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 금요일 밤 : 정체성 없는 우골의 기도, 이콘들, 나의 무용수를 떠나보내고, 이제는 fragments2024. 11. 22. 21:26

정교 신자도 카톨릭 신자도 아니고 사실 개신교 집안이지만 교회보다는 성당이나 정교 사원에 들어가 기도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콘은 대부분 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 수도원과 다른 정교 사원들에서 왔다. 서재 방에 작은 구석을 만들어두고(러시아어로는 끄라스느이 우골이라고 한다) 밤에 자기 전 항상 여기 와서 기도를 드린다. 묵주도 있고 이콘도 있고 목각천사인형도 있다. 정체성 없는 우골이다. 하지만 기도에 정체성이 필요할까?

이콘들은 내가 너무나 마음이 힘들 때 왔다. 나는 용기를 위해 성 게오르기(카톨릭 식으로는 성 조지)를, 그리고 마음의 평화와 의지를 위해 수호천사 가브리엘 이콘을 달라고 했다. 언젠가 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아주 작은 성 게오르기 이콘을 꼭 쥐고 있었다.
어제 발로쟈 슈클랴로프의 장례식이 있었다. 극장에 무수한 조문객들이 모였고 사원과 스몰렌스크 묘까지 따라간 분들도 많았다. 극장의 홀과 복도들을 돌고서 모두에게서 박수갈채를 받으며 떠났다. 막상 그 모습을 담은 작은 클립과 조각들을 보자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너무나 슬펐다. 즐거움도 위안도 같이 줬으니까 소중했던가보다고 친구가 위로해줬을 때 울음이 터져나왔다. 지난 토요일 소식을 들은 후 처음으로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이제 정말 보낸다고 생각하니까 울음이 북받쳤다. 이렇게 소리내어 운 건 정말 오랜만이다. 지금도 눈물이 고인다.
새벽 출근길에 기사를 보니 꽃들에 가득 싸여 스몰렌스크 묘지에 안장되는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고 게르기예프를 비롯해 그의 동료들의 추도사가 인용되어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는 그 묘지를 잘 안다. 옛날에 머물렀던 기숙사 근처에 있는 곳이다. 버스를 타고 그 옆을 지날 때마다 묘지가 있어서 좀 으스스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곳은 영화 '브랏'에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거기, 그토록 자주 지나다니던 곳에 그가 잠들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소리내 울고 나니 조금은 나아지면서 정말 잘 가라고, 평안하고 자유롭게 춤추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정말 무수한 팬들이 마음을 담아 절절하고 아름다운 인사들을 보내왔다. 그런데 나는, 말과 글 때문에 막히는 적은 별로 없지만, 아니, 말은 막혀도 글은 막히는 적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이럴 때는 모든 것이 막힌다. 어쩌면 이른 봄에 소중한 친구를 떠나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젊고 순수한 친구였다. 이토록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먼저 떠나는 것이 가슴아팠다. 아직도 자기 전에 그 친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곤 한다. 어제는 떠난 친구가 이제 발로쟈의 춤을 보며 함께 평안하고 자유롭기를 기도드렸다.
오늘도 새벽 4시에 깨어나 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주 내내 매일 몇시간 못 자서 잠도 모자라고 눈이 가물거린다. 아마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그랬던 것 같다. 떠나버린 사람을 안식과 평안으로 보내주고 나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주말에 잘 쉬면 나아지리라 믿어본다. 오늘 매우 바쁘게 일했다. 아주 힘든 회의도 진행했다. 다음주도 많이 바쁘고 어려운 하루하루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 주말에는 잘 쉬면서 몸과 마음을 위안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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