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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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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살아 있고 그 힘도 살아 있다. 


시차 때문에 자고 일어나면 결과가 나와있으려니 했는데 하필 새벽부터 호텔 전체 와이파이에 문제가 있어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처음엔 내 방만 안되는 줄 알고 괴로워하며 조식 먹으러 내려가서 거기서 와이파이를 잡았다. 마침 그때 다 고쳐져서 연결이 되었는데 나는 다음이나 네이버 실시간 기사만 확인하다 보니 늦었다. 그래서 쥬인에게 톡을 해서 결과를 실시간 중계(ㅋ)로 들었다. 생각보다 크게 찬성표가 나와서 다행이다. 물론 그 동네 인간들이야 자기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건 정말로 국민의 힘이다. 왜 그런지 234표래 하는 메시지에 갑자기 눈물이 좀 나왔다. 어휴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어 ㅠㅠ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다.


..


오늘 날씨도 극악이었다. 비가 내리다 눈으로 바뀌었다. 길바닥은 재앙이었다. 쌓였다가 얼었다가 녹아 흐르는 눈은 진창과 살얼음으로 변했다. 정말 이거야말로 보보경심 려! 자빠질까봐 뒤뚱뒤뚱!!!


(이것이 바로 엉망진창 거리!!! ㅠㅠ)



날씨가 너무 안좋아서 눈물을 머금고 오늘도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버스 타고 네프스키로 나가 러시아 박물관 갔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긴 한데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안 좋았다. 배란통인지 꼭 그날처럼 아프고 허리와 배와 다리가 당겨왔다. 그래서 전시도 좋아하는 작가들 위주로 보고 나머지는 지나쳤다.


박스트의 supper는 아직도 투어 중이었고 아이바조프스키 그림들도 화가 120주년이라고 트레치야코프에 가 있었다... 게다가 레핀 그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대한 '사드코'도 어디 투어 갔는지 없었다 흐흑... 대신 전에 보지 못했던 그림들이 꽤 나와 있긴 했다.



..




전시 보고 나오는데 너무 힘들어서 박물관에서 제일 가까운 곳인 그랜드 호텔 유럽에 갔다. 2층 메자닌 카페에 가서 진통제를 한 알 먹고는 비프 스트로가노프 시켜서 먹었다. 오후에 방에서 료샤랑 레냐를 만나기로 했는데 힘들어서 도저히 방까지 갈수가 없었다.


나 : 친구야, 힘들어서 유럽호텔 카페에서 밥먹고 있어... 거기로 와.

료샤 : 박물관 간다더니 그럴줄 알았어!!!!

나 : 흑... 미안하다 먼저 밥 먹는다...

료샤 : 고기 먹어!!!

나 : 비프 스트로가노프 드신다!


(료샤는 어제 삐친 거 다 풀렸다. 아침에 전화해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어제 아빠네 집 갔더니 자기랑 나따샤 빼고는 평균연령 60대였고 전부 부부동반 분위기였고 게다가 보드카 부어라마셔라 분위기라 내가 왔으면 엄청 뻘쭘하고 피곤했을 거란다. 자기는 나타샤와 아빠의 합동공격에 지쳐 보드카를 막 마시고 평소보다 빨리 취하는 전략을 구사해 두어시간 만에 침대로 기어들어갔다고 함)


..



밥을 다 먹고 모르스 마시고 있자니 료샤가 레냐를 데리고 왔다. 털방울 모자에 하늘색 패딩 입고 발그스름한 뺨으로 달려오는 레냐 왜 이렇게 귀여운가.. 어흑..


레냐가 2층 카페로 향하는 빨간 카펫 깔린 호텔 계단 올라오면서부터 큰소리로 '쥬쥬~' 하고 소리를 쳐서 료샤가 '쉿, 조용히 해야지!' 하고 주의 주는 소리까지 다 들림.


레냐는 프라하에서 자기가 사준 펜던트를 내가 하고 온 걸 보고 엄청 좋아했다. 잽싸게 내 옆에 앉으며 료샤를 구석으로 밀어냈다. 료샤가 아들새끼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고 투덜거렸다. (너 어제 너네 아빠 생일파티 가기 싫다고 궁시렁거렸던 건 생각 안하냐!!!)


료샤와 레냐도 카페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원래 오늘 나는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의 드뷔시 라벨 브람스 연주에 가려고 표를 끊었었는데 레냐도 요즘 피아노 배우고 클래식 음악도 곧잘 듣는 편이라 마침 내 옆자리 표가 기적적으로 남아 있어 그걸 추가로 더 끊었다. 문학이고 클래식이고 모두 담쌓은 료샤는 잘됐다는 듯 나보고 레냐 데리고 가라고 함. 자기는 숙취 때문에 좀 자고 오겠다고... (아빠 맞냐!)


..




나는 레냐 손을 잡고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연주를 들으러 갔다. 메인 연주홀이 그랜드 호텔 유럽 맞은편에 있어서 가깝다. 레냐는 들떠서 팔짝팔짝 뛰다 미끄러져 자빠질 뻔 하고...


자리는 그리 좋지는 않아서 1층 사이드 칸막이 맨 뒤쪽이었지만 레냐는 엄청 좋아했다. 밤에 콘서트홀에 클래식 연주 첨 들으러 왔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8살짜리라 연주회 가도 토욜이나 일욜의 낮 연주회에 갔을 거고 어린이들이 듣기 편한 연주회에 갔을 것 같다. 그리고 레냐의 엄마도 별로 연주회나 발레, 오페라 등을 좋아하지 않아서...


