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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9월이다.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다..  

 

본편도 잘 안 풀리고 일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서무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것이 작년 9월이므로 이 시리즈도 거의 일 년이 되었다. 그동안 본편은 100페이지밖에 못 썼는데 서무 시리즈는 0편부터 31편까지 32개 에피소드에, 번외편도 두 개나 써서 그야말로 주객전도 현상 발생! 본편은 언제 쓰지 싶다가도.. 확실히 사람이란 편한 게 좋고 스트레스 푸는 게 좋은지 서무는 잘 써지고 본편은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며 써야 하다 보니 답보 상태. 그러다 보니 서무 시리즈는 점점 각종 장르의 잡탕으로 변해 가고!!! 

 

지난주에 31편 1부(http://tveye.tistory.com/3994)를 올렸고 이번 주는 2부이다.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1부를 먼저 읽어야만 한다. 분량 때문에 끊어서 올리게 되었음. 역시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가 등장하는 우수한 단추 시리즈~   

 

그럼 31편 2부~ 재미있게 읽으세요!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모스크바 본부에서 파견되어 온 드미트리 베르닌. 베르닌과 똑같은 외모의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는 왕재수의 오랜 팬으로서 반가움을 표시하지만 왕재수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데... 금요일 밤에 집으로 돌아온 베르닌은 모처럼 토요일에 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푹 쉬려고 하지만...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에피소드 26. 베르닌의 옛 여인 : http://tveye.tistory.com/3832
* 에피소드 27. 밀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18
* 에피소드 28. 9밀리 마카로프와 모스크바 비밀별장 : http://tveye.tistory.com/3938
* 에피소드 29. 보랴의 생일 파티 : http://tveye.tistory.com/3957
* 에피소드 30. 엘리트 요원 드미트리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978
* 에피소드 31.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1부) : http://tveye.tistory.com/3994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번외편. 곱사등이 흑염소와 단추소년 다닐, 절세미인 미셴카(러시아 민담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849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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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31

 

 

 

 

서무의 슬픔

- 두 명의 베르닌이 금요일 밤에 모이다 (2부) -

 

 

 

 

 

 

 

 

왕재수는 베르닌의 집에 들르지 않고 곧장 자기 집으로 가서 자겠다고 했다. 베르닌은 뭐라도 먹이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계속 하품을 하고 있었으므로 포기했다.

 

 

“ 알았어, 그러면 내일 일어나면 내려와. 너 계속 제대로 못 먹었으니까 아침이라도 뜨끈한 국물이랑 좀 먹어야지. 냉동실에 닭 한 마리 넣어놓은 거 있으니까 그걸로 수프 끓여줄게. ”

 

“ 아침부터 고기 수프라니... 그거 항아리 닭고기처럼 기름 둥둥 뜨는 거 아니야? ”

 

“ 아니야! 껍질 다 벗겨서 냉동해놨어! 너 기름기 있으면 안 먹잖아! 어휴, 그 맛있는 거 다 떼어내느라 아까워 죽는 줄 알았네.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딴 데 기어나가지 말고 일어나면 내려와! ”

 

“ 알았어. 어차피 극장도 못 가. 내일 소독하고 페인트칠한댔어. ”

 

“ 그래! 너 내일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서 쉬어! 그래야 수요일 공연도 잘 올리지. 얼른 올라가서 씻고 자라. 너 어제도 그냥 뻗어서 씻지도 않고 잤잖아. 지저분하게. ”

 

“ 뭐가 지저분해! 나 오늘 아침에 샤워했단 말이야! 아휴, 진짜 시어머니처럼... 그리고 내일 바냐한테 갈 거야. 월요일에 그랬잖아, 프랑스 잡지... 토요일까지만 놔둔다고. ”

 

앗, 웃기지 마! 투레츠키 그 자식한텐 절대 못 가! 그 자식 추행범이잖아! 망할 놈의 프랑스 잡지가 밥 먹여 주냐! 잡지 꼭 보고 싶으면 내가 보랴한테 전화해서 갖다 달라 할 테니까 거기 가지 마! ”

 

“ 쳇, 왜 그렇게 바냐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람. 쓸 만한 녀석인데. 잡지 말고도 괜찮은 거 들어왔을지도 모르는데. ”

 

하여튼 안 돼! 정 가고 싶으면 나하고 같이 가!

 

“ 맘대로 해라. 너랑 같이 가든 말든 난 상관없으니까. 하여튼 나 이제 올라가서 잘래. 잘 자. ”

 

“ 그래, 잘 자. ”

 

 

왕재수가 위층으로 올라간 후 베르닌은 샤워를 하려다가 문득 드미트리 생각이 났다.

 

 

‘ 아 맞다, 내일 극장에서 10시에 보자고 했는데. 내일 극장 안 여니까 알려줘야겠다. ’

 

 

그는 요원 숙소에 전화를 했다. 그곳은 기숙사였기 때문에 전화는 각 층별 수위실에 하나씩밖에 없었다. 드미트리 베르닌을 바꿔달라고 하자 수위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다냐? 무슨 일이에요? ”

 

엇, 리자? 어... 어... 왜 당신이 전화를... ”

 

“ 아, 지금 카체리나 언니랑 갈리나 언니하고 같이 드미트리 방에 놀러와 있어요. 언니들이랑 드미트리가 너무 재미있게 놀고 있어서 내가 전화 받으러 나온 거예요. ”

 

“ 어... 그래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

 

“ 드미트리가 모스크바에서 유행하는 카드 게임을 알려줬는데 엄청 웃겨요. 지면 뽀뽀하거나 벌칙을 받아야 돼요. 근데 언니들이 서로 드미트리한테 뽀뽀하고 싶어서 일부러 져주고 분위기가 장난 아니에요. 당신도 올래요? 남자가 모자라는데. 되게 웃길 거 같아요, 얼굴 똑같은 남자 둘이! ”

 

“ 아, 아니에요... 뽀뽀... 벌칙... 난 오늘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드미트리가 당신도 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

 

“ 왜요? 난 오면 안돼요? 드미트리 재밌는데. ”

 

“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저... 드미트리... 걔 진짜 괜찮은 놈이긴 한데... 걔 다음 주 목요일에 모스크바 돌아가니까... 난 그러니까... 괜히 당신이... 아, 그게... ”

 

“ 뭐예요, 다냐! 내가 드미트리한테 반하기라도 할까 봐요? 어머, 당신 진짜 웃겨요.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다고. 별일이네. ”

 

 

수화기 너머로 리자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닌은 그저 전화로만 얘기하는 중인데도 얼굴이 갑자기 화끈거렸다.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 저... 드미트리 그럼 전화 못 받아요? ”

 

“ 어, 잠깐만요. 여기 왔네요. 바꿔줄게요. ”

 

 

리자의 웃음소리가 멀어지면서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다닐. 집에 들어갔니? ”

 

“ 으, 으응. 방금. ”

 

“ 미하일은? ”

 

“ 자러 올라갔어. ”

 

“ 아, 그럼 너 오늘 업무는 다 끝난 거네. 놀러 올래? 여기 지금 카챠랑 갈린카, 리자랑 있는데. 한 잔하면서 피로도 풀고 어때? ”

 

“ 아, 아니야. 난 오늘 좀 피곤해서... 있잖아, 내일 극장 문 안 연대. 소독하고 페인트칠한다고... 그래서 미하일도 안 나갈 거야. 그러니까 10시까지 안 와도 돼. ”

