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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의 패러디이자 장난거리로 시작했던 서무 시리즈가 이제 벌써 26편...

 

사실 0편이 있으므로 총 27편에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까지 하면 28편이나 된다... 게다가 며칠 전 번외편으로 러시아 민담 패러디를 하나 더 썼음. 음... 본편은 정말 언제 쓰지.. 본편은 겨우 100페이지 밖에 못 썼는데 ㅠㅠ 하여튼 힘빼고 놀면서 써야 술술 쓸 수 있긴 하다만... 본편은 그게 잘 안 되니 문제임.

 

하여튼 26편은 우리의 단추청년 베르닌의 과거를 좀 들춰보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과거 시점으로 서술되는 건 아니고... 단추에게도 꽃피는 봄날이 있긴 있었을까 ㅠㅠ

 

 

* 초반부에 나오는 '돌마'는 다진 고기와 야채를 포도 잎사귀에 돌돌 말아 쪄낸 일종의 고기 롤이다. 보통은 양배추로 말아서 만드는 롤인데(이건 여러 나라에서 다 먹는다) 양배추 롤은 '작은 비둘기'란 뜻의 '골룹츠이'라고 불린다. 나도 골룹츠이만 먹어보고 돌마는 안 먹어봄.

 

* 올랴, 올루슈카는 모두 올가의 애칭. 사셴카는 알렉산드라의 애칭이다.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언제나처럼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 베르닌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리고 다닐 베르닌은 추억과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에피소드 24. 시계탑 전망대에서 : http://tveye.tistory.com/3785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1부) : http://tveye.tistory.com/3800
* 에피소드 25. 천하일미 요리대회(2부) : http://tveye.tistory.com/3813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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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6 

 

 

 

서무의 슬픔

- 베르닌의 옛 여인 -

 

 

 

 

 

 

그 날도 베르닌은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왕재수의 감시를 위해 오후마다 극장에 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일이 너무 밀려서 오전에는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따예프가 소리를 쳤다.

 

 

“ 다닐, 전화 좀 받게! 자네 찾는 전화야! ”

 

“ 어, 예. 누구인가요? ”

 

“ 몰라, 무슨 올가가 어떻고 하는데. ”

 

“ 엥, 그게 누구지? 업무 담당자들 중엔 그런 이름 없는데. ”

 

 

베르닌은 전화를 받았다.

 

 

“ 예, 다닐 베르닌입니다. ”

 

“ 다냐, 나야. ”

 

“ 나라고요? 누구신가요? ”

 

“ 나라니까, 올가. ”

 

“ 그러니까 올가가 누구신지... ”

 

“ 어머, 너 일부러 그러는 거니? 아니면 진짜 날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나 말이야, 올랴! 올가 유스코바. ”

 

 

베르닌은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 뭐? 어... 아... 올가... 그 올가... 저... 올랴. 안녕. 저, 미안. 잊어버린 게 아니고 너무 오랜만이라 목소리를 못 알아들었어. ”

 

“ 하긴, 벌써 2년이 훨씬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

 

 

베르닌은 갑자기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꽉 막히는 목을 가다듬으며 웅얼거리듯 물었다.

 

 

“ 근데 어떻게 여기 번호는 알고 전화했어? ”

 

“ 예전에 네가 알려줬잖아. 야근하니까 못 나온다고 그냥 전화로 얘기하자고. 근데 번호는 똑같네. ”

 

아니, 그거 현관 대표번호였어... 민간인한테 우리 직통 번호는 못 알려주거든. ”

 

“ 흠, 너 여전하구나. ”

 

“ 어, 저... 올가... ”

 

 

잠시 베르닌은 올랴라고 불러야 할지 올가라고 불러야 할지 헷갈렸다. 하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그때 이후로 연락 한 번도 안 했잖아. ”

 

“ 너 오늘 저녁에 시간 있니? 오랜만에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밥 같이 먹으면 더 좋고. ”

 

“ 아, 어... 저... 왜? ”

 

“ 꼭 이유가 있어야 되니? ”

 

“ 아니, 그게... 저... 우리는, 그러니까... 그때... ”

 

“ 나한테 중요한 일이 생겼는데 널 꼭 보고 싶어서 그래. 다냐, 안되겠니? 너 설마 아직도 나 보는 게 불편한 거야? ”

 

“ 어, 그런 게 아니고... 아니야. 저녁에 잠깐 보자. 어디로 가면 되니? ”

 

“ 난 직장이 천사 공원 쪽인데 너네 사무실은 신시가지 쪽이지? 넌 야근할 테니까 내가 그쪽으로 가야겠네. ”

 

“ 아니야, 나 요즘 오후엔 구시가지 쪽에서 업무 보고 있어. 천사 공원이면 가까우니까 그쪽으로 갈게. 6시까지 갈까? ”

 

“ 어머, 웬일로 네가 그렇게 이른 시간을 잡니. 또 그러다가 미루는 거 아니야? ”

 

“ 아니야, 맞춰서 갈 수 있어. 공원에서 6시에 보자. ”

 

“ 그래, 다냐. 있다가 봐. ”

 

 

전화를 끊고 난 후 베르닌은 한숨을 쉬었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    *    *

 

 

 

 

오후에 그는 극장으로 갔다. 왕재수는 그야말로 회오리처럼 연습실을 누비고 다녔다. 신작 공연이 보름 정도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무용수들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고 있었다. 그 와중에 원래 일정에 따른 공연들도 꾸준히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챙기고 있었고 오디션으로 발굴한 2군, 3군 무용수들을 연습시키랴 교정해주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심지어 그렇게 바쁘면서도 스네고로드에서 데려온 나쟈를 일주일에 한 번씩 극장으로 불러와서 직접 지도를 하고 있었다!

 

 

베르닌은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왕재수의 비서인 류드밀라에게 들러서 요즘 항상 던지는 질문을 했다.

 

 

“ 걔 점심 먹었어요? ”

 

“ 오늘은 먹었어요. 토냐네 어머니랑 할머니가 감독님 찾아왔거든요. 지난번에 화재 났을 때 토냐 구해준 거 고맙다고 맛있는 걸 바리바리 채운 바구니를 네 개나 들고 오셨더라고요. 그래서 다 같이 나눠먹었어요. ”

 

“ 아, 그랬구나. 토냐는 좀 어때요? 그때 다리 좀 다쳤잖아요. ”

 

“ 많이 좋아졌어요. 다음 주에는 복귀할 수 있을 것 같대요. ”

 

“ 진짜 다행이네요. ”

 

 

베르닌은 연습실로 갔다. 신작 연습이 아직 한창이었다. 왕재수가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무용수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하를람피 푸고비체프 시절이 생각났고 다시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잠깐 아쉬워했다. 잠시 후 왕재수가 30분 휴식을 선언했다. 무용수들이 땀을 닦으며 물을 마시고 연습실 구석에 있는 바구니에서 초콜릿 바를 꺼내 먹었다. 베르닌은 오면서 사온 치즈 오이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들고 가서 왕재수에게 내밀었다.

 

 

“ 야, 먹어. ”

 

“ 나 배부른데. 아까 점심 많이 먹었어. 토냐 어머니가... ”

 

“ 그래도 먹어둬! 방금까지 소리 지르고 발 탕탕 구른 것만으로도 배 다 꺼졌겠다! ”

 

“ 아유 지겨워. ”

 

 

그래도 왕재수는 치즈 샌드위치를 받았다. 절반을 베르닌에게 주고 반만 먹었지만 주스는 다 마셨다. 무용수들은 거의가 나가고 없었다. 아마 차이카에 가서 숨을 돌리고 뭘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생겼어. 너 오늘은 발레 공연 없잖아. 저녁밥 못 챙겨주니까 바이올린 아저씨랑 먹어. ”

 

“ 에이, 웬 약속... 로만은 오늘 오페라 공연 때문에 늦게 끝나는데. 할 수 없네, 굶어야지. ”

 

“ 야! 내가 안 챙겨준다고 저녁 굶으면 어떡해! ”

 

“ 저녁 한 끼 굶는다고 큰일이라도 생기냐? ”

 

생겨! 너는 생긴다고! 의사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바이올린 아저씨한테도 얘기할 거야! 바퀴벌레 곱등이 뱀...