놀랍게도 레냐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 자기 말로는 나랑 발레 보러 가서 좋았고 차이코프스키도 좋았다고, 그래서 수업시간에 발표했더니 선생님이 피아노 배워보라 권해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나 기특해라~~~ 심지어 레냐는 드뷔시와 라벨도 알고 있었다!!!!


오늘 지휘자는 안타깝게도 테미르카노프는 아니고 베른 심포니의 마리오 벤자고였다. 전에 서울시향 연주때 내한한 적 있었다. 이분도 괜찮지만 나는 테미르카노프를 원해 흐흑 아까비... (테미르카노프는 12월 중순 이후에 연주한다...)


오늘 곡은 드뷔시의 바다, 라벨의 볼레로, 브람스 1번 교향곡이었다. 실은 앞의 두개 듣고 싶어서 끊은 거고... 내가 개인적으로 브람스는 별로 안 좋아한다 ㅠㅠ 레냐가 열심히 듣는데 내가 브람스 듣다 졸면 어쩌나 싶었음(컨디션이 안좋아서)


내 곁에 앉은 레냐는 뭐가 그리 좋은지 들떠서 방글방글 웃었고 재잘거렸다. 그래도 연주회 시작하자 얌전하고 조용하게 앉아 잘 들었다. 어린아이가 연주 들으러 와서 얌전하니 기특하다고 뒷자리 옆자리 할머니들이 막 귀여워해주며 초콜릿도 주었다.


라벨의 볼레로를 오랜만에 실제 연주로 들어서 무척 좋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볼레로는 정말로 실제 연주와 레코드로 듣는 게 많이 다르다. 훨씬 섬세하고 다층적이고 또 관능적이라서. 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잘 연주하는 걸 들으면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아마도 라벨의 볼레로가 매우 육체적인 음악이라 그런 것 같다. 나는 항상 이 곡이 사랑을 나누는 곡이라고 느꼈다.


드뷔시와 라벨은 참 좋았는데 브람스는 연주 자체는 괜찮았지만 내가 딱히 좋아하는 곡이 아니었기도 하고 피곤이 몰려오기도 하고, 또 마음속으로 회사 생각도 좀 나서 좀 멍때렸다. 레냐는 내 손 꼭 잡고 앉아 있었는데 막판에 좀 졸고 있는 걸 봤다. 근데 마냥 귀엽다... 그냥 라벨까지만 듣고 쉬는 시간에 일어날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앵콜곡도 안해줬거든, 흑흑...


쉬는 시간에 레냐 손 잡고 북적거리는 홀의 카페 쪽으로 가서 주스와 케익을 사주었다. 레냐는 내옆에 찰싹 앉더니 비밀을 고백하듯이 말했다.


레냐 : 있잖아, 쥬쥬랑 둘이만 오니까 좋아.

나 : 나도 레냐랑 연주회 오니 참 좋아. 근데 아빠가 들으면 섭섭하겠다.

레냐 :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ㅠㅠ 

나 : 레냐야, 아빠한테 벌써 비밀 가질 거야?

레냐 : 아빠는 놀린단 말이야!

나 : 알았어. 레냐가 싫으면 비밀로 해줄게. 근데 아빠는 네가 귀여워서 그러는거야. 널 사랑해서.

레냐 : 나도 아빠 사랑하지만 그래도 나도 비밀은 좀 있어야 돼.


아이고 8살짜리 아들이 벌써 이러고 있는 거 료샤가 알면 삐칠텐데 ㅋㅋ


..


연주회 마치고... 필하모닉 연주홀은 언제나처럼 엄청 붐볐다. 코트 보관소도 터져나갔다.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기 위해 레냐랑 둘이 한동안 앉아 있다가 늦게 나왔다. 옷을 입고 나왔더니 료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레냐는 계속 놀고 싶어했지만 이미 열시가 넘어 있었다. 료샤는 레냐에게 이제 자야 하니까 내일 놀자고 했다. 레냐는 다시 찡찡대면서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료샤네 집에 와 있다. 레냐는 나한테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졸라대서 결국 나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해주었고 레냐는 좋아하다가 잠들었다. 배고파서 귤이랑 초콜릿 먹었고 료샤가 윷놀이 하자 해서 좀 해주었다. (프라하에서 가르쳐준 윷놀이에 아직도 필받아 있는 료샤... 빽도 표시는 지가 지워버렸음 ㅋㅋ)


내가 자꾸 하품을 해서 료샤가 그만 자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전에 메모 남기는 중. 나 내일 늦잠 잘테니 깨우지 말아달라고 했더니 료샤가 '너와 게으름은 한몸이란 걸 나도 알고 레냐도 안다' 라고 대답했다. 맞긴 맞는데 왜 좀 짜증나지 -_-


..


참, 그러고보니 오늘 유럽호텔 나오는데 나이드신 문지기 아저씨가 날 알아보는 거였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 동안 왜 안왔어요? 라고 하면서... 이제 페테르부르크 와서 사나요? 하고... 어머나 2년전에 왔었는데... 그때 나랑 잠깐 얘기 나누긴 했지만 세상에 날 기억해주다니.. 손님들 엄청 많이 볼텐데... 내가 한국에서 온것도 기억했다... 잠깐 놀러왔다 하니 우리 호텔에서 묵냐고 물어봐서 아쉽지만 아니라고, 대신 카페에 왔다고 했더니 또 오라고 하며 포옹해주었다. 무지무지 반갑고 또 찡했다. (역시 난 이런것에 약해...)


료샤가 나에게 '너는 인사를 꼬박꼬박 하니까 아마 기억할거야' 라고 말했다. 그런가? 문지기 아저씨랑 메이드들이랑 마주칠때마다 항상 인사를 하긴 하지... 하여튼 고마워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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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