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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0. 23:15

담배 연기, 어둠과 뇌우 about writing2019. 9. 10. 23:15

 

 

 

비도 오고 이것저것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담배 뻑뻑 피우는 미샤 크로키 한 장 그림.

 

 

아래 글은 몇년 전 썼던 단편의 초반부이다. 전에 이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해 올렸던 적이 있다. 파리에서 레닌그라드로 소환되는 비행기 안에서 담배 피우는 미샤와 거기 오버랩되는 과거의 에피소드에 대한 짧은 발췌문이다. 담배 연기. 어둠. 뇌우. 거장과 마르가리타.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피곤해 보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길게 뒤엉킨 속눈썹 아래로 어두운 그림자가 패여 있었다. 항상 제멋대로 치솟는 경향이 있던 검은 머리칼은 이마 위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지만 갸름한 얼굴 위로 광대뼈 윤곽이 더 날카롭게 두드러져 있었다. 파리의 더운 날씨 때문인지 소위 위험인물이라 무기를 감출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재킷은 걸치지 않았고 주머니가 없는 검은색의 긴 소매 리넨 셔츠와 짙은 회색의 슬랙스 차림이었다. 웅웅거리는 소음과 둥근 창 너머로 보이는 두터운 구름이 아니었다면 연습실에서 막 나온 것 같다고 착각할만한 모습이었다.

 

 

 미샤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안개처럼 빽빽하고 불투명한 연기에 휩싸여 그 창백하고 지친 듯한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 서쪽에서 다가온 어둠이 거대한 도시를 뒤덮었다. 다리도, 궁전들도 사라졌다. 마치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실처럼 가느다란 섬광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내달렸고 천둥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울리는 천둥과 함께 뇌우가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 휩싸여 볼란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나는 미샤를 모스크바로 데려갔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샤는 볼쇼이나 므하트 극장보다는 트레치야코프 갤러리를 더 좋아했다. 갤러리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 나는 몇 년 전 파리에서 출간된 무삭제판 불가코프 소설을 선물했지만 그 아이는 벌써 지하 루트로 그 책을 입수해 읽은 후였다.

 

 

 “ 실망하실 필요는 없어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

 

 

 식어가고 있는 수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장을 넘기면서 미샤가 말했다.

 

 

 “ 그건 갱지 복사물이었거든요. 돌려가며 읽었는데 제 차례가 왔을 땐 잉크가 번져서 여기저기 지워져 있었어요. ”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나는 그에게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을 몇 장 읽어달라고 청했다. 마음속으로는 어느 부분을 읽어줄지 예측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마르가리타가 빗자루를 타고 모스크바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이나 사도바야에서 악마 무도회를 여는 장면이다. 혹은 반항심 많은 사춘기 소년답게 나를 권력과 체제의 상징으로 설정해 놓고는 보란 듯이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라는 대사를 읊어 주리라고 생각했다.

 


 
 미샤는 밑도 끝도 없이 대여섯 문장만을 읽었다. 어둠과 뇌우에 대한 장면이었다. 왜 그 부분을 읽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미샤가 낭독한 저 장면은 나도 개인적으로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다. 내용도, 그리고 문장들 자체도 무척 좋아한다.

:
Posted by liontamer

 

 

일찍 일어났고 오전에는 내일 국회에 가야 하는 일 때문에 숫자가 적힌 자료를 잔뜩 읽었다. 어휴 나도 모르겠다, 내일 가서는 현장에서 때울란다. 무척 졸리고 피곤하다.

 

 

정오 즈음 차를 우려 마시며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수십번을 읽은 책인데도 마르가리타가 프리다에게 용서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과 곧이어 나오는 거장과의 재회 장면에서는 눈물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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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9. 4. 6. 15:28

토요일 오후, 옛날 판본, 오리들 tasty and happy2019. 4. 6. 15:28

 

 

오늘은 날씨가 매우 흐리고 미세먼지까지 가득해 어둑어둑하다. 창문을 못 열어서 답답하다. 오후 차 우려 마시고 있음.

 

 

 

 

간만에 거장과 마르가리타 다시 읽고 있다. 이 판본은 옛날 버전이라 지금은 구하기 어렵다. 같은 번역본이 외국어표기법에 맞게 '거장과 마르가리따' 대신 '거장과 마르가리타'로 바뀌어 새 책으로 나와 있다. 2집엔 그 버전을 갖다 놓았음. 이 옛날 번역본 표지에는 무려 '러시아 소비에뜨 문학'이라고 적혀 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오리 찻잔과 접시들 꺼냄. 이게 한방에 세트로 산 게 아니고 프라하 갈 때마다 오리 하나씩 하나씩 사와서 이렇게 세트가 되었다. 전에 쥬인에게도 이 시리즈 접시 하나 사다줌.

 

 

 

어제 귀가하면서 산 빨간 장미 세 송이. 조그만 장미라 한 송이에 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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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래 발췌한 두 개의 에피소드는 이전에 종종 올렸던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장편의 중반부이다. 둘이 시간적으로 연속되는 건 아니고 앞 에피소드 이후 몇개의 이야기가 더 나오고 뒤의 이야기가 나온다. 배경은 1974년 즈음. 소련 레닌그라드.



지금의 내 상황과 같지는 않지만, 이 소설을 썼을때도 역시 나는 회사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물론 미샤가 주인공인 그 본편 우주의 일부이지만 여기 발췌한 에피소드들에는 미샤 대신 그의 친구인 트로이와 알리사가 등장한다. 그들은 운하를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불가코프에 대해 얘기하고 작가에 대해, 쓰는 것에 대해, 그리고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아마도 나의 입을 빌어서, 서로가 다른 방식과 다른 시선으로.