 

“ 이제 그거 안 통해! 너도 이제 뱀 못 주워와! 뱀 이제 겨울잠에서 다 깼어! 숲에서 막 꾸물거리면서 기어 다니고 돌아다녀! 낼름낼름... 으앙... ”

 

 

왕재수는 기세 좋게 소리치다가 갑자기 뱀이 날름거리는 모습이 상상됐는지 제풀에 소스라치면서 울먹거렸다. 아무리 잘난 척해도 역시 뱀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왕재수를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을 보고 극장 감독의 체면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 알았어, 뱀 안 주워올 테니까 밥은 꼭 먹어야 돼. 혼자라도 보랴네 식당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 ”

 

“ 그 식당 저녁에 가면 사람 많단 말이야. 가뜩이나 며칠 전에 보랴가 요리대회 상 받아서 손님 더 터져나가. 그리고 너도 없으니까 오늘은 남아서 일하다가 로만이랑 같이 들어갈래. ”

 

“ 그러면 내가 보랴한테 전화해서 음식 좀 준비해달라고 할게. 약속은 6시니까 그 전에 내가 가서 포장해 갖다 주면 되잖아. 뭐 먹고 싶니? ”

 

“ 됐어. 나 그냥 토냐 어머니가 준 바구니에서 꺼내먹을게. 아직 이것저것 남았어. 무슨 햄도 직접 훈제해서 만들었다고 하고 도넛도 있고 말린 과일이랑 치킨 샐러드도 남았어. 그거 먹을 테니까 그냥 약속에나 가라. ”

 

“ 아직 시간 있어. 에휴, 그냥 가지 말까... ”

 

“ 왜? 무슨 약속인데? ”

 

어, 그게... 걘 왜 갑자기 나한테 전화를 한 걸까... 벌써 2년도 넘었는데. 별로 좋게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전화해서 저녁에 보자고 하잖아. ”

 

“ 뭐, 옛날 애인이라도 되냐? ”

 

“ 어... 좀... ”

 

“ 그래도 애인이 있긴 있었구나. 로만이 전에 걱정하던데. 너 모태솔로 아니냐고. 나보고 발레리나들 소개 좀 시켜주라고 하더라고. ”

 

뭐가 모태솔로야! 진짜 그 바이올린 아저씬 저번에도 그러더니... 아니야! 나도 여자 친구 있었어! 나도 남잔데! 어휴, 정말... ”

 

“ 누가 너 남자 아니래? 근데 너 하도 책상물림에 여자 앞에 가면 버벅거리고... 저번에도 나타샤 온다고 해서 꾸며줬는데 굴러들어온 복도 걷어차고. 나 여기 온지 벌써 반년도 넘었는데 그 동안 너 여자랑 데이트 한번 안 했잖아. 주변에 여자들도 없고.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의심이 들지. ”

 

야! 다 너처럼 문어발 연애를 하는 줄 아니! 누가 그렇게 꾸준히 계속 옆에 애인이 있냐! 그것도 너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보통 사람은 연애를 했다가 안 했다가 한다고... 그나마도 잘 안 풀리는 경우도 많아! 그리고, 그리고... 너 알잖아. 난 서무인 거! 게다가 너 감시도 해야 하니까 엄청 엄청 바쁘고... 그래서 여자 사귈 시간은 하나도 없고... 흑... ”

 

 

새삼 서러워진 베르닌이 훌쩍거리자 왕재수가 당황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 촌스럽게 왜 또 징징대는 거야. 알았어, 내가 몰라서 그랬어. 모태솔로 아니고 여자 친구 있었던 거면 다행이네 뭐. 여자야 또 생기겠지. 근데 그 옛날 여자가 갑자기 만나자고 한 거야? ”

 

“ 응. 근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일방적으로 차였거든. ”

 

“ 왜? 역시 너 키스 솜씨가 형편없어서...

 

야! 네가 나 뽀뽀하는 거 본 적이나 있어? 아무 것도 모르면서!!!! ”

 

“ 본 적 없으니까 지금까지의 행태로 판단하는 거지! 그리고 나 이런 쪽 아주 정확하거든! 대충 스타일이랑 골격구조랑 행동 패턴 보면 견적 나온단 말이야! 내가 여태 밤을 불태운 남자들이 몇인데... ”

 

난 남자랑 불태우지 않거든요!!!!

 

“ 여기서 중요한 건 상대가 남자니 여자니 하는 게 아니고 네가 뽀뽀를 잘 못할 거 같다는 거라고! ”

 

“ 우씨, 너 그렇게 나 무시할 거야! 어휴... 내가 아무리 올랴한테 그렇게 차였지만 뽀뽀 못해서 찼다는 말은 안 들었단 말이야! ”

 

“ 그럼 여자가 헤어지는 마당에 뽀뽀 못하니 어쩌니 그런 말을 하겠냐. 근데 그 여자 이름이 올랴야? ”

 

“ 응. ”

 

“ 뭐하는 여잔데? 왜 차였어? 뽀뽀 못하는 거 아니면 이유가 뭘까? ”

 

 

왕재수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베르닌은 부아가 치밀었다.

 

 

“ 야! 넌 내 불행이 재밌냐! 여자한테 차였던 과거 얘기가 그렇게 듣고 싶냐고! 넌 우주 최고 꽃미남이니 뭐니 해서 차여본 적이 없으니 그런 슬픔 따윈 모르겠지! ”

 

“ 글쎄. 난 그렇게 대놓고 누구랑 사귀고 차고 그런 적이 별로 없어서. 그냥 자유로운 영혼이라. ”

 

“ 너 바이올린 아저씨랑 사귀잖아! 로만이 너 차면 안 슬프겠냐! 전에도 체육대회 때 그 아저씨한테 차인 줄 알고 울고불고 해놓고! ”

 

“ 아... 맞아. 흑... 그때 너무 속상했어. 엉엉... 로만은 그때 좀 너무했어. 나 버리는 줄 알고 너무 슬펐어. 엉엉... 로만이 이러다가 나 싫증났다고 차면 어떡하지? 더 어리고 더 날씬한 애 나타났다고 나 버리면... 으앙... ”

 

 

갑자기 왕재수가 바들바들 떨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냥 놔뒀다간 또 울음보가 터질 게 뻔했으므로 베르닌은 급하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랬다.

 

 

“ 아니야, 내가 농담한 거야. 그 아저씨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전에 너 독사과 먹고 아팠을 때도 진짜 괴로워했어. 다이어트 안 해도 된다고, 사과파이 두 판 먹어도 괜찮다고 했어. 울지 마. ”

 

“ 로만이 나 버리면, 엉엉... 가뜩이나 시골이라 좋은 거 하나도 없는데 꼭 안아주는 로만까지 없으면... 어헝... ”

 

“ 야! 여자한테 차인 것도 나고 그 여자 만나러 가야 하는 것도 난데 왜 네가 울고 난리야! 어휴... 맨날 바이올린 아저씨 품에 안겨서 귀염 받고 희희낙락하는 놈이... 난 누구랑 뽀뽀해 본 게 언젠지도 모르겠다! ”

 

“ 그러니까 역시 그 올랴란 여자랑 뽀뽀도 제대로 못하고 차인 거구나... ”

 

“ 아니야! 뽀뽀까진 했어!! 근데 망할 놈의 국장 때문에 진도도 더 못 나가고 결국 뻥 차였다고. 에이... 그리고 나서는 너무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고... 인기도 더 없어지고... 아... ”

 

 

베르닌은 갑자기 자기 신세가 서러워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왕재수가 울던 것도 잊어버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왜? 국장이 네 연애를 방해한 거야? 그래서 깨진 거야? ”

 

“ 응. 그게... 요원 연수받고 여기로 발령을 받았는데, 출근 며칠 전에 고등학교 동창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라면서 올랴를 소개해줬거든. 예쁘고 귀여워서 딱 내 타입이었어. 올랴도 나 싫지 않은 눈치여서 사흘 쯤 만나보다가 사귀기로 했거든.

근데 그러고 나서 곧장 내가 출근을 하게 됐는데... 알잖아! 우리 국장! 가뜩이나 나 들들 볶는데 그땐 더 심했거든. 신입이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교육하고 설교하고 밤에는 계속 환영회에 술 파티에... 끝나면 도로 들어가서 일하게 만들고... 맨날 KGB 요원이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한 설교에 서무의 역할에 대한 강의... 정말 꼬박 일주일 동안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어. 주말에는 쉬려나 싶었는데 신입이니까 국장이랑 간부들이 주최하는 무슨 등산 모임에 따라와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새벽부터 산에도 가고, 뒤풀이한다고 낮술 먹고 계속 설교 듣고... 그리고는 쌓여 있는 서류철과 영수증 정리가 필요하니 월요일 오전까지 해치우라는 거야. 그래서 산에 갔다가 곧장 사무실로 가서 주말 내내 밤새고 영수증 정리하고... 올랴랑 데이트하기로 했던 건 다 물거품 되고.

올랴는 매일 전화해서 오늘은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데 난 일 때문에 안 된다고밖에 못하고... 다음날로 약속 미뤘다가 또 취소하고. 2주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될 거 같은 거야. 올랴도 너무 보고 싶고.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고 걔가 일하는 동네로 갔거든. 미안하니까 꽃도 사들고 갔는데... 올랴가 보자마자 날 찼어. 나 같은 남자 질린대. KGB랍시고 생색내는 거냐면서 그렇게 일만 하는 남자 재수 없대.

 

“ 으응, 그랬구나. ”

 

 

왕재수가 측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베르닌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푸념했다.

