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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료샤가 자기 아빠 생일 파티에 혼자 가기 싫다고(무섭고 근엄한 아빠와 젊은 새엄마 나타샤의 합동공격이 무섭다고) 나에게 자꾸 아빠 집에 같이 가자고 졸라댔었다. 나 역시 료샤 아빠네 집은 불편했고 나타샤라면 더더욱 불편했다. 게다가 나이든 사업가들이 오는 파티 + 부부동반 등등이라 내가 가기에는 아무래도 좀 이상하고 불편했다. 공연히 오해받기 쉬운 자리이고...

 

게다가 나는 이틀만에 아무렇게나 짐싸서(오직 보온을 위한 옷들만 쑤셔넣고) 그냥 막 날아갔던 때라서 입고 갈 옷도 없었다. 패딩코트와 기모바지와 기모스타킹, 스웨터, 어그 부츠 뭐 그런 것만 있었다. 그런데 료샤 아빠는 부르주아 오브 부르주아 졸부고 다들 잘 차려입고 와서 부티 자랑하는 사람들일게 뻔해서 나는 료샤에게 잘 생각해봐라 불편하기도 하지만 나는 입고 갈 옷도 없지 않니 하고 핑계를 댔다.

사실은 옷도 옷이지만, 료샤의 전부인 이라도 그렇고 오지랖 넓은 젊은 새엄마 나타샤-료샤랑 나보다 어림!-도 그렇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사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상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이라는 전남편 료샤가 나와 친한데다 아들인 레냐마저 나에게 '미래의 약혼녀' 운운하자 짜증이 났는지 나를 거의 불여우 취급한다. 대체 말이되냐!! 난 토끼 한마리라고... 쭉쭉빵빵 글래머 키큰 미녀들이 즐비한 너네 동네에서 내가 무슨 불여우여 ㅠㅠ)

 

하여튼 료샤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를 잘 못하고 또 '남들이 좀 오해하면 어때 자고로 성인남녀가 함께 다니면 그런 오해받는 건 어쩔 수 없지 너랑 나랑 그런 관계 아니기만 하면 되지롱~' 하는 주의라서... 뭐 나도 기본적으로는 동의한다만 하여튼 료샤 주변인들의 입소문에 오르내리면 괜히 나만 피곤해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료샤 아빠네는 가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옷 핑계를 대면서도 아빠 등쌀에 괴로워하는 료샤가 불쌍하고 또 평소 사내의 자존심 내세우며 안 그러던 놈이 너무 애절하게 나한테 '같이 가주라' 하고 부탁을 해대서 45% 쯤 '같이 가줄까' 하고 있던 찰나였다.

 

이 얘기를 그 날도 쓰긴 썼다만... 하여튼 그때 료샤는 이 순간 '여자사람 친구' 앞에서는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말았다. '옷 없으면 내가 한벌 사줄게! 가다가 부띠끄 가서...' 라는 망발을 한 것이다. 순간 난 욱해서 '야! 난 유니클로 티셔츠랑 파자마 입고 방에서 쉴 거야! 내가 왜 친구가 사주는 부띠끄 쁠라찌예(드레스 -_-) 덜컥 받아입고 그 아빠네 가야 돼!' 하고 폭발하고는... 결국 료샤는 슬퍼하며(얘가 왜 화를 내지 하고 이해 못하며) 혼자 가고 나는 유니클로랑 파자마 입고 호텔 방에 앉아 차 마시며 잡지 보고 놀았었다.

 

가다가 료샤는 뒤늦게 '아, 내가 옷 사준다 해서 얘가 삐친 거구나. 여자의 존심을 건드렸구나'라는 사실을 기특하게 깨닫긴 했는데, 그 얘기를 했을때 '근데 옷 얘기 안 했어도 나 안 갔을 거 같아'란 내 대답에 이번엔 지가 삐쳤다가 다음날 서로 잘 풀었다. 이날의 이야기는 http://tveye.tistory.com/5641 에 대화를 줄줄이 쓴 적이 있다.

 

..

 

그런데... 나 사실 고백하면 그때 울컥하는 순간에도 조금살짝... 료샤가 꺼낸 단어에 조금살짝 아주잠깐 흔들렸음을 고백...

그때 료샤가 '옷 한벌 사면 되잖아. 그래그래 우리 바보츠카 가자! 거기 신상들 들어와 있는 거 같더라. 거기 진열장에 딱 너한테 어울릴만한 미니 드레스도 있었어' 라고 했기 때문이다.