 

전에 나는 런던에서 사라진 미샤를 찾으러 간 알리사의 이야기나 썰매 에피소드, 그리고 흑해로 가는 기차 에피소드를 발췌하면서 알리사란 인물에 대해 잠깐 얘기했었다. 그녀는 비중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저 소설에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리고 언젠가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도 생각했었다.



맨 위 사진은 내가 이번에 페테르부르크 서점에서 사온 에코백. 그리고 아주 오래전 샀던 한길사 거장과 마르가리따 번역본. 빛이 많이 바랬다. 저 에코백에는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중 고양이 베헤못과 짝패 코로비예프가 작가동맹의 점원에게 작가와 도스토예프스키, 증명서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의 대사가 인용되어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명문들이야 물론 셀수도 없지만, 사실 나도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와 더불어 이 대화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내 소설에서도 알리사의 입을 빌어 인용했는데 마침 저 에코백에도 씌어 있어 반가워하며 사왔다. 알리사의 인용은 아래 글 중 두번째 에피소드에 나온다.

 


 두번째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어붙은 운하 풍경이다. 아래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트로이와 알리사는 지도교수와의 식사를 마친 후 운하를 산책하다 저런 조그만 계단으로 내려가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에서야 워낙 추울때라 사람이 없지만 겨울이 아닐땐 저 자리에 삼삼오오 앉아 술마시는 사람들도 있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림 그리거나 책읽는 사람들도 있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당시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에서 막 석사 과정을 마친 트로이와 알리사가 지도교수인 스베들로프와 저녁을 먹으면서 진로 상담을 하고, 넌지시 런던의 소련 대사관으로 가서 KGB 활동을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식사 후 트로이와 알리사는 다른 이야기들을 나눈다.



이 에피소드에서 스베들로프가 말하는 사미즈다트는 지하출판물, 금서 불법출판물을 가리킨다. 콤소몰은 공산주의 청년동맹으로 보통 16~26세 까지 활동한다. (17세인가? 긴가민가...) 안드레이는 트로이의 본명이고 파벨(파블릭)은 알리사의 약혼자이다. 루뱐카는 모스크바에 있는 KGB 본부의 속칭이다. 로미오는 알리사와 트로이를 비롯한 친구들이 미샤를 부르는 애칭이다.



두번째 에피소드는 앞 이야기로부터 약 10개월 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알리사가 트로이의 아파트로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트로이에게 글쓰기에 대해 얘기하고 불가코프의 문장을 빌어 그를 독려한다. 그리고 그녀는 떠난다.


언급되는 갈랴나 코스챠 등은 이들의 문학서클 친구들이다. 전에 썰매 에피소드, 기차 에피소드, 표절 에피소드 등에서도 나온 적 있다. 코무날카는 공동아파트이다.







 

* 이 글들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첫번째 이야기 : 운하의 트로이와 알리사, 회색 톱니 기계벌레>





 

 트로이와 알리사는 둘 다 별 문제없이 논문에 통과했고 석사 학위를 땄다. 담당 교수인 스베들로프는 논문 심사가 완전히 끝난 후 이례적으로 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터놓고 진로에 대해 충고를 했다. 그들이 2년 전 해외 대사관 파견으로 위장한 KGB 근무 제안을 거절한 후 처음이었다. 정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스베들로프는 여전히 그 제안이 유효하다는 것을 넌지시 비추었다.

 


 트로이는 스베들로프가 정말로 그 제안을 하고 싶은 대상은 정부 관료의 딸이자 가장 성적이 뛰어난 알리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리사는 원어민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영어가 유창했고 문학뿐만이 아니라 영미 정세에도 환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약혼자가 부책임자로 있는 신문사에서 국제뉴스 업무를 맡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즈베스티야 급은 아니었지만 당에서도 인정받는 건전하고 탄탄한 신문사였다. 스베들로프는 알리사의 결정을 칭찬하면서 그녀가 국제부서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으면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운을 띄웠다.

 


 알리사는 평소처럼 세련된 화술로 교수의 제안을 받아넘겼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침내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 들며 잠깐 자리를 떴다. 그러자 스베들로프는 기다렸다는 듯 트로이에게 학교에 남는 것도 좋지만 재능이 아까우니 다시 생각해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 세상이 바뀌고 있네, 안드레이. 물론 자넨 어렵지 않게 박사 학위까지 딸 수 있을 거야, 교수가 될 수도 있겠지. 자네 아버지도 학교에 계시니 말야. 교수가 나쁘다는 건 아냐, 하지만 내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난 다른 일을 했을 거야. 연방은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


 

 알리사만큼 세련된 화술을 보유하지 못한 트로이는 2년 전보다도 더 서툴게 교수의 말을 툭 잘랐다.


 

 “ 아나톨리 유리예비치, 저는 콤소몰 활동도 형편없었어요. ”


 “ 그래, 내가 그런 걸 모를 줄 아나? 자네와 알리사가 불어와 독어 쪽 애들이랑 뭘 하고 다녔는지도 아네. 자네들은 영리하게 스터디 모임이라고 속였다고 생각했겠지만 몇 년이나 봐왔는데 내가 그걸 모르겠나? ”

 


 트로이는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스베들로프의 유리알 같은 눈을 응시했다.

