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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누레예프'에 해당되는 글 17

  1. 2019.12.08 2집 창가에서 티타임, 연말 장식 약간, 새 찻잔, 하름스와 누레예프
  2. 2019.11.27 누레예프 키로프 시절에 대한 책 + 영화 The White Crow 짧은 메모 4
  3. 2019.03.17 생일 축하해요 루딕
  4. 2018.01.21 발란신, 아주 짧은 메모 5
  5. 2017.10.05 10.4 수요일 밤 : 장소특정적 향기들, Le Parc(프렐조카주) 짧은 메모, 날씨 엉엉 2
  6. 2017.07.11 누레예프 초연 취소 관련 볼쇼이 극장 측 입장 등(노어/영어 기사) + 추가
  7. 2016.12.10 보드카를 따지 않는 건 죄악, 옷 빌려입기, 위선자 30
  8. 2016.11.14 수도관 터진 날, 푸쉬킨,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33
  9. 2016.08.28 천사가 날개로 쓰다듬고 지나간 사람, 렐랴의 인터뷰 54
  10. 2016.05.15 잠시 : 교조주의, 강령으로서의 예술, 세 개의 메모 - 쓰던 순간, 1년 후, 3년 반 후 55
  11. 2016.03.27 극장의 날 기념 1) 마린스키 구관 내부 사진들 + 무용수 화보들 2
  12. 2016.01.21 오랜만의 무용수 화보 몇 장 : 누레예프, 말라호프, 비슈뇨바, 슈클랴로프
  13. 2015.01.06 루돌프 누레예프 사망 22주기, 누레예프 화보 몇 장 2
  14. 2014.10.31 금요일 밤의 무용수 사진 몇 장 : 누레예프, 비슈네바, 슈클랴로프, 테료쉬키나, 노비코바
  15. 2014.08.21 분장실의 무용수들 : 로파트키나, 누레예프,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16. 2014.08.06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영상 클립(누레예프&폰테인, 슈클랴로프&테료쉬키나), 마린스키 화보 몇 장
  17. 2014.08.06 마린스키 발레 :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리뷰(빅토리야 테료쉬키나 &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4




일요일 애프터눈 티는 오랜만에 2집 창가 테이블에서. 







지난달 페테르부르크에서 사온 로모노소프 찻잔 마지막. 색깔도 그렇고 화려한 것이 신상품으로 딱 연말과 새해 시즌에 맞춰 나온 느낌이다. 이것은 별도 박스에 황금빛 종이 리본도 달아주었다. 뽁뽁이로 싸서 캐리어에 쑤셔넣어야 했으므로 종이 리본은 버리고 왔고(쫌 아까웠지만 남에게 줄 것도 아니고 내거니까 딱히 쓸모없음) 금색 줄무늬의 이쁜 상자에는 초콜릿과 뽁뽁이로 싼 향수를 넣어서 가져왔다. 









뽀드삐스니예 이즈다니야 서점에서 골라온 새해 일러스트 엽서. 러시아는 정교라서 개신교나 카톨릭의 12.25 크리스마스가 명절이 아니고 1월 1일이 가장 큰 명절이다. 이 시리즈 엽서는 두 장 샀는데 한 장은 화정 집에 두고 이것만 어제 가져왔다. 아직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2집에서 보낼지 화정 집에서 보낼지 알 수가 없음. 모두가 업무 일정에 달려 있음. 오늘 간만에 2집에서 휴일을 보내니 아주 조금만 연말 장식을 해보았다. 이 엽서는 블라인드 당김줄에 달아놓았고....






이건 에르미타주 샵에서 건져온 윌리엄 모리스의 크리스마스 천사. 전체 태피스트리 그림에서 천사만 따로 잘라낸 엽서인데 이게 더 마음에 들어서 부분엽서를 골랐다. 



책상 위 선반에는 작년에 프라하에서 건져왔던 크리스마스 쿠키를 얹어 두었다. 그 사진은 오늘 메모 포스팅에서 따로. 






어젯밤에 내려와서 꽃을 살 시간이 없었음. 그래서 거의 한달째 꽂아둔 말린 꽃과 열매로 대체. 그런데 나름대로 크리스마스 분위기임 :)





초점을 뒤의 엽서에 맞춘 사진 한 컷 더. 



엽서 아래에 보이는 러시아어들은 2015년도 마린스키에서 슈클랴로프님이 췄던 라 바야데르 프로그램. 사인은 작년에 받았다. 저 주황빛 도는 붉은 글씨가 발로쟈님 사인. 꽃돌이님이 사인해주신 프로그램들은 화정 집이랑 2집 여기저기에 이렇게 액자에 넣어 고이고이~ (저는 팬이니까요~)








이번에 사온 러시아 작가 머그컵 마지막. 다닐 하름스. 



근데 아무리 봐도 이 하름스는 본모습보다 너무너무 미화되고 잘생겨보임!!! 









하름스 컵 가져온 기념으로 간만에 하름스 선집 좀 뒤적이며 다시 읽음. 






펼쳐진 페이지는 가장 좋아하는 이 사람 작품 중 하나인 '즈듸그르 압쁘르'~ 






하름스는 몇편만 다시 읽은 후 어제 챙겨온 누레예프 전기 읽기 시작. 재작년인가 사온 건데 다 읽지는 못해서 어제 들고 왔다. 내겐 서로 다른 나라의 다른 사람들이 쓴 누레예프 전기가 여러 권 있는데 이건 러시아 평론가가 쓴 전기이다. 많이 깊고 진지하다기보다는 그냥 평이해서 좀 아쉬웠다. 아마 그래서 그때도 단숨에 끝까지 읽어치우지 않았던 듯(사실 이젠 노어보다 영어로 된 책 읽는게 쫌 더 편하긴 함.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게 된 것이 아니고 그저 노어 실력이 퇴화해서 그런 것임 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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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주 아끼는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읽고 있다. 옛날에 러시아에 처음 연수가서 발레를 보기 시작하던 무렵 마린스키 샵에서 발견해 고민하다 아주 큰맘 먹고 샀던(당시 물가로 상당히 비쌌음) 책인데 누레예프가 망명하기 직전, 키로프 극장에서 보낸 3년에 대한 동료들과 친구들의 회상록 모음집이다. 누레예프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95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되었고 영어번역본과 러시아어본이 같이 나왔었다. 친구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레닌그라드 시절 사진들도 실려 있다. 당시엔 아직 러시아어보다 영어가 편해서 영어 번역본을 샀는데 나중에 엄청 후회했음. 그런데 오늘 다시 뒤적이며 읽다 보니... 흐흑, 지금은 또 영어 읽기가 더 수월한 것인가 싶기도 엉엉...

 

 

이 책은 오랫동안 간직해왔고 닳도록 읽었다. 이후 누레예프에 대한 여러 전기나 소설들도 출간되어 이것저것 구해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을 가장 아낀다. 그리고 글을 쓸때도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맨 앞에는 누레예프가 자신이 파리 공항에서 망명하던 순간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 짧은 에세이가 담겨 있다. 읽을 때마다 좀 울컥하고 감정이 북받치는 뭔가가 있다.

   

  이번 뻬쩨르 여행 때 아에로플롯을 탔더니 기내영화에 화이트 크로우가 있어서 좋아하며 봤었다. 영문명 The white crow 인데 레이프 파인즈가 감독을 맡았고 카잔 출신 발레 무용수 올레그 이벤코가 누레예프 역을 맡았다. 메인 사건은 바로 1961년 6월 파리 공항에서 누레예프가 망명하는 이야기이고 거기에 그의 어린 시절과 키로프 시절이 절반쯤 다큐, 절반쯤 픽션으로 섞여 있다. 굉장히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국내엔 들어올 기미가 안 보여서 나중에 아마존이나 뭐 그런걸로 dvd 주문할까 했는데 기내영화로 있어서 영어자막 틀어놓고 봤다. 영어와 러시아어가 혼재되어 있는데 주로 러시아어로 진행된다.  

 

영화는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완성도가 불균질했고 누레예프의 전기적 특성과 망명 당시의 순간들에 대해 너무 문자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다 보니 어딘가 삐걱거렸다. 무엇보다도, 지난 세기 가장 위대한 무용수 중 한명, 남성 무용수로서는 전무후무했던 사람을 다루는데 춤이 너무 적었다. 그러면 한 인간으로서의 누레예프를 심도깊게 해석했는가, 그것도 조금 부족해서 양쪽으로 좀 아쉬웠다. 레닌그라드(지금의 페테르부르크)와 바가노바, 키로프(마린스키) 극장에 대한 이야기도 좀 부실한 편이라 그것도 좀 아쉬웠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저 책을 많이 참고했구나'(저 책에 등장하는 소련 시절 누레예프의 친구들도 영화에 나온다) + '어쨌든 서방 리버럴의 시선으로 가급적 충실히 사실을 재현하면서 픽션을 섞어보려 했구나' 였다. 그리고 '올레그 이벤코는 화보로 볼 때보다 영상으로 보니 누레예프를 외모적으로 좀 더 닮았네' 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둘다 타타르 혈통이라 그런 것 같다.

   

 

결론은, 음, 국내에 디뷔디 출시되면 그래도 누레예프에 대한 애정 때문에 주문할 것 같긴 하고... 이 영화가 좀 아쉬워서 세레브렌니코프가 연출해서 지금 볼쇼이의 고정 레퍼토리로 일년에 두어번 올라오고 있는 발레 누레예프를 보러 가고 싶다. 가급적이면 블라디슬라프 란트라토프보다는 아르춈 옵차렌코 주역으로. (둘중 옵차렌코를 택하고 싶은 것은 순전히 이쪽이 내가 좋아하는 외모 취향에 더 가까워서. 옵차렌코는 이 발레 이전에 누레예프에 대한 다큐 재연 필름에서 그 역을 맡기도 했었음. 근데 사실 옵차렌코는 누레예프 외모와는 그리 닮은 편은 아니고 체형도 너무 늘씬하고 길다)

  

 

 

 

 

 

 

이게 누레예프의 회상 마지막 부분. 일부만 찍어봤음.

 

 

 

 

 

영화 화이트 크로우에서 누레예프 역을 맡있던 무용수 올레그 이벤코. 사진은 최근 이 사람이 자기 인스타에 올린 것.

 

 

 

 

마지막 이미지는 당연히, 유일무이하고 위대한 무용수. 루돌프 누레예프 사진. 1962년이니까 망명 1년 후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 너무 좋아한다. 아름다움과 깊이, 젊음, 말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모두 공존하고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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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9. 3. 17. 21:29

생일 축하해요 루딕 dance2019. 3. 17. 21:29




오늘은 루돌프 누레예프의 생일이다. 1938년 3월 17일.



유일무이한 무용수, 위대한 예술가, 한 인간. 불. 루딕. 생일 축하해요.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워요. 










.. 



그건 그렇고 누레예프의 망명을 다룬 영화 The White Crow 기다리는 중이다. 최근 영국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이 영화 과연 우리 나라에서 개봉할지 잘 모르겠음. 주역을 맡은 무용수 올레그 이벤코가 루딕과 약간 닮긴 했는데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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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8. 1. 21. 21:04

발란신, 아주 짧은 메모 about writing2018. 1. 21. 21:04

 

 

 

" 나는 침묵이다. 나는 오로지 움직임을 보고 소리를 듣는 존재이다. "

 

 

약간 의역이 섞여 있지만, 조지 발란신이 했던 말이다. 팔로우하는 해외 무용잡지 트윗에서 오늘 읽음. 개인적으로 발란신의 안무 스타일과 작품들을 좋아해 본 적이 거의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향 때문이고 대단한 인물이긴 하다. 그리고 이 말은 무척 가슴에 남는다.

 

 

아마도 내가 이전에 미샤의 입을 통해 이런 고백을 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인물, 무용수이며 안무가, 그리고 좀처럼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고 1인칭 시점의 소설로는 서술되어 본 적도 없는 인물. 그런 그가 거의 유일하게 자신과 춤에 대해 내밀한 고백을 하던 순간이었다. 그것은 위에서 발란신이 이야기했던 내용과는 다르다. 나의 미샤는 발란신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안무가이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그들은 만나고 있다. 혹은, 내가.

 

 

그곳에서 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냐,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냐. 그곳에는 빛이 있고 어둠이 있겠지. 황혼도, 수면도, 어쩌면 눈보라도. 하지만 난 단지 움직임일 뿐이야. 계속해서 뛰고 날고 떨어지고 넘어지는 것 뿐이야. 멈추면 사라질 테니까. 

 

 

이것이 미샤가 춤을 추는 이유이며 춤을 추는 방식이고, 또한 그가 넘어지고 추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미샤의 저 고백이 포함된 에피소드는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링크는 아래 :

 

http://tveye.tistory.com/4720 (교조주의, 강령으로서의 예술, 세개의 메모)

 

..

 

위의 사진은 루돌프 누레예프 :)

 

:
Posted by liontamer





오늘도 추웠고... 비가 왔다. 엉엉... 보통 아무리 겨울에 와도 햇빛 쨍 하는 날이 며칠 있었는데 이번엔 아주 제대로 걸렸다. 하긴 올 때도 10월이 제일 날씨 안 좋을 때니까 잘못하면 정말 비만 오겠다 싶긴 했었지.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ㅠㅠ



오늘까지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다. 아침에 진통제도 먹었는데 이상하게 효과가 없었다. 나는 부스코판보다 타이레놀이 더 잘 듣는 편인 것 같다 ㅠㅠ 두통까지 같이 겹쳐서 그런가보다. 결국 오후에 타이레놀을 두알 주워먹었다.



근처 빵집인 부셰에 가서 연어 오믈렛과 크루아상으로 아점을 먹었다. 무척 맛있었다. 올때마다 들르는 곳이다. 고스찌 바로 근처에 있고. 여기는 특히 주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료샤도 여기 빵을 좋아한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슬퍼졌다. 수도원 가고 싶었지만 계속 날씨가 안 좋고 빗방울까지 흩뿌리니 방도가 없다. 근처 서점에 가서 귀여운 엽서와 자석 따위를 좀 사고, 쭉 걸어서 돔 끄니기에 갔다. 항상 들르는 극장 서적 코너에 가니 누레예프에 대한 새 전기가 나와 있어서 그걸 샀다. 누레예프 전기야 여러권 읽었고 또 워낙 많이 나왔지만 러시아 사람이 쓴 거라서 우파랑 레닌그라드 시절에 대한 좀더 자세한 얘기가 있나 싶어서.









힘들고 머리가 너무 아파서 조금 더 걸어가 그랜드 호텔 유럽에 갔다. 문지기 아저씨 계시면 인사해야지 했는데 그분이 안 계셨다. 쉬는 날인가... 메조닌 카페에 갔다. 나는 이 카페보다는 아스토리야의 로툰다를 더 좋아하지만(차도 그렇고 디저트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아스토리야 쪽이 더 좋다) 그래도 소파가 편하다.



