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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즈음에 에벨에 도착했다.



오늘은 비 온 후라서 창가에 볕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일주일 동안 안면을 트고 많이 친해진 서글서글하고 눈이 동그란 금발의 점원 아가씨와 밝은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내가 오면 메뉴도 안 줌 ㅋ 그리고 원래 홍차 시키면 우유 저그 주는데 내가 시키면 우유 저그도 안 줌.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거 알아서... 그래서 내가 '오늘은 메뉴 주세요' 라고 했더니 깜놀하는 분위기 ㅋㅋ



어제의 맥주 때문에 빈속에 카페인 마시기는 좀 그래서 속을 따뜻하게 하는 걸 먹어야 할것 같았다. 그래서 꿀을 곁들인 생강차를 시켰고 거기에 모짜렐라 토마토 루꼴라 페스토 베이글을 시켰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 베이글이 항상 생각난다... 참 맛있는데...










생강차에는 꿀과 레몬을 곁들여 주었고 너무나 센스 있게 레몬짜개에 레몬조각을 끼워주었다. 생강차는 집에서 내가 끓이는 것처럼 토막난 생강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딱 그 맛이다. 거기에 꿀을 전부 넣고 레몬즙도 다 짜 넣었다. 몇모금 마시자 몸이 후끈해지면서 땀이 좀 났다. 베이글도 무척 맛있었다. 숙취와 괴로움, 친구랑 약혼자가 떠난 슬픔에도 불구하고 생강차랑 베이글 맛있게 먹고 좀 힘을 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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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벨에 오래 앉아 있진 않았다. 내일 떠나야 하니 오늘은 좋아하는 카페들 순례하려는 생각이었으므로. 에벨에서 15분 도보 거리에 있는 도브라 차요브나에 가서 예루살렘의 추억이나 다른 신기한 이름의 차 마시고 바클라바 또 먹어야지 했다. 그런데 두둥!!! 갔더니 아직 오픈 전이었다. 일요일은 두시에 연다는 것이다. 한시간이나 더 기다릴 수는 없었고 심지어 빗방울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방에 우산을 두고 왔다는 것이 떠올랐다.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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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램을 타고 다시 말라 스트라나로 갔다. 카피치코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번에 와서는 카피치코에 가지 않았었다. 좀 묘한 이유였다. 카피치코는 무척 내밀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주인 아저씨 로만과 다정했던 점원 베트라와 나눈 이야기들이 좋았고 내게 위안이 되었지만 그당시 내가 많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았다. 에벨과는 좀 달랐다. 카피치코에 가는 것이 살짝 부끄러웠다. 또는, 다시 가기보다는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기도 했다. 에벨은 언제나 편안하게 드나들며 적절한 익명성과 적절한 친교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카페이지만 카피치코는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내밀하고, 그리고 조금 더 약해지는 곳이다. 아마 빈 테이블들이 많고 또 소음이 거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헬리초바에 내려서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비가 많이 왔다. 바람도 씽씽 불었다. 계속 더웠기 때문에 빨아서 말려놨던 여름 원피스 한장만 걸치고 있었는데 추웠다!!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챙겨나온 얇은 카디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막 뛰었다. 일요일이라 카피치코도 늦게 열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과 함께 뛰었는데 다행히 창문 너머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새까맣고 새하얀 카피치코 간판이 어찌나 반갑던지! 






주인 아저씨 로만이 있었다. '도브리 덴' 하고 인사를 하고 들어가자 메뉴판 두개를 가져오시며 체코어로 '체코 메뉴판 드리면 되죠?' 라고 묻는다. 그래서 '아니요 영어 메뉴 주세요' 라고 말했다. 로만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미 일년이 다 되어가는데다 내 스타일도 좀 바뀌어 있었고 이곳은 좀 한적해보이긴 해도 수많은 손님들이 오고 가는 곳이다. 살짝 섭섭했지만 동시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아마 부끄러웠기 때문인 것 같다.



