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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26. 19:31

러시아 음식점, 집밥 보르쉬 2022-23 praha2022. 11. 26. 19:31

 






여기는 월요일에 가서 보르쉬를 맛있게 먹고는 따로 올려야지 하고 사진만 갈무리해두고 그날그날 쏘다니느라 놓쳤던 그 러시아 식품점이다. 가는 길은 전혀 관광지 쪽이 아니고 심지어 좀 황량한 동네라 블라디보스톡이나 뻬쩨르 외곽 동네 느낌이 났다. 트램을 환승해 타고 여러 정거장을 가서 디바들로 나 피들로바체라는 이름도 어려운 정류장에서 내렸다.












바로 이런 썰렁한 정류장. 구글 맵을 켜고 길을 건너 아주 썰렁하고 작은 공원을 지나 이런 이끼 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설마 문 닫진 않았겠지? 이렇게 멀리 왔는데’ 하고 불안해함 ㅎㅎ
















요렇게 가게가 나타나고, 아이들 몇명이 우르르 들어가 초콜릿을 고르고... 키 높은 간이 테이블이 딱 둘 있는데 그 중 하나엔 척 봐도 곰같은 러시아 남자가 앉아 보르쉬를 드시고 있었다. 그냥 식품점, 매점 같은데 펠메니, 바레니키, 보르쉬, 우하 등의 메뉴가 있었다. 이날 아주 스산하고 추웠다. 나도 보르쉬를 시키고 연어 든 조그만 삐로슈까를 시켰다. 삐로슈까는 데워줘서 물렁해져서 좀 별로였지만 보르쉬가 너무 맛있었다. 테이블이 높아서 힘들게 걸터앉아 정신없이 흡입. 인생 보르쉬에 들어감! 비트와 감자 등 건더기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잘 먹자 카운터의 주인 아주머니가 좋아하셨다. 냉장고에서 조그만 유리 종지에 든 차갑게 식힌 고기를 가져다주었다. 육수 내고 발라놓은 소고기를 결대로 찢어놓은 건데, 나는 비위가 약해서 조금만 잡내가 나면 고기를 못먹는다. 그래서 어떻게 먹은 척 조금만 먹지 했는데 아니 이것이 또 너무 맛있는 거였다! 결국 고기도 수프에 다 빠뜨려서 끝까지 다 먹음! 꼭 엄마가 육개장 끓이실때 고기 삶아서 결대로 찢어놓은 걸 나중에 넣어주시는 느낌이었다.




며칠 후 제대로 된 러시아 식당 가서 또 보르쉬를 먹었지만 여기 것이 더 맛있었다. 그건 식당 보르쉬, 이건 엄마 집밥 느낌. 아주머니에게 너무 맛있다고 하자 엄청 좋아하시며 또 오라고 했다.




사실 우하도 먹고프고 또 진열대에 까르또슈까도 팔아서 막바지에 한번 더 갈까 했는데, 옮긴 숙소 바로 근처에도 러시아 식품점이 있어 아무래도 멀어서 안 갈 것만 같다. 우하는 먹고픈데 이제 여행이 다 끝나가니 저 먼곳에 다시 가기가 좀 어려워짐.









맛있었던 집밥 같은 보르쉬.









삐로슈까는 좀 실패. 근데 여기는 러시아어 리뷰들을 보면 펠메니가 또 그렇게 맛있다고 한다. 아 좀 가까우면 좋울텐데 ㅠㅠ











원래 러시아 식품점이었으나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 삭품점으로 바꾼 듯하다.










고려인 당근 샐러드, 비네그레트, 올리비에, 까르또슈까 등도 있고...










요런 매점 같은 곳인데 저 안 주방에서 음식이 나옴 :) 좀 학교 앞 수퍼 겸 간이분식집 같은 느낌.










도시락 컵라면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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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2. 11. 22. 00:39

뭔가 먹는 것만 가득 2022-23 praha2022. 11. 22. 00:39

 






오늘 하루 요약~



메모 적기 귀찮은데 이 그림 한 장으로 때우면 좋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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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며칠 전에 그랜드 호텔 유럽 sns에 올라온 셰프의 특제 보르쉬 영상을 보니 갑자기 보르쉬가 무지 먹고파서 오늘 아점으로 끓여 먹었다. 그랜드 호텔 유럽은 조식 뷔페가 훌륭한데 보르쉬가 특히 맛있다. 영상을 보니 거기 셰프는 닭뼈로 육수를 내고 닭고기를 썼다. 오리고기, 돼지고기 등 육수는 가지각색으로 낼 수 있는데 그래도 보통은 소고기로 낸다.

 

이번 주 내내 너무 바빴고 피곤했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나는 오늘 대충 약식으로 끓이고 게으른 자의 눈속임 재주를 좀 피웠다. 평소에 쓰지 않는 것을 활용해 보았음.

 

 

대부분의 요리가 그렇듯(특히 양식이 그렇다) 재료 준비가 거의 7~80%인데 나는 아무리 요리를 해도 앞발이라 칼질이 힘들고 또 야채를 사다놓으면 다 먹을 수가 없어서 볶음밥용으로 아주 작게 썰어놓은 냉동 야채를 한봉지, 이상하게 이 주변에서는 홀토마토는 팔아도 토마토 페이스트 통조림은 안 팔아서, 홀토마토는 좀 싱겁고 많이 시큼하기 때문에 그냥 레토르트 토마토 파스타 소스를 반봉지 써 보았다.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역시 맛의 담백함이 좀 덜하다. 다음엔 이 소스는 쓰지 않고 다시 홀토마토를 쓰는 것으로....

 

 

치킨스톡은 원래 넣어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간 맞추고 육수 내는 수고를 좀 덜어보려고 조금 넣어보았다. 그럭저럭... 근데 굳이 안 넣어도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소고기로 육수를 우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 맞추기는 좀 편해짐.

 

 

하여튼 이렇게 대충 끓였지만 맛은 역시나 보르쉬 맛이 잘 나옴~ 다만 시판용 토마토 소스를 썼더니 거기 양념이 되어 있던 탓에 오레가노와 오일 맛이 나서 이것만 감점하기로 함.

 

 

양배추를 넣으면 조금 더 시원한 맛이 나는데 그건 남은 거 뒷처리가 힘들어서 이번에도 생략함. 원래 정통 러시아식으로 하면 비트, 고기, 양배추가 3대 메인이다.

 

 

.. 지금 그림을 잘 보니 하나 빠졌다. 고기랑 비트를 첨에 올리브유 두르고 볶을 때 보드카를 넣어준다~ 보드카 그리는 거 빼먹음. 하지만 어차피 그릴 자리도 모자랐다 ㅋㅋ

 

 

 

 

짠~

 

 

스메타나만 있으면 완벽할텐데....

 

 

 

 

그래도 맛있음~

 

 

 

 

 

오늘 오후는 이렇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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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너무 피곤해서 늦게까지 잤다. 보르쉬 수프를 끓이느라 손이 좀 가서 아점도 한시 넘어서 늦게 먹었다. 그래서 오후 티타임은 그럭저럭 세시 쯤....

 

 

복지포인트 남은 걸 털어서 장만한 찻잔. 근데 얘는 이쁘긴 하지만 생각보다 찻물이 너무 조금 들어간다. 웨지우드는 문양이나 채색은 이쁘지만 사실 도자기 질은 가격 대비 그리 맘에 드는 편이 아님... 그래도 기분 전환용으로 화려번쩍...

 

 

 

 

 

 

 

 

 

 

 

어쩐지 이런 무늬는 찻잔 세트보다는 가운에 어울릴 것만 같고....

 

 

 

 

손잡이는 두 손가락으로 쥐고 마시는 디자인이라고 한다, 과연 나는 손가락이 작아서 사이에 끼울 수 있다만 웬만한 성인들은 손가락 잘 안 들어갈 듯. 그런데 쥐는 것도 딱히 편할 것 같지는 않다. 그립감이 별로라서. 이 찻잔은 예쁘기만 하고 실용적인 면은 별로 없는 것으로 결론.

 

 

 

 

지난주 꽃구독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장미 한 송이. 이것도 다 시들어서 꽃송이만 따서 찻잔에 띄워 두었다.

 

 

 

 

간만에 티라미수.

 

 

 

 

 

 

늦게 일어났지만 그래도 아점은 좀 정성들여 챙겨 먹음. 보르쉬 수프 한 냄비 끓여서 감자 샐러드와 버터롤 곁들여 먹음.

 

 

 

 

 

 

보르쉬 끓이는데 시간이 걸리니 감자 달걀 샐러드는 그냥 주문해 보았는데 실패로 돌아감. 맛은 그럭저럭 집에서 만든 것 같았지만 채썬 햄이 군데군데 들어 있었다. 주문할 때 내용물을 아주 유심히 읽어보는데 분명 햄이 적혀 있지 않아 이것을 골랐건만... 흑... 햄 다 골라내느라 힘들었다. 그리고 야채와 사과 때문에 샐러드가 질척했다. 나는 포슬포슬한 샐러드가 좋은데... 그냥 내가 올리비에 샐러드 만들 걸 그랬다. 하여튼 다 먹었다.

 

 

 

 

 

레모네이드.

 

 

 

보르쉬 아직 한 냄비 남았음. 다 먹으려면 일주일 걸릴 듯. 비트 한 알을 다 썰어서 넣으면 은근히 양이 많다.

오늘의 보르쉬는 좀 약식으로 대충 끓였다. 그 대충 레시피 스케치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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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퀵 스케치도 꼬맹이 미샤와 먹거리 시리즈. 어느새 다섯번째 그림이 되었다 :)

 

 

꼬마 미샤가 좋아하는 음식 또 하나는 바로 보르쉬 수프. 비트랑 각종 야채, 토마토소스, 소고기를 넣고 푹 끓여서 깊은 맛이 우러나는 뜨끈뜨끈한 보르쉬 한 그릇만 있으면 마지막 한방울까지 흑빵으로 샤샥 닦아먹어서 설거지가 필요없을 지경~

 

 

어른 되고 나서도 겉으로는 시크하기 이를데 없어보이지만 제일 좋아하는 것은 결국 토속적인 보르쉬랑 흑빵.... 파슬리 솔솔 뿌리고 스메타나 한두 숟가락 넣고 휘리릭 저어서 호로록 다 먹음. 그러고 나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먹으면 행복해짐. (통조림 파인애플을 제일 숭배하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먹는 것이므로 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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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첫날.

 

 

집에서 뒹굴고 있지만 여행 가서 조식 먹고 있다고 최면 걸면서, 간만에 이렇게 차려 먹음. 지난 주말에 한 냄비 끓여두었던 보르쉬도 이것으로 끝! 묵혀두어도 맛있다. 그리고 역시 빵이랑 먹어야 더 맛있음.

 

 

뻬쩨르가 그리워서, 아스토리야 호텔이라고 최면을 걸며(ㅋㅋ) 그곳 로툰다 카페에서 쓰는 식기로 세팅. 아스토리야는 로모노소프 도자기 중 저 파란 체크 시리즈를 쓰는데 이렇게 최면걸며 놀기 위해 매년 뻬쩨르 가면 저 무늬로 하나씩 사온다. 큰 접시, 찻잔, 종지 등. 빵 올려놓은 게 찻잔 받침접시임. 근데 수프 접시는 안 샀기 때문에(힝...) 그냥 마샤와 곰 접시로 대체. 하지만 다 똑같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단호박 리코타 치즈 샐러드.

 

 

단백질 보충을 위해 전에 사두었던 탄두리 닭가슴살을 좀 썰어서 넣었는데 이것은 에러였다. 맛이 강해서 이 샐러드와 보르쉬, 담백한 감자빵 등과 안 어울렸다. 그래서 닭가슴살은 전부 골라냈다. 저녁 때 반찬으로 먹어야겠다(다이어트용 아님, 반찬용으로 샀음 ㅋ)

 

 

 

 

 

보르쉬. 스메타나 한 숟갈만 올렸으면 완벽한데 흐흑...

 

 

묵혀두었더니 비트에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우러나서 양배추 안 넣었어도 90% 넘게 맛있는 보르쉬로 마무리되었다. 다음에 다시 끓일 때도 양배추 생략해야지!

 

 

 

 

 

 

 

 

버터 + 건바질.

 

 

몸에 안 좋은 것은 왜 예쁘고 맛있는 것인가!!!!

 

 

 

 

 

동네 빵집에서 샀던 감자빵. 담백해서 버터 발라먹으면 맛있음. 그리고 보르쉬 수프랑 같이 먹어도 잘 어울림. 빵이 커서 3등분하여 냉동해 놓았는데 그 중 한토막을 간밤에 꺼내두었다.

 

 

 

 

 

 

 

 

 

 

 

 

 

오후의 티타임은 이렇게.

 

 

오늘은 카페 에벨 생각하며 찻잔과 접시 세팅.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더니 에벨에서 스토리 태그도 하고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로 건강하게 잘 있다가 코로나가 잦아들면 꼭 만나자고 했음. 바르톨로메스카 거리에 새로 연 지점에 꼭 가보겠다고 했다. 흑, 레테조바의 에벨이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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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얼마 전부터 계속 보르쉬가 너무 먹고 싶었다. 그래서 주중에 마트에서 온라인 주문을 할 때 비트 한 덩어리와 소고기를 추가했다. 늦잠 자고 일어나 아점으로 끓여먹었다. 원래는 양배추가 들어가야 하는데 딱히 양배추 좋아하지 않는데다 한 통을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어 항상 애물단지로 전락하므로 그냥 생략해버림. 토마토 페이스트가 들어가야 간도 맞고 좋은데 주문할 때 보니 없어서 홀토마토로 대체했다. 스메타나(사워크림)도 없음. 

