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3

« 2024/3 »

  • 31

 

 

 

 

오랜만에 본편을 약간 발췌해 본다. 요즘 지나와 말썽쟁이 낙서하며 노느라 정작 원래 글은 한줄도 안 썼고 다른 글도 거의 안 썼다. 노는 건 좋은데 이게 문제야. 노는 건 편하고 쉬우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거든. 그래서 서무 시리즈도 그렇게 줄줄이 썼는데...

 

전에 트로이가 지나이다와 미샤의 아파트에 보드카를 마시러 간 이야기를 조금 발췌했던 적이 있다. 미샤의 공연을 보고 나오던 트로이와 마주친 지나가 그에게 아파트로 보드카 마시러 오라고 초대를 한다. 지나의 약혼자인 마르크 카라바노프는 트로이와 같은 학교의 영문학과 부교수라서 친분이 있다. 앞 에피소드에서 공연을 마친 미샤가 돌아오고 카라바노프는 어서빨리 같이 보드카 마시자고 성화를 부린다....

 

(그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643 - 보드카를 따지 않는 건 죄악, 옷 빌려입기, 위선자)

 

 

아래 얘기는 그 에피소드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샤워를 하고 나온 미샤를 남겨두고 트로이는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카라바노프가 염원하고 또 염원하던 보드카를 딴다. 미샤도 나온다. 지나이다는 학창시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그런 이야기이다.

 

지나와 말썽쟁이 시리즈에서 놀고 있긴 하지만 이 둘의 학창시절 관계는 사실 이랬으니..

 

 

..

 

 

'스톨리츠나야'는 보드카 상표 이름이다. 러시아에선 스탄다르트와 스톨리츠나야가 유명 보드카 브랜드임.

 

마이야 필리포브나는 미샤의 오랜 후원자인 노멘클라투라 귀부인이다.

 

..

 

위의 사진은 사실 이 글과는 별 관계없지만... 최근 마린스키에서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를 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 한 장. 내가 좋아하는 씬이기도 하고 이 사람은 이 의상 입고 이 포즈 취할 때 참 멋있어서.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트로이가 부엌으로 나왔을 때 카라바노프는 한 손에 여전히 보드카 병을 쥔 채 지나이다와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한순간 그는 마르크 카라바노프가 되고 싶었다. 거리낌 없고 적극적이며 단순하고 모두와 쉽게 친해지고 어디를 가나 사랑받는 남자. 자신이 원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얻은 남자. 모두의 눈에 흡족하게 비쳐질 남자. 무난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남자.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게 될 남자. 모든 것이 정상인 남자.

 

 

“ 아니, 미하일은 왜 안와? ”

 

“ 공연 때문에 피곤한 것 같던데. 그냥 자라고 했어. 어차피 걔한테는 그림의 떡이잖아. ”

 

“ 불쌍한 친구 같으니, 보드카와 캐비아를 놔두고 자러 갔다고? 이건 다 발레학교가 애들을 어릴 때부터 너무 잡았기 때문이야. 맞지, 지나샤? ”

 

“ 학교가 우릴 잡아댄 건 맞는데 바보는 그런 게 별로 안 통했어. 술만 못 마시는 거지 부릴 수 있는 말썽은 다 부렸으니까 전혀 불쌍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

 

 

카라바노프가 염원하던 스톨리츠나야의 마개를 땄을 때 미샤가 부엌으로 나왔다. 지나이다 옆에 앉더니 꽤 묵직해 보이는 종이 상자를 열어 빈 접시 위에 초콜릿 트러플과 조그만 커스터드 슈, 금박지로 포장된 캐러멜과 투명하게 꿀이 입혀진 아몬드 캔디를 주르르 쏟아놓았다.

 

 

“ 오, 이 끔찍한 것들은 뭐야, 어디서 가져온 거야! ”

 

 

지나이다가 비명을 질렀다. 정말 끔찍해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그런 것 같았다. 에메랄드빛 두 눈에 반짝거리는 광채가 일었다.

