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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에 휴가 냈을땐 원래 오늘밤에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일이 좀 있어 이틀 연장해 화요일 밤에 떠나게 되었다. 더 있는 거야 나쁘지 않지만 일이 밀리고 있을테고 파트너 후배가 혼자 고생하는 시간이 늘어나는게 미안스럽다. 뭔가 좀 사다줘야겠다.. 흑..



..



맨위 사진은 마린스키 신관 전시실. 1야루스(3층) 홀에 있다. 프티파 200주년이라 올해 행사가 많았는데 전시도 열리고 있었다. 사진의 화려한 빨간 무용화는 발레 라이몬다(영어식으론 레이몬다라고 하는거 같기도)의 여성 무용화.








오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주연의 페트루슈카 공연이 있었다. 뛰어난 무용수인 동시에 탁월한 배우인 이 사람이 추는 페트루슈카가 항상 궁금했었다. 이사람이 추는 포킨 오리지널과 블라지미르 바르나바의 버전 둘다 보고팠는데 오늘 올린 건 후자였다.



아니, 화보에선 그렇게도 인상쓰며 최선을 다해 못생긴 연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못나게 분장을 해도 조명 받을때마다 타고난 잘생김이 자꾸 스며나왔음!



스트라빈스키 음악 중 제일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내게 페트루슈카는 글쓰기에 있어 불새와는 또 다른 의미로 중요한 발레이다. 오리지널 포킨 버전도 마린스키 무대에서 봤었는데 바르나바 버전도 작년에 나왔을때부터 궁금했었다.


맨앞 가운데 앉아서 봄. 슈클랴로프님은 역시 명불허전. 춤도 연기도 모두 아주 훌륭했다. 몸과 눈빛을 참 잘 쓰는 무용수이다. 그리고 간만에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로 듣는 페트루슈카.. 좋았다.



다만 바르나바는 역시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는 걸 다시금 느낌. 이 사람이 안무한거 이래저래 마린스키 무대에서 여럿 봤는데 항상 어딘가 피상적이란 느낌이었다. 페트루슈카도 그랬다. 많은 상징을 부여하며 근사하게 만들어내려 했지만 정작 의도와 미술과 음악, 페트루슈카라는 존재 자체의 무게에 휘둘려 허덕허덕 쫓아가는 느낌이었다.



무용수들 문제는 아니었다. 슈클랴로프를 비롯해 실라치(차력사. 원작에선 아랍인)와 디바(원작에선 발레리나), 페트루슈카의 죽음(내가 귀여워라 하는 다비드 잘레예프) 등 무용수들은 좋았다. 움직임과 연기도 나무랄데 없었다.



그저 작품 자체가 좀 아쉬웠다. 저런 주제와 미술과 질료들(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라고요! 심지어 비슈뇨바와 세르게예프도 이거 췄음)을 사용했다면 좀더 깊이있는 작품이 나왔을법도 한데.. 내게 있어 바르나바는 아직 좀 치기 어린 안무가인것 같다. 나이도 이제 30살 될까말까 젊지만 이건 꼭 나이 문제는 아니다. 아주 젊은 안무가도 놀랍게도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여튼 쫌 아쉬웠지만 슈클랴로프의 원숙한 연기와 춤을 보는건 역시 반갑고 좋았다. 커튼콜때 내가 맡긴 꽃다발도 등장해서 기쁨 :)) 꽃다발 여럿 받으심. 나는 빨강과 분홍장미 섞어서 줬다. 페트루슈카가 흰색과 회색 계열 의상이라 눈에 띄라고 :))



그의 아내인 마리야 쉬린키나와 친구이자 최근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마린스키로 돌아온 안나 라브리넨코가 오른편 사이드 중간줄에 앉은거 발견. 인사하고팠는데 창피해서 망설이다 쉬는 시간에 마침 내 앞을 지나가기에 인사함. 마샤는 눈짓하며 인사받고 갔고(일행이 있었다) 안나와는 아주 잠깐 얘기나눔. 마린스키 돌아온거 축하해요 언제 나오세요 등 묻고 행운 빌어주고 헤어짐.



