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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여러 편으로 길어진 우수한 단추 시리즈. 지난 1부에 이어 이제 33편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2부이다.  

 

기존에도 서무 시리즈는 이 장르 저 장르 잡탕이었고 에피소드별 분위기나 문체도 균질하지 않았지만 특히 우수한 단추 이야기들은 서무 시리즈 중에서도 별도의 외전 같은 느낌으로 쓰긴 했다. 기존 서무 에피소드들은 당직실 귀신 외에는 그래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는데 드미트리가 나오는 이야기들은 애초부터 단추와 똑같은 외모에 전공과 성까지 같은 드미트리 베르닌이란 존재 자체가 일종의 평행우주 성격이나 환상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과연 베르닌과 드미트리는 사라진 왕재수를 무사히 구해낼 수 있을지. 베르닌의 901호에 대한 추리는 옳았을지, 그리고 금발의 안경잡이 범인은 누구일지. 여기 33편 2부에서...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 이번 편은 33편 1부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므로 전편을 꼭 읽어야 함(http://tveye.tistory.com/4062)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4월 신작 공연을 앞두고 정체불명의 협박범에게 납치된 왕재수. 베르닌과 드미트리는 힘을 합쳐 가브릴로프 시내를 동분서주하지만 왕재수의 행방은 묘연하고... 그러던 중 베르닌이 발견한 왕재수의 목걸이... 과연 이들은 왕재수를 찾아내고 사흘 앞으로 다가온 공연을 무사히 올릴 수 있을 것인지...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2부) : http://tveye.tistory.com/4013
* 에피소드 32. 왕자님과 호위 기사들 : http://tveye.tistory.com/4033
* 에피소드 33.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1부) : http://tveye.tistory.com/4062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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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3

 

 

 

 

 

서무의 슬픔

- 아가일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들의 모험 (2부) -

 

 

 

 

 

 

 

 

5층쯤 뛰어올라갔을 때 베르닌은 너무 숨이 차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무전기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 딤카, 901호야. 열쇠 받았어.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

 

 

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딤카, 내 말 안 들려? 무슨 일 있어? ”

 

 

순간 베르닌은 벽력같은 굉음에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너무나 큰 소리가 하고 울려 퍼져서 자기도 모르게 귀와 머리를 감싸고 옆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손에서 놓친 무전기 너머로 다시 한 번 꽝 소리가 났다. 저 위쪽 어딘가와 무전기 양쪽에서 동시에 꽝 소리가 울려 퍼진 거였다. 베르닌은 불에 덴 듯 벌떡 일어섰다. 총 소리였다. 위에서 난 소리였다. 9층이 분명했다. 투다닥거리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났다.

 

 

딤카! 기다려! 딤카!

 

 

베르닌은 미친 듯이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올라갔다. 8층까지 올라왔을 때 갑작스럽게 시커먼 그림자가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덩어리처럼 그의 정면으로 쇄도했다. 베르닌은 본능적으로 두 팔을 뻗어 그자를 가로막았다. 연한 금발머리였다.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맞부딪친 순간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 왔다.

 

베르닌은 악착같이 그자를 가로막다가 가속도와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뒤엉켜서 계단을 굴렀다. 안경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뭔가로 그의 머리를 거세게 쳤다. 아마 베르닌이 고개를 홱 옆으로 돌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계단 난간이 없었다면 두개골이 박살났을지도 몰랐다. 통증과 충격으로 베르닌이 숨을 몰아쉬는 순간 남자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뿌리치고 일어나더니 발로 등을 걷어찼다. 베르닌은 등골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너무 아파서 눈앞이 새하얘졌지만 고함을 지르며 그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남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한 번 그를 걷어찼다. 베르닌은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머리로 그 자의 종아리를 들이받았다. 남자가 휘청거리더니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쿠당탕 굴러 떨어졌다.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쫓아 내려가려는데 위층에서 드미트리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미하일! 미하일!

 

 

그 마법 같은 이름에 베르닌이 얼어붙은 순간 아래쪽 계단에 나뒹굴고 있던 남자가 몸을 솟구쳐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다. 베르닌은 그자의 뒤를 쫓으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드미트리가 ‘미하일!’ 하고 외쳤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범인을 붙잡는 것보다 왕재수가 먼저였다. 게다가 조금 전의 그 총소리. 한순간 베르닌은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 달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 안 돼... 아닐 거야... 아냐, 걜 쏜 게 아닐 거야... 하느님... 안돼요! ’

 

 

솟구치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베르닌은 뛰고 또 뛰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전력으로 달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침내 9층에 도착했다. 901호는 맨 끝에 있었다.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옆집에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 대체 무슨 일이에요! 웬 소란이냐고요! ”

 

“ 비켜요! KGB라고요! ”

 

 

그 기분 나쁜 단어를 듣자 902호 주민이 몸서리를 치며 잽싸게 문을 쾅 닫았다. 상관없었다. 베르닌은 달렸다. 901호.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순간 베르닌은 가슴이 덜컹했다. 현관에서부터 핏자국이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미셴카! 나야, 다닐! 제발... 미셴카!

 

 

그는 구르듯 뛰어 들어갔다. 하마터면 문턱에 발이 걸려 고꾸라질 뻔했다. 어두워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안쪽에서 드미트리가 소리쳤다.

 

 

“ 다닐, 이쪽이야! ”

 

“ 딤카! 미하일... 미샤는... ”

 

“ 여기 있어! 빨리 와! ”

 

 

머리가 띵해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베르닌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나아갔다. 정신없이 벽면을 휘젓다가 손에 닿는 스위치를 올리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침실이었다. 그는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 커튼이 빽빽하게 드리워져 있고 침대와 나이트테이블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커다랗고 휑한 침실이었다. 한쪽에 문이 하나 붙어 있었다. 아마도 욕실일 것이다. 구조가 왕재수의 집과 똑같다면.

 

 

맨 처음에 그는 드미트리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드미트리는 침대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자세가 부자연스러웠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이유를 알았다.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재수는 침대 위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오른쪽 팔을 위로 쳐든 채. 손목과 침대 난간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드미트리에게 가려져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손과 무릎을 경련했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때 드미트리가 입을 떼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숨을 몰아쉬면서 소리쳤다.

 

 

“ 너 인공호흡 할 줄 알지? ”

 

“ 으, 으응... ”

 

숨은 이제 돌아왔는데... 그래도 교대해 줘. 조금만 더 해주면 될 것 같아. ”

 

 

베르닌은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드미트리를 밀치고 왕재수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왕재수는 눈을 감은 채 입을 O자로 벌리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숨은 쉬고 있었다. 불규칙하고 약할 뿐이었다. 드미트리가 심장 마사지를 했는지 셔츠 단추가 반쯤 풀어헤쳐져 있었다. 베르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왕재수의 입술과 코가 차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차례 반복해 숨을 불어넣고 있는데 왕재수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무릎으로 그를 들이받았다. 그리고는 묶여 있지 않은 손으로 힘없이 그의 가슴을 밀었다.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도리질을 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 저리 가...

 

“ 미셴카... 나야. 다닐이야. 정신 들어? 이제 괜찮아! 괜찮아! ”

 

“ 다닐... ”

 

 

왕재수가 눈을 떴다. 베르닌과 눈이 마주치자 두어 차례 눈을 깜박이더니 기침을 하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왼손을 뻗더니 물에 빠진 사람처럼 베르닌의 손목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베르닌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그놈 갔어. 집에 가자. ”

 

“ 너 괜찮아? ”

 

“ 나... 당연히 괜찮지. ”

 

“ 아니야... 안 괜찮아. 막 쓰러지고... 꼼짝도 안 하고... ”

 

 

왕재수가 몸을 떨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머리와 손을 쓸어주면서 달랬다.

