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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잔 성당'에 해당되는 글 23

  1. 2020.03.04 미샤가 책을 읽던 벤치 - 카잔 성당과 분수 2
  2. 2019.03.24 열주 사이로 보이는 돔 끄니기
  3. 2018.10.15 가을의 북방도시 산책 2
  4. 2018.09.12 9.11 화요일 밤 : 테라사, 수프 비노, 메조닌 카페, 이 도시에서 느끼는 내밀한 공포, 료샤와 대화
  5. 2018.07.03 나의 페테르부르크 4
  6. 2017.11.03 카잔 성당 열주, 돔 끄니기, 고인 물
  7. 2017.10.26 카잔 성당 돔과 푸른 하늘 4
  8. 2017.10.08 10.7 토요일 밤 : 사계(일리야 쥐보이 안무) 짧은 메모, 드디어 산책, 수프 비노, 많이 큰 레냐
  9. 2017.10.06 10.5 목요일 밤 : SINGER 카페, 수도원, 다시 도씨 묘, 비오는데 동분서주, 레냐 재회 2
  10. 2016.12.07 페테르부르크 상징 세 곳 산책, 저녁에 4
  11. 2016.06.26 6.25 토요일 밤 : 수프 비노와 알렉세이 재회, 첨 보는 공원에 감, 네프스키 대로에 드러누워봄, 카잔 성당 분수 앞에서 료샤와 레냐에게 해준 이야기, 아이스크림 2
  12. 2016.01.25 돔 끄니기 창 너머 카잔 성당과 네프스키 거리 풍경
  13. 2016.01.18 백야의 도시 페테르부르크 사진 몇 장 4
  14. 2016.01.01 Singer 카페에서 카잔 성당 바라보며, 찬란한 겨울 낮에 2
  15. 2015.10.25 백야의 페테르부르크, 낮에서 황혼까지 2
  16. 2015.09.23 네프스키 거리의 야경, 겨울 밤 4
  17. 2015.09.06 페테르부르크 골목과 거리 풍경들 4
  18. 2015.08.19 황금빛 푸른빛 러시아 사원 쿠폴들 8
  19. 2015.08.18 하얗고 거대한 구름 아래 부유하는 도시
  20. 2015.06.23 빛 바랜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 풍경, 조금 레닌그라드처럼 8
  21. 2015.01.03 오래 전 글 : Illuminated Wall + 카잔 성당 분수와 궁전광장 사진들 2
  22. 2014.12.04 카잔 성당 돔과 십자가 2
  23. 2014.07.20 열주 너머로 보이는 사원 지붕

 

 

 

카잔 성당 앞의 분수와 벤치들. 네프스키 대로에 면하고 있다. 건너편 가운데 보이는 건물은 돔 크니기. 여기 풍경은 전에도 여러번 올린 적이 있다. 이건 2017년 10월에 갔을 때 폰으로 찍은 사진들.

 

 

이곳은 미샤의 비밀 장소 중 하나이다. 단편 illuminated wall에서 미샤가 당 고위 간부의 파티에 가는 대신 여기 앉아 책 읽고 있는 것을 화자인 레냐(내 약혼자 아님 ㅋ)가 발견하는 장소이다. (예전에 writing 폴더에 전문을 올린 적이 있다. 여기 사진들과 함께) 검은 머리 여인이 앉아 있는 오른편 벤치가 바로 미샤가 앉아 있던 자리.

 

 

여기는 내가 사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셀 수 없이 여러번, 저 분수 앞 벤치에 잠시 앉아 쉬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했다.

 

 

 

 

 

석양이 내릴 즈음이면 카잔 성당의 열주들 사이로 부드러운 황금색 빛살이 천천히 내려온다.

 

 

여기는, 아주 오래 전, 지금보다 너무나 어리고 또 너무나도 순진한 동시에 또 치열했던 시절 친구들과 거닐고 웃던 곳이기도 하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면 카잔 성당의 쿠폴과 십자가, 파란 하늘이 보인다. 새들이 날아갈 때도 많다. 분수 앞 벤치에 앉는 사람들이 이따금 비둘기 모이를 주거나 빵부스러기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분수 앞에는 언제나 갈매기와 비둘기, 참새들이 우글거린다. 까마귀들은 이쪽으로는 모여들지 않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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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9. 3. 24. 00:44

열주 사이로 보이는 돔 끄니기 2017-19 petersburg2019. 3. 24. 00:44





역시 작년 가을 뻬쩨르. 폰으로 찍음. 카잔 성당 기둥들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의 징게르 건물. 2층까지는 돔 끄니기가 들어와 있다.



카잔 성당과 그 앞 분수, 돔 끄니기. 모두 내게 소중한 장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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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0. 15. 23:02

가을의 북방도시 산책 2017-19 petersburg2018. 10. 15. 23:02






지난 9월. 페테르부르크 산책하며 폰으로 찍은 사진 몇장. 위의 사진은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맞은편의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울타리. 살짝 빛바랜 듯 나와서 어쩐지 옛날 레닌그라드풍 느낌이 들어 맘에 드는 사진이다.







카잔 성당 열주 사이로 바라본 돔 끄니기 건물과 하늘 :)







이렇게 쨍한 날도 있었고,








이렇게 꾸무룩한 날도 있었다. 그래도 올해 뻬쩨르 여행에선 날씨 운이 대체로 좋았다.







운하를 따라 걷는 건 언제나 행복하고...








좁고 한적한 루빈슈테인 거리는 언제나 근사하고 뻬쩨르풍으로 모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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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어제는 많이 피곤했다. 뻬쩨르 와서 내내 기적적으로 비가 안와서 사흘 연빵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오늘도 비가 안왔다. 날씨가 아까웠지만 다리도 너무 아프고 피곤해서 오늘은 가까운 곳 카페와 음식점만 갔다.



원래 한정거장 거리의 돔끄니기 가서 책도 사려 했는데 귀찮아서 미뤘다. 낼 호텔을 옮기는데 사실 돔 끄니기는 지금 숙소에서 더 가깝기 때문에 합리적 행동은 오늘 가는 거였다. 심지어 오늘밤부턴 비도 온다는데.. 그러나 오늘만 사는 토끼는 피곤하단 이유로 그냥 방으로 돌아옴.



..



일곱시간 반쯤 잤다. 조식 먹고(스케치대로 보르쉬에 긴쌀밥 말아서 계란말이 대용 오믈렛이랑 연어찜 작은 토막, 올리브랑 양배추볶음 같이 먹음 ㅋ) 근처의 전망 좋기로 핫한 테라사 레스토랑에 갔다. 근데 밖에 앉기엔 이미 추워서 안에 앉았더니 그럭저럭...



테라사는 긴자프로젝트 체인에서 낸 레스토랑인데 이 체인들은 내부 인테리어가 쫌 비슷비슷하다. 넓고 밝고 좀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고 가격이 비싸다. 근데 내 취향엔 지나치게 넓고 지나치게 체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무슨 차 한잔이 유럽호텔이나 아스토리야보다 더 비싸.. 빈정 상함.



홍차 마시려다 보랏빛이 이뻐보인다는 이유로 신메뉴란 라벤더티를 주문했는데 망함. 아니, 라벤더에 꿀인지 시럽인지 하여튼 단걸 넣다니 꾸엑.. 게다가 생각했던 이쁜 보라색이라기보단 잉크 풀어놓은 색이어서 실망 ㅠㅠ






사진으로 보면 또 이뻐보이네.. 하지만 입맛 떨어지는 보라색이었다(내 취향 보라색과 좀 다름)


하여튼 테라사에 앉아 폭망한 라벤더 티랑 메도빅(이것도 이쁘게 꾸몄으나 녹색 가루를 뿌려줘서 내 맘에 안듬 ㅠ) 먹으며 스케치를 좀 하고 쉬었다.



그리고는 나와서 십여분 거리의 수프 비노 가서 해물 파스타로 맛없고 비쌌던 테라사를 정화함. 알렉세이가 있었음 더 좋았을텐데.



..




테라사와 수프 비노는 모두 카잔스카야 거리에 있다. 카잔 성당 뒷길이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길을 거슬러올라오다 카잔 성당에 들렀다. 이 성당 안에 들어온 건 정말 오랜만임. 여기는 밖에서만 보고 안은 잘 안 들어가게 되는 편이라..



하여튼 여기는 성 게오르기 이콘 앞에 초들이 있어서 거기 초를 켰다. 나에겐 언제나 용기와 평온이 필요하니까. 러시아인들이 해석하는 호전적 성 게오르기/성 조지와는 좀 다른 식의 용기.



..




걸어서 방에 돌아왔다. 좀 쉬다가 호텔 카페에 내려갔다. 이 메조닌 카페는 예전부터 좋아하던 곳이다. 이 호텔 안 묵어도 한번은 꼭 들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그랜드 호텔 유럽이 그랬듯 메조닌 카페도 전같은 충만함을 주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에. (가격은 물가를 반영해 비싸졌지만)







몇년전부터 즐겨 앉던 자리에 앉아 전과 같은 찻잔에 차를 마시고 똑같은 풍경의 아름답고 인공적인 내부를 보면서 문득 뭔가 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든 느낌도 들고...



사실 페테르부르크에 오면 이런 기분이 약간 들때가 있다. 종류는 좀 다르지만... 주로 마린스키 등 극장 갔다가 밤에 버스 타고 운하변을 지나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의 어둡고 고요한 건물들을 지나칠때 그러는 편이다. 시간이 흘러가는것에 대한 깊고 조용한 공포가 있다.



이것은 내가 시간이나 영원성을 받아들이는 시선과도 조금 통해 있다. 혹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생각 같은 것. 사랑하는 도시이지만 그 사랑만큼 어딘가 깊은 곳에는 익숙함과 무관심, 검은 운하의 물과 침묵과 쇠락에 대한 공포가 존재한다. 이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또 누군가와 소리내어 공유하고 공감하기도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몇년 전 글을 쓸때 미샤의 입을 빌어 바닥 없는 운하, 검은 물이 지나가는 파이프에 대해 썼다. 그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면, 존재의 깊은 공포가 없다면 이 도시는 내게 이토록 유의미한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곳도 아니었을 것이다.



..



메조난 카페에 한시간 반쯤 앉아있자니 일을 마친 료샤가 들렀다. 나는 그날 직전이라 그런지 몸도 피곤하고 입맛도 없고 자꾸 버거나 자극적인게 먹고팠다.



그래서 호텔에서 젤 가까운 버거킹에 감. 버거킹은 2집 동네에도 있어서 맥도날드가 더 땡겼지만 거긴 거리가 애매했다. 차 세우기도 안 좋고 그렇다고 버스 타고 또 걸어서 갈만큼 먹고픈것도 아니어서. 료샤는 맥도날드보단 부르게르낑(ㅋ) 파라서 좋아했다. 얘는 부르조아인데 입맛은 안 그래서 버거킹이랑 하리보 젤리 그런거 좋아한다.



..



방에 돌아와 며칠전 수퍼에서 사온 미니사이즈 아이스와인을 따서 나눠 마시고(료샤가 술이 너무 달다고 짜증냄. 내 입맛에도 너무 달긴 했다. 대신 독하지 않으니까 ㅋ) 이야기를 좀 나눴다. 오늘따라 노어가 힘들어서 버벅댔다. 영어 섞어서 말하는데 이것도 힘들다.



료샤는 나보고 언어 문제라기보단 옛날에 첨 봤을때보다 덜 총명해진거 같다고 반쯤 놀림 + 반쯤 진담으로 말했다. 야! 두뇌노화는 어쩔수 없단 말이야 ㅠㅠ



그래도 이넘은 내가 삐칠까봐 덧붙였다.



“ 맨첨에 봤을땐 진짜 무지 똑똑했단 말이야. 하여튼 그렇게 보였어. “


“ 그래, 한때 똑똑했다고 해줘서 고맙구나 ㅠㅠ “


“ 근데 그때도 щ 발음은 잘 못했어 ㅋㅋ 우다례니예(강세)도 좀 틀리고. “


“ 야! 우리말엔 그 발음 없단 말이야 흐헝... 우다례니예도 없어어 ㅠㅜ “



료샤는 역시 립서비스로 마무리했다.


“ 근데 억양이 좋으니까 쫌 커버돼. “



고맙다 친구야 흑흑 ㅠㅠㅠㅠ



..



료샤는 집에 가고 난 내일 숙소 옮겨야 해서 가방을 대충 꾸렸다. 아직 물건들 산게 거의 없어서 괜찮았다. 집에 갈때가 문제지 ㅠㅠ



밤중부터 비온다는데 안오면 좋겠다.



오늘 메모는 무지 길구나. 노어 버벅거리곤 대신 우리말로 길게 썼나... 이번엔 노트북 안가져와서 사실 폰으로 글쓰는게 어렵다. 폰으로 쓰면 어휘도 문장도 어그러진다. 나는 글을 머리와 손을 같이 사용해서 쓰는 편이라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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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3. 22:07

나의 페테르부르크 2017-19 petersburg2018. 7. 3. 22:07





작년 10월 초. 페테르부르크. 저녁에 운하 따라 산책하다 찍은 사진 한 장. 운하 너머 가운데로 보이는 둥근 돔과 십자가는 카잔 성당. 나의 도시. 나의 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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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카잔 성당 사진 두장 더.