 

 

그러니 약식 보르쉬라서 맛은 2% 부족하다만 그래도 나쁘지 않고 보르쉬 맛이다 :0 아직 냄비에 꽤 남아 있는데 내일은 감자빵이랑 같이 먹으려고 한다. 이쁘게 찍으려면 저 위에 하얀 스메타나 크림을 한 숟갈 얹어야 하지만... 없으므로, 사진은 그냥 벌겋게 나왔다 ㅋㅋ

  

 

 

 

 

그래도 맛있음. 몸도 따뜻해지고.

 

 

 

 

 

 

 

 

 

청소를 한 후 오후의 차를 우려 마시며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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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간만에 등장하신 지나 양. 이 스케치는 그린지 꽤 됐는데 올리진 않았었다. 보르쉬 수프 먹고 계심. 쓰고 있는 글에서 마침 보르쉬 얘기가 나왔을 때라 겸사겸사 그려보았었음 :)

 

 

 

이건 오늘 휘리릭 그린 크로키. 우유 마시고 있는 말썽쟁이 미샤. 보통은 저지방 우유(1.8%) 마시는데 아이스크림만은 고지방의 플롬비르 콘도 매우 좋아함.

 

 

사실 이넘은 음식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이 하도 싸돌아다니는데다 춤도 많이 추고 연습도 빡세게 하고 이것저것 활동량이 너무 많아서 아무거나 지방질이든 고칼로리든 고당분이든 다 먹어도 상관없는 인물이건만 어릴때부터 발레학교에서 전담해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귀에 닳도록 설교한 탓에 단 것과 지방질은 가급적 잘 안 먹게 되었음(이렇게 써놓으니 불쌍하구나...)

 

 

그런데 동기 남자애들은 다들 선생님이 그랬든말든 홍차에 설탕 왕창 넣어 마시고 엄청 달콤한 타르트도 막 먹어치우고... 알고보면 순진무구했던 말썽쟁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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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30. 17:21

펠메니, 보르쉬, 아이스크림 2017-19 vladivostok2017. 12. 30. 17:21





좀 늦은 점심으로 맛있는 펠메니와 보르쉬, 생강에이드. 맛있었다. 추웠는데 보르쉬 덕에 몸 녹음.



로슈끼 쁠로슈끼.



점원이 친절했다. 옆자리 한국분들이 계산할때 노어를 못알아들어서(카드에요 현금이에요 란 질문이었음) 도와드림. 좀 뿌듯 :)







그래! 나 추워죽겠는데 아이스크림 먹는당~~ 역시 아이스크림은 겨울이 제맛! 그리웠던 러시아 마로제노예. 호텔 돌아오다 작은 수퍼에서 사들고 와서 해치움. 들고 오는 동안 하나도 안 녹음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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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어젠 자정 되기 전에 누웠는데 새벽에 몇번 깬 후 오늘도 늦게 일어났다. 계속계속 졸렸다.

 

돌아가기 전까진 오늘만 날씨가 좋다고 해서 원래 오늘 수도원이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갈까 했지만 생각보다 날씨가 좋지 않았고 다리도 많이 아팠다. 어제 바리쉬니코프 전시를 보고 와서 그런가 오늘은 어쩐지 러시아 박물관 생각이 나서 거기 가기로 했다. 며칠 전 사다놨던 에클레어와 체리로 아점을 때우고 나와서 버스를 탔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그런지 사도바야 거리에서 판탄카로 돌아나가는 길이 굉장히 밀렸다. 버스 안에서 고생한 후 내렸는데 날이 싸늘했다. 그래도 판탄카 쪽 가판대에서 아이스크림 한개 사먹었다. 이제 마로제노예 먹을 수 있는 날도 거의 없네... 한국 돌아가면 다시 아이스크림은 쳐다보지도 않는 생활이 시작되겠지. (원래 유지방 소화를 못시켜서 아이스크림을 못먹는데 페테르부르크에선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아니면 여기 아이스크림이 유지방 함량이 낮은지-맛은 안 그런데- 배가 안 아픈 편이다)

 

 

오늘 먹은 건 에스키모 크렘 브륄레. 맛있었다.

 

..

 

일년만에 러시아 박물관에 다시 왔다. 박스트는 올해 150주년인가 뭔가여서 투어를 갔기 때문에 그림이 아예 통째로 없어 슬펐지만 니콜라이 게의 못봤던 그림이 몇점 나와 있는 등 또 나름대로의 수확이 있었다.

 

금발의 가브리엘과 브루벨의 악마를 다시 봐서 행복했다.

 

두어시간 쯤 전시를 본 후 나왔다. 날씨가 싸늘했다. 카톨릭 성당 뒤에 있는 클래식 음반가게에 가서 글리에르의 청동기사상이 있느냐 물었지만 주인 남자는 자기가 이 가게를 하는 동안 그 음반이 들어온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컴퓨터로 모든 카탈로그를 검색해본 후 매우 유감스럽게도 없다고 했다. 어디서 이 음반을 구한다지... 나중에 네프스키로 나가서 다른 클래식 음반 가게에도 갔지만 없었다. 후자는 전보다 음반이 더 줄어들어 있었다. 전에는 지휘자별로 되어 있어 페도토프와 테미르카노프도 종종 득템했건만 왜 퇴행한거야...

 

자리가 있으면 징게르 카페에서 이른 저녁이나 먹을까 했지만 역시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하긴 성수기니 이른 아침 아니고서는 이 카페에서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올해는 포기해야 하려나싶다.

 

그냥 우리 호텔 9층 식당에서 전망이나 보며 저녁먹어야지 하고 버스를 탔는데 사람이 너무너무 많은데다 너무 피곤했다. 갑자기 너무 어지럽고 피곤해서 그냥 이삭 성당 앞에서 내렸다. 곧 집에 돌아가니까 아스토리야에 가서 밥을 먹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아스토리야 호텔에 갔다. 마침 그때 료샤가 전화를 해왔다. 일끝났다면서 박물관에 있으면 데리러 온다 해서 '배고파서 아스토리야에 가고 있었어'라고 하자 되게 신기해했다.

 

료샤 : 나 지금 아드미랄쩨이스까야 지나고 있어.

(이삭성당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임)

나 : 엥, 너네 사무실 그쪽 아니잖아.

료샤 : 미팅이 W호텔 쪽이었어. 마치고 나가고 있었어. 도로 간다.

 

(W호텔도 이삭성당 근처에 있음)

 

나는 너무 피곤해서 먼저 아스토리야 카페에 들어갔다. 아스토리야 호텔은 얼마 전인지 재단장을 해서 로비의 카페 로툰다와 다비도프 바, 그리고 안쪽의 아스토리야 카페로 구분이 되었는데 후자는 이름이 카페인 것이지 하얀 테이블보와 초, 꽃이 깔려 있는 레스토랑이다. 나도 로툰다에만 가보고 후자엔 가본적이 없었다. 어쩐지 테이블보가 좍 깔려 있는게 좀 부담스러워서. 그런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그냥 가봐야지 했는데 마침 료샤가 와서 덜 뻘쭘... (왜냐면... 난 오늘 박물관 가려고 빨간 운동화를 신고 왔기 때문이지... ㅠㅠ)

 

(아스토리야는 마린스키와 행사를 많이 하고 그랜드 호텔 유럽은 미하일로프스키와 행사를 많이 하는 편이다)

 

 

 

다행히 빨간 운동화와 파랑하양 체크무늬 로브 원피스를 대충 입은 나 대신 내 친구 료샤는 무슨 미팅에 다녀오느라고 양복을 잘 빼입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번쩍번쩍 시계를 차고 있었다. (제발 그런 시계 좀 차지 마 엉엉...) 나는 보르쉬와 처음 보는 생선인 깜발라(지중해에 사는 하얀 고기라고 해서 시켜봄) 구이, 크랜베리 모르스를 주문했고 료샤는 뭘 잔뜩 먹고 왔다면서 탄산수만 주문하려고 해서 내가 눈치를 줬다.

 

나 : 야아, 뭐라도 하나 먹어야지 ㅠㅠ

료샤 : 나 배부른데... 손님들이랑 이것저것 먹었어.

나 : 나 혼자 먹는 거 뻘쭘하잖아 ㅠㅠ

료샤 : 뭐가 뻘쭘해. 아무데나 들어가서 혼자 잘 시켜먹으면서!

나 : 동행 있는데 혼자 먹는 건 싫단 말이야 ㅠㅠ 빨랑 아무거나 하나 골라. 케익이라도...

료샤 : 독재자! 그러면 나는 햄버거 먹을거얏!

나 : 엥, 배부르다며!!

료샤 : 그래도 먹고 말겠다! 여기 햄버거 맛있단 말임...

 

그리하여 나의 독재로(ㅜㅜ) 료샤는 수제버거와 탄산수를 시키고(ㅋㅋ 다 먹고 배터졌을 거야 ㅠㅠ)...

 

이곳 보르쉬도 맛있었다. 빵도 맛있었고 깜발라 구이는 감자 퓨레와 짭짤한 양송이 구이가 올라가 있어 맛있었다. 고수만 없었음 딱 좋았을텐데 왜 자꾸 고수를 넣어주나요 허헝..

 

료샤는 배부르다더니 자기 버거를 몇입에 다 해치우시고는 내 깜발라 구이도 뺏아먹고, 짠 거 먹었더니 단 게 먹고 싶다면서 내 모르스도 반이나 뺏아 마셨다. 뭐냐 너!!! 돼지!!!

 

..

 

밥을 먹고 나서 료샤가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가 좀 걷고 싶어해서 차는 아스토리야 쪽에 놔두고 운하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날이 싸늘했다. 빗방울이 곧 떨어질 것 같은 날씨였다. 체크무늬 로브 원피스는 7부 소매이긴 한데 얇은 편이라 바람 불어 좀 추웠다. 그래서 친구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재킷을 벗어주었는데 나는 평소같으면 '됐어!' 할 것을 오늘은 추워서 냉큼 받아 입었음. '엥, 너 왜 오늘은 거절 안해!' 하고 료샤가 눈을 둥그렇게 뜸. 미안하다 친구야 나도 추워서 살고 보려고 그랬어 ㅠㅠ 그래도 너는 80킬로 넘으니까 좀 괜찮겠지??

 

그래도 재킷 빌려준게 고마워서 방에 같이 와서 친구에게 따뜻한 차 한잔 우려줌. 새로 산 로모노소프 그젤 찻잔에 ㅋㅋ 아스토리야에서 준 초콜릿 곁들여서 우려주니 좋다고 잘 마셨다. 체리를 씻어 컵에 쏟아놓으니 나보고 대체 여기 와서 체리를 얼마나 많이 먹은 거냐고 묻는다. 그래서 '몰라, 매일매일 먹고 있어. 아침저녁으로...'라고 대꾸했다.

 

 

 

밤이라서 나는 잠 안 올까봐 차 대신 근처 베이커리에서 사왔던 모르스를 마시고 있다. 냉장고에 넣어두어서 시원하다. 모르스를 꺼내는 나를 보고 료샤가 또 혀를 찼다. 모르스는 대체 얼마나 많이 마시고 있는 거냐고 한다. 그래서 '체리처럼 하루에 한번 이상씩 먹어'라고 대꾸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여기 와서 매일매일 체리랑 모르스를 먹고 있나보다... 돌아가면 못먹잖아...

 

그 얘길 했더니 료샤가 '음, 나도 한국에 가면 노란색 맥심만 맨날 마실지도 모르니 이해해주마' 라고 했다. 그래, 그거야!!

 

..

 

이제 모레 돌아간다... 자고 나면 하루 남는 거네... 근데 내일 뇌우가 치고 비 오고 바람 분다고 한다...

 

** 이번 페테르부르크 얘기들을 '2016 페테르부르크' 폴더를 만들어 거기 옮겨놨다. 중간중간 끼어 있었던 공연과 춤 얘긴 그대로 DANCE 폴더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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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도착한 후 가장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날씨가 맑았고 하늘이 파랬다. 호텔 조식 먹으러 내려가기가 싫어서 한참 누워 있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날씨가 좋으니 네프스키 수도원에 가기로 했는데 일단 배가 고프니 아점으로 근처 식당에서 잘 먹고 가기로 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자고로드느이 대로가 나오는데 그 대로와 루빈슈테인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우크라이나 식당 '쉬녹'이 있다. 여기는 작년에 bravebird님이 가셨다가 맛있다고 추천해주셔서 나도 가봤는데 그때 무척 맛있게 먹었던 곳이다. 런치로 먹으면 가격도 저렴하다.

 

이번엔 런치에 내가 먹고 싶은 게 없어서 그냥 제값 주고 보르쉬와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을 주문했다. 우크라이나 식당이니까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음식을 먹는다. 보르쉬도 여러 버전이라 돼지고기 없는 것으로 추천을 받아 오데사 스타일의 보르쉬를 주문. 쇠고기와 토마토, 감자, 비트, 파프리카 등이 들어 있었는데 무척 맛있었다. 빵껍질이 덮여 나오고 그 빵을 먹을 수 있다. 고골의 보르쉬가 좀더 진하고 크리미한 맛이라면 여기 보르쉬는 딱! 그 보르쉬 맛이었다.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 역시 자르는 순간 기름이 주루룩 흘러나오는 것이 진짜(ㅋㅋ) 키예프 커틀릿이었다. 그러나 별로 느끼하진 않았다. (기름진 거 못먹는 내 입에도 나쁘지 않았음)

 

 

 

 

 

 

 

..