 

 

“ 괜찮아. 그때 수면제 먹어서 그랬어. 하나도 안 아팠어. 나랑 드미트리는 괜찮아. 넌... 넌 괜찮은 거야? 그놈이 약 먹였어? 그랬어? ”

 

“ 몰라. 아무 것도... 기억 안 나... 다닐, 나 집에 가고 싶어. ”

 

 

왕재수가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지 약 기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떨구더니 몸을 웅크렸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맥을 쟀다. 불규칙하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과 차가운 손발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빨리 의사에게 데려가야 할 것 같았지만 수갑을 풀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수갑을 덜컹거리며 잡아 흔들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다가왔다. 핀을 밀어 넣더니 1분 정도 끙끙거리며 씨름한 끝에 수갑을 딸깍 하고 풀었다. 그리고는 왕재수의 팔과 손목을 주무르면서 빠르게 말했다.

 

 

“ 다닐, 의사한테 전화해. ”

 

“ 아, 그래! ”

 

“ 하지 마... 하지 마. ”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왕재수의 입술 사이로 희미하지만 단호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베르닌은 부드럽게 달랬다.

 

 

“ 괜찮아, 미셴카. 레프 사벨리예비치한테 전화하는 거야. 너 지금 아프잖아. 그놈이 약 먹였잖아. 의사 선생님이 봐주시면 금방 나을 거야. ”

 

“ 아니야. 괜찮아. 집에 갈래. 조금만 자면 괜찮을 거야. 가지 마, 다닐. 가지 마. ”

 

 

왕재수가 두 팔로 베르닌에게 매달렸다. 감긴 눈 아래로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가면 안 돼, 또 약 먹이고... 막 아프게 하고... 위험해서 안 돼. ”

 

 

베르닌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왕재수를 꼭 껴안고 뺨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 이제 괜찮아, 미셴카. 아무도 안 와. 약 같은 거 더 안 먹여. 아프게도 안 할 거야. 나 아무 데도 안 갈게. 너 옆에 있을게. 전화는 드미트리한테 하라고 할게. 넌 나랑 의사 선생님한테 가자. 그럼 괜찮지?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절한 것 같았다. 꼭 감은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드미트리가 한숨을 쉬었다.

 

 

“ 헛소리하는 거야. 약에 취해서... 아까도 저랬어. 감옥에 있을 때랑 혼동하더라고. 일단 나가자. 전화는 내려가서 해야겠다. ”

 

“ 그, 그래. 근데 아까 그 소리는... 총 소리... 그건... 앗, 너 괜찮아?

 

 

그제야 베르닌은 드미트리에게 시선을 돌렸고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드미트리는 한 손으로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소매가 피로 빨갛게 얼룩져 있었다. 드미트리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 어, 별 거 아냐... 좀 스친 거야. ”

 

“ 스친 거라니! 총에 맞았잖아! 이 바보야, 그래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앉아봐! 박혔어? 총알 박혔냐고! ”

 

아니야, 다닐. 그냥 스쳤어. 살갗만 찢어진 거야. 정말이야. 걱정하지 마. ”

 

 

베르닌은 급하게 드미트리를 침대에 앉혔다. 셔츠를 벗게 한 후 상처를 살폈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 육안으로는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일단 상처를 꽉 동여매서 지혈을 했다. 드미트리가 벽에 움푹 파인 자국을 가리켰다.

 

 

“ 그놈이 쐈는데 빗나갔어. 어깨 스치고 저기 가서 맞았어. 총알이랑 탄피는 내가 주웠어. ”

 

“ 총 소리가 두 번 났는데... ”

 

“ 두 방 쐈어. 미친 놈... 사격 솜씨도 엉망이었어. ”

 

“ 다행이다... 정말 큰일 날 뻔 했구나... 너 왜 안 쐈어! 총 있었잖아! 총 잘 쏘면서... 왜 그놈이 너 쏘게 내버려둔 거야! ”

 

 

드미트리가 왕재수 쪽을 힐끗 바라보며 지친 음성으로 대꾸했다.

 

 

“ 쏠 수가 없었어. 그놈이 이 방에 있었거든. 얜 묶여서 인사불성이었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 쏴서 총알이 튀기라도 하면... 미하일에게 맞기라도 하면... ”

 

“ 아... 그래... 그렇지... 다행이다... 딤카... 정말 다행이야. 많이 안 다쳐서... 얘가 무사해서... 그런데 그놈은... ”

 

“ 얘긴 좀 있다가 하고 미하일부터 빨리 의사한테 데려가자.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재수 뿐만 아니라 드미트리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급하게 왕재수를 들쳐 업었고 드미트리와 함께 901호에서 빠져나갔다.

 

 

 

 

*    *    *

 

 

 

 

스타브로프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즉시 응급조치를 해주었다. 왕재수의 맥을 재고 혈액 검사를 했다. 마사지를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한 후 지난번과는 좀 다른 약초즙을 먹였다. 왕재수는 곧 눈을 떴다. 스타브로프가 상냥하게 달래면서 뭘 먹었거나 주사를 맞은 기억이 있는지 물어보자 고개를 저었다.

 

 

“ 모르겠어요. 술 마신 것 같아요. ”

 

“ 보드카? ”

 

“ 술. 보드카. 토했어요. 잤어요. 잘 몰라요. 근데 이제 괜찮아요. 극장에 갈래요. ”

 

“ 극장 같은 소리! 며칠은 누워 있어야 될 거다! ”

 

“ 말도 안 돼. 애들이 다 기다리는데. 지금 가야 돼요. 수요일 공연... ”

 

안 돼! 입원이야! 나아지지 않으면 수요일 공연이고 뭐고 다 취소해야 돼! ”

 

“ 안 돼... ”

 

 

왕재수가 두 손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눈에서 새빨간 불꽃을 번쩍거리며 스타브로프에게 삿대질을 하고 꾸짖었다.

 

 

선생님이면 다야! 진짜 가야 된단 말이에요! 그 공연... 얼마나 열심히 준비한 건데! 애들이 얼마나 기다리는데! 못 가게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지금 가야 돼!

 

 

베르닌은 노의사가 버럭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타브로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왕재수의 머리와 등을 쓸어주면서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그래, 내가 실언했구나. 공연 올려야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깟 족제비 같은 KGB 나부랭이 때문에 못 올리게 할 수야 없지. 내가 낫게 해주마.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 있자. 그래야 나아져서 내일 극장에 가고 수요일에 공연도 올릴 수 있지. 어차피 오늘은 벌써 해도 지고 늦었단다. 무용수들도 너 안 오는 줄 알고 집에 갔을 거야. 오늘 푹 자고 내일 가자. 다닐이 그러라는구나. 그렇지? ”

 

 

베르닌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내가 극장에 얘기했어, 너 아파서 오늘은 못 나오지만 내일 나오니까 다들 연습 많이 하고 있으라고. 그러니까 내일 일찍 가자. 내가 데려다 줄게. 지금은 푹 자는 거야. ”

 

“ 너는? ”

 

“ 나? 내일 너 극장에 데려다 줄게. 같이 있을게. ”

 

“ 지금도... ”

 

“ 지금? 응. 일요일이니까. 회사 안 가. 여기 같이 있어줄게.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브로프는 고분고분해진 왕재수를 데리고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본 후 따뜻한 물과 약초즙을 조금 더 먹이고 재웠다.

 

 

“ 선생님, 미하일은 괜찮은 거예요? 이상한 약을 먹은 건 아닌가요? ”

 

“ 보드카를 마신 것 같기는 하구나. 혈액에서도 알콜 외의 다른 약물 성분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

 

“ 하지만... 어제 아침에 우유에 탄 수면제를 먹은 것 같아요. 그건 괜찮을까요? 전 그거 먹고 세 시간쯤 뻗었거든요. ”

 

“ 어제 아침에 먹었으면 지금쯤 몸 밖으로 배출됐을 거야.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졌고. 목이나 팔에 주사 자국은 없더구나. 진찰해 보니 별도의 약물을 먹거나 맞은 건 아닌 듯해. 애가 너무 놀란 것 같아서 입원시키겠다고 했던 거다. 상태 봐서 괜찮아지면 밤에는 집에 돌아가도 될 거야. 내일은 극장에 갈 수 있을 거다. ”

 

“ 다행이다... ”

 

 

복도로 나오니 어깨에 붕대를 감은 드미트리가 앉아 있었다. 안색은 한결 나아보였다. 베르닌을 보자 옆으로 옮겨 앉으며 자리를 내주었다.