 

 

“ 그러니까 다 국장 때문이야. 그 날도 올랴한테 차이고 너무 충격 받아서 보드카 병나발이라도 불려고 했는데 쌓아놓고 온 일 때문에 도로 사무실 기어들어가서 또 주말까지 야근하고... 그리고는 2년 반 동안 계속 들들 볶이고 서무 노릇하면서 과로에 시달리느라 다른 여자 만나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됐다고! 어쩌다 누가 여자를 소개해줘도 일 때문에 약속을 잡을 수도 없고 툭하면 취소되고... 흑흑... ”

 

음, 근데 올랴가 널 찼던 건 정말 뽀뽀 솜씨가 별로여서 그런 건 아닐까? ”

 

야! 너 진짜!

 

아니면 뽀뽀 다음에 아무 진도도 못 나가서 여자가 열 받았던 걸지도... ”

 

“ 으윽, 네 머릿속엔 맨날 그런 생각밖에 없냐! 남녀가 만나서 연애를 한다고 다 곧장 침대로 직행하는 건 아니라고!! ”

 

“ 2주 넘게 만났는데 아무 진도도 없었으면 그게 연애야? 그냥 탐색하는 거지. ”

 

그러니까 너는 모든 연애 = 잠자리라고 생각하잖아! 그거 아니란 말이야! ”

 

“ 그래? 그럼 연애가 뭔데? 나 그런 거 잘 몰라. ”

 

 

왕재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닌은 머리가 아팠다.

 

 

“ 뭐긴 뭐야! 서로의 신뢰를 얻는 과정이지!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고... 그게 선결돼서 마음이 깊어져야 관계도 진전되고... ”

 

“ 어... 관계가 진전된다는 게 같이 잔다는 뜻인 거지? ”

 

“ 하여튼, 그런 것도 포함해서... ”

 

“ 그런가. 첫눈에 맘에 들면 그 자리에서 끌어안고 뒹굴 수도... ”

 

“ 으윽, 그러니까 다 너 같은 게 아니라고!! 평범한 사람들은 안 그래! ”

 

“ 아휴 어려워. 하여튼 알았어! 옛날 여자 만나러 가게 돼서 나 저녁 못 차려준다는 거잖아. 잘 다녀오렴! 혹시 아냐, 그 올랴라는 여자가 앨범이라도 보다가 갑자기 옛 생각이 나면서 그러고 보니 그 다닐이라는 남자가 괜찮았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후회하고... 요즘 애인도 없고 옆구리도 시리니까 한번 연락해볼까 했던 걸 수도 있잖아. 나쁠 거 없으니 한숨 쉬지 말고 가서 잘 해봐! 혹시 여자가 키스를 원하는 것 같으면 잘 좀 해보고! 다짜고짜 입술만 갖다 비비면 안 돼! 분위기를 잘 맞춰서... ”

 

 

베르닌은 이 녀석의 연애에 대한 얘기는 절대로 100% 전부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    *    *

 

 

 

 

베르닌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공원에 도착했다. 점점 해가 길어지고는 있었지만 아직 3월이라 이미 석양이 내린 후였다. 그래도 날씨는 좀 풀렸기 때문에 공원에는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고 학생들도 많았다.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와 천사 조각상을 보니 맨 처음 올랴와 만났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그들은 천사상 아래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브릴로프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자꾸만 머리가 어지러웠고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쳤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사 후 업무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해본 적이 없고 사실 학창 시절에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예전의 다닐 베르닌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를 보면 금세 마음을 빼앗기곤 했었다. 그리고는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거리는 등 숙맥처럼 행동했다. 여자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엄두도 못 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올랴도 딱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갈색의 긴 머리, 살짝 통통하면서도 볼륨 있는 몸매에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즐겨 입었다. 첫눈에 가슴이 뛰었지만 언제나처럼 말을 더듬거리고 속내를 고백하지도 못했는데 다행히 그들을 소개시켜준 친구가 중간에서 열심히 노력해준 덕분에 사흘 만에 사귀기로 한 것이었다. 베르닌의 인생에서 그렇게 빨리 여자와 사귀게 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긴 그래서 그렇게 빨리 차인 걸지도 모르지만.

 

올랴와는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사귀고 헤어진 거라서 아직도 그녀를 생각하면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사실 상처를 입었다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 찼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그나마 야근 때문에 제대로 만난 건 며칠 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베르닌은 그때 자기가 사랑에 빠졌던 건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너무 빨랐고 관계가 진전되기도 전에 아무런 준비조차 없이 모든 게 끝나버린 것이다. 마음을 정리할 겨를도 없었고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도 헷갈렸다. 사실 그때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멍해졌다가 이어진 야근과 스페호프의 무시무시한 압박 때문에 올랴에 대해서는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혹은 그렇게 차였다는 충격 때문에 회피 모드에 들어갔던 것인지도 몰랐다.

 

 

‘ 근데 올랴는 왜 갑자기 날 보려고 하는 걸까? ’

 

 

베르닌은 하루 종일 그 질문을 백 번도 넘게 한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올랴의 목소리는 약간 긴장된 것 같기도 했고 살짝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베르닌은 올랴와 사귀었던 짧은 기간 동안 그런 음성을 딱 한번 들어봤다. 그건 친구의 도움으로 사흘 만에 사귀게 되어 처음으로 올랴가 이런 말을 했을 때였다.

 

 

“ 다냐, 너 좀 귀여운 거 같아. 이제 사귀는 거니까 매일 만나. ”

 

 

잠시 베르닌은 눈을 감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분명히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이상하게 다시 가슴이 뛰었다.

 

 

‘ 어, 이상하네. 내가 아직 올랴를 못 잊었나? 근데 내가 그렇게까지 걜 좋아했던 거 같지도 않은데. 그냥 충격만 좀 받았던 건데. 근데 올랴는 왜 그때랑 비슷한 말투로 전화를 했을까? 설마 그 자식 말대로 올랴가 갑자기 내가 그리워진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누구처럼 무슨 꽃미남도 아니고 올랴한테 잘해준 것도 하나도 없고 맨날맨날 약속 펑크 내고 일만 하고 책상물림 짓만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가족 중 누가 KGB 쪽에 입사를 하나? 아니면 체포됐나? ’

 

 

아무래도 마지막 가정이 제일 현실적인 것 같았기 때문에 베르닌은 최근 체포자 명단과 주요 감시 대상자들에 대해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하지만 가브릴로프는 평화로운 시골 동네였기 때문에 최근의 체포자 명단이라 해봤자 술 마시고 행패부린 남자 몇 명밖에 없었다. 주요 감시 대상자 1순위는 왕재수였고 나머지는 급진주의 서클 청년들 몇몇 뿐이었다. 혹시 그 서클에 올랴의 가족이나 지인이 있나 싶기도 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또각또각 소리가 들리더니 뒤에서 누가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그리고 낯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냐? ”

 

 

베르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올랴가 서 있었다. 금방 올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베르닌은 하마터면 침을 잘못 삼켜 기침을 할 뻔 했다.

 

 

“ 어... 올랴, 안녕. 빨리 왔구나. ”

 

“ 6시 정각인걸. 네가 의외네, 항상 늦었잖아. 많이 기다렸어? ”

 

“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어, 저... 오랜만이네. 반가워. ”

 

“ 응, 나도 반가워. 어쩜,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새치만 좀 생겼네. 일이 힘든가 보구나. ”

 

“ 어, 으응... 너는 좀 달라 보이네. ”

 

“ 아, 그래. 머리 잘랐지. 그때가 언젠데. 저녁 먹었니? ”

 

“ 아, 아니... ”

 

“ 응, 난 있다가 또 약속이 있어서... 우리 간단하게 뭐 먹자. ”

 

“ 어, 그, 그래. 간단하게... 그러면 이 앞쪽에 있는 학교 카페에 갈까? ”

 

“ 거긴 너무 시끌시끌하잖아, 학생들도 많고. 포나르나야 거리 쪽에 있는 카페로 가자. 내가 자주 가는 데 있어. ”

 

“ 으, 으응... ”

 

 

올랴가 자연스럽게 그의 팔목에 손을 얹더니 앞으로 잡아끌었다. 베르닌은 당황해서 몸이 뻣뻣해졌다. 그녀는 곧 손을 치웠지만 베르닌은 머리가 멍해졌다. 여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도 그녀는 항상 앞서가곤 했다. 성격도 급한 편이었고 활달했다.

 

 

베르닌은 어색하게 올랴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나란히 걸었다. 2년 반 만에 본 올랴가 낯설게 느껴졌다. 긴 머리는 싹둑 잘라서 단발이 된데다 곱슬곱슬하게 변했고 화장도 훨씬 진해져 있었다. 구두 굽도 훨씬 높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살이 많이 빠져서 갈대처럼 하늘하늘했다. 발레리나 정도야 물론 아니었지만 하여튼 예전보다 훨씬 마른 몸매로 변해서 더욱 낯설었다. 여전히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이제 소녀다운 분위기는 전혀 없었고 살짝 예리한 느낌도 들었다. 베르닌은 어느새 ‘예전에 통통할 때가 더 예뻤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기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찰싹 때렸다.

