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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오후, 빌니우스의 유명한 우주피스 공화국(빌니우스 예술가들이 공화국이라고 칭하며 만든 동네)의 어느 베이커리 카페 야외테이블에서. 아포가토, 레모네이드, 비스코티 닮은 건 게으름뱅이 케익(양귀비씨 버전), 그리고 견과 타르트. 아포가토와 레모네이드 함께 있다는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뜻! 드디어 3년 반만에 세 번째로 조우한 영원한 휴가님과 함께! ‘인스타 스타일로 찍어봅시다~’ 하고 내가 찍었음 ㅎㅎ ‘대충 찍고 귀퉁이를 좀 자르면 됩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



어제 피곤하게 곯아떨어졌다가 5시 즈음 시차 때문에 다시 깼다. 두세시간 뒤척이다 도로 잠들어서 온갖 꿈을 꾸다 10시 다되어 일어났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아직도 붉은 군대의 고통이 몰려와 약을 먹기 위해서는 뭔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충 씻고 정오 즈음 밖으로 나갔다. 당초 빌니아우스 거리의 티샵에 들르고 그쪽을 따라 쭉 걸어가 보키에츄 거리에 가면 먹을 곳이 많겠지 했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식당이나 카페가 나오지 않고 길이 널찍하고 뭔가 황량했다. 알고보니 한 블록 더 앞에서 내가 꺾어서 길을 잘못 들었음. 헤매다 어찌어찌 보키에츄 거리에 찍어두었던 유명한 디저트 카페에 도달했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 맞은편에 있는 크루스툼이라는 다른 베이커리 카페에서 크루아상과 차로 아점을 먹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하늘이 파랬고 해가 쨍해서 심지어 선글라스를 꺼내서 썼다. 가방 꾸릴 때 선글라스 챙기면서도 비 올 것 같은데 두 개나 챙기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이렇게 꺼내 쓰게 되니 뿌듯했다. 피곤해선지 오늘따라 얼굴과 눈이 팅팅 붓고 다크 서클이 퀭해짐(연착부터 온갖 일을 겪어서 그럴 만도 함) 크루아상 먹은 후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또 길을 잃음. 그러다 아주 작고 예쁜 정교 사원을 발견했다. 다른 카톨릭 교회들이 너무 크거나 소란스러워서 안에 들어가다 말곤 했는데(그래서 초를 켜지도 못함) 이 사원은 정말 작았고 또 아주 조용했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초를 사서 가족과 나, 그리고 지금 많이 아픈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나왔다. 나중에 영원한 휴가님 말씀으론 여기가! 푸쉬킨의 선조가 세례를 받은 곳이라고 함. 몰랐는데... 또 가야겠다.

 




사원에서 나와서 옷이 불편하니 호텔에 잠깐 돌아가 갈아입어야겠다 하던 차에 영원한 휴가님 메시지를 받고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호텔로 돌아가는데 이때도 여지없이 구글맵을 켰는데도 길을 잃고 헤매며 온갖 골목을 잘못 들어갔다가 간신히 종탑과 대성당을 보고 길을 찾아서 게디미나스 대로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와 잠시 쉬고 있는데 영원한 휴가님이 호텔 앞으로 오셨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우리는 맨 처음 5년 전에 드레스덴의 dm 앞에서 조우하고(나는 프라하, 영원한 휴가님은 베를린 여행 중이어서 중간지대인 드레스덴에서 급번개로 만났음), 두 번째로는 서울의 이문동에서, 그리고 3년 반 만에 그것도 빌니우스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아마도 프라하나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ㅎㅎ



신기하게도 동양인이라고는 아무리 봐도 눈에 띄지 않는 빌니우스의 도심 가장 큰 대로변에서 영원한 휴가님을 다시 만나니 뭔가 반가움과 함께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너무 반갑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영원한 휴가님의 인도를 따라 골목들을 거닐고 우주피스에도 갔다. 우주피스는 아껴두고 있었는데 어쩐지 영원한 휴가님이 알려주실 것 같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우주피스 언덕길을 올라가 저 작은 빵집 앞의 역시 작은 야외테이블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타르코프스키 영화와 노변의 피크닉, 솔라리스 얘기도 잔뜩!), 유명한 우주피스 헌법이 각국어로 씌어 있는 것도 보고, 무슨 거리 또 무슨 거리도 돌아다니고, 내가 궁금해했던 빌니우스 대학 안마당에도 잠깐 들어가고, 너무 아늑하고 이쁜 헌책방에도 들어가 보고... 그리고는 스티클루(? 이름 정확하지 않음) 골목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아 거한 저녁을 먹었다. 레드 와인 1잔, 생선수프, 까망베르 치즈 샐러드, 블루치즈가 들어간 버거, 콘 치킨 요리(껍데기를 바삭하게 구운 닭고기였음)를 시켜서 ‘이걸 다 먹으려면 몇시간은 먹어야 할텐데요’ 라고 했지만 다 먹음 ㅋㅋ



그리고 게디미나스 대로의 이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1개씩 사서 먹고(나는 리투아니아산 에스키모 비슷한 초코 입힌 우유맛 하드를 고름), 내가 가져온 책 몇권과 먹거리 약간을 챙겨드리는 것을 핑계로 호텔 방에 올라와 함께 도라지 차를 한잔씩 마시고 얘기를 조금 더 나눈후 이미 밤이 너무 늦어 영원한 휴가님께서는 택시를 타고 귀가하셨다. 사실 시간 내기가 정말 쉽지 않으셨을 텐데 오후부터 밤까지 통째로 함께 있어 주시고 봇물 터지듯 즐겁게 이야기를 나눠주신 영원한 휴가님께 너무 감사했고 정말 너무 기뻤다. 이곳을 알게 해주시고 결국 와볼 수 있게까지 해주신 것도 :)



원래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나 정신없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사진 같은 건 찍을 겨를이 없다. 그래서 오후 사진들은 거의 없다. 그저 행복감과 충만함만 가득 남는다. 밥 먹고 돌아 나오는 길에 파란 하늘에 동동 뜬 벌룬들을 봤다. 사진으로 봤을 땐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하늘 위에 무게 없이 구름처럼 떠 있는 벌룬들을 보니(사람들이 실제로 탄다고 함! 꺅!)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너무 높아서 폰으로 찍었더니 깨알만하게 나와서 사진은 안 올림. 오늘은 그 벌룬 같은 하루, 그런 기분이었다.


** 추가


오늘의 앱을 보니 정말 많이 걸었다. 총 12킬로, 18,907걸음이라고 나온다. 기록임. 아점 먹으러 가서 헤매면서 6킬로, 나중에 영원한 휴가님 만났을 때 또 그 정도 걸은 듯 :) 그런데 반가움 때문인지 와인 한 잔의 술기운 때문인지 오늘은 어제보다 다리도 덜 아픈 느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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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