 

 

“ 괜찮니? ”

 

“ 응. 스친 거라고 했잖아. 드레싱하고 붕대 감아서 괜찮아. 금방 아물 거래. 그건 그렇고 너도 멍들었구나. 치료 안 받아도 되겠니? ”

 

“ 난 괜찮아. 그놈이랑 좀 뒹군 것뿐이라서. 너 왜 나 안 기다렸어, 같이 들어갔어야지. ”

 

“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놈이 문을 열고 나오는 거야. 순간 판단력이 흐려졌어. 그놈도 잡아야 할 것 같고 미하일도 구해야 할 것 같아서 뛰어들었어. 무장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내 능력을 과신한 거지 뭐. 미안하다, 너 기다렸어야 했는데. ”

 

“ 아니야.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놈 하나였어? ”

 

“ 응. 그런 얼치기한테 당하다니. 자존심 완전 구겼어. 너 그놈 봤어? ”

 

“ 응, 계단에서 좀 엎치락뒤치락했는데 도망쳤어. 얼굴을 제대로 못 봐서 누군지 모르겠어. 금발에 안경 꼈는데 레베진스키는 아니었어. 우리 현장요원도 아니고... 대체 누군지 모르겠어. ”

 

검열요원.

 

“ 뭐? ”

 

 

베르닌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미트리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되풀이했다.

 

 

“ 검열요원. 그놈이었어. 목요일에 미하일 방에서 봤잖아. 검열국장하고 미하일이 싸울 때, 옆에 있었어. 상상도 못했어, 그놈일 거라고는. ”

 

 

베르닌은 눈을 감았다 떴다. 계단에서 달려들었던 남자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선명해졌다. 연한 금발. 안경. 뾰족한 턱. 흐릿한 갈색 눈. 극장. 감독실. 연습실. 그는 항상 구겨진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수첩에 뭔가를 적거나 왕재수를 상대로 뭔가를 계속 지적하면서 또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그는 베르닌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베르닌이 스페호프의 명령으로 왕재수 곁에 붙어서 감시 업무를 수행하듯, 그 역시 검열국장의 명령에 따라 정기적으로 극장에 왔고 왕재수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고 낱낱이 트집을 잡았다.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 회색인.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

 

 

“ 검열요원이었다니... ”

 

 

베르닌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드미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다닐, 두 번째 카드 기억나? 여섯 명의 작곡가. 그때 내가 그랬잖아, 범인은 검열국장과 미하일이 싸운 걸 아는 사람이라고. 그자는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극장과 발레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았을 거야, 미하일 작품 검열 담당이었으니까. ”

 

“ 그래. 검열국에서는 벌써 몇 달 동안 걜 괴롭혔어. 신작 말고 다른 작품들도 사사건건 지적했어. 우리 국장과 검열국장이 친하거든. 어떻게든 걔 공연을 방해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럼 레베진스키는 뭐지? 그 목록의 동그라미, 인형... 미샤의 사무실을 뒤지고 사진을... ”

 

“ 그자 혼자서 하지는 않았을 거야. 생각해봐. 미하일이 검열국장에게 여섯 명의 작곡가를 대보라 했을 때 국장은 아무 대답도 못했어. 그자도 옆에 있었지만 귀띔조차 하지 못했어. 그자는 음악에 대해서는 몰랐어. 알았다면 쇼스타코비치 심포니를 7번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미하일이 그랬잖아, 1번과 7번도 구별 못하는 바보라고. 검열국장이 직접 음악을 듣지는 않았을 테니 잘못된 보고서를 올린 건 분명 담당자인 그놈이었겠지. 알잖아, 윗사람들 어떻게 행동하는지. 검열국장은 창피를 당하고서는 열 받아서 그 6개 음악 목록을 당장 내놓으라고 호통 쳤겠지. 그래서 그자는 레베진스키에게 부탁해서 목록을 얻어낸 거야. 스페호프가 레베진스키를 불러서 얘길 나눴잖아. 그러니까 너희 국장은 너와 나, 현장요원들 대신 레베진스키와 검열국의 도움을 받기로 했던 거야. 혹시라도 스비제르스키나 벨스키에게 꼬리가 밟히더라도 KGB가 아니라 극장과 검열국 쪽으로 책임을 돌릴 수 있으니까. 도자기 인형도 레베진스키가 공수해줬겠지. 사진도 많이 찍었다면서. 이전부터 너희 국장의 정보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얘기잖아. 그래서 그 둘을 붙였겠지. 누가 검열국 쪽을 의심했겠니. 너랑 나도 그자를 감독실에서 봤는데도 생각조차 못했으니... ”

 

 

드미트리가 한숨을 쉬었다. 생각할수록 분한 모양이었다.

 

 

“ 보기 좋게 당했어. 네가 아니었다면 아마 수요일까지 미하일은 9층에 갇혀 있었을 테고 공연도 취소됐겠지. 미안하다, 다닐. 내가 능력도 없는 주제에 현장 경험 조금 있다고 나서기나 하고... 네 추리가 아니었다면 미하일을 찾지 못했을 거야. ”

 

“ 아니야, 딤카. 나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계단에서 목걸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끝까지 몰랐을 거야. 게다가 난 그놈이랑 치고받고 싸웠는데도 알아보지도 못했는걸. ”

 

나도 처음엔 못 알아봤어. 근데 그 안경을 보니까 퍼뜩 생각이 나더라고. 목요일에 미하일이랑 검열국장이 한바탕 했을 때 말이야. 너는 중간에서 말렸지만 난 처음에 뒤에서 그냥 지켜봤잖아. 그때 그 작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계속 수첩에 뭘 적고 있는 거야. 되게 재수 없다고 생각해서 좀 유심히 봤었거든. ”

 

가만 안 둘 거야! 고발해서 감옥 보낼 거야!

 

 

드미트리가 지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그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근데 다냐, 난 걱정이야. 그놈이 너랑 내 얼굴을 봤잖아. 나야 곧 떠나니까 상관없는데... 네가 이번 작전을 방해했다고 그놈이 스페호프에게 고해바치면... ”

 

“ 상관없어! 나쁜 놈들... 진짜 이번엔 못 참아! 아까 걔 봤잖아... 눈도 못 뜨고 묶여 있고... 더러운 놈들... ”

 

“ 나도 다른 상황 같았으면 그놈 고발하고 본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했을 거야. 근데 미하일은 워낙 상황이 복잡하니까... 그리고... ”

 

“ 그리고 뭐? ”

 

“ 아까 보니까 미하일은 정말 너한테 의지하는 것 같더라. 그런데 네가 스페호프에게 찍혀서 잘리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되면 미하일하고도 헤어지게 될 거고... 걘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어지겠지. 나 예전엔 몰랐어, 그냥 무대에서 화려한 모습만 봤으니까. 그냥 팬이었으니까. 걘 나한테는 그냥 대단한 예술가일 뿐이었거든. 근데 여기 와서 보니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있잖아, 다닐. 네가 그랬지. 걔 겉보기만 그렇지 완전히 애기라고. 처음엔 그냥 걔가 유치하게 굴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외모는 예쁜 도자기 인형 같지만 성격은 어린애 같은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었어. 이제 알겠어. 왜 네가 그렇게 얘기했는지. 너는 걔 옆에 있어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남아줘야 한다고. 정의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검열요원 그 작자랑 레베진스키를 고발해봤자 스페호프가 눈 하나 깜짝하겠니?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오리발 내밀고 그나마도 갖고 있던 너에 대한 신뢰를 잃고 널 잘라버리는 걸로 끝나겠지. ”

 

