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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선 두군데 숙소에 머물렀다.


두번째 숙소는 내가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아스토리야 호텔인데 여기는 로비 카페가 아름다운 푸른색과 녹색, 편안한 소파, 로모노소프 찻잔, 맛있는 디저트 등 여러가지로 내 마음에 쏙 들어서 페테르부르크 올때마다 이 카페에 자주 온다. 딴데 묵어도 들르고, 묵을땐 거의 격일에 한번은 가서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한번쯤 김릿을 마신다.




이 카페는 이렇게 피아노 연주를 해주는데 음악은 항상 같다. 올드팝, 이지 리스닝 팝 등등. 헤이 주드, 아이 저스트 콜드 투 세이 아이 러브 유, 플라이 미 투 더 문 등.. 몇년째 같다. 배경음악, 백색 소음에 충실하다.



이번에도 여기 카페에 자주 가서 차 마셨는데 내가 좋아하는 창가 자리는 피아노랑 가깝다. 피아니스트 뒷모습과 옆모습을 보곤 했다. 늘상 저렇게 연주복을 입은 채, 조금은 뻣뻣하고 조금은 심드렁한듯, 하지만 또 조금은 어색한듯, 그리고 ‘자 오늘도 똑같은 거 쳐야 하지만 그래도 해보자’ 하는 듯한 표정(이건 사실 내 상상임. 옆얼굴까지만 보여서 ㅋㅋ)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몇곡 치고. 잠깐 자리 비웠다 돌아와 다시 치고 등등..



이번에 이 연주자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몇년 전 쓴 글의 주요 인물이었던 트로이가 떠오르곤 했다. 트로이가 훨씬 키가 크고 머리색도 더 연하고 이따금 쓰는 안경도 훨씬 촌스러울테지만. 저 남자의 어깻짓이나 표정(그러니까 반쯤은 내가 상상한 표정), 늘상 같은 곡들을 연주하며 화려한 호텔 카페 한가운데에서 투명인간이나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인물. 어딘가 뻣뻣하면서도 살짝 부끄럼타는 듯한 느낌 때문에.



뭐 사실 다 내 상상이고 이미지다. 저분이 실제로 어떤지는 당연히 모른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여기 카페에 앉아 있을때마다 저 피아노 연주자를 보고 같은 곡들을 듣고 있자니 다시 글이 쓰고 싶고 트로이에 대해 쓰던 순간들과 그를 불러내던 과정들이 떠올라서 조금 행복했다.



...




아래는 그 글 초반부에서 트로이(본명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에 대해 서술한 부분 일부이다. 실제로는 이 인물에 대한 구상노트였는데 그것들을 거의 그대로 소설에 옮겼기 때문에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이 부분 포함 조금 더 길게 발췌하고 그 과정에 대한 메모 남긴 적이 있다. 링크는 맨 아래. 근데 폰으로 올리고 있어서 링크가 제대로 안걸릴수도 있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보통 그 정도로 키가 큰 사람들은 시선을 끌기 마련이지만 트로이츠키는 그렇지 않다. 아마 그의 별 특징 없는 머리색과 흐릿한 얼굴 윤곽, 언제나 앞으로 굽어 있는 어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197센티미터의 키에 언제나 뻣뻣하게 뒤엉키는 긴 팔다리를 늘어뜨린 나무인형 같은 사람이다. 새치가 드문드문 섞인 우중충하고 어두운 금발을 전형적인 문과 대학원생 스타일로 멋대가리 없이 짧게 깎은 데다 아무리 다림질을 해도 결국은 어딘가가 구겨지고 마는 셔츠와 소매가 접히는 재킷을 입고 다닌다. 구두 뒤축은 언제나 찌그러져 있고 바짓단에는 자주 진창 얼룩이 진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왼쪽 발을 살짝 끌면서 걷는다.



   
 부드러운 잿빛 눈의 뼈대가 굵고 조금 야윈 남자, 두세 명만 옆에 있어도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사람이다. 아마 당신은 네프스키 거리나 국립대학 앞 강변을 걷다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와 수십 차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임이나 파티에서 당신에게 그를 소개해준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 후 돌아서자마자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것이다.




http://tveye.tistory.com/m/7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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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