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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메모 : 2016.5.21>

 

 

지난주에 발췌했던 강령과 교조주의에 대한 이야기에 세번의 메모를 덧붙였는데 오늘 올리는 글도 비슷하다. 다만 두개의 글에 대한 세개의 메모라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첫번째 글은 2013년 2월부터 두달 동안 프라하에 체류할 때 쓴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가브릴로프 본편의 프리퀄에 해당한다. 그 소설은 나의 주인공 미샤가 정신교화 수용소에 끌려가 겪는 일과 그 이후 클리닉, 면회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순서대로 1부, 2부, 3부로 구성된다.

 

 

여기 발췌한 글은 1부 초중반부에 해당한다. 1부는 의대생 출신의 수용소 간수이자 약물 심문관 라브로프의 조수인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라는 청년의 심리적 관점에서 서술된다(이름이 너무 길고 어려운가ㅠㅠ) 2부는 미샤의 후원자 중 하나인 당 고위직 의원 게오르기 벨스키, 3부는 미샤의 친구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관점에서 서술되는데 이 두 파트는 이전에도 두어번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1부는 처음이다.

 

 

그리고 아래에 짧게 인용된 두번째 글은 2012년 겨울부터 2013년 1월까지 썼던 소설의 중반부에 해당된다. 플롯 전개상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이유로 인해 모르핀에 취한 미샤가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에게 자신의 첫 수용소 기억을 털어놓는 장면 일부이다. 첫번째 글과 두번째 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시간적인 배경은 다르지만. 두번째 글에서 언급되는 미샤의 회상은 첫번째 글보다 약 8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첫번째 글의 심리적 화자는 간수이자 심문 조수인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이다. 파벨 슈스코프와 데미얀 라브로프는 둘다 정신교화 수용소의 심문관으로 전자는 심리조작과 교화, 후자는 약물교화를 책임지고 있다. 33번은 미샤에게 매겨진 죄수 번호이다. 슈스코프가 말하는 'ШЛ. No 2'는 '슈스코프-라브로프 요법'이라는 정신교화 프로그램들 중 하나이다. 둘의 성 약자를 딴 것이다.

 

 

슈스코프가 중간에 언급하는 슈로프스카야는 이전에 트로이와 친구들 에피소드에서 몇번 등장했던 알리사의 성이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81년 즈음 그녀는 런던의 러시아 대사관에서 KGB 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흘레브니코프의 독백에 등장하는 토냐는 그의 옛 여자친구이다. (서무 시리즈에 나오는 발레리나 토냐와는 다른 인물이다. 노어 이름 짓기 귀찮아 ㅠㅠ)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는 슈스코프가 어떤 식으로 교육을 진행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쪽에 대한 임무는 담당 죄수를 슈스코프의 교육실까지 호송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라브로프의 방으로 다시 데리고 오는 데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슈스코프에게는 별도의 보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흘레브니코프와는 달리 전문가들이었고 하잘것없는 간수 신분이 아니었다. 주워듣기로는 파벨 슈스코프의 재교육은 폴츠키의 사정없는 물리적 폭력보다, 그리고 라브로프의 끔찍한 화학 실험보다 더 지독하다고 했다. 어떤 정치범 하나는 프로그램 시작 사흘 만에 그 재교육실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라브로프의 마약을 계속 맞겠다고 울부짖으며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흘레브니코프는 그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센터 내에서 가장 음산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은 소장인 글루크도, 새디스트인 라브로프도, 뼈와 근육을 손대지 않고도 최악의 고통을 선사하는 데 도가 튼 폴츠키도 아니고 바로 파벨 슈스코프였기 때문이다.

