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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박물관에 공연까지 좀 무리해서 그런지 오늘은 많이 피곤했다. 잠도 많이 못 자서 졸렸지만 억지로 일어나 조식을 먹고 나섰다. 겨울이라 해가 짧기도 하고 이번에 머무는 일정이 그리 길지 않고, 또 돌아가면 이제 곧 지방 본사와 새로운 집2로 가야 하기 때문에 어쩐지 시간이 아까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오늘 진눈깨비가 내렸고 날은 아주 흐렸다. 차라리 춥고 눈오는 게 낫다... 기온이 영하 1도~영상 1도를 오락가락하자 길에 쌓였던 눈이 녹아 진창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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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돌아다닐 수 있는 날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버스 타고 네프스키 대로로 나가 돔 끄니기로 직행. 도블라토프 책 두권과 페테르부르크 출신 락뮤지션이자 작가가 쓴 레닌그라드에 대한 책을 샀다. 도블라토프는 사실 전에 샀던 두꺼운 책에 들어 있는 단편들인데 두껍고 무거운 하드커버 책은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가 어려워서 그냥 얇은 페이퍼백으로 분권되어 있는 걸로 두권 샀다. 실은 도블라토프 작품들은 거의 다 가지고는 있는데 역시 하드커버는 집에서 집중해 읽기가 힘들어서... 막 들고 다니며 읽는 페이퍼백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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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을 열시쯤 먹고 나왔기에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날씨가 워낙 안 좋아서 돔 끄니기 2층의 카페 singer에 가서 차 마시고 책 읽을까 했지만 창가 자리가 다 차 있었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그러면 차라리 케익이 더 맛있는 고스찌에 가기로... 그전에 정류장 근처에 있는 예카테리나 카톨릭 성당에 가서 다시 초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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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타고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로 와서 고스찌 1층에 갔다. 여긴 2층은 레스토랑, 1층은 카페이다. 점심시간에 가서 저렴한 런치도 가능했지만 배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얼그레이와 메도빅(페테르부르크 최고의 메도빅. 여기 거랑 아스토리아 카페 것)을 주문했다. 창가에 앉아 차 마시고 케익 먹으며 친구들과 잠시 톡을 하고 책을 좀 읽었다. 그리고 료샤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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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샤는 일요일에 코펜하겐 쪽에 출장을 갔다가 오늘 아침에 돌아왔다.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오기로 결정하고 마일리지 표를 끊고 호텔 예약한 게 지난 금요일이라...

주말에 얘기했더니.. 깜놀 + 기뻐하면서 이 녀석이 하는 말...


료샤 : 드뎌 그만뒀구나!!!

나 : 아니야 ㅜㅜ 돌아가기 전의 마지막 일탈이야.

료샤 : 어휴 바보!

나 : 나 바보 아니야 ㅠㅠ


..



고스찌에서 기다리자 오후에 료샤가 왔다.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수트 대신 편한 티셔츠와 패딩점퍼, 청바지 차림이었다.



나 : 그래도 집에 들렀다 왔구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왔네. 잘했어.

료샤 : 응. 근데 저녁에 아빠가 오라 했어. 그래서 옷 있다가 또 갈아입어야 돼. 아 가기 싫다...

나 : 무섭고 근엄하지만 멋있는 너네 아빠~~

(* 료샤네 아빠 좀 숀 코너리 닮음. 소련 붕괴시 노브이 루스끼로 부를 축적했던 벼락부자 미노년 ㅋㅋ 전에 한두번 본 적 있고 그 집에 가본 적도 있음. 경호원 있는 저택에 살고 계심!)


료샤 : 야! 너 우리 아빠 넘보지 마! 내 아들 하나로도 모자라냐!

나 : -_- 안 넘봐! 글고 너네 아빠 부인 너보다 어리잖아!

료샤 : 쳇. 하여튼 가기 싫어라...

나 : 근데 왜 갑자기? 너 원래 아빠한테 잘 안 가잖아. 사업이 잘 안되니?

료샤 : 오늘 아빠 생일 ㅠㅠ

나 : 아 그렇구나. 축하한다고 전해드려.


