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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40분쯤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짐 찾고 버스 기다리느라 결국 6시 반 정도에 화정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블라디보스톡은 비행기로 2~3시간 내의 거리인데다 시차가 거의 없어(심지어 그쪽이 한시간 빠르다) 예전의 여행들과는 달리 여독이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아 그래도 다행이다.

 

 

공항에 내려서 폰으로 업무메일을 확인해보니 수십통이 쌓여 있었고 전부 빨리 답변해줘야 하는 것들 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에 갈땐 노트북을 안 들고 갔고 모바일로는 외국에서 회사메일 접속이 되지 않아 확인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몰라 다 내일로 미룬다... 내일이랑 모레는 작성해서 내야 하는 꽤 까다로운 보고서도 있다. 업무분장이 바뀌어서 나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흑.

 

 

이번 블라디보스톡 여행은 딱 두가지로 요약된다.

 

1.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2. 처음 러시아 갔을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1이야 뭐... 이 사람 공연 보러 간 거였으니 관광 같은 거 못하고 숙소가 너무 더웠어도 다 괜찮았다. 게다가 슈클랴로프와 얘기도 나누고 사인도 받고.... 다시 생각해도 꿈같네 :))

 

 

그와 이야기 나누고 포옹받은 것도 너무나 벅차고 좋았지만 무대가 더욱 좋았다. 나에게 있어 이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년 전보다 훨씬 원숙해지고 무대를 훨씬 더 편안하고 자유자재로 오가는 모습에 놀랐다. 원래부터 드라마틱하고 연기력도 뛰어나고 점프나 테크닉 등도 훌륭한 무용수였는데 곱사등이 망아지도 그렇고 어제 무대도 그렇고 두번 이상 보는 작품이 여럿이었기 때문에 확연하게 그 차이가 느껴졌다. 그는 더욱 훌륭해졌다. 그래서 기쁘고 괜히 벅찼다. 인간의 육체가 어디까지 아름다워질수 있는지, 어디까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유연하고 근사한지 그대로 보여주는 무대였다. 무척 고마웠다.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2는... 내가 묵었던 동네가 그야말로 옛날옛날 맨첨 러시아 갔을때 당시 동네 풍경이랑 너무 비슷해서.... 역시 대도시와는 다르구나 싶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이 중소도시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골은 아닌데 러시아 시골로 들어가면 장난아니겠구나, 그래서 러시아에서 만난 교수나 지인들이 러시아는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그리고 시골로 나뉜다고 했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튼 몸은 좀 피곤했고 관광은 거의 못했고 식생활은 엄청나게 부실했지만(동네에 뭔가 먹을 데가 하나도 없었음. 그래서 아이스크림, 체리 따위로 저녁 때우고 그랬음. 오늘 아침에도 도시락 컵라면 끓여먹고 공항 갔음-참고로 아침에 라면 절대 안 먹는 스타일임) 그래도 무척 행복한 여행이었다.

 

 

..

 

 

자신도 모르게 2년 전이 생각났다. 2015년 11월. 그때 나는 갑작스런 인사이동과 지방 발령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외 다른 이유들로 너무나 힘들어서 매일 울고 있었다. 발령 전에 미리 끊어놨던 마린스키 일본 공연이 있어 아주 힘들게 이틀 휴가를 내어 주말 끼고 도쿄로 혼자 갔다. 벽장 같이 좁은 비즈니스 호텔방에 처박혔다. 공연을 보러 갔는데 내 눈앞에서 슈클랴로프가 사랑의 전설을 추다가 부상당하는 걸 목격 ㅠㅠ 결국 로미오와 줄리엣은 못 추고 그는 돌아가버렸다.

