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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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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 시리즈가 엄청 길어졌다. 벌써 24편이다!

 

전에는 미리 써둔 게 많아서 일주일에 하나씩 올렸는데 이제 남은 게 25편 하나 뿐이라 올리는 간격이 좀 길어질 것 같기도 하다. 바쁘기도 했고 5월에 몸이 아파서 심신이 불안정하여 그런 것도 있고, 또 20편 이후로는 각 에피소드마다 분량이 꽤 길어져서 더 그런 것도 있다. 25편은 분량 때문에 두편으로 쪼개서 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여튼 24편!

 

폭설의 도시 스네고로드에서 돌아온 단추와 왕재수. 드디어 가브릴로프에도 3월이 오고...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 눈도 녹지 않았지만 그래도 3월이다. 그리고 단추는 다시 극장으로 향하는데...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이번 편 간략한 예고 **

 

1980년대 초 소련의 지방 소도시(..라고 쓰고 시골이라 읽는다) 가브릴로프의 보안위원회(KGB) 말단 행정직원이자 서무인 다닐 베르닌은 무시무시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격무에 짓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무용수 출신의 반동분자 정치범을 가브릴로프로 유배시키고, 베르닌은 엉겁결에 그를 감시하는 중책을 떠맡는다. 알고보니 그것은 싸가지 없는 젊은 예술가 녀석의 가정부이자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서무 업무로 들들 볶이느라 힘든 와중에 새로 온 녀석의 출퇴근 운전기사 노릇, 집안일, 밥해먹이기 등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던 베르닌은 망할 놈의 반동분자를 왕재수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재수도 나름대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3월로 접어들고, 스페호프는 베르닌에게 왕재수의 신작 발표 전까지 특별 감시 업무를 부여한다. 베르닌은 극장으로 향하는데... 

 


(이 시리즈는 아래 순서대로 읽기를 권장함~)

 

*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 대해 : http://tveye.tistory.com/3427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시리즈 목차 : http://tveye.tistory.com/3428
* 에피소드 0.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 : http://tveye.tistory.com/3429
* 에피소드 1. 왕재수, 행동에 나서다 : http://tveye.tistory.com/3432
* 에피소드 2. 당직실의 귀신 : http://tveye.tistory.com/3437
* 에피소드 3. 버찌잼과 초콜릿 쿠키 : http://tveye.tistory.com/3444
* 에피소드 4. 공유지의 배추와 의전의 문제 : http://tveye.tistory.com/3451
* 에피소드 5. 무도회에 간 베르닌 : http://tveye.tistory.com/3458
* 에피소드 6.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 http://tveye.tistory.com/3466
* 에피소드 7. 보고서의 악몽 : http://tveye.tistory.com/3478
* 에피소드 8. 새해 전야의 만두 소동 : http://tveye.tistory.com/3488
* 에피소드 9. 눈보라와 패딩 코트 : http://tveye.tistory.com/3524
* 에피소드 10. 벨라 등장! : http://tveye.tistory.com/3542
* 에피소드 11. 살구나무 거리에서 온 남자들 : http://tveye.tistory.com/3553
* 에피소드 12. 전설의 서무를 찾아서 : http://tveye.tistory.com/3563
* 에피소드 13. 검은 숲의 온천 요양소 : http://tveye.tistory.com/3580
* 에피소드 14. 한밤중의 침입자 : http://tveye.tistory.com/3599
* 에피소드 15. 우수 공산당원 연수 워크숍을 위해 막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 : http://tveye.tistory.com/3615
* 에피소드 16. 짐꾼 베르닌과 빗, 물병, 목걸이의 비법 : http://tveye.tistory.com/3635
* 에피소드 17. 운수 좋은 날 : http://tveye.tistory.com/3661
* 에피소드 18. 메드베지에서 생긴 일, 알렉산드라 : http://tveye.tistory.com/3678
* 에피소드 19. 다닐 베르닌이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된 사연 : http://tveye.tistory.com/3692
* 에피소드 20. 베르닌, 무대에 데뷔하다! :  http://tveye.tistory.com/3708
* 에피소드 21. 스페호프의 복수 : http://tveye.tistory.com/3726
* 에피소드 22. 흰머리천사날개풀과 파인애플 : http://tveye.tistory.com/3742
* 에피소드 23. 스네고로드 집단농장 : http://tveye.tistory.com/3766
 
** 번외편. 등장인물 20문답 : http://tveye.tistory.com/3492, http://tveye.tistory.com/3493


 

 

 

 

 

 

* 이 글을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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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의 슬픔 series>

episode 24

 

 

 

서무의 슬픔

- 시계탑 전망대에서 -

 

 

 

 

스네고로드에서 돌아온 후 베르닌은 굉장히 바빴다. 계속 사무실을 비웠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도 그의 업무를 대신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며칠째 야근을 했다.

 

그 와중에 국장이 스네고로드 자원봉사 보고서를 요구했고 거기 더해 왕재수와 청년단원의 충돌에 대해서도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아마 스네고로드에 심어놓은 정보원이 미리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있었던 일만 간략하게 보고했다. 왕재수가 아르투르와 당에 대해 퍼부었던 비난은 빼버렸지만 국장은 이미 그 내용도 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독사과 사건 이후 베르닌은 스페호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뱃속에서 분노가 들끓었고 동시에 서늘한 공포도 스멀거렸다. 물론 베르닌은 불순분자를 감시하고 체포하는 것이 KGB의 임무이며 자신이 속한 감시분석부의 주무도 그쪽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신체적 위해를 입히거나 암살을 시도하는 것은 해외 스파이들이나 하는 짓, 스탈린 공포정치 시절에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서는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가브릴로프였다. 평화롭고 지루한 동네였다. 도시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왕재수가 닳도록 얘기하는 대로 시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무서운 일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책상물림에 고지식하기 짝이 없지만 어릴 적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고 입사 시험 때도 연역 논술 점수가 제일 좋았던 베르닌은 논리적으로 분석을 해 보았다. 스페호프도 정말로 왕재수를 죽일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국장 자신의 입으로 혼만 내주겠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그건 매수된 레베진스키가 사과 세 알에 약을 고루 바르는 대신 한 알에만 왕창 발라놨기 때문일 것이다. 레베진스키라고 그렇게 끔찍한 목적으로 약을 많이 바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레베진스키를 잘 몰랐지만 극장 내의 평으로는 조금 무능하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시골 극장의 감독직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 할 만큼 용의주도하고 사악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무용수 출신의 안무가라는 사람이 KGB에서 쓰는 독약에 대해 뭘 알겠는가. 심지어 베르닌 자신조차 전혀 몰랐던 약물인데. 그리고 국장은 왕재수의 크레믈린 아저씨를 비롯한 중앙의 후원자들을 아주 경계하고 있었으니 고의적인 암살을 시도할 만큼 무모한 인물은 아니었다.

 

 

문제는 전처럼 ‘혼만 내주려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결국 베르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장에게 신뢰를 얻어서 계속해서 왕재수의 감시요원으로 남아 있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국장은 그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그가 왕재수를 도와주는 것도 현장요원으로서 연기력을 발휘하는 거라고 착각을 해 주었다. 분명 얼음을 깨고 강물에 빠졌던 것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그러니 그가 왕재수를 위험에서 지키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국장의 불신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서무 업무와 야근이었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다. 주간회의부터 시작해 아주 바쁜 날이었다. 베르닌은 주말에도 나왔지만 쌓여 있는 일을 보니 오늘도 야근 예약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져 있었다. 오후에는 밀려 있던 직원 외출부와 출장기록부에 사인을 받기 위해 국장실에 올라갔다. 그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국장은 후딱 사인을 해주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연번을 매기는 방식부터 시작해 서류철 노끈의 위치, 같은 날짜 내에서는 해당 직원의 성을 알파벳순으로 기재해야 한다는 문서 작성 매뉴얼 따위에 대해 ‘행정의 기본’이라는 명목 하에 족히 30분 동안 설교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스페호프는 약 10분 간 설교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베르닌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열심히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자 만족해서 그랬는지 갑자기 주루룩 사인을 해주더니만 서류철들을 탁 하고 덮었다.

 

 

“ 자, 됐네. 그건 그렇고 지난 주 내내 야근을 하더군. 어제도 나왔고. ”

 

“ 어, 예. 월초에 야스민을 병원에서 감시하고 또 며칠 전엔 스네고로드에 다녀오느라 일이 많아서요. 저... 열심히 해서 밀린 일은 이번 주 중에 모두 마무리하겠습니다. ”

 

 

베르닌은 쌓아둔 일 때문에 혼이 날까봐 더듬거리며 변명과 의지를 섞어 중얼댔다. 하지만 스페호프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닐세. 물론 서무 업무는 중요하지. 행정의 기본이고. 하지만 자네의 또 다른 주무는 그 불여우 감시야. 그런데 스네고로드에서 복귀한 후 그 녀석 감시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군, 물론 극장 쪽에도 정보원을 두엇 붙여 놓긴 했고 자네 얘기대로 자리를 계속 비웠으니 지난주에는 어쩔 수 없었다 치지만, 그래도 정식 훈련을 받지 않은 민간인 정보원과 내가 키우고 있는 요원은 하늘과 땅 차이지. 게다가 자네는 그 불여우에게 몸까지 던져서 아침부터 저녁, 밤에 해주면서 신뢰까지 얻어냈으니 자네를 대신할 수 있는 감시요원은 지금 구하기도 힘들어.

그 자식이 4월에 신작 공연을 앞두고 있다지. 당초 나는 검열국을 방패로 그 신작인지 뭔지의 이념성을 지적해 끌어내리려 했지. 그러나 그 영악한 불여우가 지난번 돈키호테인지 나발인지 무대에서 직접 춤까지 추고 그때 왔었던 모스크바 의원님들에게 자기 신작을 홍보해버린 바람에 이제 내용이나 이념으로 걸기에는 어렵게 됐어. 그 신작 공연에는 높은 인간들이 많이 올 거야. 심지어 스비제르스키에 마로조프까지 온단 말일세! 그 두 작자들이야말로 불여우를 끼고 돌았던 실세 중의 실세지! 더러운 불여우 녀석이 지금이야 끈이 떨어져서 헌신짝 신세가 됐지만 4월에 그 나리님들이 와서 공연을 보고 혹시라도 그 자식을 다시 귀엽게 보기라도 한다면 만사가 엉망이 되는 거야!