료샤 : 너 나랑 같이 갈래?

나 : 싫어!!!! 가기 싫은 자리에 혼자 가지 왜 나까지 끌고 가!

료샤 : 아빠는 맨날 잔소리한단 말이야 ㅠㅠ 근데 아빠는 너를 좋아해. 그니까 너랑 가면 잔소리 안할지도 몰라. 그래도 울아빠는 여자 앞에선 나 안 혼내.

나 : 너네 아빠가 나 좋아해??? 나도 너네 아빠 멋있었어 ㅋ

료샤 : 똑똑하다고 ㅠㅠ 내 돼먹지 못한 친구 중 너만 보기 드물게 인텔리겐치야래 ㅠㅠ

나 : 어마나 나 똑똑! 나 인텔리겐치야!! 너네 아빠 짱 멋짐~

(생각해보니 몇년 전 료샤 아빠네 갔을때 서재에 있는 책들 보고는 불가코프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 있었음. 료샤는 불가코프 안 읽었음 ㅠㅠ)


료샤 : 그니까 같이 가자 ㅠㅠ 아빠가 잔소리할때 실드 좀 쳐줘

나 : 싫어 싫어 ㅠㅠ 너네 아빠네 집에는 경호원도 있고... 도베르만도 있고(개는 다 좋아하지만 도베르만은 무서워)...너네 아빠 부인 무서워...

료샤 : 나도 싫어, 나타샤... 못되게 생겨서 입술은 맨날 시뻘개... 가슴만 왕 커!

(나타샤 : 료샤 아빠의 어린 아내. 금발 글래머 미녀. 몇번째 아내인지 기억도 안남 ㅋ)

나 : 야! 여자를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마! 그리고 너 글래머 좋아하잖아!

료샤 : 나타샤는 싫단 말이야! 목소리도 째지고 맨날 헐벗고 있고! 옷인지 속옷 쪼가리인지!!!!

나 : 나타샤 이쁘던데...

료샤 : 나타샤랑 아빠랑 편먹고 나 공격할 거란 말이야 아....



료샤가 불쌍해서 하마터면 넘어갈뻔 했지만... 나도 무지 가기 싫었다! 나타샤는 딱 한번 봤는데 목소리도 정말 크고 째지고(프렌즈의 재니스랑 비슷한 목소리 ㅠㅠ) 이쁘긴 한데 사람을 무지 깔본다(그때도 내가 청바지랑 운동화 차림으로 갔는데 왕 무시했음 ㅠㅠ) 그리고 료샤네 아빠가 멋있긴 하지만 경호원과 도베르만 있는 집에 가기 싫었다.



나 : 친구야, 가주고 싶지만 나도 (불여우 같은 ㅋ) 나타샤 무서워. 그리고 너네 아빠 생일이면 가족끼리 모이는 자리잖아... 사업 파트너들도 올 거 아니야. 백번 양보해서 간다 쳐도 나 봐라, 어그 부츠에 패딩! 명품 입고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 이러고 가라고!!! 나타샤가 얼마나 비웃겠냐!   

료샤 : 그건 그렇지만... 아 가기 싫어...

나 : 레냐도 데려가?

료샤 : 아니, 레냐는 지난주에 이라랑 따로 가서 아빠랑 밥먹었어.

나 : 하긴... 애기니까 저녁에 술마시고 만찬 먹고 할땐 좀 그렇겠다.


료샤 : (곰곰 생각...) 야, 울집에 여자 드레스 있는데 너 그걸로 갈아입고 가면 되지 않을까?

나 : 뭐야, 싫어!!!! 내가 왜 남의 옷을 입고 가니!!! 글고 나한테 맞지도 않을 건데...

료샤 : 하긴 길어서 너한텐 안 맞겠다. 아...

나 : 그래도 여자 옷이 있는 걸 보니 요즘 데이트 생활은 좀 잘되나보구나 ㅋㅋ

료샤 : 아니야!!!! 접때 그 망할 그 여자가 놔두고 간 거야!