 

따뜻한 보르쉬를 먹으니 땀이 좀 났다. 몸이 많이 힘든 상태인가보다. 그래선지 어제 수프 비노의 치킨 수프와 오늘 쉬녹의 보르쉬가 둘다 몸에 필요했던 것 같다.

 

먹은 후 생각보다 날이 더워서 다시 숙소로 갔다. 트렌치코트와 카디건을 벗고 후드재킷으로 바꿔입은 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수도원에 갔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은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난 언제나 날씨가 좋은 날, 햇볕이 따스한 날 이곳에 온다.

 

먼저 수도원 카페에 가서 얼그레이 티와 사과빵을 먹었다. 보통 여기 오면 수도원 모르스를 마시는데 오늘은 차를 안 마셔서... 사과빵은 여전히 담백하고 맛있었다. 전혀 달지 않았다. 지하 카페는 텅 비어 있었지만 잠시 후 러시아인들이 한둘씩 들어와 차와 빵을 먹고 나가곤 했다. 이 카페를 찾는 것은 거의 러시아인들이다. 그도 그럴것이 정교 수도원에 있는 카페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곳에 올땐 정교 신자는 아니지만 잠시 기도를 한다.

 

 

소박한 카페이다. 내가 사랑하는 곳이다. 사진 찍으면 안되는데 마음 속에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살짝 찍었다 ㅠㅠ

 

..

 

 

빵과 차로 몸을 데운 후 햇살 아래로 나왔다. 찬란한 오후였다. 하늘은 파랬고 햇살이 눈부셨다. 나는 스카프로 머리를 싸맸고 초를 네개 사서 수도원 내의 교회로 들어갔다. 러시아 정교 사원은 카톨릭이나 개신교 교회와는 많이 다르다. 벽에는 이콘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이콘 앞에는 초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머리를 스카프로 가린 여자들과 허리를 굽힌 남자들이 이콘과 이콘 사이를 오가며 절을 하고 성호를 긋고(카톨릭과는 순서가 다르다) 한쪽에서는 정교 신부가 예배를 보기도 한다. 신도들은 이콘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성호를 긋고 기도하고 이콘을 손으로 만지고 입을 맞추고 다시 성호를 긋고 인사를 한다. 초를 켠다.

 

나도 초를 켰다. 가족과 나를 위해. 우리 집은 개신교니까 엄밀히 말해서 정교 신자는 아니지만 성호도 그었다. 사실 진정한 신앙이 존재한다면 거기 차이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언제나 회의주의자인 내게 그런 믿음이 생기기를 바랬던 것 같다.

 

어두컴컴하고 화려하고 조용하고 촛불이 여기저기 총총 빛나고 있는 사원 안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햇빛 아래로 나왔다. 하늘색과 흰색, 금색으로 칠해진 조그만 천사 이콘을 샀다. 수호천사 이콘이라고 되어 있는데 금발인 것을 보니 가브리엘 같다. 자세히 뜯어보면 좀 조잡한데 그래도 첫눈에 띄었기 때문에 샀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그리고 쓰는 글을 위해. 천사가 중요한 상징 중 하나인 글이니까.

 

 

..

 

수도원 경내를 오랫동안 거닐었다. 햇볕을 받으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걷고 꽃들을 보고 향기를 맡았다. 묘지 사이를 걸었다. 검고 축축한 흙을 밟았다. 묘지의 십자가들과 이름들을 보았고 바람을 맞았고 심호흡을 했다. 햇살이 따스했고 눈부셨다. 하늘이 너무나 파래서 온몸을 깨끗하게 통과해 지나가는 것 같았다. 평온이 찾아왔다.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이곳에 와야 했다. 내가 이곳으로 날아온 가장 큰 이유가 어쩌면 여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진까지는 카메라로 찍은 것.

그리고 수도원 경내로 들어가서는 큰 카메라로 촬영하면 안되니(원래는 촬영 자체가 좀 그렇다) 소리 안나는 앱을 사용해 폰으로만 찍었다. 물론 교회 안은 찍지 않았다.

폰으로 찍은 수도원 사진들은 나중에 따로 올려보겠다. 아래 몇 장만.

 

(러시아 와서 올리고 있는 사진들 중 화질과 심도가 좋은 건 카메라로 찍은 거고 얕고 평면적인 건 폰으로 찍은 것들이다. 후자가 더 많다. 아무래도 휴대하기가 편하고 용량이 작아서 업로드도 쉬워서)

 

 

 

..

 

한참 산책을 하고 햇볕을 쬐다가 화단 안쪽에서 한가롭게 조는 고양이를 한 마리 발견했다. 토실토실하고 예쁜 고양이인데다 원체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는 곳이라 웬만한 소음이나 기척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햇살 받고 조는 고양이를 보니 나도 노곤해졌고 고양이를 바라보며 따뜻한 돌바닥에 한참 주저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나를 보았고 귀찮아하며 도로 졸았다.

 

 

 

고양이를 바라보며 햇살 쬐며 노곤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앙증맞고 따뜻한 어린아이 손이 날 확 껴안았다. 그리고는 '쥬쥬~' 하는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레냐와 료샤가 뒤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는데 레냐가 '쉿! 고양이 깨!' 하길래 나도 꾹 참았다 ㅋㅋ

 

..

 

우리는 원래 내가 산책을 마친 후 수도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근데 둘이 생각보다 좀 일찍 도착해서 수도원에 들어왔다고 한다. 좀 걷다가 보자마자 나인 줄 알았다고 하길래 나는 의아했다.

 

나 : 어떻게 난줄 알았어? 나 머리에 스카프 두르고 있었는데!! 뒷모습만 보고!

 

료샤 : 그걸 모르냐~

 

나 : 또 호빗이라 할라고!

 

료샤 : 아니야! 수건 두르면 뭐해! 땅바닥에 요가 자세로 앉아 있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놀라운 동양의 신비!!

 

나 : (아, 맞다. 나 양반다리 하고 앉아 있었지 ㅋㅋ) 그거 동양의 신비 아니야 이 바보야 ㅠㅠ 나처럼 둔한 사람도 다 하는 거야..

 

레냐 : 아니야! 나는 알아! 뒷모습만 봐도 알아~ 쥬쥬우우우~~

 

..

 

우리는 함께 수도원을 조금 거닌 후 한쪽에서 수도원 시장이 열린다고 해서 거기도 가보았다. 수도원에서 만들었다는 꿀을 먹어보고 배아플 때 좋다는 꿀을 사고 또 각종 향초가 배합된 차를 이것저것 시향한 후 차를 사고 있자니 료샤가 혀를 찼다. 척 봐도 '상술에 넘어가는 바보 토끼!'라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수도원에서 만든 거니까 살 거야!'라는 시선을 마구 쏘아주었다 ㅋㅋ

 

료샤의 차를 타고 걔네 집으로 갔다. 레냐가 피자를 먹고 싶어해서 근처 이탈리안 식당에 갔다. 나는 해산물 리조또를 시켜서 막 먹었다. 료샤가 혀를 찼다.

 

료샤 : 왜 그렇게 정신없이 먹니.. 굶었냐?

 

나 : 쌀밥이라서... 밥 먹고 싶었어... 밥이다 밥...

 

료샤 : 너 왜 이렇게 오늘 불쌍하게 굴어 ㅠㅠ 수건 쓰고 요가자세로 앉아 고양이 보고 있지를 않나, 꿀 찍어먹고 찻잎 냄새 맡고 비닐봉다리에 꿀이랑 차 사지 않나... 쌀이라고 리조또를 막 욱여넣질 않나...

 

나 : 안 불쌍해! 수도원 오면 원래 그런 거야! 그리고 집 떠나오면 원래 쌀밥 먹고픈 거야!

 

료샤 : 불쌍해. 많이 먹어. 한 접시 더 시켜줄까?

 

나 : 내가 돼지냐!

 

레냐 : 아니야! 쥬쥬는 돼지 아니야, 쥬쥬는 토끼야~ 토끼여왕이야~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고 료샤네 집에 가서 허브차를 마셨다. 레냐는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데다 엄격한 엄마 탓에 귀가 시간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료샤는 레냐를 먼저 집에 데려다 주었고 그다음에 나도 숙소로 데려다 주었다. 료샤는 숙소가 맘에 안 든다며 나에게 도로 자기 집으로 가서 자고 가라고 했지만 그냥 내일 보기로 했다. 얘도 어제 출장에서 돌아와 많이 피곤한 거 안다.

 

내일 우리는 같이 공연을 보러 갈 것이다. 아마 저녁도 먹을 것이다. 레냐랑은 모레부터 만나 다시 놀 것이다.

 

여기 수도원이 있고 햇살이 있고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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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을 소개하겠다. 네프스키 대로 근방에 있는 슈베드스키 페레울록에 위치해 있는 '두셰브나야 꾸흐냐'(Душевная кухня)라는 카페이다. 이 이름의 뜻은 영혼의 부엌, 소울 키친 정도 된다.

 

이 날은 눈도 오고 길은 진창이고 무척 음습하고 힘든 날이었다. 러시아 박물관 갔다가 로모노소프 찻잔 사러 갔는데 평소 잘만 찾아다녔던 코뉴셴나야 거리의 그 가게가 이날따라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궂은 날씨 때문인지 길도 잃어서 운하변을 따라 뺑뺑이를 돌고 무척 고생을 했다.

 

이미 찻잔은 포기. 너무너무 피곤하고 춥고 정신이 없고 배도 고프고 멍해서 일단 어디 들어가 몸을 녹이고 밥이라도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길 잃고 헤맬 때 눈에 띄었던 카페가 있어 그곳에 갔다. 스웨덴 대사관 근처에 있는 카페인데 간판도 예쁘지만 대문에 붙어 있는 메모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던 곳이었다.

 

대문에 씌어 있는 메모는 찍진 않았는데... 이렇게 씌어 있었다.

 

' 우리 가게 문이 좀 무거워요, 잘 안 열릴 때도 있으니 겁먹지 마시고 용기를 내어 세게 밀어 보세요!~'

 

어쩐지 그 메모가 위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웃게 만들기도 하는 거였다. 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녀도 문이 닫혀 있는 카페에 혼자서 쑥 들어가는 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이렇게 가로등 램프 아래 카페 간판이 걸려 있다.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 라고 적혀 있음. 아래 그림들도 아기자기 귀엽다.

 

 

 

이 칠판에는 '두셰브노 이 베셀로', 마음 따뜻하고 즐거운 곳이란 메모가 적혀 있다.

 

 

 

 

 

슈베드스키 페레울록은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와 발샤야 코뉴셴나야 거리를 잇는 조그만 뒷길이다. 스웨덴 대사관이 있는 곳이다. 이 골목으로 꺾어들면 저 안쪽에 있다.

 

문은 정말 무거웠다. 용기를 내어(ㅋㅋ) 밀고 들어갔다.

 

 

안은 따스했다. 카운터에는 젊은 남자 직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내가 멍해 하자 방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안내해주었다. 이때 난 눈도 맞고 바람도 맞고 춥고 길도 잃고 하여튼 반쯤 유체이탈 상태라 노어도 잘 안 들리고 정신이 없었다. 점원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자 약간 당황했으나 아주 친절했다. 손님이 전혀 없었다. 맨 앞 테이블(이 사진에서 왼편에 보이는 주황색 소파 테이블)에 앉을까 했으나 앉아보니 테이블이 내겐 너무 높아서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청년이 코트를 받아주러 왔다.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이후 알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데니스였다)

 

데니스 : 너무 추워서 얼었군요?

나 : 어... 네. 얼었어요. 밖이 추워요.

데니스 : 그럼 몸 녹이도록 차나 커피를 먼저 드릴까요?

나 : 아, 네.

 

 

 

데니스가 차를 한잔 먼저 가져다 주었다. 그냥 그린필드 티백이었다. 하지만 따뜻해서 정말 몸이 녹았다.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했다. 이때 너무 추워서 일단 뜨거운 수프가 절실했다. 핀란드식 우하(생선수프)가 있어 그것을 골랐다. 우하는 원래 좋아하지만 여기 우하가 연어로 끓인 거라고 되어 있어 잠시 망설였으나 그냥 주문. 그리고 메인으로는 야채 가니쉬를 곁들인 치킨 필레를 주문했다. 수비드로 쪄서 기름에 살짝 볶고 사과소스를 쓴다고 되어 있었다.

 

데니스는 매우 친절했다. 차를 마시고 나니 몸도 살짝 녹았고 정신도 좀 돌아왔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카페 내부를 좀 구경했다. 아주 아늑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타입의 카페였다. 즉, 서재 스타일의 인테리어에 아늑하고 살짝 어둡고 살짝 인텔리겐치야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내가 앉았던 창가 자리. 외국어 서적들을 비롯해 러시아 서적들, 사진 관련 도서들이 있었다.

 

책을 저렇게 무심한 듯 근사하게 흩어 놓는 것도 기술이다. 나 같은 정리벽 있는 성격은 절대 저걸 못한다. (결국은 똑바로 정렬하고 있으니 ㅠㅠ)

 

 

 

 

 

이렇게 가장 안쪽에는 책상과 책꽂이, 책들이 있고 근사한 사진들도 많다.

 

그리고 먼저 수프인 핀란드식 우하가 나왔다. 

 

 

핀스까야 우하. 따끈하게 데운 흑빵 한 조각과 함께.

 

나는 러시아에서 우하를 여러 번 먹어봤다. 가끔은 내가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농담 안 하고, 이 우하는 여태껏 내가 먹었던 우하 중 최고였다. 정말이다.