 

“ 아, 그래? 미하일한테는 잘 된 거네. 계속 쉬지도 않고 일했다면서. ”

 

“ 응, 그나마 다행이야. ”

 

“ 너한테도 다행이다, 너도 주말도 없이 계속 일했잖아. 그럼 내일은 어떻게 할까? 내가 그쪽으로 갈까? ”

 

“ 아, 아니야. 내일은 미하일도 하루 종일 집에서 쉬게 할 거니까 별 일 없을 거야. 너도 쉬어. 어차피 일요일 되면 또 극장 나갈 거니까 거기서 보면 될 것 같아. ”

 

“ 너도 집에서 쉬는 거니? ”

 

“ 어,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저 녀석 하는 짓 좀 봐서. 괜찮을 것 같으면 잠깐 사무실 나갈 수도 있고. 다음 주는 그 신작 때문에 옆에서 계속 봐야 하니까 사무실에 못 나가거든. 일을 좀 해놔야 할 것 같아서. ”

 

“ 음... 그래. 혹시 사무실 가게 되면 나 불러. 도와줄게. ”

 

“ 고마워! ”

 

근데 너 정말 안 올 거니? 리자 진짜 귀엽다. 너 혹시 걔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면 내가 살짝 도와줄 수 있는데. 나 다리 잘 놓거든. ”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하여튼 잘 쉬어. 나 이제 씻어야겠다. ”

 

“ 그래, 잘 자! ”

 

 

베르닌은 어쩐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드미트리는 좋은 친구였고 생각보다 예의도 바르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편이었으므로 리자에게 비신사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게다가 카체리나와 갈리나도 함께 있다고 했으니까. 사실 드미트리가 리자와 뜨거운 사이가 된다 해도 자신이 간섭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리자가 나이도 어린 편이고 원체 구김살 없이 밝은 성격이다 보니 괜히 드미트리에게 빠져들었다가 상처 입을까봐 걱정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아휴, 내가 왜 이러지. 이게 다 저 녀석 때문이야! 저 녀석 뒤치다꺼리하면서 맨날 속 썩다 보니까 걱정이 습관이 됐어. 공연히 리자까지 걱정하고... 알아서 잘 하겠지 뭐. 그리고 잘 되면 더 좋을 수도 있지 뭐. 요즘은 장거리 연애도 하는데. 뜨거운 물로 샤워나 하고 자야겠다. ’

 

 

샤워를 하니 뭉쳐 있던 근육이 좀 풀리면서 노곤해졌다. 막 파자마를 걸치고 침대로 기어 올라갔는데 갑자기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비명 소리였다. 위층이었다. 비명이 한 차례 더 터져 나왔다가 뚝 끊겼다. 베르닌은 급하게 튀어나갔다.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올라 왕재수의 집으로 달려갔다.

 

 

미하일! 야! 무슨 일이야! 문 좀 열어봐!

 

 

기척이 없었다. 더 이상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갑작스럽게 치솟는 공포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간신히 열쇠를 꺼냈지만 손이 떨려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두어 번 실패한 끝에야 문을 열었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베르닌이 목청껏 소리쳤다.

 

 

미하일! 나야! 나 왔어! 괜찮은 거야?

 

다, 다닐...

 

 

가냘픈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침실 쪽이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침실로 달려갔다. 왕재수가 어두컴컴한 침실 벽에 등을 딱 붙이고 몸을 웅크린 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방 안은 비어 있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 미셴카! 괜찮아? ”

 

“ 어... 아, 안 괜찮아... ”

 

 

왕재수는 고개도 못 들었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두 손으로 발목을 꼭 껴안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베르닌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가 왔었어? 무서운 거라도 봤어? 꿈꿨니? ”

 

“ 나 나갈래... 다닐, 너네 집 갈래... 무서워... ”

 

 

왕재수가 여전히 고개를 아래로 처박은 채 베르닌을 쿵쿵 들이받았다. 얼마나 몸을 떠는지 발작을 일으킨 병자 같았다. 베르닌은 일단 왕재수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일으켜서 거실로 데리고 나왔다. 소파로 데려가서 거실과 부엌과 욕실, 서재 불을 모두 켜주었다. 담요로 어깨를 감싸주고 가능한 한 제일 부드러운 목소리를 짜내서 달랬다.

 

 

“ 이제 괜찮아, 나랑 같이 있잖아. 고개 들어도 돼. 불도 다 켰어. 무서운 거 다 갔어. ”

 

“ 아니야... 저 안에 있어. ”

 

“ 뭐가 있었는데? 방에 들어가니까 무서운 게 있었어? ”

 

“ 지, 지금도 있어. ”

 

“ 누가 왔었던 거야? 사람이야? ”

 

“ 몰라... 왔었나봐. 누군지 몰라. 아무도 없었어. ”

 

“ 근데 어떻게 누가 왔었다고 생각해? ”

 

“ 테, 테이블 위에... ”

 

“ 테이블? 나이트 테이블 말이야? ”

 

“ 으, 으응... ”

 

“ 그 위에 뭐가 있었어? 내가 가서 잠깐만 보고 와도 돼? 너 1분만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혼자 남는 게 너무 무서운 것 같았다. 그래서 베르닌은 침실로 가지 않고 다시 왕재수 곁에 앉았다. 왕재수가 진정될 때까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어깨에 팔을 둘러주었다.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조금 안심이 된 듯 고개를 들더니 뻣뻣하게 몸을 기대왔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얬다. 겁에 질려서 그런지 눈이 평소의 두 배로 커져 있었다. 갑자기 베르닌은 그 표정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검은 숲. 온천 갔을 때, 그루터기 위에서... ’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 혹시 뱀 껍질 같은 거 있었어? 아니면 쥐? 바퀴벌레?

 

 

왕재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 베르닌은 긴가민가했지만 어쨌든 왕재수가 반응을 보였으므로 희망을 얻고 다시 물어보았다.

 

 

“ 그런 거 내가 잘 치우잖아. 내가 저번에도 뱀 껍질 치워줬잖아. 들어가서 금방 치워버리고 올게. 1분만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

 

 

왕재수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베르닌은 왕재수의 품에 쿠션을 안겨주고는 급하게 침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고양이가 또 쥐나 벌레를 물어다 놓은 모양이었다.

 

 

‘ 어휴, 다 큰 사내자식이 왜 저렇게 벌레랑 쥐 같은 걸 무서워할까. 귀신도 안 무서워하는 녀석이... 미셴카가 여기까지 쫓아왔나? 어제 소시지 줘서 물어다 준 건가? 그럼 우리 집으로 갖다 줘야지 왜 하필이면... ’

 

 

침실은 어두컴컴했다. 나이트 스탠드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마 왕재수가 자러 들어가면서 램프 불을 켰던 것 같았다. 베르닌은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금세 방 안이 환해졌다. 나이트 테이블은 침대 양쪽에 하나씩 있었는데 바깥쪽 테이블 위에는 책 한권과 수첩만 놓여 있었다. 그래서 베르닌은 안쪽으로 가보았다.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막상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보자 기절초풍했다.

 

 

으악, 이게 뭐야!

 

 

깨진 유리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죽은 새가 한 마리 놓여 있었다. 흰색인데다 체구가 큰 편이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한순간 갈매기인가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가브릴로프에는 갈매기가 없었다. 구역질이 나는 것을 꾹 참고 자세히 보니 하얀 비둘기였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데다 목이 부러지고 날개가 꺾여서 처참한 몰골이었다.

