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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는 속도는 느리지만 그래도 꾸준히 쓰고 있다. 이번 주말에도 열심히 집중해서 써보려고 한다. 이 글은 아직도 제목을 안 정해서 맨첨 장난으로 붙였던 쌍둥이, 혹은 여주인공 이름을 따서 '리다' 라고 부르고 있다.

 



아래 발췌는 지난번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의 2층 카페, 싸구려 칩시와 트윅스' (https://tveye.tistory.com/11355) 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게냐는 리다와 함께 그 호텔 2층 카페에 드나들던 이야기를 계속한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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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리다와 함께 여기 왔을 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콩쿠르나 마스터클래스 참여 때문에 학교에서 단체로 투어를 간 적은 여러 번 있었고 물론 외국 경험도 있었지만, 호텔에 묵는다 해도 여럿이서 방 하나를 썼고 항상 우리를 양떼처럼 몰아대는 인솔자가 있었기 때문에 카페나 부대시설을 이용해본 적은 없었다. 그나마 묵었던 호텔도 집단 기숙사 같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리다는 이미 대학생이었고 나보다 두 살 연상인데다 유행에 대한 여자애 특유의 세련된 감각이 있었다. 서너 번째 데이트 무렵 그녀는 스몰렌카 운하를 산책하다가 다짜고짜 나에게 호텔에 가자고 했고 내가 당황하자 ‘방이라도 잡자고 할까 봐? 우리가 그럴 돈이 어딨니. 커피 한 잔만 마시러 가는 거야’ 라고 대꾸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리다는 호텔 2층에도 카페가 있고 바텐더가 있으며 가죽 소파에 앉아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 시장이나 슈퍼마켓, 스톨로바야 카페보다는 더 비싸지만 그래도 맘먹으면 가끔은 들를 수 있을 정도의 가격대로 호텔이라는 공간과 그 분위기를 점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혹되어 있었고 나에게도 그 흥분과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물론 나는 금세 감염되었다. 열여덟 살도 되기 전이었고 극장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니까, 그저 좁은 아파트에서 엄마와 동생과 부대끼며 살던 때였고 매일 트롤리버스를 타고 조드쳬고 로시 거리로 통학하며 언제나 죽어라고 춤을 췄지만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모든 것이 아득했던 시기였으니까. 그러니 내가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2층 카페에 처음 들어섰을 때 완전히 새롭고 즐거운 세계, 어른들의 공간으로 들어온 기분이 든 건 어쩌면 당연하다. 리다는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편이었지만 집안 형편은 엇비슷했고 언제나 새로운 것, 멋진 것, 있어 보이는 것에 목말라 있었다. 나는 다른 곳에서 데이트하는 것도 좋았고 때로는 그냥 함께 강변을 걷거나 좁은 침실에 계속 같이 틀어박혀 있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리다는 언제나 ‘그래도 호텔 카페가 제일 좋아’ 라고 했다. 디스코텍이나 록클럽보다 호텔이 더 쿨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리다에게 그건 내가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바깥으로 나가면 우중충하고 습하고 어두운데다 진창이 가득한 거리와 끝없이 오르는 물가, 텅 빈 진열대와 좌판에 살충제를 놓고 파는 노파들과 불법 복사 테이프들과 매연뿐이지만, 높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와 로비의 무거운 문을 통과하면 후끈한 목욕탕 냄새와 함께 깨끗하고 광활한 공간이 펼쳐지고 마치 외국이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푹신하고 커다란 가죽 소파에 파묻혀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앉아 ‘호텔 바텐더’가 가져다주는 커피와 홍차를 마시며 별 뜻 없는 대화를 나누고 이따금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몸을 밀착시키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우리가 묵고 있는 방으로 올라가 사랑을 나눌 것만 같고, 그건 반드시 스위트룸이지 일반 ‘노메르’(номер)는 아니며 다음날이면 메르세데스나 BMW가 우리와 트렁크를 풀코보 공항으로 실어다 줄 것이며, 우리는 아에로플로트가 아니라 에어프랑스나 델타 에어라인 같은 외국 비행기에 올라 비즈니스석으로 갈 것이다. (1등석까지는 차마 이르지 못했던 것을 보니 리다의 상상력에도 어느 정도 현실적 제동이 걸렸던 것 같다)

 

 

 

 

 

 






 

 

 

 

 

 





이 글의 시간적 배경은 1997년 11월이다. 그리고 게냐가 리다와 사귀던 무렵 함께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에 갔던 시기는 그 몇 년 전이다. 헤어진 후 게냐는 이 호텔에 발을 들여놓지 않다가 리다의 연락을 받고 다시 그곳에 가면서 이런 회상을 하고 있다.