이건 성당 열주와 그 너머로 보이는 돔 끄니기의 유명한 아르누보식 돔.





그리고 빗물 웅덩이에 비친 카잔 성당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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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10. 26. 23:05

카잔 성당 돔과 푸른 하늘 2017-19 petersburg2017. 10. 26. 23:05







10월. 페테르부르크.



일주일 내내 비가 왔다. 이날 잠시 하늘이 좀 보여서 열심히 걸었다. 이때도 중간중간 비가 오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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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내일 하루만 더 지내고 나면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생각하니 괴롭구나.



낮 열두시 마린스키 신관 발레 공연 티켓을 끊어두었었다. 료샤와 레냐도 갈까 했었는데 이것도 현대 발레이고 또 레냐가 보기에는 너무 플롯이 없어서(사실 레냐보다 료샤가 걱정 ㅋ) 그냥 나 혼자 보러 가기로 했다. 대신 내일 낮 공연은 불새니까 레냐도 볼만해서 같이 가기로 함.



아침에 보니 파란 하늘이 손톱만큼 보였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극장에 갔는데 하늘이 보이기 시작해서 부디부디 공연 끝나고 나와서도 날씨가 개어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제바아아알... 네바 강변 한번이라도 걷게 해주세요오오... 아직 청동기사상도 보러 못 갔다고요...



오늘 공연은 마린스키 무용수이자 젊은 안무가인 일리야 쥐보이가 안무한 현대발레 '사계'(THE FOUR SEOSONS)였다. 작년 여름에 젊은 안무가 워크숍 공연에서 쥐보이가 Seasons란 제목으로 이 발레의 초안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2~30분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에도 막스 리히터의 음악과 쥐보이의 안무가 잘 어우러져서 느낌이 괜찮았었다. 극장에서도 그렇게 여겼는지 2막짜리 발레로 전곡을 써서 안무하게 해주었고 몇달 전 초연을 했었다.




내가 리히터를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쥐보이의 안무도 우아하고 감성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와서 본 세가지 공연 중 오늘 공연이 제일 맘에 들었다. 그러니까, 프렐조카주의 Le Parc보다는 쥐보이의 이 작품이 좀더 내 취향이었다. 물론 주역을 춘 무용수가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이기도 했지만. 하여튼 오늘 공연은 꽤 좋았다.

(커튼콜 사진은 다 번져서 안 올린다... ㅠㅠ 3층 앞줄에 앉아서 너무 멀기도 했고 조명이 너무 밝았다 ㅠㅠ)



..



공연을 보고 나왔는데... 빗방울이 약간씩 떨어지고 있었다. 흐흑... 료샤랑 레냐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호텔 앞으로 왔는데 그때 다시 개면서 하늘이 보였다. 나는 '아아... 하늘이 보여, 제발 네바 강변을 산책하자' 라고 징징거렸다.



우리는 해군성 공원을 지나 청동기사상 쪽으로 갔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저 멀리에는 파란하늘도 좀 보였다. 표트르에게 인사한 후 길을 건너 네바 강변을 따라 거닐었다. 아아... 그래도 네바 강변 걷긴 하는구나 엉엉... 석양 보는 거라면 더 좋겠지만 엉엉 이게 어디야...










네바 강변을 쭉 따라 걷다가 에르미타주 쪽으로 틀었다. 궁전광장으로 가니 오늘이 바이커 축제일이었다. 그래서 광장에 수많은 오토바이들 집결. 가죽점퍼의 라이더들 우글우글. 내가 또 이런 걸 좋아해서(ㅋㅋ) 넋놓고 그 해골과 가죽 패션과 멋있는 오토바이들을 보고 있는데 료샤가 '야!' 하면서 날 확 잡아끌었다. 사람 많은데 들어가면 밟힌다고 ㅋㅋ 레냐는 '쥬쥬가 좋아하는 해골 옷이 많아!' 하고 소리를 쳤다 ㅋㅋ



..



그런데... 아틀라스 발을 만지며 소원을 빌고 막 내려오는 순간부터 빗방울이... 아니야 아니야... 나는 이 사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싶었지만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와서 카메라 집어넣고 폰으로 찍음. 우중충해진 거리 ㅜㅜ)




료샤의 차는 호텔 앞에 세워두었으므로 그리로 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금방 그치지 않을까? 우리 그리보예도프 운하 따라 조금만 걸으면 안될까?' 하고 불쌍하게 부탁했다. 료샤는 툴툴댔지만 레냐는 '그래그래!' 하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산 쓰고 그리보예도프 운하 쪽을 따라 걸어가는데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앞에서 비가 또 그쳤음. 그래서 우리는 미하일로프스키 정원을 좀 산책했고 다시 운하를 따라 나왔다. 나온 김에 좀더 걸어서 카잔 성당 쪽을 지나서 수프 비노에 갔다. 여기는 전에 bravebird님이 소개해주셔서 알게 된 곳인데 목소리가 다정하고 매력적인 알렉세이가 있는 곳이다. 료샤랑은 안 갔었다. (알렉세이 얘기하면 또 쿠사리 줄 게 뻔해서 ㅋ) 하지만 레냐랑 료샤도 배가 고프다 했고 나는 극장에서 먹은 빵 한조각 파인애플 몇조각이 전부라 정말 배가 고팠다. 수프 비노는 음식이 맛있고...



알렉세이가 있을까 궁금해하며 쭉 걸어서 수프 비노에 갔다. 그런데 슬프게도 알렉세이가 없었고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전에도 알렉세이는 주말에는 근무를 안했던 것 같음 ㅠㅠ 알렉세이 말고도 안면 있는 점원이 두엇 있긴 한데 오늘 가게 보던 남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는 얼굴이었음 알렉세이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하고팠는데 ㅠㅠ





하여튼 배고프고 너무 지쳐서 생강 레모네이드랑 치킨 수프랑 해산물파스타를 주문했다. 료샤는 핀란드식 우하(크림이 들어가는 생선수프. bravebird님이 여기 핀란드 우하를 좋아하심. 내 입맛엔 조금 짠 편이라 나는 치킨수프가 더 좋았다), 탕수치킨 비슷한게 곁들여진 볶음밥을 시켰고 레냐는 버섯파스타를 시켰다. 수프는 나랑 나눠먹었다. 이곳의 치킨 수프는 긴 쌀이 가득 들어 있고 무척 따뜻해서 꼭 닭곰탕에 밥 말아먹는 기분이라 몸이 따뜻해진다. 작년 여름에 너무 힘들때 여기서 그 수프 먹고 감동받은 기억이 있다.... 그때 음식을 별로 못 먹던 때였는데...



료샤도 레냐도 음식이 맛있고 분위기도 좋다고 했다. 료샤는 보통 이렇게 조그만 카페 같은 음식점엔 잘 오지 않는다(여기는 테이블이 5개 뿐이고 아주 작다) 사실 덩치 큰 료샤가 앉기에는 의자도 좀 좁은 편이었지만 음식이 맛있고 음악도 좋다면서 의외로 좋아했다. 다 먹은 후 레냐를 위해 치즈케익을 시켜주었다. 작년에 먹었을때 맛있었던 기억이 나서. 레냐는 무척 좋아했다.


..



나와서 걸어나오다 카잔 성당 앞 벤치에 앉아 잠시 쉬었다. 분수를 보면서. 오래전 미샤가 등장하는 illuminated wall 단편은 이 장소를 배경으로 시작되어 궁전광장의 원주 아래에서 끝난다. 레냐는 작년에 내가 이 분수 앞 벤치에 앉아 그 단편 이야기를 해준걸 기억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는데 레냐가 '쥬쥬가 쓴 글에서 미샤랑 레냐-자기랑 이름 똑같아서 잘 기억함-가 여기서 만났어 그치. 레냐가 여기서 아이스크림 먹었어 그치?' 하고 갑자기 떠올려서 반갑고 귀여웠다.





(그 단편에서 화자인 레냐는 이 벤치 중 하나- 잘 보면 오른쪽의 분홍색 옷 입은 분 앉아 있는 저 벤치-에 앉아 책 읽고 있는 미샤와 마주친다)





분수를 보고 있는데 아까 궁전광장에 모여 있던 바이커들이 우르르 몰려 지나갔다. 네프스키 대로를 꽉 채웠고 차들이 다 멈췄다.



우리는 엘리세예프스키 상점에 가서 과자들과 케익 구경을 했다. 뭘 사지는 않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호텔 쪽으로 돌아왔다. 료샤는 항상 차를 가지고 다니므로 버스를 타는 일이 거의 없다. 심지어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있어 나랑 레냐가 '바보!' 하고 소리쳤다. (버스 요금이 작년 겨울보다 더 올라서 지금은 40루블임)



호텔 로비에서 잠시 쉬었다. 나는 석양을 보고팠지만 흐려서 실패했다. 대신 황혼녘의 모이카 운하를 좀 거닐었다. 중간에 레냐가 다리 아프다고 했다. 나도 다리가 아팠다. 오늘 많이 걸었다. 나 때문에 어린 레냐가 많이 걸어서 미안해졌다. 안아주고 싶었지만 이제 레냐는 내가 안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다. 곧 나만큼 커질 것이다. 료샤는 예전같으면 레냐를 안아주거나 업어주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이제 다 큰 소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냐도 이제 '아빠, 다리 아파 업어줘'라고 떼를 쓰지 않는다. 그냥 '다리 아프다, 좀만 쉬었으면' 이라고 말한다. 레냐는 많이 컸다...



내가 '레냐야 미안해. 내가 오랜만에 뻬쩨르 와서 산책하고 싶었는데 너무 많이 걸었나봐. 다리 많이 아프지?' 라고 묻자 레냐는 '나는 금방 안 아파져! 나는 건강해!' 하고 소리치더니 갑자기 '쥬쥬가 집에 안 갔으면 좋겠어. 그러면 맨날 이렇게 같이 걸을 수 있는데. 그러면 하루에 이렇게 많이 안 걸어도 되는데' 라고 한다. 레냐는 빵긋빵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는데 나는 갑자기 그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꾹 참았다.






..




우리는 방에 돌아왔다. 레냐는 많이 걸어서 피곤했는지 침대로 기어올라가 살풋 잠이 들었고 나는 료샤와 소파에 앉아(방 업그레이드해준 거 다시 생각해도 참 좋다 ㅋㅋ) 얘기를 좀 나누었다. 감자칩과 하리보 젤리를 깔아놓고 석류 주스를 마셨다. 료샤는 맥주 마시고 싶어했지만 레냐 태우고 운전해야 하므로 나와 주스 나눠마셨다. 그는 몹시도 맥주를 마시고 싶어했다. 그래서 '에이. 여기 방 하나 잡아서 자고 갈까' 하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는 정말 방을 잡았다. 아니... 여기는 무려 아스토리야 호텔인데... 운전 안하고 맥주 마시고프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방 잡아서 자고 갈 수 있는 부르주아 녀석이 부럽구나... 나는 여기 묵어보려고 환불도 안되는 가장 저렴한 요금 간신히 찾아서 그나마도 큰맘먹고 예약한 거였는데...



료샤는 나보고 오늘 얼마나 걸었는지 확인해보라고 했다. 앱을 보니 8.8킬로나 걸었다. 많이 걸었다. 나는 극장도 갔었기 때문에 료샤랑 레냐보다 더 많이 걸었던 것이다. 료샤는 나에게 몸살날지도 모르니 자라고 했다.



우리는 좀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료샤는 레냐를 살살 깨웠다. 레냐가 집에 가기 싫다고 막 울려는데(이럴땐 아직 아기 같음 ㅋㅋ) 료샤가 아래층에서 자고 갈거라고 하자 '쥬쥬도?' 하고 빵끗 웃는다 ㅋㅋ 아니야 레냐야. 나는 여기서 자고 너는 아빠랑 다른 방에서 자는 거야 ㅋㅋㅋ



료샤랑 레냐는 아래층에 자러 가고 나는 씻고 나와 오늘의 메모를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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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목요일이다. 월요일에 체크아웃하고 돌아가서 한국에는 화요일에 도착하고 수요일 새벽기차로 지방 본사 내려가 출근을 한다. 즉, 여행도 이미 절반 이상 지나갔다. 내일이 되면 순식간에 남은 며칠이 가버리겠지...



오늘은 그래도 10시 안 되어 일어났다. 징게르 카페(singer cafe이지만 러시아어로는 징게르라고 읽는다)에 가서 아침 먹어보려고. 여기는 카잔 성당 전망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이 자리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나마 지금은 비수기이고 원체 날씨가 꾸리꾸리하니까 좀 나을 것 같긴 했다. 오늘도 창가는 꽉 차 있었지만 잠시 후 맨 구석의 창가 자리가 나서 잽싸게 그 자리로 옮겨 앉았다.