 

 

“ 고양이가 창문을 깨고 들어왔나 봐... 그래서 유리가 깨져 있나보네...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은 꼭 닫혀 있었고 유리도 멀쩡했다. 게다가 검정고양이 미셴카는 지금까지 이쪽 집으로는 온 적이 없었다. 먹이를 주는 것도 베르닌이지 왕재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베르닌이 알기로 고양이는 새를 사냥할 때 이런 식으로 끔찍하게 죽이지 않았다.

 

 

베르닌은 빗자루와 쓰레받기, 종이봉지를 가져왔다. 죽은 새를 종이봉지에 넣고 쓰레받기에 유리조각들을 쓸어 넣었다. 밖에 갖다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돌아섰는데 슬리퍼 끝에 뭔가가 채이며 바스락거렸다. 하얀색의 작은 카드였다. 몸을 굽혀서 카드를 주웠다. 짧은 글귀가 씌어 있었다.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타이프로 친 것이었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선물이 마음에 드시는지.
그래도 당신은 공연을 포기하지 않겠지.
금요일이 몇 시간 남지 않았어.
그럼 내일 아침을 기대해.
좋은 꿈 꾸시길.

 

 

 

맨 아래에는 서명 대신 붉은 얼룩이 한 방울 번져 있었다. 핏자국 같았다. 베르닌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속이 뒤틀리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포와 충격으로 멍해져 있다가 문득 밖에 있는 왕재수 생각이 났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종이봉지와 쓰레받기를 나이트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 끔찍한 카드를 발견한 이상 함부로 그것들을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카드를 쥔 채 거실로 나왔다. 왕재수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소파에 웅크린 채였다. 쿠션을 얼마나 꼭 껴안고 있었는지 끄트머리가 다 구겨져 있었다. 베르닌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병째로 들고 가서 마개를 열고 왕재수에게 물을 좀 마시라고 했다. 왕재수는 고분고분 물을 마셨다. 아까보다는 덜 창백했고 숨소리도 한결 나았다.

 

 

“ 이제 좀 괜찮아? ”

 

“ 아니... ”

 

“ 그래, 진짜 놀랐겠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

 

“ 으응... ”

 

 

왕재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어나지는 못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뱀이나 쥐, 벌레 따위를 보면 몸이 굳어져서 못 움직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죽은 새와 협박 카드를 보고 나니 한심하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카드를 파자마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왕재수를 들쳐 업었다. 왕재수는 그래도 정신이 좀 돌아왔는지 그의 어깨에 찰싹 매달렸다.

 

 

 

 

*    *    *

 

 

 

 

 

베르닌의 집으로 들어오자 왕재수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침실로 데려가려는데 왕재수가 고개를 저었다.

 

 

“ 방에 들어가기 싫어. 거실에 있을래. ”

 

어... 우리 집은 괜찮아. 이상한 거 없었어. 내가 방금 자려고 들어갔었어. ”

 

“ 그래도 싫어. ”

 

“ 그래, 그러면 소파에 앉아 있자. ”

 

 

베르닌은 왕재수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왕재수는 심호흡을 반복하더니 천천히 머리와 어깨와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발목과 무릎도 돌리듯 움직였다. 나중에는 바닥으로 내려와서 다리를 뻗고 스트레칭을 했다. 베르닌은 잠자코 기다렸다. 왕재수는 놀라거나 흥분했을 때 말을 하기보다는 몸을 움직여야 진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참 후 왕재수가 일어나서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베르닌이 건네준 컵을 쥐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진정 좀 됐니? ”

 

“ 응. ”

 

“ 그러면 이제 내가 물어보는 거 대답할 수 있어? ”

 

“ 아마도. ”

 

 

베르닌은 그의 곁에 앉았다. 막상 물어보려니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는 행정요원이었기 때문에 범죄자는커녕 목격자나 증인 심문 실습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법학과 시절과 요원 연수 때 배웠던 이론을 떠올리면서 일단 시간 순서대로 물었다.

 

 

“ 집에 들어갔을 때 아무도 없었어? ”

 

“ 없었어. ”

 

“ 인기척도 없고? 누가 들어왔었던 것 같은 흔적이라든지. ”

 

“ 내 신발. 항상 가지런히 정돈해 놓는데 부츠 한 짝이 삐뚤어져 있었어. 그리고 침실 문도 난 항상 열어놓고 다니는데 반쯤 닫혀 있었고. ”

 

“ 그럼 누가 들어왔다 나간 거네. 근데 왜 그때 나 안 불렀어? ”

 

“ 우리 집엔 너네 KGB 끄나풀들이 맘대로 드나들잖아. 도청 장치 같은 거 다시 설치하러 왔다 갔나보다 했어. ”

 

“ 어...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그러면 곧장 침실로 들어갔던 거야? ”

 

“ 아니, 스트레칭 좀 하고 욕실로 가서 샤워했어. 그때도 밖에서 이상한 소리 같은 건 안 났어. 내가 들어간 후에는 누구 안 들어왔어. 나 그런 거 잘 알아차리거든. 다 씻고 나서 자려고 침실로 갔는데... 램프 켰는데 테이블 위에 그게 있었어... ”

 

 

왕재수가 다시 창백해졌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뭐였어, 다닐? 그거 뭐였어? 진짜 새였어? ”

 

“ 응. ”

 

“ 갈매기? ”

 

“ 아니. 가브릴로프에는 갈매기 없잖아. 비둘기였어. ”

 

“ 하얬어. 피투성이라서 자세히는 못 봤어. 날개도 다 짓이겨지고... ”

 

 

왕재수가 몸을 떨었다.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더니 심하게 토했다. 끔찍한 광경에 몹시 놀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왕재수가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하고 나왔다. 안색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눈에는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베르닌은 그제야 왕재수의 손바닥에 피가 배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 손 다쳤구나. 유리에 베었나 보네. 다른 데는 안 다쳤어? 발은 괜찮아? ”

 

“ 으, 으응... 슬리퍼 신고 있었어. ”

 

 

그래도 불안해서 베르닌은 왕재수를 앉혀놓고 유리에 벤 자국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왼쪽 손바닥과 손목 외에는 벤 곳이 없었다.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른 후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 그거 보고서 놀라서 소리 지른 거야? ”

 

“ 응. 진짜 놀랐어. 무서워. ”

 

“ 이제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그럼 다른 건 못 봤어? ”

 

“ 유리 깨진 거. ”

 

“ 카드는? ”

 

“ 카드? 그게 또 왔어? ”

 

 

베르닌은 ‘또’라는 단어 때문에 심장이 다시 팽팽하게 죄어오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왕재수에게 보여주었다. 왕재수는 카드를 받아서 글귀를 눈으로 훑어본 후 조그맣게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는 낮게 욕을 하면서 카드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 미친 놈. 변태. ”

 

 

두 눈에 파랗게 이글거리는 불꽃이 램프처럼 켜지는 것을 보니 공포보다는 분노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지도 몰랐다.