 

 

슈스코프는 완전한 대머리에 광택 없는 조그만 단추 같은 갈색 눈과 끝이 치켜 올라간 얇은 입술의 조그만 남자였는데 전신이 둥글었고 무두질한 양가죽을 뒤집어쓴 듯 반질반질하고 부드러웠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흘레브니코프는 그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아무런 음률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고 전혀 깜박이는 일이 없는 듯한 그 조그맣고 둥근 눈을 보면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마치 아주 오래된 흑백 만화에서 일어나 나온 사람처럼 완벽한 잉크로 그려진 선과 매끄러운 감촉만을 지닌 채 피도 살도 무게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뱀 같기도 했는데 그렇게 느낀 건 흘레브니코프 뿐 만이 아니어서 죄수들은 그를 코브라라고 불렀다.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간수들도 종종 그 별명을 불렀다. 그리고 죄수들 못지않게 그를 두려워했다.

 

 

그건 글루크나 라브로프를 향한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사람들은 글루크를 경멸했고 라브로프는 혐오했다. 그러나 슈스코프만은 두려워했다. 보그단조차도 슈스코프 앞에서는 설설 기었고 사상 재교육은 받아 본 적도 없으면서도 그 음습하고 어두운 교육실 얘기만 나오면 남몰래 부르르 떨곤 했다. 그 교육실에 들어갔다 나온 정치범들은 며칠 이상 버티지 못했다. 대부분 얌전해졌고 일시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뜨거운 충심과 후회로 가득한 선언문을 몇 장씩 쓰고 모범수로 탈바꿈하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게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일 리는 없었다. 그 변모의 밑바닥을 지배하고 있는 건 윤리적 개심이라기보다는 공포였다.

 

 

33번은 그런 축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슈스코프 앞에서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거나 공포에 떤 적이 없었다. 물론 흘레브니코프는 그 어두컴컴한 교육실 안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그 안에서 33번이 어떻게 구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왔을 때도 33번은 다른 죄수들처럼 울거나 공포에 질리거나 분노에 차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복도나 라브로프의 방, 혹은 센터 내의 다른 곳에서 슈스코프와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흘레브니코프는 파벨 슈스코프의 그 광택 없는 조그만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죄수를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슈스코프가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도 그 전까지는 본 적이 없었다.

 

 

그때 33번은 재교육실이 아니라 라브로프의 방에 있었다. 라브로프는 슈스코프나 폴츠키와는 달리 자신의 교육실을 언제나 ‘방’이라고 불렀다. 흘레브니코프는 ‘실험실’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시작한지 닷새 째였고 라브로프는 칸막이 뒤로 자리를 비킨 후였다. 표면적으로는 그날의 칵테일 제조를 위해서였지만 실은 슈스코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전에 진행된 사상 재교육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슈스코프가 자신의 교육실을 떠나 그것도 라브로프의 방에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흘레브니코프는 자신과는 관계도 없으면서도 공연히 긴장했다. 행여 폭력성 발작을 일으킬 경우 재빠르게 제압하기 위해 33번의 뒤에 서 있긴 했지만 사실 그건 불필요한 행위였다. 첫날의 소동 이후 라브로프는 약물을 주사할 때마다 33번의 양 손목에 모두 수갑을 채웠기 때문이다.

 

 

슈스코프는 수갑을 쓰지 않았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수를 결박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의 프로그램에서 육체적 폭력은 오로지 1단계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보그단 같은 대리인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슈스코프 자신은 결코 죄수에게 손을 대지 않았고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일도 없었다. 결코 서두르는 적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파벨 슈스코프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갑자기 불쑥 들어와 33번의 성을 호명했을 때 흘레브니코프뿐만 아니라 라브로프마저도 놀랐다. 라브로프가 약물을 섞으러 들어갔을 때 슈스코프는 그 자리에 선 채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를 묻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33번을 자리에 앉히는 것도 잊었다. 키가 작은 슈스코프는 언제나 죄수를 앉힌 후 위에서 내려다보곤 했는데 지금은 깜박임도 없는 조그만 단추 같은 눈을 위로 향한 채 33번의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 날카로운 시선을 내쏘고 있었다.