아스토리야와 그랜드 호텔 유럽은 둘다 특유의 냄새가 있다. 전자는 욕실 어메니티에서 나는 화이트 머스크 향이다. 일반적인 화이트 머스크보다 좀더 부드럽고 은은해서 혹시 페라가모에서 이 향수를 시판하고 있다면 사고 싶다. (여기는 페라가모 어메니티를 쓴다)



그랜드 호텔 유럽의 향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호텔에서 조향해서 방향제와 향수로 쓰고 있는 '그랜드 호텔 유럽' 향이다. 이건 조금 아저씨 스킨 향이 나는데 나쁘지 않다. 여기서 묵으면 체크아웃할때 10밀리짜리 미니어처를 선물해주는데 화정 집 화장실에 놔뒀다. 두번째 향은 역시 욕실 어메니티에서 나는 향인데 이건 아스토리야보다 조금 더 비누 냄새와 시트러스 냄새가 섞여 있다. 여기서 쓰는 어메니티는 elemis이다. (철자가 맞는지 갑자기 헷갈리네) 유럽 호텔에 마지막으로 묵은 게 벌써 2년도 더 되긴 했지만(요즘은 좀처럼 저렴하게 나오지를 않아서ㅠㅠ) 그래도 페테르부르크 올때마다 여기 들르곤 한다. 카페나 바에 가기도 하고 급할때 로비 화장실에도 간다(ㅋㅋ) 로비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핸드로션을 바르면 딱 그 향기가 난다. 비누와 시트러스가 섞인 냄새. 그러면 갑자기 '아, 여기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아스토리야의 화이트 머스크향이 더 좋긴 하지만 그랜드 호텔 유럽의 향기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메조닌 카페에 가서 다즐링과 에클레어를 시켜놓고 늘어져 있었다. 너무 피곤했다. 스케치를 몇장 그렸다. 누레예프 책을 조금 훑어보다가 좀 졸았다. 나중에 료샤가 왔다. 오자마자 내가 반쪽밖에 안 먹었던 에클레어를 한입에 홀랑 해치웠다 -_- 그리고는 빨리 볶음너구리와 맥심을 또 내놓으라고 난리 ㅠㅠ 그래서 호텔로 돌아왔다. (볶음너구리 네개 가져왔는데 그때 하나만 끓여준 후 나머지를 쥐어주지 않았었다 ㅋㅋ)



료샤에겐 볶음너구리 끓여주고 나는 조그만 유부우동 컵라면을 먹었다. 맥심을 타 먹이고 나는 수퍼에서 산 모르스를 마셨다. 그리고 극장에 갔다. 오늘도 마린스키 신관이었다.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Le Parc를 보았다. 무대에서 꼭 한번 보고프던 작품이었다. 영상으로만 봤기 때문이다. 원체 마지막 듀엣이 유명한 터라 전체 작품은 몰라도 '아 그 공중키스' 하며 끄덕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료샤는 어제의 악몽(야로슬라브나 -심지어 3막, 2시간 40분!- 보다가 꿈나라로...)에 괴로워하며 '나 오늘은 보지 말까?' 라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은 너도 맘에 들 거야. 야하거든' 이라고 말해주자 료샤가 눈을 반짝이며 '그래?' 하고 좋아했다. 사내놈 -_-



티켓을 끊고 나서 한참 후에야 배역이 공지되었다. 오늘 주역은 티무르 아스케로프와 크리스티나 샤프란이었다. 티무르 아스케로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무용수라 툴툴댔다. 슈클랴로프님이야 뮌헨에 가 있지만... 세르게예프가 춰주길 바랬다고... 아니면 귀여운 티모페예프라도... 그 다음날 배역은 올레샤 노비코바와 잰더 패리쉬였다. 배역 안 나왔을 때 원래 오늘 거랑 내일 것 중 뭐 끊을까 하다가 앞에 하는 쪽이 더 괜찮은 배역이겠지 싶어서 끊었던 건데...



공지된 배역을 보고 정말로 진지하게 다음날 거로 바꿀까 했었는데 잘 생각해보니 커플 케미스트리는 아스케로프 샤프란 쪽이 나을 것 같고, 게다가 나는 티무르 아스케로프가 프린시펄 승급했을때도 기가 막혔지만 잰더 패리쉬는 더더욱 그랬으므로... 그래, 욕망이 들끓는 작품이라면 뻣뻣한 나무토막 패리쉬보단 차라리 느끼한 티무르 아스케로프가 낫다 싶었다. 미안해요 노비코바.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난 슈클랴로프님과 노비코바의 이 작품 듀엣 영상을 보았을때도 큰 감흥이 없었고 '둘이 엄청 노력한다' 는 생각만 들었던 터라... 나에게 노비코바는 별로 섹시한 느낌이 들지가 않아서 그냥 표 안 바꿈. (나 노비코바 무척 좋아하는데 ㅠㅠ)



첨엔 배역 발표 전이라 혹시나 세르게예프를 비롯해 볼만한 무용수가 나오려나 싶어 앞줄 끊었었는데... 하여튼 그래서 앞줄에서 봤다. 이번에 끊은 발레 표들 중 젤 앞줄이다. 슈클랴로프님이 가버려서 이제 악착같이 앞줄 끊는 짓은 별로 안 하고 있음 ㅠㅠ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영상보다는 확실히 무대가 낫다. 하지만 나를 확 사로잡는 매력은 덜했다. 그리고 이건 딱 프랑스 안무가에게서 나올법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작품이 나왔을때인 90년대에 봤다면 확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90년대에 나왔던 육체와 욕망을 다룬 작품들에서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에이즈 시대에 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나는 그 시기와 그 주제에 많이 끌렸었고 사실 미샤를 처음으로 떠올리고 글을 구상했던 때 그는 바로 그런 시기에 발레단을 운영하고 안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녀석은 80년대 초의 시골 가브릴로프에 갇혀 있어 ㅠㅠ) 하여튼 그 시기에 나온 작품들 중 내가 많이 좋아하는 건 의외로 나초 두아토의 Remanso이다.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소품이다. (심지어 내가 두아토 안무작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Le Parc는 물론 다르다. 그리고 뛰어난 작품이다. 시선을 빼앗기도 하거니와 유머도 넘친다. 마지막의 에로틱한 듀엣은 무대로 보니 좋았다. 걱정했던 티무르 아스케로프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잰더 패리쉬보다는 더 나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샤프란은 너무 기다란 거 빼고는 역할에 어울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다 보고 나니 '슈클랴로프나 비슈뇨바가 추지 않는 한 다시 보지는 않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작품 보는 내내 남성적 시선이 좀 불편하게 느껴졌다. 욕망에 눈뜨는 여성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체적으로 욕망을 탐험하게 된다는 주제를 표방하고 있긴 한다만 전반적인 안무도 그렇고 배경도 그렇고 어딘가 내내 피상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란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영상을 볼 때보다 무대를 보니 더 그런 느낌이었다.



료샤는 정말 안 졸았다. 이게 막간 휴식 없이 1시간 40분 지속된다는 사실에 그는 고뇌하였고 1장에서는 좀 지루해 했으나 본격적으로 남녀들이 유혹을 펼치는 2장부터는 재밌게 보았다. 마지막의 에로틱 듀엣에 대해선 살짝 설명만 해주었는데 그걸 보기 위해 그는 열심히 기다렸다(뭐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렇고) 유명한 공중키스(여자가 남자의 목에 두 팔을 감은 채 격렬하게 입을 맞추고 둘은 빙글빙글 풍차처럼 돈다. 이때 남자 무용수의 손은 여자를 받쳐주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목에 팔을 감고 오로지 키스만으로 허공에 수평으로 뜬 채 빙그르르 돈다. 이거 볼때마다 '남자 목이랑 허리 뿌러지겠다... 여자 복근 엄청 생기겠다' 이런 생각이 든다 ㅋㅋ



료샤도 공중키스 씬에서 입을 벌리고 보더니 끝나고 나오면서 '우와 저 남자 좀 짱이다. 역시 키도 있고 덩치도 있어서 그런지 네가 좋아하는 얼굴만 예쁜 슈클랴로프 따위보다 훨씬 힘도 세고 남자답구나. 그래서 여자를 목에 매달고 막 도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발끈해서 나는 '뭐야! 슈클랴로프도 저거 췄어! 똑같은 거 췄다고! 목에 매달고 돌았다고!' 하고 외쳐주었다. 료샤는 '쳇... 걔가 추면 이입 안될거 같음' 이런다. 근데... 사실 이게 료샤 말이 좀 맞는게... 나는 슈클랴로프가 이 바람둥이 유혹자를 추는 게 정말 이입이 안됐다. 아무리 바람둥이 연기를 해도 누나들에게 휘둘리는 청순한 로미오처럼 보여서... ㅋㅋㅋ



커튼콜 사진 두어 장. 몇장 안 찍었다. 앞줄 오른쪽 사이드 자리였다. 그래서 무대가 비스듬하게 찍혔다. 대충대충 찍어서..... 이때 료샤는 또 '거봐 슈클랴로프 아니니까 앞줄인데도 사진 안 찍네' 하고 놀렸음. 야! 그것이 팬심이란 말이야!!! 바보멍충이!!!! (얼마나 놀림받을지 뻔히 알기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볼뽀뽀받은 얘긴 절대 안 해주고 있음 ㅋㅋ)










...



날씨가 안 좋아서 너무 슬프다고 하자 료샤가 '이런 곳에서 평생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라고 한다... '그래도 너네는 백야 있잖아 ㅠㅠ 우리는 여름 완전 수증기 찜통이야' 라고 하자 '맞아 우리는 여름 좋아' 라고 또 납득한다. 하지만 곧이어 '너네는 볶음너구리랑 맥심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잖아' 라고 함 ㅋㅋ



내일은 드디어 레냐 본다 :)))


:
Posted by liontamer





초연을 앞두고 갑자기 취소되어 버린 볼쇼이 발레단의 신작 '누레예프'에 대해 극장장 블라지미르 우린이 어제(월요일) 극장 측 입장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공연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2018년 5월 4일~5일에 무대에 올리겠다'는 것이다. 아래는 sobaka.ru의 기사(러시아어). 그 아래에는 영국의 댄스매거진 기사 링크와 마지막 문단 발췌.(영어)



이 사건에 대해 며칠 전 포스팅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6732




번역할까 하다가 피곤해서 그냥 원문 위주로 올린다. 이 작품에는 신체노출이 많고 누레예프의 전라 사진도 등장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행간 : 러시아 당국의 검열 암시) 주요 내용은 진하게 표시해두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러시아 문화부 장관 블라지미르 메진스키의 개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러 문화부에서는 검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의 댄스매거진 영문 기사를 보면 좀더 강력한 추측이 나온다. 사실 다들 짐작하고 있는 이유들이다. 1. 소련 시절 서방으로 망명한 누레예프에 대한 테마는 여전히 러시아에서는 좀 금기시되는 내용. 2. 누레예프의 성 정체성 문제 역시 마찬가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안무 연출한 이번 작품은 누레예프의 성 정체성을 정면으로 다루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러시아 문화부 측에서 발레를 중단시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거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가 돌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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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m.sobaka.ru/city/theatre/59501



Большой театр назвал причину отмены балета «Нуреев» Серебренникова  

<UPD: Инициатором отмены премьеры балета стал министр культуры РФ Владимир Мединский. Об этом сообщил ТАСС>


 
Генеральный директор Большого театра Владимир Урин объяснил перенос премьеры балета «Нуреев» режиссера Кирилла Серебренникова. На пресс-конференции телеканала «Дождь» он сообщил о том, что причиной отмены премьеры является неготовность спектакля. Данное решение было принято всей труппой, в том числе и самим Серебренниковым. 



В итоге премьера «Нуреева» пройдет 4-5 мая 2018 года. Напомним, изначально балет, режиссером которого является Серебренников, должен был быть представлен публике завтра, 11 июля. 



Репетиции балета начались в конце января. Зимой директор Большого театра получил сценарий спектакля от Серебренникова и не препятствовал дальнейшей работе над постановкой. Тем не менее, Урин назвал «достаточно трудным» период времени с января по февраль — в театре проходил фестиваль, посвященный Юрию Григоровичу, артисты балета были полностью заняты, и репетиции проводились выборочно, а в мае труппа уехала на гастроли в Японию и вернулась только за 20 дней до премьеры. По словам Урина, перед премьерой стало понятно, что это «не просто балетный спектакль», а спектакль, в котором «хоровые оперные солисты, большая массовка помимо балетной составляющей», а посмотрев финальный прогон, стало понятно, что балет «сделан плохо». 



Что касается самого режиссера Кирилла Серебренникова, то  он настал комментировать произошедшее. «Это решение театра. Вот так они решили», — сказал он. Напомним, Кирилл Серебренников поставил биографический балет с историческими костюмами о знаменитом балетном танцовщике Рудольфе Нурееве. Сейчас личность Нуреева привлекает все больше внимания деятелей искусства — в Петербург приезжал британский актер и режиссер Рэйф Файнс, который готовит биографическую картину о балетном танцовщике.
 



«По замыслу Серебренникова, большинство актеров должны были исполнять свои роли обнаженными», — пояснил собеседник ТАСС. Кроме того, в оформлении спектакля используется фотография танцовщика Рудольфа Нуреева, на которой он изображен полностью обнаженным



В свою очередь, собеседник РБК, близкий к руководству Министерства культуры, подтвердил, что решение о снятии балета принимал Владимир Мединский. По словам источника, в ведомстве сочли, что постановка пропагандирует «нетрадиционные сексуальные ценност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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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ncemagazine.com/bolshoi-just-canceled-a-ballet--2456763322.amp.html



... As a number of news outlets have noted, any work focusing on the life of Rudolf Nureyev is by default on shaky political ground in Russia. The ballet dancer's rise to stardom in the West was jump-started by his defection from the Soviet Union in 1961 (always a tricky topic), and his open homosexuality is decidedly at odds with current state policies. Rumors swirled prior to today's press conference that a frank depiction of Nureyev's sexuality, widely speculated to be included in the ballet, could be at the root of the last minute cancellation. (The Ministry of Culture has since stated that the delay of the performance is not an act of censorship.)


It's not the first time that political intrigue has been attached to the ballet: Its director, Kirill Serebrennikov, was reportedly detained and questioned over alleged misuse of government funds, though many of his supporters believe the case to be a politically motivated response to his outspokenness against government censorship.





...


욕 나오네 정말 ㅠㅠ

 

 

...

 

 

추가)

 

루돌프 누레예프 기념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과 문구. 이 문구는 르 몽드 기사에서도 인용.

 

 

 

les maux s'en vont, les regimes changent mais l'art reste

(The evils go away, the regimes change but the art remains)


 

.. 이 합성사진의 유머는 바로 저 현판이다. 볼쇼이 극장 현판을 합성해놓았음. 노어로 볼쇼이는 원래 big이란 뜻의 형용사이다.

예술가의 성 정체성과 검열이 맞물린 이 상황에 딱 맞는 캠피한 촌철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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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추운 러시아에 잠시 와 있다 보니 이렇게 추웠던 날 썼던 추운 날에 대한 이야기 조금. 아래 에피소드는 종종 조금씩 올렸던 트로이와 미샤의 장편 후반부에서 발췌했다.


에피소드의 앞부분에 생략된 배경은 이렇다. 12월의 추운 겨울날 미샤의 공연을 보러 갔던 트로이는 그날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던 지나이다(미샤의 룸메이트이자 꾸준히 파트너로 춤춰온 발레리나)를 만나고 안면이 있는 그녀의 초대를 받아 집에 놀러간다. 즉, 미샤와 지나이다가 함께 사는 아파트이다.

