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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끼는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읽고 있다. 옛날에 러시아에 처음 연수가서 발레를 보기 시작하던 무렵 마린스키 샵에서 발견해 고민하다 아주 큰맘 먹고 샀던(당시 물가로 상당히 비쌌음) 책인데 누레예프가 망명하기 직전, 키로프 극장에서 보낸 3년에 대한 동료들과 친구들의 회상록 모음집이다. 누레예프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95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되었고 영어번역본과 러시아어본이 같이 나왔었다. 친구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레닌그라드 시절 사진들도 실려 있다. 당시엔 아직 러시아어보다 영어가 편해서 영어 번역본을 샀는데 나중에 엄청 후회했음. 그런데 오늘 다시 뒤적이며 읽다 보니... 흐흑, 지금은 또 영어 읽기가 더 수월한 것인가 싶기도 엉엉...

 

 

이 책은 오랫동안 간직해왔고 닳도록 읽었다. 이후 누레예프에 대한 여러 전기나 소설들도 출간되어 이것저것 구해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을 가장 아낀다. 그리고 글을 쓸때도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맨 앞에는 누레예프가 자신이 파리 공항에서 망명하던 순간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 짧은 에세이가 담겨 있다. 읽을 때마다 좀 울컥하고 감정이 북받치는 뭔가가 있다.

   

  이번 뻬쩨르 여행 때 아에로플롯을 탔더니 기내영화에 화이트 크로우가 있어서 좋아하며 봤었다. 영문명 The white crow 인데 레이프 파인즈가 감독을 맡았고 카잔 출신 발레 무용수 올레그 이벤코가 누레예프 역을 맡았다. 메인 사건은 바로 1961년 6월 파리 공항에서 누레예프가 망명하는 이야기이고 거기에 그의 어린 시절과 키로프 시절이 절반쯤 다큐, 절반쯤 픽션으로 섞여 있다. 굉장히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국내엔 들어올 기미가 안 보여서 나중에 아마존이나 뭐 그런걸로 dvd 주문할까 했는데 기내영화로 있어서 영어자막 틀어놓고 봤다. 영어와 러시아어가 혼재되어 있는데 주로 러시아어로 진행된다.  

 

영화는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완성도가 불균질했고 누레예프의 전기적 특성과 망명 당시의 순간들에 대해 너무 문자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다 보니 어딘가 삐걱거렸다. 무엇보다도, 지난 세기 가장 위대한 무용수 중 한명, 남성 무용수로서는 전무후무했던 사람을 다루는데 춤이 너무 적었다. 그러면 한 인간으로서의 누레예프를 심도깊게 해석했는가, 그것도 조금 부족해서 양쪽으로 좀 아쉬웠다. 레닌그라드(지금의 페테르부르크)와 바가노바, 키로프(마린스키) 극장에 대한 이야기도 좀 부실한 편이라 그것도 좀 아쉬웠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저 책을 많이 참고했구나'(저 책에 등장하는 소련 시절 누레예프의 친구들도 영화에 나온다) + '어쨌든 서방 리버럴의 시선으로 가급적 충실히 사실을 재현하면서 픽션을 섞어보려 했구나' 였다. 그리고 '올레그 이벤코는 화보로 볼 때보다 영상으로 보니 누레예프를 외모적으로 좀 더 닮았네' 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둘다 타타르 혈통이라 그런 것 같다.

   

 

결론은, 음, 국내에 디뷔디 출시되면 그래도 누레예프에 대한 애정 때문에 주문할 것 같긴 하고... 이 영화가 좀 아쉬워서 세레브렌니코프가 연출해서 지금 볼쇼이의 고정 레퍼토리로 일년에 두어번 올라오고 있는 발레 누레예프를 보러 가고 싶다. 가급적이면 블라디슬라프 란트라토프보다는 아르춈 옵차렌코 주역으로. (둘중 옵차렌코를 택하고 싶은 것은 순전히 이쪽이 내가 좋아하는 외모 취향에 더 가까워서. 옵차렌코는 이 발레 이전에 누레예프에 대한 다큐 재연 필름에서 그 역을 맡기도 했었음. 근데 사실 옵차렌코는 누레예프 외모와는 그리 닮은 편은 아니고 체형도 너무 늘씬하고 길다)

  

 

 

 

 

 

 

이게 누레예프의 회상 마지막 부분. 일부만 찍어봤음.

 

 

 

 

 

영화 화이트 크로우에서 누레예프 역을 맡있던 무용수 올레그 이벤코. 사진은 최근 이 사람이 자기 인스타에 올린 것.

 

 

 

 

마지막 이미지는 당연히, 유일무이하고 위대한 무용수. 루돌프 누레예프 사진. 1962년이니까 망명 1년 후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 너무 좋아한다. 아름다움과 깊이, 젊음, 말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모두 공존하고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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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