“ 하지만... 미셴카가... 미샤가 그놈 얼굴을 봤잖아. 그놈이 미샤를 끌고 가서 가뒀고... ”

 

“ 미하일은 정치범이잖아. 조건부 석방된 유형수나 다름없다고. 걔의 증언은 아무 소용이 없어. 게다가 걘 약에 취해 있었잖아. 심신미약 상태라 증언 인정도 안 될 거야. 다 그렇게 돌아가더라. 나 파리랑 런던에 있었잖아. 본부에도. 거기서 봤어. 아직도 많이 죽여. 그냥 실종사나 의문사 처리돼. 미하일이 재판에서 즉결처형 판결 받지 않은 건, 그리고 여기로 올 수 있었던 건 그나마도 큰 손이 있었기 때문이야. 넌 미하일이 증언을 한 적이 없다고 믿니? 했었어. 재판에서. 변호인이 아무도 없었지. 그래서 쟨 자기변론을 했었어. 몇 마디 못하고 끌려 나갔어. 체제 부적응자에 정신병자라서 발언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 그랬던 앤데 이제 와서 검열요원이 자길 납치해 가뒀다고 증언한들 누가 믿어주겠니. ”

 

 

베르닌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코즐로프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 색깔 다른 남자,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의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도.

 

 

'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의 따윈 없어. 힘센 놈들이 이기는 거지. '

 

' 차르라고 전부 자기 뜻대로 됐을 것 같나? '

 

 

힘없이 베르닌이 중얼거렸다.

 

 

“ 그럼... 그러면 어떻게 해... 그놈이 벌써 국장한테 갔을 거야. 아까 있었던 일... 전부 보고했을 거야. 벌써 다 끝났잖아. 너랑 날 밀고했을 거야. 우리 때문에 작전 망쳤다고. 국장은 이제 날 안 믿을 거야. 내가 고발하든 가만히 있든 이미 다 끝났어. 국장이 나 자를 거야. 미샤는... 아... ”

 

 

드미트리가 그를 쳐다보았다. 뜻을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바라본 후 드미트리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 같은 옷 입었어.

 

“ 뭐? ”

 

“ 같은 옷. 회색과 겨자색 아가일 무늬 셔츠. ”

 

 

갑자기 얘가 머리가 돌았나 왜 갑자기 옷 타령인가 하는 생각에 베르닌은 멍하게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드미트리의 말이 맞았다. 비에 젖어 샤워를 하고 나온 드미트리에게 자기 옷을 꺼내줬으니까. 이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 어, 그래... 나 그거 그때 의류공장 견학 갔을 때 세트로 샀던 거야. 같은 거 몇 벌 있어. 근데 미샤가 되게 싫어해, 입고 있는 거 볼 때마다 제발 좀 싹 갖다버리라고 얼마나 성화인지 몰라. ”

 

“ 너랑 나는 많이 닮았지. ”

 

“ 으응. 그렇지. 다들 쌍둥이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미샤 빼고. 걘 너랑 나랑 안 닮았대. ”

 

“ 아. 미하일. 걔야 그렇게 말하겠지. 걔는 널... 음... ”

 

 

드미트리는 고개를 돌리면서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 부럽다. 너처럼 됐으면... ”

 

“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같은 엘리트가. ”

 

“ 그냥... 나도 그 친구한테 너처럼... ”

 

 

그러더니 드미트리가 목을 가다듬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어쨌든.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너랑 나랑 되게 닮았잖아. 마침 옷도 똑같이 입었고. 그 자식이 너랑 날 어떻게 구별하겠어. 위층에서 달려들었던 것도 나고 계단에서 싸운 것도 나야. 드미트리 베르닌이라고. 너는 이 건물에 없었던 거야. 넌 그냥 검은 숲에 드라이브 갔다가 저녁에 돌아온 거고 내 연락을 받아서 병원에 온 거야. 미하일을 찾아낸 것도, 그 개자식을 두들겨 팬 것도, 스페호프의 작전을 망친 것도 나인 거야. 그렇게 하면 돼. 그러면 모든 게 괜찮을 거야. ”

 

하지만... 그럼 넌 어쩌려고! 말도 안 돼! 국장이 널 가만 안 놔둘 거야!

 

가만 안 놔두면 제깟 게 어쩌려고. 난 연수요원이야. 모스크바 본부에서 파견되어 왔다고. 너랑은 달라. 여차하면 스비제르스키에게 모든 걸 고해바치겠다고 협박하지 뭐. 처음부터 당신의 얼간이 같은 계획을 저지할 생각으로 모든 것을 감시하고 기록했다고 할 거야. 정 안 되면 그 어르신 이름을 팔기라도 하지 뭐. 먼발치에서 밖에 본 적 없지만 스페호프가 그것까지 알 도리는 없으니까. 스비제르스키는 워낙 모스크바 본부에서도 그렇고 해외 지부에서도 막강했으니까 내가 거기서 만나서 연줄이 있는 사이라고 을러대면 믿을 거야. ”

 

“ 그렇지만... ”

 

“ 그렇게 하는 거야, 다닐. 난 어차피 떠날 사람이잖아. 너는 미하일 옆에 남아 있어야지. ”

 

“ 그래도 네가... ”

 

“ 아 배고프다. 우리 뭐 좀 먹자. 어제부터 제대로 못 먹었잖아. 일단 아무거나 대충 사 먹자. 있다가 미하일 깨어나면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항아리 닭고기라든지... 와인만 있으면 코코뱅 만들어 줄 수도 있고. ”

 

 

드미트리가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기 때문에 얼떨결에 베르닌도 휘말리고 말았다.

 

 

“ 어... 그래... 근데 코코뱅이 뭐야? ”

 

아, 프랑스 요리야. 와인 넣어서 조리는 닭찜이야. 비프 부르기뇽이랑 비슷한 건데 닭으로 만드는 거라서 더 금방 만들지. 미하일은 좋아할 거야. ”

 

“ 와인... 그러면 안 되겠다. 미샤는 술 못 마시니까... ”

 

“ 알콜 다 날아가는 거니까 괜찮아. 우하에 보드카 넣는 것처럼. ”

 

“ 어, 그렇구나... 근데 비프 부르기뇽은 또 뭐야? ”

 

“ 비프 부르기뇽은... ”

 

 

드미트리가 말을 멈췄다. 베르닌은 왜 그런가 싶어서 드미트리의 고개가 향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실 문가에 왕재수가 서 있었다. 온통 구겨진 하늘색 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고, 맨발로 뻣뻣하게 서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를 보니 한참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베르닌은 벌떡 일어나서 왕재수에게 갔다.

 

 

“ 어, 너 깼구나! 괜찮니? 왜 거기 그렇게... ”

 

“ 바보 멍충이... ”

 

 

왕재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더니 홱 돌아서서 도로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 드미트리에게는 눈도 주지 않았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그들의 얘기를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바보 멍충이’라는 게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도.

 

 

 

 

*    *    *

 

 

 

 

 

두어 시간 후 스타브로프는 왕재수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 즉시 왕재수는 침대에서 뛰어내렸고 시계를 보더니 극장에 가겠다고 했다. 의사가 대꾸하기도 전에 베르닌이 엄하게 말했다.

 

 

“ 안 돼. 지금 나랑 집에 가야 돼. ”

 

“ 아직 8시잖아. 잠깐이라도... ”

 

“ 무용수들 다 집에 가고 아무도 없어. ”

 

“ 아니야! 애들 나 없어도 늦게까지 연습한단 말이야. 사흘 밖에 안 남았잖아. 오늘 하루를 완전히 날렸어. 1시간만 다녀올게. ”

 

“ 아니. 넌 오늘 극장 안 가. 극장에는 내일 아침 일찍 가는 거야. 지금은 나하고 집에 가야 돼. 이거 네 맘대로 하는 거 아니야. ”

 

“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라도 하는 거야? ”

 

“ 명령 같은 소리! 어휴, 나도 너한테 명령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다고 네가 누구 명령 같은 거 듣냐! 엄청 부탁하는 거야! 제발 집에 가자. 오늘은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나 정말 걱정했어. 너 못 찾을 줄 알고... 다시 못 볼 줄 알고... ”

 

 

이틀 내내 왕재수를 찾아 헤매던 것을 생각하니 베르닌은 다시금 무릎이 풀리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왕재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베르닌의 간절한 부탁에 한숨을 쉬었다.