아파트에는 지나이다의 약혼자이자 트로이의 친구(트로이가 영문학과 강사로 일하는 학교의 같은 학과 부교수)인 마르크 카라바노프가 기다리고 있다. 카라바노프는 보드카가 있는데 같이 마실 사람이 없다고 슬퍼하다 트로이를 보고는 반색한다. 그리고...


..


스톨리츠나야는 보드카 상표 중 하나.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는 전에 종종 등장했던 미샤의 절친한 친구이자 볼쇼이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

트로이츠키는 트로이의 원래 성. 트로이의 원래 이름은 안드레이라서 미샤는 단둘이 있으면 그를 안드레이라고 부름.

넬레츠카는 지나와 미샤의 극장 후배 발레리나.

벨스키는 전에 수용소 이야기에 잠깐 등장했던 정치가이자 미샤의 후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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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 사진은 젊은이와 죽음을 추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카라바노프는 지나이다가 트로이를 데리고 들어오자 무척 좋아했다. 트렁크 몇 개에 약혼녀의 책과 여름 옷을 챙겨넣던 것도 내팽개치고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반짝거리는 스톨리츠나야 보드카 유리병을 양 손에 움켜쥐고 나와 보란 듯이 흔들었다.


 “ 하늘이 자넬 보내준 거야! 아니, 레닌이 보내줬다고 해야 하나? 저녁에 이게 두 병이나 생겼는데 같이 마실 사람이 없잖아. 지나는 보드카 입에 안 대고, 미하일은 술을 아예 못 마시니... 딤카도 없고 루벤도 없고... 연말이라고 다들 바빠서 들를 생각도 안해. 섭섭한 마음에 모스크바에 전화해서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를 부를 생각까지 했다니까! 스톨리츠나야를 앞에 놓고 뚜껑을 따지 않는 건 죄악이야! 동의하지, 트로이츠키 동지? ”



 “ 어, 그래. 죄악 맞아. ”



 지나이다가 약혼자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 당신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가 얼마나 술이 센 줄 알아? 대작할 생각 꿈에도 하지 마. 밤새 마셔도 절대 안 취하니까. 딤카도 나가떨어졌어. ”



 “ 그러니까 부르려고 한 거지. 끝까지 안 취하고 남아서 우릴 돌봐줄 사람이 하나 필요해. 당신은 안해 줄 거잖아. 미하일은 옆에서 냄새만 맡아도 취해서 기절할게 뻔하고. 아니, 세 잔까지는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트로이슈카, 자네 조금만 참아줘. 우리 이거 미하일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자. 그래도 남자들의 의리가 있는데 한 잔은 권해야지. 안 그러면 그 친구 섭섭해 할 거야. 게다가 난 미하일한테 신세진 게 진짜 많아. 새 집 구하는 것도 도와줬고 주택관리국 등록도 빨리 받을 수 있게 도와줬어. 지나랑 편하게 지내라고 자리도 많이 비켜줬고... ”



 “ 안돼, 그 바보한테는 한 방울도 따라줄 필요 없어. 그냥 지금 따. 내가 한 잔쯤 마셔줄게. ”



 “ 지나샤, 파트너를 바보라고 부르는 건 참 무례한 것 같아. 미슈카가 착해서 넘어가는 거지 사실은 별로 기분 좋지 않을 거야. ” 



 “ 바보를 그럼 뭐라고 불러. 얼간이나 멍청이보단 그래도 바보가 어감 상 나아. 꽤 신경써서 불러주고 있는 거야. ”
 


 “ 전혀 몰랐네, 그게 신경써서 불러주는 거였는지. ”



 소리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미샤가 말했다. 카라바노프는 깜짝 놀라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 아니, 미하일. 농담이었어. 스톨리츠나야가 생겨서 좋아하다 그런 거야. 기분 나쁜 거 아니지? ”



 “ 기분 나쁘긴. 신경써주고 있었다는 걸 알게 돼서 감동했는데. ”



 지나이다는 어깨를 으쓱하며 파트너에게 곧장 다가가서 코트를 받아주었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 어쩐지 말도 안 되게 빨리 집에 왔다 생각했어. 분장도 안 지웠네. 가방도 안 가져오고. ”



 “ 분장실에 안 들어갔어.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고 넬레츠카가 알려줘서 곧장 뒷문으로 나왔어. 가방이야 안나 미하일로브나가 따로 챙겨놨겠지. ”



 “ 이 코트는 뭐야! 소매가 왜 이렇게 짧아, 이거 케이프야? 여자 코트 아냐? ”



 “ 분장실에 못 들어갔잖아. 넬레츠카가 자기 거 벗어줬어. 아, 결국 그 단추 두 개나 떨어졌군. 치수 큰 거라더니 역시 무리였어, 이오시프 걸 뺏으려고 했는데 안 벗어주잖아. 이 옷 새 거라고 했는데. 단추 달아줘야겠다. ”



 “ 잘한다, 여자 후배 코트나 벗겨 입고 오고 단추도 떨어뜨리고. 그나마 케이프라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어깨 솔기 다 터졌을걸. 다닐로프가 끝나고 면담하자고 했던 거 아니었어? ”



 “ 내일 다시 얘기하기로 했어. ”



 미샤는 트로이를 발견하고 잠깐 눈짓을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나이다와 카라바노프 때문인지 코트를 벗은 것 외에는 얌전하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트로이는 그 애가 고로호바야의 집 현관에서부터 옷을 하나하나 벗어 내팽개치며 샤워를 하러 가던 것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현관의 황금색 불빛 아래에서 분장을 지우지 않은 그 애의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또 가면처럼 낯설어 보였다. 헐렁하게 늘어진 스웨터 아래로 이바누슈카 무대 의상이 힐끗 보였다.



 ‘ 그때도 그랬지, 지나이다에게 내쫓겨서 레오타드 위에 동료가 빌려준 옷을 입고 우리 집까지 왔었어. 그때 그 살인자가 왔었지. ’



 카라바노프는 의리를 지켜 꿋꿋하게 보드카를 따지 않고 버텼다. 대신 꽤 질이 좋은 캐비아가 담긴 병을 꺼냈고 지나이다를 위해 그루지야 와인도 한 병 가져왔다. 접시에 흑빵과 피클, 살얼음이 껴 있는 훈제 연어 몇 조각과 치즈를 늘어놓았다. 보드카 잔 세 개와 와인 잔 한 개도 꺼냈다. 지나이다는 카라바노프가 테이블을 차리는 동안 별 거리낌도 없이 미샤의 침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욕실 문 앞에 서서 미샤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지나이다가 나오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구급상자를 가지고 나와 트로이를 불렀다.



 “ 바보한테 약 좀 발라줘요. 내가 해줘도 되는데 마르크가 삐칠까봐. ”


 “ 어디 또 다쳤어요? ”



 “ 좀 긁혔어요. 바보 정도면 아주 양호한 호칭이란 걸 이제 알겠죠? ”




 트로이가 등 뒤로 욕실 문을 닫고 들어갔을 때 미샤는 거품을 채운 욕조 안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부글거리는 하얀 거품 때문인지 분장을 모두 지운 얼굴이 해쓱해 보였다.



 “ 어디 긁혔어? ”



 “ 아, 지나가 얘기했구나. 별 거 아닌데. ”



 미샤가 물속에서 몸을 돌려 반쯤 엎드렸다. 견갑골 사이에 길게 벤 상처가 나 있었다. 물에 씻겨나가서 피는 맺혀 있지 않았지만 피부가 양 옆으로 슬며시 벌어져 안쪽의 연한 붉은빛 살갗이 드러나 있었다.



 “ 이게 긁힌 거라고? 벤 거잖아. 누구야? ”



 “ 누구라니? 넌 왜 누구라고 생각해? 커튼 콜 끝나고 내려오다가 무대 장치에 벤 거야. 원래는 톱니를 천으로 씌워놓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었나봐. 끝나고 베어서 다행이야. 의상도 찢어졌거든. ”




 
 트로이는 그의 말을 절반도 믿지 않았다. 미샤도 그의 시선을 눈치 챈 듯 고개를 저었다.



 “ 안드레이. 넌 정말 런던에 안 가길 잘 했어. 요원은커녕 아마추어 탐정도 못 될걸. 내가 아무리 유연해도 이런 각도로 찌르진 못해. ”



 “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왜 앞장서서 변명해? ”



 “ 하고 있는데? 눈으로. ”




 
 트로이는 대꾸하지 않고 버튼을 눌러 물을 틀었다. 천정에 달린 샤워기에서 갑자기 물이 쏟아져 내리자 미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물을 흠뻑 뒤집어썼다.


 “ 엄청 뜨거워! 말도 없이! ”



 “ 거품을 닦아내야 약을 바를 거 아냐. ”



 “ 오늘 공연 보러 왔었어? ”



 미샤가 욕조에서 일어서며 화제를 돌렸다. 어깨와 등의 물기를 닦아내고 벤 상처를 소독하면서 트로이가 대꾸했다.


 
 “ 그래. ”


 “ 얘기하지 그랬어. 연말이라 표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


 “ 타마라가 구해줬어. ”


 “ 아, 귀여운 무샤. 그 아가씨 없으면 우린 아무 것도 못해. ”


 “ 벨스키는 왜 온 거야? ”


 “ 게다가 수다쟁이지. 뭐 그게 매력이지만. ”


 “ 난 벨스키에 대해 물었는데, 타마라가 아니고. ”


 “ 무슨 회의 때문에 왔다가 들렀어. 크레믈린 축제 때 지나에게 그랬거든, 레닌그라드에 오게 되면 식사나 같이 하자고. ”


 “ 지나에게? ”


 “ 아, 정말 까칠해졌네. 지나랑 나에게. 됐어? ”


 “ 넌 정치가들과 친한 게 불편하지 않아? 콤소몰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으면서 고위층 인사들과는 잘 지내네. 문화국 쪽도... ”


 “ 전제부터 틀렸네. 친하지 않아, 전혀. 이제 그런 얘긴 그만하지. ”


 “ 친하지 않다고? 고르차긴이 자기 집안에 들여놓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


 “ 너 정말 왜 그래? 넌 이 바닥을 잘 몰라. 내가 싫다고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인간들이 아냐.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밉보이면 무대에 올라갈 수도 없게 만드는 놈들이야. ”


 “ 그것 때문에 친하게 지내? 무대 뺏길까봐? ”


 “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얻어 걸리는 고위직들과 다 잔다고? 내가 여자야? 그런 짓 꿈에도 생각 안하는 인간들이 더 많아, 내가 자달라고 매달려도 절대 안 해 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그 자리에서 수용소로 보낼 걸. 넌 동의 안하겠지만, 차라리 자는 게 나아. 솔직하고 깨끗하게. 그냥 자고 끝내는 게 낫다고. 그 인간들 파티에 가고 웃어주고 공연 얘기, 극장 얘기 하고 행사에 끌려 다니는 것보다 백배 낫단 말야. ”


 “ 그런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어. 흥분하지 마. ”


 “ 그래, 그런 뜻이 아니었겠지. 위선자처럼 군다고 하고 싶었을 테니까. 나도 알아, 잘 아니까 제발 놔둬.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는 나도 아니까, 네 입에서까지 듣고 싶지 않아. 다시는 그 인간들 얘기하지 마. 그 살인자들에게 내가... ”



 미샤가 주먹으로 타일 벽을 꽝 쳤다. 살갗이 터지면서 핏방울이 튀었다. 트로이는 거울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기를 빌었다. 그는 목욕 가운을 잡아채 미샤의 어깨에 뒤집어씌우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난 한 번도,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넌 위선자가 아냐.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런 놈이라 해도 너만은 아니란 말야. 그런 바보 같은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마. ”



 미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욕조에서 나왔다. 거울 앞에 선 채 기계적으로 토너와 로션 따위를 얼굴에 부드럽게 문질렀다. 손의 상처 때문에 뺨 위로 피 얼룩이 조그맣게 번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트로이는 젖은 타월로 그의 손을 감싸 피를 닦아냈다.


 “ 너 옷 다 젖었어. 내 거라도 입고 있어야겠다, 마르크는 나보다 더 작으니까. 방에 가서 줄게. ”



 미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는 타월로 머리를 닦은 후 드라이어로 몇 분 동안 맹렬하게 물기를 말렸다. 침실로 나왔을 때 미샤는 옷장을 뒤지더니 좋아하면서 치수가 큰 스웨터와 바지를 찾아냈다.



 “ 이건 레냐한테 빌렸던 거니까 좀 나을 거야. 좀 짧겠지만 품은 맞을 걸. ”


 “ 동료고 후배고 가리지 않고 옷을 빌려 입고 오는구나. ”


 “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 정도는 기본이지. 나도 내 옷 많이 빌려줬어. 아무도 안 돌려줬지만. 그러니까 나도 갖고 있는 거야. 그래도 넬레츠카 건 내일 갖다 줘야지. 단추 달아서. ”


 


 트로이가 젖은 옷을 벗어 라디에이터에 널어놓고 레냐 핀스키의 옷을 걸쳐 입는 동안 미샤는 옷을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갛게 씻긴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 뭐해, 옷 안 입고. 마르크가 눈 빠지게 기다려, 저 보드카 빨리 안 따면 저 친구 울지도 몰라. ”


 “ 너희 집이면 좋겠다. 그럼 지금 그냥 잘 수 있을 텐데. ”


 “ 졸리면 그냥 자. 어차피 넌 거의 못 마시잖아. ”


 “ 난 네가 옷 입는 걸 보는 게 좋아. 머리 위로 윗도리 뒤집어쓰면서 팔을 빼는 거. ”


 “ 다 똑같잖아, 너도 그렇게 입잖아. ”


 “ 넌 팔이 끝없이 뻗어 나오는 것 같은걸. ”



 미샤가 일어나 다가왔다. 그의 기다란 두 팔을 뒤로 엇갈려 끌어당기면서 의심할 수 없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했다.



 “ 우리 그냥 방에 있자, 나가지 말고. 마르크는 혼자서도 잘 마셔. ”


 “ 의리를 지켜줘야지. 너 때문에 기다렸는데. ”


 “ 내 파트너 뺏아간 도둑놈에게 무슨 의리. ”


 “ 농담이라도 마르크 앞에선 그렇게 얘기하지 마라, 정말 질투하니까. 한동안 너 의심하느라 잠도 못 잤을 걸. ” 


 “ 아, 하긴. 마르크는 지나가 쓰다듬는 강아지까지 질투하지. ”




..




 

루돌프 누레예프.


신나게 보드카 마시는 이야기인 줄 알았으나 왜 또 이 미샤란 놈은 심각하게 구느냐 하고 크레믈린 흑토끼 운운하시는 분들을 위안하고자...

마르크 카라바노프는 지나이다가 쓰다듬는 강아지까지 질투한다고 해서... 강아지 사진 :)

(소설에서 카라바노프는 처음엔 미샤와 지나이다 사이를 엄청 의심했음... 파트너이자 같이 살기까지 해서ㅠㅠ)


 


그리고 '내가 바보라고?' 하는 미샤의 표정과 오버랩되는 듯한 슈클랴로프의 눈 똥그란 사진. 발레 101 :)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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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래는 이전에 여러번 발췌한 소설의 전반부에 포함된 에피소드이다. 1974년 3월. 미샤는 키로프에 입단한지 일년이 채 안된 시기이다. 우중충한 진창으로 가득한 음습한 3월의 어느날, 한밤중에 미샤가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친구인 트로이의 아파트로 찾아온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3월 초였다. 날씨는 좀 풀렸지만 거리는 진창과 감기 환자들로 가득했다. 트로이는 일 년 중 이 시기를 가장 싫어했다. 오후 강의에도 감기로 빠진 학생이 세 명이나 있었다. 우중충하고 습한 날씨 때문인지 그날따라 학생들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영문법을 따라가지 못해 쩔쩔 맸고 짧은 테스트에서도 무더기로 오답을 냈다. 마침내 트로이는 다음 주에 있을 시험을 거론하며 학생들을 협박해야 했다.