그러니 자네는 오늘부터 당분간 오후부터는 극장으로 가서 그 녀석을 감시하게. 행여 그 자식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면 서무 업무를 제대로 못 해서 나에게 징계를 받아 근신 중이라고 하게. 어차피 자네는 녀석과 잠자리도 같이 하고 살림을 해주는 사이이니 충분히 믿을 걸세. 그럼 어서 가보게! ”

 

 

 

*   *   *

 

 

 

그날은 월요일이라 극장은 휴일이었다. 하지만 왕재수가 집에서 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스네고로드에서 돌아와 둘 다 녹초가 되어 뻗어버린 일요일에 저녁밥을 해먹인 이후 베르닌은 왕재수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왕재수도 신작 준비와 무용수들 지도 때문에 굉장히 바빴을 게 분명했다.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에게도 전화를 해보았다. 의사는 왕재수가 독사과 후유증에서는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먹고 자는 것만 잘 챙겨주면 될 거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공연이 없는 날이라 극장이 한산할 줄 알았지만 뒤로 돌아가니 신관 공사 때문에 꽤 시끌시끌했다. 극장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시에서는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가브릴로프 출신이자 요즘 크레믈린 정치국에서 꽤 잘 나가고 있는 의원인 게오르기 벨스키가 특별예산을 많이 편성해 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옛날에 가브릴로프 발레단에서 춤을 췄었기 때문에 극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했다. 왕재수가 춤추던 시절에는 아주 강력한 후원자였고 수용소에서 빼내서 이곳으로 보내는 데 가장 힘을 써준 사람이라고도 했다. 베르닌은 다른 데서 그 얘기를 듣고는 너무 궁금해서 왕재수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 너 있잖아, 그 크레믈린 아저씨. 벨스키가 그 사람이야? ”

 

“ 아니야, 그 사람. ”

 

“ 엥, 너 엄청 후원해 줬다며. 가브릴로프에선 그 사람이 제일 유명해. 서기장 다음으로 유명한 정치인이야. 우리 시 출신으로 그렇게 출세한 건 그 사람뿐인데. ”

 

“ 내가 알게 뭐야, 정치하는 사람들. ”

 

“ 그래도 너 후원자라며. 우리 극장에 보내준 것도... ”

 

그래, 그 사람이 나 꽂았다! 나 낙하산인 거 다 알면서 그러니. 쳇... 그래도 그 사람이랑은 안 잤어. 아저씨들이 다 사내애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

 

“ 그럼 크레믈린 아저씨는 누구야? 정말 그 사람이야? 스비제르스키... ”

 

“ 몰라, 네가 무슨 상관이니. ”

 

 

베르닌은 차라리 게오르기 벨스키가 크레믈린 아저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건한 이미지인데다 어쨌든 가브릴로프 출신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는 걸 보니 왕재수의 크레믈린 아저씨는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맞는 것 같았다. 그는 KGB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인물로 정치국의 진짜 실세 중 하나였다. 원체 무자비하다고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고 이전에는 스페호프를 불러 호되게 질책을 한 적도 있었다. 신작 공연 때 그 사람이 온다고 하니 스페호프가 그전에 무슨 음모를 꾸밀지 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무서운 크레믈린 아저씨에 대해 생각하며 베르닌은 공사장 쪽으로 갔다. 신관은 이미 1~2년 전에 공사를 시작해서 지금은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신관에는 중규모의 공연장 하나와 연주 홀, 카페, 연습실들이 들어온다고 했다. 왕재수의 말에 따르면 신관 무대는 어린이용 공연을 비롯해 발레와 오페라 갈라 공연용으로 쓸 예정이었다. 연주 홀도 음향 시설을 보강해 오케스트라가 따로 연주회를 자주 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는 거였다. 베르닌은 극장이나 무대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돈키호테를 해보고 나니 신관 공사가 잘 끝나서 관객들이 더 많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재수는 신관과 구관 사이에 세워진 시계탑 입구에 있었다. 얼핏 보면 오래된 건물처럼 보였지만 사실 옛날 건축양식을 본 따 급조한 건축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완공이 된 모양이었다. 토냐와 가릭의 뒤로 극장의 스타 커플인 타마라와 데니스, 그리고 나쟈가 보였다. 베르닌이 다가가자 나쟈가 제일 먼저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다닐. ”

 

“ 어, 안녕하세요! 언제 온 거예요? ”

 

“ 사흘 전에요. 지금은 타마라 언니네에 있고요, 수요일부터는 발레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베르닌은 왕재수 쪽을 보았다. 왕재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너 웬일이야? 일하고 있을 시간 아냐, 여긴 왜 왔어? ”

 

어, 그게... 외근 갔다가 근처라 들렀어. 넌 왜 휴일인데 나와 있는 거야? ”

 

“ 공사 마무리되는 것도 좀 보고, 나쟈 학교 수업은 다음 주부터니까 그전에 기본 좀 가르쳐주느라고. ”

 

“ 어, 그랬구나... ”

 

 

베르닌은 어쩐지 어색해졌다. 무용수들이 곁에 있는데다 왕재수는 일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가 딱히 있을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는 돈키호테 무대에 함께 올라갔던 토냐와 가릭이 너무 반가웠지만 하를람피 푸고비체프가 아닌 다닐 베르닌은 무용수들에게 있어 KGB 감시요원일 뿐이었다.

 

 

쭈뼛거리고 있는데 타마라와 데니스는 나쟈에게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곧 자리를 떴고 가릭과 토냐는 시계탑에 올라가서 왕재수만 남았다.

 

 

“ 너 주말에 안 들어왔지. 설마 또 극장에서 잔 거야? ”

 

아니야, 로만한테 가 있었어. 나 지난주에 극장 이틀밖에 못 나왔어. 로만이 나 무조건 쉬어야 한다면서 자기 집에 가둬놓고 문도 다 잠가버리고... 극장 가면 두들겨 팰 거라고 얼마나 협박을 했다고. ”

 

“ 그 아저씨 웬일로 기특한 짓을 했네. ”

 

뭐가 기특해! 감옥이냐? 사람을 막 가두고... 너무 열 받아서 로만이랑 한바탕 싸웠어. 확 나가버리려다 말았어. ”

 

“ 문도 다 잠갔다면서 어떻게 나가. 바이올린 아저씨 5층인가 살지 않아? ”

 

“ 흥, 그깟 잠긴 문 누가 못 여니! 정 안되면 창문 깨고 파이프 타고 내려가면 그만이지. 맘만 먹으면 나갈 수 있었는데 내가 져준 거야. ”

 

“ 네가 웬일로? 너 완전 고집쟁이에 하고 싶은 대로만 하잖아.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의사 선생님이 사흘만 출근하라는 것도 안 들었잖아. 근데 어떻게 바이올린 아저씨 말은 듣는 거야? ”

 

아휴, 이 바보 멍충이. 로만은 내가 성질내고 있으면 갑자기 꼭 안아준단 말이야! 너랑 의사 선생님은 그게 안 되잖아! 그리고 로만이 얼마나 잠자리를 잘하는데... 그러니까 그냥 못 이기는 척 하고 있었... ”

 

“ 으윽, 그만 해. 알았어. 나 있잖아, 오늘부터 당분간 오후에 사무실 안 들어가도 되는데 극장 가끔 와도 돼? ”

 

“ 4월까지? ”

 

“ 어, 글쎄... 모르겠어. 근데 넌 왜 4월까지라고 생각하는 거야? ”

 

“ 너네 국장이 명령한 거 아니야? 나 4월에 신작 올리는 거 때문에? 옆에 가서 감시하라고. ”

 

 

베르닌은 멍해졌다. 가끔 그는 왕재수가 춤 말고 머리도 천재인가 싶었다.

 

 

“ 저... 맞아. 지난번 돈키호테 때도 그렇고... 미안해. 근데 나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나 국장한테 진짜 최소한만 보고하고... ”

 

“ 누가 뭐래. 맘대로 하렴. 언제는 뭐 안 했냐. ”

 

 

메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에 왕재수가 코트 단추를 채우고 스카프를 꼭 여몄다. 이제 3월이었지만 아직도 추웠다. 지난주에는 폭설까지 와서 시계탑 주변으로는 청소부들이 한쪽으로 밀어놓은 눈이 산처럼 높이 쌓여 있을 정도였다. 왕재수는 부츠에서 눈을 털어내다가 시계탑을 올려다보면서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 진짜 흉물스러워.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담. ”

 

“ 어, 난 괜찮은데. 이거 꼭 수도원 쪽에 있는 시계탑 같잖아. ”

 

“ 예산 퍼부어주니까 그걸로 여기다 세워놓은 거잖아. 전시용으로... 잘 보면 엄청 조잡해. 색깔 칠한 것부터 시작해서 저 시계 꼴 좀 봐. 자재도 싸구려에 꼴 보기 싫어. 옛날 거 흉내 내서 만든 가짜 티 엄청 나. 이거 왜 만들었는지 알아? 예전에 벨스키가 고향 도시라고 시찰 왔을 때 시 의원들이랑 우리 극장장하고 간담회를 하다가 자기는 수도원에 있는 시계탑이 참 맘에 든다고, 극장 뒤에도 그런 걸 지었다면 풍경이 근사했을 것 같다고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했다는 거야. 그 말에 여기다 저걸 짓자고 한 거래! 저런 흉물스러운 거 만들 돈 있으면 우리 극장 무대랑 음향 쪽에나 더 투자해 주지... 아니면 무용수들 기숙사나 더 지어주든가. 하긴 정치하는 인간들에게야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니. 그저 선전용에 전시용이지. ”

 

“ 어... 저게 그렇게 엉망이고 조잡한 거구나. 난 건축이나 미술이랑 담 쌓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어. 나처럼 잘 모르는 주민들은 그냥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근데 저거 엄청 높다. 구시가지에 이 정도로 높은 거 없지 않나? ”

 

“ 8층 높이쯤 될 거야. 우리 아파트 정도. 구시가지 랜드 마크로 만들려고 일부러 높게 만들었대. 전망대도 만들고. 근데 저 전망대 진짜 잘못 만들었어. 올라가봤는데 너무 좁아. 사람들 많이 들어갈 수도 없고 창문도 양쪽으로 두 개 밖에 없는데 그나마 하나는 시계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아.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인 거야. 하긴 언제 소련에서 안 그런 적 있었나. ”

 

너 제발 소련, 당, 공산주의, 레닌 이런 말 하지 마... 불안해 죽겠어. 나야 보고 안한다지만 국장이 여기저기 정보원 심어놨다고 했단 말이야. 감옥 그렇게 싫다면서 또 꼬투리 잡혀 끌려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

 

“ 아 지겨워... 악마들... ”

 

 

왕재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 뭐 딱 하나 건질 건 있어. 전망대 창문에서 보는 석양은 예쁘더라고. 구시가지랑 강이랑 검은 숲이 보여서. 나 석양 보는 거 좋아하거든. 그래서 완공되기 전부터 가끔 올라가서 해 지는 거 구경했어. ”

 

“ 아, 하긴. 우리 사무실이랑 집은 신시가지에 있으니... 이쪽 석양이 멋있긴 하지. 위에서 보면 근사하겠다. 여기는 높은 건물이 없잖아. ”

 

“ 5시쯤 올라가면 괜찮을 거야. 같이 보러 올라가자. 나 지금 무대 쪽 체크하러 가봐야 돼. 넌 산책이나 하렴. ”

 

“ 어, 그래. ”

 

 

왕재수는 신관으로 들어가고 베르닌은 잠시 극장 주변을 산책했다. 월요일 오후에 사무실이 아니라 구시가지에 와서 차갑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전에는 왕재수를 감시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오던 곳이었지만 돈키호테 이후 그는 극장이 좋아졌고 자꾸만 연습실과 분장실과 백스테이지가 생각났다. 심지어 맛없기 그지없는 극장 카페 차이카조차도 가끔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그는 극장 1층으로 가보았다. 월요일이라 닫았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차이카는 문을 열었고 공사 인부들이 앉아서 요기를 하고 있었다. 베르닌이 오렌지 주스를 한 잔 시켜서 테이블로 걸어오는데 인부 하나가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예전에 KGB 창고 부설 공사를 할 때 안면을 텄던 그리고리였다. 햄 치즈 샌드위치를 착착 접어서 몇 입 만에 해치운 후 그리고리가 탄산수를 한 모금 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맛있다. 이맘때가 제일 배고프거든. ”