 

 

“ 어머, 너 왜 그러니? ”

 

“ 아, 아니야. 날벌레가... ”

 

“ 아직 추운데 날벌레가 있어? 아, 다 왔다. 저기야. ”

 

 

올랴는 다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조그만 카페 입구로 그를 잡아끌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잡고 있었다. 올랴의 손은 조그맣고 따뜻했고 살짝 촉촉했다. 갑자기 베르닌은 현기증이 났고 옛날 생각이 났다. 맨 처음 올랴의 손을 잡았을 때와 키스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 나 왜 이러지? 미쳤나봐. 너무 오래 여자를 안 만나서 그런가... ’

 

 

다행히 올랴는 그의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안쪽 테이블로 들어가 앉더니 곧장 베르닌에게 메뉴판을 보여주었다.

 

 

“ 너 뭐 먹을 거야? 난 여기 오면 항상 먹는 거 있어. 여기는 돌마가 맛있거든. 너도 먹어볼래? ”

 

“ 어, 그, 그래. ”

 

“ 마실 건? 난 탄산수. ”

 

“ 나, 나는 그냥 오렌지 주스 마실게. ”

 

 

올랴는 점원을 부르더니 ‘돌마 2인분, 탄산수 하나, 오렌지 주스 하나 주세요’ 라고 속사포처럼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음료수가 나오자 물을 한 모금 홀짝 마시고는 귓가에서 물결치는 머리칼을 뒤로 휙 넘기며 입술을 포르르 떨었다.

 

 

“ 아휴, 나 요즘 너무 바빠. 정신이 하나도 없어. 일주일 동안 살이 2킬로나 빠졌다니까. 하긴 너랑은 하도 오랜만에 봐서 그때에 비하면 더 빠졌겠다. 그땐 나 완전히 젖살이 포동포동했잖아. 어제 앨범 보다가 그때 사진들 보고 진짜 창피했어. 어휴, 어쩜 그렇게 토실토실하고 화장도 촌스러웠는지. ”

 

“ 어... 그때? 그때 괜찮았는데. 살찌지 않았었어. ”

 

“ 너 여전하구나. 이럴 땐 그때도 귀여웠지만 지금은 더 예쁜 것 같다고 하는 거야. ”

 

“ 미안해. ”

 

“ 뭐가 미안하니! 어휴, 넌 정말... 농담도 못 알아듣고. 답답해라. 하긴 뭐 그게 매력이었지. 그 동안 잘 지냈니? ”

 

“ 으, 으응... ”

 

“ 여전히 바쁜 거지? 너네 국장이 그렇게 직원들을 들들 볶는다며. 다들 혀를 내두른다고. 스페호프. ”

 

“ 응, 맞아. 그런데 용케 기억하네. 우리 국장에 대해서. 심지어 성까지. ”

 

“ 아, 잊어버렸었지. 근데 요즘 다시 알게 돼서. ”

 

 

그때 음식이 나왔다. 베르닌은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시절 이후로는 돌마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가브릴로프의 식당들에서는 양배추로 고기를 싸서 만든 일반적인 ‘골룹츠이’를 팔기 때문이다. 포도나무 잎사귀로 돌돌 말아놓은 고기 롤을 보자 학창 시절이 좀 생각났다.

 

 

“ 우리 동네에도 돌마 파는 데가 있는 줄 몰랐어. ”

 

“ 너 벌써 잊어버렸구나. ”

 

“ 뭐를? ”

 

“ 옛날에 우리 여기 같이 왔었어. 그때도 내가 돌마 주문하니까 네가 똑같은 말 했었어. ”

 

“ 그랬나... ”

 

“ 너 다 잊어버렸구나, 나랑 있었던 일은. 하긴 워낙 짧은 기간이었으니. ”

 

“ 아, 아니야. 안 잊어버렸어. 근데 이상하게 여긴 기억이 안 나네. ”

 

“ 응, 너 그때 엄청 바빴어. 야근하다가 잠깐 나온 거였거든. 주말에도 나가야 한다면서 정신 못 차리고 있었어. 밤도 샜다고 하고. ”

 

“ 그랬구나. ”

 

 

베르닌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깐 입을 다물었다. 올랴도 조용해졌다. 둘은 가만히 나이프로 돌마를 썰었다. 잘게 다진 고기와 야채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먹어보니 촉촉했고 양념도 잘 되어 있었다. 분명 맛있는 것 같았지만 베르닌은 입안이 깔깔했고 자꾸 목이 막혔다. 용기를 쥐어짜내 ‘근데 왜 보자고 한 거야?’ 라고 물어보려는데 올랴가 불쑥 물었다.

 

 

“ 너는 어떻게 지내? 결혼은 안 했다는 거 알고. 여자 친구 있니? ”

 

“ 어... 저... 아니. 많이 바빠서... ”

 

“ 그렇구나. ”

 

 

올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보자 베르닌은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얘가 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갑자기 올랴가 방긋 웃으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 다냐. 나 결혼하거든. 다음 주에 결혼해.

 

 

베르닌은 하마터면 포크를 떨어뜨릴 뻔 했다. 자기도 모르게 컵을 들어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멍해진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 어, 어... 그렇구나. 축하해. 다음 주면 진짜 얼마 안 남았네. ”

 

“ 응, 그래서 요즘 진짜 정신없어. 그래도 그전에 너 한 번 보고 싶었어. 전화해서 많이 놀랐지? ”

 

“ 어, 아니... 그냥... 어... 근데 왜 갑자기 내 생각이 난 거야? 우리는, 그러니까, 진짜 잠깐 봤었잖아. ”

 

“ 글쎄. 어제 사진첩 보는데 너랑 찍은 게 한 장 있더라고. 그래서 생각도 나고... 또 우리 그이가 사실은 너네 회사에서 일하거든. 그래서... ”

 

“ 아... 우리 회사? 가브릴로프 KGB?!! ”

 

 

베르닌은 두 번째로 깜짝 놀랐다.

 

 

“ 응. 몇 달 전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잘 맞아서 결혼하게 됐어. 그이가 아마 너보다는 선배일 거야. 들어간 지 6년쯤 됐다고 했거든. 직급도 높고. 혹시 너랑 같은 부서일지도 모르겠다. ”

 

“ 어... 6년... 그러면 알렉산드라 선배 기수인데... 이름이 뭔데? ”

 

“ 세냐. 그러니까 세묜. 성은 모브린. ”

 

“ 아... 어... 모브린 선배구나... 나도 알아. ”

 

 

베르닌은 3차 충격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세묜 모브린이라면 알렉산드라의 동기이자 대외교류부의 주축 중 하나이며 스페호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선배가 아닌가. 지난번 메드베지에서 타라카노프가 알렉산드라를 추행했을 때에도 동기를 옹호하는 대신 시류에 영합하는 행동에 앞장서고 베르닌에게도 그냥 넘어가라고 충고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스네고로드에 막내 직원들을 파견하라고 국장을 부추긴 적도 있기 때문에 베르닌의 마음속에서 세묜 모브린은 ‘능력 있을지는 모르지만 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안 드는 작자’였다. 목구멍까지 ‘올랴, 왜 그런 놈이랑 결혼하니! 네가 아깝잖아!’ 라는 말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올랴는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활짝 웃었다.

 

 

“ 아, 너랑도 아는 사이구나. 하긴 같은 회사니까. 친해? ”

 

“ 아, 아니... 친하진 않아. 부서가 달라서. 그냥 부서 합동 회식 때랑 전체 회의 때 얼굴 보는 정도야. ”

 

“ 응, 그렇구나. 세냐는 동료들이랑 두루두루 친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하고도 친한가 했어. 우리 그이 성격 좋지? ”

 

“ 어... 응... 그렇다고들 하더라. 윗분들도 좋아하고. ”

 

“ 응, 능력도 있어서 그 동기들 중에 제일 먼저 진급했다고 하더라고. 재미있고 멋있어서 좋아. 근데 너 놀랐지? 몇 년 만에 연락해서 보자고 하고 뜬금없이 결혼한다 해서. ”

 

“ 으, 으응... 조금 놀랐어. 그래도 축하해. ”

 

 

올랴는 돌마를 다 먹고 물을 홀짝 마시더니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 다냐, 사실은... 미안한데 오늘 보자고 한 건... 세냐가 질투심이 좀 많은 타입이야. 그래서 말인데... 뭐 너랑 세냐랑 친한 사이 아니라니까 굳이 이런 말 안 해도 될 것 같긴 하지만, 혹시나 해서 말이야. 너랑 나랑, 예전에, 그러니까 우리 잠깐 봤었잖아. 뭐 아주 짧은 기간이었고 별 일도 없었지만. 하여튼 그땐 나도 어렸고... 세냐가 우리 사이 의심할까봐. 미안해. 나 너무 웃기지? 그치만 혹시라도 네가 다른 경로로 전해 듣고 나랑 사귄 적 있다고 말해서 세냐 귀에 들어갈까 봐. 저, 오해는 하지 마. 네가 일부러 그럴 거라는 게 절대 아니고, 그냥 네가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가 세냐가 알게 되면 공연히 오해하고... ”

 

 

당차게 시작했던 올랴의 목소리는 갈수록 모기소리처럼 작아졌다. 얼굴이 빨개졌고 베르닌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베르닌은 이미 3차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터라 이 4차 충격은 그저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음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올랴가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말했다.

