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 수요일 밤 : 아침의 행복, 후라칸 야외 아점, 결국 스카프 샀음, 카페들, 밥, 여행은 하루하루 좋음
좀 늦게 잠들었고 8시 안되어 깨어났다. 욕조에 물을 받는데 좀 받다 보니 미지근했다. 뜨거운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찬물은 아니고 약간 찹찰한 미온수 정도였다. 나는 매우 게으르므로 리셉션에 전화하는 대신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했다. 머리를 간밤에 감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손님이 많은가. 이 시간에 온수를 많이 쓰나? 여태까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오후에도 이러면 얘기를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하여튼 샤워를 함.
오늘은 조식 먹으러 내려가지 않음. 영원한 휴가님이 나의 피나비야 서양배 코티지 치즈 패스트리 타령에 일터에 들르셨다가 피나비야 문 열자마자 그것을 사서 와주심. 흐흐흑 감동.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해가 나고 있었기 때문에 ‘앗 그러면 이 패스트리를 밖에 나가서 먹어야지’ 하고는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런데 구름이 꽉 차 있었고 그것들이 엄청난 속도로 흘러가고 있어서 하늘의 파란 구석이 아주 조금밖에 없었다! 바람도 좀 불었다. 일단 채광이 좋은 보키에치우 후라칸에 갔다. 첨엔 테이스트 맵에 갈까 했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열두시 반 즈음이었는데 오늘따라 후라칸에는 손님이 너무너무 많았다. 혹시 후라카나스가 있으려나 그러면 힘들어하겠네 싶었는데 여자 점원 한명이 있었고 줄선 손님들에 쫄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천천히 주문받고 하나하나씩 만들어주었다. 아마 우리 나라 같았으면... (하긴 점원도 두세명은 됐을 거야) 나와 있으면 내가 지금 일을 안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만 여유의 정도에 대한 기준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기다렸다가 영원한 휴가님의 플랫 화이트, 나의 얼그레이와 메도빅을 시켰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야외 테이블에 앉음. 슬프게도 해가 아주 잠깐 반짝 비추다가 말았음. 그래도 밖에 앉을만했다. 나는 여기 앉아 피나비야의 고대했던 서양배 코티지 치즈 패스트리를 해치우고 메도빅도 먹었음. 맨 위 사진이 아직 차를 따르기 전, 패스트리 개봉하기 전의 후라칸 야외 테이블.
아점을 먹은 후 영원한 휴가님은 귀가하시고 나는 큰 결심 하에 필리에스 거리로 갔다. 해가 좀 나고 하늘이 파래서 용기를 내서... (필리에스 거리 갈 때마다 추웠기 때문에 이번에 와서는 갈때마다 좀 내키지 않는다. 예전엔 여기를 제일 많이 왔는데) 지난번에 스카프와 머그를 찍어두었던 기념품 가게 Local에 갔다. 그리고는 선물용으로는 자작나무 티코스터를 몇 개 사고 정작 내가 갖고팠던 푸른색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울 혼방의 스카프를 샀음. 역시나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근데 바람이 많이 불었고, 또 나는 푸른색을 좋아하고, 스카프를 좋아하고 등등 마구 정당화. 이 스카프 맬 때마다 이 여행을 생각할거야 하고 의미 부여.
그리고는 스티클리우 거리로 접어들 무렵 바람 불어 춥자 얼른 이 스카프를 둘렀다. 내가 좋아하는 작은 정교 성당에 들러보려 했는데 오늘도 문이 닫혀 있었다. 매일 열지는 않는 모양이다. 오후에 왔는데도 닫혀 있는 걸 보니... 하여튼 그래서 나는 스티클리우 거리를 좀 걷다가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 러브 스토리 카페에 들어갔고 라떼를 한 잔 마신 후 나왔다. 그 다음엔 디조이에서 보키에치우 거리로 들어와서(이 루트를 제일 자주 다니는 것 같음. 거기 더해 엘스카가 있는 필리모 거리) 이딸랄라에 들어가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두 카페 얘기는 따로 올렸으니 생략.