 

 

흘레브니코프는 물론 슈스코프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가능한 한 빨리 그 섬뜩한 인물이 용건을 마치고 나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3번은 슈스코프의 질문에 거의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고 두어 번 아주 짧게 ‘아니오’, ‘모릅니다’ 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슈스코프의 목소리가 변했다. 요철 없는 부드러운 실크 같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역시 매끈하지만 차디찬 알루미늄 같은 음성이 울려나왔다. 완벽하게 단조롭고 차가운 말투였지만 깊은 곳 어딘가에 증오와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흘레브니코프조차도 고개를 돌려 슈스코프 쪽을 힐끗 쳐다봤을 정도였다.

 

 

“ 그래, 정말 아는 게 없다고 우기고 싶은 모양이군. 르 몽드도, 타임즈도, 그 우스꽝스러운 구명위원회도. 그 방송 말이야, 네가 이송된 날짜까지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던데. 비공개 재판 정보도. 그런데도 전혀 모른다고? 본부에 줄을 대고 있는 놈이 없다고? 그 슈로프스카야는 어때? 뛰어난 요원이지, 네 친구잖아. ”

 

 

그때 처음으로 33번이 몸을 희미하게 떨었다. 하지만 그건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검은 눈에 다시 그 파란 불꽃이 일었기 때문이다.

 

 

“ 그 여잔 대사관 직원이에요.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5년 전이고. ”

 

“ 아, 대사관 직원. 정말 그렇게 믿었던 건 아니잖아. 그랬을 리가. 넌 똑똑하잖아, 그 바닥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애초부터 직업을 잘못 택했어. 작가가 되지 그랬나, 아니면 물리학자라도. 안 그래도 파리에서 널 솔제니친, 사하로프 운운하며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이제 그 몸은 쓰지도 못하게 될 텐데. ”

 

 

이제 슈스코프의 매끄러운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증오가 뒤섞이고 있었다.

 

 

“ 어떨까, 런던에 소환장을 보내면. 그 여자와 마주앉아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

 

“ 소환해봤자 달라질 건 없어요. 정말 모르는 일이니까. ”

 

“ 상관없어. 누구든 하나는 잡아들여야 할 테니까. ”

 

 

그때 흘레브니코프는 그 빨간 불빛을 보았다. 한순간 라브로프의 방 전체로 페인트를 끼얹은 듯, 화재가 난 듯 이글거리는 붉은색 그림자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30센티미터 이상 떨어진 뒤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흘레브니코프는 33번의 몸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미동도 없이 똑바로 서 있는 그 야윈 몸에서 달궈진 쇠처럼 뜨거운 열기가 폭발하듯 번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놈이 횃불처럼 순식간에 확 타올라 사방으로 불꽃을 내뿜을 것 같았다.

 

 

슈스코프도 그 빨간 불빛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런 광채도 감각도 없는 그 둥근 눈에 붉은 그림자가 반사되면서 당혹스러운 분노가 스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3번의 입에서 발음이 또렷하고 명료하며 아주 침착하고 건조해서 마치 라디오 방송을 연상시키는 음성이 밀려나왔을 때 그 분노는 슈스코프의 광대뼈와 입술 언저리까지 퍼져 나갔다.

 

 

“ 아, 당신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일단 약한 자를 제물로 삼지. 그런 연결 고리가 없으면 만들어내면 그만이야. 그 여잔 희생양으로 삼기엔 너무 뻔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 ”

 

 