 

바보츠카는 '나비'란 뜻인데 그랜드 호텔 유럽에 입점해 있는 명품 셀렉트 부띠끄이다. 물론 나야 그런 것들을 사입을 형편도 안되고 큰 관심도 없어서 지나갈때마다 진열장 구경만 하고 간다. 이쁜 옷이 종종 많이 걸려 있다. 그래서 순간 '잉, 바보츠카?' 하는 생각이 아주잠깐 들었다가 곧 '야! 내가 왜 친구한테 옷을 받아입어!'로 폭발했었음.

 

맨 위 사진이 바보츠카 매장 사진. 이름이 우리 어감으론 좀 웃기지만 ㅠㅠ

  

 

 

며칠 후 우리는 저녁에 같이 네프스키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마침 그랜드 호텔 유럽 근처를 지나가다 바보츠카 매장 앞에서 내가 목도리를 고쳐 매고 있는데 료샤가 날 쿡 찔렀다.

 

료샤 : 저거! 저 쁠라찌예(드레스)! 저거 너 입었으면 어울렸을 거 같았단 말이야!

나 : 무슨 쁠라찌예? 어머 이쁘다!!!!

료샤 : 쳇, 친구한테 옷 왜 받아입냐고 부르르 하더니 막상 쁠라찌예 보니까 눈 빤짝이는 것봐!

 

 

아니, 그게... 내가 원래 좀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긴 하는데... ㅋㅋ 원피스도 그렇고 복슬복슬 털도 그렇고... 아냐, 여기서 이놈에게 약점 잡힐 순 없다!!!!

 

나 : (이쁘긴 이쁘다.. 아 입어보고프다.. 하지만 속내를 들키지 말자~) 야! 저거 이쁘긴 하지만 완전 란제리 룩이잖아! 저런 걸 아무나 입니! 저렇게 헐벗은 드레스는 너네 나라에서나 입지 우리 나라 가면 평생 입을 일 없단 말임!

료샤 : 그러니까 털 달렸잖아, 저거 두르면 되잖아.

나 : 좀 속옷 같잖니!

료샤 : 예쁜데...

나 : 내가 저거 입으면 웃길 거 같지 않아?

료샤 : 몰라, 근데 좀 궁금하긴 해. 저런 거 입은 거 본적 없어서.

나 : 좀 야해보여서 자신 없다... 그리고, 이 바보야! 너 정말 저 옷 한벌 사면 내가 갈 수 있을줄 알았냐? 그래봤자 가방은 천으로 된 롱샴이고 신발은 어그부츠였단 말이야~ 저런 드레스를 입으면 구두도 갖춰 신어야 하고 핸드백도 사야 했어! 글고 기모 스타킹 대신 멋있는 실크 스타킹도 사야 했단 말이야! 바보! 사내의 한계!!!!! 

료샤 : 어 그런가... 하긴 그렇구나... 저기다 지금 그 부츠 신으면 되게 웃기겠다.

나 : 웃긴다고까지 할건 없잖앗!!!

 

 

 

볼수록 이쁘긴 했다 ㅋㅋ

 

 

그러자 료샤는 옆쪽 진열장을 가리키며(이것은 또 무려 펜디로구나)

 

료샤 : 아까 거 야해서 부담되면 이런 것도 있었단 말이다! 이건 완전 무난하구먼.

나 : 그래봤자 구두랑 핸드백 스타킹 사야 하는 건 동일!

료샤 : 이 옷은 맘에 안 드나보구나, 아까처럼 눈이 안 빤짝이네.

나 : 저 옷은 키크고 늘씬하고 마른 여자들한테 어울린다고!

료샤 : 그건 그렇지. 그래서 아까 그 슬립 같은 쁠라찌예가 딱 어울릴거 같았는데.

나 : 그 슬립 같은 드레스에 털 두르고 가서 너네 무서운 아빠랑 더 무서운 나타샤랑 더 무서운 비즈니스맨 할배할매 사이에서 보드카 받아마시고 취해 쓰러졌어야 했단 말이니?

료샤 : 에... 그건 또 그렇구나. 하여튼 뭐 그때 안 간건 잘했어.

 

 

 

그러다 또 다른 쪽 거리를 산책하다 다른 살롱에 걸려 있는 원피스 발견. 저거 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보고 있었는데 료샤가 오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료샤 : 그랬군. 꽃무늬 화려한 쁠라찌예였으면 갔을 수도 있겠군.

나 : 아니라고오오오!!!!!

 

.. 근데 저 원피스도 이뻤다 ㅋㅋ

 

 

사실은.. 내가 머물렀던 호텔 1층에도 멋진 살롱이 있었고 진열장에는 딱 내 취향인 화려한 물품들이 늘어서 있었다. 저 스카프랑 녹색 백이랑 파란 파우치 지갑 등등 전부 내 취향이었음. 그래서 아침에 조식 먹고 올라갈때마다 항상 눈요기하고 가곤 했다. 지금 봐도 이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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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