전에 왔을 땐 조식 메뉴가 좀 더 다양했는데 이번에 메뉴가 또 바뀌었다. 여기는 전망도 그렇고 워낙 명소라 가격이 좀 비싸다. 예전 겨울에 여기서 감자랑 버섯 넣은 블린과 따뜻한 열매즙을 무척 맛있게 먹었었지만 그 감자 블린은 다음 겨울에 와도 안 팔았다. 그리고 아직은 따뜻한 수제음료가 나오기 전이었다.







여기서도 오믈렛 시켜보았다. 여기서는 다른 건 이것저것 먹어봤지만 오믈렛은 안 먹어봤다. 치즈만 넣은 오믈렛에 작은 빵을 한개 추가하고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를 시켰다. 계란 프라이처럼 납작하게 등장한 오믈렛의 외양에 실망해서 별 기대 안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무척 맛있었다! 부드럽고 폭신하고 구름같은 식감에 치즈가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돌아가서도 생각날 것 같은 맛이었다.



비가 계속 내렸다. 오늘은 공연도 없고 나올 땐 비가 안 와서 징게르에서 조식 먹고 수도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블라지미르 대로의 랜드 수퍼마켓에 들렀다 와야지 하는 계획을 세웠었는데... 하여튼 트롤리버스를 타고 네프스키 수도원에 갔다. 역시나 네프스키 중심가이자 최고로 밀리는 곳인 쁠로샤지 바스따니야 역 앞에서 엄청나게 밀려서 한참 걸렸다. 지하철 타면 두세 정거장인데... 전에 사도바야에서 폭발 테러 난 후로 소심한 나는 지하철이 무섭다 ㅠㅠ



수도원으로 들어가는데 여전히 비가 왔다. 가랑비가 왔다가 주룩주룩 왔다가 잠깐 그쳤다가 다시 주룩주룩, 가랑비, 주룩주룩을 반복했다. 수도원 안의 교회에 들어가 가족과 나를 위해 초를 몇개 켰고 이콘에 손을 얹은 채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도를 했다.








나와서 비오는 수도원 경내를 좀 거닐었다. 햇빛 쨍한 날이 제일 좋긴 하지만 비오는 날의 수도원 산책도 나름대로 평온했다. 좀 걷다가 반지하의 찻집에 가서 수도원에서 구운 사과빵을 사서 그거랑 얼그레이로 몸을 데웠다. 사과빵은 언제나처럼 따뜻했고 달지 않고 맛있었다. 지난 겨울에 여기서 먹었던 양귀비씨빵이 무척 맛있었던 기억도 나서 그 빵을 두개 포장해 왔다.



나와서 입장권을 끊고 수도원 옆에 있는 묘지에 갔다. 지난 겨울에 왔으니 10개월 만이다. '나의 도씨'인 도스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에게 인사하러 갔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아무도 없었다. 땅은 진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비 때문에 꽃들의 색채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도씨 무덤 앞에도 꽃들이 놓여 있었고 손으로 쓴 쪽지도 놓여 있었다. 나도 작년에 손편지와 입술자국을 남기고 갔었지. 오늘은 그냥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도씨의 흉상을 바라보았고 아무도 없었기에 소리내어 그에게 이야기를 조금 해보았다. 인사를 했고 두어가지 소망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수도원의 초와 이콘에 대고 기도했을 때보다 더 부드럽고 간절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차이코프스키는 전과 다름없이 슬퍼 보였다. 비가 와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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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건너서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아주머니들이 어떤 청년에게 길을 가르쳐준다고 부산하게 친절을 베풀었다. 판탄카의 42번지인가 몇번지를 찾는데 몇번 버스로 갈아타야 하냐니까 '나 따라 내려' 라고 하는 분, '버스 갈아타는 거 아니야, 내려서 걸어가야 해!' 하는 분, '리쩨이느이에서 내려서 판탄카 운하 따라 걸어가다 왼쪽으로 꺾으면 돼' 라고 하는 분 등등... 그리고는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깔깔 웃으며 다 같이 '삐슈꼼!' 하고 외친다. '걸어서' 라는 뜻이다. 차 타고 갈 필요 없다는 얘기다. 여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지만 가끔 보면 의외로 친절하고 또 유머도 넘친다. (모스크바는 안 그렇다고 한다 - 페테르부르크 토박이 료샤의 주장인데 이 얘기는 웬만한 페테르부르크 토박이들이 쓴 여행책자에는 다 나와있음. 페테르부르크가 더 친절하고 예의바르다고 ㅋㅋ)



비가 오는데다 피곤해서 그냥 호텔까지 가버릴까 고민하다 그래도 내려서 블라지미르스카야 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랜드 수퍼마켓에 갔다. 올때마다 들르는 커다란 마트이다. 이것저것 살 것 같았는데 막상 산 건 별로 없었다. 쥬인 주려고 초콜릿 몇개를 사고, 내가 마실 타이가 잎차를 사고... 드이냐(중앙아시아 멜론)를 잘라서 컵에 파는 게 있어서 좀 비쌌지만 그거 샀다. 드이냐는 너무 커서 사먹을 엄두가 안나는데 잘라서 파니까....



생각보다 거의 물건을 안 샀기 때문에 '여기 오지 말걸' 하며 걸어오다가, 로모노소프 도자기 블라지미르스키 대로 지점에 들어갔다. 페테르부르크에는 로모노소프 샵이 여러개 있는데 이 지점은 내가 별로 안 좋아한다. 불친절한 편이라서. 그렇지만 며칠 전 갔던 발샤야 코뉴셴나야 지점에서 보지 못했던 게 있어서 찻잔을 결국 두개 샀다. 내가 그렇지 뭐... 근데 사실 제일 자주 가던 지점에 아직 안 갔다... 네프스키 한가운데 있는 곳... 거기 가서 또 다른걸 지를까봐 겁나는구나.



찻잔이랑 슈퍼에서 산 물건이 든 에코백, 카메라가 든 가방(비가 오니 dslr 가지고 다녀봤자 안 꺼내게 된다... 괜히 가지고 나왔어... 이번 여행 사진은 거의가 폰으로 찍음), 우산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호텔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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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와서 물건들 내려놓고 좀 쉬다가 로비 카페로 내려갔다. 료샤가 저녁에 레냐를 데리고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있자니 레냐가 나타났다. 세상에나, 넉달 전보다 더 커 있음! 얘 조금만 있음 정말 나보다 커지겠어 엉엉...



레냐는 달음질쳐 와서 나를 와락 껴안고는 '쥬쥬!!!' 하며 좋아 어쩔줄 몰랐다. 나도 너무 반가웠다. 그때 프라하에서 봤을땐 살이 쪽 빠져 있었는데 그새 다시 볼살이 통통해졌다 >.< 날 보자마자 '쥬쥬, 그러니까 여름에 왔어야지! 지금 오니까 비오고 날씨 안 좋잖아' 라고 쿠사리를 준다. 이럴땐 지 아빠 료샤랑 닮았음 ㅋㅋ



로툰다 카페에서 셋이 저녁을 먹었다. 레냐는 내일도 학교 가야 하기 때문에 저녁 먹고 좀 놀다가 집에 가야 했다. 즉, 엄마인 이라가 있는 집이다. 료샤네 집에서 잘 수 있는 것은 주말 뿐인데 뭐 어쩔수 없다. 양육을 하는 것도 엄마인 이라이고, 또 레냐는 금요일까지 등교를 해야 하니까.



그래도 이라는 레냐를 위해 꼬박꼬박 주말마다 료샤에게 아이를 보내주고 있다. 이라는 재혼을 했으니까 레냐에겐 새아빠도 있지만 그래도 주말마다 아빠를 보러오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레냐는 여전히 료샤와 사이가 좋다. 그런 걸 보면 이라는 좋은 엄마 같다.



(그런데 전에 이런 말을 했더니 료샤가 '쳇, 내가 이라한테 위자료를 많이 주니까 그렇지!' 라고 투덜거렸다. 그는 아직도 전부인인 이라를 무서워해서 웬만하면 대화를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내가 이라였음 돈만 받고 레냐 너한테 꼬박꼬박 안 보냈을지도 모르는데! 이라가 착한 거야!' 라고 하자 료샤는 '이라가 얼마나 무서운지 네가 몰라서 그래!' 하고 한숨만 팍팍 쉬었다)


료샤는 뭔가 붉은 고기로 되어 있는 걸 먹었고(스테이크 비스무리한 거였는데 기억 안남), 레냐랑 나는 치킨버거랑 감자튀김이랑 시저샐러드 시켜서 나눠먹었다. 비싼 곳이라 치킨버거에 들어가는 닭고기가 튀기거나 다진 패티가 아니고 그릴에 구운 닭가슴살이었음! 나야 구운 닭가슴살을 좋아하니 맛있었지만 이런거 모르고 시키는 사람들은 낭패일 듯 ㅋㅋ 레냐도 역시 어린아이라 '잉, 나는 KFC가 더 맛있는 거 같아' 라고 한다 ㅋㅋㅋ 그러자 옆에서 꾸역꾸역 지 밥을 먹고 있던 료샤가 '닭보다 소가 더 맛있단 말이야! 특히 너! 너는 붉은 고기 좀 먹어야 돼! 넌 왜 맨날 닭 아니면 생선만 먹냐!' 하면서 갑자기 나를 공격했다 ㅠㅠ 웃기는 놈이야 정말 ㅠㅠ



저녁 먹은 후 레냐랑 료샤는 아이스크림을 시켜서 먹었는데 나는 김릿을 한잔 시켰다. 지난 겨울에 여기서 마셨던 김릿 생각이 나서. 료샤는 나를 노려보며 '너 그거 마시면 훅 간다!' 하고 경고했다. 오늘 내가 비오는 길을 많이 돌아다닌 것과 원체 술이 약한 걸 잘 알아서 그렇다. '김릿은 별로 안 독하잖아!' 하자 '저번에 벨리니 마시고도 맛 갔잖아!' 라고 받아치는 료샤. 그렇다, 예전에 유럽호텔 바에서 낮에 벨리니 마시고 갑자기 꿈나라로 가서 료샤가 방까지 업어다 준 적이 있다(ㅠㅠ 료샤는 그때 이후로 나에게 절대 밖에서 술 마시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경고경고... 특히 낮술 절대 안된다고 경고경고경고....) 변명하자면 그 바에서 만들어준 벨리니는 내가 베니스에서 마셨던 그 벨리니가 아니었다. 복숭아 벨리니 함량보다 독한 알콜 함량이 훨씬훨씬 많았었다!



나 : 너도 맨날 술 마시잖앗!


료샤 : 나는 오늘 안 마셔! 운전할 거니까!


나 : 더 잘됐다. 네가 안 마시니까 나는 너를 믿고 마실 수 있다. 계속 이거 마시고팠는데 혼자라서 안 마시고 있었단 말이야!


레냐 : 아빠, 쥬쥬가 먹고 싶은대로 하게 해줘.



하여튼 그래서 나는 김릿을 주문했다. 진과 라임주스.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립 말로, 테리 레녹스의 칵테일. 여기에선 진과 보드카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나는 물론 진을 택한다. 여기 칵테일에는 레몬주스가 추가로 들어간다. 입맛 때문인지, 아니면 버거를 먹고 난 후여서인지 모르겠으나 오늘 마신 김릿은 지난 겨울에 마셨을때보다 덜 시큼했다. 대신 좀더 독한 느낌이 들었다.



료샤 말이 맞았음. 김릿 마신 후 10여분 정도 띵해져서 소파에 기대어 졸았다 ㅠㅠ 료샤가 쿠사리 주고 있는데 레냐가 '아빠! 쥬쥬는 힘들게 일했으니까 그냥 놔둬!' 하고 내 편을 든다. 그러자 도리어 내가 미안해졌음... 어린애 앞에서 김릿을 마시고 취해버린 나 ㅠㅠ 엉엉... 약혼녀의 약한 모습을 감싸주는 나의 의젓한 약혼자(9세) 레냐.



술기운은 곧 가셨다. 아마 피곤했었던 모양이다. 레냐는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레냐는 항상 따뜻하고 통통하고 보들보들하다 :) 그런데 레냐는 반대로 나에게 '쥬쥬는 보들보들하고 좋은 냄새가 나~' 라고 한다 ㅋㅋ 우리가 그러고 있으면 료샤가 '야! 쟤는 향수 쓰니까 좋은 냄새 나는 거야' 라고 툴툴거린다. 그러면 레냐는 나에게 '쥬쥬 향수는 울엄마 향수보다 좋아~ 오늘 냄새도 좋아!' 그런다. 앗싸, 이번에 면세점에서 질렀던 향수 성공했나보다 ㅋㅋㅋ 비오고 추운 날 어울리는 향이긴 하지... 그런데 좀 어른스러운 향이라서 레냐가 좋다고 하는 것에 살짝 놀랐다. 얘 전에는 장미향이나 꿀향 뿌렸을 때 좋아했었는데 ㅋㅋㅋ



술기운이 가신 후 료샤랑 레냐 데리고 방에 올라왔다. 레냐에게 붕어빵 과자와 양갱, 러버덕 젤리, 리락쿠마 빼빼로, 밀크 캬라멜과 그외 마트에서 긁어모은 각종 과자들을 안겨주었다. 료샤는 '야! 왜 나한테는 맥심이랑 볶음너구리 몇개밖에 안 주더니 레냐한테는 이렇게 많이 주냐!' 하고 투덜거린다. 아빠 맞아?