연어는 자잘하게 조각나 있었고.. 아마도 크림이 섞인듯한 수프로 허브가 들어 있었고... 난 평소 우하에 크림을 넣지 않고 맑게 끓이는 편이고 평소에는 크림 들어간 수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우하는... 정말 맛있었다. 난 이렇게 맛있는 우하를 처음 먹어봤다. 몸이 사르르 녹았다. 살짝 간간했지만 짜지도 않았고.. 비린내 전혀 없고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담백하고 구수하고 맛있었다. 저 우하 한 그릇을 끝까지 다먹었다. 흑빵도 따스하고 살짝 시큼하고 구수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두셰브나야 꾸흐냐가 맞았다. 정말 맛있는 수프였다. 두고두고 생각날 음식이었다.

 

 

사진 보니 생각난다. 다시 먹고 싶다. 정말 맛있었다.

 

 

 

이어 수비드로 요리한 치킨 필레 등장.

 

보통 러시아에서 닭요리를 시키면 기름에 튀겨진 커틀릿이 많이 나온다. 그렇지 않더라도 하여튼 기름기가 많다. 그러나 이 치킨 요리는 전혀 기름기가 없었다. 일단 닭가슴살을 수증기로 찐 후 기름에 구운 거라서 안은 촉촉했고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소스는 식초가 들어간 듯 살짝 새콤하면서도 달콤하고 조금 묵직한데 홀머스터드가 섞여 있어 느끼하지 않고.

 

거기에 가니쉬로 곁들인 저 파프리카가 진짜 맛있었다. 언젠가부터 소화가 잘 안되는 느낌이라 파프리카를 안먹은지 꽤 됐는데 이것은 소스가 어찌나 달콤한지.. 사과와 꿀이 들어간 것 같았다.. 진짜 달콤하고 맛있고 파프리카는 부들부들하고 물컹한게 정말 맛있었다!! 전부 다 먹었다. 

 

이날 이 카페에서 먹은 이 늦은 점심은 이번 페테르부르크 여행에서 먹은 음식 중 최고였다. 고골의 보르쉬도, 징게르 카페의 근사한 치킨감자 블린도, 심지어 그랜드 호텔 유럽의 비프 스트로가노프보다 더 훌륭했다. 

 

 

 

다 먹고 나니 데니스가 그릇 치우러 왔다. 음식이 입에 맞느냐고 물었다. 아주 맛있었다고 대답.

 

데니스 : 어디서 오셨어요?

나 : 한국이요.

데니스 : 거기 날씨는 어떤가요? 여기처럼 추워요?

나 : 한국도 춥지만 여기가 더 추워요.

데니스 : 거기도 여기처럼 눈 오나요?

나 : 그럼요. 근데 여기가 더 많이 와요. 오늘 날씨 너무 안 좋아요.

데니스 : 여기 춥지만 그래도 지금은 많이 안 추워요. 제 친구는 ㅇㅇ에서 왔는데(못 알아들은 지명) 거긴 영하 30도거든요!

나 : 아, 저 옛날에 여기 살았었는데 그때 한번 영하 30도 내려갔었어요. 뜨람바이 타고 가다 엔진 얼어서 내린 적 있어요.

 

우리는 웃었다.

 

계산을 한 후 나오면서 코트를 찾자 데니스는 오해를 하고 화장실을 가르쳐 주었다. 아니요, 코트요~ 하니까 자기도 잊었다면서 웃으며 코트를 가져다 주었다. 아마 내가 외국인이라 그도 살짝 긴장했던 듯 ㅋ

 

나 : 이 카페가 너무 우유뜨나하고 예뻐요. (우유뜨나는 아늑하고 따스하다는 뜻의 노어이다) 정말 우연하게 찾았는데...

데니스 : 우리 카페에 오는 사람들이 거의 다 그렇게 우연히 들어와요 :)

나 : 너무 좋았어요.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데니스 : 친구들 꼭 데려오세요~

 

이 날 길 잃고 헤매서 너무 힘들고 짜증났는데 맛있는 음식에 친절한 사람, 좋은 분위기 카페 덕에 기분이 완전히 전환되었다. 역시 맛있는 음식과 따스한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은 행복해진다.

 

.. 그래서 페테르부르크 떠나기 전날, 카페에 다시 갔다!

 

 

나 : 저 다시 왔어요.

데니스 : 다시 왔네요~ 물론이죠!!

 

 

 

 

 

이번엔 멋진 새 조각품이 있는 창가에 앉았다 :)

 

메뉴를 보고 이번에는 보르쉬와 생선 크넬리(우리 나라의 전과 좀 비슷한 음식) 주문.

 

 

음식 나오기 기다리면서 귀여운 램프 발견~

 

 

여기저기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

 

 

 

이번엔 티포트로 차 주문. 첨에 마셨던 차 한 잔은 50루블, 이렇게 포트로 나오는 건 100루블. 환율이 떨어져서 지금 100루블이면 약 1800원 정도이다.

 

 

보르쉬가 나왔다.

 

사실 우하 다시 먹고 싶었는데 이곳 음식이 맛있었으니 보르쉬도 먹어보고 싶어서. 다만 어떤 곳은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쓰기 때문에 물어봤더니 우리는 특이하게 오리고기를 써요~ 라는 대답. 신선한 허브와 스메타나가 같이 나왔다.

 

 

스메타나와 허브 얹어서 보르쉬를 먹었다.

보르쉬도 맛있었다. 내가 스메타나를 좀 많이 넣어서 내 입맛엔 살짝 짠 편이었지만 그것 빼곤 만족!

(그래도 역시 그 우하가 최고였다)

 

 

 

그리고 농어 크넬리가 나왔다. 아마 체코의 크네들리키랑 비슷한 요리가 아닐까 싶은데. 밀가루 반죽 같은 것으로 생선 완자를 감싸서 기름에 구워낸 요리이다. 아래에는 감자 팬케익이 깔려 있다. 이게 양이 상당히 많았다. 맛은 좋았는데 양이 많아서 팬케익은 좀 남겼다. 소스도 그렇지만 감자 팬케익 반죽에는 마늘과 고추가 들어가 살짝 매콤하고 톡 쏘는 맛이 났다. 술을 부르는 맛!!! (하지만 난 차를 마셨지..)

 

맛있게 먹은 후..

 

나오기 전에 데니스와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카페 여기저기에 17-19 라는 메모가 붙어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묻자 이 카페가 예전에는 17-19라는 이름으로 다른 곳에 있다가 작년에 이쪽으로 이사오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했다.

 

나 : 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요. 오늘이 삐쩨르(페테르부르크의 애칭) 마지막 날이라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어요 :)

데니스 : 영광이에요! 다시 오실 거죠?

나 : 네, 언젠가는. 백야 때 오고 싶은데 아직은 희망사항이에요 :)

데니스 : 꼭 백야 때 오세요!

나 :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데 사진 찍어도 돼요?

데니스 : 그럼요! 우리 약속해요. 백야 때 당신은 친구들을 한 패거리(ㅋㅋ) 데리고 오고 전 차와 커피를 서비스로 드리겠어요~!!

나 : 약속한 거예요 :)

 

그래서 데니스 사진을 두 장 찍었다. 카페 명함도 받았다. 주소와 사이트, 인스타그램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데니스가 자기 이름도 써 주었다. 나도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페이스북 대신 이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 : 근데 제 블로그는 한국어로 되어 있어요 ㅎㅎ

데니스 : 괜찮아요, 이 참에 외국어 공부 좀 하죠. 공부는 좋은 거예요 ㅋㅋ

 

그리하여 우리는 행복하게 웃었고, 나는 그의 따스한 환송 인사를 받으며 카페를 나왔다. 그리하여 나의 페테르부르크 마지막 날은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

 

그럼 우리의 훈남 청년 데니스(Denys) 사진 두 장. 블로그에 올려도 된다고 허락받음 :)

노어로는 '제니스'에 가깝게 발음된다.

 

 

 

정말 친절한 청년이고 미소가 해사했다. 데니스 덕분에 이 카페가 더욱 더 두셰브나야 꾸흐냐가 된 것 같았다 :)

 

그러니 혹시라도 페테르부르크 여행을 가실 분들은, 시간을 내서 이 카페 'Душевная кухня' (두셰브나야 꾸흐냐)에 꼭 한번 가보세요. 영어 메뉴판도 있음! 그리고 문이 무거워도 겁먹지 마시고 세게 밀고 들어가세요. 혼자 가셔도 겁낼 필요 없어요. 친절한 데니스가 있으니까요.

 

이 카페 지도를 올리고 싶은데 내가 구글 맵 첨부하는 방법을 모르는 컴맹이라.. 카페 사이트 주소들을 아래 첨부한다. 노어 아시는 분들은 아래 주소를 보세요.

 

'Душевная кухня' (Dushevnaya kukhnya)

ШВЕДСКИЙ ПЕРЕУЛОК, 2
(между Малой и Большой Конюшенными, метро «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

전화번호 : 8 911 009 55 48


<인터넷 주소들>

http://17-19.ru/

http://vk.com/club17188019

instagram soul.kitchen

혹은 페이스북에서 'Душевная кухня бывшее 17-19'를 검색해도 나온다. 근데 이게 다 노어로 되어 있다는 함정이 있네..

 

백야 시즌에 꼭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마웠어요 데니스!

 

Спасибо, Денис!

 

** 이 카페 처음 갔던 날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09

** 치즈홍차님 요청으로 크림 넣은 핀란드식 우하 레시피 찾아내 번역해 올림 : http://tveye.tistory.com/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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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부활절 이야기 네번째 파트.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은 분량이 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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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s

пасхальный расска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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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난 수업을 마치자마자 곧장 버스를 타고 미샤가 사는 동네로 갔다. 점심 때 마르가리타 아줌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미샤가 이미 퇴원해서 집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알면 야단칠 게 뻔했기 때문에 나쟈에게 걔네 집에서 숙제하고 노는 걸로 해달라고 말을 맞춰두었다. 아냐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동생은 아직 어려서 비밀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고 같이 버스 타는 것도 불안해서 그냥 혼자 가기로 했다.

 

미샤의 집은 극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5분만 걸어내려 오면 바로 모스크바 강가였지만 녹지와 큰 울타리가 쳐진 건물들 때문에 버스에서 막 내려서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스베타 얘기로는 국회의원들과 당 간부들, 별 달린 장군들, 훈장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굉장한 동네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너무 감탄해서 미샤에게 어떻게 그렇게 좋은 동네에 아파트를 얻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미샤는 자기가 얻은 게 아니고 극장에서 구해 줬다고 했다.

 

“ 난 스탄카 집이 더 좋은데. 여긴 극장에서 너무 멀어. 걸어가면 한참 걸리는걸. ”

“ 그래서 우리 아빠 집에 와 있는 거야? ”

“ 응. 스탄카가 와 있어도 된다고 했어. 레닌그라드에서도 같이 있으니까 일하기 좋았어. ”

 

난 딱 한 번 미샤의 아파트에 올라가본 적이 있었다. 막 이사 와서 아빠가 짐 정리를 도와주러 갔을 때였다. 집이 엄청나게 넓었다. 우리 집이 몇 개나 들어갈 것 같았다. 한 층 전체가 그냥 집 하나였다. 레닌그라드에서 미샤가 지나와 같이 살던 아파트도 넓고 근사했었지만 그 집보다도 더 컸다. 미샤는 이삿짐 상자 몇 개를 한쪽에 그대로 쌓아놓은 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땐 1월이었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행기가 뜨지 않았기 때문에 레닌그라드에서 올라오는 데 무척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고급 아파트였지만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탓인지 난방이 다음날부터 된다고 해서 집안은 꽤 추웠다. 그래선지 미샤는 코트를 입고 스카프도 풀지 않은 채 소파에 길게 누워 자고 있었다. 얼마나 깊게 자는지 우리가 들어온 것도 몰랐다. 아빠는 미샤를 깨우는 대신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 옷과 책들을 대충 정리해 주었다. 아빠는 우리가 잘 때도 절대로 깨우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랑 같이 살 때도 가끔 핀잔을 듣곤 했다. ‘당신이 라라를 늦잠꾸러기로 만들 거야!’ 라고. 하지만 아빠는 곤하게 자는 사람은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미샤를 깨우지 말고 책 정리를 도와주거나 한쪽에서 조용히 놀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미샤는 진짜 늦잠꾸러기였다. 공연 때문에 극장에서 늦게 돌아오는 탓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9시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뜬 후에도 한동안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주말에 미샤가 와 있는 날 아침이면 아빠는 나와 아냐에게 그를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냐는 침실로 기어들어가 미샤를 깨워 놀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난 텔레비전 만화 볼륨을 열심히 낮추곤 했다.

 

그 날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아닌 남자에게 키스를 했다. 잠자는 미녀에서 왕자님이 오로라 공주에게 입 맞추듯이. 미샤는 내가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소파 곁으로 다가갔을 때도, 목에 두르고 있는 스카프를 살짝 젖혔을 때도, 가슴에 머리를 기댔을 때도 깨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입술에 살짝 키스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땐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마터면 어지러워서 뒤로 자빠질 뻔 했다.

 

나쟈와 비카는 그 얘길 듣고 완전히 흥분해서 느낌이 어땠느냐고 캐물었다. 난 솔직하게 대꾸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냥 어지러웠다고, 미샤와 아빠에게 들킬까봐 너무 긴장돼서 정신이 없었다고. 그러자 언니가 있는 나쟈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가 키스를 안 해봐서 그렇다고, 처음 해봐서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진짜 키스를 하면 남자가 꼭 안아주고 답례로 자기도 키스를 해준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어쨌든 미샤는 너무 곤히 자느라 내가 키스한 것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내가 나쟈와 비카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부끄럽기도 했고 어쩐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미샤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꼭 아냐의 입술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그리고 좋은 냄새가 났다. 사실 레닌그라드에서 같이 보트를 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 엄마보다, 학교에서 제일 예쁜 타치야나 선생님보다 더 좋은 향기가 나.'  미샤는 향수를 쓰니까 아마도 그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아빠의 집에서 막 씻고 나와서 우리와 놀아줬을 때도 희미하게 그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그냥 체취라는 걸 알았다. 아냐에게서 우유 냄새가 나고 우리 엄마에게서 희미한 파우더 냄새가 나는 것처럼.