 


 “ 그럼 왜 그런 제안을 해주시는 겁니까? ”


 “ 요즘 공부하는 젊은이들치고 사미즈다트 한번 안 읽어본 애들이 어디 있다고. 오히려 자네 같은 친구가 나가면 더 플러스가 될 거야. 그 동네 문화를 많이 아니까. 아예 거기서 뿌리를 박을 필요도 없어. 몇 년만 나갔다 오면 탄탄대로야. 지금 런던으로 나가게 되면 구메로프 라인을 타게 될 테니까. 자네와 알리사가 같이 나가면 딱 좋을 텐데 그 아까운 아가씨가 결혼 때문에 여기 남는군. ”



 트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베들로프는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더욱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 자네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보지 않았지. 그래서 자꾸 그런 모임을 만드는 거야, 그런 것들이나 읽고 말이지. 여기 갇혀 있어서 목이 마르기 때문이야. 레닌그라드는 모스크바보다도 더 작고 답답한 곳이지. 콤소몰 실적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구메로프는 그런 쪽에는 관대한 편이니까. 이건 기회라네, 안드레이. 학교에 남아 곰팡내 나는 책을 뒤지고 분필 먼지를 뒤집어쓰는 건 나처럼 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야. 자네처럼 똑똑한 젊은이들은 다른 일을 해야 해. ”


 

 스베들로프는 이제 드러내놓고 웃고 있었다. 제자가 답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는 헛기침을 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아나톨리 유리예비치.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


 “ 물론이지. 갑작스러울 테니까. 어차피 이번 학기 강의도 나가고 있으니 비교하면서 잘 생각해 보게. 다음 달 쯤 다시 얘기 나누지. ”

 


 그 때 알리사가 자리에 돌아왔다. 스베들로프는 그녀의 아버지와 약혼자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눴고 트로이가 맡은 학부 강의에 대해서도 몇 마디 조언을 늘어놓았다. 식사를 마쳤을 무렵 교수는 애제자들과 보낸 시간 덕에 기분이 좋아져 있었고 알리사와 트로이는 둘 다 꾸며놓은 듯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

 

 

 스베들로프와 헤어진 후 트로이는 알리사와 함께 판탄카를 따라 걸었다. 이미 11월이라 산책하기에는 꽤 추운 날씨였지만 둘 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 너 괜찮아? ”



 립스틱이 지워져서 그런지 알리사의 얼굴은 창백하고 우울해 보였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핸드백에서 모자를 꺼내 썼다.


 

 “ 속이 좀 좋지 않았어. 이제 괜찮아. ”


 “ 의사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요 며칠 계속 그러더니. ”


 “ 벌써 가봤어, 임신인 줄 알고. ”


 “ 뭐래? ”


 “ 임신 아냐. 그냥 스트레스 때문이야. ”


 “ 아... 안타깝네.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미안하다, 뭐라고 해야 맞는 건지 모르겠어. ”


 “ 괜찮아, 네가 파블릭보다 훨씬 나아. ”


 “ 파벨이 뭐라고 했는데? ”


 “ 그 사람한테는 얘기 안했어. ”

 


 트로이는 걸음을 멈추고 알리사를 쳐다보았다.

 


 “ 너 말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파벨하고 결혼하는 게 그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인 거야? ”


 “ 빨리도 물어보시네, 흑해 갔을 때부터 묻고 싶어 했으면서. ”


 “ 주제넘은 것 같아서 그랬지.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


 “ 아빠 때문인 거 맞아. ”


 

 그녀는 맞은편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몸을 움츠리면서 트로이의 팔짱을 꼈다.

 


 “ 우리 아빠 은퇴 위기거든. 밀려나기 전에 어떻게든 날 괜찮은 집안이랑 엮어놓고 싶은 거지. 파블릭 아버지랑 삼촌 둘 다 모스크바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거든. ”


 “ 너한테는 그게 중요해? ”


 “ 안 중요해. 근데 아빠는 좀 중요하지. 아빠잖아. ”


 “ 파벨은? ”


 “ 파블릭? 그럭저럭 괜찮아. 너희들에 비하면 매너도 좋지. 괜찮은 집안 도련님이니까. 어차피 너희도 나보고 공주님이라고 하잖아. ”


 “ 우리 중에 널 그런 식으로 생각한 사람 아무도 없어. 그건 네가 예쁜데다 항상 일등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야, 네 아버지와는 아무 상관없어. ”


 “ 그래, 고마워. ”


 

알리사는 트로이의 코트 위쪽 단추를 채워주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 임신 아니어서 다행이야. 나 사실 그 사람 아기 갖고 싶지 않아. 아직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


 “ 결혼 안하면 안 돼? ”


 “ 순진한 소리 하지 마. 바보같이. ”


 “ 그래, 나 바보야. 스베들로프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


 “ 그 런던 얘기? ”


 

 트로이는 알리사에게 교수의 제안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 가는 게 어때? ”



 알리사는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트로이는 잠시 멍해졌다가 알리사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KGB 추천 때문에 구역질이 난다던 게 누구였더라. ”


 “ 어차피 난 타락했어, 강령이나 읊어대는 신문사에서 선전문구나 번역하게 될 테니까. 트로이, 맹세하는데 그게 런던보다 훨씬 나빠. 완전히 위선자가 되는 거니까. ”


 “ 알랴, 진심인데 결혼하지 마. 그 직장도 집어치워. 아버지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네 실력이면 어딜 가나 혼자 잘해낼 수 있어. ”


 “ 다들 그렇게 말하지, 넌 잘해낼 거라고. 그게 꼭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얼마나 속 빈 강정인지 너도 모를 거야. 그냥 결혼하는 게 나아. 난 그냥 옆에 있어줄 남자가 필요한 건지도 몰라. ”


 “ 코스챠가... ”


 “ 코스챠는 동생 같은 앤데 어떻게 잠을 자. 친구들이랑은 결혼 못해. ”

 


 알리사는 웃기 시작했다.