 

 

“ 어제 마이야 필리포브나가 주고 갔는데 깜박 잊고 있었어. ”

 

“ 그럼 진짜 브뤼셀에서 가져온 거겠네. 지극정성이다, 그 여자. 막상 바보는 이런 거 먹지도 않는데. ”

 

“ 마이야 필리포브나가 누군데요? ”

 

“ 있어요, 바보 추종자 중 하나. 쉰 살도 넘었을걸요. 무슨 인민 영웅 미망인인데 돈도 많고 엄청 잘난 척해요. ”

 

“ 그렇게 말하면 마이야가 상처받을 거야. 마흔다섯 살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이거 너한테 주라고 한 거야, 내가 안 먹는 건 알거든. ”

 

“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네. 그 아줌마가 전에 나한테 여우같은 년이라고 했는데. 바보한테 꼬리친다고. ”

 

“ 결혼 소식 듣고 아주 좋아했으니까 독 같은 건 안 들었을 거야. 정 의심되면 마르크와 트로이에게 하나씩 먼저 먹여. ”

 

“ 자기가 먹는다는 얘긴 끝까지 안하네. ”

 

 

달콤한 초콜릿과 캔디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카라바노프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내더니 직접 잔들을 끌어당겨 보드카를 따랐다. 지나이다의 잔에는 와인을 넘치도록 부어준 후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 미인을 위해! ”

 

 

다들 건배를 하고 술을 들이켰다. 지나이다는 한 모금 밖에 마시지 않았다. 모든 관심이 마이야의 초콜릿들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독 운운하더니 초콜릿 트러플을 두 개나 집어 조그만 입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이미 행복해진 카라바노프가 두 번째 잔을 따랐고 상투적인 구호대로 건강을 위해 건배했다.

 

 

미샤는 첫 잔은 단숨에 비웠지만 두 번째 잔은 기침을 하면서 몇 모금으로 나눠 마셨다. 첫 잔부터 눈물이 순식간에 차올라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니 카라바노프의 스톨리츠나야는 순도 높은 진짜 보드카가 분명했다. 카라바노프는 미샤가 잔을 다 비울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가 강의실에서 학생을 격려하듯 쾌활하게 말했다.

 

 

“ 이번 거 한 잔만 더 받아. 자기를 위한 건배는 받아야지. 미하일을 위해! 최단시간 내에 인민예술가가 되기를! ”

 

 

트로이는 미샤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기원의 말이 어쩐지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이콘 후광 같은 머리와 채찍 같은 몸. 루뱐카에서 그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지.

 

 

 

그는 당이 내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어. 오전의 만남은 자기들과 나 양측에 모두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했지. 가능하면 볼쇼이에서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인민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았어.

 

 

 

다행히 미샤는 그 끔찍했던 말을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웃었고 잔을 들어올렸다. 지나이다가 한 손을 그의 머리칼 사이로 집어넣어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

 

 

“ 천천히 마시고 가서 자, 멍청이. ”

 

 

“ 이제 더 이상 신경써주지 않는구나, 멍청이로 바뀐 걸 보니. ”

 

 

“ 아직 문법이 제대로인 걸 보니 덜 취했네. ”

 

 

“ 취해도 제대로 말할 수 있어. ”

 

 

 

하지만 미샤는 세 번째 잔을 비우지 못했다. 절반 정도 마셨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나이다의 뺨에 키스를 하고 부엌을 나갔다. 심하게 비틀거리며 식탁과 벽에 부딪치는 것을 보니 이미 꽤 취한 것 같았다. 카라바노프가 재빨리 일어나 뒤따라갔다. 트로이는 희미한 질투심을 느꼈지만 지나이다와 카라바노프가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애의 팔을 끼고 침실로 데려갈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게 낫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들은 한 시간 정도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얘기하는 쪽은 주로 카라바노프였다. 지나이다는 미샤가 가져다 준 초콜릿과 캔디들 때문에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약혼자의 어깨에 기대어 가끔 대화를 거들었다. 카라바노프가 베라에 대한 화제를 꺼내자 지나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 루빈슈테인 병원 의사? 데이트해요? ”