 

 

“ 어, 그래그래. 나 이해해. 걱정 마. 세묜 선배한테 절대 말 안할게. 그리고 네 말이 맞아, 우리 진짜 별 거 아니었잖아. 얼마 보지도 않았고 진짜 아무 일도 없었는걸.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결혼 준비 잘 해. ”

 

“ 고마워, 다냐. 진짜 고마워. 미안해. 괜히 너 불러내서. 기분 나쁘지? ”

 

“ 아니야. 전혀 안 그래. 마음 쓰지 마. 괜찮아. ”

 

“ 너 진짜 착하구나, 다냐. 어제 집에서 사진첩 보다가 네 사진 한 장 나왔다고 했잖아. 세냐가 알아보고는 왜 네 사진이 있느냐고 물어보더라고. 깜짝 놀라서 그냥 옛날에 알던 친구라고 둘러댔어. 다 같이 콤소몰 행사 가서 찍은 거라고. 그래서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아침에 전화했던 거야. ”

 

“ 그랬구나. 그냥 전화로 얘기해도 됐을 텐데. ”

 

“ 너무 뜬금없을 것 같아서 그랬어. 참, 세냐랑 여기서 7시 반에 보기로 했거든. 사진 본 김에 너랑 잠깐 만나서 저녁 먹는다고 얘기해뒀어. ”

 

“ 엥, 의심할까봐 걱정된다더니 나랑 만난다는 얘길 세묜에게 한 거야? ”

 

“ 편한 사이라는 거 보여줘야 세냐가 의심을 안 하지. 그리고 세냐가 우리 친구였다고 하니까 그럼 오늘 잠깐 같이 보자고 그러더라고. 7시 반 다 됐네. 세냐 금방 올 거야. 우리 그냥 콤소몰 행사에서 만나서 친해진 거야. 그렇게만 말해줘, 응? ”

 

“ 으, 으응...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말 모브린이 카페로 들어섰다. 올랴와 베르닌을 금세 발견하고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올랴를 껴안고 키스를 하고는 모브린이 베르닌에게 빙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 다닐. 요즘 그 불여우 담당 업무 때문에 많이 바쁠 텐데 그래도 올루슈카 축하해주려고 나와 줘서 고마워. 얘기 들었지? 우리 다음 주에... ”

 

“ 아, 예... 결혼하신다고요. 축하드려요. 준비하시느라 많이 바쁘시겠네요. ”

 

“ 그래도 좋은 일이니까. 그래 오랜만에 본다더니 회포는 좀 풀었어? 어제 올랴 앨범에서 자네 사진이 나와서 처음에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그래도 자네니까 망정이지 다른 남자 사진이었으면 나 분명히 질투했을 거야! 자네야 뭐 워낙 바른생활에 순진무구하니까. ”

 

“ 어... 네. 우리는, 그러니까, 콤소몰 행사에서 알게 돼서 친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입사하고 나선 바빠서 연락이 끊겼어요. 세상이 참 좁네요, 선배님과 올랴가 결혼을 하고. 축하드려요. ”

 

“ 하하, 고마워. 우리 올루슈카가 진짜 귀엽지. 자네도 어서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해야 할 텐데. 올루슈카 친구들 중에 괜찮은 여자 있으면 다리 놔주라고 할게. ”

 

“ 예... 고맙습니다. ”

 

 

그때 올랴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테이블을 떠났다. 베르닌도 이제 가야 하지 않나 싶어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모브린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다닐, 올랴가 갑자기 불러내서 놀랐지? 친했어도 한동안은 연락 안 하고 지냈다며. ”

 

“ 어... 조금요. 결혼 얘기도 오늘 처음 들었어요. ”

 

“ 그래. 사실 올랴에겐 내가 자네 잠깐 같이 보자고 한 거였어. 자네 요즘 바쁜데 미안하긴 하지만. 그 앨범 보니까 내가 좀 불안한 게 있어서. ”

 

“ 어, 불안... 왜요? 저랑 올랴는 그냥 친구였는데. ”

 

“ 에이, 누가 그걸 모르나. 의심할 사람이 따로 있지 자네처럼 고지식한 친구를. 그게 아니고... 다닐, 이건 말이야,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부탁하는 건데. 난 우리 회사에서 올랴를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거든. 미안한데, 올랴에겐 꼭 비밀로 해줘. ”

 

“ 예?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뭘 비밀로 해달라는 말씀이신지. ”

 

나랑 알렉산드라 말이야. 우리 옛날 관계. 정리한지 오래됐지만 그래도 올랴는 모르니까. 올랴가 다 좋은데 여자 아니랄까봐 질투심이 좀 있거든. 괜히 알게 되면 맘 상하고 의심할 거야. 그러니까 자네도 꼭 모른 척 해줘. ”

 

 

베르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네? 알렉산드라... 우리 회사 알렉산드라 선배요? 옛날 관계요? 선배님이랑요? ”

 

“ 아, 자네 몰랐나? 에이, 그럼 괜히 얘기했군. 하긴 자넨 들어온 지 얼마 안됐으니... 젠장. 그래도 혹시나 다른 친구들이 얘기해서 자네가 생각 없이 올랴에게 옮길 수도 있으니... 나하고 사셴카 말야. 입사 동기잖아. 사내 커플이었거든. 처음에 일 년쯤 사귀었는데 회사 사람들이 거의 다 알았어. 뭐 깊은 관계는 아니었고, 그냥 국장한테 볶이니까 서로 동료 의식에 친해져서 사귄 거야. 진짜 별 거 아니었어. 그러다 둘이 자연스럽게 정리했거든.

근데 하여튼 이 얘기 올랴가 알면 질투할까봐. 사셴카가 좀 동안에 귀염상이잖아. 지난번에 올랴가 우리 집에서 놀다가 내 앨범에서 가을 체육 대회 사진을 본 거야. 그때는 사셴카가 우리 부서였잖아. 여직원은 걔 하나뿐이었고. 올랴가 우리 부서원들끼리 찍은 사진을 보고는 대번에 사셴카를 찍어내면서 꾸미면 예쁘겠다고, 여직원 하나라서 부서에서 인기 많겠다고, 나도 그런 거 아니냐고, 막 꽃 갖다 주고 초콜릿 사주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는 거야. 자네도 알잖아, 여자들이 그런 얘기 농담처럼 해도 다 뼈 있는 말이란 거.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 좀 하려고 같이 보자고 한 거야. 남자로서 이해하지? 올랴에게 비밀 지켜줄 거지? ”

 

 

베르닌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 5차 충격 역시 생각 외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의 충격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 네,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말 안 할게요. ”

 

“ 고마워, 다닐. 자네 역시 괜찮은 놈이야. ”

 

 

그때 올랴가 돌아왔다. 화장을 고치고 온 것 같았다. 베르닌은 급하게 일어섰다.

 

 

“ 저, 올랴. 나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

 

“ 어머, 다냐. 벌써 가려고? 세냐도 지금 왔는데. 술이라도 한 잔 같이 하면 좋을 텐데. ”

 

 

말과는 달리 올랴의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모브린도 마찬가지였다.

 

 

“ 으, 으응... 나도 사실 할 일이 좀 있어서. 다음에 또 기회 되면 보자. 결혼 다시 한 번 축하해. 선배님, 이만 가볼게요. ”

 

“ 그래,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 잘 가. ”

 

 

베르닌은 이상하게 저려오는 다리를 약간 휘청거리면서 카페를 나섰다.

 

 

 

 

 

*    *    *

 

 

 

 

베르닌은 도저히 집으로 곧장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정처 없이 쏘다니다가 시장 근처에 있는 선술집 겸 식당에 들어갔다. 술이라도 한 잔 마시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다. 화가 나거나 우울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연속으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막 보드카를 주문하려는데 옆쪽 구석 테이블에서 낯익은 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알렉산드라가 혼자 앉아 조그만 잔으로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보드카 병 하나가 그대로 옆에 놓여 있었고 안주도 없었다. 이럴 땐 모른 척 해야 하나 싶었지만 술도 약한 편인 알렉산드라가 맥주도 와인도 아니고 보드카를 연속으로 들이키고 있었으므로 걱정이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갔다.

 

 

“ 저... 선배님. ”

 

 

알렉산드라가 깜짝 놀라서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베르닌은 모른 척 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다. 알렉산드라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코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멋쩍은 듯 손등으로 눈을 닦으며 종알거렸다.

 

 

“ 아, 다냐. 안녕. 보드카 오랜만에 마시니까 진짜 독하네. ”

 

“ 저녁은 드신 거예요? 안주도 없이. 술도 잘 못 드시면서. ”

 

“ 글쎄, 밥 생각이 별로 없어서. 넌 여기 웬 일이야? 너희 집은 신시가지 쪽이잖아. ”

 

“ 약속이 있어서 잠깐 근처에 들렀다가... ”

 

 

알렉산드라가 다시 눈가가 빨개지더니 기침을 했다. 빈속에 보드카를 마셔서 그런 것 같았다. 베르닌은 마침 다가온 점원에게 흑빵과 칼바사 햄, 오이 피클을 주문했다. 제일 빨리 나오는 안주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접시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안주에는 손을 대지 않고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베르닌은 잔을 뺏는 대신 흑빵에 햄 한 조각과 오이 피클을 얹어서 건네주었다.

