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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쓰고 있는 게냐와 리다의 이야기는 9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의 러시아, 그중에서도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 당시에 대한 여러 기억들을 복합적으로 반영하고 재구성하고 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시기에 대한 기억들이 실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쓰는 데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고 있긴 하지만 글 자체가 어렵기 때문은 아니고 일하면서 주말에만 조금씩 쓰다 보니 진도가 참 느릿느릿... 그래도 추석연휴까지는 3부를 모두 마치고 에필로그에 가까운 4부에 진입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하지만 오늘도 피곤하게 뻗어 있느라 한 줄도 못썼어ㅜㅜ) 

 

 

 

 

아래 발췌한 부분은 3부,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바닷가와 호텔 바로 근처에 있는 리다네 엄마 집으로 들어온 게냐와 리다의 이야기 약간. 리다가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라 게냐도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다.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997년 11월. 그리고 둘이 사귀었던 시기는 1992년에서 94년 즈음이다. 파블로프스크는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녹지가 많은 아름다운 곳으로 옛날부터 귀족들과 부자들의 별장이 많은 곳이다. 다차는 별장.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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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은 비어 있었다. 예전에 그렇게 자주 드나들었던 곳인데도 완전히 다른 집처럼 느껴졌다. 소파나 테이블은 그대로였지만 번쩍거리는 커다란 소니 텔레비전과 새 비디오, CD와 카세트 더블 데크 플레이어가 딸린 최신형 오디오, 금빛 장식 테두리의 마호가니 옷장 따위가 거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리다는 어머니가 파블로프스크에 있는 다차에서 지낸다고 했다. 이 집에는 거의 1~2주에 한 번 정도밖에 들르지 않는다고.

 

 

 

 “ 다차? 이제 겨울인데? ”

 

 “ 겨울엔 더 좋아, 새로 지은 곳이거든. 우리 다차 옆에 있어. 그이가 두 채 지어서 엄마한테 하나 선물했어. 시내는 아무래도 재건축을 해도 좁잖아, 말만 다차지 그냥 새 아파트야. 얼마나 넓고 깨끗하다고. 엄마는 궁전이라고 불러. ”

 

 

 

 리다는 모피코트를 현관 옆의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어 놓고는 갈아입을 옷을 꺼내러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따라 들어가는 대신 거실에 서 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리다의 침실 안쪽이 그대로 보였다. 그 방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침대도,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일본어와 한국어 교본들도, 심지어 벽에 붙어 있는 신디 크로포드와 린다 에반젤리스타의 포스터도 그대로였다. 저 브로마이드는 내가 유럽 투어를 갔을 때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사다 주었던 것 같다. 그녀는 슈퍼모델들을 좋아했고 사진을 스크랩했었다.

 

 

 