레냐는 과자들 때문에 완전 행복해져서 해해 웃고 ㅋㅋ 그러다가 집에 가기 싫다고 징징대기 시작... '이거봐아, 오늘은 쥬쥬 방도 넓잖아... 나 여기서 자고 갈래 앙앙' 하고 떼쓰기 시작. 료샤가 엄하게 '안돼! 엄마가 집에서 기다리잖아!' 라고 하자 레냐는 아빠를 조금 원망하다가... '그러면 내일은 아빠 집 가니까 쥬쥬랑 오래 놀 수 있지?' 라고 금방 누그러졌다 ㅠㅠ 이럴때 보면 측은하다... 물론 레냐는 다른 이혼가정에 비해서는 유복하게 살고 또 아빠랑도 꼬박꼬박 보고 있으니 상당히 좋은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매주 엄마랑 아빠 집을 오가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레냐를 데려다줘야 했기 때문에 9시 좀 안돼서 료샤가 일어섰다. 내일 보기로 했다.



그래서 료샤랑 레냐는 돌아갔고 나는 어제 러쉬에서 추가로 샀던 배스 밤을 욕조에 던져넣고 15분 정도 몸을 담그고 있었다. 이번 것은 '펌프킨'이었는데 꿀냄새 나는 거 있냐고 했더니 딱 맞는 건 없지만 달콤하고 따뜻한 향이라고 준 거였다. 근데 별로 그런 냄새 아니고 오히려 시트러스 냄새가 남 -_- 하여튼 욕조에 몸 담그고 있었더니 피로가 좀 풀렸다. 술기운이 다시 좀 올라오다 말았다. 술 마시고 목욕하면 안되는데 ㅠㅠ 오늘은 약 안 먹고 자야지.



목욕하고 나와서 버거랑 김릿 때문에 갈증 나서 드이냐를 먹었다. 참외나 멜론류 별로 안 좋아하지만 드이냐는 맛있다. 이거 먹으면 쥬인 생각난다. 쥬인이 이거 좋아하는데 ㅠㅠ 쥬인아, 쥬인 생각하면서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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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게.. 3시 반쯤 되면 해가 지고... 이 사진은 4시~4시 40분 사이에 찍은 것들임.

카잔 성당.


알렉산드르 푸쉬킨. 예술광장.

오늘은 도씨에게 먼저 가느라 좀 늦었어요,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 : 야! 내가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선밴데! 나한테 먼저 와야지!

토끼 : 맨날 당신한테 먼저 왔잖아요! 아직 표트르한텐 가지도 않았어요.

푸쉬킨 : 시인이 황제보다 우선하는 게 당연하지!

토끼 : 맞아요 사랑합니당~


(표트르 : 청동기사상 ㅋㅋ)


그리고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그리보예도프 운하는 얼어붙었고 눈이 쌓여 있었다. (추웠다.. 체감온도 영하 15도라고 나왔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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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양말 두개 신어야지... 어그부츠 신었다고 방심해 양말 하나만 신었는데 오늘 발 시려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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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불편한 자리에 앉아 공연 보면서 너무 무리했는지 온몸이 아프고 쑤셨다. 정오 넘어서까지 멍하게 누워 있었다. 그런데 바깥 날씨가 좋았고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부터 비가 온다고 해서 오늘 바리쉬니코프 전시랑 수도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억지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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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긴 했는데 이래저래 나오니 두시 반이 넘어 있었다. 날씨가 좋다 못해 엄청 덥고 뜨거웠다. 땀이 날 정도였다. 아무것도 안 먹었기 때문에 근처 봐두었던 몇개 베이커리 카페에 들렀으나 다들 사람이 엄청 많았다. 인기 많은 곳들인가보다. 그래서 좀 걸어가다가 카잔스카야 거리로 이어지길래 수프 비노에 가기로 했다.

 

지난번에 갔을 땐 알렉세이가 없었는데 오늘은 있었다. 혼자 가게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아는 체는 안하고 그냥 인사를 한 후 저번에 먹었던 닭고기 수프와 루꼴라 해산물 파스타, 생강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다 먹은 후 조용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알렉세이에게 살며시 물었다.

 

나 : 제 실수가 아니라면, 알렉세이 맞죠?

알렉세이 : 맞아요, 알렉세이.

나 : 혹시 저 기억하세요? 작년 여름에 왔었는데.

알렉세이 : 네. 사실 들어왔을때 알았어요! 그때 와서 같이 얘기하고 블로그로 알게 된 친구 얘기하셨죠.

나 : 맞아요. 그 친구도 기억하시나요?

알렉세이 : 네, 얼마 전에 왔었어요! 기억해요!

나 : ㅎㅎ 그 친구랑 저랑 여기서 2주 전에 드디어 만났답니다.

알렉세이 : 정말요? 인터넷으로만 안다고 하셨잖아요. 만난 적 없다고.

나 : 네! 그래서 우리 만나면 꼭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그게 이루어졌어요. 같이 여기 오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그 친구는 먼저 따로 오고 저도 얼마전에 왔는데 그땐 당신이 없었어요.

알렉세이 : 아, 그랬구나... 저 없을 때 오셨었군요!

나 : 네, 그때 비와서 춥고 아팠는데 저 닭고기 수프 먹고 엄마 생각이 났고 몸이 따뜻해져서 좋았어요.

알렉세이 : 그 말 들으니까 저도 기분이 좋아요.

나 : 친구는 한번밖에 못왔다고 굉장히 아쉬워했어요. 얘기 많이 나눴냐고 물어보니 별로 못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또다시 인사를 하며 얘기를 하기로 했어요 :)

알렉세이 : 너무나 기뻐요. 여기를 기억해준다는 것, 그리고 여기를 다시 찾아주신다는 게요. 친구분도 잘 기억해요.

나 : 그 친구의 닉네임은 독수리고 저는 토끼에요 ㅋㅋ

알렉세이 : 그래서 독수리와 토끼가 만나게 된 것이군요!

나 : 네, 우리는 이삭 성당 앞에서 만났답니다.

알렉세이 : 너무 근사한 얘기네요! 근데 당신은 어떻게 노어를 그렇게 잘 하세요?

나 : 아니에요, 많이 잊어버렸어요 ㅠㅠ

알렉세이 : 아니에요, 노어를 정말 잘해요. 어디서 배우셨어요?

(외국인이라 그렇게 생각한 것임. 진짜 잘해서 그런건 아닐듯 ㅋㅋ)

나 : 전 노어랑 노문학 전공했고 옛날에 여기서 조금 살았어요. 요즘은 1년에 한번쯤 꼭 와요. 페테르부르크가 제 2의 고향 같아요.

알렉세이 : 왜 제2의 고향이에요?

나 : 음, 여기가 너무 아름다웠고... 러시아 문학과 극장이 좋았고... 그냥 도시랑 사랑에 빠졌어요. 부러워요,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계시는 것이.

알렉세이 : 우리 도시를 좋아해줘서 저도 기뻐요. 그리고 저를 기억해주고 여기를 기억해줘서도 기뻐요!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신다니 그래서 아까 러시아어로 책을 읽고 있었군요

나 : 네, 도블라토프 좋아해요.

알렉세이 : 우와, 좋은 작가죠.

나 :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도요. 기억하세요? 작년에 왔을때 제 친구가 당신이 알렉세이 까라마조프 연상시킨다고 했던 거

알렉세이 : (웃음) 네!

나 : 친구 얘기가 다시 나와서 말인데, 친구랑 여기서 다시 보고팠는데 시간이 안돼서 먼저 돌아갔어요. 저도 며칠 후 돌아가거든요. 그 친구가 꼭 안부인사를 전해달라고 했어요.

알렉세이 : 제 안부도 꼭 전해주세요!

나 : 그리고, 작년처럼 이번에도 저랑 같이 사진 한장만 찍어주세요 :) 친구에게 보내주려고요.

알렉세이 : 그럼요~ 좋아요.

 

그래서 우리는 내 핸드폰으로 좀 웃긴 셀카를 찍었다. 자세가 엉거주춤해서 내 얼굴이 좀 웃기게 나왔다만... 하여튼 bravebird님~ 문자로 사진 보내드렸어요 :)

그때 다른 손님이 왔다, 그래서 나는 알렉세이에게 '저 또 올게요~' 라고 인사했고 알렉세이도 '다시 오시기로 한 거예요~ 또 봐요!' 하고 인사를 나눴다.

 

이곳과 조용한 목소리의 알렉세이를 알게 해주신 bravebird님 고마워요. 다시 얘길 나눈 알렉세이는 작년보다 몇배로 더 좋았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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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 비노에서 나와 카잔 성당 앞으로 간 후 버스를 타고 판탄카 근처 시티은행에 가서 다시 돈을 찾았다. 생각보다 돈을 많이 쓴거 같다. 근데 어차피 이번에 온 것 자체가 유리지갑 가루이므로... ㅠㅠ

 

전시 보러 갈 시간은 모자랄 것 같아서 그냥 수도원에 가기로 했다. 료샤에게 연락이 와서 수도원에서 보자고 했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없이 22번 버스를 탔는데... 아뿔싸... 22번은 트롤리버스만 수도원에 가고 나머지는 다른 버스가 가는데 생각없이 버스를 탄 것이다. 보통땐 버스가 오면 무조건 노선도를 잘 읽어보고 타는데 오늘은 좀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점점 버스는 이상한 곳으로 가고... 돌아서 가나 싶었지만 체르니셰프스카야 지하철역을 지나고 또 한번도 안와본 거리 이름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때 깨달았다. 완전 잘못 탔네... 내려서 반대방향 차를 타고 네프스키 대로로 도로 가야 수도원 가는 버스를 타려나보다...

 

그래서 포춈킨스카야 거리(전함 포템킨 그 이름이다)에서 내렸더니 타브리체스키 공원이 있었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마침 공원이 있어서 거기 잠깐 들어갔다. 영국식 정원인데 토요일이라 수많은 가족들이 나와서 잔디밭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공원을 좀 거닐었는데 덥고 목마르고 엄청나게 아이스크림이 먹고팠다. (원래 공원에 오면 러시아 아이스크림이 먹고프다) 다시 네프스키 대로로 나가 수도원으로 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너무 힘들어서 료샤에게 연락을 했다.

 

나 : 친구야, 버스를 잘못 타서 듣도보도 못한 곳에 왔어... 무슨 포춈킨스카야 거리에서 내려서 무슨 타브리체스키 공원에 있어.

료샤 : 아이고 이 멍충아! 웬 포춈킨스카야 거리! 수도원이랑 완전 다른 쪽이잖앗!

나 : 잉 ㅜㅜ 나는 외국인이잖아 ㅠㅠ

료샤 : 바부팅이. 거기 울집에서 가까워. 레냐랑 그리로 갈게.

 

료샤는 스몰니 사원 근방에 살고 있다. 대충 지리를 보니 정말 스몰니랑 가까운 것 같긴 했다. 그래서 공원에 잠시 앉아 햇살 쬐며(좀 땀흘리며 ㅠㅠ) 친구를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내가 먹을 거라도 잘 주게 생겼는지 비둘기 몇마리가 어정거리며 다가왔다. 먹을 거 없어 ㅠㅠ

 

 

..

 

료샤가 잠시 후 차를 몰고 왔다. 레냐가 막 뛰어왔다. 햇살 뜨겁다고 야구모자에 앙증맞은 선글라스까지 껴서 진짜 귀여웠다. 료샤도 모스크바 출장 다녀오느라 며칠만에 보는 거였다. 레냐가 역시나 찰싹 안기며 좋아했다.

 

레냐 : 쥬쥬우~~ 하얀 옷 입었어, 아이 좋아~

나 : 엥, 내가 하얀 옷 입는 게 좋니?

레냐 : 쥬쥬 하얀 옷 입은 거 첨 봤어. 아이 좋아 아이 예뻐~

료샤 : 거봐! 맨날 해골 티셔츠 따위 입지 말고 꽃무늬랑 그런 블라우스랑 뭔가 파진 옷을 입으라 했잖아!

나 : -_- 마지막 단어는 못 들은 것으로... (레냐의 귀를 막아라 ㅋㅋ)

(오늘 그 잔무늬가 있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었다. 근데 어깨가 헐렁해져서 안에 얇은 캐미솔을 받쳐 입었다만 좀 패여 있긴 했다. 여기서나 입지.. 하긴 돌아가면 도로 살쪄서 블라우스가 헐렁하지 않을지도 ㅋㅋ)

료샤 : 얼굴도 좀 나아졌네. 역시 너는 뻬쩨르가 몸에 맞아. 그냥 여기 계속 있지...