 

“ 그러게요, 공사하다 보면 진짜 배고플 텐데. 그래도 카페라도 열어서 다행이네요. ”

 

“ 전에는 월요일엔 안 열었어. 열어도 우리는 이런 데서 못 먹고 그냥 공사장에 쭈그리고 앉아서 통조림이나 까먹고 말았거든. 근데 꼬마 감독님이 지난번에 그거 보더니 우리한테 카페 열어주라고 하더라고. 극장장이 안 된다고 했는데 미셴카가 어차피 공연 있는 날은 우리도 5시엔 일 끝내니까 관객들 자리 뺏을 일도 없는데 왜 멀쩡한 사람들을 땅바닥에 앉아서 먹게 하느냐고 화냈어. 말로만 노동자의 권익 운운하지 말라고 따지니까 극장장이랑 시설팀장이 뭐라 할 말이 없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여기 와서 배 채울 수 있게 됐어. 반값 할인 식권도 받았어. ”

 

“ 아... 그랬구나. 의외네요, 걔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

 

“ 고맙다고 했더니 그 앙증맞은 감독님이 뭐라는 줄 알아? 우리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고 반대라고, 공사장에서 퍼질러 앉아 청어 통조림이나 까먹고 햄이나 우물거리니까 자꾸 보드카 퍼마시고 일도 엉망인 거 아니냐고, 그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착각하지 말래. 카페에도 얘기해서 우리한테는 보드카 못 주게 해놨다면서. 얼마나 귀여운지. 여기서 안 주면 어때, 보드카야 우리가 다 따로 챙겨오는데. 하여튼 좋은 애야. 무대 공사할 때도 자기가 궁금한 거 있으면 옆에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감투 과시도 안 하고 젠 체도 하나도 안 한다니까. ”

 

“ 이상하다... 걔 엄청 잘난 척하는데. 무용수들도 막 쥐 잡듯 하고. ”

 

“ 우리한테는 안 그래. 뭐 갈구긴 하지. 아까도 우리 십장한테 오더니 시계탑 전망대에 쌓아놓은 자재 언제 치울 거냐고 막 성질내더라고. 그거 다 쓰려고 놔둔 거라고 했더니 공사 끝났다면서 어디에 쓸 거냐고, 그러면 공사가 끝난 게 아니지 않느냐고 또 화내고. 젊은 애가 눈썰미가 엄청 좋다니까. 그거 십장이 일부러 자재 남겨먹은 거거든. 철수할 때 슬며시 자기가 챙기려고. 딱 걸렸지. ”

 

아니, 뭐라고요? 자재 챙겨 가면 안 되죠! 그건 횡령인데.

 

“ 에이, 물정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정색해. 다른 공사장에서도 다 그렇게 하는데. ”

 

 

베르닌은 나중에 왕재수에게 귀띔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카페를 나왔다.

 

 

 

*   *   *

 

 

 

베르닌은 한동안 로비를 돌아다니다가 시계를 보니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어서 시계탑 쪽으로 다시 가려고 극장을 나왔다. 그런데 현관 계단에 가릭이 쭈그리고 앉아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표정으로 보드카를 병나발 불고 있었고 옆에 왕재수가 앉아 있었다. 맨 처음에 베르닌은 왕재수가 무용수는 술 마시면 안 된다며 가릭을 쥐 잡듯 잡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옆으로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가릭은 울먹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하며 두 손으로 가슴을 쾅쾅 쳤고 왕재수는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거였다. 잘 들어보니 연애상담이었다.

 

 

“ 흑흑,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다니. 저 정말 용기내서 고백한 거였는데... ”

 

“ 그래서 오늘 나온 거구나! 난 또 연습하려고 나온 줄 알고 기특하다 생각했었네. 스네고로드도 그래서 따라가겠다고 자원한 거였지? ”

 

“ 네. 근데 다 망했어요. 흑... 일부러 분위기 좋은 데서 고백하려고 시계탑까지 데리고 올라갔는데... ”

 

“ 이 멍충아, 그 안이 지금 얼마나 어수선한데. 자재도 막 쌓여 있고 먼지구덩이에... 누가 여자를 그런 데로 데려가서 고백을 하니! ”

 

“ 그치만 감독님은 매일 저녁에 거기 올라가시잖아요.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 좋다면서. ”

 

“ 어휴, 내 말을 제대로 들었어야지! 석양 보는 게 좋다고 했잖아! 해 질 때 올라갔어야지. 타이밍이 너무 빨랐잖아. 먼지 풀풀 피어오르고 전기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데 자재들 사이에서 무슨 분위기를 찾고 무슨 고백을 하니! ”

 

“ 어흑... 문제는 먼지구덩이도 자재도 아니란 말이에요. 분위기가 아무리 좋았어도 안됐을 거예요. 토냐가 저한테 미안하다면서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저한테 마음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엉엉... ”

 

“ 아, 그래? 그 남자랑 토냐 지금 사귄대? ”

 

“ 아니요... ”

 

“ 그럼 뭘 걱정이야. 잘해주면서 마음을 뺏으면 되지. ”

 

“ 흑... 그게 안 되니까 그렇죠! ”

 

“ 왜 안 돼? 왜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니? ”

 

“ 그건, 그건... 토냐가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이니까 그렇죠! ”

 

 

가릭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술병을 와락 넘어뜨렸다.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엉엉, 정말 너무해... 그렇게 인기 많으면서 왜 토냐까지... 흑... ”

 

 

왕재수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 아 뭐... 여자들은 다 나 좋아해. 토냐라고 예외겠니. 그거 그냥 팬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그러는 거야. 그러다 말 거야. ”

 

“ 아니에요! 토냐는 진짜 진심으로 감독님 좋아한단 말이에요! 맨날 당신 얘기밖에 안 해요. 밤이고 낮이고 감독님 생각만 한다고... 그래서 난 남자로 안 보인대요. 흑... ”

 

“ 뭘 그렇게 절망하니. 난 토냐한테 그런 감정 없는데. 난 극장 여자들이랑 절대 안 사귄단 말이야. 그러니까 진정 좀 해라. ”

 

그건 감독님 사정이고요! 토냐는 진짜로 사랑에 빠졌단 말이에요. 엉엉, 내가 옛날부터 좋아했는데. 흐흑... 용기 없어서 고백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바보야. 너무 늦었어. ”

 

“ 뭘 늦냐. 너랑 사귀고 있었다 해도 어차피 토냐는 나한테 반하게 되어 있었어. 나 보면 여자들 다 그래. 그러다가 금방 포기한다니까. 그러니까 질질 짜지 말고 연습이나 열심히 해. 여자들은 노력하는 남자를 좋아해. ”

 

“ 하지만 노력하는 남자보다 이미 성공한 남자를 더 좋아한단 말이에요! ”

 

“ 누구, 나 말이야? 여자들이 날 좋아하는 건 성공이랑 별로 관계없어. 내가 우주 최고 꽃미남이라서 그렇지.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잖아. 혹시라도 토냐가 고백이라도 하면 내가 잘 거절할게. ”

 

“ 그럼 토냐가 상처받을 텐데... ”

 

“ 상처받아도 할 수 없잖아. 난 토냐한테 털끝만큼도 그런 마음이 없는데. 그러면서 받아주면 그게 더 나쁘지. ”

 

“ 그럼 정말 나쟈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때 스네고로드에서 한 번 보고 데려오셨잖아요... 학교에도 넣어주고 기숙사까지 잡아주고... ”

 

“ 으윽, 너 내 말 안 들었냐! 난 극장 여자들하고 절대 안 사귄다고! 하여튼 이런 거 안 좋아! 동료들이랑 좋아하고 사귀고... 에잇... 지금 네가 연애할 때냐? 어디서 얻어걸려서 투우사 한번 추고 나더니만... 연습 많이 해서 더 잘해야 할 거 아냐! ”

 

 

왕재수가 다시 쥐 잡는 모드로 돌아오는 것 같아서 베르닌은 말리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가릭이 코를 킁킁댔다.

 

 

“ 이게 무슨 냄새지? 어디서 이렇게 타는 냄새가 나지? ”

 

 

베르닌도 뭔가 매캐하게 타는 냄새를 맡았다. 어디서 샤실릭이라도 굽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왕재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계단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는 몸을 한 바퀴 돌려 주위를 살피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계탑에서 불 난 것 같아! 소방서에 전화 좀 해줘!

 

 

베르닌은 급한 마음에 차이카로 뛰어 들어갔다. 매니저 아르카지에게 화재 신고를 해달라고 했다. 아르카지가 소방서에 전화를 하는 동안 베르닌은 급하게 뛰쳐나와 신관 쪽으로 달려갔다. 왕재수의 말이 맞았다. 시계탑의 높은 창문 사이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고 있었다. 타는 냄새가 나면서 창문 너머로 조그만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왕재수가 주변에 있던 청소부들과 인부들에게 빨리 피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신관에서 뛰쳐나온 그리고리에게 왕재수가 소리쳐 물었다.

 

 

“ 다 나왔어요? 남아 있는 사람 없어요? ”

 

“ 다 나왔어요! 인부 몇 명 없었어요. 이름 다 확인했어요! ”

 

“ 청소부 아주머니들은요? ”

 

“ 여기, 여기, 여기! 우리 다 여기 있어요! ”

 

 

청소원들이 손을 들어가며 목청껏 소리쳤다. 왕재수는 그리고리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 시계탑은요? 거긴 아무도 없어요? ”

 

“ 없어요, 공사 끝났잖아요. 우린 다 나왔어요. ”

 

“ 그나마 다행... ”

 

 

그때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가릭이었다. 얼굴이 새파래진 채 가릭이 울부짖었다.

 

 

토냐! 토냐가 저 위에 있어요! 아까 나 혼자 내려왔어요... 토냐는 안 내려왔어요... 토냐!

 

 

왕재수가 가릭을 잡아 흔들었다.

 

 

“ 무슨 소리야! 너 내려온지 한참 된 거 아냐? 토냐도 벌써 내려왔겠지! ”

 

“ 아니에요... 저 방금 내려오자마자 감독님이랑 마주친 거였어요... 토냐는 위에 남았어요. 주변 다 찾아봤어요, 토냐가 없어요... 저 위에 토냐가... ”

 

 

베르닌은 고개를 저었다. 토냐는 이미 내려와서 집에 갔을 거라고 대답해주려고 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희미하지만 날카로운 여자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위쪽이었다. 시계탑 쪽이었다. 가릭이 소스라쳤다.

 

 

토냐! 토냐 목소리예요! 오 하느님, 토냐가 정말 저 위에... ”

 

 

가릭이 거품을 물고 비명을 질러대며 미친 듯이 시계탑 입구로 돌진하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달려들더니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가릭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베르닌은 저지할 겨를도 없었다. 가릭은 비틀거리더니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릴 틈도 주지 않고 왕재수가 소리쳤다.

 

 

“ 누가 얘 좀 옮겨요! 다닐, 소방서에 전화했어? ”

 

“ 해, 했어... 아르카지가 했어... ”

 

“ 소방서 어디 있어? 소방차 오는 데 얼마나 걸려? ”

 

“ 신, 신시가지... 우리 동네 근처... 강 건너서 와야 돼... ”

 

안 돼, 시간 없어! 그 장갑 좀 내놔요!