 

 

“ 이건 아까 못 본 거야? ”

 

“ 응, 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이게 있는지도 몰랐어. ”

 

“ 그러면 ‘또’ 왔느냔 건 무슨 뜻이야? 이런 거 전에도 받았어? ”

 

“ 어. 오늘 아침에. ”

 

“ 뭐야? 근데 왜 아무 말 안 한 거야! ”

 

“ 아침엔 그렇게 끔찍한 게 없었어. 카드만 있었단 말이야. ”

 

“ 이건 협박 편지잖아! 그리고 아침에 발견한 거면 너 자는 동안 들어와서 놓고 간 거 아냐! 근데도 말 안 하고! ”

 

“ 어젯밤에 두고 갔던 건지도 몰라. 나 어제 너네 집에서 잤잖아. 그리고 나 이런 거 예전에도 많이 받았단 말이야. 나 싫어하는 사람들 많았어. 반동분자라고. 그래서 신작 올릴 때마다 욕하고 협박하는 편지들 많이 왔거든.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

 

“ 아침에는 어디서 발견했어? ”

 

“ 베개 위에 있었어. ”

 

“ 뭐라고 씌어 있었는데? 이거랑 같은 내용이었어? ”

 

“ 아니, 같은 내용은 아니었어. 근데 기억 잘 안 나. 나 원래 재수 없는 얘기나 욕은 잊어버리거든. ”

 

“ 그거 지금 어디 있어? ”

 

“ 휴지통에 버렸어, 기분 나빠서. ”

 

“ 휴지통 오늘 안 비웠잖아. 청소 안 했으니까. 너 잠깐만 여기 있어. 그 카드 찾아올게. ”

 

 

왕재수는 이제 완전히 진정했는지 가지 말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왕재수의 집으로 갔다. 침실 휴지통을 뒤집어엎었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 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하얀 카드가 굴러 나왔다. 잽싸게 훑어본 후 미지의 협박자가 혼자 있는 왕재수를 공격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카드를 쥐고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

 

 

 

왕재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동댕이쳤던 카드를 다시 손에 쥐고 있었다. 베르닌이 휴지통에서 찾아온 카드를 내밀자 왕재수가 읽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베르닌은 내키지 않았지만 소리 내어 읽었다.

 

 

 

친애하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쇼스타코비치, 쇼팽, 슈트라우스, 민쿠스, 바흐
마지막은 물론 모차르트겠지.
하지만 수요일 공연은 올릴 수 없을 거야.
사랑하는 나리님들께 전화해, 공연은 취소됐다고.
다시 감옥에 가면 이제 살아서 나오지 못할 거야.
금요일. 하루를 줄게. 윗분들께 전화해. 

추신. 굳이 감옥에 넣을 필요도 없을 거야.
 

 

 

 

왕재수는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구겨서 내던졌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 맞아, 저랬지. 하도 싸가지 없는 개소리라서 다 지워버렸는데. 그것만 보고 그냥 재수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완전 사이코에 변태였어. 비둘기 불쌍해. ”

 

 

베르닌은 기가 찼다.

 

 

“ 야, 지금 비둘기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냐. 네 걱정을 해야지. 이건 진짜 협박이란 말이야. 수요일 공연 올리지 말라고 너 협박하는 거잖아. 죽은 새에 유리 파편까지... 지금 열한 시 반이야. 30분 남았어. 금요일이 지나면 그 자식이 너한테 위해를 끼치겠다고 협박한 거란 말이야. ”

 

“ 그게 뭐. 난 안 무서워. 이깟 얼간이 같은 사이코 자식 때문에 몇 달이나 준비한 공연을 포기하란 말이야? ”

 

“ 아깐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해놓고! ”

 

“ 그건 죽은 새가 있었으니까 그런 거고! 이런 협박은 안 무섭단 말이야. 한두 번 받아본 것도 아닌데! 극장 동료들한테서도 받아봤어! ”

 

“ 그래서, 그때도 이런 거 받았어? ”

 

“ 아니, 이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별거 다 받아봤단 말이야. 분장 상자에 칼이랑 유리도 박혀 있었고... 의상 난도질도 당해봤어. 열성팬한테 가위로 찔릴 뻔한 적도 있고. 피 묻은 편지 따위 수도 없이 받았어. 그래도 공연은 한 번도 취소한 적 없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웬 미친놈이 기어 들어와서 쇼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나도 안 무서워. 공연은 그대로 올릴 거야. ”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극장과 무대에 관해서라면 왕재수를 논리로 설득할 수 없다는 건 자명했다. 그래서 그는 전화기 앞으로 갔다.

 

 

“ 일단 난 상부에 보고해야겠어.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

 

보고는 무슨 보고! 네 상사는 스페호프잖아! 그래서, 스페호프한테 감시 요원을 더 붙여달라고 하라고? 돌았냐! 그 얼간이 천치는 수요일 공연 망치기만 기도하고 있는 놈인데! 이때다 싶어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극장 폐쇄하고 공연도 취소시킬 게 뻔하잖아! ”

 

 

왕재수는 정색을 하면서 그를 막아섰다. 언제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덜덜 떨었나 싶었다. 하지만 베르닌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왕재수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소리쳤다.

 

 

이 바보야! 얼간이는 너야! 뭐라고 씌어 있는지 다시 읽어봐! 처음에는 공연을 취소하라고 했어. 금요일 하루를 준다고 했지. 이번 카드에는 몇 시간 안 남았다고 했어. 협박범은 네가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하고 있어. 공연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씌어 있잖아. 내일 아침을 기대하라고. 이 말은 내일 아침에 그 자식이 다시 온다는 거잖아. 그게 카드가 될지 저런 짐승 시체가 될지 살아있는 뱀이 될지, 아니면 더 끔찍한 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감옥에 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거라고 해놓고 추신으로는 굳이 감옥에 보낼 필요도 없다고 했어. 너한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겠다는 협박이란 말이야. 네 말대로 그냥 미친놈의 개수작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최악의 상황도 예측해야지! 나는, 나는 네 감시요원이고... 그러니까, 국장은 널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거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란 말이야! 너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것도 내 임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난 이거 그냥 못 넘어가! 가만히 못 있는단 말이야!

 

 

왕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문득 베르닌은 왕재수가 소리 지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기는 화나면 발칵 소리 지르고 무용수들도 쥐 잡듯 하는 주제에 남이 소리 지르면 못 견디다니 정말 웃기는 녀석이었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간신히 진정하고 입을 다물었다. 왕재수는 한 손으로 오른쪽 귀를 감쌌다가 뗐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바보, 네가 말하는 건 경호원이잖아. 멍충이, 우리말도 잘 모르고. 넌 감시요원이지 경호원이 아니라고. ”

 

“ 어쨌든! 나 단어 구분 같은 거 몰라! 나한테는 같아! ”

 

“ 어, 그래. 고맙긴 한데 하여튼 스페호프한테는 말하지 마! 이거 분명히 그 자식 수작이란 말이야. 그때 돈키호테처럼... 겁줘서 공연 취소시키려는 건데 바보같이 그 자식한테 나 협박받았다고 보고해서 빌미를 줄 수는 없어. 너한테는 상부라는 게 있을지 몰라도 나에겐 없어. 수요일 공연에 대해서는 내가 최종 책임자고 결정권자야. 방해받고 싶지 않아. ”

 

“ 어휴, 고집쟁이. 알았어. 나도 국장이 그 망할 신작인지 뭔지 못하게 하는 건 바라지 않아. 국장한테는 말 안 할 거야. 그래도 그냥은 못 넘어가. 너 잠깐 여기 있어. 너네 집 가서 옷 좀 챙겨올 테니까. ”

 

“ 옷은 왜? ”

 

너 여기 있으면 위험해서 안 돼. 로만한테 가 있어. 내가 전화할 테니까. ”

 

안 돼! 로만 끌어들이지 마! 절대 안 돼!