 

 

“ 못 보긴 왜 못 봐. 수요일에 보내준다 했으니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그땐 봤겠지. 알았어, 집에 갈게. 근데 나 신발이 없어. 좀 갖다 주지... ”

 

“ 그냥 슬리퍼 신고 나와. 집 가까운데 뭐. ”

 

 

왕재수는 맨발로 병실 여기저기를 뒤지며 슬리퍼를 찾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잠깐 기다리다가 이내 마음이 약해졌다.

 

 

“ 슬리퍼 없구나. 오늘 일요일이라 간호사도 없고 선생님한테 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냥 업혀. 바로 앞이니까... ”

 

“ 싫어. 내가 애도 아닌데. ”

 

“ 나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그래. 배도 고프고. 빨랑 업혀. ”

 

 

왕재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투덜거렸지만 곧 베르닌의 등에 찰싹 업혔다. 몸이 사모바르처럼 따뜻했다.

 

 

‘ 다행이다... 아깐 진짜 차가웠는데. ’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왕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베르닌이 나직하게 물었다.

 

 

“ 저... 있잖아. 너 괜찮아? ”

 

“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이틀을 통으로 날려먹었는데. ”

 

“ 아니, 그게 아니라... 그놈이 너 가뒀잖아. 협박했잖아... 다른 일은 없었어? 보드카 먹였다면서. 때리거나 나쁜 짓한 건 아니야? 너 아까 의사 선생님한테 그랬잖아. 기억 하나도 안 난다고.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나? 그놈 얼굴도 생각 안 나고? ”

 

“ 글쎄. 기억 거의 안 나. ”

 

“ 이 건물이라는 것도 몰랐던 거야? ”

 

“ 응. 나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 네가 갑자기 쓰러졌잖아. 너무 놀라서 소리 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도 어지럽고 너무 졸렸어. 정신 차렸을 땐 그 방에 있었어. 그놈이 수요일까지 말 잘 듣고 여기 있으면 무사히 보내주겠다잖아. ”

 

“ 근데 얼굴은 기억 안 나? ”

 

“ 나 눈 가려져 있었어. 뻔할 뻔자 스페호프 똘마니겠지 뭐. ”

 

“ 그치만... 그 마지막 편지... 그거 네 글씨였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그놈이 쓰라고 한 거야? ”

 

“ 뭐, 왕자가 어쩌고 수요일까지 입 다물고 어쩌고? 응. 그 자식이 불러주면서 쓰라고 했어. ”

 

“ 왼손으로... ”

 

“ 그랬나... 기억도 잘 안 나. 머리도 너무 아프고 어지러웠거든. 말 안 들으면 다리 부러뜨린다고 했어. 그래서 그냥 썼어. 그리고 나서는 보드카를 줬어. 종이컵에 가득 담아서. 다리 부러뜨릴까봐 마셨는데 그 다음부터는 진짜 기억 안 나. 토하고 뻗었겠지 뭐. ”

 

“ 그랬구나... 나쁜 자식... 그거 검열요원이었어. 왜 있잖아, 매일 극장 와서 네 작품 지적하던 놈. ”

 

“ 검열요원... ”

 

 

왕재수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화를 내거나 놀라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조그맣게 물었을 뿐이었다.

 

 

“ 넌 안 다쳤어? 그놈이 덤벼들었다면서. ”

 

“ 응. 그냥 좀 까지고 멍든 게 전부야. 드미트리가 위험했지. 총에 맞았잖아. 스쳐서 그나마 다행이야. ”

 

“ 그 자식은 어디 갔어? ”

 

“ 아... 저녁 준비한다고 집에 먼저 갔어. 있지, 우리 너 찾으러 진짜 여기저기 돌아다녔거든.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딤카가 정말 많이 고생했어. ”

 

 

왕재수는 부스럭거리더니 베르닌의 뒷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따뜻하고 촉촉하고 매끄러웠다. 숨결 때문에 간지러웠다. 베르닌은 어쩐지 머쓱하고 기분이 이상해서 불쑥 투덜댔다.

 

 

“ 야, 왜 킁킁대! 냄새 맡냐, 뜨보록처럼! ”

 

“ 너 비 맞고 돌아다녔구나. 땀도 흘리고. 빨랑 씻어야겠다. ”

 

“ 너 찾으러 다니느라 그런 건데 구박하냐, 냄새 난다고! ”

 

“ 내가 언제 구박했어. 냄새 난다고 안 했어. 그냥 비 맞고 땀 흘렸나 보다 했지. ”

 

“ 그게 그거잖아! 지저분하고 냄새 난다고... ”

 

“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어. 그리고 땀 흘리는 거 지저분한 거 아냐. 나 무용수였잖아. 지금도 연습실 가면 맨날 애들 땀 범벅돼 있는데. 비 맞고 땀 흘리는 거 싫어하지 않아. ”

 

“ 어... 그래... ”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더 머쓱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문이 열렸다. 막 복도로 나와서 집으로 걸어가려는데 왕재수가 여전히 베르닌의 뒷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미안. ”

 

“ 뭐가? ”

 

“ 몰라. 전부. ”

 

“ 그래,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나한테 운전 시키고 집안일 시키고 온갖 허드렛일 다 시키더니만... 미안한 거 알았으면 이제부터 음식 투정하지 말고 밥 좀 잘 먹어. ”

 

“ 바보 멍충이. ”

 

“ 으윽! ”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지러울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더니 환하게 웃었다.

 

 

“ 아,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잘됐다. 저녁도 다 돼가거든. ”

 

“ 이게 무슨 냄새야, 딤카? 너무너무 맛있는 냄새 나! ”

 

“ 냉동실에 있던 그 닭 한 마리로 코코뱅 만들었어. 근데 네가 껍질이랑 기름을 다 떼어내서 너무 퍽퍽할 것 같아서 베이컨을 반 토막 넣었어. 허브 많이 넣고 기름기도 유산지로 한번 흡수시켰으니까 미하일이 먹기에도 괜찮을 거야. 지금 양파수프 끓이고 올리비에 샐러드 만들고 있으니까 너희들 씻고 옷 갈아입으면 얼추 시간 맞을 거야. ”

 

“ 아, 진짜 맛있겠다... ”

 

 

베르닌은 왕재수부터 먼저 욕실로 데려다 주었다. 혼자 씻을 수 있으려나 하고 잠깐 걱정했지만 왕재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더니 그에게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가서 옷가지를 챙겨왔다.

