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수요일 밤 : 옛 기억들과 함께 산책, 카페들, 인도 식당, 호텔 바 +

사진은 마네수프 다리 근처 블타바 강변의 난간에 당당하게 앉아 있던 비둘기. 비둘기 주제에 꼭 까마귀처럼 늠름하게 앉아 있는 것이 귀여워서 찍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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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서 처음으로 중간에 안 깨고 여섯시간 반 이상 내리 잤다. 한국에서도 보통 4~5시간 지나면 중간에 깨므로 이건 선방임. 그래도 더 자고 싶었지만 아주 얕게 20여분 더 잠들었을 뿐 계속 뒤척이다 일어났다. 아침에 꽤 추웠다. 분명히 오늘 해가 난다고 했는데, 조식 먹고 호텔 문 앞에 나가보니 바람이 불고 하늘이 흐리고 추웠다. 기온은 1도라고 하는데 스산해서 더 춥게 느껴졌다. 그래서 얇은 니트에 후드짚업에 지퍼 달린 기다란 코트, 기모바지와 스카프로 무장하고 방을 나섰다.
오늘부터 돌아가는 날까지는 쉰다. 그래도 방을 나서기 전에 30여분 정도 밀린 업무메일을 확인했다. (그동안 바쁘기도 했고 몸도 안 좋아서 메일은 보지도 않았었다) 다행히 아주 크리티컬한 일들은 없었지만 몇십통의 메일을 확인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해가 나고 날씨 좋댔는데 흐리고 추우니 어딜 가야 할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일단 에벨에 가기로 했다. 에벨의 문제는 자리가 없으면 망연자실하게 된다는 건데-주변에 갈 곳이 별로 없고 강변 근처라 춥다. 갈 곳이 아예 없진 않지만 그래도 에벨을 두고 다른 카페 가기는 싫다- 다행히 자리가 있어서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시고 나왔다.
에벨에서 나왔을 때도 싸늘했고 흐릿한 잿빛 안개가 블타바 강 위로 얄팍하게 한겹 깔려 있었다. 꼭 망사 필터가 내리덮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길을 건너서 노란 낙엽 가득한 강변을 좀 산책했다. 마네수프 다리에서 카를 교에 이르기 좀 전까지 걸었고, 카를 교에는 가기 싫었기 때문에 중간에 다시 길을 건넜다. 원래는 요세포프 쪽을 산책할까 했는데 강변을 산책하고 나니 플라트네르슈카와 마리안스케 광장, 후소바 거리 쪽이 나왔다. 이때쯤 하늘이 개면서 해가 약간 나기 시작했다.
이쪽 거리는 추억이 가득한 동네이다. 13년 2월에서 4월 초까지 릴리오바 거리의 아파트에 살았고 구시가지 광장이든 요세포프든 나로드니 트르지다든, 어디를 가든 이쪽 골목들을 매일같이 지나다녔다. 그 이후에도, 프라하에서 료샤를 몇 번 만나면 마리안스케 광장의 석상 아래에서 보자고 하곤 했다. (우리는 다스베이더라고 불렀었다) 몇 년 전 이맘때 다시 프라하에 왔을 때 레테조바와 릴리오바를 걷자 어쩐지 허전했고(카페 에벨도 사라지고 내가 살았던 집을 보는 것도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그래서 그다음에 엄마랑 왔을 때와 이번 여름에 왔을 때는 아예 이쪽 동네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발걸음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예전에 지냈던 골목들, 마리안스케 광장과 후소바, 레테조바, 릴리오바, 베틀렘스카 등을 모두 지나가게 되었다. 사라진 가게들도 많고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동생과 함께 구식 펌프를 잡아당기며 사진을 찍었던 베틀렘스카 사원 앞의 그 펌프도 그대로 있었다. 지나가던 관광객 노부부도 역시 손잡이를 당겨보며 ‘물이 안나오는구만’ 하고 웃었다. 그런 펌프는 아무리봐도 한번 당겨보고 싶게 마련이다.
베틀렘스카를 지나서 거슬러올라가면 나로드니 트르지다가 나온다. 나는 항상 그 길을 따라 테스코 수퍼에 장을 보러 가곤 했었다. 오늘도 테스코 수퍼에 들렀다. 여기가 이쪽 동네에선-그러니까 관광지에선- 제일 큰 수퍼이다. 예전엔 고기와 주스와 과일, 감자 등 식료품을 바리바리 사던 곳이었다. 오늘 나는 생수와 페일 핑크 거베라 한 다발을 샀다.
물이 무거웠고 거베라는 꽃송이도 크고 대가 길어서 에코백을 든 채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점심 때이기도 했고 짐도 있으니 숙소 바로 근처인 브 야므네 거리의 인도 식당에 들러 식사를 했다. 여기는 런치 메뉴도 있고 뷔페도 있어서 안쪽 홀은 뷔페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나는 뷔페는 딱히 즐기는 편이 아니고-본전 뽑지도 못해서- 그냥 런치 메뉴 중 하나를 골랐다. 뷔페는 200코루나부터라고 되어 있고 런치 중 내가 시킨 치킨 티카 마살라 + 플레인 난(밥도 고를 수 있는데 나는 난을 시킴)은 185~195 코루나 정도였던 것 같다(그새 까먹음). 다른 곳들과 비교하면 가성비가 나쁘지 않다. 여기 라즈베리에이드를 추가해서 먹었다. 지난 여름엔 여기서 런치로 빈달루를 먹었는데 점원이 엄청 맵다고 걱정을 했었다. 좀 맵긴 했었기에 오늘은 치킨 티카 마살라를 먹었는데 이건 또 너무 순했다. 맛있긴 했지만... 그 빈달루 절반, 이 치킨 티카 마살라 절반씩 먹으면 딱 좋을 거 같긴 했다.
점심을 잘 먹고 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깨끗하게 청소해주고 침대도 다 정리해놓은 방 좋아... 흐흑, 돌아가면 우렁이 없어(이것도 다 돈 주고 하는 건데 우렁이라고 조삼모사) 꽃을 다듬어서 꽂아두고-거베라는 잎을 다듬지 않아도 되고 저렴해서 이걸로 골랐음- 조금 쉬다가 오후의 차를 마시러 헤드 샷 커피에 갔다. 융만노바 점이 좀더 내 취향이지만 오늘은 스케치를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테이블이 좀더 편한 프란티슈칸스카 쪽이 나아서. 그리고 디저트도 후자에 조금 더 종류가 많다. 이 헤드 샷 얘기와 스케치는 따로 올렸다.
카페에서 나와 프란티슈칸스카 공원을 조금 산책하고, 예전에 딱 내 맘에 들었던 스타벅스 리저브 융만노바 점에도 들어가 봤는데 자리가 거의 없어서 도로 나왔다. 그리고는 호텔로 돌아왔고 아직은 해가 지기 전의 늦은 오후라 로비 바에 들러 칵테일을 한 잔 마셨다. 하루 쯤은 늦은 오후나 이른 저녁에 묵고 있는 호텔의 바에서 독하지 않은 칵테일 한 잔 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이 바는 예쁘고 가격도 비싸긴 한데 좋은 호텔 바 치고는 뭔가 조금 약간 어설픈 느낌이 있다. 여름에 김릿을 마셨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긴 했는데-여기 김릿은 달고 맛이 없어서 이번엔 안 시켰음- 오늘도 canta la vita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한 잔 마시며 생각했다. 잔을 좀 다른 모양으로 내주면 더 좋을 거 같다... 더 스타일리쉬해보이는 잔들이 있는데, 김릿이랑 이거랑 똑같은 잔에 내주네... 다른 바보다 양이 좀 적다... 대체적으로 달다... (하긴 이 칵테일은 진, 칸탈루프, 복숭아, 라임이파리 등이 들어가서 도수가 약하고 달달한 것이긴 했음) 괜찮은 호텔 바에서는 올리브를 안주로 내주는데 여기는 왜 팝콘을 줄까... 올리브 주면 좋겠다 등등...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칵테일을 다 마셨다. 도수가 약해서 취기는 전혀 들지 않았다.
오늘의 이 메모를 정리하며 칵테일을 마신 후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10,952보. 6.8킬로. 많이 걸었다. 오전에 에벨까지 걸어간 후 강변과 예전 동네들을 산책해서 그런가 보다.
사진들 아래 여러 장.