 


 “ 런던 말야, 나 진심으로 얘기한 거야, 트로이. 그게 꼭 KGB 쪽은 아닐 거야. 그냥 통역 일이나 서류 번역 같은 쪽으로 빠질 수도 있어. 너한테는 지금 나가는 게 좋은 일일 수도 있어. ”

 

 “ 너도 스베들로프처럼 생각해? 여기가 답답한 곳이라고? ”

 


 “ 그럼 답답하지 않아? 우리가 왜 갈랴네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괜찮은 곳에서 괜찮게 살고 있다면 왜 그런 허세를 부리게 됐겠어. 우린 말이야, 그냥 벌레 같은 거야. 그것도 머리 가슴 배와 다리가 달린 진짜 벌레도 아냐. 우린 플라스틱과 톱니로 만든 기계 벌레야, 공장에서 찍어낸 완제품들이라구. 심지어 다들 불량품이야. 그냥 회색 벌레들, 공산품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우리가 모인 거야, 그나마 진짜 벌레인 척이라도 해보려고. 너 알지? 난 어릴 때 런던이랑 암스테르담에 살았어. 거기서도 난 조그만 톱니가 달린 벌레였어. 그래도 거기선 숨이라도 쉴 수 있었어. 여기? 네바 강? 운하? 궁전광장? 잘난 척 하지 말라고 해, 레닌그라드 따위. 매장도 안 된 채 몇십년 동안 냄새를 피우고 있는 시체 이름을 달고 있는 도시 주제에... 여기 있는 건 런던에도 다 있어. 여긴 모사품에 지나지 않아. 우리가 그냥 기계 벌레에 지나지 않듯이. 그러니까 트로이, 그냥 런던에 가. 한결 나아질 거야. 여기서보다 훨씬 행복해질 거야. 숨쉬기도 더 편하겠지. ”


 

 “ 나, 난 당을 지지하지 않아. 공산주의를 안 믿어. ”

 


 “ 아무도 안 믿어, 파블릭 같은 사람 빼고는.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가서 그냥 서류를 번역해. 그냥 일이니까. 그건 신념이랑 아무 상관없어. 어차피 넌 그렇게 반항적인 애도 아니잖아. 단 일 년이라도 좋아. 일단 가. ”



 

 트로이는 침을 삼켰다. 알리사는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옳았다. 속물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스베들로프의 유리알 같은 눈을 보면서도 조금 흔들렸다. 그리고 언제나 옳은 알리사가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신념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그저 숨을 쉬고 새로운 환경으로 나가기 위한 일일 뿐이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체제 비판자나 반항아인 적이 없었다. 그가 사미즈다트나 금지된 외국 서적들을 읽은 것은 그저 문학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루뱐카, 걔를 루뱐카로 데려갔어. 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작은 방으로. ”


 “ 뭐? ”


 “ 아무 것도 아냐. ”


 

 트로이는 운하 옆 돌계단에 앉았다. 검은 물 위로 드문드문 가로등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차갑고 습한 바람이 불어와 코트 자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 왜 그런 말을 해, 알랴? 왜 날 보내고 싶어 해? 난 그냥 여기 있고 싶어. 너희 곁에 있고 싶은데. ”


 “ 우리하고만 있으면 안 돼. ”


 

 알리사도 그의 곁에 앉았다. 모피 목도리를 풀어 트로이와 자신의 목을 길게 빙 둘러 감았다. 와인과 부드러운 향수 냄새가 코끝에 끼쳐왔다.

 


 “ 다들 자기 삶을 살아. 갈랴랑 료카도, 이고리도, 그 철없는 코스챠도 마찬가지야. 근데 넌 그렇지 않아. ”


 “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일을 하잖아. ”


 “ 학교잖아. 그냥 학교에 남아 있는 거잖아. ”


 “ 나한테도 다른 친구들이 있어. 너희가 모르는. ”


 “ 그래, 다른 친구들.

 


 알리사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나직하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 런던으로 가, 그러면 훨씬 나아질 거야. 쓸데없는 의심도 받지 않을 거야. ”


 “ 무슨 의심? ”


 “ 다른 친구들. ”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손으로 트로이의 손목을 꼭 쥐었다.


 

 “ 조교 몇 명이 거지같은 소리를 하더라. 그러니까, 너하고 이라가 헤어진 다음에 말야. 네가 이상한 친구들하고 어울린다고. 그래서 이라랑 잘 안된 거라고. 그 남자, 물리학부에서 강의하던 사람. 그 사람 얘길 늘어놓고... 그래서 내가 혼쭐을 내놨었어. ”


 

 이사악. 그녀는 이사악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 달아나는 것 같았다. 알리사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 아냐, 오해하지 마. 트로이, 난 그런 말 믿지 않아. 괜히 그 계집애들이 이라 편 들어주느라 그런 거야. 난 그냥... ”


 

 알리사가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언제나 순식간에 눈물을 터뜨리는 능력이 있었다.

 


 “ 그건 그냥 네가 너무 다정하기 때문이야. 넌 친구들을 너무 아껴. 그 남자도 그렇고 또 걔도... 네가 그런 눈으로 그 사람들을 보니까 오해를 사는 거야. 진짜 그것 뿐이야.


 “ 그런 눈이라니. ”


 “ 로미오. 네가 로미오를 보는 눈.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피 목도리가 바람에 펄럭이며 그와 알리사의 얼굴을 동시에 때렸다. 그는 목도리를 풀어 알리사의 가냘픈 목에 둘러준 후 일어나 운하 쪽으로 급하게 내려갔다. 알리사가 쫓아왔다. 구두 굽이 돌계단 틈에 끼어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 했다.


 

 “ 미안해. 멍청한 소릴 해서. ”


 “ 아냐. ”


 “ 나 그런 말 하나도 믿지 않아. 그저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게 화가 났을 뿐이야. 다들 벌레라고 했잖아. 그래서 바보 같은 소릴 지껄이는 거라구. ”


 “ 그냥 친구들일 뿐이야. 미샤도. 너도 알잖아. 모두가 걜 그렇게 봐, 우리한텐 없는 걸 가진 애니까. ”


 “ 맞아. 네 말이 맞아. 미안해. 내가 정신 나간 소릴 했어. 결혼 때문이야, 힘들어서 그래. 미안해. ”


 

 알리사가 우는 동안 트로이는 판탄카 운하의 어두운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검은 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저만치에서 순찰 경찰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알리사가 울음을 그쳤을 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와 경찰들의 곁을 지났고 연인들처럼 판탄카를 돌아 나갔다.