 

 강의를 마친 후 트로이는 녹초가 되어 학교를 나왔다. 그는 자신의 수업 방법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이 나이 차이가 대여섯 살 밖에 나지 않는 젊은 강사를 만만하게 여겨서 그러는 것인지 의문하며 길을 건너 버스를 타러 갔다. 평상시 같으면 다리를 건너 집까지 걸어갔을 테지만 그러기엔 녹은 눈 때문에 길거리가 너무 지저분했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지만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사흘 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가야 했는데 아직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다. 몇 시간만 매달리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요 며칠 동안 그는 독감에 걸린 듯 머릿속이 뿌옇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어쩌면 얼마 전 다시 만난 톨랴가 그에게 퍼부어댄 원망 섞인 욕설 때문일 수도 있었다. 톨랴는 아직도 그가 청혼할 거라는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전구가 나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텅 빈 집으로 들어갔다. 지난 여름에 어머니가 재혼해 떠난 후 트로이는 아파트를 혼자 쓰고 있었다. 좁고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네프스키 대로 근처였고 방 두 칸과 거실, 부엌과 욕실이 딸려 있었으므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몇 번은 아기가 태어난 갈랴의 집 대신 그의 집으로 몰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집 주인의 요리 솜씨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갈랴 부부의 집만큼 인기는 없었다.

 

 

 밑단이 흙투성이가 된 바지를 벗어 빨래통에 처박은 후 그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서 끈끈하고 음습한 레닌그라드의 3월 공기를 씻어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아주 진한 커피를 한 잔 타 마시며 전날 알리사가 카페에서 사다 준 양귀비씨 빵으로 저녁을 때웠다. 결혼 후에도 알리사는 종종 들러 그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곤 했다.

 

 

 커피를 한 잔 더 내린 후 그는 책과 논문 뭉치를 들고 식탁으로 가서 발제 원고를 마저 쓰기 시작했다. 부엌의 조명이 가장 밝았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도 틀지 않고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서너 시간 동안 원고를 썼다.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다. 머리를 식히려고 손에 닿는 의자에 놓여 있던 푸쉬킨 시집을 집어 아무렇게나 펴고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었다.

 

 

지금은 나의 계절, 나는 봄이 싫다.

눈 녹는 철은 지겨워, 악취와 진창도. 봄에는 앓게 되네.

몸 속의 피는 방황하고 감정과 예지는 우수에 사로잡힌다

엄동설한이 내겐 훨씬 좋다.

 

Теперь моя пора: я не люблю весны;

Скучна мне оттепель; вонь, грязь — весной я болен;

Кровь бродит; чувства, ум тоскою стеснены.

Суровою зимой я более доволен,

 

 

 

 악취와 진창을 얘기하는 푸쉬킨은 진정한 러시아인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트로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고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졌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 곱슬머리의 가무잡잡한 시인이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모를 만나지 않았다면, 리체이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래도 위대한 시인이 되었을까? 아니, 어쩌면 더 위대하고 더 사랑받는 영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재능은 유일무이한 것이며 불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축복이며 특권이었다. 아무도 그의 곁에 있던 친구들과 이류 시인들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리 짙지도 않은 어둠 속으로 명멸해 사라진 자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네바 강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없었을까?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모임은 다음 주였고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혹시 알리사가 들른 걸까 싶어 트로이는 현관으로 나갔다.

 

 

 “ 누구세요? ”

 

 “ 나야. 들어가도 돼? ”

 

 

 트로이는 문을 열었다. 미샤가 가방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도 시커먼 얼룩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

 

 “ 수도관이 터졌어. 집이 물바다야. ”

 

 

 트로이는 미샤를 안으로 들여놓고 가방을 받아 내려놓았다. 미샤가 물을 뚝뚝 흘리며 재채기를 해댔다. 트로이가 타월을 가지고 왔을 때 그는 신발과 재킷과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벗어 현관 바닥에 내팽개치고 있었다.

 

 

 “ 바닥 더러운데 나한테 줘. ”

 

 “ 괜찮아, 어차피 빨아야 돼. ”

 

 

 타월로 머리의 물을 떨어내며 미샤가 거실로 들어왔다. 바지도 엉망이었다. 가방 지퍼를 열어 마른 옷을 꺼내며 그는 다시 재채기를 했다.

 

 

 “ 온수 나와? ”

 

 “ 응, 아직은 나올 거야. 빨리 가서 씻어. 파이프가 터졌으면 잽싸게 튀어나올 것이지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한 거야? ”

 

 “ 고칠 수 있을 줄 알았지. 반쯤 고쳤는데 레냐가 뭘 잘못 건드렸어. 삽시간에 펑 터지잖아. 집 밖으로 나왔는데 거기서도 또 터졌어. ”

 

 

 졸업하고 기숙사에서 나온 후 미샤는 극장 동료 세 명과 함께 사도바야 거리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하나는 동기였고 둘은 선배였는데 트로이는 미샤가 레냐라고 부르는 레오니드 핀스키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레트니 사드의 아폴로 조각상을 닮은 핀스키는 트로이가 유일하게 아는 미샤의 발레학교 동기였다. 극장에서 좀 더 좋은 조건의 집을 구해줬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나마 친한 친구와 같이 쓰게 되어 다행일지도 몰랐다.

 

 

 “ 그래서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어? ”

 

 “ 다 짐 싸서 뿔뿔이 피난갔지. 난 그나마 나아, 레냐랑 발로쟈 방은 직통으로 터져서 옷이고 책이고 다 잠겼어. ”

 

 “ 대신 물에 빠진 생쥐가 됐잖아. ”

 

 “ 뭐 몸으로 때우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

 

 

 미샤는 나무 바닥과 카펫 위에 더러운 물을 떨어뜨리면서 욕실로 갔다. 가는 내내 재채기를 했다. 트로이가 등 뒤로 물었다.

 

 

 “ 그런 몰골로 버스를 탄 거야? 같이 있는 애들한테도 차가 없어? ”

 

 “ 아무도 없어. 급료가 짜거든. 버스는 안 탔어. 경찰한테 잡혀갈 것 같아서. ”

 

 “ 그럼 걸어왔어? ”

 

 “ 알잖아, 운하 따라 오면 얼마 안 걸려. ”

 

 

 트로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시궁창에 구른 듯 흠뻑 젖은 상태로 운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걸어오는 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무용수가 할 만한 짓인지 꾸지람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갈랴처럼 굴고 있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가스렌지에 주전자를 올려놓았고 찬장을 뒤져 그나마 깨끗한 컵을 한 개 찾아냈다. 제대로 된 찻잔은 하나도 없었다, 지난번 모임 때 오랜만에 새 소설을 탈고한 쥬진스키가 신이 나서 찻잔들을 가지고 무슨 퍼포먼스를 하다가 깨뜨렸기 때문이다.

 

 

 식탁에 너저분하게 늘어놓았던 원고와 책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끓는 물과 찻잎을 컵에 붓고 있을 때 미샤가 나왔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가방에서 스웨터를 꺼내 티셔츠 위로 뒤집어쓰며 미샤가 투덜댔다.

 

 “ 중간에 더운 물 끊겼어. 우리 아파트만 그런 게 아니었나봐. ”

 

 “ 이쪽으로 와서 차 좀 마셔. ”

 

 진하게 우린 차에 얇게 썬 레몬 두 조각과 설탕을 한 숟갈 부어 넣으며 트로이가 의자를 가리켰다. 미샤는 잠깐 눈썹을 찌푸렸지만 두어 차례 몸을 떨더니 트로이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아 직접 설탕을 더 퍼 넣었다.

 

 “ 더 넣어. 그래야 몸이 녹을 걸. ”

 

 “ 이미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심장병을 일으킬 분량인데. ”

 

 

 미샤는 제대로 젓지도 않고 컵을 입에 가져갔다. 뜨거운 차를 연달아 두 잔 마시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식탁 구석에 쌓여 있는 원고와 책들을 보았다.

 

 

 “ 강의 준비해? ”

 

 “ 아니, 금요일에 모스크바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

 

 “ 아, 나도 금요일부터 투어 가. ”

 

 “ 어디로? ”

 

 “ 키예프, 사라토프, 아마 페름까지 갈 거야. 너 사라토프에 할머니 계시다고 하지 않았어? ”

 

 “ 아직도 기억하는구나. 우리 할머니 극장 좋아하니까 너 보러 갈지도 모르겠다. ”

 

 “ 그래, 오신다면 내가 앞자리 부탁해 놓을게. ”

 

 

 미샤가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끌어왔다. 개켜놓은 옷들 사이를 뒤져 발레슈즈와 작은 천 지갑 같은 것을 꺼냈다. 자세히 보니 지갑이 아니고 바느질 도구가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식탁에 다리를 걸친 채 능숙하게 발레슈즈에 바늘을 찔러 넣으면서 미샤가 물었다.

 

 

 “ 나 자고 가도 돼? 여자가 오기로 한 거 아냐? ”

 

 “ 무슨 여자? ”

 

 “ 여자 생겨서 바쁘다며. ”

 

 “ 깨졌어. ”

 

 “ 유감이네. ”

 

 “ 그냥 금요일까지 여기 있어. 우리 엄마가 쓰던 방 비어 있으니까. 파이프 터진 건 금방 고친다 해도 물 빠지고 치우는데 한참 걸릴 걸. ”

 

 “ 그래, 친구가 있어 다행이야. ”

 

 

 트로이는 매혹되어 미샤가 발레슈즈를 기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바느질을 할 줄 아는 것도 신기했다.

 

 

 “ 신발은 극장에서 다 대주는 건 줄 알았는데. 스타가 이런 걸 직접 하다니. ”

 

 “ 주긴 하는데 몇 켤레 안 줘. 그리고 아직 스타가 아니야. ”

 

 

 아마 미샤는 인민예술가 정도는 되어야 스타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트로이에게 강의와 모스크바 세미나에 대해 물어보면서 신발 세 켤레를 순식간에 기웠다. 그리고는 세 켤레를 돌아가면서 신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상태를 점검했다. 그 모든 동작은 완벽하게 기계적이고 효율적이어서 군인을 연상시켰다.

 

 

 “ 투어는 며칠 정도야? ”

 

 “ 3주. ”

 

 “ 뭐가 그렇게 길어? ”

 

 “ 버스로 간대. 집단농장들도 들르고. ”

 

 “ 키로프라고 그렇게 화려한 게 아니구나. 버스로 투어 가고 급료도 짜고 직접 신발도 기워야 하고. ”

 

 “ 당연하지, 트로이츠키 동무. 여긴 평등의 사회인걸. ”

 

 “ 크류코바도 같이 가? ”

 

 “ 아니, 니나 정도 되면 계급 위에 존재하지. 그리고 니나랑 같이 가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거야. ”

 

 “ 왜? ”

 

 “ 더 미움 받게 된다고. 투어에 니나 예전 파트너가 둘이나 같이 가거든. ”

 

 

 미샤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트로이는 극장 내부의 위계질서가 얼마나 엄격하고 경쟁이 얼마나 심한지 타냐에게 조금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수직으로 급상승하고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 젊은 신입은 아마 선배들 사이에서 눈엣가시나 다름없을 것이다.

 

 

 “ 쓰던 거 계속 써. 나 연습 좀 할게. ”

 

 “ 테이프 챙겨 왔으면 음악 틀어놓고 해도 돼. ”

 

 “ 괜찮아, 몸만 풀 거야. 근육이 좀 뭉쳤어. ”

 

 

 미샤는 거실 쪽으로 나가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트로이는 다시 원고를 쓰려고 했지만 도저히 미샤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리를 옮겨 거실에서 등을 돌리고 책과 원고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미샤는 책장과 창틀을 잡고 다리를 길게 뻗으며 트로이에게는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동작을 연속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근육만 조금 푸는 동작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완전히 몰입하여 음악도 없이 좁은 공간에서 생소한 춤을 추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가도 모를 것 같았다. 트로이는 푸쉬킨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유일무이하고 불멸하는 재능.

 

 그는 고개를 돌렸고 원고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논리가 약해지면서 횡설수설로 변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다른 논문들을 인용하고 논지를 가다듬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주제를 잘못 택한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내용을 바꿀 수는 없었다.

 

 

 

...

 

 

얼마 전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시점으로 서술된 이야기를 짧게 발췌한 적이 있었다. 투어에서 돌아온 미샤가 폐렴에 걸린 얘기(http://tveye.tistory.com/5469 )였는데 그것이 위 에피소드에서 미샤가 말하는 '키예프, 사라토프, 페름'의 버스 투어였다. 시간적으로는 위 에피소드가 1974년 3월, 투어에서 돌아와 폐렴에 걸리는 것이 4월로 이어진다.

 

..

 

인용된 시는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가을'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리체이는 소년 시절의 푸쉬킨이 다녔던 기숙학교이다.

 

미샤가 차에 설탕 타면서 얘기하는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그의 발레학교 시절 은사이다.

 

..

 

수도관 터져서 난방 끊기고 물벼락 맞고 집에서 달려나온 미샤의 이야기는... 사실 내 경험에서도 좀 가져왔다. 나는 다행히 물벼락까진 안 맞았지만... 예전에 러시아 기숙사에 있을때 동네 수도관이 다 터져서 길바닥에선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하필 혹한이 몰아닥쳐서 얼어죽는 줄 알았었음.

 

그런데 그때 기숙사에는 그저 벽에 '기술적 문제로 난방 안됨'이라고만 씌어 있었고...

'그 망할놈의 기술적 문제! 맨날 저 문구야!' 하면서 덜덜 떨며 뜨거운 물을 끓이면서 텔레비전을 틀어보니 뉴스에 어디어디 수도관 터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우리 동네였음 ㅠㅠ


 

그보다도 더 예전에 있을땐 겨울에 온수 안 나올때가 많아서 가스렌지에 물을 끓이기도 하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기도 해서 그걸로 간신히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은 적도 있었음. 그러니 소련 시절인 1970년대의 미샤와 트로이네 집은 당연히 더 심했겠지 ㅠㅠ (저 에피소드가 벌어질 당시 미샤는 아직 극장 근처의 좋은 아파트를 얻기 전이었다)

 

..

 

 

페테르부르크 예술광장의 푸쉬킨 동상.

 

 

 

루돌프 누레예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은 alex gouliaev.