나 : 앗, 그 여자랑 뽀뽀도 안 하고 헤어졌다더니 ㅋㅋ

료샤 : 그 여자가 그냥 놔두고 갔어!!!!! 간악한 여자!!! 그래놓고 막 브 콘탁테에 자기 옷 내 소파에 걸어놓은 사진 올리고!!! 악마 같은 여자 ㅠㅠ

(얼마 전 료샤는 어떤 여자를 사귈뻔 했으나... 좀 이상한 여자라서 두어번 만나고 말았지만 이 여자가 동네방네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녀서 얘는 자기 sns 계정도 다 폐쇄했음. 무서운 불여우 같은 여자라고 혀를 내두르고 있음 ㅋ)


나 : 뭐 그냥 놔두고 간 거든 역사가 있었든 상관은 없다만... 너 나보고 그 여자가 입었던 옷 입으라는 거야 지금!!!!!

료샤 : 어, 생각해보니 그것도 좀 그렇긴 하다. 생각해보니 그 여자 170 넘었는데 그 옷 너한텐 맞지도 않겠다.

나 : (-_- 어쩐지 나 의문의 1패한 것 같음 ㅠㅠ) 근데 그 여자 그렇게 싫어하면서 그 옷은 왜 안 돌려줬어?

료샤 : 무서워서... 옷 돌려주려면 연락해야 하잖아, 또 무슨 거짓말을 꾸며내고 브 콘탁테랑 인스타에 사진 올릴지 어떻게 알아 ㅠㅠ

나 : 그럼 나같으면 그 옷 버렸다! 아님 불우이웃한테 기부했거나!

료샤 : 청소 아줌마한테 버리라고 했는데 아줌마가 안 버리잖아 ㅠㅠ

나 : 네가 버리면 되잖아!

료샤 : 손대기도 싫단 말이야! 보기도 싫어!


난 가끔 얘의 행동 양태가 이해가 잘 안되지만... 하여튼 료샤는 기가 세고 목소리 크고 위압적인 여자를 매우 무서워하므로 그러려니... (성차별주의자!!)


..



하여튼 그래서 우리는 고스찌에서 좀 앉아 있다가 내 방으로 와서 한동안 얘기 나누었다. 그리고 료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으로 아빠 생일잔치에 갔다. 불쌍했다.


하도 풀죽고 불쌍해보여서 한 45% 정도 '그냥 같이 가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음. 그러나 료샤가 나한테 옷 때문에 신경쓰이는 거면 가다가 괜찮은 데 가서 한벌 사주면 되지 않냐고 해서 확 열받아서 45%는 0%가 되었다.


아니 도대체 내가 왜 친구가 사주는 옷까지 입고 부르주아 생일파티에 가야 되냐!!!!!!!!! 나는 기모바지랑 보세 니트랑 베어파우 어그 신고 패딩 입고 그냥 걸어서 쏘다니고 방에서 유니클로 티셔츠랑 파자마 입고 편하게 쉴 거다!!!!


그래서 료샤는 슬퍼하며 6시쯤 방에서 나갔고... 나한테 좀 삐쳤지만 아빠네 가다가 전화해서 '옷 사준다 해서 화나서 안 간다 한 거지? 안 그랬음 갔을 거지? 미안해 친구야' 하고 사과했다.


그래서 나는 '옷 사준다 해서 열받은 건 맞는데, 안 그랬어도 안 갔을 거야. 45 대 55였어'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료샤는 다시 좀 삐쳐서 '쳇 친구 맞아?' 하고 전화 끊음.


삐치면 안되는데... 내일 레냐랑 같이 보기로 했었는데 ㅠㅠ 친구야 삐치지 말고 아빠 생일잔치 잘 다녀오고 무서운 나타샤 어택도 잘 이겨내렴 ㅠㅠ (왜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공연히 잘못한 것 같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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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료샤는 가기 싫은 아빠네 집에 가고. 나는 샤워를 하고 유니클로 티셔츠와 파자마를 입고, 볶음김치와 참치와 누룽지로 저녁을 먹고, 그저께 호텔 로비 카페에서 준 크리스마스 쿠키를 뜯어서 에르미타주에서 사온 컵에 디카페인 차 우려 마시고 방에 비치된 잡지를 읽으며 평화롭게 밤을 보내다 이제 오늘의 메모 쓰는 중. (료샤는 나에게 '울 아빠네 안 가면 너 뭐할건데!' 라고 해서 '나는 샤워하고 파자마 입고 한국에서 가져온 인스턴트 밥 먹고, 쿠키랑 차 마시면서 잡지 볼거다!' 라고 했더니 엄청 부러워했었음 ㅋㅋ)


근데 이렇게 써놓고 나니 료샤 좀 불쌍해. 그냥 같이 가줄걸 그랬나?