 

“ 그냥 친구예요. 가끔 만나요. ”

 

“ 남녀 사이에 그냥 친구가 어디 있어. 그렇게 얘기하면 베로츠카가 분명히 섭섭해 할걸. ”

 

“ 인사도 안 했으면서 벌써 베로츠카라니. 정말 넉살이 좋네. ”

 

“ 친구가 만나는 여자라면 애칭으로 불러도 괜찮아. 미하일도 여자 친구를 좀 보여주면 좋을 텐데. 자넨 만나봤지? 궁금해 죽겠네, 어떤 여잔지. 지나랑 다른 타입이라고 했잖아. ”

 

 

트로이는 제멋대로 둘러댔던 말을 카라바노프가 기억하고 있다는데 놀랐고 더듬대며 대꾸했다.

 

 

“ 아... 나도 못 봤어. 미샤는 그런 얘긴 잘 안 해. ”

 

“ 음, 분명히 눈이 새파란 금발 미녀일 거야, 좀 얼음공주 같은 스타일의... 그래야 지나랑 다른 타입이 되지. ”

 

 

지나이다가 입술을 푸르르 떨면서 카라바노프의 입에 캐비아를 얹은 흑빵을 밀어 넣었다.

 

 

“ 왜 100킬로 쯤 나가는 갈색머리 연상녀라고는 생각 못해? 온 세상에 나랑 다른 타입들이 널렸는데. ”

 

“ 그 다른 타입이란 표현에도 숨겨진 조건들이 있는 거야. 적어도 당신만큼 예뻐야 한다든가. 미하일은 일단 자기가 너무 잘났어. 그러니까 여자도 엄청 까다롭게 고를 거야. ”

 

“ 그 바보는 고르지도 않아. 지금까지 사람 마음을 제대로 받아준 적도 없을 걸. 누굴 사귄다니 믿을 수 없어. 그런 걸 할 줄 알았으면 바보라고 불렀겠어? 그 멍청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왜 질투하는지, 왜 울고 괴로워하는지 이해해본 적도 없을 거야. ”

 

“ 아니, 정말 자기 파트너를 너무 가혹하게 깎아내리는 거 아냐? 여태까지 내가 만난 젊은이들 중에 제일 괜찮은 친군데. 다 갖췄잖아, 잘나고 실력도 좋고 착하기까지 한데. 당신 말은 다 들어주고. ”

 

“ 그 중 하나라도 안 갖췄으면 훨씬 나았을 거야. ”

 

 

지나이다는 갑자기 입맛이 떨어진 듯 초콜릿 접시를 한쪽으로 밀어놓더니 트로이나 카라바노프에게 청하지도 않고 자신의 빈 와인 잔에 보드카를 약간 따라 한 입에 마셔버렸다.

 

 

“ 학교 다닐 때 여학생들 연애편지에 답장 안 해 줬다고 사람 마음을 제대로 받아준 적 없다고 판단하면 안 되지. 나도 학생 때 맘에 안 드는 여자애가 고백한 거 거절한 적이... ”

 

“ 니넬이 그런 얘기 안 해? 정신 나간 팬 하나가 학교로 찾아와서 바보 파트너를 가위로 찌르려고 했다는 얘기. ”

 

“ 기억나, 사귀는 줄 알고 그랬다고.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

 

“ 마루샤. ”

 

 

트로이가 니넬의 이야기를 기억해내며 끼어들었다. 지나이다는 트로이 쪽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 미친 여자애는 끌려 나갔고 마루샤는 살짝 긁히기만 했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어요. 마루샤는 학기 마치고 일반 학교로 전학 갔어요. 다들 그 사건 때문에 충격 받아서 춤을 그만둔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죠. 이건 아무도 모르는 얘기예요. 양호실로 그 바보가 문병을 갔는데 마루샤가 고백을 했어요. 무대를 하나 차려도 될 정도로 열렬하게. 가위에 찔려 죽어도 좋다고, 정말 너와 사귀다 그런 거라면 상관없다고. ”