 

 

왕재수가 몸을 홱 돌리며 그리고리의 손에 끼워져 있던 목장갑을 벗겼다. 급하게 장갑을 끼더니 코트를 벗어서 내던졌다. 그리고는 단거리 주자처럼 급하게 시계탑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 안돼요, 감독님! 큰일 나요! 거기 좁아서 연기도 안 빠진다고요! 소방차 올 때까지 기다려요! ”

 

 

청소원들과 인부들이 고함을 질렀지만 왕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멍하게 굳어져 있었던 베르닌은 왕재수의 모습이 입구의 암흑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감전된 듯이 펄쩍 뛰었다.

 

 

미하일! 기다려! 기다려!

 

 

물론 왕재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베르닌은 욕을 퍼부었고 정신없이 왕재수를 따라 시계탑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시계탑 안은 밖에서 볼 때와 완전히 달랐다. 나선 계단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고 몇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층마다 방이 한두 개씩 있었다. 불은 위에서 난 것 같았다. 구조 때문인지 연기와 불길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왕재수는 수사슴처럼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올라갔다. 층마다 멈춰서 토냐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어디선가 가냘픈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한참 뛰어올라간 끝에 베르닌은 간신히 왕재수를 따라잡았다. 이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왕재수는 연기가 밀려 내려오는 층계와 벽에 난 창문 사이에 선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냄새를 맡기도 하고 고개를 휘휘 젓기도 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 너 미쳤어? 소방차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지! 금방 올 텐데! ”

 

토냐가 위에 있어. 못 내려온 거야. 소리만 지르고 있잖아... 다치거나 갇힌 거야. 안 그랬으면 벌써 내려왔을 거라고. ”

 

“ 하지만... ”

 

한 층 더 올라가야 돼. 그쪽에 있는 것 같아. 너 빨리 내려가. 위험하니까. ”

 

“ 이 미친놈아! 위험하다면서 너는 올라가도 되냐! ”

 

“ 넌 덩치도 크고 둔해서 안 돼! 빨랑 내려가! 위험하다고 했잖아! ”

 

“ 그럼 너는! 죽었다 살아난지 며칠이나 됐다고! ”

 

저리 가! 토냐 구해야 돼! 토냐는 내 책임이야! 우리 무용수들 다 내 책임이란 말이야! 내가 구해야 돼! 빨리 가!

 

안 가! 너 혼자 못 보내! 나도 갈 거야! 갈 거면 빨리 올라가!

 

 

왕재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왕재수의 눈에 스쳐간 파란 불꽃에 베르닌은 움찔했다. 가릭의 관자놀이를 후려쳤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급하게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 너 나 패기만 해봐! 나 KGB잖아, 공무원 폭행... ”

 

“ 시끄러워! 맘대로 해, 바보 멍충이... 거추장스럽게... ”

 

 

왕재수는 홱 돌아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토냐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식간에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베르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재킷 칼라를 세워 코와 입을 감싼 채 왕재수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전망대 층에 도달했다. 불꽃이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안쪽에서 연기와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베르닌은 화재 현장에 들어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시무시했다. 왕재수는 정신없이 주변을 뒤졌다. 불길이 올라오는 것도 무섭지 않은지 연기 사이를 마구 헤치고 다니며 소리를 쳤다.

 

 

“ 토냐! 어디 있어? 전망대야! 토냐! ”

 

“ 살려줘요! 아래... 바닥.... ”

 

 

가냘픈 비명 소리가 연기 속에서 들려왔다. 베르닌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왕재수는 곧장 몸을 틀더니 왼쪽으로 달려갔다. 기둥처럼 거대하게 세워져 있는 나무와 콘크리트, 철골 자재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더니 자욱한 연기 속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베르닌은 왕재수가 다친 줄 알고 소름이 돋아서 쫓아갔다. 하지만 왕재수는 다친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토냐를 발견한 거였다. 토냐는 쓰러진 자재에 다리가 깔려 있었다. 그렇게 자그마하고 날씬한 여자로서는 아무리 버둥거려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토냐를 덮어 누르고 있는 나무 자재는 이미 불길이 옮겨 붙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 미셴카... 못 움직이겠어요... 무서워요... ”

 

 

토냐가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조그만 얼굴이 눈물과 검댕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 뭐가 무서워! 꺼내줄 거야, 울지 마! 산소 낭비하지 마! ”

 

 

왕재수가 두 손으로 자재를 붙잡고 마구 밀어댔다. 그 와중에 불꽃이 튀면서 소매에 옮겨 붙을 뻔 했지만 왕재수는 침착하게 불티를 털어냈다. 베르닌이 급하게 합류했다. 무슨 기둥인지 들보인지 엄청나게 무거웠다. 자재가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왕재수가 베르닌에게 소리쳤다.

 

 

“ 내가 밀게, 넌 토냐 끌어내! 쟤 지금 못 움직여, 끌어내줘야 돼! ”

 

“ 네가 끌어내! 내가 더 힘세잖아! ”

 

“ 아니야, 내가 하는 게 더 나아! 빨리 해! ”

 

 

베르닌은 자기도 모르게 복종했다. 왕재수가 두 팔로 자재 기둥을 끌어안았다.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옆으로 비틀면서 자재를 한순간 들어올렸다. 그 무거운 자재 기둥이 정말로 움직였다. 올라갔다. 순간 베르닌은 토냐의 어깨와 팔을 붙잡아 앞으로 홱 끌어당겼다. 자그마한 인형 같은 토냐가 주르륵 하고 끌려나왔다. 왕재수는 있는 힘을 다해 자재를 들어 올린 채 버티고 있었다. 이마와 목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베르닌이 소리쳤다.

 

 

“ 됐어! 놔도 돼! ”

 

 

왕재수가 자재를 놓았다. 쿵 소리와 함께 연기와 불꽃이 일었다. 왕재수는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토냐를 껴안고 일어섰다.

 

 

“ 토냐, 정신 차려! 너 내 말 들려? ”

 

“ 미셴카... 어흑... 다리... 내 다리... ”

 

 

토냐가 흐느껴 울었다. 왕재수가 토냐를 안고 뛰면서 소리쳤다.

 

 

“ 다리 괜찮아! 걱정 마! 괜찮아! ”

 

“ 뼈 으스러진 것 같아요... 아... 이제 어떻게 해요... ”

 

“ 아니야! 그냥 금만 간 거야! 만져봤어. 괜찮아! 몇 달 있으면 다 나아! 춤 다시 출 수 있어! 괜찮아! ”

 

 

그 절박한 와중에도 어떻게 왕재수와 토냐가 다리 얘기를 할 수 있는지 베르닌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불길이 너무 거세져서 온몸이 후끈거렸고 숨이 턱턱 막혔다.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때 불어온 바람 때문에 불이 옆으로 옮겨 붙으면서 뭔가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자재가 우르르 무너졌다. 순식간에 계단으로 내려가는 출구가 막혀버렸다. 토냐가 비명을 질렀다. 뒤에서는 불길이 소용돌이치듯 다가오고 있었고 계단으로 가는 길은 비스듬하게 무너져 벽처럼 변해버린 자재에 완전히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 아, 아... 미셴카... 이제 우리 못 나가요... 엄마... 엄마... ”

 

 

토냐가 부들부들 떨며 울부짖었다. 너무나 애처롭게 울어서 베르닌도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왕재수는 울지 않았다. 비명도 안 질렀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주변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베르닌에게 토냐를 좀 안고 있으라고 하고는 옆으로 쓰러져 있는 철골 자재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 자재랑 천정 사이에 틈이 있어. 꽤 넓어. 저기 보이지? 토냐, 내가 지금 너 저기로 던질 거야. 저 틈새 사이로 던질 거니까 준비해. 너 다리 하나도 못 움직이는 거 아니야. 움직일 수 있어. 내 말 잘 들어, 아파도 무조건 뛰어야 돼. 못 뛰면 걷고,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면 기어. 그것도 안 되면 굴러. 춤 같은 거 생각하지 마! 무조건 내려가는 거야! 바람이 위로 불고 있어. 아래에는 불 안 번졌어. 연기도 없어. 내가 지금 던져주면 무조건 굴러. 한 층만 내려가면 돼. 그 아래는 괜찮아. 내 말 알아들어? ”

 

“ 하, 하지만... ”

 

하지만이고 뭐고 없어! 지금 던질 거야! 너 무용수야 아니야! 안 다치게 떨어지는 거 알아 몰라! 내가 가르쳐줬잖아! ”

 

 

베르닌은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벽처럼 서 있는 자재와 천정 사이에 정말 큰 틈새가 있었다. 토냐 정도 체구의 여자라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왕재수라도 가능할 것이다. 기어 올라간다면 체격이 큰 베르닌조차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오르는 연기와 불꽃 때문에 기어 올라갈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사람을 번쩍 들어서 그 위로 던진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가 절망에 차서 안 된다고 중얼거리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그에게 토냐를 올려달라고 했다. 그는 토냐의 몸을 밀어서 왕재수가 서 있는 자재 위로 올렸다.

 

 

“ 너도 올라와, 다닐. 네 도움이 필요해. ”

 

“ 어떻게... ”

 

높이가 모자라. 엎드려줘. 너 밟고 올라갈 거야. 무거워도 조금만 참아줘. ”

 

 

베르닌은 수평으로 쌓여 있는 자재 위로 기어 올라갔다. 왕재수가 시키는 대로 엎드렸다. 왕재수가 토냐를 안고 그의 등 위로 올라갔다. 둘 다 자작나무처럼 날씬한 애들이었지만 두 명의 무게가 얹히자 무거웠다. 숨이 턱 막혔다. 어쩌면 자욱한 연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무서웠다. 아무리 왕재수가 무용수로 잔뼈가 굵고 여자를 들어 올리는 데 도가 텄다고 하지만 천정의 틈새로 여자를 들어서 던져 넣는 것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토냐는 다리도 다쳤는데... 그때 왕재수가 펄쩍 뛰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베르닌은 등과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왕재수는 정말로 토냐를 투포환처럼 집어던졌다. 토냐는 몸을 옆으로 비틀며 자재와 천정 사이의 틈새로 거의 새처럼 날아갔다. 잠시 후 자재 너머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무 것도 안 보였기 때문에 왕재수가 소리를 질렀다.

 

 

“ 토냐! 괜찮아? ”

 

“ 네... ”

 

“ 빨리 일어나! 일어날 수 있어? ”

 

“ 아... 아악... ”

 

 

토냐는 괴롭게 비명을 토해냈지만 잠시 후 훌쩍이며 소리쳤다.

 

 

“ 일어났어요. 걸을 수 있어요... ”

 

“ 빨리 가! 빨리 내려가! ”

 

“ 하지만... ”

 

“ 빨리 가! ”

 

“ 당신들은 어떡하고요... 저 틈새로 못 나오잖아요... 나 혼자 어떻게... ”

 

“ 우린 올라갈 거야! 옥상으로 올라갈 거니까 괜찮아! 소방차 이제 다 왔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가! 너 감독 말 안 들어? 빨리 가! ”

 

“ 미셴카! 미셴카! ”

 

빨리 가! 말 안 들으면 너 자를 거야!