나 : 나도 그러고 싶네 ㅠㅠ

료샤 : 수도원 갈 거야?

나 : 아니, 나 너무 피곤해 친구야...

료샤 : 그럼 모이카 쪽에 맛있는 식당 있는데 거기 밥먹으러 가자.

나 : 그래그래~

 

..

 

 

그래서 나는 료샤 차를 타고 편안하게... 네프스키 대로로 나갔는데... (료샤가 얘기한 모이카 운하 쪽 식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네프스키 대로를 통과해야 함) 편안해지려다가...

 

료샤 : 으잉? 이게 뭐야!

레냐 : 아빠! 도로에 사람들이 걸어다녀!!!

 

네프스키 중간까지 왔을 때였다. 그러니까 딱 가스찌니 드보르와 유럽호텔 부근이었는데 거기서부터 차량 통제를 하고 있었다. 알고보니 오늘이 '알릐예 빠루사'(진홍색 돛배 - 유명한 러시아 낭만소설 제목인데 여기서 연루되어 매년 진홍색 돛을 단 스웨덴 범선이 네바 강에 들어오고 그날은 여름 축제날이다) 축제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졸지에 가스찌니 드보르부터 네프스키 대로는 차 없는 거리가 되었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대로로 쏟아져나와 걷고 있었다.

 

 

 

료샤가 막 짜증을 쏟아내려는데 나랑 레냐는 흥분해서 '우와! 네프스키에 차가 없어! 우와! 우리도 나가자!' 하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료샤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료샤 : 어휴! 이게 뭐야!

나 : 료슈카!!! 나 네프스키에 사람 없는 거 첨봐!!!!

료샤 : 뭐가 그렇게 신기해! 너 옛날에 승전기념일 때 네프스키에서 깔려죽을 뻔 했다며!

나 : 아 맞다. 옛날옛날에 그런 적 있다. 그때도 차량 통제했지. 그치만 그땐 인파 때문에 무서웠는걸. 이거봐, 사람들이 너무 편하게 걸어다녀. 친구여, 차 어디 세워놓고 우리도 잠깐 도로로 나가면 안되니?

 

료샤는 뭐라뭐라 투덜댔지만 하여튼 차를 카잔 성당 뒤쪽 어딘가로 끌고 가서 댔다. 경찰 아저씨와 또 한참 뭐라뭐라 했다. 골치아픈 건 차 주인에게 맡겨두고 나는 레냐랑 뛰쳐나갔다.

 

레냐 : 쥬쥬~ 우리 아이스크림 먹어?

나 : 응, 아이스크림 먹어!

레냐 : 아이 좋아~

나 : 오늘 안 먹었어?

레냐 : 응, 아까 사달랬는데 아빠가 쥬쥬 만나면 분명히 아이스크림 먹을 거니까 그때 먹어야 한댔어.

나 : 너네 아빠가 참 나를 잘 아는구나 ㅠㅠ 가자, 아이스크림 사줄게~

 

나는 레냐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 가판대로 갔다. 레냐는 딸기가 든 마그낫 아이스크림(외제)이 맛있다며 그걸 골랐고 나는 '에스키모 레닌그라드스꼬예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료샤는 덥다면서 콜라를 골랐다.

 

레냐 : 쥬쥬는 신기해.

나 : 왜?

레냐 : 러시아 사람 아닌데 러시아 아이스크림 좋아해. 에스키모 먹어. 울 엄마아빠같아. 울 엄마아빠도 에스키모 좋아해.

(에스키모는 소련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러시아 아이스크림임 ㅋ)

나 : 난 러시아 마로제노예(아이스크림)가 제일 좋아. 레냐가 좋아하는 마그낫이랑 하겐다즈보다 에스키모랑 다샤가 더 좋아.

레냐 : 정말? 하겐다즈보다? 진짜?

나 : 응. 제일 맛있어, 에스키모랑 다샤. 에스키모는 다 맛있어. 콘이랑 하드랑 이 세모난 레닌그라드스꼬예랑.

레냐 : 쥬쥬 옛날 사람 같아.

료샤 : 쥬쥬 옛날 사람 맞어! 아빠 또래야!

레냐 : 아빠는 아저씨고 쥬쥬는 아가씨인데! 내 약혼녀인데!!

료샤 : 쥬쥬가 나보다 두살이나 나이 많...

(내가 잽싸게 그의 입을 틀어막음 -_- 이 자식이... 사랑엔 나이도 국경도 없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그 에스키모 레닌그라드스꼬예. 은박지로 싸여 있으니 진짜 촌스러워 보인다 ㅋㅋ 하지만 맛있다. 너무 달지 않고 우유맛도 많이 나고.

 

 

우리는 차 없는 네프스키 대로로 나가서 햇살을 쬐며 도로를 거닐고 사진을 좀 찍었다. 나는 뜨거운 도로 위에 앉아보았다. 잠깐 눕기까지 했다. 료샤가 혀를 찼다.

 

료샤 : 어휴 너 뭐해... 왜 누워 ㅠㅠ

나 : 네프스키에 차가 없으니 좋아서... 내가 언제 이렇게 해보겠니~

료샤 : 레냐가 따라하잖아! 레냐야 눕지 마! 옷 버려!

레냐 : 쥬쥬는 하얀 옷인데도 누웠는데 ㅠㅠ

료샤 : 쥬쥬는 어른이잖아!

레냐 : 어린이 싫어, 어른 할래 엉엉...

나 : 레냐야 내 무릎에 앉아.

 

그래서 나는 네프스키 대로에 가방을 베고 누웠고 무릎에 레냐를 앉힌 채 파란 하늘과 눈부신 태양, 하늘 위로 깔려 있는 트롤리버스와 트램 전선들, 솟아오른 건물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열기가 올라왔지만 누우니까 신기하게 좀 시원했다. 무릎에 앉아 있는 레냐는 따스했다. 그리고 옆에 철퍽 주저앉아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며 촌스럽니 어쩌니 하고 있는 료샤가 웃겼다. 친구야, 명품 선글라스 끼고 명품 재킷 입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콜라 마시며 사레들리는 네가 더 웃기거든!!

 

..

 

잠시 후 우리는 일어났고 카잔 성당 분수 앞 벤치로 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바람을 쐬며 분수를 구경했다. 레냐가 물었다.

 

레냐 : 쥬쥬, 왜 여기가 제일 좋아?

나 : 몰라. 옛날에 처음 왔을때부터 여기가 좋았어. 그래서 내가 한국에 돌아간 후에 너무너무 뻬쩨르가 그리워서 소설을 하나 썼는데 배경이 바로 이 벤치였단다.

레냐 : 우와, 정말?

나 : 응. 그리고 있잖아, 주인공 말고 주인공 친구가 있는데.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사람이거든. 그 남자 이름이 레냐였단다 :)

레냐 : 우와아! 나야? 내 이름 붙인 거야?

나 : 아니, 그때는 너네 아빠도 알기 전이었고 레냐는 태어나기 전이었어. 근데 레냐라는 이름이 좋아서 붙였어.

레냐 : (으쓱으쓱) 히히히... 레냐는 착해? 레냐는 뭐하는 사람이야?

나 : 레냐는 마린스키 극장 무용수였단다.

레냐 : 슈클랴로프처럼!

나 : 슈클랴로프처럼 ㅋㅋ

레냐 : 우와아... 그러면 주인공은? 주인공 이름은 뭐였어?

나 : 미샤. 그 사람도 마린스키 무용수였단다.

레냐 : 내 친구도 미샤 있어, 세명이나 있어.

나 : 응 그래그래. (젤 흔한 이름이니 ㅜㅜ)

레냐 : 그러면 그건 무슨 이야기야? 레냐랑 미샤가 여기서 아이스크림 먹어? 우리처럼?

나 : 음, 옛날옛날인데, 1970년대였는데, 지금처럼 여름이었어. 레냐는 우리처럼 길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어.

레냐 : 에스키모?

나 : 아마 그랬겠지? 옛날이니까. 그래서 레냐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여기로 왔는데 이 벤치에 친구인 미샤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단다.

료샤 : 너처럼! 너 공원에 앉아 책보는 거 좋아하잖아.

나 : (엥, 듣고 있었던 거니?) 응, 나처럼. 미샤는 나처럼 이 자리를 좋아했단다. 그래서 분수 앞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

레냐 : 레냐가 미샤한테도 아이스크림 나눠줬어? 친구는 나눠먹어야 되는데.

나 : 어.... 내가 그 생각은 못해서 안 썼는데... 다음에는 꼭 그렇게 쓸게. 근데 미샤는 아이스크림을 잘 안먹었어. 케익도.

레냐 : 왜애? 그건 쥬쥬랑 틀리네?

나 : 응, 미샤는 무용수라서 단 걸 안 먹었단다.

료샤 : 쳇. 나 그놈 누군지 알아. 그 배나무 거리에 사는 놈! 극장까지 걸어가는 놈, 차도 없고... 축구도 안 한다는 그 불쌍한 녀석.

나 : 어머 너 그거 기억하는구나! (예전에 거리 이름 짓는다고 료샤에게 지금 쓰는 가브릴로프 본편 얘길 잠깐 했었음. 그 얘기들은 맨 아래 링크 추가)

료샤 : 당연하지! 배나무 거리에 살고 축구도 안 하는데 얼마나 불쌍하냐! 기억하지!

레냐 : 아빠, 자꾸 끼어들지 마! 그래서 미샤랑 레냐는 뭐했어?

나 : 미샤는 그때 어딜 가야 했는데 가기가 싫었어. 그래서 안 가고 여기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레냐가 걱정이 돼서 '친구야, 거기 가보렴' 그랬단다.

레냐 : 레냐는 착해. 미샤는 나쁘다. 말 안들으면 나쁘댔는데.

나 : 미샤는 나쁜게 아니고 옳지 않은 일을 시키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뿐이야.

레냐 : 옳지 않은 일이 뭐였는데?

나 : 미샤는 극장에서 관객들을 위해 춤을 추는 무용수인데 높은 사람들이 불러서 자기네 집에 와서 춤을 추라고 했거든.

레냐 : 그건 나쁘다!

료샤 : 뭐가 나빠, 요즘도 다 그런데. 그게 인생인데.

나 : (애기 앞에서 참 좋은 얘기 하는구만 -_-)

레냐 : 아빠, 조용히 해! 그래서 미샤는 안가?

나 : 응, 안가고 레냐랑 미샤는 궁전광장으로 갔단다.

레냐 : 그래서?

나 : 미샤는 높은 사람 집에 가서 춤추는 대신 궁전광장의 알렉산드르 원주 아래에서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멋있는 춤을 췄단다.

레냐 : 이야!! 나는 미샤가 좋아!

료샤 : 분명히 kgb가 잡아갔을거야 -_-

나 : (그건 그렇긴 하지만... 애기 앞에서 제발 ㅠㅠ)

레냐 : 그래서?

나 : 춤을 춘 다음에 미샤랑 레냐는 사도바야 거리로 걸어가서 블린을 먹었단다. 끝!

레냐 : 우와, 너무너무 좋은 이야기야! 아빠, 우리도 블린 먹어!!!

 

료샤는 모이카 운하 쪽의 근사한 레스토랑 어쩌고 하며 투덜거렸지만 레냐도 그렇고 나도 갑자기 블린이 먹고팠다. 그리고 료샤도 갑자기 '너네 때매 나도 블린 먹고 싶어지잖아!' 하고 이상해했다.

 

그래서 우리는 료샤의 고급 차는 그대로 세워놓고 근처의 체인점에 가서 블린을 왕창 시켜먹고 행복해했다 :)

 

 

.. 아이스크림 먹던 레냐와 저 벤치에 앉아 책 읽던 미샤의 이야기는 전에 writing 폴더에 올린 적 있다. illuminated wall이란 제목이다. 그 이야기는 여기서 읽을 수 있다 : http://tveye.tistory.com/3385

.. 카잔 성당 분수 앞 벤치와 미샤에 대한 얘기 추가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059

 

.... * 배나무 거리와 미샤에 대해 료샤가 한 말들

- 그가 배나무 거리와 미샤에 대해 알게 된 경위 : http://tveye.tistory.com/3187,

- 그가 배나무 거리의 미샤와 축구에 대해 투덜댄 경위 : http://tveye.tistory.com/3249

- 그가 배나무 거리의 미샤에게 축구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한 경위 : http://tveye.tistory.com/3386

 

..