:
Posted by liontamer

 

(사진은 모이카 운하)

 

 

늦잠 자고 싶었지만 9시 알람을 맞췄다. 그 이유는 우체국 소포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_- 오전까지 머문 숙소가 중앙우체국 근처라 소포를 부치려면 오늘 오전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어제 가방을 싸보니 무게보다도 부피 때문에 그 망할 소포를 부쳐야 했다. 여름이고 홍차랑 책 몇권 외엔 별로 산 것도 없는데 왜 가방이 터져나가는 것일까 허헝,,,

 

10시 반쯤 중앙우체국에 다시 갔다. 어제의 그 마귀할멈 대신 다른 창구로 가서 물어봤는데 거기도 제2의 마귀할멈이 앉아 있었다. 딸론칙을 가져오라며 화를 냈다. 대체 딸론칙이 무엇인가 한참 고민했는데(보통 종이쪽지, 버스표 등을 가리킨다) 알고보니 번호표였다. 러시아도 그동안 기술발전이 물론 있었고... 번호표를 뽑아오면 스크린에 몇번 창구로 가라고 뜨는 것이다. 중앙우체국이라 워낙 크고 창구가 많으니 그런 거였다. 흠, 몰랐던 내 잘못도 있구나. 그건 그렇다치고 엄청 신경질냄. 손님도 하나도 없었는데!

 

번호표 기계로 갔는데 뭔가 엄청 복잡했다. 소포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나는 저렴한 소포를 부치고 싶었으나 도대체 몇번을 눌러야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마침 내앞에서 번호표 뽑는 나이든 아저씨가 계셔서 물어보니 너무나 친절하게 '이건 비싼거고 저건 싼건데 어떤걸로 할거니?' 라고 물어봐줘서 '싼거요~' 했더니 그럼 이 메뉴를 누르라고 알려주심. 아저씨 복받으실 거에요 흐흑... 그래, 시민들은 친절한데 관료들만 불친절한 것이야 허헝...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창구에 번호가 떠서 상자를 가져갔더니 새로운 마귀할멈 3이 막 화를 냈다, 왜 상자를 봉해왔냐는 것이다. 원래 여기는 소포 포장을 할때 안의 내용물을 모두 검사한다. (예전엔 CD 같은 건 반출 못했는데 아마 지금도 그러려나..) 그래서 '어제 다 검사해서 저쪽 창구 아주머니가 봉해준 거에요. 근데 쉬는 시간이라 다 놀아서 난 시간이 없어 오늘 다시 온 거에요' 라고 설명하고 다행히 어제 상자 포장해준 아줌마가 한쪽에 있어서 그분이 '응, 그거 어제 내가 다 봤어' 라고 확인해 주었다(유일하게 약간 친절했던, 마귀할멈 아닌 사람이었음 ㅠㅠ)

 

그리하여 1700루블을 내고(3만원 정도) 선박 운송을 선택하여 망할 소포를 부쳐버리니 살 것 같았다. 기껏 4킬로 더 쑤셔넣고 오버차지 내지 그랬냐고 하신다면... 가방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ㅠㅠ 그리고 근력 따위 없는 나에게 4킬로 추가란 엄청난 짐!!!