 

 

왕재수가 금세 표정이 달라지면서 단호하게 소리쳤다.

 

 

“ 로만한테 이런 얘기 하지 마. 그 사람 진짜 다혈질이란 말이야. 앞뒤 안 가리고 흥분하다가 분명히 걸려들 거야. 스페호프가 나랑 친한 사람 낚으려고 기회만 보고 있는데... 게다가 그 감시꾼까지 하나 더 붙었는데. 죽어도 안 돼! ”

 

“ 하지만... 그럼 의사 선생님한테 가자. 병원에 있자. 입원한 척 하고 있다가 수요일에 극장 가서 공연 올리면 되잖아. ”

 

“ 일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준비할게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러냐. 아직 무용수들도 그렇고 오케스트라도 그렇고 부족한 점 많은데. 그리고 의사 선생님을 왜 끌어들이니. 가뜩이나 나이 드신 양반을. 난 여기 있을 거야. 너네 집에 있으면 되잖아! ”

 

“ 너네 집이나 우리 집이나... 한 층 차이인데. ”

 

“ 그래도 너랑 같이 있잖아. ”

 

어휴, 난 행정직이잖아. 책상물림이고. 총도 제대로 못 쏜단 말이야. 좋아, 알았어. 국장한테는 연락 안 할 거야. 너 여기서 자. 대신 한 사람 더 부를 거야. 로만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도 아니야. 더 이상 꼬투리 잡지 마. ”

 

 

베르닌은 요원 숙소에 전화했다. 수위에게 드미트리를 바꿔달라고 했다. 다시 리자가 받을까봐 슬며시 걱정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드미트리가 곧장 받았다.

 

 

“ 어, 다닐이구나. 여자들 아직 있는데, 맘 바뀌었으면 놀러와. ”

 

“ 아니야, 그게 아니고. 너 우리 집으로 좀 와줄 수 있어? 같이 있는 여직원들한테는 비밀로 해주고. ”

 

“ 응?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

 

“ 전화로 얘기하긴 좀 그래. 지금 좀 와줄래? ”

 

“ 그래, 알았어. 지금 갈게. 숙소에서 너희 집 가까우니까 금방 가겠다. ”

 

 

드미트리가 이것저것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서자 왕재수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또다시 ‘네가 잘못했다’ 표정이었지만 이제 베르닌은 개의치 않았다.

 

 

“ 드미트리가 올 거야. 걘 현장요원 훈련도 받았고 총도 잘 쏘고 호신술도 뛰어나니까 도움이 될 거야. 감시꾼이니 재수 없다느니 해도 소용없어. 국장 보고도 안 되고, 로만도 안 된다고 했고 의사 선생님한테 가는 것도 싫다고 했으니까 지금 도움 청할 수 있는 건 걔밖에 없어. 그러니까 불평하지 마. 안 통해. ”

 

 

왕재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베르닌의 곁을 지나쳐 침실로 들어가더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방 안에 들어가는 게 무섭다더니 이제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뒤따라갔다. 창문을 모두 안에서 잠그고 커튼을 쳤다. 그리고 전등을 켰다. 왕재수가 짜증을 냈다.

 

 

“ 왜 그래! 잘 건데. ”

 

“ 오늘은 불편해도 불 켜고 자야 돼. ”

 

“ 눈부신데...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

 

“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협박범이 또 이상한 거 갖다놓으면 너 놀랄 거잖아. 뱀 껍질이라도 갖다 놓으면 더 무서울 거잖아. 그러니까 예방하려고 그러는 거야. 이불 뒤집어쓰고 자면 괜찮을 거야. 평소엔 밝아도 잠만 잘 자면서. ”

 

“ 아니야! 나 원래 밝으면 잠 못 자! ”

 

“ 웃기시네. 어제도 우리 집에 왔을 때 불 다 켜놨는데 잘만 자더구만. ”

 

“ 그건 너네 집이니까... ”

 

“ 우리 집이면 잠 잘 와? ”

 

“ 응, 너네 집에서는 잠이 더 잘 와. 우리 집에선 로만이 옆에 없으면 잘 못 자거든. 옛날부터 그랬어, 누가 꼭 안아줘야 푹 잤어. 근데 너네 집에선 신기하게 잠이 잘 오더라고. ”

 

“ 어... 그렇구나. 그래서 우리 집 오면 그렇게 금방금방 자는구나. 하여튼 지금도 우리 집이잖아. 그러니까 불 켜놔도 잠 잘 올 거야. 졸리니? ”

 

“ 응, 졸려. 갑자기 너무 졸려. 아까 놀라서 너무 진이 빠졌나봐. ”

 

“ 그래, 얼른 자라. 걱정하지 말고. 드미트리 금방 올 거니까 걔랑 나랑 여기 있을 거야. 무서워할 거 없어. ”

 

“ 안 무서워. 그 자식 오는 건 짜증나지만... 내 옆에 오지 말라고 해. ”

 

“ 알았어, 이 방에는 내가 있을게. 피곤할 텐데 이제 자자. ”

 

 

왕재수는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끌어올렸지만 얼굴을 완전히 가리지는 않았다. 눈을 빼꼼히 내놓은 채 베르닌을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그 눈에 어려 있는 한없이 부드럽고 신뢰로 가득 찬 표정에 충격을 받았다. 주인을 따라다니는 조그만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왕재수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베르닌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책임감을 느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보호심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시계탑 창가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왕재수가 하품을 하더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금세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    *    *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깰까봐 급하게 뛰쳐나갔다. 열쇠구멍으로 바깥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드미트리가 근무 중과 다름없이 말쑥한 차림으로 들어왔다. 베르닌은 주변을 확인한 후 문을 잠갔고 걸쇠도 걸었다. 그리고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큰 소리를 내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드미트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활짝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왕재수가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베르닌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베르닌은 가능한 한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일단 스페호프에게 보고하는 것은 미뤘다는 얘기도 해주고 두 장의 카드를 보여주었다. 드미트리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이따금 ‘응’이나 ‘그래서?’ 등의 추임새만 넣으며 베르닌의 이야기를 끝까지 침착하게 들었다. 그리고는 카드를 넘겨받아 꼼꼼하게 살핀 후 비둘기 시체를 버렸느냐고 물었다.

 

 

“ 아니, 종이봉지에 싸서 쟤 침실에 그냥 놔뒀어. 혹시나 해서. ”

 

“ 그냥 두면 부패할 거야. 일단 냉장고에 넣어두자. 스페호프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증거물은 제대로 간수해야 돼. 여기로 가져올 수 있어? ”

 

“ 으, 으응. 근데 우리 집 냉장고에 넣는 건 안 돼. 쟤가 그거 다시 보면 심장마비 걸릴 거야. ”

 

“ 그래, 그럼 일단 가져와서 좀 본 후에 도로 쟤네 집 냉장고에 넣어두자. 갔다 올래? 둘이 가는 게 좋긴 한데 미하일을 여기 혼자 놔두면 안 되니까... 사실은 내가 현장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 ”

 

“ 그럼 네가 올라갔다 와. 열쇠 줄 테니까. ”

 

 

드미트리는 머뭇거렸다. 침실 쪽을 힐끗 쳐다본 후 중얼거렸다.