이딸랄라에서 나오니 4시 즈음이었다. 오늘은 웍에서 밥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라떼와 레모네이드 때문에 배가 덜 꺼져서 시간이 좀 애매했고 그렇다고 테이크아웃해가자니 그건 싫고(밥도 식고 또 날씨가 맑으니 빨리 들어가기 아까움. 한번 들어가면 게으른 나는 안 나올 게 뻔함) 근데 바람은 불고 어떡하지 하며 뭉기적대며 보키에치우에서 빌니아우스 거리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영원한 휴가님께서 일 때문에 나왔다가 구시가로 내려오셔서 몬 카페에 가신다고 하셔서 ‘어머 잘됐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카페인데. 거기 갔다가 나오면 저녁 먹을 시간도 되겠네’ 하고 좋아하며 도로 빌니아우스에서 보키에치우로 거슬러 올라가 미칼로야우스 거리의 몬에 갔다. 몬에 대해서도 따로 올렸으니 생략.
영원한 휴가님은 아이들을 픽업하러 가시고 나는 이제 적당히 저녁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빌니아우스 거리의 웍으로 갔다. 걸어가는 길엔 바람이 많이 불어서 좀 추워졌기에 식당으로 들어가니 따뜻해서 좋았다. 오늘은 새롭게 타이바질 치킨 덮밥을 먹을까 했는데 향신료 맛이 강하려나 싶어 그냥 돈부리를 시켰다. 역시 맛있었다. 그리고 역시 한국인은 쌀밥이 분명해. 밥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짐.
밥을 먹고 나오니 해가 지면서 거리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홀리 도넛에 가서 벨리니를 마시거나 숙소 바로 근처에 있다는 영화관에 딸린 백스테이지 카페 2호점에 가보고 싶었지만 바람 불어서 추웠고 더 이상 뭘 먹기란 불가능했으므로 길을 건너 호텔로 돌아왔다. 귀가하는 도중 제일 가까운 나르베센 키오스크에서 물을 한 병 샀다. 여기는 0.5리터만 판다. 그리고 확실히 리미나 이키보다는 좀 비싸다. 넵투나스보다 10센트 저렴하기도 하고 또 궁금해서 나르베센 상표가 붙어 있는 걸로 사봤는데 마셔보니 그냥 별 맛이 없는 중립적이고 가벼운 물이다.
방에 돌아와 먼저 온수부터 틀어보니 뜨거운 물이 잘 나와서 만족했다. 리셉션에 얘기하는 것도 귀찮은데. 그래서 온수 목욕을 하고 머리도 감고 말리고 빨래도 하고... 그런 다음에는 한시간 가량 업무 메일들을 확인하고 몇 가지에는 답신을 해주었다. 좀 골치 아픈 건들이 있긴 한데... 돌아가서 생각해야지. 그리고는 오늘의 카페 이야기들과 메모를 적으니 또다시 벌써 열 시네. 이제 목금토일 남았어 흑흑... 월요일도 오후 3~4시까진 머무르니까 4일 반 남았네. 가방은 내일 저녁부터 조금씩 꾸려야겠다. 먹을 거라든지 소모품은 대충 많이 없어졌는데 내가 옷을 세벌이나 사고 스카프도 사고 나뚜라 시베리카에서 샤워젤을 두 병이나 샀다 ㅎㅎㅎ 뭐 그래도 돌아갈 때의 짐 꾸리는 건 덜 힘드니까. 아아아아 근데 가방 꾸리기 싫어, 여행 끝나는 거 싫어.
남은 날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획이 아직 없다. 안 가본 카페가 한둘 있으려나. 좋아하는 카페에 가고 그냥 이렇게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오늘도 무척 좋은 하루였다. 여행 와서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좋은 순간들이다.
오늘은 10,655보. 6.6킬로. 생각보다 많이 걸었네. 반경 자체는 여러 군데가 아니었는데 오르락내리락해서 그런가 보다. 하긴 게디미나스에서 필리에스로 곧장 가면 직선 코스라 금방인데 보키에치우에서 디조이를 거쳐서 가면 돌아서 가는 거긴 하지. (근데 이것도 지도로 다시 계산해보면 비슷한 거리일지도 몰라, 나는 방향치 공간치라서)
필리에스와 스티클리우 거리 갔다가 나오는 길에 찍은 디조이 거리와 구시청사 일부. 여기가 항상 하늘이 제일 파랗다. 그러니까 여름엔 힘들었나보다. 지금은 좋은데.
저녁 먹고 나왔을 때 빌니아우스 거리. 오른편에 내가 애용하는 웍 식당 간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