 

 

 

(보기에는 아주 웅장하고 아름다운 중앙우체국. 그러나 오랜 옛날부터 나에게는 고생과 원망의 장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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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를 해결한 후 방에 돌아와 가방을 마저 싸고 체크아웃을 했다. 2시 반 택시 예약을 한 후 이제야 가벼운 맘으로 부셰에 가서 오믈렛 아점을 먹었다. 맛있어서 기분이 나아졌다

 

오늘도 엄청나게 날씨가 좋았고 하늘이 파랬고 햇살은 따가울 지경이었다. 진짜 눈부셨다. 돔 끄니기에나 갈까 하고 쭈욱 걸어올라갔다. 원래 목표는 돔 끄니기에서 책을 한권 사서 카잔 성당 분수 앞 벤치에서 아이스크림 먹으며 책 읽는 거였다. (내가 좋아하는 코스라서 옛날에 미샤를 초창기에 등장시켰던 illuminated wall 에서도 미샤는 처음에 카잔 성당 앞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근데 잠깐 와이파이 연결이 필요해서 유럽호텔 로비로 가서 폰을 좀 봤다.

 

그리고는 카톨릭 성당에 들러 다시 초를 켜고 기도를 했다.

 

 

 

..

 

 

돔 끄니기에 가서 새 지도를 샀다. 구글이나 앱이 있어도 나는 아날로그라 옛날부터 보던 종이 지도가 편한데 한 2~3년 쓴 지도가 너무 헐어서 찢어지고 말았다. 새 지도를 산 후 글쓰기에 필요해서 7~80년대 레닌그라드 시절 도시 현황과 거리 이름 등이 기재된 책이 필요하다고 점원에게 물었으나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책장을 뒤져 페테르부르크 거리 이름 유래에 대한 책을 샀다. 이건 제정시대부터 지금까지를 다 아우르는 거라 사실 내가 원하는 건 아닌데 ㅠㅠ 나중에 구글링으로 찾는 게 빠르겠다.

 

(이게 오늘 산 책과 지도 두 종)

 

 

별거 안 했는데도 카잔 성당 분수 앞 벤치에 앉아 책 읽을 시간이 없어졌다. 호텔까지 걸어내려가는 시간이 있으니(버스는 밀림) 그냥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돔 끄니기 앞 아이스크림 수레에서 에스키모 플롬비르 초콜릿 아이스크림 바를 사서 먹으면서 혼잡한 네프스키 대로와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대신 모이카 운하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갔다. 햇살이 눈부셔서 운하의 수면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붉은 다리와 푸른 다리를 건너 호텔로 돌아왔다. 택시를 타고 네번째 호텔(하루 묵었었으므로 실제로는 3개째의 호텔)로 와서 체크인을 했다. 근데 저번보다 방이 안 좋네... 하긴 급하게 방을 예약했고 제일 저렴한 방으로 했으니... 그때보다 좁고 침대도 트윈을 두개 붙여놓은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 방은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는데 이번 방은 안쪽 마당인 중정 방향이네. 그래도 뭐...

 

이 호텔은 그래도 프린트를 공짜로 할수 있어서 오늘 지젤 티켓과 새로 끊은 항공권 이티켓을 프린트했다. 그리고는 피곤해서 좀 늘어져 있다가 컵라면 대충 먹고 원피스로 갈아입은 후 마린스키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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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연이 이곳에서 머무는 3주 동안의 마지막 공연이다. 원래 매진이었는데 우연히 표가 몇개 나와서 급히 득템했던 것으로, 바로 슈클랴로프가 알브레히트를 추는 지젤이었다. 오오...

 

공연은... 사실 내가 지젤을 진짜 좋아하는데 이번 공연은 작품 자체보다는 슈클랴로프 보느라 넋을 놓아서 ㅠㅠ 지젤 보면서 안 울었던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아나스타시야 마트비옌코가 지젤로 나와서 좀 이입이 덜 되기도 했다만...

 

슈클랴로프의 알브레히트는 완벽했다... 이 남자의 타고난 기품과 동정심을 자아내는 눈빛과 애절한 춤. 10년 전 그의 알브레히트가 생각났다. 이반첸코 대신 나와서 '저거 누구야!' 하고 짜증냈던 걸 떠올리니 참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감개무량 ㅋ

 

사진은 따로 올려보겠다. 리뷰도 따로 써보겠다. 근데 이걸로 총 8개의 공연을 봤는데 제대로 리뷰 쓴 건 거의 없네 어헝...