 

 

 




 

<두번째 이야기 : 아파트의 트로이와 알리사,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신분증이 필요한가? 떠나는 알리사>

 


 

 

 

 여름이 끝나갈 무렵 알리사가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6월에 파벨과 이혼한 후 그녀는 신문사도 그만두고 두어 달 동안 잠적해 있었다. 트로이조차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연락이 전혀 없어 걱정이 되었지만 알리사의 어머니는 딸이 근교의 친척집에 가 있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전 같았다면 어떻게든 행선지를 알아내 찾아갔겠지만 그때 트로이는 격하게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숨어버린 친구를 위해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이제 생전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입에 물고 소파에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 알리사의 바짝 야윈 얼굴을 보니 트로이는 친구를 등한시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알리사는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그의 아파트로 찾아와 밤새 울고 갔던 두 달 전보다 몇 킬로그램이나 체중이 준 것처럼 보였다. 유행하는 스타일로 머리를 말끔하게 정돈하고 있었지만 머리칼에는 윤기가 전혀 없었다. 도톰하던 볼 살이 쭉 빠져서 광대뼈가 두드러져 있었고 갈색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갈랴의 집에 모여든 남자들의 가슴을 두근대게 하던 재기 넘치던 공주님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스물다섯 살이 아니라 서른다섯 살은 되어 보였다.


 

 “ 너 박사 과정 시작할 거라면서. ”


“  아, 응... 학교에 남기로 했으니까. ”


 

 알리사는 담배 연기를 가볍게 내뿜었다. 마스카라 사이로 커다란 갈색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갑자기 물었다.


 

 “ 톨랴하고는 이제 안 만나? ”


 “ 봄 되기 전에 헤어졌어. ”


 “ 그래, 말은 안했지만 네가 아까웠어. ”

 


 그녀는 화제에 오랫동안 집중하기가 힘든 듯 말을 멈추고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과 부엌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정리벽이 있는 사람답게 습관적으로 식탁 위에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책들을 한쪽으로 차곡차곡 밀어놓고 다 먹은 우유팩을 집어 휴지통에 버렸다.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것이 제대로 들어차 있는지도 확인했다. 어릴 때부터 알리사는 항상 그에게 엄마나 누나처럼 굴곤 했다.



 “ 나 런던에 가기로 했어. ”


 

 식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은 채 알리사가 불쑥 말했다.

 


 “ 뭐, 스베들로프가 말했던 그거? ”


 “ 응. 지난주에 만나서 얘기했어. 어제 구메로프한테 가서 면접도 봤어. ”


 “ 아, 그래.... ”


 

 트로이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자신도 잠시 고민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알리사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 런던으로 떠난다고 하니 배신감이 들었다. 그게 자신을 두고 가버리는 친구에 대한 서운함인지, 아니면 당과 정부의 이름으로 지저분한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선택한 그녀에 대한 감정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 너 실망했지. ”


 “ 아냐. 무슨 소리야, 축하해. ”


 “ 실망했잖아. 내가 안드로포프 앞잡이가 되고 스파이들의 뒷돈이나 세탁하게 될까봐 화난 거잖아. ”


 “ 그럴 거야? ”


 “ 진짜 바보. 그런 일은 나 같은 풋내기한텐 안 시켜. 그냥 대사관에서 통역이나 할 거야. 내가 그랬잖아, 그냥 서류 일만 들어올 거라고. ”


 “ 모르지, 넌 미인이잖아. 마타하리 같은 일을 시킬지 누가 알아. ”



알리사는 농담을 받아들일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 미인은 없어졌어. 난 팍삭 늙어버린 이혼녀야. ”


 “ 한 집 건너 하나씩 다 이혼하는 세상인데 그게 뭐 어떻다고. 그리고 너 아직 꽤 예뻐. ”


 “ 너한테 그런 말 듣는 건 하나도 기쁘지 않아. 너와 잘 건 아니잖아. ”


 “ 코스챠는 아직도 널 좋아해. ”


 “ 걔가 지금 내 쪼그라든 가슴을 보면 그 마음이 달라질 걸. ”


 

 그런 얘기를 하는 동안 알리사는 가스렌지에 냄비를 올려놓고 물을 끓였다. 냉장고에서 달걀과 감자를 꺼내 삶더니 시든 오이와 양파를 찾아내 능숙한 칼질로 잘게 토막냈다.

 


 “ 레몬은 없네. ”


 “ 독신남의 아파트에서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냐? ”


 “ 하긴, 이 정도 있는 것도 놀랍다. 그래도 식초는 있네. ”



 

 알리사는 달걀과 감자를 썰어 으깬 후 소금을 뿌렸다. 오이와 양파를 섞고 마요네즈와 후추와 식초를 쳤다. 순식간에 샐러드를 수북하게 한 접시 만든 후 흑빵과 햄을 두 조각씩 잘랐다.

 


 “ 먹어, 점심도 걸렀을 거 아냐. ”


 “ 나도 방법 좀 가르쳐줘. 내가 만들면 물이 엄청 생기던데. ”


 “ 넌 손재주가 없어서 그래. 가르쳐줘도 안될 거야. ”

 


 언제나처럼 알리사는 가차 없는 진실만 말했다. 트로이는 그런 그녀가 떠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는 알리사가 만들어준 샐러드를 먹었다. 그의 친구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 너도 먹어. 런던에 가려면 몸을 좀 만들어야지. ”


 “ 오다가 카페에서 커피랑 케익 먹었어. ”


 “ 카페인과 당분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아. ”


 “ 네 몸이나 잘 챙겨. ”


 

 그녀는 식탁 위에 쌓여 있는 강의 노트와 메모지들을 무심하게 뒤적이다가 생각난 듯 물었다.