 

내일 날씨가 좋으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가기로 했는데... 제발 비가 안 오게 해주세요 ㅠㅠ

 

:
Posted by liontamer

 

 

페테르부르크에는 명소가 차고도 넘치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돔 끄니기이다. 직역하면 '책의 집'이란 뜻인데 페테르부르크의 유서깊고 커다란 서점이다. 네프스키 대로와 그리보예도프 운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르누보 건축 양식의 건물도 매우 아름답다. 맞은편에는 카잔 성당이 있다. 페테르부르크에 온 관광객들이라면 한번쯤 들르게 되는 곳이고 페테르부르크 시민들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물론 내게도 추억의 장소이다. 오래 전 처음 페테르부르크에서 연수를 했을 때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나중에는 수리를 한다고 문을 닫았었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굉장히 편하고 쾌적해졌다. 나도 페테르부르크 갈때마다 이곳에 두세번 이상 들른다. 지금이야 다른 서점들도 많이 생겨서 그곳들에도 가지만, 그래도 돔 끄니기만의 특별한 분위기란 게 있다.

 

돔 끄니기 2층 한쪽에는 유명한 Singer 카페가 있다. 이 카페에서 먹는 아점도 좋고 차 한잔, 케익 한조각도 좋다. 창 너머로 카잔 성당이 보이는 명당이기도 하고. 가격은 좀 비싼 편이지만... 이 카페에서 찍은 사진도 몇 장 올린 적 있으니 cafe singer 태그를 클릭하면 나올 듯. 나중에 이 카페의 맛있는 음식 사진들도 몇 개 더 올려보겠다.

 

사진은 작년 7월에 갔을 때 찍은 것이다. 이때는 카페가 꽉 차서 그냥 카페 옆 창문에서 바깥 풍경만 좀 찍었다. 카잔 성당이 보인다. 창밖 풍경 몇 장.

 

 

 

 

 

 

 

 

 

 

 

서점 내부는 이렇다. 1층은 여행서. 기념품, 예술 관련 서적 등이 진열되어 있고 2층에는 러시아/외국 문학작품들이 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사진의 진열대는 '러시아 추리소설' 코너.

 

 

 

 

 

이건 외국 문학 코너.

저 창문 너머는 그리보예도프 운하. 운하 따라 내려가면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코너 사진. 윗단이 도블라토프 책들. 전부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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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6. 1. 18. 19:39

백야의 도시 페테르부르크 사진 몇 장 russia2016. 1. 18. 19:39

 

 

작년과 재작년 여름, 페테르부르크를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 몇 장.

너무 추워서 조금이라도 빛과 온기를 느껴보려고...

 

위의 사진은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에서 카잔 성당 쪽을 바라보고 찍은 것.

 

 

 

모이카 운하. 마린스키 극장 가는 길에.

 

 

 

스뜨렐까.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

 

 

 

판탄카 운하 따라 걷다가, 선착장 표지판.

 

 

 

레트니 사드에서 발견한 까마귀

 

 

 

청동기사상 앞 잔디공원

 

 

 

이삭 성당이 보인다.

 

백야의 페테르부르크는 너무 찬란해서 때로는 도시 전체가 온통 창백하고 탈색된 것처럼 보인다.

 

 

 

네바 강. 멀리 보이는 건물 실루엣은 에르미타주.

 

 

 궁전광장의 포석.

 

 

 

모이카 운하.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백야 막바지라 이때가 되면 이미 어두컴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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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작년 2월. 페테르부르크.

 

페테르부르크에 가면 한번은 꼭 들러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로 네프스키의 명소인 Singer 카페이다. 유명한 돔 크니기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는데 창 너머로는 카잔 성당이 보이는 명소이다. 창가 자리는 잡기가 쉽지 않아서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이 날은 굉장히 추운 날이었지만 하늘이 파랬고 햇살이 쨍 하고 내리쬐는 날이었다. 마린스키에서 운하 따라 실컷 산책한 후 지친 몸으로 여기 왔는데 창가 자리가 비어 있어 행복해 하며 앉았다. (그러나 너무 햇볕이 따가워서 나중엔 좀 괴로웠다 ㅠ)

 

 

 

이렇게 카잔 성당이 보인다.

 

겨울이라 분수는 작동하지 않지만... 따스해지면 분수도 보인다. 그때 사진은 다음에 또 올려보겠다.

 

이 곳 음식은 대체로 맛이 괜찮은 편이고 블린이나 디저트도 맛있다. 그러나 도심인데다 명소이기 때문에 가격은 다른 카페나 음식점보다는 비싼 편이다.

 

 

 

이때는 런치 메뉴를 주문했다. 나무열매 모르스, 야생버섯 수프, 새우 크림 파스타였다.

 

 

 

겨울 햇살이 정말 찬란하고 따가웠다.

 

 

 

 

 

스메타나 넣어서 먹었다. 수프 맛있었다.

 

 

 

 

 

 

 

이번 겨울에도 가고 싶었는데... 2월까지 너무 바쁘니 과연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리우니 사진만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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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10. 25. 21:33

백야의 페테르부르크, 낮에서 황혼까지 russia2015. 10. 25. 21:33

 

 

7월의 페테르부르크. 낮에서 황혼녘까지. 여기저기 산책하며 찍은 사진 몇장.

 

그리보예도프 운하의 다리.

 

 

 

돔 크니기 건물 측면의 장식 램프.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 왼편으로 카잔 성당의 돔이 보인다.

 

 

 

카잔스카야 거리.

 

 

 

이건 청동기사상과 해군성 공원 중간지점. 해는 이미 졌다.

 

 

 

이삭 성당의 열주와 램프. 산책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포취탐스카야 거리의 어느 건물. 숙소 맞은편에 있었는데 창문 너머로 새어나오는 불빛 때문에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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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3. 20:52

네프스키 거리의 야경, 겨울 밤 russia2015. 9. 23. 20:52

 

 

지난 2월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떠나기 전날 밤, 마린스키 신관에서 공연 보고(라트만스키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춥고 캄캄하고 숙소도 네프스키 대로 중심에 있어서 그냥 버스를 탔다. 당시 머물던 호텔은 고스치니 드보르 정류장에서 더 가까웠지만 한 정거장 전인 카잔 성당 앞에서 내렸다. 마지막으로 야경 보고 가려고.

 

내 카메라는 오래된 니콘 dslr인데 무거운 걸 못 드는 탓에 렌즈도 기본 번들 중 하나라서 딱히 야경을 근사하게 잡지는 못한다(카메라 탓이 아니고 실은 내 탓임.. 사진 찍는 걸 좀 제대로 배워보고픈데..) 어쨌든 그나마 건진 몇 장 올려본다.

 

카잔 성당.

지난번에 이 카잔 성당과 그 앞의 분수 사진들 여러번 올렸다. 이때는 겨울이라 분수는 작동하지 않았다.

 

옛날 유학생 시절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카잔 성당을 보면 낮과는 달리 상당히 괴괴한 느낌이 들었다. 모양도 그렇고 규모도 커서 더 그런 것 같다.

 

 

 

이 근사한 아르누보식 건물은 전에 몇차례 올렸던 돔 크니기 건물.

 

 

 

그리고 걸어가면서 찍은 네프스키 대로 사진 몇 장.

 

 

 

 

예카테리나 카톨릭 성당. 나의 비밀 장소 중 하나. 여기는 그 성당 앞 광장이다.

낮에는 저기서 그림을 팔고 또 초상화가들이 늘어서서 초상화를 그리지만 밤에는 이렇게 골조만 남아 텅 빈 느낌을 자아낸다.

 

 

 

 

 

길을 건너야 하므로 이렇게 지하도로 들어갔다. 이 지하도는 지하철 '고스치니 드보르' 역과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그나마 음침한 느낌이 덜하지만 옛날엔 진짜 음침했다. 여기서 이것저것 많이도 샀었지. 불법으로 학생 교통권을 판매하는 아저씨들도 있었고(거기서 한번 산 적도 있다). 그리고 이 지하도를 지나다 보면 바이올린 켜는 악사도 있었고... 옛 기억이 새록새록...

 

 

 

지하도를 건넜다.

맞은편에 보이는 저 큰 건물이 고스치니 드보르. 백화점이다. 한때는 페테르부르크 제일의 백화점이었다. 규모가 엄청나다. 아주 기다란 건물이 이어져 있다. 옛날엔 가끔 갔는데 갈때마다 길을 잃었고 다리가 엄청 아팠다. 제정 러시아 시절 생긴 곳이다. 모스크바의 '굼', 페테르부르크의 '고스치니 드보르'.

 

 

 

이때 내가 머물렀던 호텔은 네프스키 대로에서 꺾어들어가 미하일로프스카야 거리로 들어가면 나온다. 예술광장 바로 앞. 그랜드 호텔 유럽 전경. 왼편이다. 오른편에는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건물이 있다.

 

 

 

호텔 앞에 다 와서...

좋은 호텔이다. 여름엔 비싼 데다 방이 없어서 못 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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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9. 6. 19:50

페테르부르크 골목과 거리 풍경들 russia2015. 9. 6. 19:50

 

 

 

월요병을 달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 거리와 골목 곳곳 풍경 사진 몇 장.

 

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처럼 많이 오래된 도시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도시이지만 그래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기껏 3백년을 조금 넘긴 도시치고는 그 역사의 무게도 상당하다... 혁명의 도시. 전란과 기아, 죽음의 도시. 그리고 문화와 예술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레닌그라드. 페트로그라드. 러시아어 발음대로 하자면 상뜨 뻬쩨르부르그. 시민들이 부르는 애칭 삐쩨르. 베드로의 도시. 표트르 대제의 도시.

 

산책하면서 찍었던 건물이나 골목 구석 사진들 올려본다. 주로 귀퉁이들... :)

 

위의 사진은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

 

 

 

이건 이삭 성당의 거대한 기둥.

 

 

 

이건 겨울 운하에서 그리보예도프 운하 쪽으로 접어드는 길.

 

 

 

카잔스카야 거리에서 네프스키 대로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 오른편의 검은 기둥이 카잔 성당 열주, 왼편으로 보이는 근사한 건물이 돔 크니기 건물.

 

 

 

이건 아마 모이카 운하 쪽으로 빠지는 길이거나 카잔스카야 거리 쪽에 있던 건물 같은데... 긴가민가..

 

 

 

페스텔랴 거리.

 

 

 

이건 아마도 리체이느이 대로를 따라 걷다가 발견한 표지판인 것 같다. '벨린스키 거리' 표지판이다.

 

 

 

여기는 루빈슈테인 거리. 네프스키 대로에서 뻗어나온 조그만 거리인데 요즘 맛집들과 카페들로 인기 많은 곳이다.

 

 

 

그리고 여기는 내가 머물렀던 숙소가 있는 포취탐스카야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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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8. 19. 21:07

황금빛 푸른빛 러시아 사원 쿠폴들 russia2015. 8. 19. 21:07

 

 

페테르부르크를 거닐다 보면 아름다운 사원들이 참 많다.

 

이번에 갔을 때 찍어온 내가 좋아하는 사원 쿠폴 사진들 몇 장. 쿠폴은 정교 사원의 동그란 돔을 가리키는 단어다. 양파 모양으로 동그랗다고 해서 쿠폴이란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

 

 

 

이건 카잔 성당.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유명한 사원이라면 이삭 성당을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풍경 엽서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건 역시 이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피의 구세주 사원)

 

이거랑 모스크바의 바실리 사원이랑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크레믈린의 바실리 사원(테트리스에 나온다)은 붉은색 계열이고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은 금색과 푸른색 계열이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를 나타내는 색깔도 거의 그렇다)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사진은 전에도 전경을 여러번 올렸으니 태그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그럼 이 사원 쿠폴들 사진 몇 장~

 

 

 

 

 

 

 

 

 

마지막으로는 이삭 성당 :)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는데 요즘은 하도 도시 개발을 해대서 더 높은 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예전만 해도 이삭 성당보다 높은 건물은 못 짓게 했는데...) 저 황금빛 돔은 실제 황금을 녹여 만든 지붕이다. 엄청 많이 들어갔다고 함. 정확한 숫자는 지금 기억이 안 나네.. 찾아보려니 귀찮다. 하여튼 황금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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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8. 18. 20:49

하얗고 거대한 구름 아래 부유하는 도시 russia2015. 8. 18. 20:49

 

 

이건 지난 7월 24일.

 

구름이 많이 낀 날씨였다. 네바 강변 따라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 몇 장. 페테르부르크는 바람도 많이 불고 구름도 워낙 많은데다 하늘이 낮아서 걷다보면 구름이 정말 가깝게 느껴진다.

 

거대한 구름. 네바 강. 궁전 다리. 건너편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 첨탑.

 

 

 

 

 

 

 

 

 

네바 강변의 유명한 청동 사자상.

 

사자야, 구름 보고 있니?

 

 

 

보너스로 카잔 성당과 분수 사진.

 

저 카잔 성당 분수는 내가 쓰고 있는 미샤에 대한 이야기들 중 가장 첫번째 단편이었던 illuminated wall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저 분수 앞 벤치는 주인공 미샤의 비밀 장소 중 하나이다. 그 글과 카잔 성당 분수 이미지들은 이전에 writing 폴더에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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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난 2월. 페테르부르크.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러시아 박물관 갔다가 나오면서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자주 갔던 로모노소프 가게를 못 찾아서 헤맸던 날이었다. 아주 습하고 싸늘한 날이었음. 길거리는 진창... 하여튼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 풍경 한 장. 날씨가 안 좋아서 후지X 디카를 들고 갔었다. 날씨도 꿀꿀하고 흐려서 딱 옛날 레닌그라드 느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톤 다운해서 찍어봤다.