(커튼 콜 사진과 또 짧은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835)

 

내 자리가 간신히 득템한것까진 좋은데 1층 베누아르 완전 사이드의 게다가 2열이었다. 앞사람 머리에 너무 가리고 왼쪽 무대는 잘 안보여서 진짜 괴로웠다. 슈클랴로프가 출땐 반쯤 엉거주춤하게 서서 봤다(내 뒤에는 사람이 없어 다행...) 나중엔 꼭 기합받는 듯.. 허벅지 쥐나는 줄 알았다. 흐흑... 내 앞에 앉은 사람들 다 키 크고 머리 컸어 엉엉...

 

샵에서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희귀한 옛 사진 세장(아마 베자르 작품 췄을 때인듯)과 테미르카노프가 지휘한 호두까기 CD를 샀다. 그리고 내친김에 CD 파는 아저씨에게 레인골드 글리에르의 청동기사상 음악 있느냐 물었다. 이번 마린스키에서 올린 그 발레. 아저씨는 안타까워하며 다른 작품들만 있다고 했다. 그 음악 정확한 제목이 뭐냐 물으니 청동기사상 맞다고 한다. 하긴 발레음악으로 만든 곡이니... 네프스키의 다른 샵에 한번 가보라 한다. 그 음악 구하고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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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클랴로프의 우아하고 애절한 알브레히트 춤과 사랑스러운 커튼 콜 인사 때문에, 그리고 마린스키 구관의 지젤이라는 것 때문에, 또 마지막 공연이란 생각 때문에 좀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나왔는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럴줄 알고 우산 가져왔다!!!!! 요 며칠 너무 날씨가 좋았어!

 

근데 진짜 엽님 운 좋으셨습니다~ 가시자마자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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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쓰고 호텔까지 15분 정도 걸어야했다. 오다가 수퍼에 들러 자두 세알과 체리 300그램, 새로 나와서 궁금해진 구운 고기맛 감자칩(ㅋㅋ), 물 1.5리터를 샀다. 방에 와서는 배고파서 체리와 감자칩을 조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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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제 4일 남았어...

 

돌아가고 싶지 않아...

 

우울함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하다...

 

그래도 슈클랴로프의 알브레히트는 아름다웠다. 외모 얘기가 아니고(외모도 뭐 예쁘지만) 그의 춤과 표현력, 무대 자체가 아름다웠고 때로는 그런 아름다움이 마음을 뒤흔들고 감동시키고 또 위안과 평온을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도스토예프스키 말이 맞다. 때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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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6. 4. 15. 08:00

나의 뻬쩨르 5) 내가 언제나 초를 켜는 곳 russia2016. 4. 15. 08:00

 

 

나의 뻬쩨르. 금요일의 마지막 예약 포스팅은 네프스키 대로 한가운데 있는 예카테리나 카톨릭 성당이다.

카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페테르부르크에 갈때마다 꼭 들르는 곳이다. 이곳에서 초를 켜고 기도를 한다. 이곳은 나의 비밀 장소 중 하나였다.

 

 

 

 

성당 앞에는 이렇게 화가들이 나와서 그림을 판다. 초상화가들도 많이 있다. 예전에 한번 여기 앉아 초상화를 그렸던 적도 있다.

 

이것으로 이번주의 '나의 뻬쩨르' 예약 포스팅은 끝. 개인적인 공간들이면서 어느 정도 개방된 공간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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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9. 23. 20:52

네프스키 거리의 야경, 겨울 밤 russia2015. 9. 23. 20:52

 

 

지난 2월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떠나기 전날 밤, 마린스키 신관에서 공연 보고(라트만스키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춥고 캄캄하고 숙소도 네프스키 대로 중심에 있어서 그냥 버스를 탔다. 당시 머물던 호텔은 고스치니 드보르 정류장에서 더 가까웠지만 한 정거장 전인 카잔 성당 앞에서 내렸다. 마지막으로 야경 보고 가려고.