 

 

흐느낌과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점차 멀어졌다. 왕재수는 처음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벽처럼 비스듬하게 무너져 출구를 가리고 있는 그 무시무시하고 불꽃이 퍽퍽 튀고 있는 거대한 자재들을 밀어보았다. 꿈쩍도 안 했다. 몇 초도 안 되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이쪽으로는 못 나가. ”

 

“ 내가 너 던져줄게. 아까 토냐한테 한 것처럼... ”

 

“ 그건 나랑 토냐니까 된 거야. 너하고 나는 안 돼. 올라가야 돼. ”

 

“ 어디로... 여기가 제일 꼭대기잖아... ”

 

“ 옥상. 지붕 위! 뚜껑 열고 올라가야 돼! 사다리 있어! ”

 

“ 하지만... ”

 

 

왕재수는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두 눈에 파랗고 빨간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그러더니 창가로 달려갔다. 허드렛물이 들어 있는 양동이를 본 것 같았다. 그 물로 불을 끄려는 거냐고 베르닌이 절망적으로 투덜대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스카프를 풀었다. 순식간에 두 토막으로 쫙 찢더니 양동이에 철썩 담갔다. 베르닌에게 달려오더니 그의 코와 입을 물에 흠뻑 적신 스카프 조각으로 한 바퀴 감싸 묶었다. 나머지 한 조각으로는 자기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쪽을 가리켰다.

 

 

“ 다닐. 옥상은 저쪽 방으로 가야 올라갈 수 있어. ”

 

“ 뭐? 저쪽에도 방이 있단 말이야? ”

 

“ 이쪽은 전망대랑 시계가 있는 쪽이고, 뒤쪽에 작은 창고가 있어. 거기 사다리랑 옥상 입구가 있어. 올라가려면 저 방으로 들어가야 돼. ”

 

“ 하지만... 저쪽은 불이... ”

 

“ 이쪽도 금방 옮겨 붙어. 내가 먼저 갈 거야. 연기 때문에 소리 못 지를 수도 있어. 내가 들어가면 20까지 세. 그리고 들어와. 불길이 퍼져 나오면 들어오지 마. 도로 나와. 알았어? ”

 

“ 무슨 개소리야! 네가 뭔데 먼저 들어가! ”

 

“ 구조를 아니까! 내가 먼저 가서 사다리로 갈 거야. 20 세는 동안 뚜껑까지 열 거야. 그때 네가 들어오는 거야. 심호흡해야 돼. 연기 마시면 질식하니까. 무조건 사다리 타고 올라와서 옥상으로 가는 거야. 뚜껑 닫으면 불 올라오는 거 막을 수 있을 거야. ”

 

“ 안 돼! 너 혼자 못 들어가! 난 화생방도 해봤어! 군대도 갔다 왔고 요원 훈련도 받... ”

 

시끄러워! 잘못하면 둘 다 죽어! 여긴 극장이야! 내가 아는 곳이야! 지금 들어간다. 숫자 세! ”

 

 

왕재수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총알처럼 연기 속으로 튀어 들어갔다.

 

 

그때 베르닌은 왜 자신이 왕재수를 말리거나 주먹을 휘두르거나 따라 들어가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1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점점 불길이 몰려들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숨 쉬기가 버거웠다. 그나마 왕재수가 물에 적신 스카프를 둘러주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베르닌은 화재가 났을 때 여기저기서 불꽃이 퍽퍽 소리를 내며 터진다는 것도, 갑작스럽게 소용돌이치는 불길이 솟아오른다는 것도 전혀 몰랐었다. 눈물콧물이 줄줄 흘렀다. 시커먼 연기가 갈수록 짙어졌고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솟았다.

 

 

“ 20! ”

 

 

그는 심호흡을 했다.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모을 수 있는 숨을 다 끌어모아 들이쉰 후 왕재수가 사라졌던 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연기 때문에 앞이 거의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마터면 자재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달려 들어가자 전망대 쪽에서 퍼지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맵고 짙은 연기가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은 느낌이었다. 뺨이 따끔따끔하면서 굉장히 아팠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돌진했다. 시커먼 연기 안개 사이로 짙은 초록색이 잠깐 아른거렸다. 왕재수의 스웨터 색깔이었다. 그는 그쪽으로 뛰었다. 왕재수는 사다리 위에 있었다. 두 손으로 미친 듯이 천정을 쾅쾅 치고 있었다. 베르닌은 급하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너무 뜨거워서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왕재수는 스카프로 칭칭 감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안 열려. 잠겼어. ”

 

“ 열쇠... 열쇠 있을 거야! ”

 

“ 찾아봤어. 안 보여. 가지고 내려갔나 봐. ”

 

 

웅얼거리던 왕재수가 입을 다물었다. 스카프로 감싸여 눈과 이마밖에 안 보이는데다 검댕으로 더럽혀져 있었지만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베르닌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왕재수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왕재수가 머리를 젖힌 채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하마터면 함께 사다리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지만 베르닌은 한 손으로 사다리를 붙잡고 버텼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숨이 막혔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사다리에 몸을 부딪치며 간신히 내려왔다. 왕재수를 안고 정신없이 연기를 헤치며 뛰었다. 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전망대 방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베르닌은 그나마 가장 불길에서 멀고 공기 상태가 나은 창가로 달려갔다. 왕재수를 창가 안쪽에 기대어 앉히고 스카프를 푼 후 양동이에 남아 있는 물을 손으로 떠서 얼굴에 뿌렸다. 물을 맞아서인지, 아니면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바람과 산소 때문인지 왕재수가 곧 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 너 괜찮아? 숨 쉴 수 있는 거지? ”

 

“ 으응... 잠깐 질식했나봐. ”

 

“ 그것 봐! 혼자 들어가지 말랬잖아! ”

 

“ 열쇠만 있었어도... 옥상으로는 못 가겠다. ”

 

 

왕재수는 심호흡을 하며 잠시 멍해진 채 앉아 있었다. 스카프를 다시 물에 적셔서 얼굴을 감쌌을 뿐이었다. 베르닌은 정신이 아득했다. 자재들이 끔찍할 정도로 매운 냄새를 풍기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불기둥이 솟았다. 점점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서웠다. 동시에 무섭지 않았다. 현실 같지가 않았다. 곧 소방수들이 올라와서 자재를 모두 치워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구해낼 것이고...

 

 

갑자기 왕재수가 창가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연기와 불꽃이 넘실대는 오른쪽으로 뛰어갔다.

 

 

“ 야, 너 미쳤어? 뭐하는 짓이야! ”

 

 

왕재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더니 연기 속에서 정신없이 뭔가를 뒤졌다. 불꽃이 마구 튀는 것도, 타들어가는 자재가 쾅 하고 옆으로 쓰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 분명히 여기 있었어... 여기... ”

 

 

베르닌은 왕재수가 연기를 마셔서 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왕재수가 벌떡 일어나 다시 창가 쪽으로 달려왔다. 품에 지저분한 회색의 밧줄 뭉치를 껴안고 있었다.

 

 

“ 어제 봤었어. 공사할 때 쓰던 거야. 이거 풀어봐. 길이 좀 보게. ”

 

 

왕재수는 밧줄 뭉치를 베르닌에게 내던졌다. 베르닌은 급하게 줄을 풀었다.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풀려나오는 밧줄이 꽤 길어 보였다. 마침내 다 풀었을 때 왕재수는 팔을 펼치더니 밧줄에 대 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밧줄을 착착 접었다가 폈다. 그리고는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다닐, 이것 좀 잡고 있어. ”

 

 

베르닌이 밧줄 뭉치를 잡자 왕재수가 줄 끝을 잡고 거세게 잡아당겼다.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해서 당겨보면서 줄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 너 몇 킬로야? ”

 

“ 지금 몸무게 묻게 됐냐? ”

 

“ 솔직하게 말해! 지금 몇 킬로야? 제일 최근에 쟀을 때 몇 킬로였어? ”

 

 

베르닌은 멍해졌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분명히 스타브로프의 병원에서 체중을 쟀었다. 왕재수에게 수혈을 해주려고... 그때...

 

 

“ 파, 팔십 킬로 정도... ”

 

 

왕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에 새까만 막이 내리덮이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연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심장과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왕재수가 장갑을 벗었다. 온통 시커메지고 해진 목장갑을 베르닌에게 건넸다.

 

 

“ 장갑 껴, 다닐. ”

 

“ 왜! 네 거잖아! ”

 

“ 여기서 몇 분 못 버틸 거야. 저기 불이랑 연기 보이지? 저거 다 타고 나면 금방 이리로 옮겨 붙을 거야. 옥상으로는 못 가. 계단 쪽도 막혔어. 창문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 밧줄 묶을 거야. 줄 타고 내려가는 거야. ”

 

“ 뭐라고! 너 미쳤어? 이거, 이거 10층은 될 텐데... ”

 

“ 아니, 10층까진 안 돼. 8층 정도야. 할 수 있어. 밧줄 길이 재봤어. 거의 바닥까지 닿아. 파이프 쪽으로 밧줄 내리면 돼. 옛날 시계탑 흉내 내서 만들었잖아. 중간중간 장식돌이 있어. 발 디딜 수 있다고. 할 수 있어. 너 군대 갔다 왔잖아. 유격인지 뭔지 훈련 같은 거 했을 거 아냐. 줄타기 훈련 안 했어? ”

 

“ 했어. 그래... ”

 

“ 그러니까! 지금 그 방법밖에 없어. ”

 

 

왕재수는 밧줄 뭉치를 껴안고 창가로 갔다. 창가 쪽에 고정되어 있는 튼튼한 철골 파이프에 밧줄을 칭칭 감고 꽉 묶었다. 밧줄을 팽팽하게 당겨보았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밧줄을 내려뜨리고 풀었다. 밧줄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베르닌은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정말 높았다. 아득했다. 그는 고소공포증이 없었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줄을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까마득한 아래로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지만 불길이 펑펑 터지는 소리 때문인지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소방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양동이와 바가지를 나르고 있는 게 보였다. 고무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방화복을 입은 소방수들이 아니라면 자살행위였다.

 

 

마침내 밧줄이 모두 풀렸다. 땅바닥까지 닿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왕재수의 말대로 거의 근접한 것 같았다. 왕재수는 베르닌에게 다가와서 패딩을 벗으라고 했다.

 

 

“ 몸이 가벼워야 해. 공기 저항도 줄여야 되고. ”

 

 

베르닌은 패딩 재킷을 벗었다. 왕재수가 장갑을 다시 한 번 건넸다.

 

 

“ 너는! 네 걸 나한테 주면 넌 어쩌려고! ”

 

난 너처럼 둔하지 않아. 너 지금 손에 화상 입어서 맨손으로 밧줄 못 타. ”

 

웃기지 마! 네 거 절대 안 껴! 빨랑 도로 껴!