 

 

“ 그러다 속 다 버려요. 이거 드세요. ”

 

“ 고마워. ”

 

 

알렉산드라는 기계적으로 샌드위치를 한 입 먹었지만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보드카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코가 빨개지면서 다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생각났다. 왕재수도 보드카라면 한 모금만 마셔도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알렉산드라는 물을 마시고 간신히 진정되었다.

 

 

“ 아이, 왜 이러지. 미안해, 다냐. ”

 

“ 이제 술 그만 드세요. 어쩌자고 한 잔도 아니고 병으로 시켜서 안주도 없이 드시는 거예요. ”

 

“ 나 아까 너무너무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그래서 그랬어. 저, 다냐. 나 엄청 취했으니까 그냥 모른 척하고 집에 가렴. ”

 

“ 세묜 선배랑 얘기하시고 기분 상하신 거예요? ”

 

 

베르닌은 자기가 왜 그런 말을 불쑥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은 술 한 잔 안 마셨는데도. 아마 올랴와 보낸 시간 동안 너무 연속으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알렉산드라는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눈을 깜박였다. 역시 취해서인지 뭐라고 변명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대꾸했다.

 

 

“ 어, 맞아. 근데 너 어떻게 아니? 나랑 세묜이랑 얘기하는 거 봤어? ”

 

“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

 

 

베르닌은 더듬거리다가 마침 점원이 주고 간 잔에 보드카를 따라서 훌쩍 마셨다. 빈속도 아닌데 머리끝까지 금세 어질어질했다. 술기운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오늘 있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올랴와 사귀었다가 차인 것부터 시작해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는 얘기, 올랴가 자기를 불러낸 진짜 이유에 대해, 그리고 모브린을 잠깐 봤던 얘기도 했다. 모브린의 부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 그 인간이 그랬구나, 나하고 있었던 일 약혼녀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 자식이 너 보러 나온 거였구나. ”

 

“ 어... 아... 저... 선배님, 전 두 분 일 몰랐어요. 진짜예요. ”

 

“ 응,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진짜 웃기는 놈이야. 그때도 만사가 제멋대로에 딴 여자한테 양다리 걸쳐서 내가 그만 만나자고 했던 건데. 내가 미쳤다고 그런 얘길 하고 다니겠니. 헤어지고 나서도 두어 달은 진짜 못살게 굴었단 말이야. 그랬던 인간이 뭘 잘났다고. 같은 부서에서 얼굴 보면서 몇 년 같이 일한 것도 피곤했는데. 그래서 등록부서로 옮긴 게 차라리 편하기도 했었어. 근데 아까 퇴근 직전에 갑자기 우리 부서로 오더니 저녁 좀 같이 먹자는 거야. 싫다고 했더니 중요한 일이라면서 밥 먹기 싫으면 30분만 시간 내달라고... 그래서 업무 때문인가 싶어서 따라갔더니 그 개자식이 나보고 자기 다음 주에 결혼하는데 내 마음이 별로 좋진 않겠지만 축하해 달라면서, 신부가 혹시라도 의심하면 안 되니까 우리 과거에 대해 입 다물어달라는 거야. ”

 

“ 아... 올랴가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 ”

 

“ 너무 어이가 없어서 왜 그런 걸 걱정하느냐고, 난 네 결혼에 관심도 없고 그런 얘기 떠들고 다닐 마음도 전혀 없다고 했더니 그 뻔뻔스런 자식이 나한테 그래도 아직 자기한테 미련이 약간 남아 있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결혼도 연애도 안 하고 있는 거 아니냐면서, 그래도 자기 결혼하게 됐으니까 이제 자기를 잊고 비밀도 지켜달라고, 좋은 사람 새로 만나라는 거야. 이제 나이도 많은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면서. 아무래도 자기랑 헤어진 상처 때문에 남자를 못 만나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전에 타라카노프한테도 그렇게 결벽증으로 히스테리 부린 거 아니냐는 거야. ”

 

 

알렉산드라는 생각하면 할수록 분한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보드카를 다시 한 잔 꼴깍 삼키고는 기침을 하고 눈물을 쏟았다. 베르닌은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왜 그렇게 속이 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 선배님, 그런 자식이 한 말 따위 신경 쓰지 마세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놈이에요! 그리고 타라카노프 그놈은 인간 말종이잖아요! 모브린 그 자식 그때도 재수 없게 굴더니... 그런 개자식은 바퀴벌레 곱등이 뱀 껍질처럼 하찮은 놈이니까 진짜 신경 쓸 필요 하나도 없어요. ”

 

“ 내가 남자를 만나든 말든... 결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사정인데 걸핏하면 다들 나한테 언제 결혼할 거냐고 하고... 그것도 그 철면피 같은 자식이... 어떻게 내가 그런 놈한테 미련이 있어서 남자를 못 만난다는 말을 할 수 있어... 결벽증이라니. 다냐, 여자가 서른 넘어서 결혼 못하면, 성희롱하는 거 대들면 결벽증인 거야? ”

 

 

알렉산드라는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지난번 타라카노프 사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괴로워했던 것도 얼마 안 됐는데 모브린 때문에 상처를 후벼 파고 소금까지 뿌린 격인 듯했다. 베르닌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고 올랴 생각이 나면서 자기도 서러워졌다. 자기도 펑펑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알렉산드라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억지로 울음을 그치게 하느니 실컷 울게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자코 기다렸다. 손수건만 꺼내서 건네주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그들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어떤 여자는 베르닌을 여자 울리는 나쁜 놈이라는 눈초리로 노려보며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잠시 후 알렉산드라가 좀 진정되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더니 빨개진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며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 고마워, 다냐. 맨날 이런 모습만 보이고. 미안해. ”

 

“ 아니에요, 울고 마음 푸는 게 훨씬 나아요. 저도 아까 올랴가 결혼한다고 하고 그게 세묜 선배라면서 저한테 비밀 지켜달라고 했을 때 진짜 충격 받았어요. 그땐 너무 놀라서 기분 나쁘거나 속상한 마음도 안 들었는데 이제 속상해요. 그리고 세묜 선배가 와서 그 얘기했을 땐 더 이상 거기 있고 싶지 않았어요. ”

 

“ 그러게... 너도 굉장히 놀라고 속상했을 텐데. 공연히 내가 이렇게 울고불고 해서 더 당황하게 만들었네. 미안해. 난 왜 항상 이럴까. 매사가 엉망이야. 그래도 사회 나와서 열심히 산 것 같은데 해놓은 것도 없고, 곁에 있어줄 사람도 없고... 다들 만만하게 보고... 돌아서면 매일 혼자고... 되는 일도 없고... ”

 

 

알렉산드라의 눈망울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베르닌은 원래 여자가 울면 당황하는 편인데다 친한 사이인 알렉산드라가 그러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서툴게 위로를 했다.

 

 

“ 만만하게 안 봐요. 안 그래요. 다들 선배님 좋아해요. 모브린이랑 타라카노프 같은 놈들이 이상한 거예요. 혼자 아니에요. 진짜예요. ”

 

“ 흑, 고마워. ”

 

 

알렉산드라가 베르닌을 와락 껴안더니 흑흑 흐느껴 울었다. 지난번에 타라카노프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며 울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알렉산드라는 굉장히 자그마했다. 품 안에 두 번 들어오고도 남을 것 같았다. 베르닌보다 두세 살 나이도 많았지만 울 때는 꼭 어린애 같았다. 하도 울어서 몸이 뜨끈뜨끈했다. 베르닌은 뜬금없이 왕재수 생각이 났다.

 

 

그 자식도 울면 이렇게 사모바르처럼 뜨끈뜨끈했지. 아플 때도 그랬지만. 구슬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다 큰 자식이 꼭 애기처럼 우네 그랬는데 알렉산드라도 그렇구나... ’

 

 

울고 난 후 알렉산드라는 약간 술이 깼는지 깜짝 놀라면서 베르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베르닌을 쳐다보면서 사과했다.

 

 

“ 아, 미안해... 다냐, 내가 너무 취했나봐. 정말 미안. ”

 

“ 뭐가 미안해요. 괜찮아요. 근데 진짜 많이 취하신 것 같아요. 그만 일어나서 바람 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 으응... ”

 

 

알렉산드라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베르닌은 그녀의 팔을 붙잡아 부축을 해주었다. 대신 계산을 했더니 점원이 보드카가 많이 남았다면서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보드카 병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가게를 나왔다. 알렉산드라가 너무 비틀거렸기 때문에 베르닌은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 선배님, 집이 어디에요? 멀어요? ”

 

“ 아니야, 가까워. 여기... 시장 뒤... 괜찮아. 나 이제 갈게. ”

 

“ 집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몇 번지에요? ”

 

“ 126번지... ”

 

 

알렉산드라는 취해서 그런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했다. 베르닌은 ‘이렇게 술이 약하면서 왜 보드카를 마신 거예요! 어휴, 그 자식도 그렇고 정말... 술도 못 마시는 사람들이 뭘 믿고 이러는 거야!’ 하고 바가지를 긁고 싶었지만 상대가 왕재수가 아니라서 꾹 참았다.