 

가운데 멀리 보이는 건 바로 카잔 성당. 이 거리에서 보면 절반만 보인다 :)

 

.. 이날 헤매다가 고생은 했지만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를 발견했었다.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35, http://tveye.tistory.com/3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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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새해가 되었다. 올해는 2012년 여름에 구상해서 작년에 시작한 글을 반드시 끝내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내가 이 글의 주인공을 제일 처음 떠올렸던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90년대 후반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극장과 발레와 사람들, 예술가와 창작, 욕망과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는 물론 나이도 어렸고 경험도 자료도 부족했다. 이후 나는 극장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문화예술계에 속한 바닥에서 일하게 되었다. 매우 부족하지만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고, 또 사고의 지평도 넓어졌다.

 

내가 맨처음 이 사람을 떠올렸을 때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따로 있었고 배경도 90년대였다. 미샤는 그 글의 조역이었고 일종의 안티 히어로,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존재였는데 아마도 그건 그때 내가 아직 어렸고 다분히 낭만적인 환상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미샤는 훨씬 예리하고 어둡고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인물, 정치적이고 지배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지금 내가 되살려낸 미샤는 당시의 그와는 많이 다르다. 본질적인 몇 가지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로 변형되었다.

 

어쨌든 당시 내게 있어 '발레 소설'(그땐 그렇게 가제를 붙였다)은 좀더 경험이 쌓였을 때 쓸 수 있는 미래의 소설이었다. 그래서 난 다른 글들을 썼고 이후 직장에 들어가고 삶에 짓눌리면서 서서히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다만 중간중간에 그 다른 글들에 삽입되는 에피소드 몇개에 미샤를 등장시켰을 뿐이었다.

 

그리고 2012년 여름에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전에 구상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여러 인물들을 모두 놓아둔 채 이 사람을 되살려냈다. 아마도 그때가 '그때'였던 것 같다. 그를 되살려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 이제 나는 그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해 가을에 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고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구상했던 장편은 작년 10월에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아래의 이야기는 오래 전에 썼던 글이다. 2002년. 미샤를 등장시켰던 세번째 단편이었다. 다른 글에 삽입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독립적인 단편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때 이미 미샤는 내가 맨 처음 생각했던 인물과는 꽤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내가 이 글을 썼던 이유는 이 인물에 대한 갈망보다는 이미 다녀온지 오래되어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그때는 통역대학원을 휴학한 상태였고 백수로 놀고 있었다. 지금 직장에 입사하기 한 달 전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미래는 불투명했다. 다시 그곳에 갈 수 있을지조차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짧은 단편은 사실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에 대한 나의 연서와 같았다.

 

단편의 제목은 앨런 긴스버그의 시 howl의 어느 구절에서 따왔다. 이 시는 어제 발췌했던 장편의 서두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된다.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백야의 레닌그라드(소련 시절 페테르부르크의 이름) 거리를 걷는 두 남자에 대한 얘기다. 둘은 키로프 극장(지금의 마린스키) 무용수이다. 화자는 두 남자 중 하나인 레오니드 핀스키이다. 애칭은 레냐.

 

이 단편은 이전에 내가 쓴 몇 편 안되는 미샤의 이야기들 중 가장 투명하고 부드러운 소설이었다. 왜냐하면 단편의 화자 자체가 선량하고 맑은 심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 순진한 화자의 필터링 속에서 미샤는 일종의 낭만적인 반항아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이 글을 쓸 때 나는 이미 미샤가 본질적으로는 좀 더 어둡고 뒤틀린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적 배경은 1975년 7월. 주인공인 미샤는 스무살이다. 키로프 극장 제1 솔리스트. 9월 시즌이 되면 수석무용수로 승급하게 될테지만 그건 이 단편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지나이다는 미샤와 오랫동안 같이 무대에 올라간 파트너 발레리나. 다닐로프는 극장 행정감독, 아사예프는 예술감독이다. (이건 내가 소설 속 현실을 구축하기 위해 변형을 가한 것이다. 실제의 키로프 체계와는 다르다)

 

미샤의 본명은 미하일이다. 미샤는 애칭. 친한 사이인 레냐는 종종 미셴카라고도 부른다. (이건 더 친밀하게 부르는 애칭임)

 

십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이라 지금 다시 읽으면 조금 뒷목덜미가 따끔거리긴 하지만.. 어쨌든 올려본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의미에서.

 

글은 약 13페이지 분량이라 짧다. 끝나고 나면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 사진 몇 장.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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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minated wall

  

  

 

   

 

 

 

 

 

illuminating all the motionless world of Time between.. 

... Allen Ginsberg, Howl ...

     

 

1975년 7월, 레닌그라드

 

 

미샤와 마주친 곳은 카잔 성당의 분수 앞이었다.

 

이미 열 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지만 7월 초의 레닌그라드는 백야의 도시였다. 주위는 여전히 부드러운 광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홀로 네프스키 거리를 걷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무대에서 내려와 동료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었지만 단원들의 반수 이상은 유럽으로 여름 투어를 떠나서 남아 있는 동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는 나도 투어에 끼어야 했지만 여름이 시작될 무렵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남게 되었다. 아쉬운 일이긴 했지만 레닌그라드의 여름보다 아름다운 여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아이스크림을 한손에 든 채 걸음을 옮기면서 가을 시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부상은 그리 심각한 편이 아니었고 디렉터인 아사예프는 ‘라 바야데르’의 안무를 새로 손보고 있었다. 리허설은 다음 주부터였는데 솔로르 역으로는 나와 미샤가 더블 캐스팅되어 있었다. 위에서는 미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지만 그 무렵 미샤 야스민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까다로운 배역인 솔로르의 심리를 탁월하게 해석하는 무용수였기 때문에 그도 도리가 없었다. 나와 미샤의 스타일은 무척 달랐기 때문에 아사예프는 새로운 버전에서 솔로르를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었다.

 

나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서 판탄카를 거쳐 알렉산드린스키 공원 앞을 지났다. 여왕의 거대한 동상이 위압적인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낮이나 이런 백야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한겨울 저녁 발레학교 시절 공원으로 나왔다가 문득 이 동상을 올려다보면 그 푸르스름한 청동빛을 발산하는 자태에 오싹한 느낌이 들곤 했다.

 

다리가 조금 아팠기 때문에 나는 카잔 성당의 벤치에서 좀 쉬었다 가기로 했다. 예카테리나 여왕과 마찬가지로 한밤중의 카잔 성당은 어딘지 악마적인 위압감을 느끼게 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7월이었고 밤은 낮처럼 환했다.

 

분수가 하얀 물보라를 뿜고 있었다. 나는 분수 쪽으로 다가가다가 미샤를 발견했다. 그는 물방울이 튀어 반쯤 젖어 있는 벤치 귀퉁이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곳에서 미샤와 마주친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카잔 성당의 분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고 그는 자주 그 벤치에 와서 책을 읽곤 했다. 주로 도스토예프스키나 푸시킨, 혹은 레르몬토프였는데 가끔은 구하기 힘든 영어 소설들이기도 했다. 그는 금지된 원서들을 구할 수 있는 지하 루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종종 그는 내게 락 음악 잡지나 갱지에 인쇄된 비트 작가들의 시집을 빌려주곤 했다. 내킬 때면 그 자리에서 번역해 읽어주기도 했다.

 

그렇다, 이곳에서 미샤와 마주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사실만 제외한다면.

 

나는 벤치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 안녕, 미셴카. ”

“ 레냐. ”

 

미샤는 고개를 들더니 내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혼자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방해받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발레학교에서 바로 옆 침대를 썼으니까.

 

“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열 시에 출발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다닐로프가 극장 앞으로 오라고 했잖아. ”

“ 그건 다닐로프가 해결할 문제지. ”

 

미샤는 책장을 덮고 잠시 분수의 물줄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책표지를 힐끗 보았다. 안드레예프의 단편집이었다. 책갈피가 끼워져 있는 부분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느 곳을 읽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단편집에는 미샤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실려 있었다. ‘그는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라는 마지막 문장은 학창 시절의 미샤에게 있어서는 성서 구절과도 같았다. 졸업하기 일 년 전인가 우리는 연극학교 친구들의 발표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단편을 각색한 작품이 올라갔다. 미샤는 연출가였던 루벤의 청을 수락해 나레이션을 맡았는데 난 그가 그 까다로운 문장들을 푸시킨 시처럼 줄줄 외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설마, 미하일. 농담이겠지? 다닐로프가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잘못하면 새 시즌에 못 나가! ”

 

그건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나와는 달리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미샤가 이번 유럽 투어에서 제외된 것은 일종의 징계 조치였다. 지난 해 겨울에 우리는 베를린에 투어를 갔는데 미샤는 한밤중에 호텔을 몰래 빠져나가 락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갔던 것이다. 다닐로프는 펄펄 뛰었고 당과 극장의 명예를 운운하며 여름 투어를 보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물론 그는 사죄하며 근신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키로프의 지도부에게 있어 미샤 야스민은 골치 아픈 무용수였다.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름이나 가을이면 무용수들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근교의 호화롭고 아름다운 별장으로 불려가곤 했다. 그런 별장의 소유주들은 (소유주라는 어휘에 어폐가 있다 해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진짜 소유주들이었으니까. 그게 소비에트 시대의 진짜 러시아어라는 것이다) 거의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력한 정치가들과 당의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별장에서 파티를 열었고 키로프나 볼쇼이 등 유명 극장의 무용수들을 불러서 춤을 추게 하거나 오페라 가수들을 데려와 아리아를 부르게 했다.

 

그 날 미샤는 다닐로프의 인솔 아래 파트너인 지나이다 세도바와 함께 페테르고프의 별장에 가게 되어 있었다. 역시 당의 권력자인 별장 주인은 대단한 발레 애호가였기 때문에 측근들을 불러 파티를 열기로 했던 것이다. 1군에 속한 무용수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투어를 떠나버렸고 나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미샤가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난 시즌에 미샤가 보여준 무대들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애호가인 주인은 특별히 그와 세도바의 이름을 거명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 그 때 페테르고프로 가게 되어 있던 무용수들은 미샤와 지나이다 세도바, 그리고 올가 베론스카야와 세르게이 카로빈스키였던 것 같다. 비록 후자의 둘은 확신하기가 어렵지만.

 

그런데 지금, 페테르고프로 향하는 차에 타고 있어야 할 미샤 야스민이 내 곁에 앉아 분수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태평스럽게 책을 읽으면서.

 

“ 못 나가게 하라지. ”

“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미셴카! 널 주시하고 있는 게 다닐로프 뿐만이 아니란 걸 몰라? ”

“ 그래, 저기도 하나 있군. ”

 

미샤가 손을 들어 성당 쪽을 가리켰다. 나는 무심코 성당의 거대한 기둥 쪽을 보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복을 입은 대머리 남자가 기둥 뒤에 서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키로프 극장 무용수 정도 되면 감시 요원들 얼굴 한둘은 알고 있기 마련이다. 비교적 말썽 없이 지냈던 나 역시 외국 투어를 나갈 때마다 길거리에서 그런 얼굴을 발견하곤 했다. 하지만 대낮처럼 환한 네프스키 거리에서, 단독 감시 요원이라니! 언제 미샤는 그렇게 요주의 인물이 된 것일까?

 

차가운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미샤는 흔히 말하는 편안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아니었다. 아마 그는 누구와도 그런 식의 우정을 나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발레학교를 다녔고 극장에서도 좋은 동료로 지내고 있었다. 키로프에 들어가고 처음 일 년 동안은 함께 아파트를 쓰기도 했다. 그 후 극장 측에서는 공동 아파트에서 미샤를 끌어내 지나이다와 함께 2인 단독 아파트에 살게 해 주었다. 극장 측은 젊은 무용수들이 가정을 이루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내게 류다를 붙여 준 것처럼. 류다와 나는 학창 시절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곧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지만 미샤와 지나이다는 사적으로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 무대 위에서 그 둘이 보여준 듀엣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환상을 품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따금 나는 지나이다가 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어쨌든 그는 나의 친구였다. 극히 짧은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몇 명의 지인들과 먼 키예프 부근으로 추방당한 드라마 극장 배우가 스치고 지나갔다. 미샤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게 될까? 그에게는 자기 몸을 보존할 만큼 충분한 공포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질책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 것 같았다. 미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책을 옆에 끼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불쑥 물었다.

 

“ 다닐로프가 몇 시까지 기다려줄 것 같아? ”

 

나는 시계를 보았다. 열시 반이었다.

