몇 장.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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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15. 23:14

겨울의 페테르부르크 2016 petersburg2017. 5. 15. 23:14





얼어붙은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스파스 나 크로비(피의 구세주 사원). 작년 12월.


내게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문학적으로 환상적인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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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7. 15:51

한겨울 오후의 페테르부르크 2016 petersburg2017. 5. 7. 15:51

 

 

 

작년 12월. 복직을 앞두고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날아갔었다. 물론 그 동네는 매우 추웠다. 여름과 정반대로, 오전 10시가 넘어서 해가 떴고 오후 3시면 이미 캄캄해져버리는 곳.

 

여기 사진들은 대부분 오후 3~4시에 산책하면서 찍은 것들이다. 이때 날씨가 엄청 안 좋았다. 눈이 왔다가 진눈깨비가 쏟아졌다가 비가 왔다가... 뭐 전형적인 이 동네 날씨니까 그러려니 한다. 사실 이것이 이 도시의 매력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만큼 6월부터 8월까지의 찬란한 백야와 여름을 여기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 겸 레스토랑 고스찌의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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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오후 3시 반 즈음 석양 보려고(ㅜㅜ 겨울엔 3시 반에서 4시면 해가 진다) 얼어붙은 네바 강변을 거닐었다. 료샤랑 레냐랑 함께였다. 그러다 저렇게 포옥 껴안고 있는 커플 발견.


이런 걸 보면 언제나 따라하고 싶어하는 레냐가 동동거리며 달려와 나를 포옥 껴안았다 :)

(료샤는 '쳇, 아빠보다 토끼를 더 좋아해. 아들 따위 다 소용없어' 운운하며 투덜투덜)



엄청 추운 날이었는데 보들보들 복슬복슬 온통 말랑말랑 조그만 레냐가 폭 안겨오니 정말 따뜻했다. 나도 마주 꼬옥 안아주었다.


포옹을 풀고 나서 레냐가 하는 말...



레냐 : 쥬쥬한테서 꿀 냄새가 나. 너무 좋아. 블린 먹고 싶어~


료샤 : 크흐흐흐흐흐 하하하하하...


나 : 야! 뭐가 그렇게 웃겨!!!!


료샤 : 꽃 냄새도 아니고 꿀 냄새래 크흐흐흐 하하하하 블린 먹고 싶대 하하하하 너무나도 토끼 같아~~~


나 : 야!!! 꿀향기 나는 향수 뿌렸단 말이얍!!!!!!



... 하여튼 우리는 블린 먹으러 갔다. 레냐는 꿀 뿌려진 블린을 먹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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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5. 00:01

나의 페테르부르크 2016 petersburg2017. 4. 5. 00:01





테러 소식에 마음이 많이 아프다..

작년 12월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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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2. 21:51

북방 도시의 빛은 창백하다 2016 petersburg2017. 4. 2. 21:51







지난 12월. 페테르부르크 산책하며 찍은 사진 몇 장. 매우 추웠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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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1. 00:50

이해할 수 없지만 확신이.. 2016 petersburg2017. 4. 1.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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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들은 모두 지난 1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음


..



오늘은 집에 막 들어와 씻으려고 옷을 벗다가 문득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저 도시에서 살게 될 거야. 언제가 됐든, 언젠가는, 결국은 저곳으로 돌아가고, 저곳으로 떠나게 될 거야.


.. 어떻게? 나 '왜?'는 없었고 그냥 그런 기분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뭐 오늘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지도...



사실 지금 저기 있고 싶네.



..




어디가 되었든 어떻게 되든 이곳에 언제까지 남을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될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이곳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더 이상 젊지도 않은 나 자신의 급속한 소모에 대해 깊은 회의가 들었다.


근데 또 곰곰 생각해보면 원래 회의주의자니까 그런지도 ㅠ (생각 좀 그만 해ㅠㅠ)



..



그러고 보니 일찍 자려고 10시 반쯤 침대로 들어갔는데 막상 잠이 안와서 일어나 책 읽고 있다. 오늘 무리한 머리 엔진이 덜 식었나보다. 내일은 낮 기차니까 11시 즈음에만일어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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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8. 23:27

외곽은 아직도 레닌그라드 같지... 2016 petersburg2017. 3. 28. 23:27









작년 12월. 페테르부르크.