이번 뮌헨 바이에른 극장 무대에서 데뷔했던 존 크랑코의 로미오와 줄리엣 리허설 사진.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이 에피소드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5783

 

:
Posted by liontamer

 

 

 

새로운 글을 구상하면서 원래 써오던 글인 가브릴로프 본편은 잠깐 미뤄두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글인 건 변함이 없다. 그래서 새 글 구상을 하면서 동시에 이전에 좀 써둔 가브릴로프 본편을 훑어보고도 있다. 많이 쓰진 않아서 총 4개 장으로 이루어진 1부를 마치고 2부 첫장을 쓰다 중단되어 있다(그 다음부터는 이것의 패러디 외전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만 줄창 써서 ㅠㅠ) 

 

어제 본편 훑어보다 1부 3장에서 잠깐 생각을 돌이켜보았다. 3장에서는 지방 소도시 가브릴로프 극장에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미샤가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다뤘었는데 이 장의 후반부는 이 도시의 특권층(노멘 클라투라)이자 나름대로 유력한 문예지 편집장인 렐랴가 미샤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렐랴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도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이라 아마 서무 시리즈를 보신 분들은 친숙하실 것이다(미샤를 사모하여 맨날맨날 과자랑 케익 구워다 바치고 잼 만들어주고... 막상 실속은 없는 가브릴로프 최고 미녀로 등장했음) 렐랴의 성인 비슈네바는 물론 내가 좋아하는 무용수 디아나 비슈뇨바에게서 따왔는데 액센트 위치만 바꾸어서 비슈뇨바 대신 비슈네바로 만들었다. 본편의 렐랴는 서무 시리즈에서처럼 코믹한 인물은 아니고... 이 인물을 데리고 전에 가브릴로프 추리외전도 쓴 적 있다. 거기선 무려 주인공으로 탐정 역할도 했었다만...

 

기존에 쓴 본편 우주의 여러 글에서 미샤가 자신의 예술관이나 관객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한 것은 매우 드물다. 물론 단편 하나와 장편 하나에서 그가 서방/소련 언론과 인터뷰를 한 내용을 두어번 쓴 적은 있지만 그 맥락은 달랐다. 그때까지 미샤는 안무가라기보다는 무용수였다. 그리고 안무가이자 감독의 입장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이 처음이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하지만 '직접적'이라는 것이 언제나 '더 솔직한', 혹은 '더 자세한'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렐랴의 인터뷰 장면을 발췌해 본다. 관객을 대하는 미샤의 자세가 좀 나온다. 이 글을 쓸때 나는 작가이자 관객이었는데 그 둘 중 어느쪽이 우선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작가가 '이렇게' 쓴다고 해서 그가 '이렇게' 믿는다고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조금은 위험한 일이다.

 

초반에 언급되는 '먀흐킨'은 가브릴로프 극장의 극장장이자 시 의회 의원이며 렐랴의 외삼촌이다. (렐랴는 집안이 매우 좋다) 이 먀흐킨도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몇번 등장했다. 제일 큰 비중으로 나왔던 건 34편의 딸기 아가씨들과 바자회 에피소드였음. '비슈네브이 사드'는 벚꽃 동산이란 뜻으로(체호프의 유명한 희곡 제목이기도 함) 소설 속에서 렐랴가 편집장으로 있는 문예지 제목이다. 류다는 미샤의 비서인 류드밀라이다(이 사람도 서무 시리즈에 꾸준히 나왔음)

 

 

위의 사진은 6월에 마린스키 구관에서 내가 찍은 것.

 

 

 

이건 마린스키 브 콘탁테 페이지에 올라왔던 사진. 마린스키 극장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광경. 가운데 거대한 것은 샹들리에!!

 

 

사진사는 캡션에 있듯 Podorozhny. 볼쇼이 극장. 백스테이지에서 바라본 무대 연습 장면.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물론 렐랴는 자신이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이며 문화예술 애호가라고 생각했다. 예술계 인사를 인터뷰할 때는 정치적 문제나 이념, 사생활 등으로 인한 선입견은 배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샤 야스민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 마치 생일 선물을 받으러 가는 어린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취임식 당일에 사전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미샤가 일정이 빠듯해서 겨우 두 개의 인터뷰에만 응한 데다 문예지보다는 텔레비전 방송사와 연방 홍보국의 입김이 더 셌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리고 렐랴에게 필요했던 것은 겨우 2~3분짜리 홍보 인터뷰가 아니라 비슈네브이 사드 10월호 커버스토리에 어울리는 심도 깊은 대담이었다. 그 인터뷰는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절반은 렐랴의 생각대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오후 2시에 그녀는 사진사 한 명을 대동한 채 녹음기와 노트를 들고 미샤를 만나러 갔다. 극장은 썰렁했다. 사람도 없었다. 비서실조차 비어 있었다. 처음에 렐랴는 다들 젊은 감독에 맞서 파업이라도 하는 건가 하고 깜짝 놀랐지만 곧 그날이 월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극장 휴일이었다. 약속 날짜를 착각했나 하는 불안감도 잠깐, 렐랴가 노크를 하자 미샤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렐랴는 무대의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조명과 의상, 메이크업의 트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았다. 달리 배우들에 대한 기사에서 ‘ㅇㅇ는 무대 위에서의 카리스마와는 달리 사석에서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먀흐킨조차도 첫날 미샤와 만나고 돌아온 후 호기심에 가득 찬 렐랴의 질문에 약간 마뜩치 않은 어조로 대꾸했다.

 

 

 “ 그렇게 눈에 띄는 친구는 아니었어. 생각보다 작아, 자작나무처럼 야윈 게 데니스 체격의 반 밖에 안 될 거 같더라니까. 전에 무대에서 봤을 때는 꽤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애가 어떻게 발레리나들을 들고 돌렸는지 모르겠더구나. 게다가 너무 어려 보여서 깜짝 놀랐단다. 데뷔한지 7~8년이 다 됐으니 스물다섯은 넘겼을 텐데 학생처럼 보였어. 렐렌카 너보다 더 어려보이더구나. 하긴 우리 수석 남자애들보다 더 젊지. 류다가 옆에서 보더니 새 감독님은 인형처럼 곱상하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어. 생긴 것도 그렇고 말수도 적은 게 기 센 극장 사람들을 어떻게 휘어잡을지 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단다. 뭐 나름대로 강단 있는 친구라니까 지켜보긴 해야겠지... ”

 

 

 눈앞에서 미샤 야스민을 마주 대했을 때 렐랴는 먀흐킨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반쯤 이해했다. 그녀의 외삼촌은 여러 극장들을 거쳐 온 데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시 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를 평가할 때 당당한 풍채와 큰 목소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복 차림의 미샤는 극장장의 말대로 앳된 대학생처럼 보였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렐랴는 그가 움직이는 방식에 매료되었고 레닌그라드 액센트와 차분한 말투에 대해서는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렐랴는 비슈네브이 사드의 특집 기사를 다음과 같은 거창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곁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그는 민첩하고 유연한 짐승처럼 보인다. 그는 삐걱거리는 복도와 낡은 사무실, 낙엽이 쌓여 있는 좁은 길, 일상적인 모든 공간을 순식간에 극장 무대로 변형시킨다. 그가 입을 열면 정확하고 또렷한 발음과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결코 충돌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마치 칼날에 벨벳을 두른 것처럼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의 무대를 연상시킨다. ’

 

 

 미샤는 비교적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했지만 렐랴의 모든 질문에 답변한 것은 아니었다. 키로프와 볼쇼이 시절 무대에 대해, 기존 안무작에 대해서는 그래도 성실하게 답했지만 발레 팬인 렐랴는 이미 예전 인터뷰를 통해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렐랴는 해외 유명 극장들에서의 공연과 뉴욕 발레단과의 협업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미샤는 무용수로서든 안무가로서든 좋은 경험이었다는 대답 한 마디로 피해갔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은 어차피 검열국에 넘어가기 전에 자신이 모두 편집할 테니 너무 조심스러워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초면부터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꾹 참았다.

 

 

 그래서 그녀는 화제를 바꾸었다. 레닌그라드에서 살다가 지방 소도시로 옮겨와서 답답하지 않은지, 가브릴로프의 첫 인상이 어떤지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미샤는 나무가 많고 강이 아름다워서 좋다고 대답했다. 다분히 정치적인 답변이라고 생각한 렐랴는 첫 번째 질문을 되풀이했다.

 

 

 “ 음, 여기는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와는 물론 완전히 다르죠. 전 지금까지 조용한 곳에서 지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숲이 많은 곳에서도. 전 언제나 새로운 환경에 고무되곤 해요. 답답함을 느낄 겨를이 없죠. 도처에 모르는 것들이 가득하니까요. 지금은 할 일도 굉장히 많고요. ”

 

 “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 가브릴로프에는 싸움꾼과 성자 밖에 없다는 옛말이 있거든요. 아주 다혈질에 공격적인 성미거나 아예 온순하거나 둘 중 하나고 중간은 없다고요. 전형적인 시골 사람들의 특징이죠. ”

 

 “ 그런가요? 전 사람들은 어디나 같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차이를 잘 모르겠던데. ”

 

 “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예의를 차리고 외교적인 미사여구를 구사한다던데 사실인 것 같네요. ”

 

 

 미샤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렐랴의 말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았다. 렐랴가 새로 맡은 감독직에 대해, 극장에 대한 전반적 의견과 발레단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는 원론적이고 짤막한 답변만 했다. 렐랴가 신임감독의 어려움이나 극장 내부 인사들의 텃세 여부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아직 2주도 안돼서요. 지금으로서는 할 얘기가 별로 없군요. ”

 

 “ 하지만 매일 공연을 보고 계시잖아요. 그것도 백스테이지가 아니라 관객석에서. 사실 그 소식도 꽤 신선했거든요. 이제껏 그런 예술감독은 없었어요. ”

 

 “ 극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대를 봐야 하니까요. 아마 제가 무용수였다면 다른 식으로 행동했을지도 모르죠. ”

 

 “ 무대는 백스테이지에서도 볼 수 있잖아요. 감독이나 연출가들은 보통 그렇게 하지 않나요? ”

 

 “ 시간이 좀 지나면 저도 그렇게 할 거예요. ”

 

 “ 왜 지금은 그렇지 않죠? 아직 우리 극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셨다는 건가요? 볼쇼이나 키로프 같은 큰 극장 무대에도 작품을 올리셨잖아요. 그에 비하면 가브릴로프 극장은 규모도 작고 레퍼토리도 단순한데. 연출도 여러 번 해보셨으니 무대의 구조나 동선은 한두 번만 봐도 전부 파악하실 수 있지 않나요? ”

 

 “ 제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던 것 같군요. 전 극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대를 봐야 한다고 말했죠. 그건 관객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어요. ”

 

 “ 어떤 사람들이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지? ”

 

 “ 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공연을 보는지. 극장이라는 공간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이야기하고 보고 느끼는지. 그 모든 것이 중요해요. 관객과 소통하지 않는 무대는 절반만 열려 있는 공간이에요. 극장은 예술가의 자기만족과 독백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니까요. ”

 

 “ 좀 의외네요. 전 당신이 엘리트주의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술가들 대부분이 그렇죠. 관객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않잖아요. 관객들이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슬퍼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

 

 “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이성의 영역이죠. 이해하지 못하고도 사랑할 수 있고 슬퍼할 수도 있어요.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할 수도 있고요. 그들로 하여금 뭔가를 느끼게 만들 수 없다면 그건 실패한 공연이에요. ”

 

 “ 백조의 호수나 지젤이라면 모르지만 관객들이 호두까기 인형을 보면서 어떤 감정적 고양을 느끼지는 않잖아요. ”

 

 “ 하지만 즐거워하죠. 아기자기한 무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고 발레리나들의 화려한 의상과 움직임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고요. 감정적 고양이란 꼭 거창하고 드라마틱한 것만은 아니에요. 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가끔 빠져드는 함정이 있죠. 장엄하고 영웅적인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추구하지 않으면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거라고 믿어버리는 것. 그건 일종의 도그마예요. 기본적으로 예술이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고 거기에는 진정성이 필요해요. ”

 

 “ 호두까기를 보면서 웃는 어린아이들과 잠자는 미녀를 보면서 그 구조적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발레 애호가들이 원칙적으로는 동일하고 평등한 관객이라는 것인가요? ”

 

 “ 네. ”

 

 “ 그건 가브릴로프 극장 예술감독으로서의 가치관인가요, 아니면 무용수이자 창작자인 미하일 야스민의 믿음인가요? ”

 

 “ 감독으로서의 저와 예술가로서의 저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겠죠. 하지만 관객에 대한 제 태도는 전자든 후자든 변함없을 거예요. ”

 

 “ 그것이 당신이 무대에서 그 수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비밀인가요? 그들 모두를 이해하고 동등하게 대하려고 했다는 것? ”

 

 “ 조금은요. ”

 

 “ 그럼 나머지는 뭐죠? ”

 

 “ 그건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

 

 “ 그런가요? 보통 그런 힘을 가리켜 재능이라고들 하죠. 우리 가브릴로프에서는 천사가 날개로 쓰다듬고 지나갔다고 해요. ”

 

 

 미샤는 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렐랴는 그가 재능에 대한 칭찬 앞에서 점잔을 빼거나 겸손한 척 고개를 젓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긴 학창 시절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왔을 얘기일 것이다.

 

 

 그녀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오디션에 대해서도 물었다. 미샤는 레베진스키에게 했던 대답을 짧게 되풀이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극장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나갈지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레퍼토리를 다양화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15년에 달하는 파벨 쿠즈네초프의 재임 기간 동안 극장이 정체 상태에 빠졌고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평이 많은데 이를 어떤 식으로 타개할 생각인지, 키로프를 가브릴로프 극장의 이상적인 발전 모델로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을 때 미샤는 잠깐 침묵했다가 천천히 대꾸했다.

 

 

 “ 그건 아직 모르겠군요. 시즌이 좀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극장은 키로프와는 다르죠. 역사도 문화도, 무용수들의 성장 배경이나 기질도 달라요. 같은 도시가 어디에도 없듯이 극장도 마찬가지예요. 극장을 빵 찍어내듯 똑같이 만들 수는 없어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

 

 “ 사람들은 어디서나 같다고 생각하신다면서요, 도시와 극장은 어째서 다른가요? ”

 

 “ 글쎄요. 어쩌면 사람들이 결국 같지 않은지도 모르죠. ”

 

 

 미샤는 수수께끼 같은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끝낸 후 렐랴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개인적인 질문을 몇 개 던졌다. 좋아하는 색깔이라든지, 음식이라든지, 작가라든지, 이상형이라든지, 혹시 레닌그라드에 연인이 남아 있는지도 살짝 떠보았다. 미샤는 대부분의 질문을 침묵이나 미소로 넘겼다. 그가 사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렐랴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농담을 섞어 물었다.

 

 

 “ 사무실로 절 안내하신 이유는 접견실 문이 잠겼기 때문인가요? 월요일이라 아무도 출근을 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극장장이나 감독 인터뷰는 항상 접견실에서 했었거든요. 아니면 접견실의 권위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전 항상 거기 들어가면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테리어도 그렇고 좀 제정 시대 느낌이... ”

 

 “ 아뇨. 전 어디든 별로 상관없는데 어제 세탁 때문에 접견실 커튼을 모두 벗겨냈다고 해서요. 햇빛도 강하게 들어오고 살충제도 잔뜩 놨으니 오늘은 들어가지 말라고 류다가 당부해서요. 운 나쁘면 바퀴벌레들을 밟게 될 거라고 경고하더군요. ”

 

 

 렐랴는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농담인지 진지하게 얘기하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 유명한 스타를 직접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사진사 주보프의 간곡한 부탁으로 무대와 발코니 좌석에서 추가로 사진을 찍느라 15분 정도가 더 소요되었다. 주보프는 요청이나 지시도 없이 그저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댔을 뿐이었다. 심지어 미샤는 별다른 포즈를 취하지도 않았다.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세묜 주보프는 시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사진사였지만 예술가적 자존심이 센데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사람이라 심지어 유명 인사들에게조차 이렇게 앉아라 저렇게 머리를 돌려라 하며 들들 볶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 주보프는 술에 취한 듯, 필름 구입예산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셔터를 연속으로 눌러댔다. 꼭 기관총 사수 같았다. 나중에 현상된 사진들을 보고서야 렐랴는 주보프가 왜 미샤에게 그렇게 관대했는지 이해했다.

