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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26. 15:31

순간온수기, 여기 + about writing2023. 2. 26. 15:31

 

 

 

 

 

작년 말에 마친 중편 후반부 일부를 발췌해본다. 주인공 게냐가 자기 원룸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면서 순간온수기와 '여기'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의 배경은 1997년 11월, 페테르부르크이다. 발췌문은 접어둔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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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누 거품이 눈에 들어가서 따갑고 쓰렸다. 때맞춰 온수가 끊겼다. 급속도로 차갑게 식어버린 물로 머리와 눈만 씻어낸 후 대충 타월로 몸을 닦았다. 순간온수기를 달았어야 했다. 리다는 내가 이 집을 얻어 독립해 나왔을 때 뛸 듯이 좋아했지만,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독일제 필터가 부착된 샤워기와 순간온수기를 설치해야 한다고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난 괜찮은데, 어차피 욕조도 없고, 샤워는 금방 하니까라고 대꾸하면 리다는 토라져서 너는 남자니까 괜찮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야라고 투덜댔다. 바쁘고 귀찮다는 이유로 나는 결국 순간온수기를 설치하지 않았다. 아르다노프의 별장과 저택에는 신형 배관들로 무장하고 대리석과 금장으로 장식한 욕조들이 넘쳐나겠지, 순간온수기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녹물은 전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미샤는 녹물이나 띄엄띄엄 나오는 온수 같은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판탄카 자택에는 언제든 온수가 나오는 욕조와 자쿠지까지 딸린 욕실이 두 개 있었고 심지어 발레단 스튜디오에도 배관을 교체해 제대로 설치한 샤워부스를 따로 만들어 두었지만 여기 오면 찔끔찔끔 나오는 찬물로도 잘 씻었고 녹물 때문에 불평을 하지도 않았다. 리다가 투덜거릴 때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미샤가 폐렴에 걸렸을 때 나는 처음으로 순간온수기를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실에서 나오자 차디찬 바람과 몰아쳐 들어오는 빗방울 때문에 온몸에 오한이 일었다. 창문을 닫고 손에 잡히는 티셔츠와 복서를 주워입으면서 나는 갑작스럽게 깊은 분노를 느꼈다. 그가 단 한 번도 이 집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판탄카 자택과 모스크바의 신형 아파트, 어느 부호가 선물해 준 지중해 섬의 작은 별장, 가는 곳마다 초청받는 고급호텔의 좋은 방들,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기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전혀 이질적으로 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내가 창문을 열든 말든 개의치 않았고 이웃집들로부터 양파와 감자가 기름에 타는 냄새, 이상한 향신료 가득한 스튜와 묵은 양배추 수프 냄새가 스며들어오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소음, 술주정뱅이의 구역질 소리, 안뜰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욕설과 비명이 흘러들어와도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베란다 건조대에 널어둔 빨래를 내가 그대로 잡아채 입을 때도 아무런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옷도 이따금 거기다 걸어두었다. 내 방 옷걸이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강풍이 몰아쳐 스카프가 맞은편 건물의 어느 베란다로 날아가 버렸을 때도 웃기만 했다. 리다였다면 내 에르메스!’ 하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을 것이다.

 

 

 

 아마 그건 이곳이 여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옆집 노파와 아랫집 창녀에게 정중하게 굴고 녹물로 샤워를 하고 스프링이 거의 없다시피 한 얄팍한 매트리스가 깔린 좁은 침대와 올 풀린 담요가 아무렇게나 걸쳐진 낡은 소파에도 리츠와 에브로파의 고급 침대라도 되는 양 거리낌 없이 눕는 건, 역설적으로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차피 자기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고 그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를 바랐다. 차라리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이 낫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보다는.

 

 

 

 나는 얼마 전 지하철역 근처 가전제품 가게에 순간온수기를 보러 갔었다. 그리 비싸지 않고 나빠 보이지도 않는 물건을 발견했지만 사지는 않았다. 필요도 없는 브리타 필터만 샀다. 아마 나는 끝까지 순간온수기를 달지 않을 것이다. 리다에게 보여주었던 불공평한 무신경함 대신 분노와 고의로.

 
 
 
 

 

 

 

 

 

 

 

 

...

 

 

 

 

첫 문단에 언급되는 아르다노프는 리다의 남편 이름. 에브로파는 그랜드 호텔 유럽이다. 게냐가 순간온수기를 보러 갔던 지하철역 옆 가게에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 나도 몇번 갔고 거기서 브리타 간이 정수기와 필터, 그리고 큰맘먹고 테팔 전기포트를 샀었다. 

 

 

 

사진들은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만, 하여튼 팔로우하는 인테리어 sns들의 알고리즘이 가져다준 욕실 사진 두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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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