 

 

왕재수가 스웨터를 벗었다. 그러더니 안에 입었던 셔츠 소매를 북 찢어서 양쪽 손바닥을 붕대 감듯 칭칭 동여맸다. 어쩌면 그렇게 손놀림이 빠른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 됐지? 장갑 껴. ”

 

 

베르닌은 할 수 없이 목장갑을 끼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밧줄이 던져진 것을 보자 갑작스럽게 진짜 공포가 밀려들었다.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는데 왕재수가 그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 야, 정신 차려! 무서워할 시간 없어! 맨날 군대 갔다 온 거 자랑하더니... 너 먼저 내려가는 거야. 지금 가! ”

 

안 돼! 너 먼저 내려가! 아까도 질식해서 기절했잖아... 계속 아팠었잖아. 너보단 내가 더 폐활량도 좋고 잘 버틸 수 있어. 너 먼저 내려가! ”

 

 

베르닌이 고함을 지르며 왕재수를 확 잡아서 창가 쪽으로 밀었다. 왕재수는 벌컥 화를 냈다.

 

 

이 바보 멍충아! 넌 둔하잖아! 네가 뒤에 내려오면 내 위에 네가 있게 되잖아! 그러다 네가 미끄러지면 나까지 떨어지잖아! 그러니까 너 먼저 가!

 

뭐야! 그러니까 너 지금 떨어질 거면 나 혼자 떨어지라는 거야?

 

그래! 위험 요소를 최소화해야지! 알아들었으면 빨리 가! ”

 

 

베르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렇게 절박한 와중에도 어떻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든 화가 났다. 왕재수를 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그 말이 맞았다. 그는 왕재수보다 몸놀림도 둔한데다 덩치도 컸다. 자칫 잘못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왕재수를 덮치며 함께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가 먼저 내려가는 게 나았다.

 

 

그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다시 한 번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아찔했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이렇게 절박한 순간인데도 어떻게든 내려가는 순간을 늦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때 왕재수가 그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으며 세게 포옹을 했다. 뺨이 마주 닿았다. 연기 때문에 거칠어지고 목쉰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 아래 보지 마. 줄만 잡고 하나 둘 세면서 내려가. 천천히. ”

 

“ 너 금방 내려올 거지? ”

 

“ 그래. 그러니까 이제 가. 그래야 내가 따라가지. ”

 

“ 알았어, 갈게. ”

 

 

왕재수가 팔을 풀고 물러섰다. 까만 눈에 소용돌이치는 불길이 반사되어 붉은 불빛이 일렁거렸다. 한순간 베르닌은 솟구치는 공포와 강렬한 보호심을 동시에 느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 아래에서 봐, 다닐. ”

 

“ 그래. 조심해. ”

 

 

베르닌은 창가로 기어 올라갔다. 더 이상 우물쭈물할 수는 없었다. 불길이 이제 창가까지 덮쳐오고 있었다. 그가 먼저 내려가야 왕재수도 따라 내려올 수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빨리 가야 했다.

 

 

“ 너 언제 내려올 거야? 나 한 층만 내려가면 따라올 거지? ”

 

“ 응. 그럴 거야. 자, 가! ”

 

 

베르닌은 밧줄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생각보다 밧줄의 두께가 얄팍했다. 그가 매달리자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줄이 끊어지면 어쩌지 하고 겁이 더럭 나려고 하는데 왕재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 안 끊어져. 매듭도 안 풀려. 뱃사람 매듭으로 묶었어. 가. ”

 

 

그래서 베르닌은 심호흡을 하고는 창밖으로 몸을 완전히 빼냈다. 천천히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계탑의 벽면과 파이프를 디디며 한 발 한 발 내려갔다. 벽이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신없는 순간에도 그는 토냐를 떠올렸다.

 

 

‘ 다행이야, 무사히 내려갔구나... ’

 

 

어쩐지 토냐가 무사하다는 생각이 들자 쿵쾅거리던 가슴도 조금 가라앉고 호흡도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왕재수의 말이 옳았다. 줄만 잡고, 아래를 보지 말고, 하나 둘 세면서 오직 한 발 두 발 내딛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팔이 마비되는 것처럼 아파왔다.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밧줄이 흔들렸다. 그는 밧줄을 더욱 꽉 움켜잡았다. 발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턱에 닿았다. 창턱이었다. 한 층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왕재수가 토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바로 그 층이었다. 매캐하고 뜨거운 연기가 확 밀려나와서 얼굴을 델 것 같았다. 불이 아래로 번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바람 방향이 바뀐 것인지, 내부의 뭔가가 허물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기 때문에 하마터면 그는 밧줄을 놓칠 뻔 했다. 간신히 창턱을 두 발로 꽉 밟으면서 밧줄을 꼭 쥐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기억이 희미해졌다. 어떻게 밧줄을 타고 벽과 파이프를 밟으며 내려왔는지 어렴풋한 꿈처럼 느껴졌다. 세찬 바람과 매운 연기, 마비되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팔과 어깨, 후들거리는 무릎, 이 모든 것이 으깬 죽처럼 뒤섞였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기계처럼 숫자를 셌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리고 숫자에 맞춰 줄을 잡았다 놨다 했고 발을 떼었다 디뎠다 했다. 귓가에는 계속 왕재수의 목소리만 윙윙거리고 있었다. '아래 보지 마. 줄만 잡고 하나 둘 세면서 내려가. 천천히.'

 

 

그때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밧줄에 대고 눈을 비볐다. 쓰라렸다. 눈을 떴다. 순간 그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줄을 놓칠 뻔 했다. 하지만 놓쳤어도 별다를 건 없었을 것이다. 줄이 끝나 있었다. 겨우 한 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차가운 공포에 휩싸인 채 그는 처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보였다! 가까웠다! 1층 높이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고 밧줄을 놓았다. 아래로 뛰어내렸다. 두 발과 무릎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팠다. 하지만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튼처럼 그를 휩쌌다. 베르닌은 멍하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고개를 저었다. 한 손으로 뺨을 찰싹 때려보았다. 그러자 어지러웠고 속이 울렁거렸다. 기침을 해보았다. 아마도 조금 토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입에 물병을 대 주었다. 물을 마시자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제야 베르닌은 퍼뜩 놀라 소리쳤다.

 

 

“ 소방차! 소방차 왔어요? ”

 

“ 추돌사고가 나서 막혔다가 이제 뚫렸대요, 금방 도착할 거예요. ”

 

 

중요하지 않았다.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온몸이 칼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왕재수가 생각났다. 왕재수는 거의 다 내려왔어야 했다. 분명히 베르닌이 한 층 내려가면 따라 내려온다고 했었다. 그보다 훨씬 가볍고 민첩한 애니까 이제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베르닌은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안은 채 고개를 쭉 빼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왕재수는 아직 전망대 창가에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왕재수의 검은 머리칼이 마구 흩날리는 게 보였다. 그는 상체를 쭉 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르닌이 무사히 내려갔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베르닌이 막 고함을 지르려고 했을 때 왕재수가 창밖으로 나왔다. 밧줄을 잡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베르닌에게 하나 둘 세라고 했던 것과는 천지차이의 몸놀림이었다.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왕재수는 밧줄을 타면서 내려오고 있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파이프를 잡고 있었다. 너무나 불편해 보였다. 대체 왜 저러나 싶어 속이 터질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밧줄이 툭 하고 끊어졌다.

 

 

어느 새 그의 곁에 와 있었던 토냐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아악, 미셴카!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너나할 것 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베르닌은 눈앞이 아찔했다. 끊어진 밧줄이 길고 거대한 채찍처럼 휘리릭 돌더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행히 왕재수는 밧줄이 끊어진 순간 두 손으로 파이프를 꽉 잡고 매달렸다. 두 발로 파이프와 장식돌을 디뎠다. 베르닌은 바로 옆에 툭 떨어진 밧줄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군데군데 올이 풀리고 해져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너무나 무서웠다. 두 손을 부여잡은 채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 괜찮아, 괜찮을 거야. 쟨 운동천재잖아... 문도 잘 따고... 파이프 타고 내려올 수 있어... 할 수 있어... 오 하느님... ”

 

 

그의 곁에는 토냐와 가릭이 바짝 붙어 있었다. 토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흐느껴 울고만 있었다. 차마 위를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가릭은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숫자를 세는 것 같았다. 아마도... 왕재수가 그에게 해줬던 말처럼. '아래 보지 마. 줄만 잡고 하나 둘 세면서 내려가. 천천히.'  하지만 이제 밧줄은 없었다.

 

 

베르닌은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정신없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왕재수는 전혀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파이프는 밧줄과 달랐다. 미끄러웠다. 왕재수는 장갑도 없었다. 손바닥을 천 조각으로 대충 동여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낮은 철봉을 잡고 움직이는 것처럼 편안하고 침착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몸놀림 하나하나가 정확했다. 베르닌처럼 헛디디거나 우왕좌왕하거나 중간중간 멈추지도 않았다. 그 명료하고 침착한 움직임에 베르닌의 공포가 가라앉았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왕재수는 전망대에서 2층이나 내려왔다. 지상에서 3분의 2 정도 높이였다. 저런 속도라면 금방 내려올 것 같았다.

 

 

왕재수가 창턱에 도달했을 때 갑작스럽게 안쪽에서 펑 소리가 났다.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펑펑 소리를 내더니 거대한 구름기둥처럼 창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해일처럼 왕재수를 덮쳤다. 거대한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충격파를 정면으로 받은 왕재수가 휘청했다. 머리와 몸이 완전히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파이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양손 모두.

 

 

안 돼! 미하일! 안 돼!!!!!!!!!!

 

 

베르닌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솟구쳐 일어났다. 시커먼 연기와 세찬 바람 속에서 왕재수가 추락했다. 토냐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적어도 5층 높이였다. 그리고...

 

 

왕재수는 공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채 그대로 떨어지더니 높이 쌓여 있던 눈더미 속으로 포탄처럼 처박혔다. 철썩 소리와 함께 눈보라가 거세게 일었다. 정신없이 달려갔던 베르닌은 발을 헛디뎠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을 뒤집어쓴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 미하일, 미하일... 안 돼... 안 돼... ”

 

 

흐느끼고 울부짖으며 베르닌은 두 손으로 눈을 마구 파냈다. 머릿속이 완전히 하얗게 되었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고함치고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눈을 파내는데 옆에서 갑자기 왕재수가 머리를 불쑥 내밀며 부르르 하고 눈을 떨어냈다. 자꾸자꾸 눈을 떨어내더니 기침을 하고는 ‘어휴...’ 하고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눈더미 위에 드러누웠다.

 

 

미처 베르닌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가릭이 달려들었다. 두 팔로 왕재수의 어깨를 껴안고 이마와 얼굴에서 눈을 떨어내며 소리쳤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괜찮으세요? 정신 들어요?

 

“ 아유,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누르지 마, 무거워. ”

 

 

왕재수가 목쉰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눈을 움켜서 정신없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누군가가 달려와 물병을 건네주었다. 왕재수는 물을 반병쯤 마시고 나서 계속 기침을 했다. 검댕으로 더럽혀진 뺨 위로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을 움켜서 얼굴을 닦아내며 왕재수가 투덜댔다.

 

 

“ 아, 진짜 싫어. 시골... 소화기 하나 없고... 시설팀장 가만 안 둘 거야... ”

 

 

그제야 베르닌이 정신을 차렸다. 가릭을 밀쳐내고 왕재수를 부둥켜안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 너 괜찮아? 괜찮아? 다리... 근육... 부러지고... 높은 데서 떨어져... 장갑도 없고... 줄... 끊어지... ”

 

“ 뭐래는 거야. 나 괜찮아. ”

 

“ 정말? 정말 괜찮은 거야? 저렇게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다리 부러졌을 텐데... ”

 

“ 안 부러졌어. 괜찮아. 눈 위로 떨어졌잖아. 아, 소방차 왔다. 참 빨리도 오네. 에잇, 진짜 시골이라니까. ”

 

 

왕재수가 눈더미에서 기어 나왔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가릭이 그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서 못 일어나게 했다.