오를로이 천문시계. 항상 이 앞이 북적대므로 가능하면 피하는 길이지만 에벨에 가려면 여기를 지나는 게 빠르므로 여러 번 지나치게 된다.

강변 건너가는 길에. 낙엽들 위로 빨간 장미들이 아직 덜 시든 채 피어 있었다.

첨엔 이렇게 안개가 끼고 흐리고 추웠다.

레테조바 거리. 카페 에벨이 있던 곳에 새 카페가 들어왔다. 몇년 동안 비어 있었는데... 마음이 많이 묘했다.

아파트에서 나와 바로 옆의 이 레테조바 골목으로 접어들어 카페 에벨에 가곤 했었다. 이후에도, 코로나 때문에 20년에 여기 에벨이 닫기 전까진 프라하에 올 때마다 자주 갔다.

이 골목을 따라서.

내가 지냈던 릴리오바의 아파트. 저 문은 상당히 크고 무거웠다.

동생과 함께 갔던 초코 카페는 아직도 있었다. 여기 쇼콜라 쇼와 초콜릿케익이 맛있었다.

점심으로 먹은 치킨 티카 마살라 + 플레인 난.

프란티슈칸스카 정원.

툴툴댔지만, 하여튼 호텔 바에서 마신 칸타 라 비타. 잔을 좀 바꿔보면 좋을 거 같음. 아니면 저 코스터를...
... 여기까지 이 메모를 정리해 올린 후, 생각지 않은 옛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프라하에 출장을 와 있다고 해서 곧 보기로 하거 바에 다시 내려왔다. 나머지는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