 

 

옷을 욕실 문 앞에 내려놓고는 베르닌은 부엌으로 갔다. 드미트리가 감자 샐러드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 저, 좀 도와줄까? ”

 

“ 아니야, 다 됐어. 수프 불 좀 꺼줄래? 다 됐거든. ”

 

“ 우와, 이건 평소에 먹는 양파수프랑 다르네. 위에 덮인 거 치즈야? ”

 

“ 응. 프랑스식이야. 굉장히 맛있어. 비 맞고 떨었으니까 이거 먹으면 몸도 따뜻해지고 좋을 거야. 미하일도 그렇고. 파리 왔을 때도 대사관 파티에서 이건 잘 먹었댔어. ”

 

“ 그렇구나... 쟤 올리비에 샐러드도 좋아해. 닭고기도 잘 먹고. 잘됐다. 여기 와서는 맨날 기름진 시골 음식이라고 투덜대고 밥도 잘 안 먹었는데 너 덕분에 진짜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겠구나. ”

 

“ 난 이 동네 음식 맛있던데. 근데 여기 오래 있으면 살찌긴 하겠더라. 다 기름지고 맛있어서. ”

 

 

드미트리는 접시에 샐러드를 솜씨 좋게 담으면서 욕실 쪽을 힐끗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 나 사무실에 갔었어. ”

 

“ 뭐, 정말? 언제? ”

 

“ 아까. 미하일이랑 네가 병원에 있을 때. 무전기 갖다놓으러. 거기서 스페호프와 마주쳤어. 그 작자한테서 보고를 받은 모양이더라고. 참, 그놈 이름도 알았어. 이반 데미도프래. ”

 

“ 데미도프... 아... 그래, 뭔가 D로 시작하는 성이었어. 검열국에서 가끔 공문이 왔었거든. 그래서... 국장이 뭐라고 해? 그자가 전부 까발린 거야? ”

 

“ 음, 아닌 것 같아. 그 자식도 겁이 났나봐. 우리한테 들키고 총까지 쏜 게 발각되면 골치 아플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미하일이 혼자서 도망쳤다고 보고했더라고. 그래서 스페호프는 완전히 저기압이었어. 나한테 자초지종을 간추려서 들려주더니 진작 나한테 맡길 걸 괜히 검열국 쪽 협조를 받았다가 작전을 망쳤다고 투덜댔어. 나하고 너한테 맡길 걸 그랬다고. 다행이지. ”

 

“ 아... 정말 다행이다... 근데 아직 사흘이나 남았는데... 국장이 또 나쁜 짓을 꾸미면 어떡하지... ”

 

“ 안 그럴 거야. 내가 뻥을 좀 쳤거든. 조금 전에 본부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스비제르스키가 수요일 공연에 관심이 지대해서 조금이라도 거기 차질이 생기면 여기 KGB고 극장이고 문화국이고 완전히 물갈이하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은 손 떼는 게 나을 거라고 했어. ”

 

“ 그걸 믿어? ”

 

“ 믿은 모양이야. 펄펄 뛰더니 나한테 크레믈린 앞잡이라고 욕을 하더라고. 스비제르스키가 보낸 끄나풀 아니냐면서. 그래서 몹시 모욕적이라고 운을 뗀 후 만약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넌지시 물어보니까 안색이 변하더라고. 꺼지라던데. 아마 한동안 몸 사릴 거야. ”

 

 

베르닌은 드미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왜? ”

 

“ 진짜야? ”

 

“ 뭐가? ”

 

“ 그 사람. 너 그 사람이 보낸 거야? ”

 

“ 누구, 스비제르스키?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허술했겠냐. 얼치기한테 총이나 맞고 미하일 납치되도록 놔두고... 너 그 사람 잘 모르는구나. 스비제르스키가 부리는 요원들은 진짜 프로야. 장난 아니라고. 나 같은 건 발끝도 못 따라가. 내가 이미지 메이킹 하느라 잘난 척해서 그렇지 그래봤자 나도 행정요원에 책상물림이라고. 그래도 스페호프는 멍청하니까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았어. ”

 

 

베르닌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드미트리의 말이 어디서부터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헷갈렸다. 드미트리는 다시 웃었다.

 

 

“ 너랑 같이 모스크바 가면 좋겠다. 재미있을 텐데. 책상물림 둘이서. ”

 

“ 응, 나도. 모스크바에도 가고 레닌그라드에도 가면 좋을 텐데. 미셴카도 같이. ”

 

“ 그래. 이제 밥 먹자. 미하일도 다 씻었나보네. 너도 얼른 가서 씻어. 내가 차리고 있을게. ”

 

 

베르닌은 비와 땀과 먼지에 젖어 눅눅하기 짝이 없는 셔츠와 바지를 벗고 속옷 바람으로 욕실로 갔다. 마침 왕재수가 씻고 나와서 옷을 주워 입고 있었다. 셔츠를 입고 나서 못마땅한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 속옷부터 겉옷까지 전부 다 까만색만 가져오고. 내가 까마귀냐. ”

 

“ 야! 네가 어제 알록달록하다고 구박해서 그런 거 아냐. 또 뭐라고 할까봐 색깔 있는 옷은 안 골랐단 말이야. ”

 

“ 무지개 아니면 까마귀... ”

 

“ 맨날 우주 최강 꽃미남이라며! 그러면 아무 거나 입어도 다 예뻐야지! 왜 옷 탓을 해! ”

 

“ 물론 난 아무 거나 입어도 예쁘지! 그치만 기분이란 게 있잖아! ”

 

“ 아휴, 난 그런 거 몰라. 한번만 더 불평하면 내 옷 가져다 줄 거야. 아가일 무늬 셔츠랑 손목토시랑 황토색 면바지. 입혀 놓고 사진 찍어서 극장에 돌릴 거야! ”

 

“ 악마! ”

 

 

왕재수는 티셔츠의 주름을 펴더니 몸을 돌려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 야, 너 어디 가! ”

 

“ 집에! 잘 거야! ”

 

“ 저녁 먹어야지! ”

 

“ 배 안 고파. 잘래. ”

 

“ 안 돼. 어제부터 먹은 거 없잖아. 저녁 먹고 자. 너 먹으라고 드미트리가 엄청 맛있는 거 만들었단 말이야. 무슨 꼬꼬에 양파수프... 치즈가 막 올라가 있고... 정통 프랑스 식이랬단 말이야.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파리에서도 먹었을 거 아니야. ”

 

“ 안 좋아해. 프랑스 음식 안 좋아해! ”

 

“ 저녁 안 먹으면 내일 극장 못 갈 줄 알아. ”

 

 

왕재수는 베르닌의 발을 꽉 밟더니 화를 내면서 거실로 갔다. 카펫에 철썩 드러눕더니 다리를 들어 올리고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베르닌은 안심하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    *    *

 

 

 

 

 

저녁 식사는 아주 근사했다. 닭고기와 베이컨, 감자와 당근, 양파를 와인 소스로 조려낸 코코뱅은 그야말로 혓바닥에서 살살 녹았다. 고기와 야채, 와인이 어우러지며 진한 풍미가 감돌았다. 베르닌은 빵으로 접시를 다 닦아 먹은 것도 모자라 냄비에 남은 소스까지 모두 긁어 먹었다. 그리고 노르스름한 치즈가 두껍게 덮여 있는 양파수프는 예술에 가까웠다. 치즈를 살며시 가르자 김이 펄펄 오르는 황금빛 수프와 캐러멜처럼 갈색으로 변해 푹 익은 양파가 기절할 듯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맛 또한 기가 막혔다. 게다가 감자와 양파, 달걀, 당근만으로 만든 올리비에 샐러드의 소박하고 신선한 맛이 코코뱅과 양파수프의 화려한 맛을 부드럽게 감싸주면서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베르닌은 거의 접시에 코를 박다시피 하며 먹었고 드미트리도 맛있게 먹었지만 왕재수는 음식에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중간 중간 살뜰하게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기도 하고 빵에 버터를 발라주기도 했지만 전혀 입맛이 없어 보였다. 베르닌이 협박의 눈길을 보내거나 좀 먹으라고 종용하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조금씩 먹었지만 그나마도 금방 포크를 내려놓았다. 베르닌도 처음에는 야단을 쳤지만 왕재수가 억지로 먹는 기색이 너무 역력했기 때문에 속이 상했다.

 

 

“ 왜 이렇게 안 먹니. 언제 이런 거 또 먹을 수 있다고... 우리 동네에서는 유럽 음식 못 먹잖아. 맛있는데... 드미트리가 너 먹으라고 일부러 이렇게 다 준비한 건데. ”

 

“ 지금은 진짜 못 먹겠어. 내일 먹을게 화내지 마. ”

 

 

왕재수가 하염없이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색도 아직 창백했고 몹시 지쳐 보였기 때문에 베르닌은 마음이 아팠다. 그때 드미트리가 상냥하게 말했다.