 

 

“ 미하일이 알면 화낼 것 같은데... 나 엄청 싫어하잖아. 자기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갔다고... ”

 

“ 자니까 괜찮아. 그리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

 

“ 그래. 미안하긴 하지만... 심각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 나 금방 다녀올게. 근데 너 총 있어? ”

 

“ 아, 어... 있긴 한데... ”

 

“ 다행이네. 안 그러면 내 거 빌려주려고 했더니. ”

 

“ 너 총 가지고 왔어? ”

 

“ 응. 나 총기 소지 허가받았어. 현장요원 연수도 받았거든. ”

 

“ 어, 그건 아는데... 내가 아무 얘기 안 했는데 어떻게 총을 챙겨올 생각을 다 했네. ”

 

“ 다닐, 나 여기 이틀밖에 안 있었지만 네가 밤중에 함부로 사람 불러낼 성격 아니란 건 파악했어. 목소리도 다급했고.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다른 이유도 하나 있고. ”

 

“ 그게 뭔데? ”

 

“ 음, 일단 현장 보고 와서 얘기해줄게. 총부터 꺼내라. 쓸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

 

 

베르닌은 며칠 전 스페호프의 지시로 5호실에서 다시 수령한 9밀리 마카로프를 옷장 서랍에서 꺼냈다. 하지만 권총을 쥐고 있자니 다시 불안해졌다.

 

 

“ 저기... 나 총 잘 못 쏘는데... ”

 

“ 걱정 마, 내가 좀 있다 가르쳐줄게. 그리고 그놈 지금은 안 올 거야. 카드에 그렇게 썼잖아. 내일 아침을 기대하라고. 밤에는 안 올 거야. 이런 협박범에겐 패턴이 있어. 강박 관념이 있어서 자신이 예고한 내용을 따르려고 하고. 그래도 위험을 최소화해야 하니까 총은 꼭 가지고 있어. 나 금방 다녀올게. 현장 사진도 좀 찍어놔야겠다. ”

 

 

드미트리가 주머니에서 조그만 로모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는 재킷 안쪽에 손을 넣어 권총을 확인하더니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베르닌은 9밀리 마카로프를 꼭 쥔 채 침실 문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모두 잠가 놨지만 그래도 혹시나 누군가가 침입할까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이 와중에 왕재수가 저렇게도 곤하게 잠들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드미트리가 와줘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혹시라도 혼자 올라간 드미트리가 협박범에게 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쿵쿵거렸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협박범이 제시한 시한은 금요일 하루였다. 시한이 지났다. 왕재수는 공연을 취소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침에 뭔가가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지나갔다. 드미트리가 왜 안 오나 싶어 점점 걱정이 됐다. 올라가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쇠구멍으로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자 드미트리가 들어왔다.

 

 

“ 봤니? ”

 

“ 응. 끔찍하더라. 미하일이 진짜 놀랐겠는데... 일단 잘 싸서 냉장실에 넣어놨어. 유리조각들도 그렇고. 네가 과민반응한 게 아니야, 다닐. 시한이 금요일 하루였다고 했지? ”

 

“ 첫 번째 카드엔 그렇게 돼 있었지. 근데 두 번째 카드에선 쟤가 공연 포기 안 할 거라고 비아냥거리고 있었어. ”

 

“ 그래. 미하일이 어떻게 나올지 다 알면서 일부러 시한을 준 것 같아. 전형적인 겁주기 수법이야. 저러다 끝나면 다행이긴 한데 아무래도 명확한 목적을 가진 놈인 것 같아. ”

 

“ 미샤는 사이코일 거라고 하던데. 예전에도 이런 거 많이 받았다고. ”

 

“ 아니야. 뭐 사이코 기질이 있는 놈일 수야 있지. 근데 계속 공연 얘기를 하고 있잖아. 게다가 첫 번째 카드에는 네가 간과한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어. 작곡가들 얘기를 하고 있잖아. 기억 안 나? 어제 미하일이 검열국장이랑 싸우면서 여섯 명의 작곡가 얘길 했잖아. 누군지 대보라고. 근데 여기 나열한 이름이 여섯 개야. 미하일 신작에 쓰는 음악들 아닐까? 나야 연습하는 걸 못 봤으니 모르지만... 너 알지 않아? ”

 

“ 어, 글쎄... 나 음악은 잘 몰라서... 음악은 들었는데 그게 여섯 가지가 섞인 건지도 몰랐어. 근데 네 말 들으니 그럴 것 같아... 이게 무슨 뜻일까? 왜 중요한 단서가 되는 거야? ”

 

“ 중요한 단서야. 범인은 미하일의 신작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 음악들을 쓴다는 걸 아는 거야. 연습하는 걸 봤거나 압수한 레코드 리스트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 게다가 여섯 명의 이름을, 그것도 미하일이 검열국장에게 이름 대보라고 도발했던 그날 밤에 보낸 카드에 적었잖아. 검열국장이랑 미하일이 싸운 걸 아는 사람이야. ”

 

“ 그러면, 그러면 극장에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

 

“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근데 꼭 극장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정보원을 통해서 얘기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

 

 

드미트리는 카드 두 장을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낮게 휘파람을 불더니 소파에 뒹굴고 있던 잡지를 집어 들었다. 이 상황에 팔자 편하게 웬 잡지인가 싶었는데 드미트리가 잡지 표지 귀퉁이의 여백에 볼펜으로 빠르게 문장 하나를 휘갈겨 썼다.

 

 

‘ 너희 집에는 도청 장치 없어? ’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내가 알기로는 없어. 그 업무는 내가 총괄하잖아. 적어도 우리 쪽에서 붙인 건 없어. ”

 

 

불현듯 머릿속에 스비제르스키가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S가 널 신뢰하긴 하더라. 아마 이 집엔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베르닌은 대체 S가 누구인가 하다가 스페호프이겠거니 하고 혼자 깨달았다. 왜 갑자기 도청이니 S니 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 다닐. 스페호프가 내게 지령을 줬어. 미하일의 공연을 막으라고. 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네가 감시요원이란 건 너무 잘 알려져 있으니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건 극장 동료나 일반 열성 팬이 꾸민 짓이 아니야. 이건 보안위원회와 연관된 짓이야. 미리 계획된 협박이라고. 그러니까 절대로 이 문제를 공식화해서는 안 돼. 그러면 스페호프의 계획에 넘어가게 되는 거야.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그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어. 첫째, 협박을 공론화함으로써 미하일에게 관객의 위험을 빌미로 공연을 취소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 둘째, 미하일이 입을 다물 경우 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해서 공연을 막는 것. 내가 보기에 미하일의 성격상 절대 이 일을 KGB에 알릴 것 같지는 않아. 그 말은, 자동으로 두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된다는 얘기야. ”

 

 

베르닌은 눈을 깜박였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 국장이, 국장이 너한테 지령을 줬다고? 언제? ”

 

“ 어제 아침에. 너 올라오기 직전에. 작전이 진행될 거라고 했어. 그러면 옆에서 도우라고. 걔가 불여우 짓을 해서 빠져나가서 이것도 저것도 안 될지 모르니 곁에서 감시하는 척하면서 도와주라고 했어. ”

 

“ 그러면... 카드, 죽은 새, 유리... 너는 다 알고 있었던 거야? ”

 