발로쟈, 한국 또 오세요...





커튼콜 사진 한장. 맨앞줄 가운데였지만 오늘따라 폰이 버벅대서 화질 나쁨 ㅠㅠ 카메라로 찍은건 나중에 집에 가면.. 근데 신관 무대에서 흰옷 입고 나올때 찍으면 맨날 사진 망하므로 기대 안함 ㅠㅠ


발로쟈는 어디에 있을까요~ 가운데 계시긴 한데 페트루슈카 역이라 행색이 초라함.. 그래도 무대 위에서 눈빛이 얼마나 형형하게 살아 있던지.







내가 바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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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시차 때문에 새벽에 제대로 깨어났고 한참 뒤척였다. 잠이 너무 안 왔다. 호르몬 주기와도 겹쳐서 그런 거였다. 진통제를 주워먹고 8시쯤 다시 잤고 10시 반쯤 깨어나 계속 누워 있었다. 아침에 새로 잠들었을 때 아주 생생하고 복잡하고 또 감정적으로 격렬한 꿈을 꾸었다. 심지어 동료가 안 좋은 일을 당하는 꿈에 자신의 흐느낌 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꿈에 나온 회사 동료가 걱정되어 톡까지 보냈다. 꿈자리 안 좋으니 조심하라고.... 울 엄마는 내가 이런 말 하면 할머니 같이 군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이따금 꿈이 맞을 때가 있단 말이야 ㅠㅠ



바깥 날씨는 아주 꾸무룩했다. 어제까진 예보에서 분명 오늘 기온은 낮아도 구름은 약하고 해가 난다 해서 수도원에 갈까 했었지만 그날이 시작되어 몸 상태도 나쁘고 또 원체 흐려서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았기에(저녁에 비온다고 예보는 되어 있었다) 다 포기했다. 1시 넘어서 기어나갔다.





(이 꾸무룩한 날씨 ㅠㅠ)

(맨 위 오페라 글라스 사진이랑 왜이리 느낌이 다르냐면... 그 사진은 dslr로 찍은 것이기 때문...

극장 갈때만 카메라 들고 갔다. 어제랑 오늘 몸이 힘들어서 그냥 폰으로만 찍었더니 찍은 사진도 별로 없고 화질도 그냥저냥...)




...




호텔에서 10분 거리의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본치 카페에 가보았다. 여기는 페테르부르크 알파벳이라는 일러스트 북을 그린 소피야 콜로프스카야가 멋지게 그려놓고 추천했던 곳이다. 예전에 간판은 자주 봤는데 들어가보진 않았었다. 내가 러시아에서 기대하는 카페와는 다르게 너무 현대적이라서 ㅋㅋ 점원은 너무 시크해서 친절한 느낌이 없었지만 카페 자체는 좋았고 특히 창가에 앉아 글쓰기가 편한 곳이라 왜 콜로프스카야가 여기를 좋아하는지 알것 같았다. 앉아서 아침에 꾼 꿈 이야기를 약 5장 정도 자세히 적었다. 나중에 단편 같은 걸로 쓸 수 있을만큼 상징과 글감이 넘쳐나는 꿈이었다.



본치 카페에서 스메타나 곁들인 아주 얇은 블린 석장과 생강차를 먹었다. 탄수화물을 좀 먹었더니 정신이 좀 들었다.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도 서양배로 때웠다... 카페에서 나와 건너편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일본라멘집인 야루멘에 갔는데 가라아게 카레 시켰다가 너무 맛없어서 피보고(차라리 오뚜기 3분 카레가 낫겠어!!!) 계산서 갖다달라 했는데도 너무 한나절이라 결국 나가면서 카운터에서 직접 계산하고 팁은 안 줬다.



방에 돌아와 좀 쉬면서 디카페인 차 우려서 도착했던 날 호텔에서 준 초콜릿 상자를 열어 두 알 곁들여 먹었다. 그리고는 화장을 좀 고치고 6시 즈음 호텔을 나섰다.




...