 

 

다행히 126번지는 별로 멀지 않았다. 시장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금방 건물이 나왔다. 베르닌은 알렉산드라를 부축해서 아파트로 올라갔다. 부축하는 게 너무 불편해서 마음 같아서는 왕재수에게 그랬듯이 들쳐 업고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여자인데다 알렉산드라가 놀랄 것 같아서 그럴 수는 없었다.

 

 

“ 선배님, 다 왔어요. 열쇠는 있어요? ”

 

“ 으응... 핸드백에... ”

 

 

알렉산드라가 주섬주섬 핸드백을 뒤졌다. 열쇠를 꺼내는가 싶더니 베르닌의 팔에 꼭 매달리며 잠깐 포옹을 하고 볼에 입을 맞췄다.

 

 

“ 고마워, 다냐.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줬어. 고마워. 안 잊을게. ”

 

“ 선배님도 항상 저한테 잘 해주셨잖아요. ”

 

“ 내가 언제... 고마워. 내일 술 깨고 보면 되게 부끄럽겠다. ”

 

“ 저도 술 마실 거예요. 그럼 둘 다 하나도 생각 안 날 거예요. ”

 

“ 마시지 마. 머리 아플 거야. 고마워, 다냐. 잘 자.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후 아파트를 나왔다.

 

 

 

 

*   *   *

 

 

 

 

 

베르닌은 알렉산드라를 바래다 준 후 기분이 꿀꿀해져서 구시가지 골목을 정처 없이 배회하며 보드카 병나발을 불었다. 공무원이자 KGB 요원이 길에서 음주를 하며 늦은 밤까지 나돌아 다니는 것은 규정 위반이었지만 ‘다 집어치워’ 하고 투덜대며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저녁이라 해봤자 돌마를 약간 입에 댄 게 전부였기 때문에 금세 머리끝까지 술이 올라왔다.

 

 

캄캄한 골목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다 보니 알렉산드라와 있었을 때는 그녀를 돌보느라 잊고 있었던 충격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다. 터무니없게도 올랴에 대한 배신감도 조금 들었다. 그리고 모브린의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알렉산드라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다가 자기도 안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자괴감이 들었고 점점 우울해졌다.

 

 

그는 밤 열한 시 즈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취해서 머리가 빙빙 돌았고 속도 울렁거렸다. 두어 번 주저앉기도 했다. 간신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는데 눈에 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왕재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어, 너 이제 들어오는 거야? ”

 

“ 으응... ”

 

“ 으윽, 술 냄새. 얼마나 퍼마신 거야! ”

 

“ 좀... ”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베르닌은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왕재수는 버튼을 누른 후 그의 팔을 잡아 주었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부웅 올라가자 베르닌은 어지러워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눈치 빠른 왕재수가 짜증을 냈다.

 

 

야! 여기서 토하면 안 돼! 좀만 참아!

 

“ 안 토해... 우욱... ”

 

 

베르닌은 못 견디고 토해버렸다. 하필 왕재수의 신발 위에 토한 것 같았지만 앞이 잘 안 보였다. ‘아휴!’ 하는 소리가 들려온 걸 보니 맞는 것 같긴 했다.

 

 

 

눈을 떠보니 베르닌은 소파에 누워 있었고 이마에 미지근한 물수건이 놓여 있었다. 잠시 필름이 끊겼던 것 같았다. 다시 토할 것 같아서 억지로 일어났는데 화장실이 왜 이렇게 먼지 이해가 안 갔다. 집안 구조가 이상했다. 간신히 화장실로 가서 실컷 토했다. 그러고 나니 울렁거리는 건 가셨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그때 왕재수가 와서 그의 팔을 붙잡고 욕실로 데려갔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물로 입을 헹궈준 후 다시 부축을 해서 침실로 데려갔다.

 

 

“ 너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

 

“ 많이 안 마셨어. 한 병도 안 마셨다고. ”

 

“ 한 병! 보드카가 맥주냐! ”

 

“ 넌 아무 거나 마셔도 취하는 주제에 뭘 안다고! 술 구별도 못하는 게! ”

 

“ 왜 몰라! 보드카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아까 너 보자마자 어지러웠어! ”

 

 

툴툴대면서 왕재수는 그를 침대에 눕혔다. 베개를 머리 아래로 들이밀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어지럽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베르닌은 뭔가 낯선 느낌이 들었다. 베개의 느낌도, 침대의 느낌도 달랐다. 침실도 훨씬 넓은 것 같았다.

 

 

“ 어... 여기 너네 집이야? ”

 

“ 응. ”

 

“ 저... 나 그냥 소파에... ”

 

“ 그냥 있어. ”

 

“ 뜨보록도 못 올라오게 했잖아, 네 침대... 너랑 바이올린 아저씨의 보금자리라고. ”

 

“ 야! 멍멍이하고 사람하고 같냐! 시끄러워, 그냥 누워서 빨랑 자! 자면 술 깨겠지. ”

 

“ 그래도... 너도 자야 하잖아. 나 토해서 좀 나아졌어. 우리 집으로 갈게. ”

 

“ 시끄러워. ”

 

 

왕재수가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주고는 불을 탁 꺼버렸다. 그리고는 침실을 나갔다. 베르닌은 뭐라고 웅얼대다가 다시 필름이 끊겼다.

 

 

 

 

*   *   *

 

 

 

 

 

두어 시간 후 베르닌은 술이 깨면서 퍼뜩 눈을 떴다. 온갖 숙취가 다 몰려왔다. 머리가 약간 어질어질하긴 했지만 그래도 속은 좀 진정된 것 같았다. 굉장히 목이 말랐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더니 거실 소파에 왕재수가 앉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베르닌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 너 왜 나왔어. 누워서 자라니까. ”

 

“ 너무 목말라서. ”

 

 

왕재수가 냉장고로 가서 물병을 하나 꺼내주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자 좀 살 것 같았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왕재수가 혀를 찼다.

 

 

“ 고주망태가 돼서 들어온 걸 보니 여자랑 잘 안된 모양이구나. ”

 

“ 잘 되고 말고가 아니고... 으윽... ”

 

“ 그럼 뭐야? 결혼이라도 한대? ”

 

“ 엇, 너 뭐야,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춰? 맞아, 결혼한대. ”

 

“ 으응, 그렇구나. 조용히 결혼할 것이지 뭐하러 옛날 남자한테 전화는 해대는지. 쪼잔한 여자구만. ”

 

“ 그게... ”

 

 

술이 깨면서 극심한 두통과 우울감이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아까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왕재수는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음악에 맞춰 휘파람을 불기도 하면서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대체로 왕재수는 그가 횡설수설하며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면 중간에 말을 끊는 적이 별로 없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게 뻔했지만 베르닌은 어쨌든 가슴이 답답했으므로 왕재수가 듣든 말든 얘기를 줄줄 쏟아놓았다.

 

 

왕재수는 별로 위로를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었다.

 

 

“ 그렇구나. 그런 게 걱정이 되는 거구나. 결혼할 사이에는 옛날 애인 얘기를 하면 삐치는 건가 보구나. ”

 

“ 그런 사람 많아. ”

 

“ 참 인생 피곤하게 사네. 안 그래도 신경 쓸 거 많은데. 다 정리했으니까 결혼하는 걸 텐데 옛날에 몇 명을 사귀었든 놀아났든 뭐가 그렇게 중요하담. ”

 

“ 그러게. 나도 그런 거 신경 안 쓸 텐데... 올랴는 신경 쓰였나봐. 모브린도... ”

 

“ 그 모브린인지 나발인지는 재수 없어. ”

 

“ 왜? 올랴는 괜찮고 모브린은 나쁜 거야? 둘다 똑같이 행동했잖아. ”

 

“ 올랴는 너한테 미안해했지만 그놈은 알렉산드라한테도 뻔뻔하게 굴고 너한테도 그렇게 굴었잖아. 거짓말도 하고. 지난번에도 성추행범 옹호하면서 잘난 척 했다며. ”

 

“ 아... 너 의외다. 그런 거 기억하는구나. 이름까지. ”

 

“ 네가 그때도 되게 씩씩거리면서 아까처럼 그랬잖아. ”

 

“ 내가 그렇게 얘기하면 다 기억해? ”

 

“ 네가 얘기하는 건 보통은 기억해. ”

 

기억만 하면 뭐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잖아! 밥 챙겨먹으라 해도 말 안 듣고 패딩 입으라 해도 안 입고 출근 날짜 줄이라 해도...