 

 “ 요즘은 글 안 써? ”


 “ 시간이 없어, 재능도 없고. ”


 “ 아니야, 난 네 글 좋아했었는데. 틈나면 계속 써봐, 응? ”


 “ 어릴 땐 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알지. ”


 “ 쥬진스키 같은 멍청이도 벌써 책을 두 권이나 냈는걸. ”


 “ 그래, 증명서를 받은 작가지. ”


 “ 도스토예프스키가 작가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해야 해? 그에겐 그런 신분증 따윈 없었을 게 뻔해! ”


 

한 때 그들의 밤을 하얗게 새게 만들었던 소설의 대사를 인용하며 알리사가 열을 냈다. 트로이는 그녀의 열성에 맞춰 대사를 따라가면서도 우울하게 끝을 꼬았다.


 

 “ 아, 맞아. 도스토예프스키는 불멸이지. 하지만 우린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걸. ”


 “ 그건 모르는 일이지, 지금 어떻게 알아? ”

 


 그녀는 끝까지 불가코프의 대사를 따라가며 친구의 재능을 변호했다. 그건 믿음이라기보다는 우정이었고 트로이는 감동을 받았다.


 

 “ 계속 써, 트로이. 그만두지 마. ”


 “ 시간이 나면 써볼게. ”

 


 그는 자신이 아직도 조금씩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는 작가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재능이 없는 자를 작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다 먹은 샐러드 접시를 빼앗아 싱크대에 던져 넣으며 알리사가 물었다.

 


 “ 걔 여기 와 있어? 발레슈즈가 있네. ”

 


 트로이는 당혹감을 감추려고 애쓰며 느리게 대꾸했다.

 


 “ 아... 전에 하루 자고 갔어, 이사하느라. ”


 “ 이사? 사도바야 쪽에 있었잖아. ”


 “ 지난달에 새 아파트를 줬어. 극장 바로 근처에. ”


 “ 코무날카 아니고? ”


 “ 아니, 복층에 방이 대여섯 개는 돼. 룸메이트는 하나뿐이고. 그 아파트 진짜 대단해. 스몰니의 네 부모님 댁보다 더 넓어. ”


 “ 굉장한데, 일 년 밖에 안된 애가. 정말 스타 대접을 받나보네. 그때 갈랴네 집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냥 형 누나들 틈에 낀 귀여운 꼬마라고만 생각했지. ”

 


 알리사는 똑똑하고 뭐든지 잘 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재능에 대한 판단력은 부족할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트로이에게 글을 쓰라고 간절히 권하면서 미샤를 그냥 어린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룸메이트는 누구야? 지난번처럼 극장 동료야? ”


 “ 그렇대. ”

 


 트로이는 그 룸메이트가 학창시절 동기이며 최근 새 파트너가 된 지나이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극장에서는 미샤와 지나이다를 볼쇼이의 바실리예프와 막시모바 커플처럼 만들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둘 다 실력도 좋았고 일 년 만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데다 강렬한 외모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미샤가 좀 더 빠르게 뜬 편이었지만 지나이다의 어머니는 키로프의 유명한 무용수 출신이었고 아직도 극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유력한 군인이었다.


 미샤는 파트너 발레리나와 한 아파트를 쓰도록 조치한 극장 측의 이른바 세심한 배려에 드러내놓고 분노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그저 가장 편하고 자기다운 방법으로 반항했을 뿐이었다. 이사 후 그는 종종 트로이의 아파트에 와서 자고 갔고 트로이가 이름을 알고 싶지 않은 다른 애인들의 집에서도 밤을 보냈다. 트로이는 지나이다가 그런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미샤에게 묻지는 않았다.

 


 “ 런던 가기 전에 사인이라도 받아놔야겠네. 8월에는 공연 없나? ”


 “ 지금 투어 때문에 부다페스트에 가 있어. 바르샤바 거쳐서 비엔나랑 프라하까지 간대. 겨울엔 런던도 갈 것 같다던데. ”


 “ 나한테 감시 업무 맡길 수도 있겠네. 이 누나가 잘 봐주겠다고 전해줘. ”




‘ 그래, 잘 봐줘야 할 거야. 걘 문제아니까. 바깥으로 나가면 더욱 눈에 띄겠지. 튀어나온 못처럼. ’

 


 트로이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미샤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알리사와는.



 “ 같이 가지 않을래? ”


 “ 런던? ”


 “ 그럼 어디겠어. 나 진짜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야. 구메로프가 사람이 하나 더 필요하다고 했어. ”



 알리사의 눈이 너무나 진지하고 간절하게 빛나고 있어서 트로이는 선뜻 대답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잠시 침묵한 끝에 그는 입술을 축이며 대꾸했다.

 


 “ 나도 너와 같이 가고 싶어, 알랴. 너랑 같이 일하고 싶어. 하지만 난 그게 안돼. 레닌그라드를 떠나고 싶지 않아. ”


 “ 왜? 여기가 대체 뭐라고. 너한테 뭘 해준 게 있다고. ”


 “ 여긴, 그러니까 내 주위의 모든 것, 전부야. ”




 몇 달 전 어두운 침실 안에서 미샤에게 얘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트로이는 자신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미샤는 레닌그라드가 전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다른 소련 시민들은 평생 한번 나가보기도 힘든 해외 도시들로 날아가 춤을 추고 환대를 받는 남자가 이 도시를 자신의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트로이에게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족할지도 몰랐다.