주인 아저씨 로만은 여전히 키가 크고 어딘지 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과 다름없이, 오후에 찾아오는 말씨가 어눌하고 다리를 저는 약간 유로지브이 같은 남자가 오자 밝게 웃으며 맞아주었고 테이블에 함께 앉아 체스 비슷한 게임을 했다. 작년에도 그 모습을 보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진 않지만 친해지면 무척 따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



나는 다즐링과 메도브닉을 시켰다. 워머에 올려진 투박하고 이 빠진 세라믹 주전자와 손잡이 없는 찻잔, 그리고 52코루나밖에 하지 않지만 너무나 맛있는 이곳의 메도브닉이 나왔다. 나는 본시 투박한 도자기도 좋아하지 않고 이 빠진 그릇을 보면 빈정상하고 손잡이 없는 찻잔을 주면 싫어하는 사람이다(뜨거우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카피치코와는 놀랍게 어울린다...
















바깥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거세게 쏟아졌다. 카페는 두어 테이블 외에는 비어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차를 마셨고 메도브닉을 먹었고 문을 닫은 도브라 차요브나에 대해, 그리고 카피치코에 대해 낙서를 했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데 나는 따뜻하고 조용하고 한적한 카피치코 안에 앉아 향긋하고 뜨거운 차를 마시고 달콤한 메도브닉을 먹고 있었다.



이것은 에벨과는 다른 종류의 충만함이며 아마 다른 곳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행복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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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좀 그친 후 카피치코에서 나왔다. 카피치코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숙소로 갔고 30여분 정도 쉬었다. 그리고 긴 바지와 긴 티셔츠로 갈아입고 스카프를 둘러매고 노트북을 들고 다시 나섰다. 스카프 두장이나 챙겨왔고 트렌치코트도 챙겨왔었지 ㅠㅠ 카디건도 두장이나 챙겨왔어... 그런데 내내 엄청 더웠지... 흑흑... 트렌치코트는 한번도 안 입었고 가방 속에서 부피만 차지하고... 스카프도 오늘 처음 둘렀다. 검은 셔츠를 입기도 했거니와 비오는 우중충한 날씨라 흑백 스카프와 빨강주황 스카프 중 후자를 골랐음.



숙소 바로 근처에 있는 우 크노플리치쿠에 갔다. 가성비 제일 좋은 카페. 젊은 점원 아가씨가 좀 불친절하긴 하지만 주인 아주머니는 친절하다. 카피치코에서 홍차를 마셨으므로 레드베리 티를 시켰고 목도 말라서 사과주스도 시켰다.









작년에 이곳과 에벨에서 글을 좀 구상하고 조금 쓰기도 했었다. 한동안 바탕화면에 이곳의 빨간 입술 찻잔 사진을 깔아놓기도 했었다. 여기는 저렴한 가격에 비해 내부가 은근히 분위기 있고(좀 꽃무늬 시골풍이긴 한데 묘하게 어울림), 화분이 가득 놓여 있는 창 너머로는 빨간 트램 지나가는 게 보여서 좋다.



차를 마시며 글을 좀 썼다. 비가 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의외로 글이 잘 써져서 두페이지를 쓸 수 있었다. 작년에 여기서 구상했던 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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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크노플리치쿠에서 나와 살짝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갔다. 빗방울이 약간씩 떨어지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서 꽤 싸늘했다. 스카프를 펼쳐서 숄처럼 어깨와 목 전체를 감쌌다.



추워서 뭔가 따뜻한 것,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한번 갔었던 우예즈드 근처의 중국식당이 생각나서 거기 갔다. 여기 마파두부에는 돼지고기를 빼달라면 빼준다. 베지테리안 메뉴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과 흰밥과 자스민 차를 시켜서 먹었다. 어제의 맥주와 비프버거가 좀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흑... 지난주에 영원한 휴가님과도 얘기 나누었지만 나는 체코에서는 못 살것 같아.. 음식이 너무 입에 안 맞아서... 신선한 야채도 없고 해산물도 별로 없고 짜디짠 소시지와 햄과 돼지고기와 맥주 천국이니...