 

아니, 오글거리는 게 진짜 무대 위에서 하는 말 같네. 사춘기라서 그런가? ”

 

“ 그럼 학교에서 매일 배우고 춤추는 게 왕자랑 공주의 로맨스에 온갖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레퍼토리들뿐인데 제정신인 애들이 얼마나 있었겠어? 여자애들만 그런 것도 아냐. 다들 꿈이랑 현실을 구분 못했어. 극장에도 아직 그런 사람들 많아. 근데 미샤는 안 그랬어. 꿈같은 로맨스 따윈 믿지도 않았고 다른 애들의 환상을 받아주지도 않았어. 그 자리에서 마루샤를 거절했는데 그 불쌍한 여자애가 너무 상심해서 걔가 보는 앞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렸어. ”

 

“ 뛰어내려? 장난이 아닌데! 전학 갔다고 했으니 다행히 무사했나보네. ”

 

“ 겨우 2층이었는걸. 마루샤야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일단 뛰어내린 거고. 하나도 안 다쳤어. 미샤가 걜 안고 다시 양호실로 데려왔는데 그때 마루샤가 완전히 맛이 갔지. 울면서 자기가 뛰어내릴 때 안 잡아줬다고, 분명히 옥상에서 뛰어내렸어도 가만 놔뒀을 거라고 소리를 질렀어. ”

 

“ 불쌍한 미하일, 난 그 친구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울고불고 한다고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

 

 

트로이는 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흑해에 함께 갔던 소녀, 작은 인어 같던 레나. 그 애도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지나이다는 한숨을 조그맣게 내쉬더니 약혼자 대신 트로이 쪽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 미샤가 달래주려고 가까이 갔는데 그때 마루샤가 베개 밑에서 재봉 가위를 꺼내서 걜 찔렀어요. 진짜로 찔렀어요, 그 팬 계집애가 슬쩍 긁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바보가 그때 조금만 늦게 피했으면 가슴에 박혔을 걸요. ”

 

 

카라바노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트로이와 자신의 잔에 보드카를 철철 따르며 중얼거렸다.

 

 

“ 아니, 그렇게 끔찍한 얘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토슈즈를 신고 드레스를 나풀거리는 귀여운 여학생이 그렇게 무서운 짓을! 전혀 낭만적이지 않잖아! ”

 

“ 왜, 아주 낭만적이지. 역시 당신은 아직 발레를 잘 몰라. 지젤만 해도 버림받으니까 미쳐서 심장도 터져 죽고... 라 바야데르도 연적을 독사를 풀어 제거하는걸. 내 무대 제대로 안 봤지? ”

 

“ 그래서, 미하일은 무사했어? ”

 

“ 뭐 안 죽었으니까 무사했다고 해야 하나. 팔로 막았는데 꽤 많이 베었지. 내가 마루샤 떼어놓지 않았으면 완전히 난도질당했을 걸.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지. ”

 

“ 당신은 어떻게? ”

 

“ 그때 몸살이 나서 양호실에 누워 있었거든. 제일 안쪽 침대에 있어서 걔네가 날 못 봤었어. 있는 줄 알았어도 똑같았겠지만. 그래서 유일한 목격자가 된 거야. 미샤가 아무한테도 얘기 못하게 했거든. ”

 

“ 왜?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났는데도? ”

 

“ 몰라. 귀찮아서 그랬겠지. 위에 불려가는 걸 제일 싫어했으니까. ”

 

“ 마루샤가 퇴학당할까봐 그랬을지도 모르죠. ”

 

“ 글쎄요, 귀찮아서 그런 거였으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 같아요. 사람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으면서 걱정해주는 건 더 나쁘니까. 걘 그걸 이해 못해요. 아마 지금도 모를 걸요. ”