 

 알리사는 화를 내거나 따져 묻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를 엑스레이 광선 같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알리사가 자신을 투명한 책처럼 읽어냈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제 그 책은 페이지가 너무 많고 지리멸렬하게 뒤엉켜 있었다.


 

 “ 그래. 여기 남아도 좋아. 하지만 꼭 글을 써야 해. ”



 그는 왜 알리사가 그토록 집요하게 그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환상을 갖는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너무나도 그를 아끼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알리사는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갔다. 그리고 9월 초가 되자 커다란 여행가방 두 개를 끌고 런던으로 떠났다. 여전히 자작나무처럼 야윈 채, 어두운 붉은색으로 물들여 짧게 자른 새 헤어스타일과 소년처럼 직선으로 떨어지는 재킷과 바지 차림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트로이는 친구들과 함께 그녀를 전송하러 공항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코스챠가 제대로 고백해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오래된 짝사랑에 절망해 난폭운전을 하다 교차로에서 버스를 들이받을 뻔 했다. 다행히 주변에는 경찰이 없었고 그들은 잽싸게 샛길로 도망쳤다. 코스챠는 그날 밤 떡이 되도록 취했고 갈랴의 품에 안겨 실연당한 고등학생처럼 엉엉 울었다.

 

 

 


... 


 

 



트로이와 알리사가 어깨를 맞대고 쭈그려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운하 계단은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운하변을 따라 걷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에서 알리사가 인용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문구. 이 에코백에 씌어 있는 문장은 파란색 표시를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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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코프와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대해 전에 썼던 짧은 원고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3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이전에 발췌한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미샤의 이야기에서도 미샤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572 (그가 읽었던 불가코프의 문장, 비행기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러브 스토리에 대한 짧은 발췌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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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발췌했던 이야기들 중 알리사가 등장했던 에피소드들은 아래.


썰매 에피소드 : http://tveye.tistory.com/4050

 

 

흑해로 가는 기차 에피소드 : http://tveye.tistory.com/4671

 

 

런던에서 사라진 미샤를 찾으러 간 알리사의 이야기 : http://tveye.tistory.com/2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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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 이 글은 albaricoque님이 블로그에 올리신(http://albaricoque.tistory.com/92) 거장과 마르가리타 후기에 댓글을 달다가 생각나서 쓰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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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전에 petersburg diary 폴더에 쓴 적이 있다. 나는 책 한 권과 영화 한 편 때문에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고 후자는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의 백야였다. 그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606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러시아 문학을 향한 사랑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준 것은 미하일 불가코프와의 만남이었다. 지금 내게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 셋을 꼽으라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미하일 불가코프, 그리고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될 것이다.

 

 

내가 가장 처음 읽었던 불가코프의 소설은 대표작인 거장과 마르가리타였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페테르부르크의 허름하고 추운 기숙사 방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사진 속 맨 왼쪽에 보이는 한길사 번역 판본이었다(사진 속의 책은 같은 건 아니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따로 산 것이다) 당시 친구가 또 다른 친구에게서 빌린 책이었는데 어쩌다 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부끄럽지만) 러시아어과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불가코프라는 작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책 제목도 처음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때까지의 러시아 작가들은 대부분 19세기 작가들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호프, 푸쉬킨 등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기 시작했을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초반부에 안누슈카가 해바라기 기름을 이미 쏟아버린 결과로 편집장 베를리오즈의 머리가 전차에 잘려나가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전반부에서는 충격과 공포와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고 후반부에서 마르가리타가 마녀로 변신해 하늘을 날아가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 거장을 구하기 위해 무도회의 여주인이 되는 장면부터는 반쯤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많은 소설들이 내게 기쁨과 슬픔과 쾌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불가코프의 이 소설만큼 나를 완벽하게 흥분시킨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작가들의 소설이었다. 쓰는 자의 소설이었다. 정말이었다.

 

 

이후 나는 불가코프의 단편과 다른 장편들을 거의 모두 구해 읽었다. 국내에 번역된 책들도 읽었고 원서도 가능하면 구해 읽었다. 사진의 책장에 꽂혀 있는 불가코프 책들 중 왼편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번역본은 세가지인데 제일 왼쪽이 내가 처음 읽었던 버전이고 노어 발음에 가깝게 거장과 마르가리따로 되어 있다. 이후 외국어표기법에 따라 '거장과 마르가리타'라고 손질되어 나온 버전이 옆의 좀더 새책, 그리고 오른편의 한권짜리는 다른 분이 번역한 책이다. 원서와 단편집 등 몇권은 부모님 댁에 있다. 원어로 되어 있는 저 책은 '어둠의 대공'이라는 제목인데 불가코프가 거장과 마르가리타 완성본을 쓰기 전에 썼던 초본 등을 엮은 것이다.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호흡법을 새로 익혀야 했다. 그래서 원래 구상했던 장편 대신 워밍업을 위한 단편을 썼다. 이전에도 몇번 발췌한 단편이다. 레닌그라드의 정치가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나의 주인공 미샤의 이야기로 소설은 파리에서 체포된 미샤가 비행기 안에서 마로조프와 나누는 대화와 마로조프의 회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나는 아마도 미샤에 대해 지금만큼 친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만큼 그를 이해하고 있지 않았고 지금만큼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지금만큼 그의 내부에 다가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소설은 마로조프와 마찬가지로 내게도 미샤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느끼고 내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되었다.

 

 

그 소설에서 나는 불가코프의 이 소설을 몇 문장 인용했다. 정말 몇 문장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순간의 미샤와 나에게는 중요한 문장들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그와 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용한 문장은 아래 발췌문에서 푸른색으로 표시하였다.