 

 

“ 안 돼요, 감독님. 움직이지 마세요. 의사가 봐야 돼요! 금 갔을 수도 있어요, 근육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요! 가만히 있어요! ”

 

“ 나 괜찮... ”

 

 

그때 소방차가 도착했다. 구급차와 의료요원들도 함께 왔다. 소방대원들이 호스로 물을 뿌리고 불을 끄는 동안 의료요원들이 토냐와 왕재수와 베르닌을 안전한 쪽으로 옮겼다. 토냐는 얌전하게 들것에 누웠지만 왕재수는 매우 싫어하며 자기는 괜찮다고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가릭이 그를 번쩍 들어서 들것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베르닌에게 고개를 돌렸다.

 

 

“ 당신도 빨리 가서 진찰받아요! ”

 

“ 어, 나... 난 안 다쳤어요... ”

 

“ 뭐가 안 다쳐요! 얼굴이랑 손에 물집 좀 봐요... 흑... ”

 

 

그러더니 갑자기 가릭이 울면서 베르닌을 와락 껴안았다.

 

 

고마워요, 다닐. 고마워요... 토냐 구해줘서 고마워요, 엉엉...

 

“ 저... 내가 구한 거 아니에요... 저 자식이... ”

 

“ 같이 올라갔잖아요... 토냐한테 들었어요... 자재에 깔린 것도 꺼내주고 빠져나올 수 있게 등까지 받쳐줬다고... 어흑... 우리 감독님 감시하는 KGB라고 욕했던 거 미안해요... 당신 아니었으면... 엉엉... ”

 

 

가릭은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훌쩍거리면서 베르닌을 구급차 쪽으로 데리고 갔다. 토냐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양쪽 다리에 피와 진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겁에 질린 토냐는 계속해서 ‘다리 부러진 거예요? 금 갔어요? 근육 다친 거예요?’ 하고 묻고 있었다. 의료요원은 다리를 만져보면서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 부러졌으면 일어나지도 못해요. 금 갔는지는 엑스레이 찍어봐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요.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네요. 목이 많이 쉬었네. 연기 많이 마셨어요? ”

 

“ 네, 조금... 근데 목쉰 건 소리 지르고 울어서 그래요... 너무 무서워서... ”

 

“ 이제 괜찮으니 마음 놔요. ”

 

 

토냐의 다리 상처를 드레싱하고 붕대를 감아준 후 의료요원이 왕재수 쪽으로 갔다. 그 사이에 다른 요원이 베르닌을 진찰했다. 청진기를 대고 폐 소리를 듣고 상의를 벗게 한 후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 연기 마셔서 기관지에 염증이 생겼을 거예요. 병원에 가야 해요. 일단 화상만 먼저... ”

 

 

베르닌은 아픈 것도 모르고 있었다. 거울을 보니 뺨 양쪽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손바닥은 좀 더 심했다. 물집에 진물에 껍질이 다 벗겨져 있었다. 드레싱을 하자 너무나도 쓰라려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잠시 후 그와 토냐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걱정이 된 토냐가 의료요원에게 왜 왕재수는 함께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 구급차가 두 대 왔어요. 다른 차로 가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

 

“ 그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

 

 

토냐가 부르르 떨었다. 베르닌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울었다. 자기 때문에 둘 다 죽을 뻔했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베르닌은 그녀를 달래주면서도 왕재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 멀쩡할 리가 없어... 아무리 눈 위로 떨어졌다 해도 그렇지... 연기도 엄청 마셨는데... 폐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독사과도 먹었고... ’

 

 

그때 구급차가 멈췄다. 스타브로프의 병원은 아니었다. 신시가지까지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온 것 같았다. 토냐는 들것에 실려 가고 베르닌은 안내해주는 대로 걸어서 병실로 들어갔다.

 

 

 

*   *   *

 

 

 

베르닌은 생각보다 오래 진찰을 받았다. 엑스레이도 찍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화상 치료를 꼼꼼하게 받았다. 몸 여기저기에 나 있는 타박상 치료도 받았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이 쑤셨다. 의사는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라면서 연기 들이마신 것 때문에 며칠 동안 병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어느 새 뒤따라온 가릭이 자기 옷을 한 뭉치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베르닌은 검댕 투성이에 연기로 푹 절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가릭은 그보다도 키가 컸기 때문에 소매를 조금 접어야 했다. 가릭은 심지어 그의 패딩 재킷도 주워다 주었다. 그가 밧줄을 타고 내려간 후 왕재수가 창밖으로 집어던졌는지 눈더미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 토냐는 어떻대요? ”

 

“ 다행이에요... 오른쪽 발목에 살짝 금만 갔대요. 토냐가 워낙 날씬해서 완전히 짓눌린 게 아니라 자재 틈새에 끼어 있었나 봐요.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많이 나서 토냐가 너무 놀랐던 거였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우린 다리 다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거라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입원하기로 했어요. 토냐 어머니도 곧 오실 거예요. ”

 

“ 다행이다... 미하일은요? ”

 

“ 감독님도 큰 이상은 없대요. 당신보다 화상도 덜 입었대요. 근데 연기 마신 것 때문에 아직 치료 중인 것 같아요. ”

 

“ 부러지거나 금 간 데도 없대요? ”

 

“ 네, 괜찮대요. 떨어지느라 타박상만 좀 입었다고... 눈더미 덕분이에요. 정말 하늘이 도왔죠. 볼 때마다 눈 대충 치워놨다고 짜증냈었는데 그게 없었다면... ”

 

 

베르닌은 복도로 나왔다. 의자에 주저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20분쯤 후 왕재수가 나왔다. 역시 가릭이 가져다 준 옷을 입은 건지 자루처럼 헐렁한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코트는 없었다. 창밖으로 던질 거라면 값비싼 자기 코트나 던질 것이지 왜 베르닌 자신의 패딩 재킷만 챙겼는지 불쑥 짜증이 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왕재수는 시계탑에 들어갈 때 이미 코트를 벗어버렸던 것 같기도 했다.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데다 군데군데 재가 묻어 있고 마구 솟구쳐 있었지만 얼굴은 깨끗하게 닦아낸 후였다. 가릭의 말 대로였다. 뺨과 입술 언저리의 조그만 물집을 제외하면 왕재수의 예쁘장한 얼굴과 하얀 피부는 별로 손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버럭 소리를 쳤다.

 

 

야! 너 왜 그렇게 늦게 내려왔어! 분명히 나 한 층만 내려가면 따라 내려온다 했잖아! 꾸물거리다가 줄 끊어지고! ”

 

“ 바보, 그 줄 엄청 낡고 해져 있었는데 거기 어떻게 두 명이 매달리냐. 대번에 끊어지지. 그나마 네가 먼저 내려가서 망정이지. ”

 

“ 뭐야? 너... 너 그 줄 끊어질 줄 알고 있었단 말이야? ”

 

“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너 먼저 가라고 했지. 너랑 나랑 몸무게 합치면 아무리 적어도 140킬로야. 둘이 매달리는 즉시 밧줄 끊어졌다고. 어제 인부들이 그걸로 시멘트 포대 옮기는 거 봤었어. 40킬로짜리 두 개. 그러니까 잠깐 동안 네 몸무게쯤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봤어. 문제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니까 중력이 작용해서 무게가 더 쏠린다는 건데... 그래도 어찌어찌 1층까지는 내려가겠더라고. ”

 

 

베르닌은 숨이 턱 막혀왔다. 눈을 깜박였다. 입을 다물었다 벌렸다. 왕재수의 침착한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억누르며 물었다.

 

 

“ 너 그래서 내 몸무게 물었던 거야? ”

 

“ 응. 대충 그 정도 될 거 같긴 했어. 내가 하던 일이 뭐야, 파트너 들어 올리고 지탱해주던 거잖아. 무게와 중력에 대해 모르면 안무도 못해. 밧줄이 지탱할 수 있는 하중 계산을... ”

 

“ 이 개자식아! 그럼 너 먼저 내려갔어야지! 네가 나보다 훨씬 가볍잖아! 너 내려가고 나서 내가 따라가는 게 순서잖아! 왜 거꾸로... 내가 먼저 가서 밧줄 끊어진 거잖아! 너는... ”

 

 

왕재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나라도 마찬가지야. 밧줄이 많이 약했어. 끊어지게 돼 있었어. 내가 먼저 내려갔어도 너 내려올 때 중간에 끊어졌을 거야. 기껏 1~2분 차이였을걸. 어차피 두 명이 내려올 만큼 튼튼하지 않았... ”

 

 

베르닌은 견딜 수가 없었다. 왕재수의 따귀를 철썩 후려치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이 바보 멍청아! 너 먼저 내려갔어야지! 죽고 싶어 안달이 났냐! 목숨이 두 개라도 돼? 너 살 궁리를 해야지 그 상황에서 그런 병신 짓을 하면 어쩌란 말야!

 

 

왕재수가 두 눈이 둥그레졌다. 맞아서 새빨개진 뺨을 한 손으로 꼭 쥔 채 몹시 당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 아니, 그게... 너는 둔하니까... 중간에 줄 끊어지면 넌 떨어졌을 거고... 어차피 나는 파이프 타고 내려올 생각이었어. 여차하면 뛰어내리려고 했었어. 눈더미 봐놨다고... 전에도 그렇게 눈 위로 떨어져서 멀쩡한 적 있... ”

 

 

시끄러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이 얼간이 새끼야! 가만 안 둘 거야! 네까짓 게 뭔데 성인군자 노릇이야! 하던 대로 싸가지 없게 자기 몸 하나만 챙길 것이지 왜 그 상황에서 잘난 척하면서 영웅 노릇이냐고! 이 미친 자식아, 정말 너는! ”

 

“ 어... 다닐, 소리 지르지 마... 제발... ”

 

 

왕재수가 두 손으로 귀를 감싸며 부탁했다. 휘둥그렇게 뜬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하지만 베르닌은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대며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귓가에 대고 망치를 쾅쾅 두들기는 것 같았다. 화가 났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계속 고함을 지르고 왕재수를 다그쳤다. 멱살을 잡고 마구 잡아 흔들었다.

 

 

너 또 그럴 거야? 또 이런 식으로 할 거냐고! 나 정말 너 때문에 미쳐버릴 거 같아! 넌 정말....

 

 

너무 시끄러웠는지 복도로 사람들이 몇 명 달려 나왔다. 가릭이 깜짝 놀라서 베르닌을 왕재수에게서 떼어놓으며 소리쳤다.

 

 

“ 왜 이래요, 다닐! 제발 진정해요! ”

 

“ 시끄러워요! 지금 진정하게 됐냐고! 저 바보 같은 자식이... 가만 안 둘 거야!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

 

 

왕재수가 울먹거렸다.

 

 

“ 왜 화내... 소리 지르는 거 싫어... 화내는 거 싫어... 엉엉... 미워... ”

 

 

그러더니 왕재수가 베르닌을 밀치고 일어났다. 서럽게 울면서 사람들을 헤치고 휘청휘청 걸어서 복도를 빠져나갔다.

