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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마친 글은 1970년대 레닌그라드에서 여러 인물들이 맞이하는 새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금은 퇴고 중이다. 몇년 전에 쓴 소설과 시간/공간/인물이 거의 겹치기 때문에 그 글을 중간중간 다시 뒤적여보면서 썼다.

 

 

아래의 짧은 이야기는 그 예전 소설의 후반부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소설은 3인칭으로 썼지만 심리적 화자는 트로이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렌즈로 기술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심신이 소진된 미샤와 그런 그를 카를로비 바리로 데려가는 모스크바 출신 안무가이자 절친한 벗인 일린, 그리고 트로이에 대한 짧은 에피소드이다.

 

 

소피야는 미샤의 예술계 지인. 카라바노프는 미샤의 파트너인 지나이다의 약혼자이며 트로이의 동료 교수.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는 일린의 이름과 부칭이다. 카라바노프는 일린과 막역한 사이가 아니므로 예의를 갖춰 부칭까지 챙겨 부른다.

 

 

사진은 판탄카 운하.

 

 

발췌문은 접어두었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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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0월 마지막 주에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갑작스럽게 레닌그라드로 왔다. 기차나 버스, 자동차가 아닌 첫 비행기를 타고 안개에 잠긴 풀코보 공항에 내렸다. 그때 미샤는 이콘 복원가 소피야와 함께 자기 집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고 있었다. 밤새 쉬지 않고 열띤 토론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마르크 카라바노프가 지나이다를 깨울까 봐 조심하며 침실에서 나와 학교로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일린이 초인종을 눌렀고 작은 여행 가방을 경쾌하게 끌며 안으로 들어왔다. 카라바노프가 반가워하며 약혼녀를 깨우겠다고 하자 일린은 지나이다와는 어제 통화했으니 피로에 찌든 발레리나 아가씨를 조금이라도 더 자게 내버려 두라고 만류했다. 그 모스크바 안무가는 곧장 거실로 갔고 소피야의 곁에서 자고 있던 미샤를 흔들어 깨웠다. 그날 학교에서 트로이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면서 카라바노프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자네도 알지? 아침에 미하일 깨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으니까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가 이마를 찰싹 갈기던데. ‘그만 일어나지, 잠꾸러기!’ 라고 버럭 소리쳤어. 꼭 피오네르 교관처럼. ”

 

 

 

눈을 뜬 미샤가 멍하게 일린을 쳐다보다가 꿈이라고 착각한 듯 다시 소피야의 따뜻한 몸에 기대며 자려고 했다. 일린은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고 억지로 욕실까지 끌고 갔다. 카라바노프가 도와주기까지 했다.

 

 

 

 난 이제부터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를 존경하기로 했어. 15분 만에 다 해치웠어! 깨워서 칫솔을 물리고 머리랑 얼굴에 물을 끼얹게 하더니 가방에 옷만 몇 벌 쑤셔 넣은 후 데려갔어. 보통 때 같으면 두 시간은 걸렸을 걸. 미하일은 잠도 덜 깨고 정신도 못 차려서 신발끈 매다가 두 번이나 넘어졌어. 스카프도 현관에 흘리고 갔어. ”

 

 어디로 갔는지 알아? ”

 

 어디랬더라. 내가 물어봤는데... K로 시작되는 지명이었는데... 키슬로보드스크? 카를로비 바리? 하여튼 온천 쪽이었어.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가 처음에 미하일을 좀 야단쳤거든. 그 상냥한 사람이 화내는 건 처음 봤어. 별로 무섭지는 않았지만. ”

 

 왜 화를 내? ”

 

 아픈 줄 몰랐었나봐. 휴가 받았다는 것도 안지 며칠 안 됐고. 그것도 지나가 전화해줘서 알았던 것 같아. 자기한테 얘기 안 했다고 야단치더니 모스크바에 열흘이나 있었으면서 연락 안 했다고 또 꾸짖고, 또 뭐라고 했더라. , 몸을 혹사시킨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했지. 그러니까 미하일이 자기는 아픈 데도 없고 일주일 후에 다시 극장에 나갈 거라고 했어. 자다 일어나서 뜬금없이 야단맞는 사람치곤 별로 화난 것 같지도 않았어. 와줘서 반가워하는 것 같던데. 그 친구는 심지어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어.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가 시키는 대로 가방을 싸더니 얌전하게 따라가더라고. 난 미하일이 그렇게 온순하게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 ”