 

미샤는 30분 후에야 깨어났고 키스는커녕 내가 와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빠가 짐을 정리하고 있는 걸 보고는 그냥 놔두라고 미안해하더니 나랑 아냐를 데려와 같이 저녁 먹자고 했다. 난 그때까지도 어지럽고 부끄러워서 피아노 뒤에 숨어 있었고 아빠가 불렀을 때에야 쭈뼛거리며 기어나갈 수 있었다. 미샤는 날 보더니 굉장히 반가워했고 코트 주머니에서 무척 귀여운 머리핀을 꺼내 주었다. 폭신하고 보드라운 은빛 솜털이 달려 있는 자작나무 핀이었다. 미샤에게는 언제나 예쁘고 근사한 물건들을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부활절 달걀도 그렇게 잘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버스에서 내린 후 난 전에 봐 두었던 빵집 간판을 찾아냈고 조금 헤맨 끝에 공원 왼편의 작은 문을 통과해 미샤의 아파트를 간신히 찾아냈다. 수프가 든 보온병과 보자기에 싼 쿨리치를 양손에 들고 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수프는 놓고 올 걸 하고 후회했지만 아플 때는 뜨끈한 보르쉬를 먹어야 했다. 엄마는 나와 아냐가 아플 때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래야 비타민과 철분을 섭취할 수 있다고. 아침에 엄마 몰래 냄비에서 덜어내느라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겨우겨우 울타리들을 지나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했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장애물과 부딪쳤다. 그 아파트는 1층 전체가 경비실로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두 겹의 문으로 막혀 있었고 뒤편으로 나 있는 계단으로 가는 문도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지키고 있었다. 꼭 외국인들이 가는 호텔 같았다. 전에는 아빠랑 같이 왔었고 아빠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아저씨가 날 보더니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난 미샤의 이름과 아파트 호수를 댔고 아빠 친구라서 보러 왔으니 들여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저씨는 안 된다고 했다.

 

“ 왜 안돼요? 1월에도 왔었는데. 우리 아빠 진짜 미샤 친구예요. 볼쇼이에서 안무해요. 우리 아빠도 유명해요, 스타니슬라프 일린이에요. 국영채널 방송에도 나왔어요. 내 이름은 라라예요. 미샤는 그저께도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었어요. 진짜예요. ”

 

경비 아저씨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아저씨도 거들었다.

 

“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정 올라가고 싶으면 아빠와 같이 오든가. ”

“ 우리 아빤 지금 극장에 있단 말이에요! ”

“ 그런 말을 하는 여자들이 여기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니? 꽃다발에 선물에 거짓말에... 이젠 이런 꼬마까지 와서 떼를 쓰니 참... ”

“ 난 꼬마가 아니에요! 학교 다녀요! 열 살도 넘었어요! 진짜예요, 미샤랑 정말 아는 사이예요. 미샤가 아프댔어요, 그래서 보르쉬 가지고 왔어요. 미샤는 아파도 참는단 말이에요, 저녁에는 밥도 잘 안 먹어요. 우리 엄마가 아프면 잘 먹어야 된다고 했는데. 그냥 놔두면 계속 아플 거예요.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 ”

 

난 결국 답답하고 억울해서 엉엉 울어버렸다. 내가 울자 아저씨들은 굉장히 난처해했다. 무뚝뚝하던 아저씨가 날 달래주면서 보르쉬를 놓고 가면 자기가 미샤에게 전해주겠다고 했다.

 

“ 안돼요! 미셴카한테 안 주고 아저씨가 먹어버릴지 어떻게 알아요! ”

 

아저씨는 절대 안 먹을 테니 믿어달라고 했지만 난 악착같이 버텼다. 들여보내달라고 계속 떼를 쓰며 울었다. 아저씨들이 못 들어가게 하자 더럭 겁이 나고 걱정이 됐다. 이 아저씨들이 이렇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서 미샤가 진짜 많이 아픈데도 위에서 혼자 누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너무 슬퍼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미샤는 자기 집이 너무 넓어서 싫다고 했고 아늑한 우리 아빠의 아파트가 훨씬 좋다고 했었는데.

 

내가 주저앉아서 계속 울자 안쪽 사무실에서 어떤 아줌마가 나왔다. 매부리코에 굉장히 무섭게 생긴 아줌마였다. 당장이라도 보온병과 케익을 빼앗아 바닥에 집어던지고 날 내쫓을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그래도 계속 울면서 버텼다. 아줌마는 경비 아저씨들에게 자초지종을 듣더니 나에게 이름과 아빠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는 거짓말하면 가만 안 두겠다, 부모님과 학교에 얘기해서 혼쭐을 내주겠다고 협박하더니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난 그 무서운 아줌마가 엄마에게 전화하는 줄 알고 겁에 질렸다. 하지만 잠시 후 아줌마가 나오더니 손수건으로 눈물과 콧물을 닦아 주었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아줌마는 내 손을 잡고 두 겹의 육중한 문을 열더니 엘리베이터로 데려다 주었다. 보온병과 쿨리치도 들어 주었다. 알고 보니 친절한 아줌마였다. 미샤의 집으로 직접 전화를 해서 나랑 아는 사이가 맞는지 물어봤다고 했다.

 

“ 미샤 집에 있어요? ”

“ 있으니까 전화를 받았지. ”

“ 안 아파요? ”

“ 모르겠는데, 목소리는 괜찮았어. ”

“ 왜 아저씨들이 지키면서 못 들어가게 해요? ”

“ 여기는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그래. 아무나 못 들어가. ”

“ 미샤는 중요한 사람이에요? ”

“ 글쎄, 여기 사니까 아마 그렇겠지. ”

“ 중요한 사람은 배 나온 아저씨들인데... 막 당에서 연설하고... ”

 

매부리코 아줌마가 웃었다.

 

“ 그러니? 그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구나. 모델처럼 날씬하니까. ”

“ 모델이 아니고 무용수예요. 볼쇼이에서 제일 잘 춰요. 외국에도 많이 갔어요. 상도 많이 받았어요. ”

“ 아줌마도 알아, 사인도 받았는걸. 표 받아서 공연도 봤어. ”

“ 미샤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사람이에요. ”

“ 그래, 좋은 사람 같긴 하더라. 그러니까 표도 줬지. ”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줌마는 7층을 눌러준 후 보온병과 쿨리치를 내게 돌려주었다. 난 주머니에서 장식 계란을 한 개 꺼내 아줌마에게 주었다. 아저씨들 것까지 주고 싶었지만 두 개밖에 안 가져왔고 하나는 미샤 몫이었다. 아줌마는 무척 좋아했고 나에게 잘 놀다 가라고 인사도 해줬다.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미샤가 복도에 나와 있었다. 내가 괜찮으냐고 묻기도 전에 먼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 라루츠카, 왜 이렇게 울었어? ”

“ 안 울었어. ”

“ 눈이 퉁퉁 부었는걸. ”

“ 아저씨들이 못 올라가게 해서. ”

“ 나한테 전화하지, 그럼 내려갔을 텐데. 비까지 맞고... 우산 없었어? ”

“ 버스 탈 때까진 비 안 왔어. ”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미샤는 수건을 가져와 내 얼굴과 머리를 닦아 주었다. 보르쉬가 든 보온병과 쿨리치는 뭐냐고 묻지도 않고 받아서 티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내 머리의 물기를 털어주기 바빴다.

 

“ 옷 갈아입어야겠다. 감기 걸릴 거야. 잠깐만 있어봐. ”

 

미샤는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쪽 방문을 열었다. 큰 거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옷장이 여러 개 있었고 얇은 커튼으로 가려진 바퀴 달린 옷걸이도 보였다. 극장 의상실에서나 보던 거였다. 그는 옷장 서랍을 열어 안을 뒤지더니 티셔츠를 하나 꺼내서 내게 주었다.

 

“ 젖은 거 벗고 이거 잠깐만 입고 있어. 라디에이터에 널어놓으면 금방 마를 거야. ”

“ 이거 누구 옷이야? ”

“ 내 거야. 미안하네, 라라가 입을만한 옷이 없어서. 예쁘진 않지만 잠시만 입고 있어. ”

 

예쁜 옷보다 미샤가 입었던 옷이 천 배는 좋았지만 부끄러워서 그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아냐라면 서슴없이 말했을 텐데. 미샤는 날 침실로 데려다 주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한 뒤 나갔다. 난 점퍼와 스웨터와 바지와 양말을 벗었다. 그래도 속옷은 젖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 미샤가 준 티셔츠를 입었다. 물론 나한테는 엄청 컸다. 무릎 아래까지 펄럭이며 내려왔고 반소매 티셔츠였지만 소매 끝이 거의 팔목에 닿았다. 원래는 짙은 파란색이었던 것 같았지만 많이 빨아서 그런지 흐릿한 푸른색으로 물이 빠져 있었고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잠옷은 아니고 연습할 때 입는 옷 같았다. 카펫 위에 선 채 잠시 두 팔로 어깨를 꼭 감싸고 티셔츠의 보드라운 감촉을 느껴 보았다. 세탁해서 개켜 두었던 옷이라 희미한 세제 냄새 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샤가 입었던 옷이라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침대 시트와 담요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프니까 당연히 누워 있었을 줄 알았는데. 커튼이 젖혀져 있지 않아 스탠드 램프를 켰는데도 어두웠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장미 몇 송이가 꽂힌 꽃병과 책이 두어 권 놓여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있을 때도 미샤의 집에는 언제나 꽃이 가득했다. 팬들이 매일같이 꽃다발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로 이사 온 후에는 우리 집에 올 때 자주 꽃을 가져왔고 극장 동료들에게도 꽃을 나눠주곤 했다. 그 중에서도 장미가 제일 많았다. 한겨울에도 장미를 잔뜩 받았다. 미샤가 장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사람들이 어디서 그렇게 꽃을 구하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난 맨발로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며 잠깐 미샤의 침실을 구경했다. 엄마는 허락받지 않고 남의 침실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들쑤시면 안 된다고 했지만 분명히 미샤가 안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라고 했고 아무 것도 만지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화려하고 넓은 아파트에 비해 침실은 간소했다. 침대와 나이트 테이블, 램프와 꽃이 전부였다. 벽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을 뿐이었다. 연필인지 목탄인지는 모르겠지만 휘갈겨 그린 스케치였다. 어두워서 무슨 그림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미샤가 날 불렀다.

 

“ 라루츠카, 옷 불편해? 다른 거 줄까? ”

“ 아니야, 좋아. 다 입었어. ”

 

난 급하게 옷 뭉치를 껴안고 침실에서 나왔다. 미샤는 내게서 젖은 옷들과 양말을 받아 거실 라디에이터에 널었다. 자리가 모자라자 침실 라디에이터에도 마저 널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따라 들어가 물었다.

 

“ 저 그림은 뭐야? 그리다 만 거 같아. ”

“ 아, 스케치야. 브루벨이 날아가는 악마 구상할 때 그린 거래. ”

“ 정말? 진짜 브루벨 그림이야? 트레치야코프에 있는 거? ”

“ 응. 근데 날아가는 악마는 레닌그라드에 있어, 러시아 미술관에. ”

“ 어떻게 구했어? 미술관에 있어야 되는 거 아냐? ”

“ 스케치나 소품들은 별도로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대. 예전에 누가 선물해 줬어. 생일에. ”

“ 난 저 그림은 못 봤는데. 레닌그라드 갔을 때도 에르미타주만 갔었어. ”

“ 화집 보여줄까? ”

“ 응. ”

 

미샤는 서재로 가서 굉장히 크고 두꺼운 브루벨 화집을 꺼내왔다. 난 거실 소파에 앉아 화집을 넘겨보았다. 모르는 그림도 많았다. 미샤는 브루벨을 좋아해서 종종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가곤 했다. 난 풍경화와 화려한 초상화들이 더 좋았고 브루벨 그림은 어두워서 그런지 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미샤와 트레치야코프에 가면 그가 브루벨 전시실에 있는 동안 다른 방에 가 있곤 했다. 하지만 백조 공주는 좋았다. 환상적으로 예뻤다. 전에 미샤가 그 그림 앞에 서 있을 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백조 공주가 미셴카랑 좀 닮았다고. 미샤는 남자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싫어할 것 같아서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지만, 화집을 펼쳐 보니 역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조 공주도 검은 머리였고 피부가 하얬다. 그리고 눈이 깊고 아름다웠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것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매처럼. 그러자 갑자기 좀 슬퍼져서 화집을 덮어버렸다.

 

그때 미샤가 내 발에 슬리퍼를 신기고는 목과 어깨에 폭이 넓고 보드라운 스카프를 둘러 주었다. 하얀 줄이 두 개 들어간 녹색 스카프였는데 무척 따뜻하고 예뻤다. 미샤에게는 멋진 스카프가 많았다. 직접 사기도 했지만 선물도 많이 받았다. 아빠는 미샤가 팬들에게서 받은 스카프가 굼 백화점에 있는 스카프들보다 더 많을 거라고 했다. 나중에 극장 박물관에 방을 하나 내줄테니 거기 그 예쁜 스카프들과 옷가지들을 전시하라고 농담도 했다. 내가 스카프를 만지면서 좋아하는 동안 미샤가 몸을 녹이라고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차를 한 잔 주었다.