 

 

발췌문은 지난번 올렸던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은 춤, 운하를 건너는 미샤'(http://tveye.tistory.com/4485) 파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파리에서 체포된 미샤와 비행기 안에서 조우하고 그들의 두번째 만남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적당한 고도에 접어들어 더 이상 기체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미샤가 커튼을 젖히고 내 쪽으로 건너왔다. 앞뒤를 가로막고 있는 두 명의 거대한 요원들 사이에서 그는 거의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를 내버려두고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요원 중 하나가 반쯤 의무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 하지만 명령을 받아서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위험인물이라. ”

 

 

나는 미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파리에서부터 내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던 요원들에게는 비웃음이라고 여겨질 만한 미소였다.

    

 

 

 

요원들이 뒷자리로 돌아간 후 미샤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을 때 내가 물었다.

    

 

“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위험인물이라고 해서? ”

 

“ 명령을 내리는 사람 앞에서 명령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

 

“ 자넨 내 관할이 아니야. ”

 

“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죠. ”

 

 

 

나는 그에게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여 주었다. 미샤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후 잠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호텔 앞과 공항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신 기자들과 극장 관계자들, 피켓을 든 각종 단체와 예술가들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오늘 아침 르 피가로에 실린 사진이 가장 선명했는데, 물론 그때도 위장한 요원들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검은 머리칼과 창백한 얼굴, 호리호리한 실루엣 외에는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골치 아픈 기자들과 인권운동가 나부랭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그를 예정되어 있던 레닌그라드 직항 여객기 대신 한 시간 먼저 출발하는 모스크바행 특별편에 탑승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나였지만, 정말로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샤 야스민에게는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미샤는 피곤해 보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길게 뒤엉킨 속눈썹 아래로 어두운 그림자가 패여 있었다. 항상 제멋대로 치솟는 경향이 있던 검은 머리칼은 이마 위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지만 갸름한 얼굴 위로 광대뼈 윤곽이 더 날카롭게 두드러져 있었다. 파리의 더운 날씨 때문인지 소위 위험인물이라 무기를 감출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때문에 빼앗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킷은 걸치지 않았고 주머니가 없는 검은색의 긴 소매 리넨 셔츠와 짙은 회색의 슬랙스 차림이었다. 웅웅거리는 소음과 둥근 창 너머로 보이는 두터운 구름이 아니었다면 연습실에서 막 나온 것 같다고 착각할만한 모습이었다.

 

 

미샤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안개처럼 빽빽하고 불투명한 연기에 휩싸여 그 창백하고 지친 듯한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서쪽에서 다가온 어둠이 거대한 도시를 뒤덮었다. 다리도, 궁전들도 사라졌다. 마치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실처럼 가느다란 섬광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내달렸고 천둥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울리는 천둥과 함께 뇌우가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 휩싸여 볼란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나는 미샤를 모스크바로 데려갔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샤는 볼쇼이나 므하트 극장보다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을 더 좋아했다. 미술관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 나는 몇 년 전 파리에서 출간된 무삭제판 불가코프 소설을 선물했지만 그 아이는 벌써 지하 루트로 그 책을 입수해 읽은 후였다.

    

 

“ 실망하실 필요는 없어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

 

 

식어가고 있는 수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장을 넘기면서 미샤가 말했다.

 

 

그건 갱지 복사물이었거든요. 돌려가며 읽었는데 제 차례가 왔을 땐 잉크가 번져서 여기저기 지워져 있었어요. ”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나는 그에게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을 몇 장 읽어달라고 청했다. 마음속으로는 어느 부분을 읽어줄지 예측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마르가리타가 빗자루를 타고 모스크바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이나 사도바야에서 악마 무도회를 여는 장면이다. 혹은 반항심 많은 사춘기 소년답게 나를 권력과 체제의 상징으로 설정해 놓고는 보란 듯이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라는 대사를 읊어 주리라고 생각했다.

 

 

미샤는 밑도 끝도 없이 대여섯 문장만을 읽었다. 어둠과 뇌우에 대한 장면이었다. 왜 그 부분을 읽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마로조프의 시점으로 씌어진 이 소설의 다른 발췌 장면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267, http://tveye.tistory.com/2877

 

 

..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불가코프 생전에는 출판되지 않았다. 검열로 고통받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소련에서는 불가코프 사후, 그리고 스탈린이 죽은 후에야 그나마도 군데군데 삭제된 버전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무삭제본은 그리고도 한참 후에야 나왔다. 그래도 60년대 말 즈음 파리 등 해외에서는 무삭제판이 출간되었는데 이 소설에서 마로조프가 미샤에게 건네주는 것이 바로 그 무삭제판이다.

 

 

 

 

마로조프가 이야기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 웹진 기사로 포스팅했던 적이 있다. 왜 이 소설이 스탈린 시대에 출판될 수 없었는지, 그리고 무삭제판이 나오기까지는 왜 더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는지도 이 포스팅에 간략히 쓴 적 있다. 

그 포스팅은 여기 :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http://tveye.tistory.com/13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러브 스토리에 대한 짧은 발췌는 여기 :

반지하 창문을 볼때마다 http://tveye.tistory.com/979

 

 

** 추가 : 이 글을 발췌하게 된 이유 중 약간 : http://tveye.tistory.com/4575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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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2. 11. 9. 13:09

어서 오세요 russia2012. 11. 9. 13:09

네바 강의 안글리스카야 나베레즈나야 쪽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 건물 창문. 반지하 건물이다. 전에 포스팅했듯 난 반지하 창문을 보면 항상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가슴 뛰는 묘사가 생각난다. (http://tveye.tistory.com/979)

전구 불빛이 반짝이는 저 글자는 '어서 오세요~' 혹은 '환영해요' 라는 뜻. '도브로 빠잘로바찌' 라고 읽는다.

마음의 평온을 위해 창문 사진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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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