 

 

 “ 그런 피사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지. ”

 

 “ 하긴 그 사람 진짜 미남이긴 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20페이지 쯤 늘려서 이 사진들 전부 컬러로 싣고 싶네요. ”

 

 “ 그런 것과는 좀 달라. 외모가 아무리 잘 나면 뭘 하나, 당장 우리 극장에도 얼굴만 예쁘고 나머지는 나무토막 같은 애들이 태반인데. 이 친구는 특별한 경우야. 그건 타고 나는 거지. 가뭄에 콩 나듯 그런 사람이 있어. 렌즈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사람. 춤추는 걸 찍었어야 했는데... ”

 

 

 주보프는 못내 아쉬워했다. 아라베스크 포즈를 취해달라는 그의 유일한 부탁을 미샤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 전 이제 춤을 추지 않아서요. ”

 

 주보프는 그 유명한 포즈를 찍기 위해 당장이라도 미샤의 발아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지만 렐랴는 키로프 시절 사진을 한 장 가져다 쓰면 된다고 그를 부드럽게 진정시켰다. 사실 그녀도 실망했지만 콧대 높은 예술가의 변덕에 간섭해봤자 좋을 일이 없다고 마음을 달랬다.

 

 

 

 

...

 

 

 

무용수들 사진 몇 장.

먼저 루돌프 누레예프. 주보프는 이 사람 앞에서도 넋을 잃고 셔터를 눌러댔을 것이다.

 

 

루돌프 누레예프. 햄릿 중에서.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사진은 캡션에 있듯 nina alovert. 이 사람의 포즈도 정말 아름답다.

 

 

 

 

90년대 키로프-마린스키 시절의 율리야 마할리나. 마린스키 극장 좌석에 앉아서.

사진은 캡션에 있듯 nina alovert

 

 

 

역시 사진은 nina alovert

피사체로서의 매력이 넘치는 무용수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카리스마를 내뿜는 젊은 시절의 파루흐 루지마토프.

 

위의 누레예프, 말라호프, 루지마토프 모두 각각 서로 다른 면에서 무용수로서의 미샤에게 조금씩 영감을 준 인물들이다.

 

 

 

파루흐 루지마토프 한 장 더. 사진은 캡션에 있듯 nina alovert

 

 

 

팬심으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도 한 장.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이건 내가 이번 6월에 마린스키 구관에서 찍은 사진들 몇장. 관객으로서 찍은 사진들 :)

 

 

 

 

 

 

 

 

이 사진은 볼쇼이 무용수인 아르춈 옵차렌코와 디아나 비슈뇨바. 몇달 전 마린스키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함께 췄는데 이건 백스테이지에서 찍은 리허설 장면이다.

 

 

 

프리드리만 보겔.

 

 

 

이건 내가 폰으로 찍은 사진. 여기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예전에 맡은 업무 때문에 하루종일 여기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찍음... 여러 모로 힘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억은 지우고 싶다만... 덕분에 백스테이지와 분장실, 음향, 조명 등 이것저것 많이 훑었고 그것만으로도 내겐 수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렐랴와 먀흐킨, 미샤 등이 코믹한 패러디 버전으로 등장해 복작거리는 외전 에피소드들이 궁금하시면 서무의 슬픔 시리즈 폴더를 보세요~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3년 반 후의 메모, 2016.5.14>

 

   

나는 아래 발췌한 에피소드를 3년 반 전, 2012년 12월에 썼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서 몇달 후. 가장 바닥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미샤를 되살려낸 후 두번째로 쓴 소설이었다. 소설의 심리적 화자는 그의 친구이자 애인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일반적으로는 트로이 라고 불리는 인물이었지만 진짜 주인공은 미샤였다. 이 소설의 에피소드들은 전에도 여러번 이 폴더에 발췌한 적이 있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소설의 중후반부인 3부 14장 끝부분이다. 저 부분을 쓸때 나는 어느 정도 화가 나 있었고 어느 정도는 매우 지치고 슬픈 상태였다.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솔직하기도 했다. 허구라는 렌즈를 통해 왜곡될 수 있을만큼만 왜곡시킨 정도로.

 

이 글을 쓴 바로 다음날 남긴 짧은 메모와 1년이 지난 후 쓴 역시 짧은 메모가 있는데 그것도 같이 올려본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에피소드에 대한 세가지 메모가 달려 있는 셈이다. 쓴 직후, 1년 후, 그리고 3년 반 후.

 

미샤와 트로이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지나'는 미샤의 발레학교와 키로프 발레단 시절 파트너 발레리나인 지나이다를 가리킨다. '세레브랴코프'는 미샤의 키로프 발레단 선배이자 일종의 라이벌이다. 세레브랴코프에 대한 에피소드는 전에 돈키호테와 페름 저수지 사건 등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http://tveye.tistory.com/4597

 

대화에 역시 언급되는 '스탄카'는 전에 여러번 발췌된 이야기들에 등장한 스타니슬라프 일린을 가리킨다. 볼쇼이 안무가이고 미샤의 친구이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의사인 유리 아스케로프이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이 폴더에 두어번 발췌했고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한번 등장시킨 적 있다.

 

둘의 대화에서 나온 '안드레이'는 미샤가 트로이를 부르는 이름이다. 트로이는 자기 본명을 싫어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트로이란 애칭으로 통하지만 미샤는 사적 자리에서는 항상 그를 본명으로 부른다.

 

 .. 맨 위의 사진은 라트만스키 안무의 신데렐라를 추는 디아나 비슈뇨바. 사진은 Mark Olich.

그 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게의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1년 후의 메모, 2013.11.7>

 


나는 이 부분을 거의 일 년 전 이맘때 썼다. 이 소설에서 미샤가 자신의 춤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부분 밖에 없다. 그는 죽음과 성, 권력과 사회적 억압, 이데올로기와 젠더, 그리고 이 모든 외부에서 온 어둠과 더불어 자기 내부에서 비롯되는 어둠을 마주하며 춤춘다. 그건 그가 춤을 추는 이유인 동시에 춤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저 소설은 재능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건 성적 갈망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건 미샤가 아니라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였다. 심지어 저 순간, 미샤가 자기 입으로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에도 트로이는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트로이는 창작자가 아니었고 그의 사랑은 이해를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아래 발췌된 에피소드를 쓰고 난 직후, 그러니까 2012년 12월에 적었던 메모는 맨 아래에 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트로이의 팔을 베고 누워 담배 연기를 천정으로 길게 뿜어낸 후 미샤가 말했다.

 

 

“ 지나가 그러더라, 세레브랴코프의 낯짝을 한방 날려주고 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

 

“ 그 아가씨답네. ”

 

“ 정말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 ”

 

“ 글쎄.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좀 늦었지. 그리고 넌 누굴 제대로 쳐본 적도 없잖아. ”

 

“ 그건 그래. 스탄카가 그때 끼어들어줘서 다행이야. 정말 그 자식 치고 싶지 않았거든. ”

 

“ 열받았다면서 어떻게 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수가 있어? ”

 

“ 모르겠네, 하여튼 난 누굴 패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어. 그래봤자 별 소용없잖아. ”

 

“ 지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주먹질을 한번 하거나 적어도 욕이라도 해주면 그 자식도 한풀 꺾일 거야. 그런 놈들은 항상 그래. 네가 계속 내버려두니까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

 

“ 뭐, 나타샤? 계집애 같다는 말? 그건 춤 때문이야. 그러니까 두들겨 패봤자 해결이 안돼. ”

 

“ 세레브랴코프는 왜 그렇게 네 춤을 싫어해? ”

 

“ 그는 교조주의자야. 가장 끔찍한 게 뭔지 알아? 그건 자기 예술을 강령처럼 믿는 것, 그걸 다른 모두에게 강요하는 거야. 우리의 잘난 공산주의와 일당 독재와 집단주의처럼. 근데 세상 어디에도 그렇게 단순한 건 없어. 예술은 더 그래. 아니, 내게는 춤 말고 다른 걸 얘기할 자격이 없지.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에게 자기가 내키는 대로 추라고 해, 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작자의 참견은 받고 싶지 않아. 그자는 자기 강령을 따라 깃발을 휘두르며 춤을 추고 나는 내 몫의 허공으로 나가면 돼. 길을 잃든 헛디디든 추락하든 그건 온전히 내가 감당할 무게일 뿐이야. 난 그자의 이상과 꿈을 믿지 않아. 춤이 종교가 될 수도 없고 규율이나 원칙이 될 수도 없어. 공산주의자였던 적도 없고 소비에트 이념을 믿어본 적도 없는 내가 왜 그 얼간이의 질서를 따라야 해. ”

 

“ 세레브랴코프의 질서는 뭔데? ”

 

“ 그는 자기 고환으로 춤을 추지. ”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드는 듯 미샤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트로이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필터 언저리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카펫 귀퉁이에 문질러 끈 후 나머지 연기를 트로이의 가슴팍에 천천히 불어 날렸다. 트로이는 미샤의 코트를 끌어당겨 활짝 펼친 후 서로의 몸을 덮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도 코트 안쪽에 배어 있는 낯익은 고급 향수 내음과 은밀하게 깔려 있는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젖은 숲의 흙 냄새, 그리고 딱히 규명하기 힘든 쏘는 듯하고 무겁고 달콤한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후자는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몸 구석구석에 키스를 하거나 혀와 이로 빨아 당겼을 때 그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트로이는 사라토프의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유리병 속에 채워놓았던 끈끈하고 짙은 색깔의 꿀을 생각했다. 숲의 꽃과 나무에서 채취해 만든 그 꿀은 너무 진하고 독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어린 손자가 아무리 졸라도 몇 방울 이상은 결코 주지 않았다. 아주 아플 때만 홍차에 한 숟가락을 통째로 녹여 주었다. 어린 시절 트로이는 그 차를 마실 때마다 심하게 취해서 24시간을 내리 잤다.

 

 

“ 그럼 넌? ”

 

아, 나도 그런 부분이 있지. 어쨌든 사내자식이니까. 하지만 전부는 아냐. ”

 

 

코트 아래에서 몸을 좀 더 바짝 붙여오며 미샤가 약간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세레브랴코프가 날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자기 자리를 빼앗는 게 두려워서가 아냐. 내가 무대 위에서 그 굳건한 남성성의 환각을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지. 신사적이고 기사도 넘치고 파트너를 견고하게 지지해 주는 남자, 필요한 순간 검을 빼들고 달려가 적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 언제나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찬 남자, 왕자님, 기사, 귀족, 깃발 든 혁명가, 전쟁터의 장군, 여자를 지켜주는 남자, 당의 기치를 앞장서서 체현하는 진짜 남자. 반듯하고 우아하며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파트너.

그렇게 추는 게 어렵지는 않아,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은 거기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 난 연습을 많이 했어, 엄청나게 혹독하게 배웠어. 꼭 춰야 한다면 그렇게 추겠지. 그게 바로 키로프의 기본기라는 거니까. 남자 무용수의 기본기.

그런데 말야, 안드레이. 그 모든 건 사실 고환과 음경과 정액으로 이루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아. 발레리나들이 유방과 질과 눈물로 우아하고 연약한 공주님의 환각을 만들어내듯 남자 무용수들도 마찬가지야. 세레브랴코프의 가차 없는 남성성이 빚어낸 질서 맞은편에 발레리나들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아성이 도사리고 있어. 난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건 단순한 섹스의 문제가 아냐. 성이란 건, 아니 인간이란 건 그렇게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 한편에는 빛, 한편에는 어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과 몸이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다면 행복할 텐데.

안드레이, 어쩌면 그건 인간 전체에 대한 얘기가 아닌지도 몰라. 그저 나 자신에 대한 얘기일 뿐인지도 몰라. 난 사람 마음을 모른다면서. 그러니 인간에 대해서도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되겠지. 난 틈새로 들어가고 바닥도 출구도 없는 안개 속에서 춤을 춰. 내가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그곳에서 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냐,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냐. 그곳에는 빛이 있고 어둠이 있겠지. 황혼도, 수면도, 어쩌면 눈보라도. 하지만 난 단지 움직임일 뿐이야. 계속해서 뛰고 날고 떨어지고 넘어지는 것 뿐이야. 멈추면 사라질 테니까. 거기 고통이 있어, 두려움이 있어. 나는, 난 멈추게 될까봐 두려워. 사라지고 싶지 않아. 세레브랴코프는 그런 공포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는 강령을 선택했으니까. ”

 

 

미샤는 더 이상 트로이에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교회 종탑을 마주하고 고해하듯 나직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고백이 너무나 괴롭고도 개인적이어서, 또 한없이 조용하고 부드러워서 트로이는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과 죄책감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는 춤을 춰본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진정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인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스타니슬라프 일린은 이해할지도 모른다. 모스크바에서 온 그 안무가, 스탄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미지의 남자. 어쩌면 유리 아스케로프도 전부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미샤를 알았으니까, 미샤는 움직일 수 없는 그 무서운 순간 아스케로프가 곁에 와주기를 원했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스케로프는 미샤의 춤에 관심이 없었다. 춤 나부랭이라고 비하했고 미샤에게 하잘것없는 춤을 포기하고 그만 내려오는 게 낫다고 꾸짖었다. 그자는 오직 미샤에게 성적으로 완전히 반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온전히 그 아이의 몸과 마음에 대한 욕망과 애정일 뿐 춤과 재능에 대한 갈망은 아니었다. 그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는 그만큼 복잡하고 음울한 남자가 아니었다.

 

 

미샤는 갑작스럽게 말을 뚝 끊었다.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생각을 토로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었고 졸려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울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스케로프와는 달리 트로이는 미샤가 우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후 트로이는 쑤시고 결리는 몸을 거실 바닥에서 일으켰다. 미샤는 그가 일어난 것도 모르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코트 째로 미샤를 쓸어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옷을 치우고 모포를 덮어주면서 트로이는 그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목덜미의 상처는 다시 하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허벅지의 칼자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랫배와 허리, 골반과 옆구리 구석구석에 찍혀 있는 트로이의 손자국은 반쯤은 자주색이고 반쯤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일그러진 꽃처럼 옆으로 퍼지며 증식하고 있었다.

 

 

아마 미샤가 무대에 올라가야 하지 않았다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의 몸에 깨끗하게 남아 있는 하얀 살갗 구석구석 전부를 붉고 검은 자국으로 뒤덮었을 것이다. 이마와 뺨과 턱도 예외 없이, 부드러운 눈꺼풀과 입술조차 피해가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머리카락과 눈동자와 치아와 혓바닥 위에, 살갗 아래 혈관과 근육과 신경 위에도 자국을 냈을 것이다. 해독할 수도 없는 문자를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차마 자기 이름을 쓸 용기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서랍 속에 숨어 있는 노트와 수첩과 종이쪽지 위에 잉크 범벅이 되어 도사리고 있는 단어와 구절들이었을 것이다. 그 어눌하고 수치스러운 언어들은 그 찬란하게 타오르는 애에게 닿는 순간 녹아내려 사라질 것이다.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

 

 



<쓰고 난 다음날 : 교조주의, 강령으로서의 예술, 2012.12.7>



어제 저 주제에 대한 부분을 쓰면서 내가 겪었던 몇가지 좌절과 절망스러웠던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저 글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사회는 지금 서울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메가폴리스가 아니라 전체주의와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70년대 공산사회의 레닌그라드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점은 존재한다.