 

 

 

트로이는 그날 자신이 맡은 수업 두 개를 모두 휴강하고 판탄카 운하 주변을 맴돌았고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이른 저녁부터 뒷골목의 어느 선술집에 처박혀 술을 마셨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보드카와 포트와인과 맥주를 뒤섞어 마셨던 것 같았다. 몇몇 남자들과 합석했던 것 같았다. 나토 뒤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이 꾸미고 있는 계략과 각 집단농장의 보드카 제조 기술, 브레즈네프가 숨기고 있는 불치병에 대한 음모이론 따위의 얘기가 오갔던 것 같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가느다란 달빛 외에는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는 습기찬 운하변의 돌계단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의 곁에는 비슷한 처지의 주정뱅이 두어 명이 콧노래를 부르며 옆으로 누워 뒹굴고 있었다. 그는 악취를 풍기며 철썩이는 검은 물을 오랫동안 내려다보면서 세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했다. 하나는 지금 몸을 일으키면 틀림없이 토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10월 말인데도 바깥 공기가 전혀 춥지 않다는 것. 마지막은 뜨겁고 무딘 살의였다. 하지만 그게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수께끼 같은 스타니슬라프 일린인지, 따분하기 그지없는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자신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고도 모자라 끝없이 그를 괴롭히고 그의 몸과 마음을 태워대는 남자, 그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미샤 야스민인지. 아니면 셋 다인지. 그는 가장 쉬운 결론부터 내렸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고 돌계단 위에 토했다. 그러자 찌르는 듯한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에 춥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취기 때문이었다는 두 번째 결론을 얻었다. 순찰 경찰들의 플래시가 다가오기 전에 그는 몸을 일으켰고 비틀거리며 운하를 따라 대로 쪽으로 나갔다. 집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 힘들어서 그는 세 번째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다.

 

 

 

 

 

 

 

 

 

일린이 미샤를 데리고 간 곳은 카를로비 바리이다. 체코의 유명한 온천 휴양지이다. 13년에 갔을 때 찍은 사진 두 장. 나에게는 글쓰기에 있어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 이유는 이미 몇차례 쓴 적이 있고 사진 아래 링크의 글에도 조금 적혀 있다.

 

 

 

 

 

 

 

위의 이야기는 이번에 마친 글의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이곳을 언급하기 때문에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발췌해 보게 된 것이다. 미샤에게 카를로비 바리는 대조적인 두가지 기억이 상존하는 장소인데, 스비제르스키가 다분히 이기적이고 정략적인 이유로 그를 데려가 휴가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고 여기 발췌한 이야기에서처럼 절친인 일린이 친구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데려가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일린은 전자의 기억에 대해서는 전혀 모름. 지난 봄에 마친 글인 '밤, 레닌그라드'에서도 미샤가 스비제르스키와 보냈던 그때의 기억을 잠시 되살리기도 했다.

 

 

예전에 위의 발췌글의 앞부분만 올리면서 카를로비 바리에 갔던 진짜 이유에 대해 적었던 적이 있다. 소설을 쓰는 과정과 카를로비 바리, 비엔나라는 장소에 대한 얘기였다. 링크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5541

 

 

오늘 올린 발췌문에는 일린이 미샤를 데려가는 얘기에 더해 그 뒤에 이어지는 트로이의 이야기가 추가되어 있다.

 

 

 

 

 

판탄카 운하변 사진 몇 장 더. 판탄카 운하를 따라 걸을 때면 나는 보통 트로이와 알리사를 떠올린다. 특히 난간과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 오목하게 패인 작은 공간,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술병들은 내게 트로이와 결부되는 주요 이미지들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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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