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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과정이란 지우고 고치고 돌아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아주 꼼꼼하게 갈고닦고 양생을 하고 퇴고하는 타입이 아니고, 좀더 직관적인 편이고 때로는 내용만큼 리듬을 중요하게 여긴다. 다 쓰고 나서보다는 쓰는 중간중간 고치는 비중이 더 높다. 글을 완성하고 퇴고까지 마치고 나면, 이후에는 웬만하면 고치지 않는다. 몇년 후 다시 읽었을 때 정말 심각한 오류나 오타, 비문이 발견되는 경우만 제외하면 '아 이건 정말 오글거린다' 라거나 '이 내용은 지금 보니 빼거나 이렇게 고치는 게 좋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도 가급적 그냥 놔둔다. 부득이하게 고치게 될 경우에는 손댄 연도와 날짜로 새로운 버전을 따로 만들어둔다. 실수와 부끄러움과 미성숙함이 드러난다 해도 분명 그 과거에 그렇게 쓰던 순간에는 최선을 다했고 거기에는 그 순간의 내가 온전하게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가, 혹은 미래의 내가 그 과거의 나를 수정하고 부정할 자격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미래의 시선은 별개로 하고, 쓰는 과정에서, 그리고 쓰고 난 직후의 퇴고 과정에서는 물론 단어와 문장, 때로는 문단들과 에피소드들을 고치고 더 심한 경우에는 아예 들어낸다. 그런 문장과 문단들은 완전히 삭제되는 경우도 있고 보완되거나 새롭게 구성되어 다른 식으로 녹아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 이후에는, 분명 맨 처음 쓰는 순간의 감각에 부합했기에 나타났다가 정련의 과정에서 잘려나가 바닥에 남은 것들이 생겨난다. 사금을 체로 쳐내고 남은 모래알들. 오랜 옛날 펜으로 노트에 썼을 때는 지우개나 화이트로 지웠기 때문에 그런 흔적들은 사라져버리곤 했다. 사실 이제는 노트로 쓴 글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으니 차이가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기술의 덕을 볼 수 있다. 삭제한 부분들 중 대부분은 모아둔다. 그 파편들 역시 쓰는 과정이고 또 선택받지는 못했을지라도 모종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아래 접어둔 문장과 문단 몇 개는 작년 말에 마친 중편을 쓰는 중, 그리고 퇴고의 과정에서 잘려나간 파편들이다. 발췌한 내용들이 전부는 아니다. 조금 더 있다. 나는 이것들에 '구름 파편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설의 제목에 '구름'이란 단어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파편들은 이대로 남을 수도 있고 이후에 올 다른 글들에서 새롭게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 혹은, 이미 퇴고 과정에서 조금 다른 식으로 보완되고 재구성되어 녹아들어간 부분도 있다. 말 그대로, 파편들이다. 순서는 뒤섞여 있다. 물론 나는 이 글들을 쓰고 삭제한 순서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구름 파편들이 된 이 시점에서 그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구름 파편들 : 삭제한 문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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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그가 미안하다고 하기 전에 키스를 하는 것처럼. 그 키스로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 것처럼.

 

 

 

 

*   *   * 

 

 

 

 

 미샤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갔었다. 런던도 원래 12일로 다녀오려다 일정이 늘어났던 거라서 옷가지도 별로 챙겨가지 않았다. 아침 일기예보에서 모스크바에는 눈이 온다고 했었다. 눈 오는 쉐레메티예보 공항과 비가 쏟아지는 풀코보, 어느 쪽이 더 최악인지 모르겠다. 아마 우산도 가지고 있지 않겠지. 어딜 가든 우산이나 스카프를 잃어버리는 사람이니까. 우리 집에도 그가 놓고 간 우산이 두 개나 있었다. 그 트렌치코트는 리다가 스크랩할 만큼 값비싸고 근사한 옷이지만 이런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런던은 여기만큼 춥지 않았으니 두툼한 코트를 새로 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냥 맞고 다녔을 것이다. 하와이와 레닌그라드 운운하며 캔버스화를 야단칠 자격이 없는 인간이다. 폐렴이 도지든 말든 그냥 그렇게 다니겠지. 갈런드는 그가 어떤 옷을 입고 갔는지, 캐리어에 뭘 챙겨갔는지 모를 것이다.

 

 

 

 

*   *   * 

 

 

 

 

나는 그가 여자친구를 두어 달마다 갈아치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나와 미샤의 관계를 안다는 것도.

 

 

 

 

*   *   * 

 

 

 

 

 반쯤은 오기로. 미샤는 차를 좋아했다. 키라와 내가 가장 차를 잘 우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갈런드가 우려준 차는 구정물 같다고, 미국인들은 차를 우릴 줄 모른다고 했다. 똑같은 티백이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내가 우려준 립톤이나 라벨 없는 싸구려 티백도 군소리하지 않고 잘 마셨다.

 

 

 

 

 

*   *   * 

 

 

 

 

 

 “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생각지 않게 뒷좌석의 긴 머리 여자애가 불쑥 물었다.

 

 

 

 

 

*   *   * 

 

 

 

 

 

 

 리다는 내가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파나소닉 오디오를 켰을 뿐이었다. 아마 라디오였을 것이다. 잠깐 잡음이 섞이더니 이내 노래가 흘러나왔다.

 

 

 

Hallo, Spaceboy, you're sleepy now

Your silhouette is so stationary...

 

 

 

 내가 채널을 돌리려고 했을 때 리다가 내 손을 가볍게 탁 쳤다.

 

 

 

 “ 놔둬. 나 이 노래 좋아. ”

 “ 난 별론데. ”

 “ 예전엔 보위 싫어하지 않았잖아. ”

 “ 이 노래는 별로야. ”

 “ , 너무 게이 같아서? 보위 하나로도 넘쳐나는데 펫 샵 보이스까지 얹었으니까? ”

 “ 펫 샵 보이스가 피처링한 건 줄 몰랐어. ”

 

 

 

 

Don't you want to be free

Do you like girls or boys

It's confusing these days

But Moondust will cover you

And the chaos is killing me

 

 

 

 

 

*   *   *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얘기 중에 나왔던 말이었지만 난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었으니까. 어쩌면 그건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얘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   *   * 

 

 

 

 

 

 마스카라와 아이라인을 지우면 예전의 그 짓궂고 활기찬 광채가 되살아날 것 같았다

 

 

 

 

 

*   *   * 

 

 

 

 

 

 문득 미샤의 시선이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말없이 오래 주시할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간지럽거나 오글거리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불편하다는 느낌이 든 적도 거의 없었다. 그는 원한다면 자기 시선만으로 상대방을 기분 나쁘고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고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자리에서는 거리낌 없이 그렇게 했지만 내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그의 눈빛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사진은 몇년 전 겨울, 아스토리야 호텔 카페 로툰다. 내 기억 속에서 아주 차갑고 흐릿한 안개로 휩싸여 있는 시기이다. 저때 나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았다. 저때는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아마 그날의 메모를 적으려고 가지고 내려갔거나, 쓰려고 구상만 했지만 도저히 손댈 수 없는 글을 만지고 있었을 것이다. 완성된 글에서 나온 파편들과 마찬가지로, 쓰기 전의 구상 과정에서도 무수한 파편들이 생겨난다. 그 파편들을 엮어내는 과정은 지난하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한다. 영영 시작하지 못하기도 한다. 

 

 

 

사실 오늘 새 글을 시작해보려 했는데 아직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쓰는 과정'을 떠올리다 적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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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