 

 

트로이는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아마 지나이다는 그가 이해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 그래서, 지나샤, 어떻게 됐어? 아가씨는 진정했어? ”

 

“ 절대 진정 안하지. 사춘기 여자앤데. 뭐 내가 재우긴 했어. 따귀 두어 대 갈긴 다음에 보드카를 우유컵에 가득 채워 먹였거든. 바보는 캐비닛에서 약이랑 붕대 꺼내서 자기 혼자 치료하고. ”

 

“ 그땐 둘이 같이 추기 전이었나요? ”

 

“ 그때까진 그랬죠. 며칠 후에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우릴 파트너로 엮었어요. ”

 

 

지나이다는 접시 위에 쌓여 있는 초콜릿과 캔디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 난 걔랑 같이 추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일을 목격하고서 파트너가 되고 싶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운 나쁘면 광팬한테 습격당할 거고 더 나쁘면 나도 마루샤처럼 그 바보한테 빠졌다가 돌아버릴까 봐 겁났어요. 아니, 당신 그런 생각하지 마. 같이 해보니까 저게 완전히 바보란 걸 알게 돼서 반할 일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

 

“ 아니, 뭐... 내가 무슨 그런 생각을 했다고. 설사 그랬다 해도 어릴 때야 다들 짝꿍에게 반하니까 난 이해해. ”

 

 

지나이다는 약혼자의 살짝 질투어린 시선을 무시했다. 그녀는 트로이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 난 걔한테 그대로 얘기했어요. ‘너랑 같이 추기 싫어, 마루샤처럼 되고 싶지 않아.’ 라고. 그러니까 그 바보가 자기는 나와 같이 추고 싶다는 거예요. 전부터 그랬다나.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지금도 그대로 기억나요. ‘여자애들 중에서 네가 가장 뛰어나. 무대를 어떻게 쓰는지 알지. 절대음감은 아니지만 음악도 잘 따라가고. 절대 겁먹지도 않잖아.’ 근데 난 그 말에 또 발끈해서 ‘절대음감이 아니라는 건 뭐야, 그럼 넌 그렇다는 거야?’ 라고 화를 냈어요. 그러니까 그 건방진 게 자기는 그렇다는 거예요! ”

 

 

카라바노프가 아는 척하면서 끼어들었다.

 

 

“ 그 절대음감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긴 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

 

“ 아, 바보가 거기 아주 가깝긴 해. 뭐든지 한번 들으면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어. 악보도 그려줄 수 있고. 지금 이 잔 부딪치는 소리도 무슨 음인지 정확히 잡아줄 수 있을 걸. 근데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정말 재수 없잖아. 그래서 내가 그랬지, 너 갈수록 건방지고 재수 없어진다고. 우린 1학년 때부터 같이 수업 들어서 친하긴 했지만 파트너로 춰본 적은 없었거든. 걘 나보다 훨씬 빨리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반으로 옮겼으니까. 어쨌든 걔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묻더라고, ‘나랑 추는 게 싫은 이유가 건방지고 재수 없어서야? 그게 그렇게 중요해?’ 라고. 근데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렇게 출 수 있는 애는 학교에 걔 하나 밖에 없는데. 선배들도 그렇게 추진 못했어. 극장에는 너 같은 게 널렸을 테니 지금에나 실컷 잘난 척하라고 해주긴 했지만 사실 그때도 알았어. 극장에 와도 그 바보처럼 추는 사람은 없으리란 거. 그래서 그냥 같이 추기 시작한 거야. ”

 

“ 전혀 로맨스는 없었던 거야? ”

 

“ 없었다니까. 저 바보가 춤이라도 잘 춰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까지 멀쩡하게 걸어 다니지도 못했을걸. 주변에 마루샤 같은 추종자들이 한둘이어야지. 바보는 지금도 마루샤가 왜 자기한테 그렇게 굴었는지 이해 못 할 거야. ”

 

 