흘레브니코프는 슈스코프가 33번의 얼굴을 내리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파벨 슈스코프는 오른손을 거의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반질반질하고 매끄럽던 얼굴 전체가 바싹 구겨진 양피지처럼 쭈글쭈글하게 주름졌다. 갈색의 구슬을 박아 넣은 듯한 두 눈이 순간 파삭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날 것 같았다. 그는 슈스코프가 그토록 평정을 잃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파벨 슈스코프는 잠시 손바닥을 들어 올린 채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다섯 개의 뭉툭하고 통통한 손가락이 부채처럼 활짝 펼쳐져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33번은 여전히 붉은 불빛을 켠 까만 눈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흘레브니코프는 그 미친놈이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 타고 있어, 불타고 있어. 인체발화에 대한 얘길 토냐가 해준 적이 있었는데. 난 그걸 믿어본 적이 없었지. 저 자식 타고 있어, 완전히 타버릴 거야. 재도 안 남기고 불타 없어질 거야. 오 하느님, 실험실에 불이 옮겨 붙을 거예요. 센터가 다 타버릴 거예요. 토냐, 저 자식 타고 있어. 코브라는 왜 저렇게 심호흡만 하면서 손을 파닥이고 있는 거지? 아, 저 미친놈. ’

 

 

 

마침내 슈스코프가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일그러졌던 얼굴에서 주름이 사라지며 다시 부드러운 가죽을 뒤집어씌운 듯 매끄럽게 변했다.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고 33번의 주위를 아주 천천히 반 바퀴 돌았다. 왼쪽으로 돌아왔을 때 슈스코프는 멈추었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그 젊은 죄수의 목을 가볍게 눌렀다. 맥이 뛰는 곳 바로 위를.

 

 

“ 아주 좋아, 미하일. 계속 그렇게 멀쩡한 척 하고 있어. 허세 부려봐. 만사가 잘돼가고 있는 것처럼. 무서운 것도 없고 다 괜찮은 것처럼. 아프지도 않은 것처럼. 이토록 태연하고 침착한 연기를 할 수 있다니, 진작 인민예술가 쯤 달아줬어야 할 걸 그랬지. 하긴 훈장도 두어 개 받았지, 공훈예술가 직함도. 다 박탈당한 게 문제지만. ”

 

 

그는 라브로프의 칸막이 쪽에 힐끗 시선을 던지며 더욱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 안됐지만 난 알아, 지금 아프다는 거. 네가 무서워한다는 것도. 모든 프로그램들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의사들은 그걸 잘 알아. 그 예외들이 반응하는 법칙도. 넌 'ШЛ. No 2'의 예외지. 그런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그 프로그램의 효과가 아예 없다는 게 아냐. 설마 그럴 리가. 그저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뿐이지. 넌 아마 내 앞에선 끝까지 버틸 수도 있을 거야. 사상 재교육 따위 끝까지 무시하겠지, 거기선 네 목을 비틀고 죽인다 해도 아마 두려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애초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니까. 그런데 이 방에서는 다르지.

 

난 알고 있어, 넌 내 교육보다 약물 교화를 더 두려워해.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보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걸 더 끔찍하게 생각하지. 아, 지금은 좀 견딜 만하겠지, 마지막 주사로부터 24시간이 지났으니까. 아픈 것도 덜하고 다리도 뜻대로 움직이겠지. 잘 알잖아, 곧 다시 아파질 거야. 어지러워질 거고 열이 오르고 마비될 거야. 울게 될 거야. 아무도 널 위해 와주지 않아. 파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그건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네가 여기서 팔다리가 잘리든 숨이 넘어가서 관에 실려 나가든 이제 그놈들은 절대 모를 테니까.

 

네 교화나 개심 따위 사실 관심 없어. 백만에 한 놈 꼴로 끝까지 안 넘어오는 놈이 있어. 그게 너라고 해도 놀랍지 않아. 상관도 없고. 우리끼리니까 좀 솔직하게 얘기해줄까? 난 네가 넘어오지 않는 편이 더 좋아. 그래야 이 방에 계속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 난 너 같은 놈을 좋아하지 않아. 넌 우리에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간이야. 네 그 알량한 재능 따윈 우리에겐 그냥 쓰레기야, 아니, 쓰레기보다 더 나쁘지. 더럽고 유해한 것도 모자라 전염성까지 갖췄으니까. 그건 박멸해야 할 해충이나 다름없어. 그냥 허세 부려, 그렇게 고개 쳐들고 괜찮은 척 버티고 있어. 난 네 시체를 치우는 걸 정말 보고 싶으니까. 그땐 이미 꼼짝도 할 수 없을 거야, 눈썹 하나 움직이지 못하겠지. 네 아비처럼. ”