 
.. 중략 ..


 
여전히 난 예술이 강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나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표현 양태는 무수하게 존재하며 어느 한가지만 옳다고 우기는 것은 교만이며 폭력이다.

 

...

 

 

 

좀 우울한 얘기였으니까 무용수들 화보 몇 장.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저 글을 쓸때 가졌던 느낌과 약간은 비슷한 사진들을 골라봤다.

 

 

 

 

 

세르게이 폴루닌.

 

 

마린스키 무용수들. 슈클랴로프와 테료쉬키나, 스코릭, 김기민씨 등이 섞여 있다.

웨인 맥그리거의 인프라 추는 중. 재작년에 마린스키 무대에서 이 작품 보고 반했었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매우 유명한 사진. 루돌프 누레예프.

 

 

 

파루흐 루지마토프.

 

 

 

파루흐 루지마토프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사진은 Mark Olich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사진은 Alex Gouliaev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젊은이와 죽음. 한장 더.

사진은 Alex Gouliaev.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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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3월 27일은 세계 극장의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도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극장이나 발레 관련 포스팅을 하나씩 올려보겠다. 월요일~금요일에는 아침 8시에 예약 포스팅 걸어두었다.

 

오늘은 마린스키 극장. 구관 내부 사진 몇 장과 무용수 화보들 몇장.

 

마린스키 사진은 작년 2월에 페트루슈카 보러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이다. 이땐 사이드 박스석에 앉아서 정면 사진들은 거의 아니다. 예전 사진들 뒤지면 정면에서 찍은 사진들도 꽤 있는데 귀찮아서(ㅜㅜ 게으름..)

 

 

 

 

 

 

 

 

 

 

 

 

 

이제 무용수 화보 몇 장.

알렉세이 티모페예프. 라 바야데르의 황금 신상 추는 중.

요즘 내가 눈여겨보는 무용수 중 하나. 작년에 해적에서 이 사람이 추는 랑켄뎀이 꽤 근사했었다.

 

 

 

 

 

프리드리만 보겔.

 

이 사람이 와서 추는 라 바야데르 보고픈데 지금같은 상황으론 그림의 떡 ㅠㅠ

 

 

 

 

언제까지나 나의 뮤즈 중 하나로 남아 있을 루돌프 누레예프.

 

 

 

 

 

몇년 전 사진인데 볼때마다 찡하다. 마야 플리세츠카야 축하공연 때... 가운데가 플리세츠카야. 왼쪽에서 하얀 옷 입고 방긋 웃는 것이 슈클랴로프(오른편 뒤를 보면 함께 돈키호테를 춘 빅토리야 테료쉬키나도 보이고 그 옆은 아마도 안드리스 리에파인 듯) 오른편은 일리야 쿠즈네초프.

 

극장의 날이니까... 꽃과 마야, 그리고 꽃돌이..

 

 

 

 

 

이건 작년.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갈라 공연 때. 슈클랴로프는 파키타를 같이 췄었다. 끝나고 뽀뽀하는 중 :) 꽃도 꽃돌이도 이쁘구나. 왼편에 얼굴만 보이는 건 콘스탄틴 즈베레프.

 

 

 

 

마지막 사진은 Valentin Baranovsky가 찍은 마린스키 극장 무대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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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린 사진도 두어 장 있다만.

마음의 위안을 위해 무용수 화보 몇 장.

 

루돌프 누레예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진이다.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한동안 이 사진을 월페이퍼에 깔아놓고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루돌프 누레예프.

 

 

 

블라지미르 말라호프.

사진사는 캡션에 나와 있듯 nina alovert

 

 

 

디아나 비슈뇨바

 

 

 

이제부터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2013년 베네피스 공연 때 파리 오페라 극장의 도로테 질베르가 니키야를 맡아서 라 바야데르의 망령의 왕국을 함께 췄다. 도로테 질베르야 괜찮은 무용수지만 확실히 라 바야데르의 니키야는 마린스키 발레리나들이 훨씬 어울렸다. 테료쉬키나가 아쉬웠다.

질베르와 리허설 중 찍힌 사진. 허리가 아팠는지 밴드를 대고 있네..

 

 

댄스 오픈 페스티벌.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함께 흑조 2인무 추는 중,

사진은 jack devant

 

 

 

로미오와 줄리엣. 디아나 비슈뇨바와 함께.

얼굴은 거의 안 보이지만 몸짓만으로도 정말 간절하고 애절한 느낌이 그대로 배어나오는 사진이라 좋아한다.

 

 

 

전에 올린 적 있다. 롤랑 프티의 젊은이와 죽음 화보 중 하나.

사진사는 alex gouliaev

매우 좋아하는 화보이다.

내가 이 사람을 무용수로서 다시 평가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 몇년 전 마린스키에서 슈클랴로프가 춘 이 작품 보고 돌아오는 길 내내 공연이 너무 좋아서 몸이 떨렸다. 그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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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월 6일은 루돌프 누레예프가 사망한 날이다.

그를 기념하며 사진 몇 장 올려본다..

 

 

 

 

 

 

 

 

 

맨 아래 사진은 젊은이와 죽음. 이 동영상 클립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2389

 

안녕, 루딕. 우리에게 와 줘서 고마워요.

 

** 태그의 '루돌프 누레예프'를 클릭하면 전에 이 사람에 대해 올린 포스팅을 여러 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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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피로한 일주일이었지만 이제 주말. 금요일 밤이다. 자기 전에 좋아하는 무용수 사진 몇 장.

 

최근 페이스북에서 발견한 사진. 루돌프 누레예프.

 

이 사진은 묘하게 사람을 사로잡는다. 아마도 사진 속에 잡힌 누레예프가 톱스타, 최고의 무용수라기보다는 어딘가 야위고 지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때로 한 장의 사진은 한 권의 책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뭔가를 느끼게 한다.

 

 

 

디아나 비슈네바. 로미오와 줄리엣.

 

 

 

금요일이니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도 세 장~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함께. 흑조 2인무.

사진은 Stas Levshin.

 

 

역시 테료쉬키나와 함께. 돈키호테 결혼식 2인무.

 

 

마지막으로. 올레샤 노비코바와 함께.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Le Parc 리허설 중. 연습 중이라 둘 다 맨얼굴이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둘이 무대에서 춘 진짜 작품 동영상의 이 장면보다 이 사진이 더 좋아보인다.

 

사진은 캡션에 나와 있듯 Alex Goulia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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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한 주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마음의 위안을 위해 좋아하는 무용수들 사진 몇 장.

 

연습실의 무용수들과 마찬가지로 분장실의 무용수 사진 보는 것도 좋아한다.

 

이건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사진사는 Alex Gouliaev.

 

 

 

이건 파루흐 루지마토프. '온순한 여자' 필름 촬영할 때라고 캡션이 붙어 있었다.

 

 

 

이 사진은 전에 한번 올렸지만.. 수많은 누레예프의 멋진 사진들 중에서도 내가 매우 좋아하는 사진이다.

 

루돌프 누레예프와 프레드릭 애쉬튼.

 

 

 

그리고 분장실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 두 장.

 

둘 다 사진사는 Katya Kravtsova. 작년 댄스 오픈 페스티벌 때, 분장실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에서 가운데 분장 받고 있는 남자는 올레그 마르코프,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까만 조끼 입은 남자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거울에도 비치고 있다. 얘는 이미 분장은 완료한 후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헤어 스타일 점검 중. 미용실에서나 쓸 법한 거대 헤어 드라이어로 앞머리 세우고 계심. 2013년이니까 아마 테료쉬키나와 흑조 2인무 췄을 때인 것 같다. 그런데 안쪽에 입은 루바슈카 소매를 보니 차이코프스키 파 드 두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2014년에 췄는데. 작년 댄스 오픈 영상은 제대로 못 봐서 잘 모르겠네.

 

어쨌든 머리를 저렇게 가르마 타고 앞머리 세우고 있는 걸 보니 로미오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이 사람이 로미오처럼 앞머리를 살짝 내린 스타일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원 미모가 뛰어나니 사실 어떻든 큰 상관은 없을 듯.

 

그건 그렇고 드라이 하면서 눈에 힘주고 있는 걸 보니 엄청 집중해서 머리 세우고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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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린 마린스키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리뷰(http://tveye.tistory.com/3002)에 이어.

 

1. 루돌프 누레예프와 마고트 폰테인의 오리지널.

화질은 별로 좋지 않고 영화식으로 편집되어 살짝 아쉽긴 하지만.

 

 

 

2. 그리고 이건 내가 리뷰 올렸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빅토리야 테료쉬키나가 춘 버전,

앞부분(마르그리트의 환영, 첫 만남, 교외 보금자리 약간) 발췌 클립. 아마 관객 중 누군가가 캠으로 찍은 듯...

 

확실히 캠 버전에는 한계가 있어서 원 무대와는 느낌이 좀 다르다. 좀 아쉬운 게, 이들의 무대는 뒤로 갈수록 근사했기 때문에 앞보다는 뒤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쨌든 링크 올려본다. 위의 오리지널과는 느낌이 꽤 다르다.

 

 

 

유튜브에는 세르게이 폴루닌이나 자하로바, 로파트키나, 타마라 로요 등 다른 무용수들이 춘 버전도 올라와있으니 비교해 보시면 좋을 듯. 감상자의 취향에 따라 잘 맞는 무용수들이 있을 것 같다.

 

 

3. 이번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공연 관련 마린스키 사이트에 올라왔던 화보들 몇 장. 슈클랴로프와 테료쉬키나만 발췌. 로파트키나와 아스케로프가 궁금하신 분들은 마린스키 페이스북이나 브 콘탁트 사이트 참조.

 

 

 

 

 

 

 

 

 

 

 

 

 

 

 

 

 

이 마지막 사진은 'neznaika' 라는 러시아 팬이 찍은 것. 교외 보금자리 사랑의 듀엣 장면.

 

** 내가 찍었던 커튼 콜 사진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2973, http://tveye.tistory.com/2966

 

 

** 다음 리뷰는 테료쉬키나 & 슈클랴로프 & 마트비옌코의 라 바야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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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는 모두 마린스키 사이트. 이 포스터에서는 왼편이 아스케로프와 로파트키나, 오른편이 테료쉬키나와 슈클랴로프)

 

 

바쁘고 피곤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뒤늦게 올리는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리뷰. 별로 체계적이거나 전문적인 건 아니고, 그냥 감상 위주.

 

이 날 프로그램은 3개의 단막 발레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순서대로 미하일 포킨의 '쇼피니아나', 제롬 로빈스의 'in the night', 그리고 마지막 작품이 프레드릭 애쉬튼의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이었다. 전자 두 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린스키에서 몇 번 봤고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은 무대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쇼피니아나와 인 더 나잇은 나중에 따로 짧은 메모 올려보고 오늘은 일단 마르그리트와 아르망만..

 

먼저 간단한 공연 정보는 다음과 같다.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음악 : 프란츠 리스트

안무 : 프레드릭 애쉬튼

무대 미술 및 의상 : 세실 비통

 

<주요 배역>

마르그리트 : 빅토리야 테료쉬키나

아르망 :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아르망의 아버지 : 안드레이 야코블레프

 

<시놉시스>

 

동백꽃 아가씨(마르그리트)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어가는 중이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자신의 비극적 삶에서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을 반추한다.

 

<극 순서>

프롤로그 - 만남 - 교외의 별장 - 모욕 - 마르그리트의 죽음

 

 

..

 

1. 누레예프와 폰테인, 오리지널, 애쉬튼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이라는 작품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마고트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의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애쉬튼은 이들을 위해 이 작품을 안무했고 생전에는 다른 무용수들에게 역을 내주지 않았다. 망명한 젊은 누레예프가 마고트 폰테인에게 끼친 영향과 둘의 듀엣이란 워낙 유명한 이야기여서 따로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리지널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얘기 전에.. 나는 누레예프를 아주 좋아한다. 오래 전 맨 처음 발레를 보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명의 인물이 있다면 그건 너무나 전설적인 니진스키와 누레예프였다. 그의 춤도, 그라는 인물도, 그의 치열했던 삶도 모두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지금도 그에 대한 나의 경의는 변함이 없다. 니진스키도 마찬가지이지만, 루돌프 누레예프란 이름 없이 20세기부터 지금까지의 남성 발레 무용수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리지널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은 전에도 필름으로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사실 옛날에 맨 처음 누레예프 화보집 샀을 때 사진으로 먼저 봤는데, 그때는 작품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는 상태였지만 둘의 화보가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 넋을 빼앗겼던 기억이 난다.

 

그것과는 별개로, 필름으로 보면서는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흠, 난 애쉬튼과는 어딘가 맞지 않아...

 

그러니까.. 폰테인은 너무나 우아하고 애처롭다. 누레예프의 성적 자력은 굉장하다. 그러나 애쉬튼의 안무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발레는 매우 드라마틱하고, 리스트 음악도 마찬가지이고, 두 무용수는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애쉬튼 안무는 내 취향보다는 너무 젠체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건 개인적 취향이긴 한데, 난 애쉬튼의 다른 작품들을 볼 때도 거의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드라마틱하면서도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유연하게 따라가며 이입할 수 있는 안무를 좋아하는 편인데 애쉬튼은 내겐 좀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건 지난번에 본 실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연미복 재킷과 흰 타이츠를 차려입고 춤을 춘다는데, 심지어 여자에게 지폐를 흩뿌리는 분노의 연기를 보여준다는데 여기 애쉬튼의 안무고 취향이고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분명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로 가서 누레예프와 폰테인의 이 무대를 봤다면 그때도 애쉬튼이고 안무고 간에 누레예프의 춤을 보느라 넋놓고 있었겠지. 무용수가 그만한 자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재능이자 축복이다.

 

 

2. 마린스키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전체 리뷰

 

 

 

 

마린스키에 공연을 보러 갔다. 그간 내가 여러 가지 일로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을 가엾이 여긴 료샤가 나를 위해 앞자리 표를 끊어주었다. 앞에서 세번째 줄 가운데 자리로 꽤 좋은 자리였지만, 역시나 앞자리 발샤야 갈라바(큰 머리)로 괴로워하다가 In the night 부터는 비장의 필살기 책 깔고 앉기를 다시 시전.. 그리하여 그나마 덜 가리고 봤다.

 

초연이었고(비록 로파트키나와 예르마코프가 '13년에 이미 추긴 했지만), 첫 날은 울리야나 로파트키나와 티무르 아스케로프, 둘째 날이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였다. 물론 나도 로파트키나가 추는 걸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르망을 슈클랴로프가 춘다는데.. 당연히 그게 우선(ㅜ.ㅜ)  게다가 난 티무르 아스케로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중에 관객들 평을 보니 의외로 둘째 날이 더 좋았다는 얘기가 훨씬 많았다. 훨씬 절절하고 이입이 잘됐다는 평이었다. 첫날 걸 안봐서 모르겠지만 나도 동의한다. 테료쉬키나와 슈클랴로프는 워낙 호흡을 많이 맞춰본데다 드라마틱한 연기력이 좋기 때문에 감정선이 살아 있었다.