 나는 지난번 뉴욕 투어에 갔을 때 어느 파티에서 케이트 모스를 만난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얘기를 해주면 리다가 좋아하겠지, 손뼉을 치고 눈을 반짝거리며 정말? 너무 좋았겠다! 예뻐? 멋져? 어땠어?’하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하는지 안다. ‘글쎄, 왜 그렇게 유명한지 모르겠어. 별로 안 예뻐, 너보다 작고 볼품없어. 네가 더 예뻐라고 말해야겠지. 그러면 리다는 바보, 패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라고 대꾸하며 더 환하게 웃을 것이다. 모스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그녀가 파티에서 무엇을 마시고 먹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물어볼 것이다. 나는 후자의 질문들에는 대답할 수 있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침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가 아니라 미샤를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왔던 거니까. 나하고도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그건 그냥 어느 파티에서나 이루어지는 가벼운 인사, 스쳐 지나가는 소개일 뿐이었으니까. 그녀는 미샤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고 심지어 그의 팔에 매달려 사진도 찍었다. 헐리우드 배우와 사귀고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톱모델이 미샤를 보고는 록스타 앞의 그루피처럼 들뜬 눈빛으로 포옹을 했다. 어쩌면 그것도 철저히 계산된 포즈였을지도 모른다, 잡지에 실린 그 파파라치 스냅 사진이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이다. 미샤와 친분을 과시하는 건 영화배우나 록스타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훨씬 쿨하고 고상해 보일 테니까, 소위 말하는 고급예술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리다의 마음에 들지 않겠지. 차라리 이런 얘기가 낫겠다. 그녀는 마약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발레리나들보다도 더 깡마르고 볼품없이 야윈데다 두 눈이 퀭했다. 리다의 스크랩 속 슈퍼모델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런데도 최고의 모델이라고 했다. 파파라치들이 끊임없이 따라붙었다. 문득 나는 리다가 이제 더 이상 에반젤리스타나 크로포드의 사진을 모으지 않을 거라고, 아마 그녀는 케이트 모스를 따라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퀭한 눈, 날카로운 광대뼈. 야위고 지친 얼굴. 마약중독자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근사한 유행이니까. 흑발 보브 컷과 마구 번진 스모키 메이크업. 남편이 부추겨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가 그렇게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리다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찢어진 스타킹과 니트 드레스를 벗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문득 어색해져서 부엌으로 갔다. 테팔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 스위치를 켰다. 언젠가 딱 이렇게 초겨울 비가 쏟아지던 날 차를 마시러 잠깐 들어왔다가 섹스를 하느라 가스렌지에 올려뒀던 법랑 주전자를 새까맣게 태웠던 기억이 났다. 타는 냄새를 맡은 내가 , 젠장. 주전자!’ 하고 투덜대자 리다는 넌 이 상황에 주전자가 중요하니? 불 안 나. 가만히 있어하고 짜증을 냈었다. 그때도 리다는 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내 허리를 껴안고 있었다. 일이 끝난 후 우리는 함께 주전자를 박박 문질러 닦았지만 검댕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복구가 되지 않았다. 리다는 프리모르스카야 시장에서 똑같이 생긴 주전자를 구해와서 어머니 몰래 바꿔쳐 놓았다. ‘울 엄마 이런 거 몰라라고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나는 주전자에 물을 올리면서 우리 엄마는 알 텐데. 이건 뚜껑이 찌그러졌잖아라고 대꾸했다. 하긴 리다의 어머니에겐 뭐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주전자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물을 끓일 수 있으니까.

 



 

 

 

 

..

 

 

 

 

 

 

 

 

90년대는 그야말로 슈퍼모델들의 시대였다. 케이트 모스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기 전까지는 역시 나오미 캠벨, 린다 에반젤리스타, 클라우디아 쉬퍼 등등이 주름잡았는데 나는 시크한 린다 에반젤리스타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여학생들은 잡지를 펴놓고 신디 크로포드의 화보를 보며 '정말 너무 예쁘다~'를 연발하곤 했다(그러다 신디 크로포드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는 너무 폭망 영화라 참 안타까워했었다 ㅋㅋ) 

 

 

 

유명한 흑백 화보 한 장. 순서대로 나오미 캠벨, 린다 에반젤리스타, 타티아나 파티즈, 크리스티 털링턴, 신디 크로포드. 

 

 

 

저렇게 늘씬하고 섹시하고 글래머러스한 슈퍼모델들의 시대는 케이트 모스가 나타나면서 저물었던 것 같다. 나에게 케이트 모스는 모델보다는 '조니 뎁 여자친구'로 먼저 각인되었으니 나는 확실히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자는 아니었음 ㅋㅋ 케이트 모스 사진도 두 장. 캘빈 클라인부터 시작해 모델 화보는 워낙 웹에도 많고 유명하니, 게냐가 파티에서 만났을 때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스타일로 두 컷. (그건 그렇고 케이트 모스씨, 소설에 맘대로 등장시켜 죄송합니다) 

 

 

 

 

 

 

 

 

 

 

 

그리고 맨 위 사진은 게냐랑 리다가 태워먹었던 법랑 주전자랑 비슷하게 생긴 사촌 주전자. 나도 페테르부르크 기숙사에서 법랑 주전자랑 냄비를 썼는데 얼마 후 큰맘먹고 테팔 전기포트를 장만해 매우 행복해졌음. 법랑냄비는 종종 아래를 태우거나 그슬려먹었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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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