 

“ 그건 나에 대한 거고. 너에 대한 건 대충 기억해. ”

 

“ 엥? 감동받아야 하는 거야? ”

 

“ 이 멍충아, 맨날 징징대는데 어떻게 안 기억해! ”

 

“ 누가 누구 얘길 하는 거야! 어휴... 하여튼 나 너무 꿀꿀해. ”

 

“ 근데 뭐가 그렇게 꿀꿀하니. 올랴랑 다시 잘 될 거란 생각을 하고 갔던 건 아닐 거 아냐. 그렇게까지 좋아했던 것도 아니라며. 모브린은 재수 없는 놈이지만 원래 재수 없는 놈인 거 알았잖아. 알렉산드라는 좀 안되긴 했다. 그래도 넌 할 만큼 했잖아. 바래다주기도 하고. 네가 맨날 나한테 그랬잖아, 세상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며. ”

 

“ 나도 기대는 안 했어. 올랴 때문에 속상했지만 그건 뒤늦게 나타나서 그런 말을 하니까 그랬던 거 같아. 그리고... 이상하게 계속 마음에 남고 속상한 건 그런 게 아니고... 걔가 나 찰 때 그랬거든. 분명히 KGB 따위 너무 싫다고, 공무원 노릇하면서 KGB 완장 차고 생색내는 남자 질색이라고 했는데... 결국 결혼은 모브린이랑 하잖아, 똑같은 KGB인데... 그러니까 KGB가 문제가 아니고 사실 올랴는 내가 그냥 싫었던 거야. 근데 그게 되게 꿀꿀하단 말야. ”

 

“ 왜? 세상 사람이 다 너 좋아하란 법 있냐? 나 같은 우주 최강 꽃미남도 시기 질투하는 놈들에 싫어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어떻게 모든 여자에게 다 좋다는 얘길 듣니. ”

 

아니야! 너는 그런 거 몰라! 너는 그래도 추종자들이 엄청 많잖아. 네가 손 하나 까딱하면 거의 다 넘어왔을 거 아냐. 넌 매력 없다고 차이는 게 뭔지 모른단 말이야. 나는, 나는 인기도 없고 지금까지 여자 친구도 몇 명 사귀어보지도 못했고 그나마도 몇 달 이상 간 적도 없단 말이야. 가끔씩 부모님 댁에 가면 언제 결혼하느냐고 다 걱정해. 나도 여름이면 스물아홉이 되고... 알렉산드라가 왜 그렇게 속상해하는지 나도 조금은 이해된단 말이야. 나처럼 여자한테 인기도 없는 책상물림 숙맥은 이러다가 결혼도 영영 못하고 끝까지 혼자... ”

 

 

왕재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까만 눈이 반짝거렸지만 장난기는 전혀 없었다.

 

 

“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

 

“ 결혼 못할까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

 

“ 어... 꼭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좀 그런가봐. 나는 옛날부터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 착하고 예쁜 여자랑 살면서 귀여운 아기도 낳고 그러고 싶었거든. 너는 대도시에서 와서 모르겠지만 여긴 보수적인 동네야... 빨리 결혼해서 가정 꾸리는 게 미덕이라고. ”

 

“ 레닌그라드도 그래. ”

 

“ 뭐가? ”

 

“ 빨리 결혼해서 빨리 가정 꾸리는 거.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전쟁 때 봉쇄로 남자들이 많이 죽었잖아. 그래서 결혼도 빨리 하고 이혼도 많이 해. 10대 때 결혼하는 애들도 많은 걸. ”

 

“ 거기도 그렇구나... 하여튼... 아까 알렉산드라가 울 때 나 되게 이입됐었어. 나도 뭐든 열심히는 했는데 남은 것도 없고 기껏 서무잖아. 옆에는 아무도 없고. 알렉산드라 데려다주고 나왔는데 길은 캄캄하고 춥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누구랑 같이 걸어가면서 깔깔 웃고... 갑자기 너무 우울했어. 이러다 정말 결혼도 못하고 끝까지 혼자 남을 것 같았어. 그런 거 너무 속상하잖아... 아무도 나 안 좋아하는 거. “

 

“ 애인이 안 생겨서 두려운 거야, 아니면 결혼을 못 할 거 같아서 두려운 거야? ”

 

“ 둘 다. 근데 특히 두 번째... 오늘은 그런 거 같아. ”

 

“ 그런가. 어렵네. ”

 

 

왕재수가 생각에 잠겼다. 베르닌의 곁에 앉더니 고개를 다시 갸웃했고 잠시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나는 그럴 일이 없을 텐데. ”

 

“ 뭐가? ”

 

“ 결혼. 난 결혼 같은 거 할 일이 없을 거 아니야. ”

 

“ 어... 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인기 많으면서... 지금 극장에도... ”

 

“ 바보. 결혼은 법과 질서가 인정해야 이루어지는 거잖아. 일종의 체제라고.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서 만드는 계약체. 그러니까 나는 죽을 때까지 그런 거 만들 일이 없을 거야. 애기는 더더욱. ”

 

“ 아... ”

 

 

베르닌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술이 완전히 깨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왕재수가 연방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신과 다른 이유가 단순히 예술가이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아마도 그는 마지막 생각을 입 밖에 냈던 건지도 몰랐다. 술기운에. 그것도 아니라면 언제나 그랬듯 그가 펼쳐진 책처럼 적나라하게 마음을 드러낸 표정을 지었던 것일지도. 왕재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기 때문이다.

 

 

“ 그래봤자 다 똑같아. ”

 

“ 뭐가? ”

 

“ 세상 사는 거. 많이 피곤하고 덜 피곤하고의 차이지. ”

 

“ 엥,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해. 철없는 놈이. ”

 

“ 들켰나. 내가 한 말 아니야. ”

 

“ 역시... 바이올린 아저씨로구만. 딱 나이 많은 아저씨가 할 법한 말이네. ”

 

“ 로만은 아니고. 뭐 아저씨는 맞네. ”

 

 

왕재수가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품을 하더니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 나 잘래, 다닐. 너무 졸려. ”

 

“ 어, 그, 그래. 그럼 난 우리 집에 갈게. ”

 

“ 그냥 여기서 자. 너 아까 너네 집 현관이랑 거실에 엄청 토했어. 그거 치울 엄두 안 나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 거야. ”

 

“ 어... 그랬구나. 치워야겠다. ”

 

“ 내일 치우고 지금은 자라. 술 퍼마셨잖아. 그래야 내일 아침에 나 태워다 주지. ”

 

“ 그러니까 결국 너 좋은 일 해달라고 돌봐준 거구나! ”

 

“ 응. 근데 너 이제 진짜 살 좀 빼... 무거웠어... 80킬로 넘는 거 같아. ”

 

 

베르닌은 최근 다이어트를 좀 해서 적어도 1킬로는 빠졌을 거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왕재수가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 쌕쌕거리며 잠이 들었기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 뭐야, 이게. 울 때도 그렇고... 자는 것도 진짜 애기처럼. 순식간에 자네. ”

 

 

베르닌은 왕재수를 안고 침실로 갔다. 침대에 뉘어주고 이불을 덮어주자 왕재수가 눈도 뜨지 못하고는 희미하게 웅얼거렸다.

 

 

“ 아이, 술 냄새. 베개에 뱄어. ”

 

“ 미안해. 베개 바꿔줄게. ”

 

“ 됐어. 마시지도 못하는 거 대리만족이라도 할래. ”

 

 

왕재수는 곧 다시 잠이 들었다. 베르닌은 집으로 갈까 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거실 소파로 가서 드러누웠다. 왕재수의 소파는 그의 집 소파보다 훨씬 넓고 푹신했다. 침대도 그랬다. 집도 훨씬 넓었다. 쿠션을 머리에 베고 눕자 온몸이 노곤해졌다.

 

 

‘ 토한 거 치우기 싫어서 여기서 자는 거야. 오늘만. 진짜야. 혼자 있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누구처럼 애기도 아닌데. ’

 

 

베르닌은 입 안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FIN

- 2015. 6. 5 ~ 6. 15 -

 

 

...

 

 

어쩌다 보니 26편은 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만...

 

이번 편의 알렉산드라와 세묜 모브린은 18편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http://tveye.tistory.com/3678)에 등장한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알렉산드라가 나오는 글들은 거의가 좀 우울한 편이네.. 꼭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그렇게 됐다. 아무래도 알렉산드라는 서무 시리즈에서 코믹한 기운도 없고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라서 그런 것 같다.

후반부에서 왕재수가 하는 이야기들은 사실 본편 미샤와 맥이 많이 닿아 있다. 어쨌든 이 사람이 퀴어 캠프의 일원이자 억압된 소련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인 것은 본편이든 서무 시리즈든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

 

기껏 새로운 여자 캐릭터를 등장시킨다더니 이 모양이냐! 하고 야단치는 분들께 ㅠ 그래서 분위기 전환용으로 다음주에는 번외편으로 러시아 민담 패러디를 올리겠습니다~ 과연 단추는 번외편에서라도 미녀 군단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인가~!!

 

 

***

 

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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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