 

 

 

그 순간 33번의 눈에서 불빛이 꺼졌다. 빨간 불빛과 파란 불꽃 모두, 한 순간에 전구가 터진 것처럼 완벽하게 모든 광채와 열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흘레브니코프는 그게 슈스코프의 말 때문이라기보다는 칸막이 뒤에서 라브로프가 나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흘레브니코프는 슈스코프의 그 부드럽고 음산한 장광설 중에서 딱 한 가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했다. 33번은 슈스코프보다 라브로프를 더 두려워했다. 아니, 그 약물을.

 

 

그는 33번이 첫인상처럼 부드럽고 가냘픈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아주 단단하고 강한 몸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그단은 그 곱상한 얼굴에 눈이 멀었던 게 분명했다. 날씬하고 사지가 긴 그 몸은 사실 강철과 채찍에 가까웠다. 흘레브니코프는 토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체육관에 다니던 시절에도 그렇게 섬세하고 단단한 근육으로 치밀하게 조직된 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약물 프로그램을 시작한지 사흘 째 되던 날 라브로프가 그의 어깨와 등에 찬물을 쏟아 부었을 때 33번은 거의 호흡이 멎을 만큼 괴롭게 경련을 일으키며 나뒹굴었다. 2단계. 흘레브니코프는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기말시험을 앞둔 의대생처럼. 모든 감각이 수십 수백 배로 예민해지는 단계. 스쳐지나가는 입김조차 칼날처럼 파고드는 통증으로 변형되는 단계. 차디찬 물을 뒤집어썼을 때 33번은 아무리 그게 물이라고 현실을 인식해보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차라리 황산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차갑다기보다는 뜨거웠을 것이고 그보다는 아팠을 것이다. 뼈와 가죽을 태워 들어가는 것처럼. 라브로프가 물을 마저 쏟아 부었을 때 33번은 기절했는데 3단계로 돌입해 독방으로 옮겨지기 전에 그런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라브로프가 보는 앞에서는 더더욱.

 

 

“ 정말 실망이야, 잘 버틸 줄 알았는데. 넌 심지어 안경잡이 인텔리겐치야 나부랭이들보다 더 금방 나가떨어지잖아. 그런 몸을 갖고도. 이제 겨우 사흘밖에 안됐는데. ”

 

 

흘레브니코프는 라브로프가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전 대상자들에게는 3일 연속으로 그 약물을 주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라브로프의 실망에도 일리는 있었다. 33번은 다른 정치범보다 반응 속도가 빠른 편이었고 약 기운에서 풀려나는데도 더 오래 걸렸다. 보통 미성년자이거나 신체가 허약한 경우 그럴 가능성이 많았지만 물론 그는 양쪽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라브로프의 명령에 따라 흘레브니코프는 그 성가신 죄수를 독방으로 옮겼다. 흠뻑 젖은 옷을 벗긴 후 보풀이 가득한 얇은 모포를 대충 뒤집어씌우면서 그는 왜 라브로프가 ‘그런 몸을 갖고도’ 라고 비아냥거렸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탄탄하고 강해 보이는 몸을 갖고도. 그때에야 흘레브니코프는 그 미친놈이 두 손만 가지고 보그단을 병신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납득했고 동시에 라브로프의 약물 칵테일은 체질량 지수나 근력과는 별도로 작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브로프가 칸막이 뒤에서 나왔을 때 슈스코프가 손짓을 했다. 둘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흘레브니코프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프로그램에 대한 전문 용어와 자신들만의 속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슈스코프가 완벽하게 평정을 찾은 모습으로 방을 나갔다. 33번에게는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라브로프는 다시 칸막이 뒤로 들어갔고 10여 분 후에 나와서 자신의 실험 대상자 곁으로 다가왔다.

