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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했을 때 재미로 '쌍둥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그냥 편하게 '리다'라는 가제로 부르고 있는 글은 원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주 천천히 계속해서 쓰고 있다. 이제 중반부로 접어들었고 국면 전환을 앞두고 있다. 이 글 역시 쓰는 중간중간 문장들과 흐름을 다듬는 작업을 병행하는데 이건 섬세한 퇴고가 아니고 전적으로 '흐름'과 '리듬', 그리고 '단어의 중복 여부'의 시점에서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여러 줄, 이따금 몇 문단을 통째로 들어내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는데, 이렇게 들어낸 파트들은 아예 돌아오지 않거나, 때로는 좀 뒤로 배치된다. 어느 정도의 변형을 거칠 때도 있고 그대로 갈 때도 있다. 그러면 그 들어낸 파트들은 일단 쓰는 글의 맨 뒤에 첨부해 둔다. 

 

 

 

 

아래 발췌한 글은 1~2주 전 주말에 썼던 파트이다. 그리고 맨 아래 따로 떼어놓은 푸른색의 몇 줄이 바로 그런 '들어낸 부분'이다.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2층 카페에서 옛 여자친구인 리다와 재회한 게냐는 한동안 잡담을 주고받다가 결국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꺼낸다. 그리고 더 불편해진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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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다는 유리잔을 무심하게 빙글빙글 돌렸다. 얼음이 잔 안에서 부딪치며 달그락거렸다. 나는 반쯤 남아 있던 페리에를 그녀의 잔에 따라주고 식어버린 차를 마저 마셨다. 문득 이 자리가 너무나 불편해졌다. 옛날이야기를 주고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전화를 걸어왔을 때 리다는 그저 잠깐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꼭 할 얘기가 있다고. 전화로는 하기 어렵다고. 내가 아는 리다는 이런 잡담을 하기 위해 사람을 불러내는 여자가 아니었다. 친구나 애인이라면 예외지만 자기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후 4시였다. 스튜디오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직하게 물었다.

 

 

“ 리도츠카, 왜 만나자고 한 거야? ”

 

 

리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빽빽하고 두꺼운 마스카라 사이로 투명한 푸른 눈을 천천히 깜박이면서. 무의식적으로 나는 코펠리아를 떠올렸다. 인형처럼 무감각한 눈빛, 무대 분장을 연상시키는 짙은 메이크업. 그 침묵의 주시가 계속되자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불편해졌고 그냥 그녀가 본론을 꺼내놓을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마 우리가 이렇게 서로 눈을 오래 마주치는 건 오직 키스할 때와 사랑을 나눌 때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하는 커플이 아니었다. 아니, 대화의 총량은 그리 적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말하는 쪽은 대부분 리다였다. 말할 때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건 둘 다 서툴렀다. 리다는 맘먹으면 얼마든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얘기할 수 있었지만 ‘너무 간지럽잖아. 미국 애들도 아니고’하며 싫어했다. 미국을 동경하고 할리우드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쓰면서도 그랬다.

 

 

한참 후에야 리다가 말했다.

 

 

“ 넌 나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구나. 잘 지냈는지, 뭘 하며 사는지. 하나도. ”

 

“ 미안해. ”

 

 

 

 

..

 

 

 

문득 미샤의 시선이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말없이 오래 주시할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간지럽거나 오글거리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불편하다는 느낌이 든 적도 거의 없었다. 그는 원한다면 자기 시선만으로 상대방을 기분 나쁘고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고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자리에서는 거리낌 없이 그렇게 했지만 내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그의 눈빛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푸른색으로 표기된 일곱 문장은 원래는 리다에 대한 묘사, 즉 '미국을 동경하고 할리우드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쓰면서도 그랬다' 라는 문장 바로 뒤에 오는 글이었다. 기울임체까지 정확히. 하지만 다음날 그 뒤를 이어서 쓰기 전에 저 문장들을 들어냈다. 나에게 필요한 문장들이었다. 하지만 저 순간 들어가는 것이 알맞은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논리적으로는 괜찮았지만 정서적으로는, 그리고 이 인물의 특질과 성격을 생각하면 이 문장들은 나중에 등장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저 부분을 들어냈고 리다의 대사를 적었다. 그런데 여전히 저 문장들을 되풀이해 읽고 굴리게 된다. 아마 글의 속도가 늦어서 그런 것 같음.

 

 

 

보통 들어낸 부분은, 그것도 글이 완결되기 전까지는 여기 적어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쓰는 과정에 대해 잠시 적어보고 싶었다. 

 

 

 

..

 

 

 

코펠리아는 희극 발레 제목이자 거기 등장하는 인형 이름이다. 사람으로 변하는 인형. 리도츠카는 리다의 애칭이다. 리다도 리디야의 애칭이다만. 

 

 

 

맨 위 사진은 그냥 글만 발췌하자니 심심해서. 반쯤 녹은 얼음과 탄산수가 담긴 유리잔 사진을 찾는 게 귀찮아서, 글의 분위기보다는 너무 화사해보이지만, 그랜드 호텔 유럽의 아르누보 바에서 내주는 체리 벨리니. 몇년 전에 저 바에서 복숭아 벨리니를 마셨다가 생각보다 너무 독해서(내가 베네치아에서 마셨던 그 달콤하고 약한 벨리니가 절대 아니었음) 완전히 취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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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