“ 아니, 전혀. 자세한 얘기는 하나도 안 해줬어. 기밀이 새어나가면 안 된다고. 작전이 진행되면 나도 알게 될 거라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도와주면 된다고 했어. 아까 오후에 지방 분권 특성 강의 끝나고 나서 국장이 다시 한 번 얘기했어. 스페호프는 정말로 쟤를 미워하더라. 발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쟤가 올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작을 망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예 공연을 못 올리게 하든지 무대 위에서 엉망으로 만들든지 둘 중 하나를 노리고 있더라고. ”

 

“ 그래서... 그래서 너 나 따라온 거야? 쟤 감시하는 척하면서 방해하려고? 국장 명령에 따라서 공연 망치려고? 그랬던 거야? ”

 

 

베르닌은 배신감과 충격에 젖어서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때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다닐. 그런 거 아냐. 내가 그랬잖아, 기억 안 나? 나 저 친구 팬이었어. 무대 다 챙겨봤어. 인터뷰 실린 신문이랑 잡지도 다 구했어. 정말 좋아했다고. 그런데 나보고 미하일 야스민의 공연을 방해하라고? 무대를 망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스페호프는 내가 쟤 팬이라는 걸 전혀 몰랐어. 발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나는 레닌그라드에서 왔어. 레닌그라드 사람에게 키로프가 어떤 의미인지, 그 극장의 주역 무용수가, 그것도 그 무대에서 제일 빛나던 스타가 어떤 의미인지 너희 국장은 결코 알 수 없을 거야. 아마 너도 모를걸. 그건 레닌그라드 팬이 아니면 절대 이해 못해. 그런데 나보고 쟤 공연을 망치라니, 그런 짓은 절대 못해.

나도 알아, 미하일이 나 싫어하는 거. 곁에 있는 것 자체로도 못 견디는 것도. 하지만 스페호프가 그런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계속 옆에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누군가는 미하일을 옆에서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뻔뻔스럽게 계속 극장에 간 거야. 중간에서 널 힘들게 만들긴 했지만... 너한테도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미안하지만 솔직히 널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어. 국장이 그렇게도 널 신뢰하고 있으니까. 괜히 어설프게 얘기했다가 미하일한테 더 안 좋게 돌아갈까봐 입 다물고 있었어. 미안하다, 널 못 믿어서. ”

 

 

베르닌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드미트리가 내민 손을 세게 쥐고 흔들었다. 드미트리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지만 곧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 너 총 잘 못 쏜다고 했지? ”

 

“ 응, 사격 시험도 간신히 통과했어. 군대 있을 때도 총 제대로 못 다룬다고 맨날 깨졌어. ”

 

“ 협박범은 분명히 다시 올 거야. 패턴을 놓고 판단한다면 내일 새벽에서 아침 사이에 나타날 것 같아. 미하일의 집으로 올 가능성이 크지만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여기로 올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랑 내가 나눠서 감시해야 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그 동안 너한테 마카로프 다루는 거 가르쳐줄게. ”

 

 

드미트리는 탄창을 뺀 9밀리 마카로프를 꺼내서 베르닌에게 총 다루는 법을 속성으로 가르쳐 주었다. 베르닌은 드미트리가 지금껏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더 뛰어난 교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분 만에 베르닌은 그럭저럭 마카로프를 다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 고마워, 이제 좀 알 것 같아. 내가 너무 힘을 줘서 총을 잡았던 거구나. ”

 

“ 응, 이제 그 느낌만 알면 적어도 오발은 안 할 거야. 탄창 채워놔, 안전장치는 걸어놓더라도. 아참, 근데 우리 아침엔 나눠서 보초 서야 하잖아. 누가 위층으로 올라갈지 정하는 게 좋겠다. ”

 

 

베르닌은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 네가 올라가는 게 낫겠어. 내가 여기 있을게. ”

 

하긴, 너는 현장 경험이 없으니까 위험하겠다. 아무래도 미하일의 집에서 범인과 마주쳐 몸싸움이 일어날 확률이 더 높으니 내가 가는 게 나을지도... ”

 

“ 어, 저... 그게 아니고... 나는 위험한 게 문제가 아니라... 저... 미샤가 아까 그랬거든. 걔가 너 감시꾼이라고 아직 경계하잖아. 그래서... 너 온다니까 자기 자는 동안 옆으로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저 자식 완전 철딱서니 없어서... 한번 자기 맘에 안 들면 계속 저러거든. 그래도 아까 너무 놀라기도 했고 안 그런 척해도 많이 무서울 거야. 근데 기분까지 상하게 하면 좀 그러니까... 저, 미안해... ”

 

 

드미트리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 그래. 할 수 없지 뭐. 어쩌겠니. 내가 너처럼 인상이 좋은 것도 아니고 착한 것도 아니니... 게다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으니... 괜찮아. 지금 중요한 건 내 우상한테 잘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친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도와주는 거니까. 그럼 나 지금 잠깐 올라갔다 올게. 아까 문단속 다 해놓고 오긴 했는데, 범인이 혹시라도 아침 전에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미리 가서 장치를 좀 해놓고 와야겠어. ”

 

“ 어떤 장치? 지문 남기게 하는 거? ”

 

“ 아니, 그런 건 나도 없어. 근데 거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창문이나 현관문, 옥상 뭐 그런 쪽에 작은 방울 같은 걸 달아놓는 거야. 좀 웃기지만 혹시라도 효과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까 보니까 미하일 서재에 그런 거 있더라고. ”

 

“ 아, 있어. 무대 소품 몇 개 가져왔더라고. 무대 효과 연구해본다고.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 20분? 걱정하지 마. 금방 다녀올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크게 소리 지르기로 하자. 이 건물은 방음이 잘 안되니까 위에서 소리치면 여기서도 잘 들릴 거야. 정 안되면 공중에 대고 총 쏴. ”

 

“ 알았어, 너도 무슨 일 생기면 총 쏴. 그러면 내가 도와주러 갈게. ”

 

“ 넌 미하일 옆에 있어야 돼. 절대로 쟤 혼자 놔두면 안 돼. 내 걱정은 하지 마. 너희 지부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 현장요원들 중에 그렇게 실력 좋은 사람들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 다들 나이도 많고. 그럼 갔다 올게. ”

 

 

드미트리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간 후 베르닌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한 손에 권총을 꼭 쥔 채 거실과 부엌 쪽 창문들을 다시 체크했다. 그리고 침실로 갔다. 왕재수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미동도 없이 누워 있어서 깊이 잠든 줄 알고 구겨진 이불을 바로 해주려는데 왕재수가 목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 총 쏘지 마, 다닐. ”

 

“ 어, 너 깼구나. 피곤하다더니. ”

 

“ 그럼 어떻게 자냐, 밖에서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계속 하는데. ”

 

“ 어, 미안해. 문 닫아주고 싶었는데 협박범이 나타날까봐 걱정돼서 그랬어. 이제 조용히 할 테니까 얼른 자. ”

 

“ 총 쏘지 마. ”

 

“ 아, 이거... 그냥 혹시나 해서 가지고 있는 거야. 만약을 대비해서... 너 총 본 적 없겠구나. 괜찮아, 이거 안전장치도 걸어놨어. 무서워하지 마. ”

 

“ 누가 그래, 내가 총 본 적 없다고. ”

 

“ 어, 너 군대 안 갔다 왔잖아. ”

 

“ 그렇다고 본 적 없는 건 아니야. 그리고 여기서 총 쏘면 안 돼. ”

 