 

 

“ 그래, 파리에서 그렇게 난리란 말이지. 그런데 당사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누가 정보를 실어 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거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난 파벨처럼 널 과대평가하지 않으니까. 그래봤자 너 별로 똑똑하지도 않잖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더 모르겠지. 그전까지는 매사가 아주 쉬웠을 테니까.

 

파벨이 믿어주지 않는다고 너무 억울해할 것 없어. 이제 진짜 아무 것도 모르게 될 거야. 그럼 파벨도 더 이상 널 의심하지 않을 걸. 아니, 어쩌면 귀여워하게 될지도 몰라. 아주 착해질 테니까. 이제껏 내가 이걸로 실패한 적은 없었거든. 파벨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화학이 언제나 심리학에 우선해. 난 너 바꿔놓을 거야, 미셰츠카. 착한 애가 되고 나면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걸. 난 극장 좋아해. 파벨과 달라. 널 잘 만져서 다시 태어나게 해줄 거야. 그럼 정말 나한테 감사하게 되겠지. 모스크바에서 다시 불러줄지 누가 알아? 그럼 난 네 무대 보러 가서 감동해 울지도 몰라. 그러니까 먼저 착해져야지, 안 그래? ”

 

 

그날 라브로프는 새 칵테일을 만들었다. 흘레브니코프는 약물의 색깔을 보고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33번도 알았을 것이다. 바늘을 찔러 넣고 천천히 약물을 주입했을 때 33번이 처음으로 욕을 했다. 아주 낮아서 짐승들이나 낼 수 있을 것 같은 소리였다. 아랫배와 흉곽 안쪽 어딘가에서 밀려올라오는 조그맣고 낮은 울음소리 같았는데 자음은 거의 모두 뭉개져 있었다. 1단계는 5분으로 급속하게 축소되었다. 2단계와 3단계는 거의 동시에 왔다. 라브로프가 촉매제를 추가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 라브로프는 투약 회수를 2회로 늘렸다. 주임 의사는 매우 바쁘고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녁의 두 번째 주사는 흘레브니코프에게 일임했다. 매우 바쁘지만 하찮은 인물인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는 물론 명령에 따랐다.

 

 

 

..

 

 

 

 

 

<두번째와 첫번째 메모 : 2013.3월~5월>

 

 

라브로프와 슈스코프는 그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쓰는 즐거움이 적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거의 언제나, 재수 없는 인물에 대해 쓰는 것이 고결한 인물을 그리는 것보다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전에 1부를 쓰는 도중에 슈스코프에 대한 메모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 적이 있다. 1부를 마칠 때까지 그 인물의 성격은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깐 발췌해 본다.

 

 

이 글을 위해 나는 수용소에 존재하는 인물들 몇명을 새로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1부의 심리적 화자인 흘레브니코프이다.(흑빵이란 어근 가진 그 사람) 발췌한 부분에 등장하는 파벨 슈스코프는 일종의 사상 재교육관이다.

 

저자의 원형은 1월에 마친 장편에서 잠깐 등장한 루뱐카 KGB 본부의 그라도프 라는 인물이다. 그라도프는 환각에 취한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기술되기 때문에 다분히 환상적이며 일종의 캐리커처에 가까웠다. 그 일그러진 만화 같은 인물을 좀더 동글동글하게 빚어서 뭉쳐내고 확장시킨 인물이 파벨 슈스코프이다. 저 사람은 꽤나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짝패이자 2인자이며 약물 교화를 진행하는 주임 의사인 라브로프가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성격의 두 분신이 존재하는 경우 진짜는 언제나 슈스코프 같은 인물이다.