 

발레의 내용이야 익히 잘 알려진 소 뒤마의 춘희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여타의 각색 버전들과 다른 것은 길이가 30분 이내로 매우 짧고 주요 사건들만 스피디하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무대 디자인이나 의상 등은 오리지널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실비아와 마찬가지로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아르망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눈호강은 실컷 하겠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의외로 애쉬튼 안무를 그리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몰입해서 보았다. 물론 영상과 무대의 차이도 있고, 두 무용수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해서 마치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허구가 아니라 실재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라면 이미 그들의 춤이나 테크닉, 다른 디테일들에 대한 사항들은 뒤로 밀려난다. 허구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무대가 더 이상 '연기'나 '공연'으로 느껴지지 않을만큼, 진짜 현실처럼 관객을 사로잡는 순간 그 무대는 '진짜'가 된다. 그만큼 테료쉬키나와 슈클랴로프의 감정선은 강렬하게 살아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무척 몰입해서 봤다. 사실 맨 처음 무도회장 장면에서 슈클랴로프 아르망이 파란 연미복을 입고 등장해 붉은 드레스의 테료쉬키나 마르그리트와 춤추기 시작할때는 나도 모르게 누레예프와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뒤로 갈수록 둘의 눈빛과 움직임, 서로를 향한 갈망과 고통, 슬픔이 절절해지면서 그런 생각은 멀리 달아났다.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고 아르망이 마르그리트를 거칠게 붙잡아 돌려세우고 목걸이를 잡아채고 지폐 뿌리는 장면에서는 관객들 모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몰입했다. 종반에 마르그리트의 숨이 끊어지고 아르망이 슬픔에 젖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관객들은 열띤 갈채와 브라보를 보냈다. 같은 애쉬튼 작품이었고 초연이었던 실비아와 비교해보면 두세 배는 더 뜨거웠다. 이쪽 관객들도 감정적으로 이입되는 드라마틱한 비극에 더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커튼 콜도 수 차례 계속되었고 불도 켜지고 다들 나가는 가운데에도 열혈 팬들은 끝까지 남아 끈질기게 박수를 쳤다. 나도 나가려다 반응이 재미있어 남아 있었는데 정말 둘이 다시 나와서 무척 좋았다 :)

 

내 옆에 있던 중년 아주머니는 나에게 '박수쳐요, 계속 박수쳐~" 하고 부추겼는데 너무 몰입하고 흥겨워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무대와 무용수들에게 그렇게 사로잡혀 행복한 열기를 발산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좋았다. 이날 테료쉬키나와 슈클랴로프 팬들이 많이 왔는데 2~3층에 포진한 채 계속해서 브라보~ , 벨리꼬레쁘노~(위대하고 근사하다는 뜻의 노어)를 우렁차게 연발. (이 분들은 라 바야데르 때도 오심)

 

전반적으로 무척 몰입해서 봤다. 테료쉬키나와 슈클랴로프가 추는 버전이라면 다시 볼 의향이 있을 정도로. (실비아는 그렇지 않았다!)

 

리스트의 음악도 그렇고 사실 이 작품의 안무는 꽤 허세 넘치고 작위적이란 느낌이 좀 든다. 아마 내가 누레예프가 추는 오리지널 생각을 해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애쉬튼이 누레예프에게 준 솔로는 특히 그런 느낌이다. 누레예프란 무용수의 카리스마와 성적 자력 때문일수도 있지만.. 그의 아르망은 상당히 수탉 같고 공작새 같은 인물이었다.(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고, 누레예프란 무용수에겐 이런 특질이 있다. 그만큼 화려하고 도도하고 오만하고 자력 넘친다는 얘기다) 그런데 누레예프의 이런 특질과 애쉬튼의 젠체하는 안무, 리스트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내겐 좀 'over the top'이란 느낌을 주곤 했다. 폰테인의 마르그리트는 참으로 애처롭고 청순하긴 한데 또 너무 청순하다는 느낌이었고. 아마 그래서 내가 오리지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나보다.

 

마린스키 버전은 사실 '진짜' 애쉬튼 팬들이라면 아쉬워할지도 모르겠다. 전에 실비아 때도 그런 얘기가 좀 있긴 했지만, 애쉬튼을 제대로 구현했다기보다는 꽤 러시아적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선도 그렇고 둘을 해석하는 테료쉬키나와 슈클랴로프도 그랬다. 물론 러시아적인 작품들도 over the top인 경우가 무지 많다. 그런데 난 이쪽의 과잉은 또 취향에 맞는 것 같다.

 

 

3.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의 마르그리트

 

 

슈클랴로프 얘긴 아래 따로 하고. 빅토리야 테료쉬키나에 대해 잠깐.

 

테료쉬키나는 좋은 무용수이다. 테크닉과 연기 양쪽 모두 더할 나위 없다. 물론 이 사람에게도 특질은 있다. 외모도 그렇고 춤추는 스타일도 여리여리하고 청순하기보다는 강렬한 쪽이다. (오데트보다는 오딜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은 캐릭터가 지닌 속성보다도 훨씬 세 보이거나 강력해보여서 몰입이 안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이 사람과 슈클랴로프의 듀엣은 거의 언제나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바로 이런 속성이 슈클랴로프의 소년다운 속성과 만나면서 둘이 가끔 '기 센 누나와 연하의 온순한 애인' 느낌을 자아낼 때가 있다. (그래서 이 둘의 조바이다와 황금노예 페어는 좀 내 취향과 어긋났다)

 

마르그리트 역의 테료쉬키나는 무척 좋았다. 물론 그녀의 마르그리트는 폰테인처럼 툭 건드리면 눈물이 똑똑 떨어질 것처럼 청순하고 연약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 마르그리트가 아주 강단있고 전투적인 타입도 아니었다. 테료쉬키나의 마르그리트는 그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고 고통받은 여인이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온몸을 던져 아르망의 아버지에게 애원하고 사랑하는 아르망을 향해 매달리는 그녀의 연기는 한없이 애처롭다기보다는 무척 고통스러웠다. 처절하게 울부짖고 몸부림치고 마침내 죽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죽지 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에게 그런 간절한 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그건 성공한 무대인 것이다.

 

며칠 후 라 바야데르를 보면서 다시 느꼈다. 테료쉬키나는 생각보다 더 좋은 무용수구나.. 적어도 니키야 역에는 아주 잘 어울리는 무용수였다.

 

 

4.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아르망

 

이 부분은 팬으로서의 사심이 넘치는 애기들이라.. 좀 오글거려도 그러려니 해주시길.

 

슈클랴로프의 팬이라면 꼭 한 번 볼만한 무대였다. 그 이유는..

 

1. 미모의 절정 :)

2. 목걸이 잡아채고 지폐 뿌리는 슈클랴로프 (!!)

3. 이 사람의 강점인 드라마틱한 연인 배역!

 

이 사람이 깨끗한 포즈와 훌륭한 도약, 탁월한 연기력에 비해 몇 가지 테크닉이나 파트너링 부분에서 결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테료쉬키나와는 호흡이 잘 맞아서 그런지 이 무대에서는 별로 그런 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슈클랴로프의 장점 중 하나는 바로 무대에서 뿜어내는 자력이다. 물론 그건 (아쉽게도) 루돌프 누레예프 같은 성적 자력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로잡는 뭔가는 분명 갖고 있다. 앞선 쇼피니아나와 in the night 무대에서는 남자 무용수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조명이나 하이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작품들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아우라가 있다. 이 사람은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눈에 확 띄는 타입이다. 그게 또렷하고 잘생긴 이목구비 덕을 보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 요즘 마린스키 남자 무용수치고는 키도 크지 않고 따라서 체격도 당당하지 않은데다 비율도 완벽하지 않은 편이라 그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확 사로잡을 수 있는 건 재능이다. 

 

세실 비통이 디자인했던 아르망의 의상이 무척 잘 어울렸다. 파란 프록코트, 검정 프록코트, 그리고 흰색 루바슈카 셔츠와 타이츠 모두가 이 사람을 위한 듯 딱 들어맞았다.

 

슈클랴로프의 아르망은 누레예프의 공작새 같고 살짝 이기적이면서도 섹시한 아르망과는 달랐다. 이게 취향에 따라 부정적 평을 받을수도 있는 부분인데, 이 사람의 아르망은 좀 로미오 같았다. (어떤 관객은 폴루닌의 아르망과 비교하면서 너무 귀엽고 철없는 왕자님 같은 아르망이라고 했었다) 원체 외모부터 시작해 소년다운 특질이 있는 무용수라서 드라마틱한 연인에는 매우 잘 어울리지만 어딘가 청순한 구석이 있다. 특히 흰색 루바슈카와 타이츠 차림으로 교외 보금자리에서 마르그리트와 춤출땐 더 로미오 같았다. (그래도 소파에 누워 마르그리트와 키스할 때는 너무 근사해서 여성 관객들의 혼을 뺏음)

 

절정부의 무도회장에서 돈 뿌리는 씬인데. 이때 검은 재킷으로 갈아입은데다 입술을 붉게 칠하고 나타났다. 그 효과란 대단한 것이어서 테료쉬키나도 안 보이고 이 사람의 창백한 미모만 광채를 발함(분명 경고했음. 내가 오글거릴 거라고 했잖아요 ㅠㅠ) 게다가, 이 사람이 이렇게 확 타올라서 부르르 떨고 여자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이며 그녀를 거칠게 잡아끌고 밀어붙이고 목걸이를 휙 잡아채 내던지고 지폐를 내던지는 모습을 또 어디서 보겠나... 거의 언제나 이 사람은 완벽한 왕자님이나 장난스런 바보 이반, 아니면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연인인데..

 

슈클랴로프의 춤은 뒤로 갈수록 좋았다. 아무래도 앞부분에서는 내가 아직 누레예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사람이 해석한 아르망의 움직임은 오리지널의 그 분절적이고 허세 넘치고 공작새 같은 움직임과는 좀 달랐다. 좀 더 부드러웠고 어떤 측면에서는 살짝 여성적이었다. 어쩌면 그의 소년다운 매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반의 아르망과 교외 보금자리에서의 아르망은 사춘기 소년 느낌이 났고(그러니까 조금 로미오..) '남자'라는 느낌은 덜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이라는 제목부터 그렇듯, 이 작품은 무엇보다 남녀 주인공의 듀엣이 중요하다. 그리고 테료쉬키나와의 듀엣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종반의 비극적인 2인무는 정말 눈물을 자아냈다.

 

내가 이 무대에서 가장 감명받았던 순간은 바로 마지막, 마르그리트가 숨이 끊어진 직후였다. 연인이 세상을 떠나자 망연자실한 채 무릎을 꿇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슈클랴로프의 연기가 훌륭했다. 앞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표정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생생하게 볼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이 사람이 두 손을 미세하게 계속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섬세하고 훌륭한 연기였다. 둘의 감정선도 그렇고 마지막에 슈클랴로프가 보여준 슬픔은 너무나 진실하고 애절했다. 그런 진정성 있는 무대를 외면할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브라보가 나왔겠지.

 

 

 

 

.. 그리고 커튼 콜.

 

앞자리에 앉아있기도 했고.. 나중에 커튼 앞으로 테료쉬키나랑 나왔을땐 역시나 오케스트라 핏 앞으로 가서 그의 미모를 열심히 구경 :) 여기 미모의 결정체가 있구나.

 

변명하자면 나만 그런 거 아니었다.. 앞에 매달려 그의 미모에 넋나간 팬들 꽤 있었다. 아저씨 팬들도 있었다. 나중에 라 바야데르 리뷰 때 얘기하겠지만 어떤 아저씨는 대놓고 그의 미모를 칭찬했다 ㅋㅋ

 

 

5. 사족 : 초심자의 놀라운 이입

 

의외로 같이 보러 갔던 발레 초심자이자 예쁜 남자 무용수와 타이츠 혐오자(http://tveye.tistory.com/2979)인 내 친구 료샤는 엄청 감명을 받았다. 이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뜨겁고 뜨거운 러시아인의 심장을 가진 남자!

 

그는 뒤마의 춘희를 읽어본 적도 없고 라 트라비아타도 카멜리아 레이디도 이것도 저것도 전혀 모르는 인물이다. 라 바야데르 보며 졸았던 얘기도 전에 쓴 적 있듯이.. 발레는 진짜 거의 모른다.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한 리브레토만 알려줬다. 그리고는 '졸리면 그냥 자라'고 했다. (이미 앞의 쇼피니아나와 in the night 때 푹 주무심)

 

놀랍게도 그는 한순간도 졸지 않았다. 엄청나게 이입해서 봤다. 슈클랴로프의 아르망에 이입했다가 심지어 테료쉬키나의 마르그리트에게도 잠깐 이입했다. 처음엔 좀 정신없어 하다가(암전과 무대 배경 전환이 스피디하게 이루어지니 초심자는 첨에 좀 우왕좌왕할 수도 있다), 무도회장에서 아르망이 나타나 여자에게 반하고 춤추는 장면부터 시작해 마르그리트가 던지고 나간 꽃을 아르망이 아무에게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면서 집어드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혹하고 말았다.

 

교외 보금자리로 배경 전환되면서 암전됐을 때 료샤가 속삭이며 물어봤다.

 

" 여자 기침하는 거 많이 아픈 거야? 진짜 죽어? "

" 응, 죽을 거야. 원작이 그래. "

" 아, 안되는데. 안 죽었으면 좋겠다. "

 

이것은 괄목할만한 발전!!! 뿌듯한 마음과 함께 계속 봤다. 이때부터 난 무대에 폭 빠져서 얘 상대를 거의 해주지 않았는데 얘도 나름대로 열심히 보고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슈클랴로프 아르망이 나타나 마르그리트를 모욕하고 목걸이 잡아챌 때는 너무 놀라서 숨을 소리내 들이쉬더니만 지폐 뿌리는 장면에서는 '안돼, 그러면 안되지 ㅠㅠ'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아, 보람 있다!!! 이건 진짜 성공한 무대다!! 얘를 이렇게 집중하고 이입하게 만들다니! 고마워요 빅토리야, 블라지미르!

 

마지막에 테료쉬키나 마르그리트가 죽고 슈클랴로프 아르망이 슬픔을 토로하자 이 친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면서 투덜댔다. '아, 진짜 죽어버렸어 ㅠㅠ 남자는 어떻게 해...'

 

.. 이때는 너무 이입해서 봤는지 슈클랴로프의 순백색 타이츠에 대해서도 아무 말 안 했다 :) 내가 오케스트라 핏 앞으로 가서 그의 미모에 집중하고 있을 때도 쿠사리 안 줬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힘!!!!

 

 

...

 

 

어쩌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네...

동영상 클립이랑 오리지널 영상 링크는 내일.. 그리고 마린스키 측 화보들도 내일..

 

** 추가 **

 

슈클랴로프&테료쉬키나의 공연 클립 + 누레예프와 폰테인 오리지널 영상, 화보 : http://tveye.tistory.com/3006

 

** 내가 찍었던 커튼 콜 사진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2973, http://tveye.tistory.com/2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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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