“ 만약을 대비한 거라고 했잖아. 그 나쁜 놈이 들어와서 혹시라도 해코지하려고 하면... ”

 

“ 총소리가 얼마나 큰데... 그 소리 나면 경찰이고 너네 KGB고 다 몰려올 거야. 그 즉시 난 보호 대상이 될 거고 너희 국장은 범인 수색을 한답시고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시간을 끌겠지. 그럼 수요일 공연은 물 건너가는 거야. 총 쏘지 마. ”

 

“ 에휴... 너는 이 와중에도 공연 걱정을 하는구나. 지금 상황이 심각하단 말이야. 드미트리가 그러는데 스페호프가... ”

 

“ 나도 들었어. ”

 

“ 아... 들었구나... 그래도 드미트리가 와줘서 다행이야. 우리 둘이 있을 거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 당연히 아무 일도 없지! 없던 걱정을 네가 만들고 있잖아! 총이나 들고 다니고! 총도 못 쏘면서. ”

 

“ 어, 아니야. 나 그래도 군대랑 요원 연수 때 사격 배웠어. 그리고 방금 드미트리가 가르쳐줘서 이제 잘 쏠 수 있을 것 같아. ”

 

“ 그래봤자... 하여튼 총 치워. 보기 싫어. ”

 

야!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네가 싫어도 할 수 없어! 그리고 드미트리한테도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마. 국장 명령도 무시하고 너 도와주러 왔잖아. 지금도 위험을 무릅쓰고 너네 집에 올라가 있단 말이야. ”

 

 

드미트리 얘기를 하자 왕재수의 눈빛이 딱딱하게 변했다.

 

 

“ 그 자식 얘기 하지 마. ”

 

“ 너 정말 왜 그러니. 아까 우리가 얘기하는 것도 들었다면서. 동향 출신에 옛날부터 네 팬이었다잖아. 네 신작 망치지 않게 하려고 저렇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조금만 잘 해주면 안 돼? 너 팬들한테 친절하잖아. 여자들에게도... 그것처럼 드미트리한테도... ”

 

“ 그 자식이 여자도 아니고... 그리고 나 팬들에게 다 친절하게 군 거 아냐! 맘에 안 드는 놈은 무시했단 말이야! 그 자식은 맘에 안 들어. ”

 

“ 그치만... ”

 

“ 어디서 굴러먹은 놈인지 단추 눈은 또 닮아가지고... 에이... ”

 

 

왕재수는 불만과 짜증을 잔뜩 쏟아낼 기세였지만 베르닌의 표정을 보고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베르닌은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왕재수의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을 보니 다시금 심장이 당겨오는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 바보. 운도 지지리도 없는 자식. 온갖 잘난 건 다 가지고 태어난 주제에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서 맨날 대들고 성깔 부리다가 감옥 가고 혼나고 여기까지 오고. 이상한 협박까지 받고... ’

 

 

침대에 걸터앉자 왕재수는 그가 졸려서 그런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안쪽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를 내주면서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 졸리면 좀 자. ”

 

“ 나 안 졸려. 그리고 네가 누워 있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자냐! ”

 

“ 왜 안 돼? 침대도 넓은데. 어차피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꼭 안고 잘 것도 아니고. ”

 

어휴, 너란 놈은 정말!

 

“ 지난번에는 안아서 재워줘 놓고. ”

 

“ 야! 그때는 네가 무서운 꿈 꿨다고 하도 울고불고 해서 그런 거 아냐! ”

 

“ 지금도 잠 안 온단 말이야. 너 때문에 깼어. 총 들고 설쳐서. ”

 

“ 그래서 지금 안아서 재워달란 거야? ”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어! 졸리면 좀 자라는 거야! 안 그래도 너 면도도 안 해서 꾀죄죄해졌는데 잠까지 못 자면 더 형편없어질 거 아니야! ”

 

“ 알았어, 졸리면 나도 잠깐 잘게. 드미트리 오면 교대로 눈 붙이면 되지 뭐.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 그래야 힘내서 공연도 잘 치러내지. ”

 

 

왕재수는 잠이 안 온다던 말과는 달리 이미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있던 손이 탁 소리를 내며 베개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자면 나중에 팔이 저릴 것 같아서 손목을 잡아 이불 속으로 집어넣어주려는데 왕재수가 눈을 감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 그 비둘기... 버렸어? ”

 

“ 어... 아니. 드미트리가 그거 증거물이라고 함부로 두면 안 된다고 해서 너희 집 냉장고에 넣어놨어. 저... 내가 나중에 다 치워줄게. 소독약으로 깨끗하게 닦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

 

“ 비둘기 불쌍해... 날개도 막 부러뜨리고... 나쁜 놈. ”

 

 

왕재수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베르닌에게 잡혀 있는 손 대신 반대편 손을 들어 올려 눈을 문질렀다 뗐다. 그리고는 잘 들리지도 않는 딸꾹질을 한 번 하더니 머뭇거리며 속삭였다.

 

 

“ 다닐... 그 비둘기... 나 때문에 죽은 거야?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왕재수의 손목을 꽉 쥐었다. 어쩐지 떨려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

 

“ 나 보여주려고... 그래서 새 잡아서 죽이고, 날개 부러뜨리고... 비둘기 잘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

 

 

왕재수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베개와 머리칼에 가려져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숨소리가 불규칙해지면서 빨라졌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권총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왼손으로는 여전히 왕재수의 손을 쥔 채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가만히 쓸었다.

 

 

“ 아니야, 미셴카. 너 때문에 죽은 거 아니야. 그냥 그놈이 나쁜 놈인 거야. 그리고 원래부터 죽은 비둘기였을 거야. 사고로 죽은 새를 주워서 가져다 놓은 거야. 그러니까 잊어버려. 다른 생각해. ”

 

“ 다른 생각이 안 들어. ”

 

“ 그러면 좋은 거 생각해봐. 로만. 꼭 안아주면 좋다면서. 아니면, 음... 파인애플이라든가. ”

 

“ 바보, 파인애플은 아플 때 생각나는 건데. ”

 

 

왕재수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속눈썹 끝이 약간 젖어 있었지만 숨소리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동안 침묵한 끝에 왕재수가 졸음에 취해 무거워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비둘기... 묻어줘. ”

 

“ 그래, 알았어. ”

 

“ 깊이 묻어줘야 돼. 안 그러면 개가 와서 파헤치니까. ”

 

“ 짐승 싫다면서 어떻게 그런 건 또 아니? ”

 

“ 다 알아... 그때 읽었어, 네가 빌려온 책. 멍멍이 와 있었을 때. ”

 

“ 아, 벨라 말이구나. 아니, 뜨보록. 그 녀석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네. 보고 싶다. 너도 보고 싶지? ”

 

“ 내가 왜... 아무짝에 쓸모없는 멍멍이... ”

 

 

왕재수가 잠꼬대하듯 투덜대더니 곧 조용해졌다. 다시 잠든 것 같았다. 베르닌은 무릎에 권총을 얹어 놓은 채로 왕재수의 손을 꼭 잡고 밝은 형광등 불빛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방울을 달러 간 드미트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FIN

- 2015. 8. 16 ~ 8. 25 -

 

 ...

 

과연 세번째 협박 카드가 날아올 것인가~~ 그건 다음주 32편에서~

 

..

 

맨끝에서 벨라, 뜨보록으로 불리는 멍멍이는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코트', '10. 벨라 등장!',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에 등장한 하얀 강아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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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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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