(다시 와서 반가운 마린스키 신관의 깃털 막과 스와롭스키 크리스탈 장식들)




오늘은 마린스키 신관에서 블라지미르 바르나바가 여름 백야축제 개막작으로 안무했던 3막 발레인 '야로슬라브나, 일식'을 끊어두었다. 바르나바는 슈클랴로프랑 스메칼로프의 절친인 젊은 안무가인데 모던 발레를 안무한다. 예전에 이 사람 단품을 몇개 봤고 최근 호평을 들었던 '글리나'(clay)도 무대에서 봤는데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볼까말까 하다가 이번 여행 기간엔 발레 레퍼토리 체가 딱히 풍성하지 않아서 그냥 보기로 했다. (흑, 도착 전날 슈클랴로프님이 노비코바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췄지 엉엉... 진작 말해줬으면 휴가를 앞당겼을 거 아니니 엉엉)



하여튼 이 공연은 혼자 볼 생각이었는데 내가 오늘이랑 내일 다 발레 본다니까 료샤가 자기도 따라왔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이 안무가는 현대발레 안무가이다. 그나마도 네가 (나 덕분에 알게 된) 백조의 호수나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 같은 발레와는 다를 것이다. 재미없고 뭔 말인지 모를 수도 있다... 등등... 그러나 료샤는 '이고리 원정기 얘기잖아! 그거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배운단 말이야! 너보단 내가 더 잘 알아!' 하면서 잘난척하며 따라온 것이다. 아아... 나는 분명 경고했어!



료샤는 1막 내내 졸았고 2막에선 좀 좋아했고(왜냐면 중간에 약간 야할듯 말듯한 장면이 나와서) 3막에선 또 졸았다 ㅠㅠ 나도 1막은 좀 지루했고 2막이 제일 재미있었고 3막은 그냥 그랬다. 주인공인 이고리 대공과 그의 아내 야로슬라브나가 나오는 장면들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해서.... 역설적으로 2막은 얘들보다는 적군들의 샤먼 의식과 괴기스러운 마법의 초원이 나와서 더 볼만했음.



이 발레는 70년대 소련에서 안무된 작품을 바탕으로 바르나바가 재안무한 것이다. 내용은 러시아 역사에서 유명한 이고리 대공의 원정기와 그의 아내 야로슬라브나의 비가를 재구성한 것인데 영웅 서사시라기보다는 인간(특히 한 남성) 내부의 야망과 정복욕, 그리고 헛된 파괴와 비극을 다루고 있다. 보면 딱 러시아 현대 발레 느낌이 난다. 보리스 티셴코의 음악도 딱 소련 작곡가 스타일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별로 내 취향이 아니었음. 보고 있자니 음악과 무대 미술에 안무가 먹히는 느낌이었다.



바르나바는 물론 열심히 했고 내가 좋아하는 스메칼로프가 주역인 이고리 대공을 춰서 근사해보이긴 했지만 작품 자체는 탁월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줄곧 어우러졌고 장엄하고 웅장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자아냈지만 가장 중요한 춤과 주인공들의 드라마가 약해서 아쉬웠다. 바르나바는 주인공 내면의 투쟁과 거대한 비극을 다루고 싶었다고 인터뷰했지만 내게 그건 피상적으로 남아서 아쉬웠다. 팔다리 길쭉길쭉하고 키크고 체격 좋은 스메칼로프는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춤도 그렇고 이고리 대공 역에 딱 맞았고 잘 추기도 했지만 슬프게도 그게 다였다. 아무리 무용수가 뛰어나도 작품 자체가 그 정도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도 스메칼로프가 나올때는 군대들도 나오고 전투도 나와서 좀 나았는데 야로슬라브나가 나타나 느릿느릿하게 온몸을 꼬고 비틀며 독백하고 고통에 몸부림칠때면 '언제 들어가니 ㅠㅠ'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니 작품 타이틀로 등장한 배역이 이래버리면 이미 낭패...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 취향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사랑의 전설에서 메흐메네 바누가 몸을 꼬며 고뇌하는 장면도 안 좋아했음 ㅋㅋ 그러나 이 작품에 비하면 그리고로비치의 메흐메네 바누는 엄청나게 탁월하다!)