 

“ 나 안 마실래. ”

“ 쓴 거 아니야, 설탕 넣었어. ”

 

그 말에 안심하고 차를 마셨다. 여전히 별로 달지는 않았다. 미샤는 차에 설탕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스카프를 두르고 차를 마시자 몸이 한결 따뜻해졌고 그제야 난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깨달았다. 도리어 미샤가 날 돌봐주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찻잔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쳐다보자 미샤가 물었다.

 

“ 라라,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

“ 왜? ”

“ 비 맞고 여기까지 왔잖아. 울었고. ”

“ 안 울었어. 조금, 조금 눈물만 난 거야. ”

 

다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아서 급하게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미샤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이제 안 아파? ”

“ 누가 그래, 내가 아프다고. ”

“ 아빠가 새벽에 데리러 갔잖아. 어제 병원에 있었고. 내가 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안 된다고 했어. ”

“ 아, 그랬구나. 별 거 아니었는데. 스탄카도 안 와도 됐는데. ”

“ 부끄러워서? ”

“ 뭐가? ”

“ 아빠가 그러는데 미셴카는 아픈 걸 보여주는 게 부끄럽다고 했대. 그래서 나보고 오지 말라고 했어. ”

“ 내가 그랬대? ”

“ 아니야? ”

“ 글쎄, 스탄카가 그렇게 말했으면 그런 거겠지. ”

 

미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티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안색이 좀 창백한 정도였다. 눈은 여전히 밤하늘처럼 까맸고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잠옷이나 가운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나에게 준 옷과 비슷한 반소매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을 뿐이었다.

 

“ 거기 다친 거야? ”

“ 어디? ”

“ 손목. ”

“ 아... ”

 

미샤는 흠칫 놀라면서 왼손을 등 뒤로 감췄다.

 

“ 아니야, 살짝 긁힌 것뿐이야. ”

“ 피났어? ”

“ 조금. ”

“ 보르쉬 먹어야 돼. ”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프 생각이 나서 난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던 보온병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눈에 띄는 그릇을 찾아내 수프를 부었다. 아직도 김이 살짝 올라왔다. 뭔가 더 먹을 만한 게 없나 하고 냉장고와 찬장을 뒤졌지만 요리를 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케피르와 주스, 흑빵과 오렌지 외에는 없었다. 할 수 없이 흑빵을 좀 잘라서 버터를 발랐다.

 

쟁반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미샤는 바를 잡고 다리를 길게 뻗고 있었다. 거실은 아주 넓었고 한쪽은 완전히 극장 연습실처럼 되어 있었다. 벽 한 면은 완전히 거울로 되어 있었고 기다란 바도 있었다. 구석에는 조그만 피아노도 있었다. 아빠는 안무가였고 거의 매일같이 무용수들과 저런 연습실에서 같이 일했지만 엄마 때문에 난 한 번도 그걸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음악도 없고 의상도 갖춰 입지 않은 채 미샤가 연습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나중에는 바를 완전히 놓고서도 한쪽 발로 서서 반대쪽 다리를 뒤로 쭉 뻗은 채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런데도 넘어지지 않았다. 전혀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 비행기 같아, 미셴카. 한 바퀴 돌 수도 있어? ”

“ 도는 게 좋아? ”

“ 응. ”

 

그러자 미샤가 그 자세에서 천천히 도는 것을 보여주었다. 근사했다. 이제 비행기가 아니라 진짜 새처럼 보였다. 날개를 편 백조 같았다. 나도 해 보고 싶어서 한쪽 다리를 뒤로 들어보았지만 물론 도는 건커녕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내가 엉덩방아를 찧자 미샤가 와서 일으켜 주었다. 진짜 아팠지만 그보다는 창피했기 때문에 괜찮은 척 하며 미샤의 손을 잡아끌고 티 테이블 앞으로 데려왔다. 그는 긴 소매 셔츠로 갈아입은 후였다. 붕대가 보이지 않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난 미샤에게 보르쉬와 쿨리치, 그리고 버터 바른 빵을 먹으라고 했다. 미샤는 무척 고마워했다. 무거운데 어떻게 들고 왔느냐고 하면서 그래서 우산을 못 가져왔느냐고 정확히 짚어내 날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는 같이 먹자고 했다.

 

우리는 함께 수프와 흑빵과 케익을 먹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빵과 쿨리치는 나 혼자 먹었다. 미샤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 것 같았다. 보르쉬는 맛있다고 했지만 많이 먹지는 않았다. 한 입 먹고 나서는 한참 있다가 다음 숟가락을 떴다. 그것도 나 때문에 억지로 먹는 것 같았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내 표정에 실망감이 드러났는지 미샤가 미안해하면서 저녁에 꼭 다 먹겠다고 약속했다.

 

“ 나 수요일에 공연 보러 가도 돼? ”

“ 로미오와 줄리엣은 나스챠의 리스트에 없었던 것 같은데. ”

“ 그치만 내용은 다 아는걸.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읽었어. ”

“ 스탄카가 된다고 하면. ”

“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미셴카가 설득해줘. ”

“ 너희 아빠는 설득하기 힘들어. 도리어 내가 항상 넘어가는걸. ”

“ 어제 주사 맞았어? ”

“ 아니. 주사 맞을 만큼 아프지 않았어. ”

 

그럼 왜 아빠가 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어야 했느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미샤는 현관문에 달린 작은 거울로 바깥을 확인하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눈에 띄게 예쁜 여자가 들어왔다. 이미 4월이었지만 은회색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 화려한 빨간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입술도 꽃잎처럼 빨갛게 칠하고 있었다. 짙은 밤색 머리칼은 반짝거리는 구슬이 박힌 핀으로 틀어 올리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꼭 고양이 같았다.

 

물론 난 그 여자를 금방 알아봤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 때문인지 무대 위에서 볼 때와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벨리나 크리셴스카야였다. 볼쇼이 발레리나였다. 엄마는 극장 쪽 친구들과 얘기할 때 크리셴스카야를 실력보다는 외모로 뜬 여자라면서 어찌어찌 제1 솔리스트는 됐지만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려면 더 노력해야 할 거라고 헐뜯은 적이 있었다. 아빠는 같이 일하는 무용수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런 혹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 전에는 그녀를 위해 짧은 춤을 고안해 무대에 올려준 적도 있었다. 난 미샤가 크리셴스카야와 춘 백조의 호수를 한 달 전에 봤다. 그녀는 화려한 외모 때문인지 오데트보다는 오딜에 훨씬 잘 어울렸다. 하긴 그때도 내 관심은 온통 미샤에게 쏠려 있긴 했지만.

 

“ 안녕하세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

 

미샤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훨씬 나이가 많은 우리 아빠나 마르가리타 아줌마에게도 편하게 말을 놓곤 했기 때문에 크리셴스카야에게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는 게 낯설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그녀는 미샤보다 나이도 몇 살 많았고 볼쇼이에서는 훨씬 선배니까 무용수들 사이에서는 그래야 할지도 몰랐다. 비록 미샤는 수석무용수였고 크리셴스카야는 아니었지만. 극장에서는 그런 것보다도 선후배 사이의 예의를 많이 따진다고 들었다. 미샤가 목도리와 코트를 받아 주려고 했지만 크리셴스카야는 고개를 저었다.

 

“ 됐어, 금방 나갈 거야. 수요일 로미오 그대로 가는 거야? ”

“ 바뀔 이유가 없잖아요. ”

“ 줄리엣 내가 추기로 했어. 마리야가 무릎 때문에 빠졌어. 너도 솔직하게 말해, 안 될 것 같으면 빠져. 그럼 이고리와 맞춰볼 테니까. ”

“ 왜 제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시죠? 키로프에서도 로미오는 많이 췄는데. 저랑 다른 건 같이 춰 보셨잖아요. ”

“ 네가 별로라는 게 아냐. 너처럼 잘 나가는 애랑 호흡 안 맞는다고 얘기했다간 극장에서 쫓겨나라고. 내가 미쳤어, 그런 얘기 하게? ”

 

크리셴스카야는 휘파람을 불었고 잠깐 미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뭐 멀쩡한 것 같네. 그래도 불안해. 테라스 파 드 두도 그렇고 피날레도 그렇다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려야 하잖아. ”

“ 어깨 부상은 작년에 다 나았는걸요. ”

“ 진짜 연기도 잘한다니까. 그 얘기 아닌 거 알잖아. ”

 

그녀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미샤의 왼쪽 팔을 잡아당겼다. 소매 위로 손목 부근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미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팔을 뒤로 빼냈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 누구한테 들었어요? ”

“ 지금 스탄카가 얘기했을까봐 배신감 느끼는 거야? 그 사람이야 절대 말 안하지. 정말 스탄카가 거기 와서 널 데려간 줄 알았어? 말이 안 되잖아. 그 사람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왔겠어. ”

“ 그럼... ”

 

난 미샤가 그렇게 창백해지는 걸 처음 봤다. 무대 조명을 그대로 얼굴에 받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보니 비가 그쳐서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크리셴스카야는 낮게 웃었다. 연극배우처럼 멋지고 과장된 웃음이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었지만 미샤와는 사이가 나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빨리 나가줬으면 싶었다. 우리 아빠 이름을 자꾸 말하는 것도 싫었다.

 

“ 왜, 게르만 알렉세예비치였을까봐? 그랬으면 네가 지금 여기 와 있겠어? 그 사람이 발견했으면 공연이고 뭐고 곧장 클리닉에 처박았겠지. 아예 어제 베를린에 데려갔을지 누가 알아. 그거 내 차였어. 문도 잠가 놨었는데 어떻게 땄는지 모르겠네. 게르만이 선물해 준 차였는데... 일부러 거기서 그런 거야? ”

“ 몰랐어요. 미안해요. ”

“ 됐어, 시트만 바꾸면 되니까. ”

“ 스탄카 말고 누구에게 또 얘기했어요? ”

“ 그게 그렇게 중요해? 감독이 알면 자르기라도 할까봐? 키로프에서 뺏아오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 기껏 그런 바보짓 했다고 널 자르겠어? 그러다 자기가 잘리겠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뭐 좋은 일이라고. ”

“ 미안해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불편하게 만들어서. ”

“ 불편하게? 그런 짓을 해놓고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 밖에 없어? 하긴 피곤하긴 했지. 집에 가고 싶었는데... 나한테 미안해 할 건 없어, 그런 꼴 전에 안 본 것도 아니고. 너도 어차피 맨 정신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렇게 술 못 마시는 줄은 몰랐어. 게르만에게서 듣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거 한 잔 먹이니까 그냥 가버리던데. ”

“ 저, 제가 선배님에게 실수라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집에서... ”

 

크리셴스카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 고양이 같은 눈초리였다. 난 그 여자가 미샤를 할퀴거나 한 대 때릴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쟁반을 꼭 쥐고 여차하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었고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어디까지 기억나? ”

“ 뭐가요? ”

“ 그거 마시고 나서. ”

 

미샤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내 쪽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나중에 얘기해요, 에벨리나. ”

“ 쟤 누구야? ”

“ 라라요. ”

“ 아, 스탄카 딸이구나. 닮았네. ”

 

크리셴스카야는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을 뿐이었지만 귓가에는 그대로 다 들렸다.

 

“ 크라베츠는 기억나? ”

“ 모르겠어요, 취해서. 그 자리에 같이 계셨던 거예요? ”

연기인지 진짜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마음대로 해. 기억 안 나는 편이 더 좋으면 그렇게 해 둬. 나도 그 쪽이 더 좋아. 그래야 수요일 무대도 더 편해. 내일 아침부터 맞춰보면 되겠지. 열 시까지 나올 수 있어? ”

“ 네. ”

“ 보르쉬 먹어, 철분이 많으니까. 너 나한테 빚졌어. 혈액형 같아서. ”

“ 고마워요. ”

“ 정말 고맙기는 해? 원망하는 건 아니고? 난 후회하는데. 그냥 놔뒀으면 좋았을걸. ”

 

크리셴스카야는 고개를 돌려 거실 쪽을 힐끗 훑어보았다. 날 본 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집 좋다더니 정말이네. 나한테는 차 밖에 안 줬는데. 금방 인민예술가 만들어주겠어. 그 사람 여기로 와? ”

“ 전 스탄카 집에서 자요. 극장에서 가까워서. ”

“ 반항은 적당히 해둬. 게르만은 성깔 부리는 애 좋아하긴 하지만 수틀리면 그저께보다 더 끔찍하게 굴 테니까. 아, 하긴 넌 기억 안 난다고 했지. 그냥 곱게 여기 머물러 있어. 주는 대로 받고 말도 잘 듣고. 공연히 다른 사람 집에 드나들지 마. 그 사람은 화나면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

 

미샤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현관으로 나가서 문을 열면서 혼잣말처럼 가만히 물었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에벨리나 드미트리예브나? ”

“ 뭐가? ”

“ 그 사람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

“ 진짜 웃긴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양보라도 해 주려고? 그 사람이 그런 거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전부 자기 뜻대로 하는데. ”

“ 그자는 도살자예요. 더러운 인간이라고요. ”

“ 말 좀 가려서 하시지. 여기 도청될 걸. 이렇게 좋은 아파트를 안겨주고 도청 마이크 하나 안 달아놨을 줄 알았어? 또 얼마나 혼이 나고 싶어서. 뉴욕에서 말 안 들었다고 그렇게 벌 받아 놓고서. ”

“ 전 기억 안 나요. ”

“ 그래, 그렇게 우겨. ”

 

크리셴스카야는 모피 목도리를 여미고 복도로 나가다가 생각난 듯 핸드백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 이거 네 거지? 차에서 나왔어. ”

“ 제 거 아니에요. ”

“ 아니긴. 게르만이 주는 거 봤는데. ”

 

그녀는 미샤에게 상자를 쥐어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미샤는 문을 닫은 후 현관 구석에 상자를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욕실로 들어가서 문도 닫지 않고 세면대 수도꼭지 아래 머리를 들이밀더니 물을 틀었다.