로모노소프 도자기 박물관 가는 길. 도심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라 황량하고 건물과 주변 풍경에는 잿빛 소련 느낌이 배어 있는 동네다. 레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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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7. 23:49

항상 떠나고 싶으니.. 2016 petersburg2017. 3. 27. 23:49




작년 1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사진들 몇장















몸이 아플 때도 안 아플 때도 항상 떠나고 싶으니 현실에 불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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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발췌했던 에피소드 중에 아파트 수도관이 터져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친구인 트로이의 집으로 피신 온 미샤의 이야기가 있었다. 두 토막으로 나누어 올렸는데 하나는 흠뻑 젖은 미샤가 트로이네 집으로 오는 이야기였고 다음 얘기는 잠든 미샤를 바라보는 트로이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5524 (수도관 터진 날, 푸쉬킨,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http://tveye.tistory.com/5783 (깊은 잠, 멈춘 육체)



그 파트는 사실 트로이와 미샤가 처음으로 밤을 보내고 육체적 관계를 맺는 순간을 그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행복한 순간이었겠지만 돌이켜보면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그 직후의 이야기이다(공개 블로그라 자기 검열에 의해 둘의 불꽃튀는-ㅋㅋ- 장면은 건너뜀) 덜컥 관계를 맺어버린 후 트로이와 미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사실 내겐 그들의 잠자리보다 이 순간이 더 중요했다.



실지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이야기와 단어와 표현조차 그 순간의 트로이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샤라면, 그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농담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말은 믿을 수 없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작가로서의 나는 오직 그의 말만을 믿을 수 있다. 웬 횡설수설이냐고? 어쩔 수 없다. 애초부터 작가란 거짓말쟁이이며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인간이다.



발췌한 에피소드 아래에는 이 글을 쓰던 당시 내가 사적으로 남겼던 메모를 첨부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한참 후 미샤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팔에서 빠져나갔다. 침대에서 내려가 방을 나갔다. 트로이는 잠깐 동안 어둠 속에 누운 채 두려움에 잠겼다. 그가 떠나 버릴까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 두려움이 너무 생생하고 강렬해서 어지럽고 욕지기가 났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일어나 침실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갔다.



 미샤는 가버린 게 아니었다. 그는 부엌에 있었다. 식탁 구석에 오랫동안 놓여 있던 미지근한 과일주스를 팩 째로 마시고 있었다. 달착지근한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 애였으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트로이는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 안을 뒤져 맥주 한 병을 찾아냈다. 막 뚜껑을 따고 들이키려는데 미샤가 병을 빼앗아 크게 두 모금 마시고 돌려주었다. 트로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 넌 마시지 마. ”



 “ 왜? 미성년자도 아닌데. ”



 “ 찬바람 맞고 왔잖아. 투어도 가야 한다면서. ”



 “ 폐렴에라도 걸릴까봐? ”



 트로이가 맥주 대신 물을 따라 주자 미샤는 컵을 들고 침실로 돌아갔다. 트로이는 술병을 거꾸로 들어 끝까지 다 마셨다. 차가운 알콜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까지 단숨에 흘러내려갔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며 침실로 갔다. 차가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미샤는 모포를 찾아내 몸에 두르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벽에 기댄 채 넓은 침대에 앉아 있는 미샤는 더 이상 격렬하게 그를 포옹할 때처럼 대담하고 강해 보이지 않았다. 사원을 기어오르던 악마도, 끝없이 그를 몰아대며 끌어당기던 젊은 폭군도 사라졌다. 부스스하게 뒤엉켜 사방으로 치솟은 검은 머리칼을 갸름한 얼굴 주위로 종려나무 잎사귀처럼 드리운 채 보풀 어린 모포로 어깨를 감싸고 사춘기 소년처럼 사지를 늘어뜨리고 앉아 트로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 어둠 속의 고양이처럼 세로로 길게 빛나고 있었다. 트로이는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어깨를 안고 베개 위로 눕혔다.



 미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이런 거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



 길 잃은 아이처럼 우울한 목소리였다. 미샤는 베개에 이마와 눈을 파묻고 몸을 웅크렸다.




 충격을 받은 게 당연해. 무경험, 친구의 배신, 충격.


 아니, 사회 윤리와 법률 위반도 있지. 발각되면 체포당할 짓이니까. 넌 항상 그런 규율과 질서를 경멸하는 것처럼 굴지. 하지만 어쩌면 넌 그렇게 강하지 않을지도 몰라.