(2013.3.15)

 

 

나는 ‘진짜’라는 표현을 썼지만 어쩌면 라브로프가 슈스코프의 덜돼먹은 유령이듯 파벨 슈스코프도 ‘Nights With No Shadows’에 등장했던 심문관 그라도프의 뒤틀린 시뮬라크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 전형적이고 가학적인 꼭두각시들, 전체주의의 메아리 유령들로 얼기설기 구축된 피라미드 맨 위에는 아마도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있을 것이다. 그 사악한 인물이야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2013.4.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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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의 두번째 글은 위의 메모에 등장한 모스크바 KGB 루뱐카 본부의 심문관 그라도프에 대한 미샤의 뒤틀린 기억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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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긴 일반적인 사무실이나 다름이 없었어. 책상이 있고 의자가 있었어. 서랍과 캐비닛이. 회색 벽이 있었어. 그림도 걸려 있었지. 말레비치 모사품이. 거기 그자가 기다리고 있었어. 성은 그라도프. 이름은 몰라. 직위도 계급도. 채찍을 몇 갈래로 꼬아서 맨 위에 이콘 후광처럼 둥그런 머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보였어. 그런데 그 실루엣 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 키도, 체격도, 얼굴도, 아무 것도. 기억나는 건 채찍 위의 이콘 후광뿐이야. 건드리면 굴러 떨어질 것처럼 보였어.

 

심지어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아. 그는 낮고 툭툭 긁히는 어조로 말했는데 그 모든 말들은 타자기로 찍어내는 단어들처럼 하나하나 튀어나와 지루한 공산주의 선언문처럼 눈앞의 잿빛 벽에 등사되는 것 같았어. 나는 그의 말을 듣는다기보다는 읽었어. 어쩌면 그건 주사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그자의 사무실에 들어오기 직전에 비서실에 앉아 있던 어떤 여자가 내 소매를 걷더니 바늘을 찔러 넣었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검역이나 예방접종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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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광을 얹은 채찍이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노래하듯 말하기 시작했어. 그건 장조였어, 그것도 4분의 2박자짜리 경박한 춤곡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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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글이 수록된 수용소 프리퀄에 대해서는 이전에 ABOUT WRTING 폴더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그 링크는 아래.

 

 

<2부 : 게오르기 벨스키와의 면회>

불과 바람, 물과 돌 : http://tveye.tistory.com/4502

 

<3부 : 스타니슬라프 일린과의 면회>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을때, 수용소 면회실에서의 조우 : http://tveye.tistory.com/4521

푸에테와 이반 왕자와 불새 : http://tveye.tistory.com/3613

농담에 약한 주인공, 타협, 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 : http://tveye.tistory.com/4468

견딜 수 있을만한 압력, 눈을 돌리고 넘어갈 수 있을만한 더러움 : http://tveye.tistory.com/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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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얘기였다만...

 

아래 사진은 명확히 위의 글들과 연관은 없지만 흘레브니코프가 인체발화와 짐승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과 조금 느낌이 비슷해서 올려본다.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그는 1970년대 중반 미국으로 망명했다. 라트비아태생. 아직도 러시아에는 돌아와 공연한 적이 없다. 누레예프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레닌그라드와 우파를 방문했고 키로프 무대에도 올라간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은 정말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노 무용수의 얼굴에 새겨진 연륜과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 치열한 시선. 그는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이고 역시 유일무이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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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짜 우울했으니까, 조금 마음을 달래는 사진 :)

 

본편의 미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산짐승이나 숲고양이, 표범 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지녔지만 본편 패러디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의 왕재수는 오리지널 미샤보다 무엇이든 조금씩 귀여워지고 어린애 같아지기 때문에... 단추 베르닌 역시 그를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왕재수 미샤의 고양이 이미지는 이런 것...

 

 

이 사진 처음 본 순간 기절할만큼 귀엽다고 생각했다 >.<

진짜 고양이는 아니고 표범, 살쾡이 등등 고양이과 친척 동물들 중 하나의 새끼임.. 아아, 저 눈 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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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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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