 

“ 미셴카, 뭐해? ”

“ 세수해. ”

“ 세수하면서 머리도 감아? ”

“ 응. ”

 

난 미샤가 부러웠다. 나도 남자였다면 세수하면서 머리를 감을 수 있을 테고 엄마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될 텐데.

 

미샤가 욕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머리에 물을 맞고 있었기 때문에 난 안으로 들어가서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이 얼음장처럼 찼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 엄마가 찬물로 머리 감으면 폐렴 걸린댔어. ”

“ 어른은 안 그래. ”

“ 미셴카는 어른이 아니잖아. ”

“ 난 어른인데. ”

“ 어른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

“ 왜? ”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야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많이 기다릴 필요가 없지’ 라고 말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른이었다면 크리셴스카야가 그렇게 날 무시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게 쌀쌀맞은 태도로 미샤를 야단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샤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왔을 때 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이제껏 내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샤는 놀란 것 같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냐에게 그랬던 것처럼 몸을 굽혀 안아 주었다.

 

“ 라루츠카, 우는 거야? ”

 

그 말을 듣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그전까지는 울고 있지 않았는데. 몸이 떨리면서 심하게 울음이 나왔다. 미샤는 날 좀 더 꼭 안아 주면서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내 머리를 쓸어준 적이 없었다. 그건 아냐 같은 어린애한테만 하던 거였는데. 하지만 전혀 화나지 않았다. 난 미샤에게 더욱 찰싹 달라붙어서 서럽게 울었다. 미샤는 한동안 가만히 날 안고 있다가 내가 좀 진정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 라라, 에벨리나 때문에 놀라서 그래? ”

“ 그 여잔 왜 그래? 왜 미셴카한테 그렇게 무섭게 해? ”

“ 그냥 얘기만 한 거야. 에벨리나는 목소리가 커서 그래. ”

“ 아니야, 화냈어. 미워했어. 무서운 눈으로 쳐다봤어. ”

그렇지 않아. 좋은 사람이야. 그냥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랬던 거야. ”

“ 왜? ”

“ 어... 내가 술 못 마시는데 마셔서... ”

“ 그 언니는 잘 마셔? ”

“ 그런가봐. ”

“ 그것 봐, 나쁜 여자야. 엄마가 그랬어, 술 많이 마시는 여잔 나쁘다고. ”

“ 술 많이 마시는 여자가 나쁘면 많이 마시는 남자도 나쁜 거야. ”

“ 왜 미셴카가 술 마셨다고 그 여자가 화내? ”

“ 음.... 수요일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이 춰야 하는데 내가 아플까봐. 그럼 무대를 망치잖아. ”

“ 술 마셔서 아팠던 거였어? 그래서 우리 아빠가 병원 갔던 거야? ”

“ 응. ”

“ 다시는 술 마시지 마. ”

“ 알았어. ”

“ 그 여자랑 로미오와 줄리엣 안 췄으면 좋겠어. 마리야 언니랑 춰. ”

“ 마리야는 무릎 다쳐서 못 나온대. 에벨리나도 잘 추는데. ”

“ 여기 다시는 못 오게 해. ”

“ 라라가 싫다면 그렇게 할게. ”

 

미샤는 찬물로 머리를 감았는데도 무척 따뜻했다. 큰 라디에이터나 사모바르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운 게 창피해서 여전히 미샤의 품에 얼굴을 처박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문득 궁금해진 게 있어서 불쑥 물었다.

 

“ 근데 도살자가 무슨 뜻이야? ”

“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

“ 아까 미셴카가 그랬잖아. 그 여자랑 얘기하다가. ”

“ 어... 미안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 ”

“ 왜? 그럼 엄마한테 물어볼 거야. 오빠가 그랬잖아,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거라고. ”

“ 별로 좋은 말이 아니라서 그래. ”

“ 뭔데? ”

“ 살인자란 뜻이야. ”

“ 우와, 그런 악당을 알아? 그런 건 영화에 나오는 거잖아. ”

“ 맞아. 영화랑 발레에 나오는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나오고... 그래서 그 얘기한 거야, 공연 때문에. 근데 나쁜 말이니까 라라는 쓰지 마. ”

“ 응. ”

 

궁금증도 풀렸고 눈물도 다 말랐기 때문에 난 미샤의 팔에서 빠져나와 오렌지를 가져왔다. 껍질을 벗겨서 반을 쪼개어 주자 미샤도 오렌지를 먹었다. 하지만 케익은 여전히 먹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던 장식 달걀을 꺼내주자 미샤는 예뻐서 먹기가 아깝다면서 꽃병 옆에 있던 조그만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만든 계란을 예쁘다고 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 그때 만들어준 이콘 계란 깨져버렸어. 아냐가 밟아서 부서졌어. ”

“ 원래 내가 많이 부쉈던 거라 그럴 거야. ”

“ 속상해, 정말 예뻤는데. ”

“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 ”

“ 그건 부활절에만 만드는 거야. ”

“ 그럼 내년 부활절에 만들어 주면 되지. ”

“ 내년에도 여기 있을 거야? 레닌그라드 안 돌아가고? ”

“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어. ”

“ 모스크바에 계속 살아, 응?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마음을 바꿨다.

 

“ 미셴카가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면 나도 따라가야지. ”

“ 전에도 이사 온다 했다가 엄마한테 야단맞았다면서. ”

“ 아빠랑 갈 거야. ”

“ 라라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구나. ”

“ 딸은 원래 그런 거랬어. 그래서 엄마가 아들 없다고 섭섭하댔어. 오빤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았어? ”

“ 우리 아빠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 ”

“ 병 걸리셨던 거야? ”

“ 잘 몰라. 어릴 때라서.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 ”

“ 많이 슬펐어? ”

“ 응. 나중에 알게 돼서 많이 슬펐어. ”

“ 신부님이 그러는데 사람은 죽고 나면 다시 살아난댔어. 예수님이 그렇게 해준대. 우리는 부활절 계란도 만들었고 쿨리치도 먹었으니까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럼 나중에 미셴카도 아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

“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난 아냐처럼 어렸는데. 아빠가 지금 보면 날 알아볼 수 있을까? ”

미셴카가 늙은이가 되어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아빠들은 다 그런댔어. ”

“ 누가 그래? 신부님이? ”

“ 아니, 우리 아빠가. ”

“ 아, 스탄카가 한 말이면 믿을 수 있겠네. ”

“ 우리 아빠 말은 다 믿어? ”

“ 응. 스탄카 말은 웬만하면 다 맞아. ”

 

난 미샤가 아빠 칭찬을 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오렌지 껍질을 휴지통에 버리러 갔다가 현관 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 가져왔다. 미샤는 부엌으로 가서 남은 보르쉬를 뚜껑 달린 그릇에 붓고 있었다. 수첩을 뜯어서 ‘꼭 먹을 것’이라고 써 붙여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샤가 돌아오면 허락을 받고 열어보려 했지만 그 상자는 무척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그만 구슬이 한 줄로 박혀 있는 자작나무 상자였는데 테두리는 금색과 은색으로 되어 있었다. 나비 모양의 잠금쇠도 달려 있었다. 잠금쇠를 비틀자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깜짝 놀라서 도로 닫으려고 했지만 안을 보자 탄성이 나왔다.

 

“ 우와! ”

 

태어나서 그렇게 예쁜 물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샤가 둘렀던 구슬 달린 팔찌도,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가 머리에 썼던 왕관도 그 정도로 찬란하고 화려하지는 않았다. 부활절 달걀이었다. 하지만 진짜 달걀은 아니었다. 매끄러운 도자기와 황금빛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이었다. 휘황하게 반짝이는 녹색 구슬과 파란색 구슬들이 가느다란 황금색 그물 무늬를 따라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달걀 가운데에는 상자와 마찬가지로 아주 조그맣고 우아한 나비 모양 잠금쇠가 달려 있었고 옆으로 비틀자 부드럽게 열렸다. 속은 텅 비어 있었지만 붉은색 벨벳 안감이 들어가 있었다. 난 그렇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을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보석처럼 밝고 찬란했다.

 

“ 미셴카, 이것 좀 봐! 부활절 계란이야. 너무 예뻐! ”

 

거실로 돌아온 미샤는 내가 치켜든 보석 달걀을 힐끗 쳐다봤지만 만져 보지는 않았다.

 

“ 꼭 진짜 보석 같아. 램프에 비추니까 더 반짝반짝 빛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부활절 계란이야! ”

“ 그럼 가져갈래? ”

“ 나 빌려주는 거야? ”

“ 아니, 가져. 난 그런 달걀 별로 안 좋아해. 라라가 만든 게 더 좋아. ”

“ 정말? 가져도 돼? ”

 

난 기뻐서 펄쩍 뛰었다. 한참동안 계란을 만지작거리다가 구슬이 하나라도 빠질까봐 걱정이 돼서 상자 속에 도로 곱게 집어넣었다. 하지만 뚜껑을 닫지는 않았다. 무릎에 상자를 올려놓고 계속 달걀을 구경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미샤와 눈이 마주쳤다. 미샤는 내가 준 장식 계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굴리면서 날 바라보더니 살짝 웃었다. 그 날 처음으로 웃는 거였다. 미샤가 웃자 해가 져서 어두컴컴해진 거실 전체에 전등을 켠 것 같았다.

 

그 때 또 초인종이 울렸다. 그 무서운 여자가 다시 왔나 싶어서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다행히 그건 아빠였다. 발레 공연이 없는 날이어서 그랬는지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미샤가 괜찮은지 보러 온 것 같았다.

 

아빠는 날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 버스 타고. ”

“ 너 혼자서 버스 타고 왔단 말이야? 길은 어떻게 찾았어? ”

“ 나 길 잘 찾아. 빵집 간판 외워놨어. ”

“ 엄마한테 얘기하고 온 거야? ”

“ ... 응. ”

“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

“ 잘못했어. 나쟈네 집에서 논다고 했어. ”

오고 싶었으면 아빠한테 얘길 했어야지. 그럼 아빠가 데리고 왔을 텐데. ”

“ 아니야, 아빤 안 데려왔을 거야. 병원에도 못 오게 했잖아. ”

 

아빠는 날 꾸짖으려고 했지만 미샤가 감싸주었다.

 

“ 그렇게 야단치지 마. 나 때문이니까. ”

“ 너한테 온 게 잘못이란 게 아냐. 말 안 하고 혼자서 버스 탄 게 문제지. 위험하잖아. ”

“ 라라는 어린애가 아냐. 다 컸는걸. 버스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

“ 모스크바는 레닌그라드가 아냐. 훨씬 복잡하고 위험해. 길도 더 넓고. 너 어렸을 때와는 다르다고. ”

“ 난 버스 안 탔는데. 걸어 다녔어. 사람도 너무 많고 떠밀리면 다리 다칠까봐. ”

“ 하긴. 나도 웬만하면 걸어 다녔지. 축구도 안 했고. ”

 

아빠가 옛날에 발레학교 다니던 추억을 떠올려서 천만다행이었다. 날 야단치려던 마음이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아빠는 미샤의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스카프를 두른 날 보고 웃더니 옷이 말랐으면 갈아입으라고 했다. 라디에이터로 달려갔더니 옷은 이미 다 말라 있었다. 아직 안 말랐다고 해볼까 하다가 아빠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솔직하게 부탁했다.

 

“ 미셴카, 나 이거 입고 가면 안 돼? ”

“ 입고 가. 근데 추울 텐데. 위에 걸칠 거 있는지 찾아볼게. ”

“ 괜찮아, 그냥 바지만 입어. 차 가져왔으니까. 양말도 신어야지. ”

 

아빠가 바지와 양말을 건네주며 내 스웨터와 점퍼를 뭉쳐서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는 미샤 쪽을 보면서 엄하게 말했다.

 

“ 너도 겉옷 입어. 비 와서 추워졌으니까 두꺼운 거 입어. ”

“ 왜? 집은 따뜻한데. 난방 때문에 더워. ”

“ 우리랑 같이 나갈 거니까. 여기 혼자 있지 마. ”

“ 그런 식으로 말하면 혼자 있고 싶어지는 법이야. ”

“ 아니, 넌 혼자 있으면 안 돼. 옷 입어. 지금. ”

“ 명령하는 거야? 나한테? ”

 

난 미샤가 우리 아빠에게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들었다. 두 눈이 너무 새까매져서 커튼을 친 것 같았다. 미샤가 화낼까봐 무서워서 여차하면 또 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부드럽게 말했다.

 

“ 아니. 부탁하는 거야. 넌 명령 같은 건 안 듣잖아. 누구 명령도. ”

 

미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옷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짧은 재킷을 걸치고 나왔다. 아빠가 모자와 스카프도 챙기라고 하자 순순히 따랐다.

 

아파트를 나가기 전에 미샤는 부엌으로 갔다. 보르쉬가 담긴 그릇을 내가 가져왔던 보자기로 싸더니 보온병과 함께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예쁜 옷을 입고 근사한 스카프를 두르고서 보자기로 싼 그릇을 들고 있는 미샤의 모습이 좀 우스웠지만 수프를 다 먹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 같아 뿌듯했다.