지나이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몸이 결리는지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길게 뻗으며 유연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 이제 그만 마셔, 마르크. 벌써 한 시가 다 돼 가는데 저 가방들은 옮겨놔야지. 나 내일도 오전에 리허설 있어. ”

 

“ 그럼 얼른 자. 내가 지금 차로 옮길게. ”

 

“ 당신도 바보라고 불리고 싶어? 보드카를 그렇게 바닥내놓고 차를 몰 생각을 하다니! 운전은 내가 할 테니까 짐이나 옮겨. ”

 

 

여왕에게 복종하는 신하처럼 카라바노프가 절을 하면서 거실에 내놓았던 트렁크들을 가지러 갔다. 지나이다가 트로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 자고 가요, 많이 늦었는데. 마르크만큼 마셨잖아요. 버스도 이제 없고. ”

 

“ 괜찮아요, 걸어가도 30분 정도 밖에 안 걸려요. ”

 

“ 미샤 옆방에도 침대 있어요. 2층 침실도.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가 돌아간 후로 그 방 비어 있거든요. ”

 

 

그녀는 거실 쪽을 힐끗 보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 저 바보를 혼자 두고 나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남아주면 좋겠어요. ”

 

 

트로이는 그녀의 녹색 눈과 단정하게 다물어진 입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단호하고 명쾌한 여왕 같은 모습 너머로 병원 복도에 엎드려 울부짖던 고통스러운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조용히 물었다.

 

 

“ 전에도 그런 적 있었어요? ”

 

“ 뭐가요? 마루샤? ”

 

“ 아니, 유럽 호텔. ”

 

“ 바보가 얘기 안하는 걸 내가 얘기할 필요는 없죠. ”

 

“ 당신에겐 아무 얘기 안 해요? ”

 

“ 무슨 얘기? ”

 

“ 왜 그랬다든지... ”

 

“ 절대. 바보라고 했잖아요. 난 농담한 게 아니에요, 춤이라도 잘 춰서 다행이에요. 쟤한텐 그것 하나 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자기 춤을 안 믿어요. 그냥 믿으면 되는데. 아무 것도 안 믿어요. 멍청이. 파리에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런던에라도... ”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창백해지면서 입을 막았다.

 

 

“ 아, 잊어버려요. 취했나봐. ”

 

“ 미샤가 로쉬 얘길 했나보죠? ”

 

 

지나이다가 웃었다. 그 매끄럽고 완벽하며 아름다운 얼굴에 갑작스럽게 주름이 지면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아뇨, 걔가 그런 말을 파트너에게 감히 어떻게 하겠어요. 우린 그런 말 절대 안 해요. 내가 디나에게 걔 방 열쇠를 줬어요. 난 디나가 걜 자기들 쪽으로 데려가길 바랐죠. 이제 지금 했던 말 다 잊어요. 편하게 자고 가세요, 내일 아침 열 시까지 바보가 안 일어나면 꼭 깨워주세요. 감독 면담에 가야 할 테니까. ”

 

 

그녀는 트로이의 어깨를 잡아당겨 고개를 낮추게 한 후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약혼자와 함께 아파트를 나갔다.

 

 

 

..

 

 

 

마루샤에 대해 미샤와 지나의 후배 니넬이 늘어놓은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842

 

 

파리의 프리마 발레리나 디나 로쉬와 미샤의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040

 

 

마루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트로이가 떠올린 레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389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16. 7. 3. 17:08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화보 몇 장 dance2016. 7. 3. 17:08

 

자리 비운 동안 넷에 올라온 슈클랴로프 화보들 몇 장.

나도 저렇게 잘 찍고 싶다 ㅠㅠ 흰 옷 입어 번져버린 커튼 콜 사진들이 눈앞에 어른어른..

 

최근 글린카 극장에서 고팍과 발레101을 춘 슈클랴로프. 먼저 고팍.

아아, 루바슈카와 빨간 바지 입고 고팍 추는 슈클랴로프를 보고 싶다!!! 얼마나 훨훨 날아다닐 것인가. 얼마나 경쾌하고 생기 넘칠 것인가...