(그래도 커튼콜 사진 두 장. 이번엔 맨앞줄이 아니고 3층 앞줄을 끊어서 오케스트라 핏 앞까지 뛰어나가지 않았음.

사진도 대충... 스메칼로프는 붉은 칠 검댕 칠을 해서 얼굴도 제대로 안 나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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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나는 안 졸았고 그래도 열심히 보았다. 료샤는 실컷 졸고 나서는 나에게 '너 뭔말인지나 알아들었냐? 노어로 계속 노래부르던데 그거 다 이고리 원정기 얘기인데!' 하고 오히려 나에게 쿠사리를 준다.



'내용이야 대충 다 알아들었다, 나도 대학 시절 이고리 원정기 노어로 읽었다'고 하자 그는 '헉 그거 옛날 노어로 되어 있는데 어케 읽었어?' 하고 깜딱 놀랐다. 전체는 번역본으로 읽었고 노어로는 발췌 텍스트만 읽고 시험봤는데 머리 쥐나는 줄 알았고 수업시간엔 졸았고 그때도 야로슬라브나의 비가 읽으며 '으악 머리야' 했다고 말해주자 료샤는 킥킥 웃었다. 졸았다고 쿠사리들을까봐 먼저 공격하는 이놈...



나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료샤가 쫓아온 것에 감사했다(차를 가져왔으니까 ㅋㅋ) 차 안에서 료샤는 '오늘 나온 놈도 좋아하지 않았어? 얼굴 보니 전에 너랑 딴거 볼때 나왔던 놈 같아. 그때도 네가 사진 찍지 않았어?' 하고 물었다.



나 : 응, 유리 스메칼로프도 좋아해. 되게 옛날에 에이프만 발레단 무용수로 있으면서 내한공연했을 때부터 좋아했어. 


료샤 : 흥, 그래도 그 슈클랴로프 놈보다는 안 좋아하지.


나 : 그건 그렇지만... 왜!


료샤 : 그러니까 1야루스(3층)를 끊었지. 슈클랴로프 녀석이 나왔음 이렇게 지루한 발레라도 분명 맨앞줄 가운데 끊어서 가산 탕진했겠지!


나 : 우와 예리하다!!!!



내가 그날 때문에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진통제를 털어넣고 있자니 료샤가 혀를 찼다. 도대체 몸이 괜찮을 때는 언제냐고 묻는다 -_- 야! 우리 나라는 10월 초에 5도까지 내려가진 않는단 말이다 ㅠㅠ 그리고 사내놈이 뭘 알아! 네가 일생에 한번이라도 여자처럼 피를 흘려보았느냐!!!! 흑흑...



하여튼 그래서 료샤는 나를 데려다주고는 자라고 하고 가버렸다. 맥심 한 잔쯤은 타줄 용의가 있었는데 나보고 얼굴이 너무 창백하다고 하며 자라고 한다. 그럼 피가 줄줄 나오는데 얼굴에 홍조가 돌겠냐 ㅠㅠ 나는 사실 저녁을 안 먹어서 배고파서 이놈이 괜찮다고 하면 뭐라도 테이크아웃해서 들어오려 했는데... 이놈이 나보고 아파보인다고 매우 걱정을 하며 '어서 자야 한다'고 난리를 쳐서 착한 친구답게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방에 와서 배고파서 과일접시에 남아 있던 파란 사과를 반쪽 먹었다. 무지 시고 맛없어 흐흑.. 그래서 미니 초콜릿도 한개 먹었다.



으앙.... 나 아직 청동기사상도, 푸쉬킨 동상도 안 보러 갔다. 뻬쩨르 와서 이런 건 처음이다... 흑, 제발 내일은 날씨가 좋았으면... 그리고 아픈 것도 가셨으면 ㅠㅠ

(그런데 찻잔은 샀다... 이게 뭐냐 ㅋㅋ)



..



모두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보름달도 보실 수 있길!

(여기 날씨를 보니 올해도 난 보름달 보긴 틀렸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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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