 

 

“ 입맛 없는 게 당연하지. 못 먹는 술도 억지로 마셨고 많이 놀랐을 텐데. 부엌에 보니까 과일청 있더라. 그거 타 줄 테니까 따끈하게 한 잔 마시고 푹 자면 괜찮아질 거야. ”

 

 

드미트리가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따끈한 과일차를 준비하는 동안 베르닌은 왕재수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마에 손을 대고 체온을 재 보았다. 살짝 뜨거웠지만 왕재수는 본래 체온이 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손목을 잡고 맥박도 쟀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웬 맥이 이렇게 빨리 뛰니. 너 아프면 솔직하게 말해야 돼. 의사 선생님한테 데려다 줄 테니까. 그래야 내일 극장도 가고 공연 준비도 잘 하지. ”

 

“ 아니야, 안 아파. 다닐, 나 이제 자면 안 돼? 자러 갈래. ”

 

 

베르닌은 안쓰러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잠깐만. 나 아침에 침대 엉망으로 해놓고 나왔거든. 시트만 좀 정리해줄게. ”

 

“ 아니야, 내 방 가서 잘래. 너도 자야 되잖아. ”

 

“ 너네 집에서는 잠 잘 안 온다며. ”

 

“ 오늘은 금방 잘 것 같아. ”

 

“ 그래. 아, 잠깐만... 있잖아, 그러면 조금만 기다릴래? 내가 잠깐만 너네 집 갔다 올게. 좀 치울 게 있어서. 과일차 마시고 있어. ”

 

“ 괜찮은데... ”

 

“ 너네 집 되게 지저분하단 말이야. 그때 그 유리 깨진 것도 안 치웠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드미트리가 보랴 표 과일청을 세 잔 타서 나왔기 때문에 베르닌은 얼른 한 잔을 쭉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진해서 온몸의 피로가 쫙 풀리는 느낌이었다.

 

 

 

왕재수와 드미트리가 과일차를 마시는 동안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집으로 올라갔다. 깨진 유리조각들은 드미트리가 전부 모아서 치워 두었기 때문에 침실은 말끔했다. 그는 냉장고를 열어서 내용물을 모두 꺼낸 후 소독약과 비눗물을 묻힌 행주로 안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리고는 안을 다시 채워놓고 문제의 종이봉지를 들고 나왔다.

 

 

‘ 비둘기 꼭 묻어주라고 했으니까... ’

 

 

베르닌은 아파트 뒤뜰로 나왔다. 뒤뜰에는 화단과 나무들이 단정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행히 비도 그쳤고 땅도 많이 말라 있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제일 남향에 있는 커다란 배나무 아래로 갔다. 모종삽으로 젖은 땅을 파냈다.

 

 

‘ 깊이 묻어야 한다고 했지. 개가 와서 파헤친다고... 그 책 다 읽어 놓고 아닌 척 하고. 하여튼 웃긴 녀석이라니까. ’

 

 

그는 땅을 깊이 판 후 종이봉지에 싸여 있는 비둘기를 묻어 주었다. 정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흙을 잘 덮은 후 손으로 탁탁 쳐서 단단하게 눌렀다. 돌아서려다 마음이 무거워서 곁의 화단에 피어 있던 조그만 꽃 몇 송이를 뽑아서 비둘기 묻은 자리에 살며시 놓아 주었다.

 

 

 

침대 시트만 정리해주면 되겠다 싶어서 그는 다시 7층으로 올라갔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후 침실 쪽으로 갔다. 그런데 문이 반쯤 닫혀 있었고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어, 이상하다. 문 열어놓고 나왔었는데. 바람 불어서 닫혔나. 내가 창문 열어놨었나. 불도 끄고 나온 것 같은데... ’

 

 

갑작스럽게 베르닌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다시 데미도프가 왔을 수도 있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스페호프가 다른 놈을 보낸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벽에 붙어 가능한 한 소리를 죽이며 문 옆으로 다가섰다. 순식간에 바짝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안을 엿보았다. 그리고 감전된 듯 멍해졌다.

 

 

왕재수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드미트리도 있었다. 한 팔로 왕재수의 허리를 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뺨과 턱을 감싸며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둘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둘 다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왕재수의 바지는 반쯤 말려 내려가 있었다. 드미트리가 계속해서 키스를 하면서 한 손으로 자기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왕재수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왕재수가 매트리스 위에 눕자 드미트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두른 팔을 더 세게 조이면서 옆으로 누웠고 왕재수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귀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베르닌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딸꾹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정신없이 뒷걸음질쳐 현관으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두 번이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집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옷도 벗지 않고 무작정 욕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미지근한 물을 두 컵이나 마셨다. 그래도 딸꾹질이 그치지 않아서 거실을 왔다갔다 걸어 다녔고 한참 후에야 침실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꽝꽝 울려서 잠이 오지 않았다.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술에서 막 깨어난 것 같기도 했다. 눈앞에 드미트리와 왕재수가 어른거렸다. 너무 놀라서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시트에 이마와 얼굴을 비벼대자 서늘한 기운 덕에 약간 정신이 돌아왔다. 심호흡을 하자 훨씬 나아졌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를 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투덜댔다.

 

 

‘ 뭐야, 꼴도 보기 싫다더니. 엘리트 따위 싫다더니. 하여튼 문어발... 그럴 거면서 밥도 안 먹고 틱틱대고. 그럴 거면 평소에도 좀 잘해줄 것이지. ’

 

 

한 대 패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베르닌은 돌아누웠다. 어둠 속에서 잠을 청했다. 하루종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왕재수를 찾아 돌아다니고 협박범과 몸싸움을 하고 왕재수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까지 묻어주느라 무척 피곤했다. 하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드미트리가 새벽에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소리가 나면 어차피 깨겠지 하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문소리는 나지 않았고 베르닌은 거의 뜬눈으로 밤새 뒤척이다 동이 터올 때쯤에야 살풋 잠이 들었다.

 

 

 

 

 

*    *    *

 

 

 

 

 

 

이른 아침에 베르닌은 기척을 느끼고 깨어났다. 침실 문가에 드미트리가 서 있었다. 옷을 완전히 차려입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베르닌은 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드미트리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 어, 딤카... 빨리 일어났구나. ”

 

“ 응, 깨우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

 

“ 가다니, 어딜 가는데? ”

 

모스크바. 본부에서 돌아오라고 연락이 왔어. 지금 공항으로 떠날 거라서. ”

 

 

베르닌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야! 모스크바라니. 너 일주일 연수 일정이었잖아. 수요일에 끝나는 거잖아. 왜 오늘... ”

 

“ 본부에서 연수 일정을 축소했대. 사실은 어제 저녁에 요원 숙소에 들렀는데 메시지가 와 있더라고. 얘기할까 하다가 즐겁게 밥 먹고 노는데 괜히 분위기 망치기 싫었어. ”

 

“ 혹시 우리 국장이... ”

 

“ 아,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어제 그 작자가 나보고 그랬잖아, 꺼지라고. 그래도 연수 점수는 다 채워주겠대. ”

 

“ 우리 때문에 네가... ”

 

“ 아니야. 나 이걸로 연수 코스 다 마치는 거라서 본부 돌아가면 발령도 받을 거고. 내가 손해 보는 건 하나도 없는걸. 오히려 며칠 빨리 마치는 거니까 더 좋은 거지. 딱 두 개 아쉬운 게 있지만... ”

 

“ 뭔데? ”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그 보고서... 국장하고 담판을 못 지었잖아. 그거 사장시키지 말고 꼭 스페호프에게 보여주고 업무 분장 다시 받아. 발따예프 따위에게 휘둘리지 말고. 알았지? ”

 

“ 어... 으응... 고마워. 그런데 다른 하나는... ”

 

“ 수요일 공연. 정말 보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 그래도 미하일이 무사하니까 됐어. 다행이야. 나 이제 갈게. 8시 반 비행기라서 지금 나가야 버스를 탈 수 있어. ”

 

“ 어, 내가 공항까지 태워다줄게! 잠깐만 기다려, 나 옷만 갈아입으면 돼. ”

 

“ 아니야, 다닐. 괜찮아. 넌 미하일 옆에 있어야지, 걔 오늘 아침 일찍 극장 가야 하잖아. ”

 

“ 하지만... 딤카... 나 너무 섭섭해. ”

 

“ 에이, 무슨 소리야. 꼭 다시 못 볼 것처럼. 모스크바 오면 꼭 연락해. 나 계속 연수 다니느라 아직 집을 못 구해서 주소랑 전화는 없지만 본부로 연락하면 연결될 거야. 꼭 와. ”

 

“ 응. 근데 저... 있잖아, 너 조금만 기다릴래? 미하일... 내가 걔 깨울게. 너 가는데 인사라도 해야지. 이렇게 그냥 가면 서운해 할 거야. ”

 

“ 아니야, 됐어. 깊게 자더라. 그냥 자게 내버려둬. 꼴 보기 싫은 KGB 나부랭이 돌아간다는데 좋아하겠지. ”

 

“ 하지만... 너희... ”

 

“ 모스크바에서 봐, 다닐. 건강하고. ”

 

 

드미트리가 두 팔을 벌려 베르닌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침실을 나갔다.