 

 

저 헐렁한 루바슈카와 빨간 바지를 보니 너무 귀엽다.. 애 아빠 맞느냐..

 

 

발레 101.

7월에 도쿄에 와서 에튀드와 이 발레101을 춘다는데 이제 나는 파산이라 도저히 도쿄까지는 못 가겠네..

이 사람이 추는 발레 101 진짜 무대에서 보고프다. 영상만 봐도 유머와 생기가 철철 넘치는데..

 

 

 

 

이건 스메칼로프의 '녜 빠끼다이 미냐"(나를 버리지 마)

사진은 Jack Devant

아아, 내가 이번에 가서 찍은 커튼 콜 사진은 흰옷 입은 유령으로 나왔건만..

좋은 작품이었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 싶을 정도로...

어떤 면에서는 스메칼로프의 초기 안무작이자 역시 슈클랴로프가 나왔던(그땐 오브라초바와 췄지) parting의 보다 원숙하고 고통스러운 버전 같은 느낌도 드는 작품이었다. 아마 둘다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적의 알리를 춘 슈클랴로프

아무리 봐도 콘라드가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예쁜 알리...

 

 

악, 그렇게 웃으면 관객들 다 쓰러진다...

 

 

얼마전 아내 마리야 쉬린키나와 함께 춘 라 바야데르. 사진은 캡션대로 elena lekhova

 

 

이 사진 보니 다시 이 사람의 라 바야데르 무대를 보고 싶다. 이 사람은 1막부터 3막까지 점점 사람을 휘어잡는 솔로르로 변해간다. 그러니까, 1막은 좀 철딱서니 없지만 사랑스러운 연인, 2막은 안절부절 못하는 비겁한 배반자, 3막은 참회와 회한으로 몸부림치는 알브레히트 같은 남자인데 이 사람의 연기와 춤은 3막에서 가장 빛을 발하곤 한다.

 

3막에서 이 사람이 스카프를 휘날리며 무대로 뛰어나와 선회하고 망령들의 그림자 앞에서 니키야를 향해 뛰어오를 때면 간혹 숨을 죽이게 된다. 그만큼 사람을 매료시킨다. 2막 결혼식의 화려한 2인무보다는 이 3막의 2인무와 솔로가 훨씬 잘 어울린다.

 

 

청동기사상.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함께

 

최근 내가 본 공연들 중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연기와 춤과 무대였다.. 비단 슈클랴로프 뿐만 아니고 스메칼로프와 무대 미술, 음악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분명 광란의 예브게니를 혼신을 바쳐 연기해낸 이 사람이 있었다. 아직도 3막에서 이 사람이 테료쉬키나의 환영을 보며 허우적거리고 미쳐 웃고 청동기사상을 향해 손가락질하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당신은 좋은 무용수이고 동시에 좋은 배우예요.

 

 

 

백조의 호수.

사진은 natalya knyazeva

만일 내가 오데트인데 지그프리드가 저런 표정으로 달려와 '오데트야 미안해 오딜한테 깜박 속아버렸어...' 라고 하면 나는 용서해줄 것 같아... ㅠㅠ

 

잠자는 미녀. 테료쉬키나와 함께.

사진은 두 장 모두 karina edwards

내가 딱히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이 사람은 데지레 왕자 역에 맞춤이나 다름없긴 하다..

 

 

:
Posted by liontamer

지난 4월 10일 마린스키 발레 페스티벌 폐막 갈라에서 선보인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독무 무대.

제목은 "Не покидай меня" (Ne Me Quitte Pas)

번역하면 '날 버리지 마..'

유리 스메칼로프 안무. 여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슈클랴로프가 춤을 춘다.

발췌된 클립은 공연 일부.

