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목요일 밤 : 잿빛 황량한 페테르부르크 꿈, 늦어져서 안 좋아짐, 그냥 쉬었음

어린이가 아니게 된지는 아주 오래됐지만 하여튼 어린이날이고 쉬었다. 원래는 오늘 출근할 생각이었는데 몸이 너무 피곤해서 그냥 집에서 쉬었음. 아침에 일찍 깨면 그래도 출근해볼까 했었지만 새벽에 깼다가 도로 잠들어서 이미 9시 넘어서 깨버렸으므로 다 포기.
곤하게 자면서 페테르부르크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꿈은 아니었다. 아마도 전쟁 때문에 무의식에 남아 있었는지 군인이 나왔다. 꿈에서 나는 아주 황량하고 우중충하고 아주 넓고 거대한 도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곳은 네바 강과 운하를 가운데 끼고 있는 도로였는데 건너편으로 가려면 역시 거대한 다리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날씨는 흐렸고 온통 잿빛이었고 진눈깨비가 날렸고 바닥 여기저기 진흙과 진창이 고여 있었다. 그곳이 페테르부르크라는 것을 알았던 건 다리 너머 멀리 저편에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제 지리적으로는 내가 걷고 있었던 위치의 장소는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카잔스카야 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꿈이었으므로 그곳들은 아니었다.
나는 서두르고 있었고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이 다리는 쭉 이어져 있는게 아니라 중간이 아래로 깊게 패여 있어 계단을 따라 많이 걸어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거나,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처음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지만 무장 상태의 군인이 나를 가로막았고 표를 사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는 10루블이었다. 나는 '표'라는 뜻의 '빌롓', 엘리베이터란 뜻의 '리프트', 그리고 10루블이라는 단어를 말하려 했지만 노어가 잘 되지 않았고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기껏 이런 것을 타기 위해 10루블을 내는 것은 말도 안된다 생각했고 그냥 계단을 따라 걸어내려가기로 했다.
가파른 철제 계단을 따라 쭉 내려가자 돔 끄니기나 반디 앤 루니스 같은 서점이 나왔고 나는 dvd와 음반이 있는 작은 매장에 도착했다. 어린이 애니메이션들과 영화 dvd들이 2-300여점 정도 있었다(그리 많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냥 아카이브 룸 같았다. 나는 예전에 비행기에서 재미있게 봤던 바보 이반과 공주와 늑대, 말에 대한 애니메이션 디뷔디를 사려고 했는데 가격 스티커에 10만루블이 넘는 금액이 붙어 있었다. 103,*** 루블 이랬던 것 같다. 앞 숫자들은 기억난다. 만루블도 아니고 십만루블이라니! 디뷔디라면 천루블도 비싼 금액인데. 나는 좀 비현실적 기분이 들었고 이런 금액을 지불하고까지 애니메이션 디뷔디를 사고 싶지 않아서 포기하고는 매장을 가로질러 가서 다시 가파른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가 평평한 다리 위로 올라왔다. 여전히 바깥은 우중충하고 잿빛으로 어두웠다.
깨어난 후에도 한참 침대에 붙어 있었다. 이제 출근할 시간은 어차피 놓쳤고 몸이 힘들었다. 아직도 붉은 군대가 도래하지 않아 나의 여행 계획에 심대한 불편을 끼치게 되었다. 그날을 피해서 계획을 잡은 건데 이번 주기가 늦어지는 바람에 다음 주기와 겹치면서 꼼짝없이 비행기 탈 때 이놈과 동행하게 될 것 같다. 이런 징크스는 좀 피해 가고 싶은데 꼭 이 모양이다. 그저 그때가 제일 힘든 1~2일차만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ㅠㅠ 나쁜 넘 흑흑... 아무래도 이번에 너무 과로하고 신경을 많이 써서 몸에 영향을 끼친 것 같음.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쉬었다. 오후에 글을 약간 썼고 실내자전거는 30분 가량 탔다. 오늘은 지치고 호르몬 영향도 있어서 아점과 저녁 둘다 그냥 밥 먹었다. 티푸드도 그냥 먹었다. 거의 3주가 다 되었는데 살은 조금 빠지긴 했지만 아직 멀었다 ㅠㅠ 글을 좀더 이어쓰다 자야겠다. 오늘 출근하려던 게 수포로 돌아가서 좀 아깝긴 하지만 조삼모사로 내일 하루만 출근하면 주말이라고 마음이 좀 편하다.
오늘의 식단
아점 : 다이어트도시락 + 김치찌개
(냉동실에 오랫동안 처박아두었던 300칼로리짜리 다이어트도시락 데워서 새로 끓인 김치찌개랑 먹음. 김치찌개를 먹었으므로 그닥 다이어트 도움은 안 될것 같음. 그나마도 이 도시락 데운 건 냉장고가 텅 비어서 도시락에 들어있던 오믈렛 반찬이라도 먹으려고 ㅋㅋ)
티타임 : 다즐링. 바나나 땅콩크림케익.
저녁 : 밥 1/3그릇 + 두부 1/3모 + 통조림 참치 + 김치찌개.
타트체리즙 1/4컵.
티타임 사진 몇 장 접어두고 마무리.



딱딱한 sf들을 읽다가 기분전환하려고 엄청 말랑말랑하고 옛 동심을 되살리는 초원의 집 시리즈 다시 읽고 있음. 그런데 이 시리즈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 얘기가 너무 많이 나옴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