 

 

그때 너무 힘들었다. 여행들 중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물론 작년 여름 페테르부르크로 도망치듯 날아갔을때도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는 '아예 그만둬야지'란 맘이 들기도 했고 곁에 료샤가 있어 주었고 좋은 분들도 만났다. 그러나 그때, 2년전 도쿄 우에노에서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그리고 보고 싶은 무용수의 공연을 보러 갔는데 그는 부상을 당했었다. 그때도 4일인가 묵었던 것 같다. 그때는 밤마다 울고, 혼자 우에노 고가를 걸어가다 울고, 지하철역에 딸린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도 울었다. 돌아오는 공항에서도 주저앉아 울다가 비행기 타지 말고 공항에 남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일년 정도 지난 후, 작년 여름에 슈클랴로프가 페테르부르크 잡지와 인터뷰를 했다. 바이에른으로 떠나는 시점이었다. 그 역시 그때 부상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대체 왜, 자신이 그때 무슨 실수를 했기에 그런 부상을 당했을까 하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작년에 도쿄 그 극장 무대에 다시 섰을때도 맘속으로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경우나 내용이야 전혀 다르지만 내가 지방 본사가 있는 동네 기차역에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던 것과 조금 비슷하다. 작년 여름에 나는 그 기차역에 거의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작년에 나와 트러블이 있었던 상사 때문이었다. 그 충격과 상처가 너무나 큰 나머지 나는 한동안 그 기차역 자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곳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 자체가 뱀들이 우글거리는 진흙탕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지로는 그 기차역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장소일 뿐이다. 진짜 두려움과 진짜 상처는 다른 것이다. 그저 하나의 물적 장소로 형상화되었을 뿐이다. 아마 슈클랴로프에게도 도쿄의 그 극장이 그런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부상으로 도쿄를 떠나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슈클랴로프는 이고르 젤렌스키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바이에른으로 오라고. 그때 그는 인생의 전환점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당연히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작은 상징들이나 연관성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글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부상당해 도쿄에서 고향 도시로 돌아가는 그의 절망과 새로운 선택에 대한 고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기자간담회에서 나는 사실 그런 것들에 대해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개인적이고 내밀한 질문이었고, 게다가 나는 기자가 아니었다.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해서(ㅋㅋ) 약간 이 바닥과 관계있는 업무를 내세워 질문을 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얼어버렸고(눈앞에 천사가 내려와 앉아 있으니 ㅋㅋ), 다들 너무나 유창한 러시아어로 얘기하고 있었는데 저런 내용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유창하게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마린스키 측에서 그걸 다 영상으로 찍고 있었고 그 동네 방송사들도 와있었기 때문에 너무 창피해서 도저히 마이크를 달라 할 수가 없었다. 으악, 더듬거리며 버벅대는 노어로 질문을!!

 

 

근데 지금은 또 후회됨 ㅋㅋ 물어볼 걸. 물론 물어봤다 해도 저런 질문이 아니라 아주 포멀하고 가벼운 질문을 했겠지만. 예를 들어,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역은 뭔가요 라든가... 실은 이번 볼쇼이의 '누레예프' 취소 사태에 대한 생각을 묻고도 싶었지만 그건 너무 민감한 주제였지

 

 

그래봤자!!! 백스테이지 따라들어가선 얼어붙어서 엄청나게 노어 버벅거리고 바보짓을.... 지금 생각해도 창피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여튼, 그는 그때 선택을 했고 나는 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남는 것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년까지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하지만 온전히 남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떠나는 것을 체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는 바이에른으로 갔다. 그때 나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레퍼토리들을 추고 싶어하는 것도, 그리고 아내에게도 프린시펄이 될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도 알지만 그래도 바이에른으로 가기에는 그 실력과 스타성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에게는 '마린스키=우리 극장' 이라는 웃기는 페테르부르크식 마인드가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일년만에 그의 무대를 보니(작년에 그가 떠나기 직전 무대를 여러개 봤었다) 그의 선택은 괜찮은 것이었고 또 필요한 거였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발로쟈, 당신은 멋있는 사람이에요.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뛰어난 예술가로군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모습보다 지금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고마워요 :)

 

..

 

 

으악, 지금 잠자리에 들어도 여섯시간 반 정도밖에 못 잘 것 같아... 그런데 잠이 아직 안와... 블라디보스톡보다 한시간 느리긴 하지만 거기 있을때 맨날 공연 보고 새벽에 자다 보니... 안돼, 난 내일 새벽에 일어나 기차를 타야 한다아아...

 

 

이번 주말은 힘드니까 2집에서 보낼 것 같다. 아까 가방 풀면서 짐의 절반쯤은 작은 캐리어에 다시 쑤셔넣었다. 그거 끌고 내일 내려간다.

 

 

짧은 여행 동안 글 달아주신 분들 감사해요. 내일이나 주말쯤 답글도 달고 블로그들에도 찾아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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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