 

“ 최대한 30분? 극장에 전화를 해. 아니면 차라리 이쪽으로 차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 편이 낫겠어. ”

“ 30분이면 걸어가도 충분해. ”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성당 기둥 쪽을 바라보았다. 대머리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우리는 별 말 없이 카잔 성당을 나와 거리를 따라 걸었다.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지나면서 미샤는 가판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샀다. 이번에는 푸시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였다.

 

채색 삽화가 들어가 있는 책장을 넘기면서 미샤가 입을 열었다.

 

“ 누굴 출래? ”

“ 뭐? ”

“ 이걸 안무한다면 누굴 추고 싶냐고. ”

 

나는 잠시 흥미진진한 그 서사시의 등장인물들을 떠올려 보았다. 수염을 기른 마법사 체르노모르, 혼인 잔치 때 마법사에게 납치된 아름답고 활기찬 왕녀 류드밀라. 아내를 찾아 떠나는 정의의 용사 루슬란, 루슬란이 마주치게 되는 황야의 거대한 머리, 루슬란을 돕는 노인, 마녀 나이나. 그리고 류드밀라의 구애자들이자 루슬란의 적 세 명, 루슬란과 싸우다 패해 물에 빠져 죽는 검은 기사 로그다이와 비겁하게 기회를 노리는 파를라프, 그리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반해 평온한 호반의 어부로 변하는 라트미르... 모두가 한 번쯤은 무대에서 재현해 볼만한 역이었다.

 

“ 당연히 루슬란이지. 주인공이잖아. ”

“ 난 루슬란에게 주역을 주지 않을 건데? ”

“ 그럼 누구? 류드밀라를 출 생각은 아닐 테고. ”

“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지만 난 로그다이를 출 거야. ”

“ 잘 어울리는데 그래. 막판에 물의 요정에게 끌려가는 걸로 끝나겠군. ”

“ 내 발레에는 네 명 밖에 안 나와. 루슬란, 로그다이, 파를라프, 라트미르. 그게 전부야. ”

“ 그리고 주인공은 로그다이고 말이지? ”

“ 그래. 주인공이 아니어도 루슬란을 춰주겠어? ”

 

내 머리 속에는 그 책의 중반부가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루슬란의 칼에 찔려 검은 강물로 떨어지는 로그다이, 깊은 물속으로부터 올라와 젊은 기사의 싸늘한 시체를 품에 안고 만족한 듯 웃으며 사라지는 물의 요정...

 

“ 그래, 물론이지. 네가 안무를 한다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

“ 조만간 할 거야. ”

“ 아사예프가 가만히 있을까? ”

“ 아마 극장 레퍼토리에 들어갈 수는 없을 거야. ”

 

생각에 잠긴 얼굴로 미샤가 말했다. 나는 그가 안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레학교 시절에도 그는 종종 짧은 춤들을 고안하곤 했다. 극장에서도 역할의 해석을 놓고 아사예프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다반사였다.

 

미샤는 운하를 지나 방향을 틀었다. 계속해서 루슬란과 로그다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나는 문득 우리가 궁전 광장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 미셴카! 이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 저쪽으로 돌았어야지! ”

“ 저쪽? 저쪽에 뭐가 있다고. ”

“ 농담이 아니잖아, 극장으로 가려면 반대편으로 갔어야 하잖아. 이쪽은 에르미타주라구! ”

 

물론 내 얘기는 헛된 설명에 지나지 않았다. 미샤는 나와 마찬가지로 레닌그라드 토박이였고 누구보다도 도시 골목골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극장엔 안 가. ”

“ 다닐로프는? ”

“ 말했잖아. 그건 다닐로프의 문제야. ”

 

미샤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검은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부드러운 에메랄드 청록색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지나 궁전 광장으로 걸어가면서 미샤가 말했다.

 

“ 그 돼지 같은 놈들 앞에서 춤을 추라고? 뭐가 좋아서? ”

 

가슴이 답답하게 당겨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사복 차림의 대머리 남자를 찾았다. 눈에는 띄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이 미샤에게 그런 고집을 부리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별장에 불려가 춤추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름대로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무용수였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는 얘기긴 했지만 발레리나들과 밤을 보내기 위해 무용수들을 부르는 역겨운 나리님들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미샤는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다닐로프가 아니었다. 다닐로프나 아사예프 같은 지도부와 미샤의 마찰은 만성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미샤는 본능적으로 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 말은, 불같은 성격의 다닐로프조차도 미샤를 극장에서 쫓아낼 생각까지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 권력자들의 분노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가 아는 미샤는 타협하지 않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순간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궁전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꼭대기에 천사상이 조각된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가 엷은 핑크색을 띤 하늘에 반사되어 어렴풋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미샤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 하루뿐이잖아. 네가 전에 그런 곳에 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

“ 그래, 이제 그만둘 때가 됐어. 레냐, 그만둘 때가 됐다고. ”

 

미샤는 기념비를 둘러싼 울타리에 한 손을 대고서 여전히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우린 아직도 20년을 기다려야 할 거야. 어쩌면 20년이 지나고도 아무 것도 오지 않을지도 몰라. 페테르고프 별장의 주인들은 단지 그 이름만 바뀔 뿐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뱃속으로 그곳에 머무르면서 우릴 부를 거야. 당이 뭐가 어떻다는 거야, 우리에겐 아무 상관없는 얘기야. 다닐로프더러 별장에 가서 춤을 추라고 해. 이런 밤에는 그 자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

 

미샤는 엷은 핑크빛 띠가 드리워진 듯한 파르스름한 하늘을 가리켰다.

 

“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 ”

 

나는 그가 당에 대한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귀를 막고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에메랄드 청록색 에르미타주 궁전 기둥 너머로 대머리 남자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맙소사, 그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샤가 더 이상 과격한 말을 내뱉지 않기를 빌었다. 그들이 나를 호출한다면 지금 들은 모든 이야기는 그를 시베리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스크나 카프카즈 등지로 보내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심문 앞에서 침묵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공포에 질려 나는 미샤가 입을 다물어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때 그가 말했다.

 

“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 ”

 

나는 그가 들어 올린 손끝을 보았다. 한밤의 여름 하늘이 부드러운 붉은 보랏빛과 푸른빛 광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름의 레닌그라드 밤하늘이었다. 눈부신 빛으로 흘러넘치는 하늘.

 

미샤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권의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손을 허리 뒤로 하고 한 손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 기념비 원주 주위를 돌며 천천히 춤추기 시작했다.

 

광장을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샤는 고개를 가볍게 젖히고 두 팔로 원을 그리며 춤추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칼이 비단 스카프처럼 나부꼈고 딱딱한 돌바닥을 스치는 두 발은 흰 섬광 같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것이 무슨 작품에 나오는 춤인지 떠올리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춤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샤는 그늘진 쪽으로 옮겨가 격렬한 스텝으로 도약하고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역광이 그의 젖혀진 목덜미와 가슴을 따라 기묘한 십자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기념비 기둥 위의 천사상을 보았다. 한 손에 십자가를 든 천사상을.

 

로그다이.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로그다이.

 

사방에 빛이 있었다. 미샤는 광채를 발산하며 춤추고 있었다. 궁전 광장은 흘러넘치는 빛들로 가득했고 미샤는 두 손으로 보이지 않는 벽을 어루만지며 춤추는 것 같았다. 어둠의 장막을 두들기는 검은 기사처럼. 백야의 부드러운 빛으로 투명해진 어둠의 장막을.

 

나는 미샤가 보이지 않는 루슬란과 마지막 격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미샤가 홀로 춤추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앞에 있는 루슬란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홀린 눈으로 나는 보이지 않는 루슬란의 모든 동작과 스텝을 따라갔다. 마치 그 보이지 않는 기사의 춤이 내 온몸에 지도를 그리고 도장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로그다이의 최후가 왔다. 미샤는 가슴을 움켜쥐고 빙그르르 돌더니 뭔가에 거세게 떠밀린 듯 앞으로 넘어져 무릎을 꿇었다. 천사상의 손에 들린 십자가가 황금빛을 내쏘며 그의 어깨와 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검은 강물에서 올라온 물의 요정이 싸늘한 두 팔을 벌려 죽은 기사의 몸을 뒤에서 안고 있는 것처럼.

 

갈채와 환호가 내게 정신을 차리게 했다. 몰려든 사람들이 원을 이룬 채 박수를 치고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무수한 극장의 무대들을 밟았지만 나는 그토록 경이에 찬 환호와 갈채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아주 작은 환호였고 작은 갈채였지만 그 한순간을 위해서라면 내가 지금껏 올라간 모든 무대와 지금껏 받아온 모든 꽃다발과 찬사를 아낌없이 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빛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미샤는 천천히 일어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타는 듯한 열기가 어린 시선이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책들을 집어 들었다.

 

“ 가자. ”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어디로? ”

블린이나 먹으러 가자. 센나야 광장 쪽에 카페가 하나 생겼는데 블린을 잘 만들어. ”

 

나는 에르미타주 궁전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사복 차림의 대머리 남자가 기둥 곁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역시 사복 차림의 키 큰 금발 머리 남자가 함께 있었다.

 

나는 미샤와 함께 궁전 광장을 나와 센나야 쪽으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도 나는 두 남자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미샤의 옆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호출이 언제 있을까 하고 의문했다. 다닐로프에 대해, 심문에 대해, 내가 해야 할 대답에 대해 생각했다. 엷은 핑크빛을 띤 하늘에 대해, 투명해진 어둠의 장막에 대해, 십자가를 든 천사상에 대해 대답할 수 있을까?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이야’ 라는 미샤의 말을 그들에게 옮길 수 있을까?

 

우리는 센나야 광장 뒤편에 있는 카페에 가서 블린을 먹었다. 미샤가 옳았다. 블린은 무척 맛있었다.

 

  

 

200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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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가 카잔 성당 분수 앞에서 읽고 있었던 소설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의 단편 '비행'이다. 이 글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러시아 일기'에서 쓴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98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언급했던 것과 같이 푸시킨의 유명한 서사시이다. 혹시 안 읽어보셨다면 정말 재미있으니 한번 읽어보셔도 후회 없을듯.

 

어제 올렸던 그 장편 후반부에서 나는 미샤가 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안무해 키로프 극장 무대에 올리는 이야기를 삽입했다. 그건 일년 후인 1976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로그다이가 주인공이라는 미샤의 말과는 달리 실제 작품에서는 네 명의 남자가 균일한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무대에서 미샤는 로그다이를 춘다. 그리고 루슬란은, 여기서 약속한대로 레냐에게 준다 :) 물론 이것은 가상의 작품으로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누가 좀 안무해 줬으면 좋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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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 장. 2012~2014년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찍은 것들이다.

 

먼저 미샤의 비밀 장소인 카잔 성당 앞 분수. 네프스키 대로 한복판에 있다. 시민들의 휴식처. 명소이다. 맞은편에는 돔 크니기와 그리보예도프 운하가 있다. 물론 소련 시절 카잔 성당은 성당이 아니라 종교 박물관이었지만...

 

 

 

 

 

 

분수 앞에 이렇게 벤치들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쉰다.

 

 

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돔 크니기.

 

이때가 7월 초. 소설의 배경과 같은 시즌. 다만 사진 찍은 건 이른 오후.

 

 

 

 

이 벤치가 미샤가 앉아 책 읽던 자리 :)

 

 

 

나무들 너머로 보면 이렇다. 왼쪽 벤치.

 

 

 

그리고 궁전광장. 예전에 여러 번 올렸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옛 겨울 궁전) 앞 광장이라 궁전광장이라 불린다. 가운데의 저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도 페테르부르크의 상징적 풍경. 미샤는 저 기념 원주 앞에서 춤을 춘다.

 

 

7월, 자정 직전의 하늘. 천사상.

 

미샤는 조금 더 이른 7월 초에 춤을 춘다. 그래서 하늘은 이것보다 훨씬 핑크빛 석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에는 이렇다.

 

 

 

궁전광장.

 

사실 저 돌바닥 위에서 춤추면 발이 꽤 아팠을 듯...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를 둘러싼 울타리. 엄밀히 말하면 저 울타리 앞에서 췄다.

 

 

 

 

 울타리 가장자리에 서 있는 가로등. 왼편으로 이삭 성당, 오른편으로 해군성 첨탑이 보인다.

 

..

 

그럼 이제 심기일전해서 다시 쓰던 글로 돌아가야지...

 

 

 

** 2015년 7월에 찍은 카잔 성당과 분수 사진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059

 

 

:
Posted by liontamer
2014. 12. 4. 21:08

카잔 성당 돔과 십자가 russia2014. 12. 4. 21:08

 

 

페테르부르크. 7월. 카잔 성당의 돔과 십자가.

 

매우 맑은 날이었다.

 

:
Posted by liontamer
2014. 7. 20. 21:00

열주 너머로 보이는 사원 지붕 russia2014. 7. 20. 21:00

 

 

 

 

 

 

페테르부르크.

 

카잔 성당 열주 사이로 보이는 예카테리나 카톨릭 사원 지붕과 십자가. 일요일 밤. 마음의 위안을 위해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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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