 

 

베르닌은 망연자실해서 따라 나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멍하게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드미트리는 이미 길을 건너서 조그만 점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후 옷을 갈아입었다. 위층으로 갔다. 침실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좀 망설이다가 살며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왕재수는 등을 돌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담요로 몸을 돌돌 말고 있었지만 한쪽 어깨와 팔이 빠져나와 있었다. 카펫 바닥에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베르닌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에 불그스름한 자국들이 몇 개 흩뿌려져 있었다. 간밤에 드미트리가 남긴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닌은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왕재수의 팔을 토닥였다.

 

 

“ 미셴카, 자니? ”

 

“ 으응... ”

 

 

잠에 취한 음성으로 왕재수가 웅얼거렸다.

 

 

“ 저... 있잖아. 드미트리 말이야. 본부에서 연락이 와서 지금 돌아간대. 8시 반 비행기래. 지금쯤 버스 탔을 거야. 저... 우리 공항에 가보지 않을래? 가는 거 보고 인사라도... ”

 

왕재수의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잠들었나 싶어서 베르닌이 다시 한 번 좀 더 큰 소리로 말하려는데 조그맣고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돌아간다고... 지금... ”

 

“ 응. 갑자기 그렇게 됐대. 공항에 같이 가자. ”

 

“ 내가 왜. ”

 

“ 하지만... 너... 저... 너랑 걔랑, 그러니까 어제... 어... ”

 

 

왕재수는 몸을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지금 가면 이제 다시 보기 힘들 거야. 그러니까 나랑 공항 가자. 옷만 입으면 돼. 차에 시동 걸어놓을게. ”

 

“ 다닐, 나 좀 내버려둬. 제발. ”

 

 

목쉰 음성으로 왕재수가 속삭였다. 마지막 단어에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알았어, 그럼. 더 자라. 있다가 일어나면 우리 집으로 내려와. 아침 먹고 극장에 가자. ”

 

 

왕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전날 비가 와서 공기가 차가웠기 때문에 걱정이 된 베르닌은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올려 주려고 몸을 굽혔다. 왕재수가 고개를 더욱 옆으로 돌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뺨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베르닌은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침실을 나갔다. 문을 닫아주려는데 등 뒤로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다.

 

 

‘ 바보. 울 거면서. ’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잠은 이미 다 달아난 후였다. 냉장고를 뒤져서 드미트리가 어제 코코뱅을 만들고 남겨놓은 짜투리 닭고기와 뼈를 찾아냈다. 육수를 내고 반쯤 말라빠진 비트와 당근을 잘게 썰어 넣어 보르쉬를 끓였다. 달걀도 삶고 샌드위치도 만들고 사과와 오렌지도 챙겼다.

 

 

‘ 아침엔 많이 안 먹는 애니까 수프랑 흑빵 먹이고 차 한 잔 우려주면 될 것 같고. 극장 가면 바쁘다고 점심 거를 테니까 계란이랑 샌드위치랑 과일 먹으라 해야지. ’

 

 

그는 시계를 보았다. 8시였다. 드미트리는 이제 공항에 도착했을 것이다. 잠시 후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떠날 것이다. 그는 서무 업무의 효율성 제고 보고서에 대해, 9밀리 마카로프에 대해, 코코뱅과 마카롱, 프랑스 홍차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키스에 대해. 포옹과 웃음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드미트리는 쾌활하게 잘 웃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침실에서 들었던 것은 다닐 베르닌에게는 들려준 적이 없는 웃음소리였다. 훨씬 낮고 내밀하고 가슴을 울려나오는 웃음소리였다. 마치 왕재수가 그에게는 결코 그런 눈빛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처럼. 관통하는 듯한 눈빛.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과 같은 눈빛. 기묘하게도 어딘가 고통스럽고 슬픈 눈. 그러자 베르닌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왕재수는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드미트리의 품에 안겨 키스를 하는 내내, 서서히 달아오르는 열락에 취한 왕재수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닌은 분명히 그 눈빛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드미트리도 보았을 것이다. 코즐로프도. 그리고 레닌그라드의 그 의사, 유리 아스케로프도.

 

 

그는 한쪽에 치워두었던 십자가 목걸이를 가지고 왔다. 아마 극장에 가져가면 의상 담당자가 망가진 고리를 고쳐줄 수 있을 것이다. 시커멓게 더러워진 십자가를 옷자락으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얼룩은 금세 사라졌다. 그건 그저 흙과 먼지와 기름이었으니까. 드미트리가 입었던 아가일 무늬 셔츠에 번진 핏자국보다 훨씬 지우기 쉬웠다. 핏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겠지만 어쨌든 지울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차피 같은 셔츠가 여러 벌이니 지워지지 않으면 버리면 된다. 하지만 뭉개진 채 들려오던 흐느낌과 꼭 감긴 눈 너머로도 보이던 깊고 고통스러운 눈빛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베르닌은 흙과 먼지와 피가 아닌 얼룩을 지우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책상물림이었으니까.

 

 

 

 

 

FIN

- 2015. 9. 6 ~ 9. 18 -

 

 

 

...

 

 

이렇게 하여 우수한 단추 시리즈가 끝났다. 서무는 보통 1~2개 에피소드로 완결되는데 이번 얘기들은 계속 연속되면서 오래 붙잡고 써서 그런가 좀 섭섭하네..

 

사실 완전히 끝난 건 아니고... 다음주에는 33-1편이 올라갈 예정이다. 일종의 디렉터스 컷 같은 건데 이번 우수한 단추 시리즈에 종속되어 있어 별도의 34편이 아니라 33-1이라는 숫자를 붙였다~ 우수한 단추 시리즈는 내용상 왕재수의 등장 분량이 적었는데 33-1에는 이 녀석도 많이 나온다 :) 이건 다음주...

 

..

 

중반부에 드미트리가 왕재수의 재판에 대해 하는 얘기는 본편 우주의 미샤가 겪었던 일에서 가져왔다.

 

..

 

 

... 단추 브라더스의 액션이 너무 적은 이유는... 서무 시리즈라서 나름대로 폭력 묘사는 매우 자제했습니다.. 테이큰 단추는 다른 기회에... :)

(생각해보니 단추의 액션이 제일 무자비했던 것은 14편 검은 숲 온천 요양소에서 어리버리 탈영병 알릭을 상대로 의자 휘두를 때였음... ㅠㅠ)

 

제대로 된 테이큰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단추나 드미트리가 아니라 프로페셔널이자 나쁜 남자인 일류샤가 주인공으로 나와야 할 듯한데... 일류샤는 댓글 우주에서 어느새 쿠마의 마력에 빠져 나쁜 짓을 청산하고 빵집 점원이 되어 있으니 :)

 

..

 

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사실 얼마 안되는 낙이기도 해요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가져가시거나 베끼거나 인용/변형/사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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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