몇년 전에 프라하에 두어달 살때는 직접 장을 봐서 음식 해먹긴 했지만 그때도 '아아 해산물...' 하고 괴로워했었다. 어디든 바다 있는 나라에 살아야 해...


..



밥을 먹은 후 이제는 반대로 중국음식의 맛을 없애기 위해 안젤라또에 갔다. 오늘은 쌀쌀해서 바깥까지 줄이 늘어서 있진 않았다. 마파두부로 자극된 입안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역시 스트라치아텔라~ 추워서 안젤라또 안에 앉아서 스트라치아텔라 먹음. 역시 맛있었다. 올리브유 바질이 맛있긴 했지만 그래도 스트라치아텔라가 제일 좋다.





.. 그러고 보니 오늘의 이 두번째 파트는 전부 먹고 마신 얘기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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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오후 공항 가는 택시를 예약했고 방에 올라와서 씻은 후 가방을 쌌다. 이번에는 산 게 별로 많지 않았고 찻잔 몇개도 그때그때 뽁뽁이로 싸놓아서 가방 금방 꾸릴 줄 알았지만 역시나 시간 꽤 걸렸다. 가방 다 싸고 나니 녹초...



아마 돌아가기가 싫으니 가방 싸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듯.. 흐흑..



방에 돌아와 와이파이를 잡아보니 료샤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잘 도착했고 레냐는 자기 엄마에게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그냥 확 집어치우고 내일이라도 그냥 뻬쩨르로 오라고 농담을 하고 있었다. ㅋㅋ 그래서 나는 '프라하는 음식이 맛없고 뻬쩨르는 6월에 눈이 오는데 선택지가 너무 적다...' 고 답을 해주었다.



내일은 조식 먹고 체크아웃한 후 에벨에서 시간 보내다 공항에 가야겠다. 여유가 있으면 도브라 차요브나에 먼저 갔다가 에벨에서 점심 먹어도 되긴 하는데 좀 생각 중...


아아... 휴가가 끝났어어어어...




** 카피치코에서 그린 스케치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6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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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오후에 카페에서 남긴 것처럼 오전엔 늦게 일어났고 조식은 근처의 cafe lounge라는 곳에서 모짜렐라 토마토 야채 파스타를 먹었다.







그리고 골목들을 좀 산책한 후 얼마 전 발굴한 저렴하고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에 가서 초콜릿 케익 곁들여 차를 마셨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아니어서 제목(가제)와 처음의 얼개, 그리고 가상의 목차와 아마도 쓰게 될 에피소드들의 제목들만 늘어놓았다.


가능하다면 내일부터는 어떤 에피소드이든 쓰기 시작하고 싶다. 이번 글은 쓰는 순서와 실제 목차가 많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잘 써지는 내용부터 시작하면 된다. 아이스크림 골라 먹듯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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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쯤 방에 잠깐 돌아왔다. 원래는 금방 나가려고 했는데 들어오니 또 너무너무 피곤하고 다리가 아프고 몸이 무겁고 졸려왔다. 운동부족인가... 간만에 매일매일 나돌아다니고 햇빛을 쬐어서 그런가 침대만 보면 드러눕고 싶고 다리가 욱신거린다.


한시간 반쯤 침대에 누워 에어컨 쐬면서 멍때렸다. 원래는 다른 카페로 가서 글을 이어 쓰려고 했는데 에너지 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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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반쯤 배가 고파져서 방을 나섰다. 얼마전 발견해놓았던 중국집에 갔다. 100코루나 안되는 가격에 사천식 닭고기를 곁들여주는 밥이 있어 그거랑 산라탕이나 게살수프를 같이 먹어볼까 했는데 사진을 보니 게살수프가 너무 맛이 없어보였고 심지어 게맛살과 통조림옥수수가 들어 있었다. 말도 안돼... 게맛살을 너무 솔직하게 썰어서 둥둥 띄워놨잖아... 그걸 보고 어떻게 주문해...