 

내 카메라는 오래된 니콘 dslr인데 무거운 걸 못 드는 탓에 렌즈도 기본 번들 중 하나라서 딱히 야경을 근사하게 잡지는 못한다(카메라 탓이 아니고 실은 내 탓임.. 사진 찍는 걸 좀 제대로 배워보고픈데..) 어쨌든 그나마 건진 몇 장 올려본다.

 

카잔 성당.

지난번에 이 카잔 성당과 그 앞의 분수 사진들 여러번 올렸다. 이때는 겨울이라 분수는 작동하지 않았다.

 

옛날 유학생 시절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카잔 성당을 보면 낮과는 달리 상당히 괴괴한 느낌이 들었다. 모양도 그렇고 규모도 커서 더 그런 것 같다.

 

 

 

이 근사한 아르누보식 건물은 전에 몇차례 올렸던 돔 크니기 건물.

 

 

 

그리고 걸어가면서 찍은 네프스키 대로 사진 몇 장.

 

 

 

 

예카테리나 카톨릭 성당. 나의 비밀 장소 중 하나. 여기는 그 성당 앞 광장이다.

낮에는 저기서 그림을 팔고 또 초상화가들이 늘어서서 초상화를 그리지만 밤에는 이렇게 골조만 남아 텅 빈 느낌을 자아낸다.

 

 

 

 

 

길을 건너야 하므로 이렇게 지하도로 들어갔다. 이 지하도는 지하철 '고스치니 드보르' 역과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그나마 음침한 느낌이 덜하지만 옛날엔 진짜 음침했다. 여기서 이것저것 많이도 샀었지. 불법으로 학생 교통권을 판매하는 아저씨들도 있었고(거기서 한번 산 적도 있다). 그리고 이 지하도를 지나다 보면 바이올린 켜는 악사도 있었고... 옛 기억이 새록새록...

 

 

 

지하도를 건넜다.

맞은편에 보이는 저 큰 건물이 고스치니 드보르. 백화점이다. 한때는 페테르부르크 제일의 백화점이었다. 규모가 엄청나다. 아주 기다란 건물이 이어져 있다. 옛날엔 가끔 갔는데 갈때마다 길을 잃었고 다리가 엄청 아팠다. 제정 러시아 시절 생긴 곳이다. 모스크바의 '굼', 페테르부르크의 '고스치니 드보르'.

 

 

 

이때 내가 머물렀던 호텔은 네프스키 대로에서 꺾어들어가 미하일로프스카야 거리로 들어가면 나온다. 예술광장 바로 앞. 그랜드 호텔 유럽 전경. 왼편이다. 오른편에는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건물이 있다.

 

 

 

호텔 앞에 다 와서...

좋은 호텔이다. 여름엔 비싼 데다 방이 없어서 못 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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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9. 15. 19:54

러시아 박물관 창 밖 풍경 russia2015. 9. 15. 19:54

 

 

지난 7월. 페테르부르크. 루스끼 무제이 (러시아 박물관, 혹은 러시아 미술관)

 

옛날엔 에르미타주를 더 좋아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 박물관이 더 좋다. 그래서 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마다 여긴 꼭 들르고, 에르미타주는 이제 2번 가면 1번 정도 들른다.

 

2층의 어느 전시실 창문 너머로 바라본 바깥 풍경. 울타리 안쪽은 미하일로프스키 공원. 건너편으로 보이는 곳은 예술 광장.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연한 녹색의 돔은 네프스키 대로에 있는 카톨릭 성당이다. 그곳은 나의 비밀 장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마다 꼭 그곳에 들러 초를 켠다. 일종의 의식이기도 하다.

 

다녀온 지 두달밖에 안됐지만 다시 가고 싶네. 이 박물관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브루벨 그림과 천사 이콘이 있다. 이 박물관은 해가 갈 수록 내게 매우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몇년전 썼던 미샤와 트로이가 나오는 장편의 결말을 이곳, 러시아 박물관의 전시실에서 맺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시실에서 저 바깥으로, 예술광장으로, 그리고 네프스키 거리로 이동하면서 끝난다. 눈 내리는 2월. 러시아. 표트르의 도시. 한때 레닌그라드로 불렸던 도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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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