 졸업을 하고 성인이 되었어도 마찬가지야. 넌 아직 애에 지나지 않아. 얕보이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는 애. 그런 상황을 거부할 용기가 없는 어린애. 그건 강간이나 마찬가지였을지도 몰라. 내가 그렇게 한 거야.




 트로이는 공포를 억누르려고 애쓰며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 네 잘못이 아냐. 내가 그런 거니까. 넌 아무 것도 몰랐잖아. ”




 “ 네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 ”



 알리사와 마찬가지였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알아차린 것이다. 미샤는 언제부터 알았던 걸까?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알리사는 조교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의 표정과 태도 전체에 선명하게 낙인이 찍혀 드러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오랫동안 감추려고 애썼는데.



 미샤가 눈을 들어 충격에 잠긴 트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 다른 애들은 모를 거야. 난 같이 자는 남자들이 많아. 보면 알아. ”



 “ 그럼 다른 것도 알았어?"



 그는 차마 ‘내가 널 원했던 것도 알았어?’ 라고 대놓고 묻지 못했다. 다시 두려움이 솟구쳤다.



 “ 몰랐어. 알고 싶지 않았어. 어쨌든 너와는 자고 싶지 않았어. ”




 “ 교회 첨탑 같아서? ”



 트로이는 억지로 농담을 짜냈다. 미샤는 웃지도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 파트너나 친구와는 자는 게 아니니까. 신뢰가 사라지잖아. ”



 “ 난 나보다 널 더 믿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



 “ 네가 그렇다는 건 알아. ”



 미샤는 그의 얼굴에 뺨을 마주대고 여전히 우울하게 말했다.



 “ 파트너는 바꿀 수 있어. 친구는 그게 안 돼. 내게 친구는 너 하나 밖에 없어. ”



 “ 주위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쩌고. 극장 동기들은, 이고리는, 타냐는? ”



 “ 친구는 잘 사귀지 못해. 난 사람들을 믿지 않아. ”



 처음으로 트로이는 미샤의 완벽하게 서늘하고 우아한 아름다움 너머로 깊게 일그러지고 오그라든 어둠을 보았다. 어둠. 불. 추락. 크세니야가 했던 말. 불을 뿜으며 떨어지는 아이. 모스크바 역 좁은 의자에 앉아 공포에 질려 있던 소년.



 “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한데. ”



 그는 심각하게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팔 안의 몸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미샤의 몸에는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 세상이란 게 뭔데. 소비에트 연방?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




 
 그는 키로프라고 하지 않고 마린스키라고 했다. 레닌그라드 대신 페테르부르크라고 얘기한 것처럼.



 “ 우리 주위의 모든 것. 전부. ”



 “ 레닌그라드. ”



 미샤가 결론을 내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트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레닌그라드. ”



 그는 미샤가 이 도시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의 깊이에 전율했다. 물 위에 돌로 지어진 도시, 학살과 절망의 도시, 피와 바람의 도시, 허위와 모방의 역사로 가득 찬 옛 수도, 이제는 모스크바의 광휘에 밀려나 퇴색하고 있는 도시를 향해 그런 절대적이고 강력한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 나하고 레닌그라드는 같을지도 몰라. ”



 미샤는 트로이의 귓가에 입술을 마주 댄 채 따스한 숨결을 내쉬며 말했다.



 “ 뿌리가 없어. 돌이킬 수 없이 안이 비었어. 파이프처럼. 운하의 검은 물이 그 안으로 차올랐다가 어디론가 빠져나가. 그래서 사람들을 잡을 수가 없어. 친구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 ”



 2년 반 전 갈랴의 집에서 만난 이래 미샤는 단 한 번도 트로이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그럼 나는? ”




 “ 내가 널 잡는 게 아니야, 네가 날 잡아주는 거지. 그래서 나한테는 친구가 너 하나 밖에 없어. 너하고 나는 레닌그라드에 같이 있으니까. ”



 그는 미샤의 말을 절반쯤 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는 지금껏 미샤를 이해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있어 미샤 야스민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의 내부에 있는 것이라곤 깊은 사랑과 욕망뿐이었다.



 가슴을 에는 듯한 연민과 애정을 느끼며 안드레이 트로이츠키가 조용히 물었다.