 

 

*   *   *

 

 

아빠는 날 먼저 데려다줘야 했다. 난 제발 엄마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아빠는 어차피 아파트 앞에 내려주고 갈 거니까 엄마랑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내가 혼날까봐 걱정되기보다는 가뜩이나 미샤를 싫어하는 엄마와 부딪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내겐 다행이었다.

 

미샤는 날 데려다주고 나서 극장에 내려달라고 했지만 아빠는 거절했다.

 

“ 수요일 거 에벨리나로 바뀌어서 연습해봐야 해. ”

“ 내일 열 시에 맞춰보기로 했잖아. ”

“ 어떻게 알았어? ”

“ 내가 연습실 사용 시간 바꿔달라고 콜랴한테 얘기했으니까. ”

“ 같이 맞춰보는 거 말고... 어제랑 오늘 계속 연습을 안 했어... ”

“ 극장에 안 간 것뿐이지 집에서는 계속 연습했잖아. 내가 널 몰라? 어제 병원 복도에서도... ”

“ 그건 다르잖아. ”

“ 어쨌든 오늘은 안 돼. 쉬어야 하니까. ”

“ 오늘도 하루 종일 쉬었어. ”

“ 오늘 먹은 거 말해봐. ”

“ 보르쉬. 쿨리치. 오렌지... ”

“ 쿨리치는 안 먹었잖아. 보르쉬도 두세 숟갈 먹다 말았겠지. ”

 

거울에 미샤의 놀란 얼굴이 비쳤다. 눈이 두 배로 커지고 공처럼 동그래져 있었다.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아무리 봐도 지나와 비슷하다니까. 내 주위 사람들은 왜 다 그렇지. ”

“ 그렇다는 게 무슨 뜻인데? ”

“ 감시꾼처럼. 쉬어라 먹어라 자라... ”

“ 필요할 때 쉬고 먹고 잔다면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겠지. ”

“ 보르쉬는 다 먹을 거야. 라라가 가져다 줬고 맛있으니까. ”

“ 그래. 집에 가자마자 먹어. ”

“ 정말 극장에 안 내려줄 거야? 조금만 연습하고 가면 되잖아. 못 믿겠으면 같이 가든가. 옆에서 감시하면 되겠네. ”

“ 아니, 난 너 믿어. 네 말은 항상 믿어. ”

 

아빠는 핸들을 옆으로 돌려 강변도로로 접어들면서 조용히 말했다.

 

“ 그냥 오늘은 네가 쉬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야. 우리 집에서. ”

 

미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난 안 믿는데. 한 번도 믿어본 적 없어. 나도, 내 춤도. ”

“ 그래. 그래서 그렇게 출 수 있는 걸지도 몰라. ”

 

난 아빠와 미샤가 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쯤 걷잡을 수 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손발이 풀려 와서 잠시 꾸벅꾸벅 졸았다. 그 와중에 꿈까지 꾼 것 같았다. 그 못된 고양이처럼 생긴 크리셴스카야가 나타나 보르쉬와 쿨리치를 내놓으라고 날 다그치는 거였다. 안 그러면 목을 치겠다고 협박했다. 붉은 여왕처럼...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그때 차가 다시 커브를 틀면서 어딘가에 부딪쳐 좀 덜컹거렸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뒤에서 미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모스크바는 정말 빙글빙글 돈다니까. 가도 가도 끝이 없어. 강에 뛰어들어 헤엄쳐가고 싶어. ”

“ 하긴 레닌그라드는 쭉 뻗은 길이 많지. 동네가 작아서 그렇지. ”

“ 여긴 너무 넓어. 복잡하고 지나치게 크고. 회색이고. 극장까지 걸어가지도 못하고. ”

“ 미안해, 미셰츠카. ”

“ 뭐가? ”

“ 볼쇼이로 데려와서. ”

“ 왜? 계약서에 사인한 건 난데.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야. ”

“ 그자들이 그런 식으로 널 부를 줄 알았다면 모스크바로 오라고 하지 않았을 거야. 절대로. ”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난 살짝 눈을 떴다. 하지만 차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빠의 옆얼굴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샤가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 그건 레닌그라드에서도 마찬가지였어. 그냥 그런 거라고. 일이잖아. ”

“ 아니, 그건 일이 아니야. 내가 잘못 말했던 거야. ”

“ 그래도 달라질 건 없어. 그러니까 이 얘긴 하지 말자. 안 그러면 정말 강에 뛰어들어서 헤엄쳐 갈 거야. ”

“ 여기 크레믈린 앞인 거 몰라? 뛰어들자마자 경비정에서 그물로 낚아 올릴 걸. ”

“ 그래서 모스크바는 별로라니까. ”

 

난 다시 꾸벅꾸벅 졸다가 아빠 말에 창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크레믈린과 바실리 사원이 강 너머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크레믈린에서 열린 축제에 작품을 두 번이나 올렸다. 아빤 정말 대단했다. 미샤도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빠는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직접 춤을 추는 쪽이 더 훌륭하다고 했다. 아빠도 미샤처럼 출 수 있었다면 춤을 그만 두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미샤가 작년에 크레믈린 축제 개막식에서 춤을 췄을 때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직접 꽃을 줬다. 다른 높은 사람들도 가까이 와서 칭찬을 했다. 그때 난 아빠 손을 잡고 무대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미샤에게는 다가갈 엄두도 못 냈다. 크레믈린보다는 극장이 훨씬 좋았다.

 

아빠가 부드럽게 말했다.

 

“ 수요일에 로미오 추고 나면 따로 같이 맞춰볼 거 있어. ”

“ 뭔데? 스파르타쿠스? ”

“ 아니. 그건 나랑 맞춰볼 필요 없지. 어차피 잘 출 테니까. ”

“ 그럼 뭐? 내가 못 출 것 같은 역이 뭔데? ”

“ 흥분하지 마. 우리 레퍼토리 중에 네가 못 출 역은 없으니까. ”

“ 노비코프도 안 주던데, 투우사. ”

“ 줄 거야, 시간 좀 지나면. 지금은 좀 참아. 벌써 웬만한 건 다 췄잖아, 넉 달도 안 됐는데. 지금 투우사까지 추면 우리 애들도 폭발할 걸. 정말 모스크바 강에 집어던질지도 몰라. ”

“ 놀랍지도 않아. 신입일 때 정말 그랬거든. 강은 아니고 저수지였지만. ”

“ 페름에서? ”

“ 어떻게 알아? ”

“ 지나에게서 들었어. 세레브랴코프가 그랬다면서. ”

“ 그랬지. 그때도 지나가 펄펄 뛰었어, 왜 두들겨 패주지 않았느냐고. ”

“ 왜 안 그랬어? 그땐 지금보다 훨씬 어렸잖아. 피가 거꾸로 솟았을 텐데. ”

“ 열 받긴 했는데 패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

“ 왜, 물이 깊어서? 수영 잘하면서. ”

“ 물이 너무 더러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 바닥도 진흙 뻘이라 한 번 빠지니까 나올 수도 없었고. 그래서 화낼 타이밍을 놓쳤어. ”

“ 하긴 저수지니까 더럽긴 했겠다. ”

 

아빠는 다시 한 번 핸들을 꺾었다. 이제 우리 동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새 거 시작했어. 6월에 올리려고. 아까 노비코프하고도 잠깐 얘기했어. 긍정적이더라고. ”

“ 나보다 노비코프와 먼저 얘기했단 말이야? ”

“ 어젯밤에 구상했으니까 그렇지. 안무도 이제 짜야 돼. ”

“ 음악은? ”

“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2번. ”

“ 네 취향 아니잖아, 프로코피예프는. 그것도 2번? ”

“ 난 그렇지만 너한테는 잘 맞잖아. ”

“ 아... ”

“ 새로운 거야. 백야하고는 달라. ”

“ 조금 페트루슈카 같은 거야? ”

“ 아니. 그럼 새로운 게 아니잖아. 그건 작년에 벌써 췄는데. 잘 췄지. ”

“ 그것도 네 취향 아니었지. 나한테 맞춰준 거였는데. ”

“ 맞춰준 게 아니야.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야. ”

“ 왜? ”

“ 너니까. 네가 그렇게 추는 걸 보고 싶었으니까. 그걸 출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었으니까. 그 프로코피예프도 마찬가지야. 완전히 새로운 동작들을 만들 거야. 나 혼자서는 어려워. 그러니까 도와줘. 페트루슈카 때처럼. 재미있을 거야.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거울에 옆얼굴이 비쳤다. 나는 불빛이 일렁이는 모스크바 강을 내다보고 있는 미샤의 눈가에 반짝이는 물기가 고여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미샤가 완전히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내 손을 살짝 토닥였다.

 

“ 라라, 겉옷 입어. 거의 다 왔잖아. ”

 

그래서 난 바로 앉아서 점퍼를 대충 걸쳤다. 미샤의 티셔츠만 입고 들어가면 엄마가 분명히 꼬치꼬치 캐물을 테니까. 그때 뒤에서 미샤가 낮게 노래하듯 말했다.

 

“ 강에 비친 불빛 좀 봐, 라루츠카. 보석 같아. ”

 

그래서 나도 고개를 돌려 창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미 멀어져 가는 바실리 사원의 알록달록한 지붕으로부터 모스크바 강의 검은 물 위로 환하고 예쁜 불빛들이 비춰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주 보던 풍경이었지만 미샤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 보석처럼 보였다.

 

“ 예쁘다. 레닌그라드 생각 나. 거기도 밤에 이랬는데. ”

“ 한밤중에 네바 강을 따라 걸으면 좋아. 강변을 걷다가 다리를 건너면 운하가 나와. ”

“ 그리보예도프 운하! 판탄카! 우리 같이 보트 탔어! 근데 갑자기 비 와서 머리가 다 젖었어. ”

“ 여름에는 안 그래. 비가 와도 금방 그치고 언제든 어디에든 빛이 있어. 한밤중에도 환해. 해가 없어도. 네바 강 위로 교회 종탑들이 길게 내려와, 천사상들도 반짝반짝 빛나. 백야가 되면 사방에서 보석들이 흩뿌려지는 것 같아. ”

“ 밝아도 보석이 잘 보여? ”

“ 가끔은. 아주 밝아야 빛을 볼 수 있어. ”

 

난 미샤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때 아빠가 차를 돌려 우리 집이 있는 골목 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내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미샤의 눈가에 비쳤던 물방울은 모스크바 강물의 보석들이 반사된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미샤는 어른이고 남자인데다 왕자님이었으니까. 왕자님은 나나 아냐처럼 울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파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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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5장에서 끝난다. 그건 내일..

 

일린과 미샤가 언급하는 '백야'와 '페트루슈카'는 둘다 일린이 미샤를 위해 안무해준 작품이다. 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 '백야'를 원작으로 주인공 청년과 나스첸카를 내세운 모던 발레로 일린은 76년에 키로프에 가서 게스트 안무가로 그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페트루슈카는 미하일 포킨의 원작 발레를 바탕으로 일린이 광대 페트루슈카의 비극적인 운명을 재구성한 10분짜리 모놀로그 발레이다. 일린은 76년에 미샤가 런던의 유력한 무용 페스티벌 경쟁 부문에 나가게 되자 그를 위해 그 작품을 안무했고 호평과 함께 미샤는 좋은 상을 받는다. 물론 저 두개의 발레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었음. 저 두 작품에 대한 얘기도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그 장편에 나온다.

 

에벨리나와 미샤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스비제르스키는 다른 글들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이다. KGB 출신이며 막강한 당 권력자로 소설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미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따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에벨리나는 오랫동안 스비제르스키의 정부였다.

 

미샤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 사실 이 사람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긴 하다. 이 사람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발췌해 보겠다.

 

좀 우울한 파트였기 때문에... 라라가 얘기하는 미하일 브루벨의 백조 공주 이미지로 기분 전환. 전에 두어번 올린 적 있지만..

 

 

 

라라는 미샤가 백조 공주를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맨처음 이 사람을 구상할 때 브루벨 그림에서 이미지를 좀 따오긴 했다. 그래서 그의 레닌그라드 친구 트로이는 맨 처음 10대의 미샤를 만났을 때 그가 그림에서 나온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나중에는 브루벨 그림을 떠올린다. 이 사람이야 사내아이니까 백조 공주보다는 유명한 브루벨의 악마와 더 닮았다고 해줘야겠지만.. 사실은 라라 말대로 백조 공주와 더 닮았을 거라고 비밀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미하일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

 

 

미하일 브루벨, 날아가는 악마

 

라라가 미샤의 침실에서 발견하는 스케치는 이 그림의 스케치이다. 물론 가상의 스케치임.. 이 날아가는 악마 그림은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미술관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그림 중 하나이다. 정말로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트레치야코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백조 공주였다면 러시아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과 금발의 가브리엘 이콘, 그리고 레프 박스트의 SUPPER였다.

 

.. 그리고 라라가 가져가는 수프 보르쉬. 내가 끓였던 보르쉬 사진 두 장. 전에 쓴 적 있지만 스뵤클라(비트), 양배추, 쇠고기 등을 넣어 만드는 우크라이나 수프이다.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다. 아플 때 먹으면 몸이 따뜻해진다.

 

 

 

**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네바 강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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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4. 3. 29. 18:46

보르쉬와 펠메니로 점심 중 russia2014. 3. 29. 18:46









시차 때문에 잠 설치고 후두염 약에 취해 오전에 잠깐 운하와 궁전광장 따라 산책하고 돔 끄니기 왔다가 2층 카페에서 늦은 점심 먹는 중.

의도한 건 아니지만 보르쉬와 펠메니, 아주 러시아적인 식사.

목이 아팠는데 따뜻한 수프 먹으니 좋긴 하다. 펠메니는 딱 러시아 펠메니.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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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