제목부터 시작해 심금을 울리는구나.. 우릴 버리지 말라고요, 마린스키를 떠나지 말라고요 ㅠㅠ

최소한 마린스키에 게스트 프린시펄로라도 계속 남아 주면 좋겠다. 파테예프가 떠날지도 모른다는데 이것과도 연관이 있나 싶기도 하고 ㅠㅠ 하지만 스코릭이야 그렇다칠수 있어도 이 사람이야 자기 재능만으로도 충분히 지금 톱이라서... 아무래도 아내 쉬린키나 때문인 것 같아 흐흑...

 

 

 

Владимир Шкляров, Ne Me Quitte Pas, фестиваль Мариинский 10.04.16

 

 

공연 사진 몇장.

 

 

사진 : Jack Devant

 

 

 

사진 : Jack Devant

 

 

 

사진 : Jack Devant

 

 

 

 

사진 : Jack Devant

 

 

 

사진 : Jack Devant

 

 

 

 

마린스키 발레 페스티벌 마친 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파티에서.

유리 스메칼로프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 : Svetlana Avvakum

 

..

 

녜 빠끼다이 나스, 발로쟈...

떠나지 말아요, 가지 말아요 엉엉...

 

..

 

4월 17일에 이 사람 화보집이 나온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을 보니 특정 서점에서만 파는 것 같다. 소량 인쇄를 했나... 인터넷에서도 좀 팔아주면 안되나.. 여름에 가면 돔 끄니기에서 득템할 수 있을까 ㅠㅠ

 

:
Posted by liontamer

 

 

 

 

지난 3월 중순, 라 바야데르 무대에서 슈클랴로프가 보여준 결혼식 솔로르 춤.

출처는 https://www.youtube.com/watch?v=-OR1gI-4JSg

 

난 슈클랴로프가 솔로르를 추는 무대를 마린스키에서 세번 봤다. 이 사람은 드라마틱한 연기력이 일품이라 솔로르 역에 잘 어울렸다. 춤도 뒤로 갈수록 좋아지는 스타일이다. 이 솔로르를 보면 니키야와 감자티가 죽어라고 싸우는 것도 이해가 감. (그래도 솔로르 나쁜 놈 ㅜㅜ)

솔로르는 이 2막과 3막에서 각각 근사한 춤을 보여주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슈클랴로프는 이 2막보다 3막 솔로가 더 좋다. 아무래도 드라마틱한 연기와 어우러져서 그런것 같다. 하지만 2막의 춤도 설레는 건 마찬가지다.

이 사람 솔로르 출 때 예전엔 앞머리를 내리고 나왔는데 이 무대에선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빗어넘겨서 조금 더 성숙하고 남자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래도 멋있고 저래도 멋있음(콩깍지)

 

태그의 라 바야데르를 클릭하면 전에 올렸던 이 발레에 대한 여러 영상과 사진, 마린스키 라 바야데르 등의 리뷰를 볼 수 있고 물론 슈클랴로프 무대 사진, 그의 라 바야데르 여러 클립들을 볼 수 있다(이 결혼식 솔로도 예전에 다른 버전 올린 적 있다)

 

 

:
Posted by liontamer
2015. 12. 27. 21:26

잠자는 미녀 - 슈클랴로프의 왕자 솔로 dance2015. 12. 27. 21:26

 

 

우울한 기분을 달래보려고. 거의 6~7년 전 영상이긴 한데,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추는 잠자는 미녀 파이널 그랑 파의 왕자 솔로 클립. 알리나 소모바와 췄는데 슈클랴로프가 추는 솔로만 발췌했다.

 

몇 년 전이라 얼굴도 한참 어려보이고 체격이나 몸놀림도 전체적으로 훨씬 소년 같다. 

 

잠자는 미녀 자체는 딱히 내 취향의 발레는 아니지만 무대에서 가장 처음으로 본 고전 발레라 그래도 애정이 있다. 특히 이 파이널 2인무에서 왕자의 춤이 좋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앳된 슈클랴로프의 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신나서 '브라보!'를 외쳐대는 어린 관객의 환호도 듣고 있으면 같이 기분 좋아지고...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