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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 3. 16:51

빨간 소고기 뭇국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2023. 8. 3. 16:51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이 폴더는 먹거리와 옛 이야기에 대한 가벼운 단문들을 모아놓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몇달 전 이런 단문을 몇개 쓰고 리스트업도 해두었는데 일도 너무 바쁘고 원래 쓰던 단편에도 집중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많이 쓰지는 못했다. 예전에 올렸던 무 생채와 오이무침 얘기도 이 시리즈의 일부라서 폴더를 만들면서 옮겨두었다. 틈틈이 하나씩 올려보겠다. 일러스트도 첨엔 이렇게 그려봤는데 결국 시간과 에너지가 모자라서 그림은 이거 포함 두세개 밖에 못 그렸음. 근데 다 그려놓고 보니 이 그림 속 무는 무 같지 않고 꼭 두부 같다 흑흑 토끼의 앞발 ㅜㅜ
 

 
 
 
 
 
 
 

빨간 소고기 뭇국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독립한 후 나는 러시아에서 사귄 친구와 십여 년 이상 함께 살았다. 친구는 부산 출신이었다. 대학 졸업 후 부산에서 잠깐 회사를 다니다 나의 꼬드김에 넘어가 서울로 상경, 잠시 함께 통역대학원을 준비하기도 했고 이후에는 둘다 취업을 했다.
 
 
 
어느 날 감기에 걸려 열이 나고 아팠는데 친구가 빨간 소고기 뭇국을 끓여주었다. 감기 걸리면 엄마가 끓여주던 거라고 했다. 나는 반신반의했다. 일단 나는 당시만 해도 우리 엄마의 식성을 닮아서 고깃국을 거의 먹지 않는 입맛이었다. 내 기억 속의 소고기 뭇국은 희뿌연 국물에 기름이 둥둥 떠 있는 느끼한 음식이었다. 게다가 빨간색이라니! 어떻게 여기다 고춧가루를 풀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뿌리 깊은 편견, 즉 경상도 음식은 맛이 없다는 믿음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전라도 출신이라 경상도 쪽 음식은 낯설었다. 여기에는 친구네 어머니가 담근 김치가 엄청나게 맛이 없었다는 기억도 한몫했다.
 
 
 
친구는 참기름에 소고기와 무를 볶았고 거기 물을 부어 팔팔 끓였다. 콩나물도 넣었고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고춧가루를 한 숟가락 풀었다. ‘맛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아픈 나를 위해 끓여준 성의를 생각해 먹어야겠지. 맛있다고 해줘야겠지’ 하고 생각하며 그 경상도식 빨간 소고기 뭇국을 먹어보았다.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콩나물이 들어가서 시원했고 고기를 참기름에 볶아서 그런지 특유의 역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고춧가루 덕분인지 온몸이 따뜻해졌다. 한마디로, 빨간 소고기 뭇국은 맛있었다. 왜 감기에 걸렸을 때 먹는 음식인지도 알 것 같았다. 그 이후 나는 몸이 으슬으슬할 때 가끔 이것을 끓여 먹곤 했다. 생각해보니 소고기미역국도 이 친구 덕분에 처음 먹게 된 음식이다. 우리 집은 미역국에 다른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 머릿속에 빨간 소고기뭇국은 소고기미역국의 자매품처럼 각인되었다. 둘 다 참기름에 소고기를 볶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후 룸메이트였던 친구는 결혼을 해서 떠났고 나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점점 요리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온갖 레토르트와 인스턴트, 밀키트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목이 아프면 피코크에서 나오는 소고기뭇국 봉지를 뜯어 냄비에 데우고 최소한의 양심을 발휘해 콩나물을 한 줌 집어넣고 끓인다. 콩나물의 유무에 따라 맛이 많이 달라진다. 참기름도 몇 방울 뿌린다. 고춧가루는 넣지 않는다. 콩나물과 참기름까지는 괜찮은데 기껏 레토르트 따위에 고춧가루까지 넣으면 좀 선을 넘는 것 같다. 나 혼자만의 이상한 기준이랄까.
 
 
 
덧글 : 그러고 보니 이 빨간 소고기뭇국은 나의 경상도 음식에 대한 편견을 퇴치해준 계기가 되었다.
 

 

 
 
 
...
 
 
 
 
여기 등장하는 룸메이트 친구는 앞의 글에서도 등장했던 나의 절친 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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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