그래서 그냥 마파두부랑 밥 시킴. 원래 밖에 나와서 한국음식 그리우면 항상 중국집 가서 마파두부랑 밥 시켜먹는데 돼지고기 알레르기가 생긴 후 이것도 위험해졌다. 다행히 이 집은 고기 유무를 선택할 수 있어 뺴달라 했다. 베지테리안 메뉴에 들어 있어 그런가보다... 돼지고기를 뺀 건 좋은데 그만큼 풍미는 적어지고... 굴소스 맛이 너무 많이 났다. 마파두부는 굴소스로 맛 내면 안되는데 -_-






하여튼 여기 와서 첨으로 흰밥을 먹게 되어 정신없이 먹긴 했다. 맛은 그냥저냥이었고 하나도 안 매웠지만 그래도 먹고 나니 심지어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혔다. 뭐야, 기력이 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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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얹어먹었지만 마파두부가 짰기 때문에 이를 핑계로 젤라또 사먹으러 갔다. 이틀 전 이름 때문에 신기해서 찍어놓은 '서양배와 화이트와인'을 골랐다. 이건 젤라또가 아니라 소르베이다. 실은 소르베는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지만 덥고 갈증나고 짠거 먹었으니 괜찮을 거 같아서.






신기했다. 진짜 배 맛이 났다. 그것도 많이 났다. 우리나라 배 말고 서양배 :) 화이트와인 맛은 잘 모르겠다만. 서양배를 그대로 갈아서 거기에 좀더 달콤하고 새콤하고 상큼한 맛을 가미한 느낌이었다. 소르베 특유의 샤샤샥 하고 공기처럼 스르륵 녹으며 알알이 스러지는 촉감이 전해져 왔다. 짠 거 먹고 난 후 입가심하기 좋았다. 그래도 나는 역시 부드러운 젤라또 쪽이 좀더 취향이긴 하다. 다음엔 무슨 라벤더 어쩌고 하는 걸 먹어봐야지. 신기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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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맛 소르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뒷골목을 지나 캄파 쪽으로 갔다. 머물고 있는 우예즈드 거리 뒤로 나가서 좀 걸어가면 블타바 강가의 캄파 공원과 광장, 그리고 카를 교로 갈 수가 있다. 저녁 시간이니 캄파 쪽에서 석양이나 볼까 하고.


천천히 걸었다. 전에 이 동네를 걸었을땐 겨울이었고 춥고 싸늘해서 한적했는데 지금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근데 나는 이런 더위보단 그때 춥고 싸늘했던 캄파가 더 맘에 들었다...


카를 교 쪽으로 드디어 올라갔다. 도착한지 일주일만에 카를 교에 옴. (별로 안 좋아해서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음) 역시 관광객들로 바글바글.


근데 석양은 확실히 말라 스트라나 쪽 카를교 입구보단 저쪽 반대편의 카를로바 골목 쪽 다리 입구에서 봐야 풍경이 근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지는 방향도 그렇고... 그쪽에서 봐야 프라하 성 쪽으로 해가 지고 블타바 강물 위로 석양이 드리워지는 걸 볼 수 있는데 나는 오늘 반대쪽에 있어서 역광도 그렇고 프라하 성과 미쿨라쉬 성당에 석양이 다 가려져서 안 보였음 ㅠㅠ





그래서 석양과 역광을 배경으로 드리워진 그림자 사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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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진만은 아쉬우니... 반대방향이라 석양 느낌은 별로 안 나지만 그래도 부드럽고 미묘한 황금빛 그림자가 드리워진 블타바 강과 구시가지 쪽 풍경도...










이후 다시 캄파 쪽으로 내려와 천천히 걸었고 페트르진 공원 쪽으로 조금 올라가서 마지막 석양을 좀 보다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8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아이고 다리 아프고 더워라...


씻은 후 피곤해서 침대에 한동안 누워 있다가 이제 사진 옮기고 메모 적는 중이다.


근데 왜이렇게 피곤한 거야. 체력고갈인가 ㅜㅜ 노화인가봐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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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님들, 연휴 잘 보내시고 풍성한 한가위 맞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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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