 “ 누구든 사랑해본 적이 있어? ”



 “ 같이 자는 남자들은 많아. ”



 미샤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트로이의 목을 껴안고 따뜻하게 데워진 몸을 바짝 밀어붙였다. 한쪽 다리를 들어 트로이의 허리를 감았다. 엷은 갈색 털이 성기게 돋아난 트로이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애무하듯 쓸어내리며 턱을 들어 입을 맞췄다.



 키스를 잠시 멈췄을 때 미샤가 입술을 떼지도 않고 말했다.



 “ 좀 안아줘, 안드레이. 한번만 더 해줘. ”



 절망적이고 쓸쓸한 목소리였다. 불을 뿜으며 떨어지는 아이.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생명체. 낯선 인간. 하지만 트로이는 더 이상 그게 새로 온 존재인지 그들 이전부터 있었던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거라곤 ‘좀 안아줘, 안드레이. 한번만 더 해줘란 말과 ‘안드레이, 나 좀 잡아줘. 잠시만’ 이란 말이 똑같은 울림과 똑같은 깊이로 밀려나온다는 것뿐이었다. 파이프에서 검은 물이 빠져나오듯, 그렇게.



 그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시트가 말려 올라간 매트리스 위를 구르며 다시 사랑을 나눴다. 아침이 되었을 때 트로이는 면도도 하지 않고 강의 노트를 챙겨 학교에 나갔다. 그가 나갈 때 미샤는 기침을 하면서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파이프가 터져 엉망이 되었던 아파트는 예상 외로 다음날 곧 복구되었다, 레오니드 핀스키가 아는 수리공에게 보드카를 뇌물로 주며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샤는 3일 후 키예프로 투어를 떠날 때까지 트로이의 아파트에 머물렀다.





...







<2012년 가을의 메모 - 이 소설을 쓰던 무렵>




요즘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텅 빈 일종의 파이프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가끔은 그 파이프 안으로 차가운 물이 들어와 위아래, 양옆으로 물결치는 것 같다. 그 물은 아주 차갑고 아주 검다. 주로 밤에 그렇다. 원래 밤이란 건 그런 시간이다. 


 
옛날에도 가끔 우울증에 시달렸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나 자신이나 주변과 타협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면서 훨씬 나아졌다. 그런데 그건 사실 해결의 기술이 아니라 회피의 기술이다. 파이프에는 별 도움이 안된다.
 


오래 전 글을 쓸 때, 그리고 최근 다시 글을 쓰게 되었을 때, 난 동일한 인물의 입을 빌어서 한 인물의 내부와 외부에 오로지 어둠만이 존재하며 거기에는 어떤 정점도 어떤 바닥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고 우울한 일인지 이야기했다. 난 그 느낌을 안다. 그건 파이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인물은 파이프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난 그 느낌을 안다. 


 
어쩌면 내가 다시 글을 쓰기로 했을때 비슷한 성향이지만 훨씬 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웠던 다른 인물, 이미 정교한 플롯이 짜여져 있던 다른 이야기를 되살리는 대신 그 음울하고 고통스런 인물을 데려온 것은 그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은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치기로 한다. 재능을 배신하고 열망을 버린다. 다른 세계로 옮아간다. 그건 기만이며 일종의 회피, 비겁한 행위이다. 딱히 살아남기 위한 열정에서 나온 회피도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말로 나쁜 건 어떤 식으로 행동하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더. 지금껏 내가 만들어냈던 그 어떤 인물보다도 더. 물론 나는 그와 같은 재능이나 매력을 갖춘 예술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


 
어쨌든 파이프가 되는 건 우울한 일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건 더욱 그렇다.



201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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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들은 모두 작년 여름과 겨울에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것. 마지막 사진은 푸쉬킨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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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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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17. 22:11

겨울,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2016 petersburg2017. 3. 17. 22:11

 

 

 

지난 12월. 페테르부르크.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복직 며칠 전.

 

춥고 흐린 날이었다. 습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전형적인 잿빛 페테르부르크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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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저 기념품 가게에서 파란 망토의 목각천사 미하일을 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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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13. 21:36

12월, 얼어붙은 모이카 운하 2016 petersburg2017. 3. 13. 21:36




지난 12월.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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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8. 21:13

밤중에 호텔 복도를 지나다 2016 petersburg2017. 3. 8. 21:13




아스토리아 호텔의 색깔과 빛, 붉은색과 푸른색 줄무늬,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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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