 




두번째 문단의 '스톨로바야 카페'는 소련 시절 많았던 카페테리아 형태의 셀프 식당 겸 카페이다. 지금도 여럿 있다. 저렴한 구내식당 같은 스타일이다. 조드쳬고 로시 거리는 바가노바 발레학교가 있는 거리 이름이다. 소설의 주인공 게냐는 미샤와 마찬가지로 그 학교 출신이다. 다만 미샤는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게냐는 집에서 통학을 했다. 세번째 문단의 ‘노메르’ (номер)는 일반적으로는 '숫자'라는 뜻이지만 호텔에서는 방을 가리킨다.

 




그리고 게냐와 리다가 산책했던 스몰렌카 운하와 그쪽 동네에 대해.

 



맨 위와 바로 위 사진이 스몰렌카 운하 풍경. 저 사진은 2016년 12월에 찍었더니 워낙 추운 때라 살풍경하게 나왔는데 사실 원래 좀 저렇다. 바닷가 동네라 바람도 많이 불고 춥고 주변이 황량한데 지금도 90년대와 큰 변화가 없다. 바실리예프스키 섬 끄트머리의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 부근에 있다. 여기는 이 글의 배경인 1990년대 후반에 내가 실제로 살았던 기숙사가 있는 동네이다. 저 스몰렌카 운하를 따라 많이 걷기도 하고 운하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도 했다. 글에 나오는 프리발티스카야 호텔도 이 동네에 있는데,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과 스몰렌카 운하에서 도보로 20분 가량 걸린다(내 걸음으로) 운하를 끼고 돌면 까라블레스뜨로이쩰레이 거리가 나오고 그 기다란 거리에는 페테르부르크 국립대 기숙사와 소련 시절 지어진 아파트들,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이 있다. 호텔 뒤로는 바다가 이어진다. 바다와 호텔 사이에는 우체국과 전화국이 있고, 바닷가에는 전쟁 당시의 대포들이 진열되어 있다.



 

 

 

 




스몰렌카 운하 좌우로 옛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왼편의 소련 시절 아파트들 중 한곳에 미샤와 그의 어머니 율리야가 살았다고 설정하며 글을 썼다. 이전에는 좀더 도심에 살았지만 아버지가 체포된 후 엄마 율리야와 어린 미샤는 이쪽 동네로 이사오게 된다. 그리고 미샤는 몇년 후 발레학교 입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극장 들어간 후에는 근처의 다른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하여튼 여기는 꼬마 미샤네 동네.

 





 

 





여기는 기숙사에서 프리발티스카야 호텔로 가는 길에 있는 아파트이다. 소설 속에서 리다가 결혼 전까지 엄마랑 살았던 집도 이 근방 아파트들 중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리다랑 게냐는 이 동네 스몰렌카 운하를 산책하기도 하고, 가까운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2층 카페에 드나들게 되었다. (막상 게냐네 집은 이 동네가 아니고 상당히 멀어서 리다랑 데이트하려고 항상 멀리멀리 오가곤 했음. 사랑의 힘인지 젊음의 힘인지)




 

 

 

 




위의 아파트들을 지나 프리발티스카야 호텔로 가는 길에 있는 아주 조그만 식료품 가게. 여기는 90년대 후반에도 있었고 나와 쥬인이 이따금 들러 트윅스 초코바나 음료수를 샀던 곳이다. 예전 발췌에서 게냐랑 리다가 트윅스나 피크닉 사러 가던 가게가 여기.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그런지 낙서도 되어 있고 문에 커다란 맥주광고도 붙어 있네... 전에는 그래도 낙서 같은 건 없었는데.

 




 





여기가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이 사진도 16년 12월에 찍었다(그러고보니 이 호텔 앞으로는 이때 간 게 마지막) 지난번 올렸던 2006년 사진보다는 훨씬 멀끔하고 좋아보이는데... 아마 카메라의 차이일지도 ㅋㅋ 이미 여기는 파크 인에서 인수해서 지금은 파크 인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이 되었다. 잘 보면 왼편 사이드에 여전히 그 전광판 시계/온도계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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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