 

 

베르닌은 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동안 씩씩거리며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고 욕을 하다가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떠나고 가릭만 남아 있었다. 가릭은 측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진정해요, 다닐. ”

 

“ 바보 같은 자식... 끊어질 거 뻔히 알았으면서... 따라 내려올 거라고 거짓말하고... 나 안심시키고는... 내가 뒤에 내려간다니까 자기 위로 떨어질 거라고 겁주고... 거짓말쟁이... 애초부터 다 알았으면서... ”

 

 

베르닌은 몸을 떨었다. 타는 듯한 분노가 누그러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꼭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연기와 불꽃과 온몸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 펑펑 터지는 소리, 바람, 밧줄, 통증, 그리고 공포가 되살아났다. 가릭은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다가 베르닌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 저 있잖아요... 토냐가 아까 탑에서 혼자 내려왔을 때, 걔도 화냈어요. 얼마나 울고 화냈는지 몰라요. 당신이랑 똑같았어요, 감독님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그랬어요. 자기 구하러 왔다고... 소리 지르고 울었어요. 그러니까 이해해요. 그래도 그 분한테 화내지 마세요. 지난번에도 톱니장치 고장 났을 때 애들 다칠까봐 막아줬어요. 미샤는 좋은 사람이에요. ”

 

“ 나도, 나도 안다고요! 개자식이... 생긴 대로 재수 없게 놀 것이지 왜 안 어울리게 좋은 놈이냐고요... 어흑... ”

 

 

베르닌은 손등으로 눈물콧물을 문지르며 끅끅 울었다. 가릭은 한동안 기다렸다가 그에게 물을 한 잔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신 후 베르닌은 딸꾹질을 했고 숨을 골랐고 서서히 진정되었다. 잠시 후 그는 가릭에게 고맙다고 한 후 병원을 나섰다.

 

 

 

*    *    *

 

 

 

 

병원 밖으로 나와 보니 레닌 대로 근처였다. 이미 해는 져버린 후였고 도로 위로는 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다. 차를 가져오려면 극장으로 다시 가야 했지만 시계탑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극장 쪽에서 연기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불은 다 끈 모양이었다. 베르닌은 주변을 헤매 다녔지만 왕재수는 눈에 띄지 않았다.

 

 

‘ 이 바보... 설마 다시 극장에 간 거 아니야? ’

 

 

그는 눈에 띄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서 극장 당직실에 전화를 해보았다. 왕재수는 구급차에 실려 간 후 극장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화재는 다 진압되었다고 했다.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코즐로프에게 전화를 하려다 ‘우리 귀염둥이 아기가 사지에 들어가도록 놔두다니 제정신이냐! 크아아!’ 하고 폭주할 게 뻔했기 때문에 포기했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바이올린 깡패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이 자식... 코트도 버리고... 아까도 스웨터 한 장밖에 안 입고 있었는데... 바람 불고 추운데 어디로 간 거야... ’

 

 

베르닌은 한참 주변을 헤매다가 공원을 가로질러 시느이 교각까지 갔다. 왕재수가 가끔 이용하는 길이었다. 왕재수는 베르닌이 차로 출근시켜주지 않을 때면 보통 배나무 거리의 아파트에서부터 레스나야 거리를 지난 후 시느이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의 극장까지 걸어가곤 했다. 도보로는 한 시간 이상 걸렸지만 운전 실력이 형편없으니 그 쪽이 낫다고 했다.

 

 

 

베르닌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아담한 시느이 다리로 갔다. 가로등 램프가 줄줄이 켜져 있었다. 다리 위로 올라가 한 바퀴 둘러보다가 그는 건너편 강가에 앉아 있는 왕재수를 발견했다.

 

 

그는 급하게 다리를 건너갔다.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강가로 내려갔다. 왕재수는 판판한 돌멩이 위에 걸터앉아 출렁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 위로 뭔가를 집어던지고 있었다. 잘 보니 오리들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고 있었다. 짙은 색의 청둥오리들이 삼삼오오 유빙을 헤치고 미끄러져 와서 먹이를 받아먹었다. 베르닌은 왕재수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맥이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얼굴도 보지 않고 그는 혼잣말처럼 투덜댔다.

 

 

“ 동물 싫다더니 추운데 앉아서 뭐하는 거야... ”

 

“ 동물은 싫지만 새는 좋아. ”

 

“ 새도 동물인데! ”

 

“ 아니야, 새는 새야! 새는 날아다니잖아! 특히 오리는 날기도 하고 헤엄도 칠 줄 알고... ”

 

“ 곧 죽어도 자기 말이 맞다고... ”

 

 

베르닌은 가릭이 빌려줬던 패딩 재킷을 벗어서 왕재수의 어깨에 덮어씌웠다. 왕재수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어두웠기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두 눈은 말라 있었다. 이따금 반짝거렸지만 그건 가로등 불빛과 수면에 비친 달빛 때문이었다. 눈물이 고여 있는 건 아니었다. 베르닌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말했다.

 

 

“ 미안해, 화내서. 너 소리 지르는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

 

“ 그래, 소리 지르는 거 싫어. 앞으로는 그러지 마. ”

 

“ 구해줘서 고마워. 그 말을 먼저 했어야 됐는데. ”

 

“ 구해준 것까지야. 자기 힘으로 줄 타고 내려갔으면서. 나 없었어도 그렇게 했을 걸. 하긴 애초부터 쫓아온 네가 바보지. ”

 

“ 다시는 그러지 마. 위험한 짓... ”

 

“ 그거 위험한 짓 아니었어. 그 상황에서 제일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합리적인 결정을 하면 안 돼. 자기가 살아날 짓을 해야 돼. 알아들어? 약속해, 앞으로는 안 그럴 거라고. ”

 

뭘? 불났을 때 뛰어들지 말라고? 토냐가 갇혀서 죽게 놔두라고? ”

 

“ 아니... 토냐 구한 건 맞아. 잘했어. 그거 말고... 아까 나랑 있었을 때... ”

 

“ 토냐는 구해야 되고 너는 놔둬야 해? 그런 게 어디 있어? ”

 

“ 토냐는 약자고 나는 아니니까. ”

 

“ 아니야, 불 속에서는 모두 약자야. ”

 

 

왕재수가 손에 쥐고 있던 흑빵 짜투리를 부숴서 전부 수면 위로 뿌렸다. 오리들이 잽싸게 부스러기를 낚아채는 것을 보면서 왕재수가 덧붙였다.

 

 

“ 그리고 나 목숨 여러 개야. 많이 살아났어. 두 개보다 더 많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 뭐가 여러 개야! 네가 고양이냐! ”

 

“ 옛날에도 여러 번 죽을 뻔 했었는데 다 살아났어. 작년에 감옥도 가고... 여기 와서도... 얼음물에 빠지고... 독사과 먹고... 그래도 지금 멀쩡하잖아. 그리고 어릴 때 썰매 타러 갔다가 아까처럼 눈더미로 떨어진 적 있는데 그때도 괜찮았는걸. 진짜야. ”

 

“ 그래도 이제 그 목숨 몇 개 안 남았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 위험한 짓 하지 마. 알았지? ”

 

“ 위험하고 안 위험한 걸 어떻게 알아? ”

 

“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위험한 거야. ”

 

“ 칫, 넌 책상물림인데 그걸 어떻게 믿니. ”

 

“ 하여튼 약속해! 안 그러면 이제 저녁밥 안 해 줄 거야. ”

 

“ 알았어. 치사하긴. ”

 

 

왕재수는 패딩을 입었고 지퍼를 올렸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 베르닌을 훑어보았다.

 

 

“ 넌 안 추워? ”

 

“ 80킬로니까 괜찮아. 너보다 지방질이 많아서. ”

 

“ 하긴. ”

 

 

그래도 바람이 불어오자 왕재수는 베르닌의 곁에 몸을 딱 붙였다. 오랫동안 스웨터 한 장만 걸친 채 앉아 있었을 텐데도 몸이 따뜻했다. 베르닌도 몸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앉아서 오리들을 구경했다. 어두운 강물 위로 미처 녹지 않은 얼음이 둥둥 떠다녔고 불그스름한 가로등 램프 불빛과 하얀 달빛이 겹쳐져 부드럽게 반짝거렸다. 잠시 후 오리들이 하나둘 날아가기 시작했다. 왕재수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 여기 오리들은 꼭 갈매기처럼 높이 나네. ”

 

“ 레닌그라드 오리들이랑 종류가 좀 틀릴 걸. ”

 

“ 시골이라 그런 거지 뭐. 근데 예쁘다. ”

 

“ 거봐, 시골이라도 좋은 거 있잖아. ”

 

“ 아니야! 누가 좋대? 예쁘다고 한 거지! ”

 

“ 그게 그거 아니야? ”

 

“ 아니야! 좋은 건 좋은 거고 예쁜 건 예쁜 거야! ”

 

“ 그랬다 하자. ”

 

 

마지막 오리가 날아간 후 그들은 일어섰고 레스나야 거리를 지나 배나무 거리의 집으로 돌아갔다. 왕재수는 배가 고프다면서 저녁을 달라고 했다. 연이은 야근으로 부엌에 남아 있는 거라곤 냉동 펠메니와 인스턴트 보르쉬가 전부였지만 베르닌은 그렇게 맛있는 저녁은 난생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왕재수는 별 말 하지 않았지만 보르쉬 접시에 거의 코를 박고 먹었고 펠메니에도 평소보다 스메타나를 훨씬 많이 찍어서 먹었다. 그리고는 베르닌이 홍차에 설탕을 두 숟가락이나 넣었는데도 투정하지 않고 홀짝 마셨다. 사실은 달착지근한 차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베르닌은 내심 생각했지만 물론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또 시골이 어떻고 무용수의 식단이 어떻고 근육이 미워지는 게 어떻고 하며 투정을 부릴 테니까. 하긴 그런 투정쯤은 받아줄 수 있는 날이었지만 어쨌든 베르닌은 입을 다물었다.

     

 

 

 

 

 

FIN

- 2015. 5. 3 ~ 5. 12 -

 

  ...

 

 

초반부에 언급되는 가브릴로프 출신 국회의원인 게오르기 벨스키는 본편에도 등장한다. 본편에서도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미샤를 끌어내 가브릴로프로 보내준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왕재수의 말대로 이 사람은 '그' 크레믈린 아저씨는 아니지만, 어쨌든 본편에서도 미샤를 많이 후원해준 사람이다.

'그' 크레믈린 아저씨는 베르닌의 의심대로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가리키고, 스페호프가 높은 분들 얘기하면서 언급한 '마로조프' 역시 레닌그라드 출신의 유력한 국회의원으로 미샤의 후원자이다. 이 사람이 화자로 나오는 단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전에 about writing 폴더에 올린 적이 있다 : http://tveye.tistory.com/2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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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편도 사건들이나 미샤의 성격, 행동 패턴 등 상당히 본편 색채가 짙은데 25편으로 가면 다시 서무 느낌으로 돌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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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가 어릴 때 썰매 타다가 눈더미 위로 떨어진 적 있다고 얘기하는 내용은 사실 이전에 쓴 본편 우주의 트로이가 등장하는 장편 초반부에 나온다. 나중에 발췌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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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25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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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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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